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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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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에 ‘코인 기부’ 바람…AI 악용 사기도

재테크

튀르키예-시리아 강진 이후 전 세계에서 구호의 손길이 계속되는 가운데 암호화폐(가상자산)을 통한 기부도 이뤄지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 시작된 암호화폐 기부 행렬이 이번에도 이어진 것이다. 다만, 암호화폐 지갑을 악용하는 가짜 모금 활동이 동시에 기승을 부려 주의도 요구된다.22일 암호화폐 온체인 데이터 분석 업체 크립토퀀트에 따르면 전날 21일 기준 이더리움·아발란체·비트코인 등을 통한 튀르키예 지진 기부 금액은 총 561만9546달러(약 73억2844만원)로 나타났다. 이 중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통한 기부금은 416만1053달러(약 54억2642만원), 아발란체 블록체인은 135만9776달러(약 17억7328만원)였다. 비트코인 기부는 7만8500달러(약 1억237만원)가 실행됐다.튀르키예 정부는 지진 발생 다음 날인 지난 7일 암호화폐 기부를 본격적으로 받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비정부기구(NGO)인 아나톨리아 민중평화토대(AHBAB·아흐밥)의 설립자인 할룩 레방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BEP-20, ERC-20 및 아발란체 체인 주소를 공유했다. 발표 후 단 몇 분 만에 기부금이 10만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크립토퀀트의 데이터를 구체적으로 보면 튀르키예 암호화폐 기부는 초창기인 7~8일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이더리움 관련 기부는 200만 달러로 뛰어올랐고, 아발란체 관련 기부도 120만 달러로 훌쩍 늘어났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기부액 증가 속도가 둔해지고 있다. 이더리움 관련 기부는 초창기보다 2배 가량 늘어났지만, 아발란체 관련 기부는 이달 9일부터 이날까지 약 10만 달러 증가하는 데 그쳤다. 비트코인 기부도 사태 초기인 8일에 대다수 몰려있었다.다만 해당 통계는 크립토퀀트가 튀르키예의 NGO 현지 암호화폐 거래소 등이 공개한 지갑 주소만을 추적한 것이다.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다른 지갑을 통한 기부를 합하면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추정된다.업계 인사들과 글로벌 거래소들도 따뜻한 나눔에 동참했다.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은 지난 11일(현지시간) 부테린은 99 이더(ETH)를 아흐밥의 기부 주소로 전달했다. 그는 피해 발생 당일인 6일(현지시간)에 이미 50 ETH를 구호금으로 기부한 바 있다. 22일 오후 4시 기준 이더리움은 개당 213만3800원에 거래되고 있으므로 부테린은 약 3억1793만원(149ETH)을 기부한 셈이다.글로벌 1위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도 튀르키예 이용자를 대상으로 인당 100 달러 상당의 바이낸스코인(BNB)을 에어드롭하겠다고 밝혔다. 바이낸스는 기부금 총 규모를 약 500만 달러(약 65억2750만원)로 추산했다. XRP를 발행하는 리플사도 최근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해 커뮤니티와 함께 100만 달러 상당 XRP를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이 같은 암호화폐 기부는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본격화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해 3월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10여 가지 코인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해 기부할 수 있는 공식 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했다. 또한 유엔난민기구(UNCHR)는 지난해 12월 스텔라 블록체인을 활용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는 블록체인 솔루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한편, 감성적인 사진과 함께 기부를 독려하면서 개인 암호화폐 지갑으로 모금을 빼돌리는 신종 사기도 나타나고 있어 주의해야 한다. 모 트위터 계정은 무너진 건물 속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소방관의 사진과 함께 12시간 동안 같은 내용의 호소문을 8번 반복 게시했다.하지만 이는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만든 거짓 사진이었다. 해당 사진 속 소방관의 오른손 손가락이 6개로 그려지는 오류가 나타나기도 했다. 해당 게시글에 첨부된 암호화폐 계좌 주소는 지난 2018년 사기 및 스팸 트윗 게시글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관계자는 “피해복구를 위해 애쓰는 분들의 선의를 악용하려는 사람들과 유사 기관이 목격되고 있다”며 “신뢰할 수 있고 잘 알려진 기관과 조직을 통해 기부해주기를 요청한다”고 당부했다.

2023.02.22 16:43

3분 소요
“7만달러 규모 옷·담요 지원”…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돕는 이 회사는

유통

글로벌세아 그룹이 우크라이나 전쟁 피난민과 아이들을 위한 지원에 나섰다. 지난 6월 김웅기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다가올 겨울 추운 날씨에 고통받을 피난민들과 아이들 구호를 위해 약 7만 달러 규모의 옷과 담요 등 동계 의류 물품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으로 주변국으로 탈출한 우크라이나 피난민은 700만명을 넘어섰으며, 이 중 90%는 아동과 여성으로 보호자 없이 홀로 피난길에 오른 아이들도 많다. 이번 우크라이나 피난민과 아이들에게 지원한 의류 용품은 글로벌세아 그룹의 핵심 계열사이자 세계 최대 의료제조 판매 회사인 세아상역의 과테말라, 아이티, 인도네시아, 베트남 지역 공장에서 제작한 의류 물품들이다. 글로벌세아 그룹은 세계 각지 공장에서 제작한 구호 의류 물품을 모아 국제구호단체인 ‘CORE(Community Organized Relief Effort)’를 통해 우크라이나 피난민과 아이들에게 전달했던 설명이다. 특히 올겨울은 ‘라니냐’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강한 한파가 예상되는 만큼, 글로벌세아 그룹이 CORE를 통해 지원한 구호 의류 물품들은 전쟁 피해와 한파로 고통받고 있을 우크라이나 피난민과 아이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사용된다. 글로벌세아 그룹은 매년 기금을 조성해 전쟁 피해를 본 피난민과 아이들,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지원할 예정이다. 글로벌세아 그룹 관계자는 “글로벌세아 그룹은 자연 재난과 사회적 재난을 극복하려는 많은 나라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며 “글로벌세아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구호와 인도적 차원으로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글로벌세아 그룹은 구호 의류 물품 지원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한 기금도 조성해 운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크라이나 재건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채영 기자 chaeyom@edaily.co.kr

2022.11.24 09:04

2분 소요
신한금융, 우크라이나 난민에 20만 달러 구호성금 지원

은행

신한금융그룹은 전쟁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20만 달러(약 2억5000만원) 규모의 긴급구호 성금을 지원한다고 17일 밝혔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도시의 주요 시설 파괴로 전기, 물 등 필수 물자와 의료용품을 포함한 생필품의 공급이 차단돼 있다. 이에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이 폴란드, 루마니아 등 인근 국경 국가로 피난을 떠나고 있다. 국제연합(UN)은 이번 사태로 4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전체 난민의 절반에 가까운 150만명의 어린이가 기본적인 교육은 물론 생계·의료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신한금융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와 함께 국내 민간단체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폴란드 지역의 아동 및 여성 피난민 약 2만4000명을 위한 임시 숙소를 제공한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식량 및 위생용품 등의 긴급 생필품도 지원할 계획이다. 신한금융은 코이카와 함께 민관협력사업의 하나로 해외 재난·재해 발생에 따른 긴급구호를 위한 특별 예산을 편성하고 2019년부터 매년 약 2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신한금융그룹 조용병 회장은 “이번 긴급구호활동을 통해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재난 상황 지역에 인도적 지원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신한은행은 지난 7일부터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피해 기업을 대상으로 총 3000억원 규모의 금융지원을 했다. 아울러 ▶기존 대출의 분할 상환금에 대한 분할 상환 유예 및 만기 연장 ▶최고 1.0%포인트 대출금리 감면 등의 금융지원을 하고 있다. 윤형준 기자 yoon.hyeongjun@joongang.co.kr

2022.03.17 09:22

2분 소요
우크라 피난민, 헝가리 국경 마을로 탈출 행렬 이어져

차이나 포커스

(헝가리 베레그수라니=신화통신) 27일 늦은 저녁, 담요를 뒤집어쓴 어린 소녀들이 헝가리 동부 국경 마을인 베레그수라니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도착했다. 현지 소방관들은 이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파란색 텐트를 설치했다.베레그수라니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약 300㎞ 떨어진 마을이다. 지난 24일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된 이후 이 마을을 통해 헝가리로 들어온 피난민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고 있다.헝가리 자선단체의 한 자원봉사자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며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자원봉사자들은 국경 검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시 대피소를 설치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온 피난민들을 위해 따뜻한 음료와 음식을 준비했다. 몇몇 자원봉사자는 '무료 이동'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었으며 피난민이 다음 행선지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피난 온 사람들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위치한 자카르파티아주에 거주하는 카르파탈랴다. 카르파탈랴는 헝가리어를 구사하는 소수민족이다.많은 사람들이 임시 대피소 근처에 거주하는 친척 또는 친구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헝가리에 지인이 없는 피난민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차를 타고 베레그수라니 현지 정부가 마련한 피난소가 있는 문화센터로 이동했다.날이 어두워진 후에도 크고 작은 가방을 든 사람들이 국경 검문소에서 걸어 나왔다.부인과 함께 국경을 넘은 한 남성은 "이곳까지 오는 데 10시간 정도 걸렸다"며 "국경 검문소에서만 네다섯 시간을 대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친척이 있는 루마니아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세 아이를 데리고 임시 대피소로 온 한 젊은 여성은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한 차량에 탑승하는 것을 거부했다.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남편이 징집될까 걱정이라며 그곳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싶다고 전했다.국경 검문소에서 약 8㎞ 떨어진 다른 마을에도 임시 대피소가 마련됐다. 이곳에서 피난민의 이동을 돕고 있는 한 운전기사는 3일 전부터 피난민들을 국경에서 마을에 있는 대피소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우리 집도 그들에게 내어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베레그수라니 측은 "앞으로 며칠간 우크라이나에서 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며 "현재 국경 너머에 수천 대의 진입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2022.02.28 19:04

2분 소요
서방에 대한 러시아&벨라루스의 하이브리드 전쟁 '이주민'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유럽연합(EU)의 동쪽 경계인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와 비 EU 국가인 벨라루스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초유의 이주민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중동 각지에서 항공편으로 벨라루스에 도착한 이주 희망자 수천 명이 국경에 몰려와 국경 통과를 요구하며 경비대와 충돌하고 있다. 벨라루스는 폴란드와 약 400㎞, 리투아니아와는 약 680㎞, 라트비아와는 170㎞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평소 조용하기 그지없던 이 국경 지대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핫스팟이 되고 있다. 벨라루스는 이주 희망자들이 서유럽으로 가고 싶어 하며, 자신들은 이들을 감당할 경제력이 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을 국경으로 밀어내고 있다.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는 벨라루스가 의도적으로 난민들을 국경 지역으로 몰아넣으며 이웃 EU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양측 주장을 모두 정리하면 이렇지만 이번 사태의 배경은 살펴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벨라루스와 벨라루스의 대통령인 알렉산데르 루카셴코가 자국과 자신을 제재하는 EU를 상대로 한 ‘하이드리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혐의가 짙어진다. 루카셴코가 이주 희망자를 받으라는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상대로 한 제재를 풀라고 압박하는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 ‘유럽 최후의 독재자’ 루카셴코, EU의 제재를 받다 이를 파악하려면 벨라루스의 대통령인 알렉산데르 루카셴코라는 인물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루카셴코는 1994년부터 27년째 장기 집권하는 ‘유럽의 문제적 인물’이다. 장기 집권하는 독재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단적인 행동과 국민의 민주주의 요구 무시, 인권 침해가 모두 발견된다. 루카셴코는 경력부터 민주주의나 인권, 자유, 시장경제과 거리가 멀다. 그는 소련 시절 소련군 국경경비대와 국가에서 직영하는 국영농장인 솝호스의 책임자로 일했으며, 소련이 무너지자 과거 공산당 시절 권력을 바탕으로 새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다. 1994년 5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신설해 처음 당선한 이래 지난해 6번째 대선까지 연속 당선했다. 벨라루스에선 1991년 독립 이래 정권 교체가 한 차례도 없었다. 이에 따라 루카셴코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장기 집권하는 철권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벨라루스의 현재 상황이 그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소련의 공화국이던 벨라루스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독립했다. 한반도 면적(22만 748㎢)과 비슷한 20만7600㎢의 면적에 약 930만의 인구를 가진 나라다. 벨라루스는 옛 소련 시절의 흔적을 가장 강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러시아와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루카셴코는 1999년 12월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벨라루스-러시아 연합국가 창설 조약을 맺었으며 이듬해 1월 26일 발표했다. 옐친 대통령은 1999년 12월 31일 물러나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이듬해 5월 대통령에 선출됐다. 두 나라는 각각 주권은 유지한 채 정치·경제·사회를 통합해 유럽연합과 비슷한 연합국가를 구성해나가고 있다. 문제는 벨라루스가 옛 소련의 흔적을 러시아보다 더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벨라루스는 소련 사회주의 중앙통제 경제의 가장 강력한 특징인 주요 기업의 국유화를 지금도 유지한다. 시장 경제와는 거리가 멀다. 벨라루스는 눈에 띄는 산업도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133달러의 가난한 나라다. 당연히 여행사도 항공사도 국영이다. 대통령 한 마디에 이익도 손해도 따지지 않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국기도 소련 시절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것을 거의 그대로 쓰고 있다. 아래위로 붉은색과 녹색이 2대 1로 자리 잡고 왼쪽에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이뤄진 장식이 붙어있는 국기다. 소련 시절인 1951년 제정됐을 때보다 왼쪽 장식의 크기를 키우고, 소련 시절에 있던 낫과 망치의 공산당 상징만 제거했을 뿐이다. 야권은 1919년 일시 독립 당시 사용했던 붉은색과 흰색의 전통 국기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실제로 시위 등에는 전통 국기를 사용한다. 국가를 상징하는 공식 표장인 국장(國章)도 과거 소련 시절에 쓰던 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해 붉은 별이 그려져 있다. 이런 벨라루스와 루카셴코 대통령은 현재 EU의 제재를 받고 있다. 이유는 루카셴코의 장기 집권 야욕 때문이다. 그는 큰 이유가 2020년 8월 9일 루카셴코가 치른 6번째 대선이다. 루카셴코는 1994년 첫 대선을 제외한 모든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루카셴코는 ‘유럽 최후의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대선 때마다 반대파 지도자들의 입후보를 원천 봉쇄해왔다. 특히 반대파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치러진 6번째 선거에서 무려 80.3%를 득표해 9.9%를 얻은 야권 후보인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면서 더욱 강력한 선거 부정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러자 EU는 지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EU의 호세프 보렐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벨라루스 대선은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했다. 독일 의회도 “정당한 선거가 아니었다”고 비난했다. 대선에서 2위를 한 티하놉스카야는 반정부 블로거였던 남편이 대선 입후보를 거부당하고 사회 질서 교란죄로 체포까지 되자 대신 출마했다. 루카셴코는 다른 유력 후보는 대선을 앞두고 돈세탁 혐의가 있다며 입후보를 막았다. 이러니 선거부정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대선 직후 티하놉스카야는 보안군에 의해 이웃 리투아니아로 사실상 추방됐다. 이로 인해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 등에선 2021년 3월까지 극심한 시위가 계속됐다. 루카셴코는 지난 5월 23일 전 세계를 경악시킨 정치적 ‘엽기 행위’를 벌였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벨라루스 영공을 거쳐 이웃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로 행하던 아일랜드의 라이언에어 4978편 여객기를 전투기를 동원해 강제로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착륙시켰다. 당시 이 여객기는 라이언에어를 대리한 폴란드의 자회사 버즈 항공사가 운항하고 있었으며, 보잉 737-8AS 여객기에는 132명이 탑승했다. 아무리 자국 영공이라도 허가를 받고 비행 중인 타국 항공기를 강제로 착륙시키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루카셴코는 이 여객기에 반정부 언론인인 로만 프로타세비치와 그의 여자친구인 소피아 사페가가 탑승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비행 중인 여객기를 납치한 것이다. 국가가 주도한 항공 납치 사건이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는 EU로부터 자국 항공사의 유럽영공 통과금지, EU 여행금지, 자산동결, 경제제재 등 혹독한 제재를 받게 됐다. ━ 루카셴코, EU 제재에 ‘난민’으로 응수 그러자 루카셴코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지난 여름 인신 매매업자와 마약밀수업자, 무장이주자를 데려오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이를 사실상 실행에 옮겼다. 지난 여름 벨라루스의 국영항공사인 벨라비아와 국영여행사는 중동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사냥 관광객을 대대적으로 모집하면서 중동과 수도 민스크를 연결하는 항공편을 대폭 늘렸다. 이라크의 경우 원래 벨라비아 항공사의 민스크 직항편이 출발하는 공항은 바그다드로 국한됐다. 하지만 벨라비아 항공사는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인 아르빌(한국의 자이툰 부대가 주둔했던 곳)과 슐레이마니아, 그리고 남부 바스라 등 모두 네 곳으로 취항지역을 증설했다. 그러면서 일부에서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벨라루스에 오면 국경을 육로로 넘어 EU 지역으로 가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거짓 뉴스를 퍼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유럽 이주 희망자들은 대부분 난민에 관대하고 일자리도 많은 독일로 가는 것이 꿈이다. 벨라루스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판단한 이주 희망자들은 이라크에서 벨라루스 사냥 관광 비자를 받고 민스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EU가 이라크를 설득해 벨라루스로 가는 항공편을 8월 7일 이후 축소하자 터키 이스탄불과 시리아·레바논에서 민스크로 가는 항공편이 확대됐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체류자로 넘치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를 본부로 하는 저비용 항공사인 플라이 두바이도 민스크를 잇는 항로를 증설했으며, 이 나라 동부의 토후국인 라스 알 카이마에서 민스크로 이어지는 직항편도 생겼다. 벨라비아 항공은 터키와도 직항로를 늘렸다.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과 민스크를 잇는 직항편을 늘린 것은 물론 터키 남부 안탈리아에서 민스크로 가는 직항로도 개설했다. 터키 남부 휴양지인 안탈리아는 이란과의 직항로가 개설돼 과거 이란의 사정이 좋았을 당시에는 이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곳이다. 시리아 내전 뒤에는 국경을 넘은 난민들이 육로로 접근하는 집결지가 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는 내전 중인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민스크를 연결하는 직항로를 개설했으며,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도 직항편이 뜨기 시작했다. 시리아 항공사인 참에어도 민스크 노선에 동참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유럽 이주 희망자’들은 독일로 가는 꿈에 부풀어 민스크행 여객기에 올랐다. 독일 대중일간지 빌트에 따르면 중동의 각 도시에서 민스크로 가는 직항로는 약 50편으로 증설됐다. 매주 이스탄불 26회, 두바이 12회, 다마스쿠스 7회, 바그다드 4회 안탈리아 4회, 베이루트 2회, 그리고 에르빌과 라스 알 카이마가 각각 1회씩 생겼다. 벨라루스는 유럽연합의 동쪽 끝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회원국인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로 기차와 차량, 심지어 도보로 쉽게 입국할 수 있다. 그쪽으로 이주민이 몰리면서 이번 국경 혼란 사태가 불거졌다. 민스크에 도착한 이들은 벨라루스 당국의 도움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 국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의 국경을 관리하는 당국자들이 이들을 통과시켜줄 리가 없었다. 국경 통과 길이 막힌 이주 희망자들은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벨라루스 경비대가 이들이 다시 민스크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주 희망자들은 국경을 넘을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들은 국경지대에 갇힌 신세가 됐다. ━ ‘인도주의’와 ‘현실’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 EU 이런 상황에서 EU는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난민을 받자니 루카셴코의 음모에 놀아나는 게 될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러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몰려온 난민을 수용하고 국가 별로 나눠 수용하는 과정에서 독일·프랑스를 비롯한 부유한 나라와 헝가리·폴란드 등 경제력이 그보다 못한 신규 EU 회원국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난민에 가장 관대하다는 독일 국내에서도 난민이나 외국인, 특히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확산했다. 무슬림 이주민의 증가로 유럽이 결국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유라비아(유럽+아랍)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난무했다. 외국인, 특히 무슬림 이주민에 반대해온 ‘독일을 위한 대안(AfD)’ 등 극우파가 정치적으로 지지를 늘려갔다. 독일에서도 비교적 경제적으로 열악한 옛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2014년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인 유럽인(PEGIDA)’이라는 극우·반이슬람·반외국인 단체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런 우려 때문에 난민을 내치면 인권이나 인도주의에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EU가 내걸어온 인도주의·인권의 가치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 된다. 게다가 이는 바로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이 노리는 부분이다. ‘나를 선거부정·인권탄압·국제법 위반 등으로 비난하는데 EU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국제여론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국제전략이나 군사전술 차원에서 이번 사태를 ‘하이브리드 전쟁’이라고 지적한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군사적 수단만이 아니라 경제적·정치적·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해 상대를 타격하고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복합 전쟁의 한 양상이다. 달리 표현하면 총 한 방 쏘지 않고 상대를 곤경에 빠뜨려 내 의지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이번 경우에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은 난민을 앞세워 EU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여러 이유로 서유럽 정착을 희망하는 중동의 이주 희망자들을 정치 도구화한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다.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은 과거 터키에서 국경을 넘어 유럽연합 회원국인 그리스를 거쳐 몰려오는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EU의 전통적인 서유럽 회원국들과 중부유럽의 신규 회원국 간에 갈등이 생겼다는 사실을 이번에 재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하이브리드 전술은 당시 EU 상황을 유심히 살핀 끝에 나온 국제 전술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루카셴코가 원하는 것은 EU가 이들 이주 희망자를 받는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제재를 푸는 것이다. 이주 희망자 일정 인원을 받고 안 받고, 지원하고 안 하고는 문제 해결책이 아니다. 루카셴코는 이주민을 EU의 정치적인 분열과 세력 균형의 불안 등을 유발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이주 희망자들이 국제정치에서 최고의 타격 도구가 되고 있다. 게다가 EU가 사태 해결을 위해 벨라루스 추가 제재 여부를 논의하자 루카셴코는 한 술 더 뜨고 있다. 추가 제재를 할 경우, 벨라루스를 통과해 유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가스관을 차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겨울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유럽으로선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루카셴코가 언급한 가스관은 야말 유럽(Yamal - Europe)으로 불리는 가스관으로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의 소유다. 서북 시베리아 북극해의 야말 반도에서 채굴한 가스를 운송하는 4107㎞ 길이의 거대한 가스파이프 시스템이다. 야말 유럽은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지나 폴란드·독일로 이어진다. 운송 용량이 연 330억㎥로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스파이프라인 중 가장 큰 규모다. 루카셴코의 큰 소리는 국경을 맞댄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는 물론 이 가스관이 가는 EU 최강국 독일을 향해 제재를 풀라고 외치는 엄포로 풀이할 수 있다. 이주민 사태를 계속 겪기 싫으면 벨라루스에, 루카셴코에게 유럽연합 27개국이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거론하며 압박하지 말라는 경고다. 유럽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 고조되는 동-서 유럽 간 군사적 긴장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주민 사태에서 벨라루스를 적극적으로 두둔하면서 전략 폭격기인 투폴레프(Tu)-22M3 2대와 Tu-160 2대를 11월 10일과 11일 연이어 벨라루스 영공으로 파견해 초계비행을 했다. 누가 봐도 명백히 EU를 겨냥한 무력시위다. 나토도 맞대응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11월 13일 러시아 북부 북극해에 가까운 바렌츠 해와 러시아에서 북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노르웨이 해, 그리고 영국과 노르웨이 북쪽의 북해 등의 공해 상공을 비행하던 자국의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을 상대로 영국의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초근접 비행을 하면서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11월 12일 벨라루스와 함께 EU 회원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접경한 벨라루스 서부 그로드노 주에서 대규모 연합 공수 훈련을 펼쳤다. 러시아군은 서방과 가까우면서 러시아에 적대적인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지대에 약 9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우크라이나 국방부가 발표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호응해 국경지대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나토도 11월 11일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을 동원해 흑해 공해 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펼쳤다. 러시아와 나토 간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이 역대 최고로 높아지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에는 나토와 EU 가입을 희망하는 국민이 많은데 옛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로선 이런 분위기가 불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될 경우 러시아 본토가 EU나 나토 회원국과 국경을 맞대게 된다. 이미 옛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나토와 EU에 가입해 러시아 본토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소련에서 분리된 리투아니아도 나토와 EU에 가입했지만, 러시아 본토가 아닌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와만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런 갈등 과정에서 러시아는 2014년 3월 우크라이나가 지배하던 크림반도를 합병해 EU의 제재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선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돈바스 전쟁이 벌어졌다. 2014년 9월 5일 민스크 협정을 통해 휴전하고 이를 연장하고 있지만, 갈등은 여전하다. 루카셴코의 하이브리드 전쟁은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긴장 고조로 이어지고 있다. 벨라루스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EU를 곤혹스럽게 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종류의 전쟁이 얼마나 확산할지 세계가 고민에 빠지고 있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11.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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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 다시 드리워지나

산업 일반

러시아 정부는 오래 전부터 다수 국가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을 지원하며 유럽을 분할 정복하려 애써 왔다. 적어도 이제 헝가리는 EU의 가치·원칙·규칙에 대한 저항의 심장부가 됐다 지난 4월 8일, 봄인데도 여전히 공기가 차가웠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도나우강 주위로 수만 명이 운집해 영웅의 연설을 들으려고 밤 늦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자정께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열광했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선언했다. “헝가리를 수호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오르반 총리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역사적인 4선에 성공하고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오르반 총리는 철저하게 반이민 캠페인을 펼치면서 유럽연합(EU)을 ‘제국’으로 비난했다. 대다수 유권자의 반응이 좋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그를 지지했다. 푸틴 대통령은 10여년 동안 자신의 권력을 총동원해 오르반 총리의 성공을 도왔다. 오르반 총리는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자기 브랜드의 분열적인 반EU 정서를 퍼뜨려왔다. 러시아 관영 통신사 RT는 그 과정을 “유럽의 오르반화”라며 칭송했다.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스페인의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로부터 영국 브렉시트(EU 탈퇴) 운동가 등의 단체들을 후원하면서 EU를 분할하고 약화시키려 애써 왔다. 크렘린은 프랑스의 극우 국가주의 정당 국민전선에 융자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프로파간다 채널을 이용해 발트해 연안의 러시아 소수민족 박해와 관련해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부다페스트 기반 싱크탱크 폴리티컬 캐피털에 따르면 러시아 발 악성 댓글, 트위터 봇, 소셜미디어 위장계정이 동원돼 이민자의 범죄를 부풀리고 “타블로이드 신문의 음모론 패키지에서 친크렘린 스토리를 퍼뜨렸다.” ━ 헝가리의 변절자 이웃 체코 공화국에선 지난 2월 친러시아 포퓰리스트인 밀로스 제만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친EU 성향의 경쟁 후보 지리 드라호스가 아동성애자이며 공산주의 협력자라고 비난하는 조직적인 흑색선전에 희생된 뒤였다. 그런 스토리의 출처는 대부분 약 30개의 체코 웹사이트였다. 모두 모스크바와 관련된 사이트라고 프라하 기반 싱크탱크 유러피언 밸류스가 운영하는 단체 크렘린 워치가 밝혔다. 친푸틴 동조자를 지원해 유럽 전역에 걸쳐 의혹과 불화의 씨앗을 심어 EU 당국이 우크라이나 같은 곳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을 집단적으로 제재하기 힘들게 만들려는 노림수다.크렘린은 분명 유럽의 다수 국가주의 정당과 정치인을 도우려 애썼다. 그러나 오르반에 대한 후원은 규모와 범위 면에서 전례 없는 수준이었다. 프로파간다뿐 아니라 가스 공급 계약 특혜, 수십억 달러 융자, 전략적인 투자, 폭력적인 극우 혐오단체에 대한 은밀한 후원이 잇따랐다. 그리고 적어도 크렘린으로선 큰 보상을 받았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군 지원 여파로 다른 EU 국가들이 러시아를 멀리할 때도 오르반은 유럽에서 푸틴 지지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목청 높여 반대했으며 다른 EU 지도자들이 푸틴 대통령을 규탄하려는 시점에 수시로 부다페스트에서 그를 맞이했다. 또한 러시아 스타일의 정실 자본주의 신흥재벌 엘리트들을 등용하고, 충성스러운 사업가들을 동원해 반체제 뉴스 매체를 인수하고, 비정부기구(NGOs)와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크렘린으로선 무엇보다도 헝가리가 EU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원칙·규칙에 대해 확대되는 저항의 심장부가 된 것이 의미심장했다.영국 옥스퍼드대학 허트포드 칼리지의 정치경제학자 윌 허튼 교수는 “보수적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부상이 우리 시대 최대의 위협 요소”라며 “유럽은 국가주의의 가장 어두운 악령을 다시 마주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분명 유럽(또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포퓰리스트적인 반동의 배후는 아니다. 그러나 크렘린은 얼싸 좋다하며 그것을 이용한다. 그리고 적어도 오르반의 헝가리에선 그 전략이 먹힌다.오르반이 원래부터 모스크바 편인 건 아니었다. 그는 반러시아·반공산주의, 자유주의 반체제 인사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디뎠다. 1988년 헝가리계 미국인 금융가 조지 소로스에게 편지를 써보내 옥스퍼드대학 학자금 지원을 요청했다(소로스는 훗날 오르반의 가장 큰 적이 됐다). 최근 헝가리 언론이 발굴해낸 그 편지에서 청년 오르반은 ‘시민 사회의 부활’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금을 지원받았으며 공산주의 몰락 후 귀국하자마자 대학생 중심의 친자유시장 정당 피데스 설립에 참여했다. 당시의 많은 동유럽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르반은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 헝가리가 경제난을 극복하고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2004년 EU가 헝가리와 기타 중부유럽 국가들을 받아들이면서 오르반의 꿈은 실현됐다. 부다페스트 지역 출판인 타마스 파르카스는 초기 피데스를 지지했지만 훗날 환멸을 느껴 등을 돌렸다. 그는 “일단 유럽의 일원이 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구세대와 농촌지역에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정부에 의지하는 삶에 익숙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가 아무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브뤼셀 당국이 알아서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신 국경개방과 자유무역은 경기가 침체된 동안 해외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헝가리 젊은이들의 대규모 두뇌유출을 촉발했다. 유럽의 최빈국 개발을 목표로 보조금과 후원금 형태로 지급되는 EU 지원금이 2016년 헝가리 국내총생산(GDP)의 4% 가까이 차지했다. 헝가리는 오늘날 EU 자금의 최대 순 수혜국으로 꼽힌다. 연간 45억 유로를 받으면서 EU의 연간 예산에 기여하는 돈은 10억 유로도 안 된다.동시에 헝가리는 EU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반부패 NGO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수뢰와 공직자 횡령에서 불가리아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출판인 파르카스는 “사람들은 EU가 무임승차가 아님을 깨닫고는 크게 분노했다”며 “그들은 모든 문제가 자신들이 아니라 외부인 탓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2008년 10월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이후 당시 헝가리 야당 지도자이던 오르반은 러시아를 규탄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조지아에서 일어난 일은 냉전 종식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현재 러시아가 보여주는 이런 원시적인 무력정책은 유럽에선 20년 동안 유례가 없었다”고 말했다. 에이프럴 폴리 당시 헝가리 주재 미국 대사는 오르반이 구미 관계를 중시하며 “러시아와 극좌파의 생존과 복귀”를 헝가리에 대한 최대 위협으로 믿는다고 워싱턴 정부에 보고했다.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전문 내용이다. 폴리는 ‘오르반이 천사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선 천사 편’이라고 썼다.그러나 오르반은 훗날 2010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을 하면서 대중영합적이고 외국인혐오적인 공약이 유권자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오르반의 오랜 측근인 지외르지 마톨치 경제 보좌관(현 헝가리 중앙은행장)은 그의 자유주의적인 세계관이 시대착오적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독립적인 헝가리 언론 그룹 디렉트 36의 한 대규모 조사 프로젝트에 따르면 마톨치는 떠오르는 동방이 곧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실세는 물론 주도적인 정치 모델이 되리라고 오르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2009년 11월 오르반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가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고 다음 달 베이징으로 건너가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던 시진핑을 만났다. ━ 날아간 수십억 달러의 이익 오르반은 분명 두 사람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는 곧 러시아와 중국을 대표적인 모델로 거론하면서 개종자 같은 열정으로 헝가리의 “국가적인 토대 위에 비자유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메릴랜드 대학 정치학과 블라디미르 티스마네누 교수는 오르반을 가리켜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로 변신한 베니토 무솔리니” 같다고 평했다. “그는 자유주의 전통과 거기에서 다원주의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안다. 그는 시민사회 출신이면서 그것을 파멸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과거와의 단절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을 가지려 애쓰는 변절자다.” 2010년 4월 오르반은 자신의 새로운 국가주의적 정강을 기반으로 선거운동을 벌인 뒤 총리로 선출됐다.푸틴 대통령도 분명 오르반에게서 또는 적어도 그의 국가주의적 가치에 대한 갑작스러운 열정의 파괴적 가능성에 그 못지 않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문제는 그의 인화성 강한 메시지가 전파되도록 러시아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그 답은 곧 명백해졌다. 총리에 오른 오르반은 그해 11월 러시아를 다시 찾아가 푸틴 대통령과 회동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러시아 지도자 푸틴 대통령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골치 아픈 문제를 논의했다. 앞서 2009년 헝가리 최대 석유회사 몰의 21.1% 지분을 러시아 국유 에너지 대기업 수르구트네프테가스가 인수했었다. 오르반의 전임자 정부는 러시아의 주주 권리 행사를 막아 이고르 세친 러시아 부총리를 분노케 했다. 위키리크스 전문에 따르면 세친이 몰의 CEO에게 “당신의 싸움 상대는 수르구트네프테가스뿐 아니라 기업들에 없는 도구를 가진 러시아 국가도 있다”고 위협했다고 미국 대사관이 워싱턴에 보고했다.신임 총리 오르반은 모스크바와 대결 양상은 어떻게든 피하기를 원했다. 대신 그는 수르구트네프테가스가 가진 몰의 지분을 헝가리가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오르반이 몰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데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헝가리 최고 부자 중 한 명인 산도르 차니는 최대 은행장 겸 몰의 부사장이었다. 몰을 국가에서 인수하면 오르반이 차니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나아가 오르반이 헝가리의 에너지 시장을 통제하는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러려면 러시아 석유업계의 파수견인 세친 부총리가 지분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푸틴 대통령의 관점에선 이익과 지정학적 이해 간의 선택이었다. 후자가 선택 받았다. 2011년 4월 모스크바가 갖고 있던 몰의 지분이 헝가리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르반이 푸틴 대통령에게 넣은 다음 청탁은 헝가리 가스 거래 업체 MET 문제였다. 원래 몰이 창업했지만 오르반이 총리에 오를 무렵엔 소유구조가 불투명했다. MET는 서방 공급업체들뿐 아니라 러시아 가스 대기업 가즈프롬과 가스 조달계약을 체결했다. 2011년 서방의 가스 공급가가 러시아산보다 더 낮았다. MET의 중간 거래상들이 가즈프롬과 장기 계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훨씬 더 큰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부패 리서치 센터 부다페스트’의 한 조사에 따르면 오르반 정부가 내린 일련의 결정으로 MET는 서방에서 받는 물량을 늘려 회사에 수십억 달러의 순익을 안겨줬다. 무엇보다도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가스·전력 요금을 낮춰 오르반에 대한 유권자의 호감도가 더 높아질 수 있었다.가즈프롬은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했다. 그 러시아 업체는 MET와 이른바 의무인수 계약(take-or-pay agreement)을 체결했다. 이론상 MET가 사용하든 않든 구입하기로 계약한 가스 전량의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조건이다. 그리고 독일 에너지 업체 E.ON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는 거세게 항의했으면서도 MET의 계약 불이행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 결정으로 러시아는 수십억 달러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치적으로 보상받았다. 낮은 에너지 가격이 2014년 오르반의 재선 성공에서 큰 변수로 작용했다.비슷한 시기에 러시아는 원자력 에너지에서도 오르반을 정치적으로 돕기로 결정했다. 헝가리 정부는 헝가리 중부 팍스 인근에 공산주의 시대 발전소와 함께 가동할 새 원자로 2기의 건설을 계획했다. 미국 원전 업체 웨스팅하우스, 프랑스 에너지 업체 아레바,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납품업체들이 입찰에 참여하려 팍스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2013년 8월 오르반은 러시아의 국유 원자력 에너지 업체 로사톰 대표를 비밀리에 만났다. 그 회동 결과는 2014년 1월 푸틴 대통령과 오르반이 모스크바에서 발표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지만 오르반 총리는 공개 입찰을 거치지 않고 팍스 확장 프로젝트를 로사톰에 맡기기로 합의했다. 그 결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러시아 정부가 오르반에게 100억 유로의 융자를 제시한 것이다. 수년래 헝가리에서 단연 최대 규모의 투자였다. ━ 푸틴의 전략 팍스 원자로 계약에 관한 비밀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례 없는 수준의 이민 물결이 유럽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이민위기는 유럽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과 심도 있는 성찰을 촉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수석 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은 지난 3월 워싱턴 연설에서 “새로운 정치현실은 좌파 VS 우파가 아니라 세계주의자 VS 국가주의자 간의 대립”이라고 말했다. 2013년 오르반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반세계주의 전도사로 떠올랐다. 그는 틈만 나면 EU 정부 엘리트들을 조롱하며 크렘린에 기쁨을 안겨줬다.오르반은 1848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헝가리 혁명을 기념하는 휴일에 대규모 지지 군중 앞에서 기독교 유럽과 헝가리가 대이민 물결에 맞서 “문명 투쟁”을 벌인다고 말했다. 그 이민 물결은 말썽꾼들과 “국제 투기꾼들의 후원을 받는 NGOs” 네트워크가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 투기꾼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옛 후원자이자 유대인인 소로스를 지목했다(소로스는 부다페스트의 많은 시민사회 단체와 대학 한 곳을 후원한다). 그러면서 반유대주의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드는 용어를 구사했다. ━ 믿을 만한 좋은 친구 베테랑 해외 통신원이자 부다페스트 주민인 아담 레보는 “그의 발언을 두고 1930년대의 불쾌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조잡하고 혐오스럽고 심지어 인종차별을 넘나드는 전술로 보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방의 자유주의 금기에 도전하는 아이디어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통했다. 주권, 통제가 이뤄지는 국경, 공통된 역사·문화의 중요성, 국가적인 단결의식 등이다.”그러나 난민과 이민에 대한 오르반의 집요한 공격이 국내뿐 아니라 중부 유럽 전반적으로 먹혀드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와 호르스트 제호퍼 독일 내무장관 모두 이민에 관한 그의 강경 메시지를 앵무새처럼 되뇌며 공개적으로 그를 귀빈으로 맞았다. 피데스의 발라스 히드베기 대변인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유럽 정치 지도자가 갈수록 늘어난다”며 “빅토르 오르반이 옳다”고 말했다.오르반은 또한 푸틴 대통령의 전략을 일부 베꼈다. 과거 독립적인 기관들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채워 넣고 부패를 통해 자신과 한통속이 된 패거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의회 과반수 의석을 동원해 검찰·감사원·언론 등 헝가리 정부와 사회의 과거 독립적인 조직들을 피데스의 휘하로 끌어들였다. EU는 크게 분노했다. 유럽의회의 브렉시트 협상대표 가이 베르호프스타트는 지난 3월 “연합의 가치에 서명했으면서도 모든 가치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EU 자금은 원하면서도 우리의 가치는 원치 않는다.” 한편 소로스는 푸틴 대통령을 본받아 헝가리를 ‘마피아 국가’로 만든다고 오르반을 비판해 왔다. EU도 그들의 보조금이 오르반의 친구·친지들의 배를 불리는 데 흘러들고 있다는 광범위한 증거를 찾아냈다.하지만 오르반과 크렘린의 우정이 정말로 빛을 보기 시작한 건 2014년 3월이었다. 소속불명의 군복 차림을 한 러시아 병력이 크림 반도를 침공했을 때였다. 그 일로 푸틴 대통령은 대다수 유럽 지도자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웃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처지는 2014년 7월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항공 보잉 여객기가 러시아군의 부크(Buk) 지대공 미사일을 이용하는 반군에 격추당했을 때 더 분명해졌다. EU와 미국 모두 여러 차례 갈수록 강도 높은 제재를 가했다. 대다수 러시아 기업들이 국제신용도 상향조정에서 제외되고 푸틴 대통령의 핵심 가신들이 서방에서 자산을 보유할 수 없게 됐다. EU의 제재에는 회원국 전체의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했다. 오르반은 러시아의 전통 우방인 그리스, 키프러스와 함께 제재에 회의적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끄는 대규모 외교노력으로 두 나라가 입장을 바꿨다. 협상 내용을 잘 아는 한 EU 외교관은 익명을 요구하며 “때로는 그들이 쓰는 돈을 누가 내는지 상기시켜 줘야 한다”며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단합된 유럽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메르켈 총리의 입장은 단호하다”고 말했다.오르반은 언제나 제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뿐 아니라 러시아를 집단적으로 규탄하려는 EU의 시도를 외면했다. 오르반은 2017년 2월 부다페스트의 합동기자회견에서 “서유럽은 극히 반러시아적인 태도와 정책을 갖고 있다”며 “다자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고 말했다.푸틴 대통령은 헝가리를 러시아의 “중요하고 믿음직한 파트너”라고 부르며 맞장구쳤다. EU 정부가 러시아를 불량국가로 낙인 찍으려는 시점에 중부 유럽을 방문해 환영받는 것은 커다란 외교적 자산이다. 지난해 푸틴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게자 제스젠스키 전 헝가리 외무장관은 “푸틴은 자신에게 믿음직한 좋은 친구가 있음을 NATO와 EU에 과시하려 한다”며 “헝가리는 동맹 내의 트로이 목마”라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말했다.하지만 오르반이 제재 문제를 두고 EU 정부에 전면적으로 반항하지 못하는 한 가지 요인이 있다. 대다수 헝가리 유권자는 푸틴 대통령의 보수적인 세계관에 동정적일지 모르지만 특히 오르반의 핵심 지지기반인 구세대 중 많은 사람이 여전히 러시아를 1956년 헝가리 민선정부를 탄압한 식민지 세력으로 여긴다. 따라서 잉글랜드 솔즈베리에서 러시아군 정보장교 출신인 세르게이 스크리팔의 암살기도 이후 지난 3월 23개국이 160여 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을 때 헝가리도 한 명을 추방했다.러시아에 대한 EU 제재는 6개월마다 갱신된다. 그리고 오르반은 반EU 주장을 펼치면서도 2014년 이후 지금까지 모든 투표에서 EU 정부의 노선에 순종했다. 헝가리 정부 대변인 졸탄 코박스는 “우리의 결정이나 정책에서 우리가 러시아나 푸틴 대통령에 다른 어떤 서방 국가보다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푸틴 대통령은 오르반이 더 많이 지지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렘린의 10여 년에 걸친 베팅이 보여주듯 러시아는 장기전을 펼칠 각오가 돼 있다. 그들의 투자는 이미 배당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오르반의 압승은 보수적 국가주의가 헝가리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제재로 경제규모가 스페인보다 작아진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EU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군사적으로도 최근 푸틴 대통령이 차세대 핵군비와 크렘린의 국방비 지출을 대폭 늘렸다고 말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NATO 동맹이 여전히 러시아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프로파간다 면에서는 푸틴 대통령을 따를 자가 없다. 그는 EU가 해체된다면 내부적인 문제가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듯하다.- 오언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2018.05.21 10:38

11분 소요
2017년 주목할 세계 8대 핫 이슈

산업 일반

트럼프 당선, 유럽 난민 위기, 포퓰리즘의 부상, 푸틴의 영향력 확대… 2016년에 일어난 사건들의 여파 계속될 듯 많은 사람이 새해에는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한다. 2016년 한 해 멀리 돌아보지 않아도 암울한 뉴스가 숱하게 많았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2016년 6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나이트클럽에서 100여명의 사상자 발생)가 일어나고, 유럽연합(EU) 본부인 브뤼셀이 세 차례 자폭 테러를 당하고, 프랑스 니스에서 축제 관람 인파 속으로 대형 트럭이 돌진하고, 시리아 휴전에 실패하고,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범의 사살을 부추기고, 난민위기가 지속되고, 가짜 뉴스가 급증하고, 록의 전설 데이비드 보위와 프린스가 유명을 달리 했다.한 해가 저무는 이 시점에도 사건 소식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기대했던 2016년의 마무리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알레포를 점령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차기 정부의 내각인선 작업을 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세상은 올해의 후유증에 어떻게 대처할까? 내년에 예상되는 세계 주요 뉴스를 뉴스위크 기자들이 개략적으로 간추렸다. ━ 1. 트럼프 정부에서의 이민과 난민 미국 대선 캠페인 공약만 놓고 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미국의 이민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난민 재정착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대선 이후 난민 운동가들은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칠지 “두렵다”며 트럼프 정부 하에서 악몽의 시나리오를 그렸다.선거 유세 중 트럼프는 미국 내 시리아 난민 프로그램의 폐지를 약속하고, “무슬림의 미국 입국에 대한 철저하고 완벽한 차단”을 촉구했다(이 공약은 그의 웹사이트에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일 아침에는 2001년 9·11 테러 공격에 대해 엉뚱하게 난민들을 탓했다. 또 다른 드리머스(DREAMers, Development, Relief and Education of Alien Minors Act) 그룹의 문제도 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주한 불법체류 이민자 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추방을 막기 위한 2014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트럼프가 무효화할 경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초당적인 노력이 현재 진행 중이다. 2016년 11월 오하이오주립대학 테러 용의자는 소말리아 난민이자 합법적인 미국 영주권자였다. 그를 “미국에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내용의 트윗을 트럼프가 띄우면서 우려를 더욱 부채질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이 몇 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운동가들과 난민은 불확실한 4년에 대비하고 있다. ― 루시 웨스트콧 ━ 2. 유럽 난민의 미래는? 유럽 이민 위기에 관한 한 2016년이 심각했다면 내년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35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바다로 내몰아 위험을 무릅쓰고 유럽행 보트에 오르도록 한 환경이 호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시리아 내전은 계속 불타오르고,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이라크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사분오열돼 있다. 파키스탄과 에리트레아에선 경제난과 정치탄압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내년 폭력과 궁핍을 피해 유럽으로 몰려드는 난민 중 다수는 그들을 보호하려는 의지 또는 능력이 없는 환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유럽 전역에서 반이민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독일에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의 지지도가 급등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표를 많이 잃게 될 듯하자 과거 이민 수용에 적극적이던 태도를 버려야 했다.다른 EU 국가들은 필시 이민 수용 확대에 더 소극적일 듯하다. EU 진영은 터키·아프가니스탄과 2건의 송환 계약을 체결하고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과 추가 협약을 모색 중이다(2016년 12월 12일 EU는 아프리카에선 처음으로 말리 정부와 송환 계약을 맺었다). 목숨을 걸고 유럽행을 감행한 많은 이민자들이 곧바로 송환될 운명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 미렌 지다 ━ 3. 프랑스의 친러 노선 전환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충격적인 승리 이후 모두의 시선이 프랑스로 쏠리고 있다. 또 다른 극우파 후보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내년 봄 대선에서 트럼프처럼 포률리즘의 반란을 꿈꾸고 있다.그러나 르펜이 승리하지 못할 경우 중도 우파 후보인 프랑수아 피용이 엘리제궁에 입성할 가능성이 크다. 경제 자유주의자인 피용 전 총리의 당선은 정치 주류의 승리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르펜과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견해에 거의 전적으로 동조한다는 점이다.르펜은 프랑스가 미국 곁에서 떨어져 나와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신 ‘다극화’ 시대를 약속한 반면 피용 전 총리는 푸틴과 “솔직하고 견고한 관계의 재개”를 촉구했다. 그는 유럽의 대 러시아 경제제재에 반대하고 시리아에서 모스크바 정부와 협력 확대를 촉구해 왔다.EU의 손꼽히는 강대국인 프랑스 정부가 친러시아로 방향을 틀면 러시아에 대한 현 EU 강경 노선의 미래가 불확실해질 수 있다. 불가리아와 몰도바에서 친러시아 대통령의 당선으로 푸틴이 이미 동유럽에서 영향력 확대를 기대하는데 내년에는 서방에서도 그의 말발이 더 잘 먹혀들 가능성이 크다. ― 조시 로 ━ 4. 푸틴, 트럼프, 크림 반도 러시아와 그 지도자들이 갈림길에 섰다. 한편으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입지가 허약해 보이지 않는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지지율이 급등하고 시리아에서 군사개입의 성공으로 한껏 고무돼 있다.반면 러시아 경제는 아직 수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은 물가상승, 실질임금 하락, 경기부진에 계속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차기 대선이 2018년 초로 다가오면서 푸틴은 남은 12개월 동안 차기 지도자에게로의 권력이양 준비 작업을 하거나 또는 직접 출마를 결정할 경우(대다수 분석가들은 그렇게 예상한다) 전례 없는 4선을 향해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 국민의 사기 또는 경제를 살려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크림반도 합병 후 러시아에 가해진 서방 제재의 종식이다.푸틴은 내년이 자신의 뜻을 이루는 최고의 기회라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자신이 시사한 대로 크림반도 합병 인정을 정말로 ‘검토’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상당수 서방 지도자들은 이젠 시리아 내전이 우크라이나 상황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고 느낀다. 그리고 예컨대 프랑스 국민전선 마린 르펜 대표 같은 친 러시아 지도자와 단체가 유럽에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면서 2017년이 제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푸틴이 기대한다 해도 놀랍지 않다. 이는 상당부분 미국 대선에 대한 러시아 개입의 증거가 추가로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그럴 경우 서방 여론의 흐름이 푸틴에 불리하게 바뀔 가능성이 크다.제재가 해제될 경우 크렘린이 오래 전부터 서방의 경제 ‘갑질’이라고 주장해온 문제에서 승리를 주장하는 한편 유리한 조건의 EU 수입품에 국경을 개방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수입금지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의 식료품비가 상승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제한됐다. 이는 또한 러시아에는 크림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는 서방의 태도가 틀렸다는 신호가 되며 푸틴으로선 2014년 그에게 기록적인 지지율을 안겨준 애국 열기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 대미언 샤코브 ━ 5. 이슬람국가(IS)가 아닌 칼리프 국가의 종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유럽과 세계 각지에서 벌이는 테러 공격에 현혹돼선 안 된다. 이들의 자칭 칼리프 국가는 붕괴되고 있다. 이라크-시리아 접경에 걸쳐 있는 이들의 폭력적인 핵심부는 지난 2년간 통합과 성장 과정을 거친 뒤 지금은 사실상 두 동강 났다. 영토 확장 시도는 실패했고 2017년으로 넘어가는 현 시점에서 칼리프 국가를 제외하면 유일했던 점령 도시인 리비아의 시르테를 잃었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미국 주도 연합군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군이 트럼프 취임 전에 이라크 북부 도시 모술을 해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났지만 도시의 최소 4분의 3 이상을 여전히 IS가 장악하고 있으니 모술 함락은 트럼프 정권에서나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모술 함락 후 IS의 사실상 수도인 시리아 라카 해방 작전에 본격적으로 탄력이 붙을 것이다. IS는 이들 양대 도시를 잃고 나면 그들의 수중에 있던 도시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세계 각지의 무슬림을 맞이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국가라는 주장이 빛을 잃는다. 그렇다고 IS가 종말을 맞는 건 아니다. 칼리프국가 전체가 붕괴되더라도 IS는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적 개체에서 반군 단체로 전환하더라도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동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위협은 앞으로도 수년간 지속될 것이다. ― 잭 무어 ━ 6. 이란의 대통령 선거 서방의 정치조류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가운데 동쪽에서도 곧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내년 5월 대선에서 개혁파 지도자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과거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이 이끌던 보수 진영 후보와 맞대결을 벌인다. 로하니는 이란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 공약을 실천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아마디네자드의 입후보를 사실상 금지하면서 라이벌 진영은 누구를 그의 상대 후보로 내세울지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이란 지도자 하메네이가 직면한 어려움을 말해준다.트럼프의 당선은 핵협상 타결을 통한 제재완화로 이란 경제를 살리겠다는 로하니의 약속에 걸림돌이 된다. 트럼프는 2015년 이란과 세계 강대국들이 체결한 기념비적인 핵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되면 이란의 재정이 다시 수렁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란인들도 어쨌든 핵협상 타결로 얻은 혜택이 거의 없다고 느낀다. 2015년 7월 핵협상 타결 후 나아진 게 없다고 답한 이란인이 4분의 3에 육박한다. 핵협상 이후 성장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빈곤과 불평등은 확대됐다.이란 정치 엘리트 중 보수 진영은 선거 캠페인에서 이를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2016년 2월 총선에서 로하니가 이란 국민의 신임을 받았지만 경제가 나빠지면 그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는 내년 대선에서 로하니가 연임에 실패하고 이미 중동 전역의 분쟁에서 프락치 단체들을 후원하고 있는 시아파 세력이 한층 더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 잭 무어 ━ 7. 아사드의 알레포 승리 후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알레포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한때 시리아의 번화한 상업 수도였던 알레포는 바로 1년 전만 해도 반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인 듯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대적인 공중 폭격 덕분에 안과의사 출신의 독재자 아사드가 권좌를 지키면서 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 수 있었다.알레포가 아사드 정권의 수중으로 넘어갔지만 시리아 내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리고 그동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시달린 것만큼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도 분명 악몽이 될 전망이다.이는 미국이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다. 워싱턴 정부는 과거 온건파 반군이 아사드 이후의 민주 시리아를 넘겨받게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수니파가 주도하는 반정부 세력은 상당부분 수많은 급진 지하드 단체로 탈바꿈했다. 이제 백악관은 아사드에 대처할 카드가 바닥났다. 그리고 오바마 정부가 아사드 정권의 알레포 공습을 비난만 많이 했지 막으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다.트럼프의 시리아 정책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시리아 문제의 해결은 오바마 때보다 한 치도 진전이 없을지 모른다. 현지의 이슬람국가(IS)를 격멸해 아사드가 시리아의 남은 반군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군사적 승리가 어떤 간단한 정치적 해법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 오웬 매튜스 ━ 8. 대만, 중-미 관계의 뇌관될까? 7분간의 전화통화가 아직도 세계의 몇몇 초강대국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차이잉원 대만 총통 간의 짧은 대화(40여 만의 첫 양국 정상 간 소통)가 반세기 가까이 조심스럽게 구축한 중-미 외교관계를 허물어뜨릴 위험이 있다.중국의 입장에선 그것이 오랫동안 지켜온 ‘하나의 중국’ 정책에 역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중국’ 정책은 중-미 관계의 성스러운 불문율이나 다름없지만 내년에는 점점 더 위태로워질 듯하다. 그 정책에 따르면 다른 나라들은 사실상 중국·대만 양국과 동시에 공식 외교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트럼프가 느닷없이 차이잉원 총통의 전화에 응한 것이 큰 변화를 상징하는 까닭이다.트럼프는 중국을 중요한 전략적 동맹으로 여기는 러시아와 정치적으로 다리를 놓을 작정이다. 그에 따라 대만 독립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집중 조명을 받을 것이다. 중국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와 마주 보고 있는 대만을 자국 영토로 간주한다.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트럼프와 베이징 정부 간의 설전에서 중국 관영매체는 그를 “어린이처럼 무지하다”고 비판하고 중국 외교장관은 “그들은 제 발등을 찍고 있다”고 주의를 줬다. 두 지도자가 언젠가 직접 만나게 되면 수면 아래서 끓어오르던 분쟁이 표면으로 분출할 것이다. 그때 가면 무역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이 작은 섬나라가 중-미 관계의 미래에 결정적인 뇌관이 될까? 이들 세계 양 대국간 갈등은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이판사판의 지정학 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로리 챈

2017.01.0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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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수단 구하기 ’ 나선 조지 클루니의 좌절 … 스타 인도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산업 일반

2012년 3월 어느 날 오전 나일 강변의 술집에선 종업원이 바닥을 닦고 빈 병과 잔들을 치우고 있었다. 조지 클루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가 앉은 테이블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클루니는 북쪽 교전지역으로 가기 전에 두어 시간 정도가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나일 강변의 구호요원용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녹색으로 흐르는 넓은 나일강이 장관이었지만 클루니는 경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술집 위의 잔디 지붕과 벽에 부착된 빈 술병들, 아직도 작은 원 모양으로 모여 있는 빈 의자를 둘러봤다. “밤중에 여기 온 적이 있나요?” 클루니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열광의 도가니라는 걸 잘 알겠군요. 나도 여기서 아주 열띤 밤을 몇 번 보냈죠.” 클루니는 수단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운동가 존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 방금 도착했다. 몇 시간 뒤 그들은 전투지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곳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새로 생긴 수단 국경 바로 아래의 비포장 활주로에 내린 다음 바닥에 철판을 깐 낡은 SUV로 갈아타야 한다.그 SUV는 라이언 보이옛이 운전한다. 보이옛은 미국인 구호요원으로 수단에서 결혼한 뒤 그곳에 정착했다. 그 역시 인도주의 운동가로 수단 정권의 누바족 박해 만행을 폭로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클루니와 프렌더가스트를 태우고 수단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 그들을 누바 산악지대로 데려다 주기로 자원했다.그곳 반군 지역에 보이옛이 아내와 함께 살려고 손수 지은 집이 있다. 몇 달 전 수단 공군이 그 집을 폭격하려 했다. 그들 세 명이 가야 하는 길도 거의 매일 폭격을 받는다. 수단 공군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석유를 담은 통에 폭약을 붙여 고도 1.6㎞ 이상의 상공에서 떨어뜨린다. 클루니는 그런 공습을 직접 목격하러 그곳에 간다.“그들은 1.8㎞ 상공에서 그 폭탄을 떨어뜨려요”라고 클루니가 말했다. “따라서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기보다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겁니다. … 더 큰 문제는 지상의 폭력이죠. 일부 괴한들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죽이고, 흉기로 목을 그어요. 그러니 아주 조심해야 하지요.”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 물었다. 클루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 경험은 충분히 했어요. 또 현지 사정과 요령을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문제없어요. 아무튼 내가 해야 할 일이죠.”스타 인도주의 운동가이런 일에 유명인사가 꼭 필요하다면 클루니가 적격인 듯하다. 그때가 클루니의 일곱 번째 수단 방문이었다. 그는 그 일을 하느라 사재 수십만 달러를 썼다. 그가 아프리카의 전쟁 지역에 간다고 발표했을 때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사 간부들과 에이전트들이 성난 목소리로 말렸을 게 뻔하다. 그의 세대에서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클루니가 이제 오지 중의 오지로 향하는 위험천만한 길을 가려고 한다. 클루니는 수단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을 목격했다. 수단은 2011년 7월 남과 북으로 공식 분단되기 전만 해도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경계선에 위치한 아프리카 최대의 국가였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유럽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이곳에선 아랍인들이 수세기 동안 이교도 아프리카인들을 계몽시킨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노예로 삼고, 정복하고, 착취했다.1956년 독립한 후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들어선 정권은 그런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독재 국가를 세웠다. 그들은 석유를 착취해 축재와 낭비를 일삼았다.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 해방 물결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런 행동이었다. 독립으로 식민지에서 탈피했지만 수단 정권은 제국주의와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또다시 나라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시달렸다. 특히 좀 더 기독교적이고 아프리카적인 남부 지역에서 투쟁이 심했다. 정부는 탄압으로 대응했다.또 198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급진적인 이슬람주의를 실천했다(1990년대에 오사마 빈 라덴은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하르툼에서 5년을 지냈다). 반세기 동안 거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새천년 초 수단은 젊은 미국인 인도주의 운동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수단 내전의 희생자가 너무도 많고, 9·11 후 이슬람주의자들이 미국의 공적 1호가 됐으며, 건국 신화가 노예무역과 얽혀 있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수단이 노예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클루니가 그 대의에 앞장섰다.클루니는 먼저 2003년 수단 서부 지역 다르푸르에서 자행된 수단 정부의 만행을 규탄했다. 수단 정부의 아랍화 정책에 비아랍인들이 반기를 들고 정부군을 상대로 투쟁한 유혈사태였다. 2004년 미국 정부가 그 내전을 집단학살로 규정하자 클루니를 비롯한 인도주의 운동가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탄원해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기소하도록 했다.2005년 미국은 수단 정부와 남부의 최대 반군인 수단인민해방군(SPLA) 사이의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그 협정에는 분리독립 주민투표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후 클루니는 인터뷰, TV 출연, 미 의회와 유엔 안보리에서의 증언, 오바마 대통령 면담 등을 통해 휴전이 남부의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첫 단계가 돼야 한다고 세계를 설득했다.2011년 1월 남부 수단 주민 98.8%가 분리독립 투표에 참여해 최신생 국가를 탄생시켰을 때 클루니는 주바에 있었다. “그때는 정말 대단했다”고 클루니가 돌이켰다. “평생 투표를 해보지 못한 아흔 살 할머니가 몇㎞나 걸어 투표소에 가서 난생처음 자유를 선택하는 투표를 했다. 내 눈으로 직접 봤다. 투표율이 98%가 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 투표를 의무이자, 명예, 특권으로 생각했다.”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단 정부는 남부인들, 그리고 새로 생긴 국경선 안에 남은 누바족 같은 반정권 세력을 계속 공격했다. 2010년 10월 클루니는 수단에서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그런 유혈사태를 막을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 누워 별을 쳐다보면서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것보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독자적인 첩보 위성을 띄우는 발상이었다. 클루니는 이렇게 돌이켰다. “구글 어스로 개인의 집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는 판에 전쟁 범죄가 저질러지는 현장을 구글 어스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프렌더가스트도 어쩌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클루니와 프렌더가스트는 미국으로 돌아가 구글맵스와 위성사진 전문 업체 디지털 글로브(Digital Globe)에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디지털 글로브가 소유한 위성 중 수단 상공에 위치한 세대를 특정 시간대에 한해 임대한 뒤 그 이미지들을 처리해 구글맵스에 덧씌웠다. “이미지를 단순히 확보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실시간으로 확보해서 신속하게 분석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클루니가 말했다. “그래야 ‘닷새 전에 이곳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이틀 전에는 이렇게 변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죠. 병력 15만 명을 국경에 배치할 때 위성으로 정밀하게 사진이 찍힌다면 발뺌을 하기 힘들거든요.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가 어렵죠. 그럴 경우 유엔 안보리가 수단 정부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불가능하죠. 수단 정부가 우리의 일을 터무니없다고 매도하고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동원하면 매우 효과적이죠.”클루니는 말을 잠시 멈추고 웃었다. “공평하지 않다고요? 좋은 이야기잖아요? 바로 그들이 제 발등을 찍는 꼴이죠.”스타로서 늘 파파라치에게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클루니가 이제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이 파파라초가 되어 독재 정권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근사한 반전이 아닌가? 클루니는 자신이 없었다면 훨씬 더 암울한 상황이 됐을 곳을 바꿔 놓으려고 명성과 재산을 쏟아 부었다. 그는 일반적인 유명인사보다 덜 방종한 모델을 제시했다. 그가 할리우드에서 갖는 지명도와 영향력으로 ‘명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클루니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그의 목표는 명확하다. 사람들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도 잘 안다. “내가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거나 군인이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단지 이곳의 실상을 TV와 신문에 전하는 게 내 역할이죠. 사람들은 늘 ‘실상을 알면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르완다나 보스니아에 관해 잘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는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곳의 가해자들은 얼마든지 그럴 듯하게 둘러댈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이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큰 목소리로 외치며 실상을 알릴 겁니다.”물론 클루니의 인도주의 운동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더 이상했다. 클루니는 매력적이고 잘 생겼고 유명하고 부자였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거대한 새 국가의 탄생을 도울 수 있었다. 영화와 고급 시계, 커피를 광고하던 할리우드의 주연급 배우 중 한 명인 그가 기막힌 솜씨로 수백만 명의 삶과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클루니로선 용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그게 서방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면 터무니없어 보인다.클루니에게 수단 북부에 있는 정부 인사들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수단의 미래는 미국 배우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가 아무리 ‘쿨’해도 말이다. 클루니는 하르툼에 한번 갔지만 실망만 했다고 대답했다. 수단 정부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그를 더욱 분투하게 만들었다. 클루니는 수단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회의를 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고 명확한 도덕적 의무도 인식했다. 클루니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일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문제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본다. 멀리 떨어진 외국 땅에서 할리우드 배우가 그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뭔가? 어떤 외부인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독립을 어떻게 대신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자유와 독립이란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게 아닌가? 뼈의 도시그로부터 21개월 뒤 남수단은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2013년 12월 15일 남수단 육군의 파벌 중 누에르족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에르족 일파는 딩카족 일파가 살바 키이르 남수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을 강제로 무장해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병영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시가전으로 확대되면서 군인 500명이 사망했다.딩카족 군인들은 누에르족 군인과 민간인들을 색출해 학살하기 시작했다. 누에르족 군인들이 반격했다. 각각의 민병대가 가가호호 수색하며 누에르족과 딩카족을 서로 색출했다. 수천 명이 처형돼 거리에 그대로 버려졌다. 도망가던 어린이들도 총에 맞아 숨졌다. 아버지들은 가족 앞에서 목이 잘렸다. 여성들은 납치돼 성폭행당했다. 그 사건으로 세계는 20년 전 르완다에서 100일 동안 거의 100만 명이 학살당한 기억을 되살렸다. 르완다에서처럼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했고 교회, 병원, 학교, 유엔기지 외곽으로 피신한 여성과 어린이는 집단 학살됐다.올해 4월 15일과 16일 누에르족 민병대가 북부 도시 벤티우를 공격해 수백 명을 학살했을 때 유엔은 현지 라디오 방송의 선동이 도화선이었다고 발표했다. 르완다 사태 당시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다음 날 딩카족 민병대가 보르의 유엔 기지를 습격해 누에르족 난민 58명을 살해했다. 20년 전 세계는 다짐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지금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은 묻는다. 그게 빈말이었는가? 제2의 르완다 사태가 올까?2014년 4월 중반 내가 주바에 도착했을 때 남수단의 폭력사태는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도 세 곳이 폐허가 됐다. 약 4만 명이 희생됐다.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고, 그중 25만 명이 나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렸다. 유엔은 남수단인 700만 명에게 식량 구호가 필요하며 어린이 4만 명이 몇 달 안에 기아로 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 수치로 볼 때 남수단의 붕괴 속도와 심도는 시리아보다 더했다. 그러자 클루니는 위성의 초점을 남부에 맞췄다. 특히 주바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국경 도시 말라칼이 그 표적이었다. 누에르족 반군들이 말라칼을 세 차례 점령했고, SPLA가 세 차례 탈환했다. 지난 2월 반군들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 피해가 가장 컸다. 클루니가 제시한 이전과 이후의 위성사진들은 이전에 양철집과 초가집 수백 채가 있었던 곳에 검은 자국밖에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말라칼과 그 주변에서 추가적인 전투가 임박한 듯했다. 남수단 정부는 국고 수입의 98%를 말라카 부근의 유전에 의존한다. 남수단의 최초 부통령인 리에크 마차르 테니 두르곤은 그 유전과 주바를 점령한 뒤 키이르를 타도하겠다고 선언했다. SPLA가 그를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유엔 비행기로 말라칼로 갈 계획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남수단의 기자 마딩 응고르가 SPLA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1시간 안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운용하는 흰색 일류신 76 수송기의 화물칸에 올라탔다.그 전날 밤 주바에서 응고르와 나는 말라칼에서 방금 돌아온 정부 관리를 만났다. 그에게 그곳 상황을 물었다. “대부분 뼈뿐이죠. 그들이 거리와 교회, 병원에서 양민을 학살을 하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어요. 개와 새들이 뼈가 있는 곳에 몰려들었어요. 이제 말라칼은 없습니다.”아니나 다를까 말라칼에 도착한 뒤 우크라이나인들이 수송기의 옆문을 열어젖히자 즉시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말라칼이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1.6㎞ 떨어진 유엔 기지에 머물기로 했다. 기지의 도로에는 로프로 만든 침대 수백 개가 야외 기숙사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엔 비닐 봉지, 양철 접시, 자동차 바퀴 커버, 대나무 막대기가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판자, 함석 조각, 플라스틱 의자를 계속 갖다 쌓았다. 대머리황새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응고르는 다른 SPLA 친구에게 연락했다. 지프 한 대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지프가 도시로 향하는 간선도로로 들어서자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고 조용히 시작됐다. 여기엔 박살 난 출입구, 저기엔 불에 탄 오두막집. 작은 가판대에서 비닐 봉지와 종이가 거리로 날아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라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검게 탄 땅과 무너진 벽, 구부러진 함석판뿐이었다. 초강력 태풍이 지나간 듯했다. 응고르와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걸었다. 재에 발이 푹푹 빠졌다. 양쪽 벽은 다 사라지고 금속 대문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벽돌집이 아직 서 있었지만 창은 전부 부서졌고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화장터와 다름없었다.우리는 나일 강변에 있는 말라칼 항구로 차를 몰았다. 지난 1월 초 수용인원을 초과한 페리가 이곳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폭력사태를 피해 탈출하려던 난민 200명 이상이 익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다수는 어린이였다. 일부는 페리를 타지도 못한 것 같았다. 항구 정문 부근에 작은 두개골이 작은 정강이뼈 곁에 놓여 있었다. 항구 안에는 뼈가 더 많았다. 팔뼈, 다리뼈, 또 다른 작은 두개골 곁에는 검은 실크 머리띠가 놓여 있었다. 걸어가던 내 발에 뭔가가 걸렸다. 아주 작은 꼬리뼈가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갔다.응고르와 나는 유엔 기지로 돌아와서 난민들을 취재했다. 청록색 유니세프 모자를 쓴 에르네스트 우루아르(52)는 영어를 좀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직후 병원에 있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살기 위해 그곳으로 피신했어요. 열여섯 살, 열네 살짜리 두 아들은 크리스마스 날에 카누를 타고 탈출하려다가 익사했고요. 남은 가족은 아내와 장모, 그리고 나뿐이었어요. 우리가 그 병원에 있을 때 반군이 세 번째로 그곳을 공격했어요.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였어요. 부상자들도 장모도 그들의 손에 죽고 말았어요. 그들은 ‘누가 딩카족인가? 누가 누에르족인가? 누가 실루크족인가?’라고 물었어요. 딩카족은 그 자리에서 쏴 죽였어요.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어요"소수 부족인 우루아르는 아내를 데리고 다른 난민 수백 명과 함께 성당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반군이 도시를 약탈했어요. 그 다음 그들은 여자들을 찾으려고 성당에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여자들을 성폭행했어요.” 그런 만행이 얼마나 오래 진행됐는지 내가 물었다. “반군이 도시를 점령한 두 달 내내 그랬어요.”“두 달 동안이라고요?” 내가 다시 물었다. “반군이 두 달 동안 성당을 성폭행 캠프로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10분 거리에 평화유지군이 가득한 유엔 기지가 있는데 말이에요?”“예, 두 달 동안 그랬어요.” 그가 대답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젊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들은 ‘너, 너, 너 나와’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그 여자들을 데리고 가서 성폭행했어요. 어느 날 밤 그들은 일곱 명을 데려갔는데 두 명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 누이와 다른 식구들도 전부 살해됐어요.”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혼자 도망쳤어요.” 그러고는 불쑥 떠나버렸다.우루아르는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요. 그들이 여자들을 데려갈 때 남자라고 나서서 항의하려고 하면 그들은 구타하고 죽였어요. 두 달 동안 그랬죠. 죽이고 구타하고 성폭행했어요. 그 다음 유엔군이 들어왔어요. 반군이 떠난 뒤에 말이에요. 그들은 상황이 조용해질 때까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들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기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우루아르에게 유엔이 제공하는 보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이런 파괴행위에 일조했어요. 그들은 너무 늦게 우리를 구했어요.”그날 오후 응고르와 나는 말라칼을 탈환한 존슨 고니 빌리외 SPLA 장군을 만나러 갔다. 거리에는 SPLA 군인 수백 명이 빈 집에서 가구를 들고 나와 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언급하자 장군은 즉시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부하 중 약탈자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장군에게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그는 정확한 수치가 없다며 수천 명이라고 말했다. 개들이 시신들을 많이 물고 갔고, 두개골이 쪼개지고 수백 구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게 유엔의 민간인 보호 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대처가 느리죠”라고 그가 대답했다.오후 늦게 기지로 돌아가면서 흙더미가 많은 곳을 지나쳤다. 곧 그게 뭔지 깨닫고 SPLA 운전병에게 차를 돌려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곳은 공동묘지였다. 묘지 정문 바로 안쪽에 최근에 파낸 거대한 흙더미가 있었다. 가로와 세로가 20m쯤 됐다. 그 뒤와 양쪽으로 그런 흙더미가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흙더미를 세어 보았다. 큰 흙더미가 13개, 중간 크기가 24개, 작은 흙더미가 100개 이상이었다. 공항에서 그랬듯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 흙더미 위에는 반쪽만 남은 두개골이 얹혀 있었다. SPLA 운전병에게 각 흙더미에 시체 몇 구가 묻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약 이삼십 구”라고 그가 대답했다.응고르가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은 SPLA가 그 묘지를 판 게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때쯤 우리는 알았다. 땅바닥에는 유엔기지 입구에 있던 것과 같은 중장비의 넓은 바퀴 자국이 찍혀 있었다. 세계가 남수단인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했지만 2년 반 뒤 세계는 그들의 시신을 불도저로 집단 묘지에 파묻고 있었다. 백인 구원자들1994년 4월 르완다 대학살 뉴스가 전해졌을 때 미국과 국제사회는 두 손 놓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일하던 젊은 관리 수전 라이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중에 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맹세했다. 필요하다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다.”르완다 사태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9년 전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는 코소보에서 유엔 특사로 활동했다. 그때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세르비아계를 표적으로 공습을 단행했다. 당시 그곳에는 젊은 기자 사만 사 파워도 있었다. 파워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데 멜로의 전기 ‘지옥에서 비롯된 문제: 미국과 대량학살의 시대(A problem from Hell: America and the Age of Genocide)’를 써서 200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 책에서 파워는 서방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도덕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1999년 데 멜로는 동티모르에서 유엔 행정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인 동티모르인들을 공격하는 인도네시아 보안군과 무슬림 민병대를 적극 저지했다. 2003년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레비는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지했다. 당시 영국 정부 외에는 그 전쟁을 지지하는 유럽인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급진 이슬람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도주의적 대의라고 외쳤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를 창설해 199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베르나르 쿠시네르는 2007년 프랑스 외무 장관이 된 뒤 프랑스의 대테러전 반대 입장을 뒤집었다. 이라크전과 뒤이은 유혈 종파분쟁은 서방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데 멜로도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유엔 특사로 활동하다가 2003년 유엔 사무소를 공격한 폭탄테러로 직원 20명과 함께 숨졌다. 그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 분파는 데 멜로가 동티모르에서 이슬람주의 민병대의 활동을 차단한 데 대한 복수라고 선언했다.세계에서 으뜸가는 인도주의자였던 데 멜로의 죽음으로 동료들의 결의는 더 굳어졌다. 2005년 유엔 세계정상회의는 인도주의적 개입을 유엔의 공식 원칙으로 채택했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이유와 의무를 국제법화한 것이다. 그 원칙에 따르면 한 국가가 자국에서 극단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하거나 그런 행동을 막을 능력이 없을 때는 주권을 몰수당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외부 세계가 외교와 제재,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동원해 재앙을 막는 행동을 취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취해야 한다.교수가 된 파워는 같은 해 서부 수단의 다르푸르 반군과 수단 정부 사이의 내전에 관해 젊은 미국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에 자문을 제공했다. 다르푸르 사태는 또 다른 인도주의의 시금석이었다. 수단은 오랫동안 인도주의자들의 초점이었지만 9·11 사태 후 수단 내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수단의 남북 분쟁을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싸움으로 규정한 미국의 우익 기독교인들이 그 주류를 이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남수단을 돕는 구호단체를 설립했다.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돈가방을 들고 가서 무슬림 주인들로부터 기독교인 노예들의 자유를 사주었다. 곧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남북 수단 사이의 평화협상을 중재했다.파워는 다르푸르와 수단에서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일했다. 프렌더가스트 역시 미국의 아프리카 개입을 지지했다. 그는 수단에서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를 위해 남수단 내부의 경쟁 민병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잔혹한 폭력행위에 관해 보고서를 쓰면서 인도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프렌더가스트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아프리카 문제 책임자로 일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 장관의 보좌관을 지냈다. 그후 국제위기그룹(ICG)에서 일하다가 ‘이너 프 프로젝트(Enough Project, 집단학살과 반인도주의 범죄 방지 프로젝트)’를 공동 설립했다. 거기서 프렌더 가스트는 할리우드 엘리트층과 인도주의 운동가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아 클루니(수단), 앤절리나 졸리(난민), 매트 데이먼(물), 벤 애플렉(콩고), 돈치들(집단학살과 환경) 등의 인도주의 활동을 돕기 시작했다.오바마가 대통령에 선출되자 인도주의자들은 정부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바마는 사만사 파워를 국무부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가안보회의 선임국장으로 발탁했고, 수전 라이스를 유엔 대사로 임명했다. 2011년 라이스와 파워는 백악관에서 리비아 공격을 주장했다.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2013년 오바마는 라이스를 힐러리 클린턴 국무 장관 후임으로 앉히려 다가 결국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기용했고, 파워는 라이스 후임으로 유엔 대사를 맡았다.1960년대 운동권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목표로 시작된 인도주의가 50년 뒤 서방 외교정책의 초석이 된 것이다. 사전에 실패한 국가인도주의자들을 향한 가장 흔한 비난은 그들의 노력이 종종 구제 받는 쪽보다 구제하는 쪽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를 추구하는 외국인들을 수없이 받아 들였다. 개성화란 넓은 세계로 나가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을 가리킨다.서방에서는 칭찬 받을 만한 통과의례이지만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조역이 돼버린다. 남수단인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자유를 얻었지만 그후의 사태 발전 대부분을 만들어낸 쪽은 외국인들이었다. 이론상으론 남수단은 독립으로 번창하는 미래를 약속받았다.수단의 유전 대부분이 남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 남부는 거대한 수드 습지를 둘러싼 넓고 비옥한 땅으로 축복 받았다. 두당 250~400달러인 소가 사람보다 더 많다. 인도주의자들에겐 가장 순수하고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무에서 시작해 멋지게 이뤄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을 말한다.나는 2009년 초 처음 남수단을 찾았다. 그때도 국가 건설 계획을 두고 너무도 이상적이고 지나치게 야심적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5년 전이었지만 주바는 사하라 사막 남부 변방의 특징인 바 위 언덕과 텅 빈 평지에 비닐 봉지로 지붕을 씌운 움막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회사 몇 개, 경찰 몇 십 명, 학교 몇 개, 낡은 병원 하나, 공무원 수백 명이 있었다. 구호요원 수천 명이 그곳에 도착하면서 주바의 포장도로에서 가끔씩 흰색 SUV들로 교통체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외국인들의 돈을 노리는 매춘부들이 가득한 술집 몇 개가 생겨났다. 하지만 하나의 국가가 되기엔 무리였다. 기반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외교관들은 대부분 새 국가 건설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특이한 상태를 일컫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사전에 실패한 국가(pre-failed state)’였다. 미국 이 남수단에서 최대의 단일 주자였다. 다름 아닌 키이르 대통령이 미국의 영향력을 상징했다. 그는 부시가 선물 한 카우보이 모자를 어디서나 쓰고 다녔다. “남수단은 미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당시 주바의 한 서방 외교관이 내게 말했다.새로 구성된 내각의 주된 관심사는 석유 판매수입을 자신들이 나눠 갖는 것이었다. 2011년 나는 여러 외교관들로부터 남수단 정부가 2005년 이래 석유 판매수입 140억 달러를 착복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남수단은 2012년 북부 수단을 공격해 그곳에 남아 있는 석유를 훔치려 했다. 기자들이 구타당하고 투옥되고 살해됐다. 키이르가 새 국가를 위해 제정한 헌법은 그에게 독재 권력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남수단 지도자들이 서로 반목했다. 딩카족과 누에르족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도 매년 토지와 가축 소유권을 두고 부족간의 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의 중요성과 선례의 필요성을 생각할 때 인도주의자들은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들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런 결과는 없었다. 자유는 속성상 다른 사람을 대신해 얻어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남수단 지도부는 새로 얻은 자유를 서로 죽이는 자유로 해석했다. 세계는 경악했다. 그러자 키 이르와 남수단 지도자들은 세계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그들에게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수단 정부만이 아니라 과거의 친구들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다고 그들은 해석했다. 키이르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주장에 특히 참지 못했다. 2012년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키 이르 남수단 대통령에게 북부 수단 침공을 중지하라고 촉구하자 키 이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의 수반입니다. 병력을 철수하지 않겠습니다.”2014년 9월까지 외국 구호기관들은 닥쳐오는 기아를 몇 달 동안 경고했다. 그러나 키이르 정부는 외국인들이 남수단에서 떠나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 달 안에 남수단 의 모든 기관과 사업체의 임원직 중 80%가 남수단인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포기하고 철수?지난 4월 주바에서 프렌더가스트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 자체가 폭력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에 남수단이 새로운 국가로 순조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기대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의 인도주의적 개입 방식이 “크게 잘못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남수단이라고 덧붙였다.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남수단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지금까지 유엔은 남수단의 살육을 막으려고 작전을 펼치기는커녕 그곳에 있는 자체 기지마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유엔은 전쟁이 아니라 국가 건설을 위해 파견됐다”고 프렌더가스트는 말했다. “따라서 유엔보다는 전투를 마다 하지 않는 군대가 필요하다.” 긴급구호 노력도 마찬가지로 미흡했다. 지난 9월 기준으로 집을 잃은 남수단 주민이 약 170만 명이었다. 지난 5월 우기가 닥치면서 주바에 콜레라가 퍼져 130명 이상이 사망 하고 약 6000명이 감염됐다. 그중 다수는 주바의 유엔기지 외곽에 텐트를 치고 기거하던 난민들이었다. 콜레라 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곧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구호기관들은 영양실조와 기아가 늘어나고 있 으며 몇 달 안에 전면적인 기근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연말까지 남수단 인구 1200만 명 중 절반이 국내에서 난민이 되거나 해외로 탈출하거나 굶주리거나 사망할 것”이라고 안보리에 경고했다.따라서 그냥 철수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고 주바의 몇몇 고참 외교관들은 말했다.수단에서 수십 년을 지낸 한 고참 서방 외교관은 남 수단에서 세계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많은 생명을 구했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세대에 걸친 외국의 노력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 않았는지 물을 수도 있 다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요?”라고 그는 되물었다. “만약 우리가 20년 전에 철수 했더라면 이 나라가 지금쯤 정치적으로 더 성숙했을까요?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몇 분 뒤 그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담 높은 저택의 철문까지 응고르와 나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곳 외교관들은 더는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그러나 그 모든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자들 이 노력을 중단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 외교관들, 유엔 관리들, 구호요원들, 운동가들은 전부 책임을 통감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실패했다고 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의에 회의를 가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2012년 나일 강변에서 클루니를 만났을 때 왜 남수단을 계속 방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시작했을 때 잘 되지 않는다고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다고 느낀다. 그런 잘못을 안고 살아갈 순 없다. 따라서 계속할 수밖에 없다.”클루니는 자신과 특히 가까웠던 남수단 관리가 주미 대사를 지낸 에제키엘 롤 가트쿠오스라고 말했다. 내가 주바에 있을 때 그는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후 풀려났다). 가트쿠오스는 지난해 12월의 유혈 사태를 부추겼다고 지목된 정부 인사 4명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법정에 출두할 때를 제외하고는 교도소에서 지냈다.응고르와 내가 주바에 있을 때 그 재판 중 하나가 열렸다. 우리는 일찍 도착해 법정 입구에 자리 잡았다. 그 네 명이 차로 도착해 군인과 보좌관들에 둘러싸여 지나 갈 때 응고르는 내가 준비한 몇 가지 질문을 적은 쪽지를 가트쿠오스의 변호사 손에 슬쩍 집어주었다.내 질문은 이랬다. “어떤 사람은 외국인들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국제사회의 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가?” 그 변호사가 다음 날 쪽지를 돌려주었다. 가트쿠오스의 답변이 내 질문 아래 흘려진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남수단의 위기를 해결할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보탬이 되도록 조지 클루니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2014.10.1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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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Russia, a Return to Arms 러시아, 다시 핵무장 하나 러시아의 핵 미사일이 다시 동유럽 땅을 밟을까?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 방어기지 계획에 러시아도 맞불을 놓을 태세다. 미국은 폴란드와 체코에 요격 미사일과 미사일 추적 레이더를 설치할 계획이다. 주 벨로루시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수리코프는 지난주 러시아가 작지만 충실한 이웃국 벨로루시에 “핵시설”을 설치하는 등 “워싱턴에 맞선 대응”을 함께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옛 소련 시절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에 설치된 최후의 미사일이 제거된 지 10년이 넘었다. 리처드 루가와 샘 넌 상원의원이 발의한 미국이 지원하는 무장해제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의 치욕적인 나날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크렘린은 무기를 버리기보다 손에 꼭 쥐고 싶은 듯하다. 러시아의 국방 예산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7년간 세 배로 뛰었다. 그중 일부 예산은 차세대 미사일 잠수함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편성됐다. 러시아는 이 미사일이 비행하면서 미국이 구상 중인 미사일 방어망을 자유자재로 피해간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는 냉전시대를 연상시키는 군사훈련을 강화한다. “곰”이란 애칭의 Tu-95 장거리 폭격기는 미국 동부 상공으로 주기적인 순찰 비행을 재개했다. 이 폭격기는 핵미사일 장착이 가능하다. 최근 “곰”들이 북해와 태평양을 순찰하자, 나토와 미국 사령부는 스코틀랜드와 괌의 공군기지에서 제트기들을 긴급 발진시키기도 했다. 러시아가 이렇게 급격히 재무장 태세를 갖추는 이유가 뭘까? “주위를 끌려는 다소 유치한 발상”이라고 지난주 군비 축소 협상을 재개하려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루가 의원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푸틴은 ‘우린 이제 돈도 많고, 완전히 재기했다’는 식이다.” 모스크바 소재 미국·캐나다 연구소의 세르게이 로고프 소장은 푸틴이 “존경”을 얻으려고 하지 “실제 대립 상태”를 원하진 않는다고 주장했다. 모순이라고? 맞다. 하지만 제2의 냉전보다야 낫다. OWEN MATTHEWS Popular Fronts 이슬람 급진단체도 친환경?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주의자들은 한동안 이슬람 저항단체 하마스를 모방했다.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서 인기를 얻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미 실패한 재난 구조나 빈민 구제책이 그 예다. 이제는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류 환경주의자의 명성을 등에 업는 전략을 펴는 듯하다. 지난 7월, 인도네시아에서 원리주의 이슬람법을 적용한 샤리아 통치를 주장하는 어느 이슬람주의 상부단체는(지도층이 공개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지한다) 미국 탄광회사와 부시 행정부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국제적인 환경단체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인도네시아 사무국’ 이름이 적힌 포스터를 흔들었다. 이 사건 때문에 정치계와 언론은 환경단체가 이슬람 급진단체에 동조한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지구의 벗 측은 자신의 로고가 허가 없이 사용됐다면서 연관 관계를 부정했다. 하지만 사회 행동주의를 빙자해 활동을 펼치려는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의 행태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JOE COCHRANE BY THE NUMBERS 카지노라면 마카오 베네치안 마카오 리조트 호텔이 지난주 개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카지노가 있다. 하지만 4747㎡에 달하는 이 호텔은 마카오 도박업계의 빙산의 일각이다. 70% 마카오 정부 총세입 중 카지노 도박업체가 부담한 세금의 비율. 26개 2002년 마카오 정부가 카지노 산업 개방을 선언한 이래 새로 문을 연 카지노의 수. 24억 3000만 달러 2007년 2분기 마카오 카지노 산업이 벌어들인 총소득. 50%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카지노 수입 증가 비율. Oprah's Obama Blowout 오프라 윈프리의 오바마 밀어주기 오프라 윈프리는 대통령 후보 출마에 관심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당선을 돕는 일은 어떨까? 9월 8일 오후, 윈프리는 2008년을 향한 가장 화려한 모금행사를 주최할 예정이다. 캘리포니아주 몬테시토의 자택에 1500명의 손님을 초대해 버락 오바마의 민주당 경선 승리를 후원하는 모임을 연다. 입장 티켓은 경선에서 개인 기부 법적 최대 금액인 1인당 2300달러에 판매된다. 윌 스미스, 존 트라볼타, 제이미 폭스, 할리 베리 등 할리우드 스타들도 참석한다. 스티비 원더와 윈프리의 친구인 가스펠 가수 비비 와이넌스가 공연한다. 윈프리와 가까운 한 소식통은 오바마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2005년부터 윈프리가 그와 친분을 쌓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시카고에서 휴스턴까지 함께 날아가 카트리나 허리케인 난민들을 방문했다. “오프라가 오바마의 진실된 면모를 본 듯하다… 그리고 크게 감동받았다”고 소식통들은 덧붙였다. 많은 할리우드의 젊은 흑인 배우와 제작자들도 오바마를 지지한다. 장년층은 힐러리 편이다. 하지만 오프라 모금 행사의 인기는 대단해서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까지 입장 티켓을 구입한다. “농담하나?” 여배우 할리 로빈슨 피트가 말했다. “오프라가 초대하면 어디라도 가는 거다.” 그래도 오프라의 친구가 다 참석하진 않는다. 오프라와 오랜 친구 사이로 자택의 일부분을 ‘오프라’라고 이름 붙이기까지 한 제작자 퀸시 존스는 9월 14일 매직 존슨의 집에서 힐러리 지지 파티를 공동 주최한다. “파티 장소가 너무 멋지다. 음식과 음악도 최고급일 것”이라고 존스가 말했다. “하지만 절대 경쟁은 아니다.” 후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ALLISON SAMUELS Princess Diana: A Reputation Revisited 다이애나의 재발견 다이애나는 아름다웠고, 화려했으며 추문에 시달렸다. 그녀의 따뜻한 선행에 수백만 명이 감동받았다. 영국 왕가의 어느 누구도 그녀의 세계적인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말대로 그녀는 “국민의 공주(People’s Princess)”였다. 하지만 성급한 역사적 판단이었나? 그녀의 사후 사학자들이 검증 작업을 계속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주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10주기가 됐다. 그동안 기록을 충분히 검토한 영국인들은 더 이상 그녀가 남긴 유산을 확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견해는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물론 다이애나만의 미덕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 모두와 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사귄 친구들은 종종 정체가 의심스러웠고, 언론 플레이라는 흑마술에 능했다. 그리고 사생활에서는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경향이 있었다. 사실 1997년 그녀가 살았던 켄싱턴궁 밖에 쌓인 꽃다발 더미들과 문상록에 서명하려고 10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던 행렬 등 대중들의 유례없는 추도 열기는 지금 생각하면 약간 민망할 정도다. 평소 감성의 적극적인 표현에 인색했던 영국인들이 잠시 평상심을 잃은 때였다. 요즘에는 다이애나의 사진을 표지에 실어도 잡지 매출이 급등하지 않는다. 그녀의 묘지 방문객들은 크게 줄었다. 사실 영국인들이 추도한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 다이애나는 세간의 화젯거리였던 왕실 결혼이란 일일극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TV 연속극보다 더 흥미롭고 (현실과 괴리된) 얘기였다. 분명한 점은 이제 영국인들은 훨씬 수수하고 늙수그레한 지금 왕실의 모습에 꽤 만족한다는 사실이다. 홍보 전략을 약간만 바꾸자 왕실의 지지도가 회복됐다. 대중은 나라의 수장이 한때 유행을 초월한 모습으로 굳건히 서있기를 바란다. 그 유행이 정치 분야든 고급 패션이든 말이다. 영국 왕실의 인간적인 고뇌를 다룬 영화 ‘더 퀸’에 사람들이 호감을 보인 사례가 좋은 증거다. 언론은 화려한 매력을 선호한다. 하지만 후손들은 종종 성실성을 더 높이 친다. WILLIAM UNDERHILL

2007.09.1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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