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화이트칼라인가? 대부분의 사무직 샐러리맨은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법관이 생각하는 화이트칼라는 조금 다르다. 최근 사법부에서 논의되는 ‘화이트칼라’는 ‘사회지도층’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화이트칼라 범죄’를 ‘사회지도층 범죄’ ‘지배층 범죄’ ‘권력형 범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생산직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를 나누는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개념은 ‘화이트칼라 범죄’ 논란과 정의부터 다르다고 보면 된다. 전국 처음으로 ‘화이트칼라 범죄 양형(量刑) 기준’을 마련한 창원지방법원의 기준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창원지법은 화이트칼라를 ‘세인의 존경을 받고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사’로 정의했다. 구체적인 직종으로는 공무원, 사업주, 전문 경영인, 의사, 변호사, 학교재단 이사장 등을 들었다. 이들이 직무과정에서 저지르는 뇌물죄, 횡령·배임죄 등에 대해 지금보다 더 엄정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게 골자다. 문형배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기업은 자본금 50억원 이상 또는 상장기업의 ‘과장’ 이상 임직원을 화이트칼라로 정의한다”고 설명했다. 문 판사는 “지역별 경제 규모에 따라 화이트칼라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창원보다 경제 규모가 큰 서울의 경우 화이트칼라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개별 판사의 재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창원지방에서 이 화이트칼라 범위에 드는 사람이 뇌물 1000만원이라도 받았다면 집행유예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문 판사의 설명이다.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정한 실형 원칙’. 이런 분위기는 전국적으로 확산 추세다. 창원지법에 이어 부산지법과 전주지법도 유사한 양형 기준을 마련했다. 서울중앙지법 ‘양형연구위원회’는 최근 화이트칼라 범죄를 다루는 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해 연구에 들어갔다. “두산 판결 때 법관으로 치욕” 최근 분위기를 보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사법부 입장은 거의 굳혀진 듯하다.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누린 이들이 행한 범죄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김종대 창원지방법원장)”는 것이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 이용훈 대법원장도 여러 번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검찰과 법원은 왜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이런 칼을 빼들었을까. 법관들은 “국민적인 사법부 비판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한다. 김종대 창원지법원장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단 조치는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법관들이 오랫동안 잠재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공유했던 것이 현재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법의 한 일선 판사는 “두산 판결 직후 언론에 ‘재벌에 또 무릎 꿇은 법원’이라는 제목에 법관들이 큰 치욕을 느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여기서 두산 판결이란 박용성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혐의에 대해 지난 2월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그동안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법당국의 미온적인 양형은 줄곧 비난의 대상이 됐다. 잘 알려진 예만 보자. 분식 규모가 41조원이었던 대우그룹은 강병호 전 사장만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핵심 경영진은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었다. 1조8000억원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진 하이닉스 경영진은 모두 집행유예, 1161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던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징역 3년에 집유 5년, 12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이중근 부영 회장은 징역 3년·집유 5년, 1조9000억원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됐던 최태원 SK회장 역시 징역 3년·집유 5년(현재 상고심 진행 중)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끝내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렸다’고 평가받는 두산그룹 박용성 전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사건에 대해 검찰은 불구속 기소, 법원은 1심에서 집유를 선고했다. “이때 국민의 비난이 쏟아졌고 법관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기업인뿐 아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정치인·고위 공무원·공기업 간부·법조인 가운데 징역형을 받은 10명 중 7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선거법 위반으로 확정 판결된 국회의원 중 의원직이 상실되는 기준인 100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는 비율은 약 25%에 불과하다. ‘불공정한 재판’ ‘유전무죄·무전유죄’. 법관들도 이에 동의한다. 지난해 말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법조인 37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73%가 ‘형사재판이 공정하지 않으며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답했다. 문형배 판사는 이에 대해 “화이트칼라 범죄자는 유력한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 그리고 뛰어난 자문단과 변호인을 활용할 수 있고, 그를 이용해 수사와 유죄판결을 피해가곤 한다”고 설명했다. “법조의 기업 친화적 분위기도 기업가를 범죄자로 처리하지 않는데 일조한다”고도 했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1% 내외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법조계에서는 전체 범죄 비율 중 화이트칼라 범죄를 1% 내외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범죄가 사회적으로 미치는 폐해가 일반 범죄보다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법조계에서 정리되고 있는 화이트칼라 범죄의 특징과 유형은 이렇다. 일단 화이트칼라 범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피해자가 분산되는 경향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인이 횡령이나 배임을 했다고 치자. 누가 피해자인가. 살인이나 강도, 절도처럼 분명히 드러나는 한 사람의 피해자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개인 피해자는 사소한 손실을 보고 해당 범죄자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가는 특징이 있다. 조직적인 화이트칼라 범죄의 경우 책임자도 분산된다. ‘회장부터 부장’까지 관여했다면 누가 해당 범죄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욱이 범죄 자체에 ‘폭력성’이 없다 보니 화이트칼라 범죄자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범죄자인 자신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설사 처벌받더라도 동료 사회에서 어떠한 상징적 제재를 받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상당수 기업에서 화이트칼라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고위 임원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성장과정과 환경 및 사회적 지위가 유사한 사법당국의 온정적 태도도 관대한 처벌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범죄학 측면에서 보면 ‘화이트칼라 범죄’는 엄정한 양형을 하면 예방 효과가 크다고 한다. 생활범죄의 경우 가난 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아무리 엄정한 처벌도 일반 예방 효과를 보장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화이트칼라 범죄 같은 공리적 범죄(법 위반으로 인해 얻는 기대 이익이 법적 제재와 사회적 비난이라는 기대손실을 능가할 때 이뤄지는 범죄)는 처벌이 강화되면 예방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20억원을 횡령해 벌금 3000만원을 받고 집행유예를 받는 경우를 생각하면 쉽다. 일부 통신업체가 줄곧 과징금을 맞고도 불법 마케팅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일반적으로 화이트칼라 범죄는 특정 조직의 공식적인 지원하에 이뤄지는 조직체 범죄와, 사적 이익을 위해 개인 혹은 소수가 공동으로 행하는 불법행위로 나뉜다. 조직체 범죄는 탈세,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상업적·정치적 뇌물, 관권 부정선거, 대학 입시부정 사건 등이다. 직업범죄는 횡령, 권력판매형 공무원 범죄, 공무원 사기·횡령, 변호사의 위증교사, 의사의 과다진료 행위 등 매우 다양하다. 결과적으로 이런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기존 사법당국이 ‘온정주의’ 경향이 짙었다면 앞으로는 ‘처벌 수위’가 올라갈 가능성이 커졌다. 사법부가 계층 가르나 비판도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은 적을 것이다. 김종대 창원지법원장은 “양형 기준을 만들고 13개 시민단체와 간담회를 하면서 참석 인원 25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95%가 지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판사의 재량권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부터 나온다. 특히 일부에서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법’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법관의 독립성 침해가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법관들은 ‘양형 기준’을 법으로 묶는 것에는 대부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사법부의 두 수장(천정배 장관, 이용훈 대법원장)이 직접 나서 챙기다 보니 법관들이 무리한 판결을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최근 정몽구 회장의 구속 영장을 발부한 이종석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단해야 한다는 원칙과 불구속 수사 원칙의 충돌 사이에서 고민했다”고 털어놓은 것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읽힌다. 일부에서는 “양극화 논쟁을 벌이면서 계층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마당에 법 집행마저 계층을 가르는 것은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화이트칼라 범죄’와 관련해 법관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고 있는 문형배 판사는 “미국은 이미 1930년대에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연구가 시작돼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며 “계층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라고 반박했다. 당장 재계의 관심은 이 같은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 방침이 구속된 정몽구 회장에게 적용될 것인가 여부다. 이미 ‘경제 정의론’에 무게가 실렸고, 검찰과 법원이 뜻을 같이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법관들이 스스로 “두산 판결에 치욕을 느꼈다”고 하고, 이런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정몽구 회장이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회장실에 출근하는 일은 당분간 보기 힘들 수도 있다. 창원지법의 ‘화이트칼러 양형 기준’ 들여다 보니 1000만원 이상 뇌물은 모두 실형 뇌물죄 양형 기준 ▶ 뇌물 수수액을 기준으로 한다. ▶ 뇌물 수수액이 1000만원 이상이면 집행유예 아닌 실형선고를 원칙으로 한다. ▶ 1000만원 이하인 경우 6개월 내외 실형선고를 원칙으로 하되 다른 요인을 참작해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하다. ▶ 공무원 신분이 유지되는 선고유예 판결은 지양되도록 한다. ▶ 뇌물을 준 자가 수뢰자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경우 실형선고를 원칙으로 한다. 원칙적 실형사유 뇌물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경우, 뇌물 수수 전후로 부정한 업무집행이 있는 경우, 체계적·구조적·지속적인 비리인 경우, 뇌물을 준 자의 청탁 내용이 부정한 업무집행인 경우, 부패구조의 정점에 있거나 통로역할을 하는 경우, 인사청탁과 함께 부하직원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하는 등의 경우 금액과 관계없이 실형을 선고한다. 업무상 횡령 ▶ 범죄 주체를 기업 간부(대기업은 과장급 이상, 중소기업은 부장급 이상), 종교지도자, 학교재단 임원, 대학교수, 노동조합 간부, 의사·변호사·공인회계사 등 전문직업인으로 한정. ▶ 횡령 등으로 인한 이익 액수를 기준으로 한다. ▶ 피해금액 기준으로 1억원이면 징역 1년 내외, 5억원이면 징역 3년 내외, 25억원이면 징역 5년 내외를 선고한다. ▶ 형사합의가 돼도 실제로 피해 회복이 미흡한 경우 집행유예를 하지 않는다. ▶ 범죄로 인해 얻는 수익의 박탈이 필요한 경우 사안에 따라 벌금형도 병과한다. 집행유예 제한 사유 범인을 석방해 형을 집행하지 않는 경우 일반인이 법 감정상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경우 실제로 피해 회복이 됐더라도 실형선고가 불가피. 손해 액수가 이례적으로 높고 피해자에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 범행의 수단과 방법에서 드러난 범죄적 인성이 법 경시적 태도가 매우 높은 경우. 배임수재죄 ▶ 배임수재액이 3000만원 이상일 경우 형사합의가 되었더라도 실형선고를 원칙으로 한다. ▶ 양형 조건이 평균적이고 배임수재액이 3000만원일 때 표준양형으로 징역 8월 내지 수재액 상당의 몰수 또는 추징한다. ▶ 초범과 학력 여부는 양형에 고려하지 않는다. 원칙적 실형 사유 동종 전과가 있는 경우, 수재자가 적극적으로 요구한 경우, 직위·직무의 중요성이 매우 높고 공공적 성격이 있는 경우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죄 ▶ 해당 법률 18조(5~7년, 재산상 이득액의 2~10배 벌금 병과)에 맞는 엄정한 형의 선고 필요 원칙적 실형 사유 첨단전자제품 등 개발에 참여한 핵심 연구인력이 전직 제한규정을 어기고 경쟁회사나 경관한 법률 위반죄쟁국가로 전직·이주하는 과정에서 영업비밀을 유출하고, 그 결과 경쟁업체나 경쟁국가가 무임승차의 방법으로 개발기간 단축과 비용절감 등의 효과를 거둬 피손해를 가하거나 가할 우려가 있을 경우 초범이라는 사정에 구애 없이 실형선고 및 벌금형 병과를 원칙으로 한다. 양형 기준의 효력 ▶ 해당 재판부에 권고적 효력을 가지고, 해당 재판부는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양형 기준을 벗어난 형을 선고할 수 있으며, 다만, 판결문에 양형 이유를 자세히 기재함으로써 그 근거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주기적으로 양형 기준의 적용 여부, 양형 기준의 수정 필요성을 관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