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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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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로 억압받던 1984..위기 속에서 찾은 기회

산업 일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걸 4번이나 반복했다. 긴 시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1984년 ‘푸른 쥐의 해’ 갑자년(甲子年)에 창간돼 국내 경제의 방향성을 제시했던 ‘이코노미스트’의 시간도 벌써 40년이 흘렀다.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그 시절을 되짚어 보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를 조금은 더 안정적으로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1980년대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시기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 여파와 국내 정치 불안 등이 맞물리면서 위태로웠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저금리·저유가·저달러 등의 영향으로 경제 성장에 속도가 붙었다. 일례로 1986년부터 3년간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1%를 상회했다.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은 침체기에서 회복 및 성장기로 가는 과도기였다.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고, 서민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기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한 혁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4년 현재 고물가·고금리·국내외 정세 불안 등의 영향으로 서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새로운 변화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지만 1984년과 2024년은 어떤 점에서 닮은 부분이 있다.그 시절을 돌아보면 낯익은 것들도 눈에 보인다. 그해 처음 출시돼 현재까지 판매 중인 식료품들이 그렇다. 대표적으로 ▲농심 ‘짜파게티’ ▲동양제과(현 오리온) ‘고래밥’ ▲한국야쿠르트유업(2012년 계열 분리 팔도에서 판매) ‘팔도 비빔면’ ▲롯데제과 ‘칸쵸’ 등이 있다.당시 물가는 어땠을까. 시대별 물가 흐름을 볼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짜장면 값이다. 이를 보면 그 시절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고급 음식으로 분류됐던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한국물가정보 집계 기준)은 572원이었다. 현재 짜장면 한 그릇의 평균 가격은 7069원 정도다. 금값은 g당 1만517원, 쌀값은 80kg 기준 6만1428원이었다.1984년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5060세대는 당시를 회상하며 “찢어지게 가난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해 1인당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GNI)은 2300달러(약 317만원)에 불과했다. 국민총소득은 국민이 국내외 생산활동에 참여하거나 자산 제공을 대가로 받은 소득의 합계를 말한다. 국민 소득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만든 경제지표다. 당시 한국의 GDP 수준은 세계 상위 50위 내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은 1987년 이후부터 50위권에 포함됐다.소득 수준이 높은 그룹에 속하는 현대·럭키금성·삼성 등 대기업 신입의 월급(대졸 기준)은 29만원에서 30만원 사이였다. 이들을 제외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일급은 500원에서 800원 사이였다. 하루 일하면 짜장면 한 그릇을 겨우 사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인 3만3745달러(약 4646만원)와 비교하면 격차가 상당하다. 현재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은 14만~18만원 정도다.사회적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제5공화국, 당시 군부정권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다.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등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작품 ‘1984’도 떠오른다. 독재 권력 아래 저항하다 처참하게 사라지는 개인의 모습을 매우 비관적으로 그려낸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말) 소설이다.해당 소설은 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집필한 미래 소설이다. 전체주의(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해 모든 영역에서 통제하는 것) 체제를 비판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사회주의자였다. 작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통치하기 원했던 소련식 체제에 회의감을 갖고 1984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1984년 한국의 모습은 이 소설과 비슷하다. 한국은 독재 정권 하에 통제당했다. 그 시절 지구촌엔 어떤 일이1984년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사건이 유독 많았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 대항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가 성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민정당사 농성 사건’이다. 1984년 11월 14일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 소속 대학생 264명은 민주정의당 중앙당사를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노동악법 개정·선거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농성 약 12시간 만에 경찰병력 등의 투입으로 해산됐다.대규모 인명 피해를 불러온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도 있었다. ‘서울 대홍수’ 사건이다. 1984년 8월 31일 서울·경기·충청 일대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태풍 준(June)의 영향으로 5일간 폭우가 계속된 것이다. 한강은 위험수위인 10.5m를 넘어섰다. 도로 곳곳이 침수됐고, 휴교령까지 떨어졌다. 이 사건은 사망자 189명·실종자 150여 명·재산 피해 1300억원·이재민 23만명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불러왔다. 당시 인재의 요인이 많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사건 직후 북한이 수재 복구를 위한 지원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정치적으로 보면 한일 관계 개선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합의 이후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같은 해 7월 7일 한일 양국 외무장관들의 합의로 이뤄진 공식방문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1년 전 한국을 방문한 것에 대한 일종의 답방이었다.외교부가 2015년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과 일본에서 만난 히로히토 일왕은 “양국의 불행한 역사는 진심으로 유감이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의 상징인 일왕의 말이라 의미하는 바가 더욱 컸다.이외에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6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5월 3~7일) ▲LA올림픽 종합순위 10위(7월 28일~8월 12일) ▲남북회담(11월 15일, 20일) ▲소련인 마투조크의 판문점 망명 사건(11월 23일) 등이 있었다.그해 해외에서도 굵직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16년간 인도를 이끌어온 인디라 간디 수상(66세)이 10월 31일 시크 교도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됐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1월 6일 선거에서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11월 12일에는 미국의 유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세계 최초로 고장난 통신위성을 회수하는 데 성공하며 우주개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월 3일 인도 보팔시에서는 유니언 카바이드라는 다국적 기업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돼 2500여명이 사망했다.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첫걸음경제적으로 보면 1984년은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한 시동이 본격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1981년 발표한 증권시장 국제화 계획을 차근차근 이행하고 있었다. 1984년 1월 재무부는 종합금융회사의 회사채 상장을 허용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코리아펀드가 상장됐다.표류하던 부동산 신탁제도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도 1984년이다. 당시 정부는 모든 시중은행에 신탁업 겸업을 처음 허용했다. 당시 전체 신탁 규모에서 부동산 신탁이 차지하는 비중은 0.0001%로 크지 않았다. 남에게 자신의 토지·자산을 관리 및 처분하게 하는 것이 생소했던 것이다.1984년은 한국과 글로벌 기업의 반도체 격차를 단축한 시기다. 이전까지 10년 이상 벌어졌던 국내외 반도체 산업의 격차가 4~5년 수준으로 좁혀졌다고 업계는 평가한다. 그해 3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대단위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생산 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 세계에서는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동한 첨단 반도체 공장이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직전 해(1983년)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반도체를 월 600만 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당시 화폐가치로 1000억원을 투자해 기흥 공장을 완성했다. 그해 말 럭키금성의 반도체 회사인 금성반도체는 64K D램 양산 및 판매를 개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이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반도체가 안착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현대전자산업(현 SK하이닉스)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설립된 이 회사는 1년 뒤인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반도체 1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에는 자체 개발한 16K S램을 시범생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 제조업 중 하나인 자동차도 1984년에 한 단계 도약했다. 독자 기술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첫 번째 자동차 ‘포니’로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976년 1월 시판된 현대차 포니는 단일 차종 기준 국내 최초로 생산 대수 50만대를 돌파했다. 8년간 포니는 국내 36만5207대, 수출 15만3281대 등 총 51만8488대가 생산·판매됐다. 한국의 포니가 세계의 포니로 발돋움한 해였다. 그해 현대차는 총 1억6600만 달러의 승용차를 수출했다. 자동차를 제작하기 위해 수입한 부품액(납품계열사 포함) 1억3200만 달러보다 3400만 달러를 더 수출한 것이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로서는 처음으로 무역 흑자를 달성했다.한국이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IC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해가 1984년이기도 하다. 당시 통신 불모지였던 한국에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다. 포문을 연 것이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다. 이 회사는 1984년 처음으로 카폰(차량 내 설치된 전화) 서비스를 공식 개시했다.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는 일찍이 카폰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은 미국 벨시스템(AT&T)이 갖고 있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 각료(장관) 관용차에 카폰을 도입했다. 당시 가격은 1000만원을 웃돌았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내놓은 카폰의 가격은 400만원 수준이었다. 이전보다 가격이 많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격 부담은 컸다. 당시 현대차 포니의 가격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다소 무모했던 이 도전은 성공했다. 오늘날 SK텔레콤을 국내 1위 이동통신사업자로 도약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1984년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현실이 됐다. 정확히 40년이 흐른 지금, 경제 위축·정치 갈등·세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2024년.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의 위기도 우리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구절이다.

2024.05.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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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마지막 추징금 55억원 환수...나머지 867억원 끝내 미납

정책이슈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마지막 추징금 55억원이 국고로 환수될 예정이다.4일 법조계에 따르면 교보자산신탁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상대로 제기한 공매대금 배분 취소 소송은 지난달 30일 원고 패소로 마무리됐다. 교보자산신탁은 지난달 2심에서 패한 뒤 상고하지 않았다.해당 소송은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교보자산신탁에 맡긴 경기 오산 소재 임야 5필지 중 3필지에 해당하는 공매대금 추징 과정에 진행된 것이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내란 및 뇌물수수 등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과 2205억원의 추징금 처분을 받은 바 있다. 검찰은 2013년 추징 판결을 집행하기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오산시 임야 5필지를 압류했다. 국세청은 2017년 추징금 회수 목적으로 오산시 임야 5필지를 공매에 넘겼다. 이 과정에서 공매를 진행한 주체가 이번 소송의 피고인 캠코다. 공매 이후 추징금으로 배분된 금액은 75억6000만원이다.교보자산신탁은 압류 처분 무효를 위한 행정소송과 오산시 임야 5필지 중 3필지에 대한 공매대금 배분 취소 행정소송을 각각 제기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7월 검찰의 압류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해당 판결 이후 오산시 임야 5필지 중 2필지에 해당하는 공매대금 20억5200여만원이 국고로 환수된 상황이었다.공매대금 배분 취소 소송이 원고 패소로 끝남에 따라 나머지 3필지에 대한 공매대금 55억원의 국고 환수도 가능해졌다.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마지막 추징금이다. 아직 환수되지 않은 추징금은 867억원에 달하지만, 지난 2021년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으로 추가 추징이 불가능해졌다.

2024.01.0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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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동자탄압·임금억제로 물가 안정…조작사건도 많아

정책이슈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대상엔 노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불순분자로, 그들의 파업·집회를 사회혼란으로 여겼다. 정권에 대항하는 노동운동가들을 삼청교육대에 강제수용하는 등 인권유린은 다반사였다. 심지어 근로자 임금 인상 억제를 강제해 국가 차원에서 물가 안정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1980년 9월~1988년 2월)는 앞서 박정희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96년 총 7차) 중 5차(1982~1986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경제개발 계획은 5차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0~1970년대에는 먹고 사는 생존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1980년대엔 자유·문화·복지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을 이어나가 박정의 정부를 잇는 적통 정권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회 변화를 반영해 신군부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정권의 안착을 도모했다. 그 예로 국풍81 축제, 한국프로야구·축구 창설, 야간통행금지 해제,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진행했다. 사회·근로·연금·의료 관련 복지제도도 개선해나갔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농어촌을 떠나는 이농과 대도시 집중화가 심화하고, 소득불평등과 도시빈민이 증가하던 사회구조 변화도 복지 확충의 한 배경이 됐다. 근로복지 분야에서는 1984년 최저임금제 시행 방안, 1986년 의료보험 전국민 확대 방안과 국민연금제도·최저연금제 도입 방안, 1986년 최저임금법 제정, 부당 노동행위 처벌을 담은 노동조합법 개정 등을 발표했다. 최저임금제는 195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근거를 마련했으나 기업주들의 반발과 사회여건 부족으로 보류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 1986년 국민복지 증진의 일환으로 도입을 결정, 그 해 연말에 법을 만들어 정권 말기인 1988년 시행에 들어갔다. 최저임금제를 통해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도록 강제성을 못박았다. ━ 사회복지망 확충으로 도시빈민·소득불평에 대응 전두환 정부는 사회복지제도도 확충했다. 당시 산업화를 좇아 농어촌을 떠난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의 하층민을 형성하면서 소득불평등과 고령인구·도시빈민 증가, 도시화·핵가족화 확산, 부모부양의식 퇴조 등으로 사회보장 수요가 급증하던 때였다. 대책의 하나로 국민의 절반에 머무르던 의료보험 혜택을 모든 국민이 받도록 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조기 정착’ 방안을 1987년에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을 1988년 농어촌으로, 이듬해엔 도시 전역으로 확대했다. 국민복지연금도 1986년 법 개정을 거쳐 수혜 폭을 넓혔다. 18~60세 미만 모든 취업연령층으로 확대,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우선 실시, 사용자와 근로자 균등 분담, 정부가 제도운영관리비 부담 등의 내용으로 개선했다. 1987년엔 근로자의 주거 안정과 목돈 마련을 지원하는 법도 만들어 이듬해 시행했다.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엔 노동관계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등을 개정했다. 이를 통해 행정관청의 재량권 남용 축소, 노동조합 요건 축소와 설립 자유화, 단체교섭권한 위임절차 간소화와 사후신고, 노사 간 세력 균형을 위한 근거 마련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에 노후생활 연금신탁제를 도입하고 남녀고용평등법을 만들어 여성차별 철폐 기반도 마련했다. 이렇게 전두환 정부 때 기틀을 마련한 사회·근로 복지정책들은 신군부 차기 정권인 노태우 정부 때도 계속 이어졌다. ━ 정권의 폭압에 청년 노동자들 분신자살 잇따라 하지만 전두환은 국민에게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정당·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영장 없는 구금 등을 강행했다. 정권 말기에 각종 복지제도 확충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항거하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는 철저히 분쇄했다. 산업·재벌을 앞세우고 노동·인권을 묵살하던 박정희 정권과 닮은꼴이었다. 옛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의 노사분규 통계를 살펴보면 1985년에는 노사분규 265건, 노사분규참가자 2만8700명, 노동손실일수 6만4300일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권 말기인 1987년엔 3749건, 126만2300명, 694만6900일로 급증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노동자·학생·시민들의 민주·자유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억눌렸던 민심은 대통령직선제와 정당·언론 자유화를 추진한 차기 노태우 정부 때 봇물처럼 표출됐다. 이 때문에 전두환의 철권통치 때 적지 않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부산에서 상경한 김종태씨는 1980년 서울 신촌역 부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사건을 알리고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는 앞서 2년 전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을 운영하다 정부 감시에 걸려 강제 해산됐다. 1984년엔 택시운전사 박종만씨, 1985년엔 건설노동자 홍기일씨, 1986년엔 금속노동자 박영진씨 등이 노조탄압 규탄,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했다. 이 밖에도 노동운동을 하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의문사·행방불명·행려병자 등으로 사라져갔다. 당시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연금,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등 온갖 박해가 이어졌다. ━ 조작사건·경제정책에 희생되고 강제 수용되기도 전두환 정권은 정치범수용소라 할 수 있는 삼청교육대를 운영해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는데, 수많은 노동운동가들도 이곳으로 끌려갔다. 또한 1987년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일화로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비극을 낳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 1980년 12월에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을 추가하는 등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개악했다. 제3자 개입 금지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이나 노동운동 전개를 외부 세력이 돕지 못하도록 원천 금지한 조항이다. 제3자 개입 금지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계를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일부 법 개정이 이뤄졌지만 그 잔재는 20여년동안 이어졌다. 결국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발로 2005년 노사관계선진화 방안에 채택돼 2006년에 결국 폐지됐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임금 인상 억제를 물가 안정 정책의 하나로 악용하기도 했다. 집권 초기 1980~1981년에 유가와 물가가 급등하자 인상을 부추기는 나쁜 심리를 내쫓자며 ‘부정적 심리 추방운동’을 벌였다. 그 대상 중 하나가 노동자 임금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임금 동결을 선언하며 노동자 임금 인상을 통제했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1.11.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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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고도성장’ 대신 ‘물가 안정’…공권력으로 물가 잡은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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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군부독재, 노동운동 탄압 등으로 정권을 이어가는 동안 국내 경제는 3저(저금리·저유가·저환율) 호황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그렸다. 이 시기 국내 경제는 성장과 함께 물가안정이 이뤄졌다. 전두환 집권 초기였던 1980년대 초에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 2차 국제석유파동(오일쇼크) 충격이 겹쳐 경제적 불안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로 역성장 했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실업률도 5.2%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정부에서 이어받아 추진한 정책이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이 계획은 무리한 고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경제·사회기반을 만들어 경제도약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취지였다. 고도성장을 대신해 물가안정을 추구한 것은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을 추진한데 따른 것이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조세제도를 바꿔 기업·산업의 경쟁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제도적 금융지원이나 세제혜택을 없앴다. 당시 국내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수출 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시행하던 주요 공산품 가격과 서비스 요금 통제, 수입 억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금리의 수출 지원 금융과 같은 정책자금과 관치 금융제도, 각종 보조금 지급 등 지원 제도도 남아 있었다. 이들 제도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왔다. 한 예로 저금리 특혜를 적용한 수출 자금을 부동산 투기자금으로 활용하며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농촌 주택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시멘트 수급 사정이 악화했으며, 이렇게 지은 주택은 이촌향도 현상에 장기적으로 빈집이 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는 성장 지원 대신 기업이 경쟁력을 갖춰 물가안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이 밖에도 수입자유화 정책를 시행, 수입규제를 풀어 공급비용이 상승할 여지를 줄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5월 약사법·마약법 등 특별법에 의해 수입이 금지된 344개 품목의 수입자유화 조치를 시작으로 1985년 7월에는 국제경쟁력을 보유한 품목,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비경쟁 품목 등 총 235개 품목을 수입자동승인 품목군에 포함했다. 이에 국내에서 수입산 농산물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도 했으며, 1986년 기준 수입자율화율은 약 92%에 달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정부는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세출 예산을 동결하고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한편, 추곡수매가를 인상하지 않았으며 근로자 임금도 동결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극심한 반대에도 전두환은 공권력을 활용해 이들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 같은 조치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1년 21.4%, 1982년 7.2%, 1983년 3.4%로 안정화하는 흐름을 보였다. 물가가 안정되자 수출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무역수지는 적자를 줄여 나갔고, 1986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42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규모는 1988년에 114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강력한 물가안정책에 오일쇼크 뒤 3저 호황기에 들어서며 경제성장률(국내총생산 성장률)도 높아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 경제성장률은 1980년 -1.6%에서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올랐다. 전두환 집권기(1981~1987년)에 한국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10.2%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의 물가안정책을 두고 공권력을 동원한 노동 탄압으로 임금 상승을 억제, 물가를 관리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거세다. 거시경제 안정화를 바탕으로 기업은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근로자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물가안정책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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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강소기업 육성했지만…목숨줄 쥐락펴락에 정치자금도 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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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쏟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고 계열사를 빼앗기도 했다. 앞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한 고도성장의 지속에는 이바지했지만 각종 부작용도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들어 한국 경제에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중복·과잉시설 심화 등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목표지향적 계획에서 유도적 계획 체제로 바꾸었고, 중소기업 육성을 지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웠는데, 대·중소기업 격차 해소도 그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이에 그가 재임하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년) 기간 중엔 각종 중소기업 육성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1차년도인 1982년 4월초에 수립한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1982~1991)을 기반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전문화를 유도했다. 대기업들과 상호보완적 분업체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성장기여율(고용과 생산 등 전체 산업 성장에 기여한 비율) 증가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3~1979년 사이 중소기업의 수는 전체 기업의 80~90%를 차지했지만 성장 기여율은 20%(제3공화국, 1963~1971년), 33%(제4공화국, 1972~1979년)에 불과했다. 전두환 정부 시기 중소기업 진흥 정책 실시 결과, 생산부문에서 중소기업의 성장 기여율은 41%까지 높아져 대기업(59%)과의 격차를 줄였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경제성장 등을 들어 전 전 대통령의 당시 경제정책에 후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사례도 많다. 전두환 본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제그룹을 해체한 것이 대표적이다. 1949년 왕자표 고무신을 시작으로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을 만들며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던 재계 7위 국제그룹이 ‘부실기업 정리 및 산업 합리화’를 명분으로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의 구조재편을 단행하며 재벌 산하의 기업을 빼앗기도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원중공업을 빼앗겼다. 아울러 정 회장에게는 1977년부터 맡고 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 사퇴 압력을 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현대양행 창원공장(현 두산중공업)을 넘겨야했다. 동명그룹의 사례도 있다. 동명그룹은 목재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1965년 국내 재계서열 1위의 재벌이었고, 해체 전까지 해운·중공업·식품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룹은 1979년 원목 가격 상승과 사업 다각화에 따른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강석진 회장 등을 악덕 기업주로 지목하고 빼돌린 은닉재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동명목재를 수사했다. 이에 동명그룹은 자구노력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부도를 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계에 손을 뻗친 사례로는 일해재단이 있다. 당시 그는 여러 재단을 설립해 국내 주요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일해재단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전 전 대통령은 운영비 명분으로 정치자금을 모집했다. 재단은 1984년 3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재벌로부터 약 598억5000만원의 기금을 모았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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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에 정·재계 반응 엇갈려…추징금은 어떻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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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는 23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전 전 대통령의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고인의 회고록을 인용해 “'북녘 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그냥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고 남긴 내용이 사실상의 유언의 전부”라며 “평소에도 가끔 ‘나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라고 말했고, 유가족은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재용씨 부인인 배우 출신 박상아씨가 며느리다. 앞서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5일간의 국가장으로 치러졌지만 전씨는 반대 여론이 거세 국가장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낮다. 이에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전망이다. 다만 3남인 재만씨가 미국 체류 중이어서 귀국 시간을 고려해 장례가 3일장을 넘겨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 “사과하고 갔어야” 선긋기 나선 정치권 이날 정치권은 전 전 대통령이 군사독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탄압 등 과오에도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조문에 나서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은 국가장에 반대하며, 조문을 가거나 조화를 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3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전두환 사망에 대해 민주당은 조화·조문·국가장 모두 불가”라며 “끝까지 자신의 죄의 용서를 구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전 전 대통령 사망과 관련해 공식 논평을 내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무리를 빚었던 윤석열 대선 후보의 행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23일 오후 자신의 SNS를 통해 "전 전 대통령 빈소를 조문하지 않겠다"며 "당을 대표해서 조화는 보내도록 하겠다"고만 언급했다. 이날 오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 대표는 조문하지 않기로 한 이유를 묻는 가자들의 질문에 “전 전 대통령의 경우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노태우 대통령 일가와는 과오에 대해 다른 자세를 보여왔다”며 “독재의 상징이 됐고 지난 과오에 대한 반성이 없었던 전 전 대통령에 대해 당 대표로서 조화는 보낼 수 있어도 개인적인 추모나 조문 계획은 없다”고 설명했다. 대선 후보 간에는 대응이 일부 엇갈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날 전 전 대통령의 사망과 관련해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국가권력을 찬탈했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민께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 후보는 전 전 대통령이 내란 학살 사건의 주범이며, 조문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지난달 당내 경선 과정에서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이날 전 전 대통령 조문 계획을 밝혔다가 번복하며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 후보는 이날 전 전 대통령이 생전 5·18 무력 진압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은 데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지금 돌아가셨고 상중이니까 정치적인 이야기를 그 분과 관련지어 하기는 시의적절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 경제단체도 ‘조용’ 중소기업계는 ‘애도’ 주요 경제단체들도 23일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별도의 애도와 추모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입장이나 논평을 내는 것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지난달 26일과는 다른 모습이다. 당시 이들 단체는 일제히 입장을 밝히고 88 서울올림픽 개최, 북방 외교 등 노 전 대통령의 경제·외교적 성과를 거론하며 명복을 빌었다. 중소기업중앙회만이 이날 애도 입장을 밝혔다. 중기중앙회는 ‘전두환 제11대·제12대 대통령 별세에 대한 중소기업계 입장’을 내고 “고인은 대통령 재임 시절 중소기업 진흥 10개년 계획 추진, 유망 중소기업 1만개 육성, 중소기업 경영안정 및 구조조정 촉진법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양적 성장을 견인했다”며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독과점 폐해가 심각해지자 공정거래법 제정을 통해 중소기업 보호 육성에 성과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을 추진하며 중소기업의 성장과 전문화를 지원한 바 있다. ━ 추징금 미납 956억원 환수 어려울 듯 전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며 검찰이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을 환수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유진승 부장검사)에 따르면 이날 기준으로 검찰이 환수한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은 1249억원이다. 전체 추징금 2205억원의 57%로, 미납 추징금은 약 956억원이다. 현행 형사소송법상 미납 추징금 집행은 당사자가 사망하면 그 절차가 중단된다. 유산과 함께 상속되는 채무와 달리 벌금이나 추징금 등은 법무부령인 ‘재산형 등에 관한 검찰집행사무규칙’에 따라 납부 의무자가 사망하면 ‘집행불능’으로 처리된다. 형사소송법은 예외적으로 몰수 또는 조세, 전매 기타 공과에 관한 법령에 의해 재판한 벌금 또는 추징은 그 재판을 받은 자가 사망해도 상속재산에 대해 추징을 집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검찰은 제3자 명의의 재산에 대해 추징금 추가 집행이 가능한지 살펴보겠다는 입장이다. 앞서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에 2013년 7월 특별환수팀을 구성하고 미납 추징금을 집행해왔다. 연희동 자택, 오산시 임야, 용산구 빌라 및 토지 등 책임재산에 대해 압류 후 공매를 진행했으나, 전 전 대통령 측 이의제기에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앞서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내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전 전 대통령은 약 313억원을 낸 다음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남은 추징금 납부를 미뤘다. ━ 전두환 며느리, 연희동 별채 공매 무효 항소심 패소 최근엔 전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이윤혜씨가 전 전 대통령 연희동 자택 별채 공매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냈지만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서울고법 행정3부(이상주 권순열 표현덕 부장판사)는 지난 11일 이윤혜씨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상대로 낸 공매처분 무효확인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내지 않자 2018년 그의 연희동 자택을 공매에 넘겼다. 이 자택은 캠코의 공매 대행으로 2019년 3월 51억3700만원에 낙찰됐다. 그러나 연희동 자택이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 명의 본채, 비서관 명의 정원, 며느리 명의 별채 등 3곳으로 나뉜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전 전 대통령 일가는 법원에 형사재판 집행에 관한 이의를 신청하고, 이윤혜씨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 전두환 향년 90세 나이로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냈다. 1931년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에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데 이어 12·12 군사반란을 획책했다. 전 전 대통령은 군을 동원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으며 1988년 초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퇴임 후 내란과 살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최근 알츠하이머를 비롯해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등 지병을 앓아온 그는 23일 오전 8시 40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사망 당시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었으며, 오전 8시 55분께 경찰과 소방서에 신고됐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께 사망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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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화장실서 쓰러진 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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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향년 90세.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40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전두환 비서실 측에 따르면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대통령은 오는 29일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의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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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 금괴·보석·예술품 비밀창고 역할도

산업 일반

금고 속 물건은 은행도 몰라 … 화재나 수색영장 있을 때나 외부인 열람 최근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보유한 시중은행 대여금고 7개를 찾아냈다. 금고 안에는 예금통장 50여개와 금·다이아몬드 등 귀금속 40여 점이 들어 있었다.경기도 성남시도 7월에 고액 체납자 5명의 은행 대여금고 5개를 찾아내 압류·봉쇄 조치했다. 이들이 지난 2년 간 체납한 세금은 최대 8000만원으로 총 26건에 이른다. 대여금고는 고객의 화폐·유가증권·귀금속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은행이나 증권사 지점에서 빌려주는 고객 전용 소형 금고다.휴가철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도대여금고는 과거부터 고액 자산가의 ‘보물창고’였다. 고객이 대여금고에 수십억원의 현금을 넣는다고 해도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통보되지 않는다. 계좌를 통해 2000만원 이상 거래되면 모두 FIU CTR(고액현금거래)에 보고되지만 대여금고의 재산은 본인외에 어느 누구도 알기 어렵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처럼 거액자산가들이 재산 은닉 목적으로 대여금고를 즐겨 활용한다.대여금고의 표준 규격은 평균 가로 12~16cm, 세로 6~8cm, 높이 5~8cm다. 책상 서랍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이다. 5만원권으로 채울 경우 3억원 정도 들어간다.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 2300여 지점에 40여 만개의 대여금고가 있다.대여금고 실에는 은행 직원과 고객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은행 직원이라도 혼자 들어갈 수 없다. 고객이 자신의 번호가 적힌 금고를 찾아 은행원과 함께 키를 꽂고 돌린다. 문이 열릴 즈음 은행원은 조용히 사라진다. 혼자라는 것을 확인한 고객은 따로 마련된 방에서 자신의 전용 보관함을 열어본다. 윤태웅 신한은행 여의도PB센터장은 “대여금고는 본인 외에 열람이 불가능해 고객을 관리하는 전담프라이빗뱅커(PB)도 내용물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대여금고는 사이즈에 따라 소·중·대(1~6)로 나뉘어진다. 가장 사이즈가 큰 대여금고는 평균 가로 60~90cm, 세로 80~100cm, 높이 10cm 이내다. 열쇠는 필수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전자식이나 지문인식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대여금고는 대개 지점의 안쪽에 있다. 주변에는 이동 물체를 감시하는 센서와 CCTV, 연기 및 화재 경보장치 등이 설치돼 있다.최근에는 금고가 예술작품 보관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A은행 PB는 “대부분 문서나 금괴 등을 보관하지만 최근에는 비밀스럽게 입수한 작품도 보관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여금고는 거액 자산가만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이용 자격에는 제한이 없다. 해당 은행 고객이라면 가능하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1년마다 연장할 수 있다. 비용도 저렴하다. 크기에 따라 5만~50만원의 보증금과 1년에 1만~5만원 정도의 이용료를 내면 쓸 수 있다.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이용료 없이 보증금만 받고 운영한다. 절도사건이 늘어나는 명절이나 휴가철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예금 잔액 1억원 이상 등 거래 실적이 많은 고객으로 이용 자격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다. 이유철 신한은행 차장은 “대여금고 수량이 제한돼 있어 거래 금액이 많은 고객이 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대여금고는 고객 본인이 있어야 열 수 있지만 예외도 있다. 대여금고 이용 고객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모든 상속인의 동의 하에 열람과 처분이 가능하다. 또 화재·천재지변 등 비상사태나 보관물품에 대한 법원 제출명령, 법관이 발부한 수색영장이 있을 때에는 임의개문(본인 없이 금고를 여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은행은 금고를 빌린 본인에게 금고 문을 연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거나, 개문 후 사후에 알려주면 된다. 이번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대여금고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임의개문 사례는 전에도 있었다. 지난해 서울시가 1000만원 이상 고액 체납자의 세금 납부를 독촉하기 위해 시중은행 319곳에서 이들의 대여금고 503개를 압류해 금고를 개봉했다. 개방된 대여금고 속에는 집 문서부터 금괴·황금돼지 등의 금 관련 제품과 보석류, 명품 시계, 각종 기념주화, 고서화, 미술품, 다량의 외국돈이 발견됐다. 이용규 우리은행 차장은 “대여금고는 법적으로는 ‘임대차’에 해당되기 때문에 범죄와 관련된 물건이 보관돼 있었다하더라도 은행은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대여금고도 못 믿어 … 개인금고 판매 증가일반인들이 귀금속이나 유가증권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고를 사용하는 사례도 늘었다. 이에 따라 가정용 금고 판매량도 증가했다. 올 초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춰지고 세무조사가 확대되면서 자금 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이 늘었다.신세계 강남점에서는 가로 34㎝, 세로 32㎝, 높이 64㎝ 크기인 금고가 가장 많이 팔린다. 가격은 253만원 정도다. 5만원권을 가득 채우면 12억원이 들어간다. 롯데백화점 서울 소공동 본점에 입점한 금고매장 ‘루셀’의 올 1분기 매출은 지난해 4분기보다 두 배 가량으로 증가했다.홈쇼핑 채널에서도 개인금고가 인기다. 7월 중순 새벽 1시 홈쇼핑 채널에서 판매된 가정용 개인금고는 방송에서 250대 ‘완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날 판매된 상품은 높이와 폭이 40㎝ 안팎 소형으로 정가가 47만원이었다. 늦은 시간에 방송된데다 일반 금고보다 가격도 비쌌지만 화려한 색깔과 장식이 고객의 눈길을 끌었다. 금고 제작사인 선일금고 관계자는 “홈쇼핑 방송 한 번에 최대 700대까지 팔아봤다”며 올해 금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작년 대비 매출이 80% 가까이 늘었다”고 말했다.젊은층에서도 금고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다. 신세계 서울 강남점 루셀 매장 관계자는 “매장 방문객 중 20~30대가 부쩍 늘었다”며 “꼭 현금이 아니더라도 예물반지나 여권 등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금고를 사러 왔다는 고객이 많다”고 설명했다.

2013.08.13 15:31

4분 소요
DJ의 검증·실용 중시 朴당선인과 닮아 코드·회전문·깜짝·맹물 인사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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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보안 강조한 인수위·총리 인사 놓고 뒷말 무성…통합·탕평 인사로 감동 줘야 역대 대통령은 인사로 흥하고, 인사로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총리 후보자를 지명한 박근혜 당선인은 장관 인사와 청와대 인사를 앞두었다. 박 당선인이 선택하는 장관 17명과 청와대 실장 2명, 수석비서관 9명의 면면으로 국민의 평가를 받는다. 그에 따라 임기 1년차의 명암도 엇갈릴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서 박 당선인이 타산지석 또는 반면교사 삼을 부분을 짚어봤다. “여러 말 필요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보스 기질이 강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9월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그 자리를 제안하면서 화끈하게 힘을 실어줬다. 역시 호방한 김영삼 대통령은 ‘깜짝 놀랄 만한 40대’라는 말 한마디로 무명이나 다름없던 이인제 의원을 일약 유력한 대권 주자 반열에 올려놨다. 그런가 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시골에서 농사 짓던 농부를 농림부장관에 임명했다가 비판 여론에 6개월 만에 해임했다.“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대통령의 인사 하나가 대통령 본인은 물론 정책과 정치, 그리고 국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례다. 정치권에 ‘인사는 천사(天使)고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다. 인사만 잘하면, 악마도 천사처럼 보이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는 뜻이다. 반대로 인사를 잘 못하면 모든 일이 망가진다는 뜻에서 ‘인사는 망사(亡事)’라는 말도 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알렉산더·징기스칸·링컨·정조처럼 성공적인 지도자 옆에는 반드시 좋은 참모가 있었다. 그건 성공적인 인사에서 비롯된다. 탕평인사의 모델로 꼽히는 링컨 대통령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힌 정적 3인방을 국무·법무·재무장관이라는 3대 요직에 앉혔다.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월 초 인수위원회 인선에 이어 1월24일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하는 과정에서 특유의 인사 스타일을 보여줬다. 박근혜 인사 스타일은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안전 인사’다. 매사에 예측 불허의 모험보다는 예측 가능한 안전을 좋아하는 박 당선인은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꿀 만큼 ‘안전’을 선호하고, 사람을 쓸 때도 사전에 충분히 알고 있는 ‘안전한 사람’을 기용한다. 이번 인수위원장의 총리 이동도 그런 연장선에 있다.다음으론 ‘보안 인사’다. 윤창중 대변인의 밀봉 인사에서 나타났듯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는 건 박 당선인의 완벽주의적인 성격과 관련 있다. 철통(鐵桶) 보안을 중시하다 보니 깜짝 인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다만,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전혀 의외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는 ‘요란한 깜짝 인사’가 아니라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인물 중에서 선택하는 ‘조용한 깜짝 인사’다. 이 때문에 800여명에 이르는 인수위 출입기자들이 등잔밑이 어두운 ‘등하불명(燈下不明) 인사’에 번번히 물을 먹고 있다.셋째는 ‘관찰 인사’다. 박 당선인은 평소에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을 메모해 뒀다가 중요한 국면에 도움을 요청하는 식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가동한다. 서강대 은사인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국회 상임위 옆자리에 앉았던 ‘옆박 인사’, 친박계보다 더 인연이 깊은 ‘진박 인사’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관찰 인사는 주변을 잘 살펴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퍼즐 인사’이기도 하다.박 당선인의 이런 인사 스타일은 오랜 청와대 생활과 아버지의 용인술, 부모의 사망 이후 18년간의 칩거와 다시 15년간의 정치활동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앞으로 임기 5년 동안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원칙을 중시하는 안정적 리더십이 인사 스타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박 당선인의 인재풀을 보면 전체적으로 ‘3다(多) 3소(少) 현상’을 보이고 있다. 법조인과 호남 출신, 외부 인사가 많은 편이고, 친박계와 TK 출신, 정치인이 상대적으로 적은편이다. 3다의 범위에는 ‘박정희 키드’나 정영사 인맥도 포함돼 있다.박 당선인은 조만간 단행할 장관과 청와대 인사에서 자신의 진짜 용인술을 보여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연고주의 인사’다. 박 당선인의 최근 인사를 보면, 과거 정권의 단골 메뉴인 정실인사는 크게 줄었다. 그러나 앞으로 단행할 인사에서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통합인사가 더 큰 폭 이뤄져야 할 것이다. 2월25일 취임식을 앞두고 있는 박 당선인의 숙제다. 그래야 51.6%의 지지자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48%의 반대자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첫 장관·청와대 인사에서 멋진 탕평인사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임기 초반부터 유령처럼 나타나는 레임덕 현상을 차단하고,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영광과 앙겔라 메르겔 독일 총리의 성공모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 해법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의 인사 사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박 당선인은 안전·보안·관찰 인사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초반부터 인사 실패로 큰 곤욕을 치렀다. 이후 임기 5년 동안 고생했다. 아마 역대 대통령 중에서 이토록 임기 초부터 인사 문제로 애를 먹은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고소영 인사’ ‘강부자 인사’다.곧이어 ‘영포 라인’이라는 신조어가 보태졌다. 임기 초에 인사 실패로 한번 ‘미운 털’이 박히니 글로벌 외교와 같은 좋은 성과를 내놓아도 국민의 마음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인사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책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국민의 감성을 자극한다.이 대통령은 “가 봤어?” “해 봤어?”라는 말을 곧잘 사용할 정도로 현장 능력을 중시하는 CEO형 지도자다. 그래서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실용인사가 이뤄질 걸로 기대됐다. 그러나 인사 때마다 번번히 능력보다 연고를 중시하는 19세기형 인사를 단행해 국민을 실망시켰다. 당장 여야에서 모두 부정적인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내정자의 인사파동도 마찬가지다.박근혜 정부가 새롭게 출범하는 마당에 국민적인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이동흡 인사파동’은 정부 인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미국 대통령은 국회의사당에서 취임 선서를 한 뒤 2.7㎞ 떨어져 있는 백악관 집무실에 도착해 첫 업무를 시작한다. 첫 업무는 전임 대통령이 친필로 적은 편지를 읽는 것이다. 편지에는 후임 대통령이 가장 유의해야 할 사항이 적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빌면서 청와대 집무실에 메모지를 남기고 간다면, 그것은 ‘인사를 잘 하는 법’이 아닐까.노무현 대통령은 인사 실패라기보다는 인사 편중문제로 임기 5년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역대 대통령 중 인사 편중에 대한 그토록 다양한 용어가 쏟아져 나온 적이 없었다. 코드 인사는 아예 노무현 정부의 상징어로 자리 잡았고, 이 외에도 회전문 인사, 돌려 막기 인사, 보은 인사와 같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진보적인 정치철학을 공유한 사람을 요직에 집중 배치하는 코드 인사를 단행해 보수 진영은 물론 당내 중도세력으로부터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코드 인사의 중심에는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 주자로 나온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필두로 386 운동권 출신이 있었다. 주로 40,50대인 친노 386 운동권 그룹은 끈끈한 정치적 패밀리즘을 형성해 2012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 과정에서 공천권을 행사하고 대선 후보도 내세웠다. 대선 이후에도 민주당 내부에 아성을 구축했다. 그러나 과도한 견고함이 배타성을 형성하면서 당내 계파논쟁을 불러일으켰다.만약 노 전대통령의 곁에 알렉산더 대왕의 감정 조율사였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형 직언파 참모가 있었다면, 코드 인사는 좀더 약화됐을 것이다. 박 당선인은 특정 세력이 중심이 되는 인사는 당장 자신에게 편하고 유리할지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는 교훈을 노 대통령의 코드 인사에서 얻어야 할 것이다.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전혀 다른 어린시절과 성격, 정치스타일만큼이나 인사스타일도 판이하다. 부잣집 외아들로 자란 김영삼 대통령은 외향적 성격이어서 인사 스타일도 요란하고 공격적이었다. 조그마한 섬, 하의도의 반골 선비 집안에서 자란 김대중 대통령은 내향적 성격이어서 인사 스타일도 조용하고 방어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사람들을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깜짝 인사’를, 김대중 대통령은 마치 자동차가 깜박이등을 켜고 안갯속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는 듯한 ‘깜빡이 인사’를 선호했다.YS·DJ 성격만큼 인사 스타일 달라역대 대통령 중에서 ‘인사는 만사’라는 말을 가장 자주 사용한 김영삼 대통령은 보안제일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1993년 12월 문민정부 초기, 서청원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정무장관 통보를 받을 때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니 내일 중책 하나 맡는데이.보안 철저히 하거래이!”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기자들을 피해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잠적했다고 한다. 문민정부 시절, 대중목욕탕에서 사우나를 하다가 장관 통보를 받거나 승용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에서 장관 해임 통보를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럴 때면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하기도 했다고 한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숨에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고 언론에 2배수, 3배수를 흘려 사전 검증을 받는 ‘검증 인사’를 자주 활용했다. 용의주도한 성격 때문인지 정부인사를 할 때 사전에 충분한 자체 검증과정을 거친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가 건넨 명함에 그의 특징이나 전문 분야를 메모했다.필요한 시점에 다시 연락하는 ‘명함 인사’, 제 아무리 경력이 화려해도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다시 연락하지 않는 ‘실용인사’가 몸에 배어 있었다. 한마디로 철저한 실용주자였다. 평소에 사람을 꼼꼼하게 관찰했다가 훗날 때가 되면 기용한다는 점에서 박 당선인의 인사 스타일과 비슷하다.김대중 대통령은 해방 이후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하고도 첫 청와대 비서실장에 평생 헌신한 동교동계 심복이 아니라

2013.01.28 15:22

6분 소요
[박근혜식 경제학개론] ‘선거의 여왕’에서 경제통으로 변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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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출생이니 올해 나이 만 60세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소령이었다. 박 후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대통령에 당선된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 그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꼽히곤 했는데 성심여중·고 시절에는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해서도 학구열은 식지 않았다.박 후보의 졸업 평점은 4.0점 만점에 3.82였다. 여성 공학도가 드물던 분위기에서 산‘ 업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며 공대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졸업 후 교수를 꿈꾸며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지만 이후의 인생은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사망 소식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와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하지만 5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1979년 11월 청와대를 나왔다.학창 시절 공부 잘하는 모범생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은둔의 삶을 살던 박 후보는 1997년 12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4·2 재보선에서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2000년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서 부총재에 당선돼 빠르게 당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2002년 2월 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 등을 주장하며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는데 쇄신안이 받아들여지면서 9개월 만에 다시 합류했다.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당대표에 선출돼 차떼기 사건, 탄핵 역풍 등으로 침몰 위기에 빠진 당의 구원투수로 나섰다.한달 후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천막당사’라는 회심의 카드로 국민 여론을 바꾼 덕분이었다. 2년 3개월 동안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각종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20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에 뺨이 찢기는 테러를 당하고도 병원에서 선거를 지휘한 일화는 유명하다.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도 이때 얻었다.2007년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패배한 후 주춤하다 2010년 세종시 정국 이후 MB정부와의 힘겨루기에서 승리하면서본격적인 재도전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디도스 사건으로 다시 위기에 빠진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각종 쇄신작업을 진행했다. 올해 4월 총선에서 정권심판론을 뚫고 원내 1당을 유지하면서 당내 지지기반을 확고히 했고, 8월 20일 19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후보에 선출돼 12월 대선에 나서게 됐다.199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박 후보는 산업자원위원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여성위원회, 국방위원회, 행정자치위원회 등을 두루 거쳤다. 경제 공부도 꾸준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당 내 모의원은 “2000년 대 초반부터 경제학 박사 출신 보좌진을 적극 활용해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안다”며 “정기적으로 제출되는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하고 기업인들도 많이 만나 의견을 들었다”고 말했다. 언론사 경제부기자를 초청해 3~4시간씩 토론하던 것도 이 무렵이다.당 대표에 취임해서는 외곽에 전문가 그룹을 가동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박 후보의 장점은 탁월한 정치력, 조직 장악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주변에서도 ‘상황 판단이 탁월하다’,‘큰 그림을 그릴 줄 안다’ 등 그의 거시적인 안목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당 대표 시절 주요 이슈 역시 국가보안법, 사학법 등 정치·사회 분야에 몰려 있었다. 2002년 방북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데 이어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05년 중국 후진타오 주석을 만난 덕분에 외교적 역량 또한 부각됐다.반면 경제에 대해서는 ‘경제마저 정치로 풀려 한다’, ‘원론적인 언급일 뿐 구체성이 없다’ 등의 비판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경제 전문가로서의 캐릭터를 만들지 못한 결과는 뼈아팠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그랬다. 당시 박 후보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명박 후보를 앞서고도 국민 여론조사에서 뒤져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줬다. 경제 살리기로 마케팅에 나선 이 후보는 기업가 출신이라는 경력을 앞세워 주요 경제 이슈를 선점해 여론몰이에 성공했다.그 때문인지 박 후보는 18대 국회에서 보건복지가족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등 경제 분야로 활동 영역을 바꿨다.2007년 대선 이후 침묵의 정치를 계속하던 박 후보는 2008년 11월 수도권 규제완화와 주식시장 부양을 위한 연기금 동원 등 정부 정책에 구체적인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박 후보가 경선에서 자신을 도왔던 자문 교수와의 모임 횟수를 늘리며 본격적인 경제 그림 그리기에 나섰다는 정치권의 관측이 나왔던 직후다. 박 후보 스스로도“여름 동안 경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소회를 내놓기도 했다. 여당내 모 의원은 “당시 실물 경제의 어려움이나 한국에 맞는 복지제도 등을 심도 있게 고민했다”며 “전문가 풀을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 경제를 챙길 안목을 키우려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2009년 5월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스탠포드대 강연에 나서 그동안 쌓은 내공을 발휘했다.이후에도 박 후보의 경제공부는 계속됐다. 박 후보의 측근인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가 고등학교 3학년처럼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0년 말에는 한국형복지론을 제기하며 복지 이슈를 선점했고, 연이어 대선에서 싱크탱크 역할을 할 국가미래연구원을 출범시켰다. 본격적인 대선 행보의 시작이었다. 이 때도 중심추는 경제에 뒀다. 오랫동안 과외 선생님역할을 해준 교수진이 대부분 참여했다. 18대 국회 하반기 상임위를 기재위로 옮겨 국가부채나 물가상승 등 현안에 대해 구체적인 지적을 내놨고 올해 들어서는 박근혜식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내세워 야당을 긴장하게 만들었다.고3처럼 경제 공부 박 후보 측 관계자는 “궁금한 점이 생길 때 절대 한 사람의 전문가에게만 답을 구하지 않고 각각 다른 자리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습관이 있다”며 “아무리 가벼운 사안이라도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않고 지나치게 단언하는 것도 경계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큰딸에서 20대 퍼스트레이디. 18년간의 은둔과 정계 입문, 그리고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기까지 대한민국 정치사와 함께 흘러온 박 후보의 3번째 대권 도전이다. 성패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한국형 복지, 경제민주화 등 한발 빠르게 경제 이슈를 선점하며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박근혜 후보의 재산삼성동 자택이 사실상 전재산박근혜 후보의 재산 목록은 다른 국회의원들과 비교해 단출하다. 국회공보에 매년 3~4월 공개되는 국회의원 재산 변동 현황에 따르면 박근혜 후보는 재테크와는 거의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2012년 박 후보가 신고한 재산 총액은 21억8100만원. 전년에 비해 5800만원 가량 줄었다. 박 후보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19억 4000만원이라고 신고한 서울 삼성동에 있는 단독주택(대지 484㎡, 건물 317㎡)이다. 박 후보는 현재 이 집에 거주한다.강남구청에 따르면 그가 삼성동 자택을 구입한 시점은 1990년 7월이다. 현재 이 집의 실거래가는 30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박 후보는 대구 달성군 화원읍 대백맨션 아파트(105㎡)를 6000만원으로, 인근 건물의 전세(임차)권은 4000만원이라고 신고했다. 대구 소재 아파트는 지난 6월 매각했다. 박 후보가 소유한 자동차는 2008년식 에쿠스VL450과 2008년식 베라크루즈다. 예금은 농협과 외환은행 등에 7800만원 정도가 있다. 보유 주식은 물론, 골프장 회원권 등도 없다. 채권·채무 관계도 깨끗하다.2006년 삼성동 집값이 크게 오른 것 외에 거의 변동이 없다. 2007년 신고한 재산 총액은 21억8000만원, 2010년은 21억6000만원이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관계자는 “재산 목록 칸이 가장 적은 의원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재산 공개 현황으로만 보면 박 후보 재산은 문제 삼을 게 없다. 하지만 야당은 다른 쪽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다. 박 후보가 10·26 사태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는 6억원의 실체와 정수장학회다.박 후보는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생계비 명목으로 6억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야권은 이 돈의 출처와 이걸 어디에 썼는지를 집중 추궁할 계획이다. 정수장학회 논란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 측은 “정수장학회는 사회에 환원했다”며 박 후보와의 연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박 후보가 여전히 정수장학회의 실질 소유자라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2012.08.2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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