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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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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입고 출근? 자율 복장제, 이대로 괜찮을까[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옷 애호가인 필자는 19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 학번으로 살아오면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여러 격동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런데 요즘 후드티는 물론, 반바지와 샌들까지 출근복 리스트로 허용되는 ‘자율 복장제’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필자는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는 미명하에 진행된 교복 자율화 역풍 속에서도 다니던 학교의 외골수 정책에 따라 교복에 얽매여 고교 시절을 보냈고 심지어 교련복까지 싸들고 다녔다. 지긋지긋한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새마을 운동과 군대 문화로부터 영향 받은 획일화의 압박과 굴레를 이제는 벗어던지나 싶은 근래의 복장 자율화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실로 붕괴에 가까운 복식 문화의 변화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옷 환자’로 칭하며 상황과 격식에 맞는 옷차림에 대해 연구해온 필자 입장에서 요즘처럼 편안한 차림의 출근복을 용인하는 문화가 조금은 걱정스럽다. 과도한 노출과 상황(TPO/Time·Place·Occasion)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개성으로 합리화하는 젊은 층의 시도가 여전히 낯설고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사회적·시대적 요구이니 어쩌겠는가. 필자는 자율 복장제도에 관한 의 기고 요청을 받은 이후 최근 한 달 간 부지런히 주변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여전히 급여생활자를 우아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제는 ‘꼰대’로 분류되는 50대의 친구들과 선배들은 물론, 협업이나 컬래버레이션 등의 이름으로 만나게 되는 현업에 종사하는 2030세대의 젊은 사회인들까지,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다양한 직종과 연령대의 직장인들의 복장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 보게 됐다. 한국의 복식문화 변천사의식적으로 필자가 직장을 다니던 20대 후반을 돌이켜보니 확실히 더 편하고 개성이 드러나는 옷차림이 많아짐을 느낀다. 1990년대 중반 닷컴(.com) 버블과 함께 등장한 점점 ‘더 편하게, 더 자유롭게 옷 입기’의 경향은 코로나 팬데믹과 사회의 주류가 된 MZ세대의 강력한 자기 표현과 맞물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초부터 유행처럼 자리했던 강력한 맞춤복에 대한 수요는 온데간 데 없다.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을 위한 예복 맞춤 시장마저도 점점 증가하는 캐주얼화 경향에 따라 기성 브랜드의 셋업 차림으로 빠르게 대체되는 중이다.백화점 남성복 판매 층의 필수 코너로 등장하던 넥타이와 셔츠 매장은 이미 5~6년 전 부터 자취를 감췄다. 세계적인 복장 규정 변천의 결정적인 원인, 코로나19 팬데믹과 재택근무제도 도입은 인류의 ‘편하게 옷 입기’ 바람을 좀 더 빠르게 구체화시켰다. 비대면 미팅과 자율 근무 제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대면 격식’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졌다. 야외 활동과 개인 취미 활동에 쏟는 시간과 비용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활동을 위한 옷차림이 일터와 일상에 스며들게 됐다. 우리는 서양에서 유래된 복식(옷·장신구 등 꾸밈새에 관한 문화)을 식민지 시절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왔다. 이후 우리의 복식문화는 6·25 동란을 겪으면서 특별한 저항이나 반성 없이 부족한 물자의 수급사정에 따라 수용됐다. 또 우리의 전통이나 문화적 반성에 따른 발전이나 변형을 취하지 못한 채 소위 ‘정장’, 혹은 ‘양복’에 해당되는 옷이 자연스럽게 출근복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요즘처럼 다종다양하게 분류된 직군과 달리 과거에는 이분법적 분류로 '화이트칼라'(White-collar)와 '블루칼라'(blue collar)로 대비되는 두 가지 직군이 존재했다.이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이른바 '화이트칼라'에겐 상하의가 동일한 재질과 컬러로 만들어진 정장에 넥타이를 매는 차림이 요구됐다. 여성들에게는 이에 준하는 여성복이 복장 규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블루칼라' 직종엔 회사가 공급하는 유니폼이 제공돼 복장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적 고찰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이 입으니 그렇게 입었고, 개성이나 선택권 보다는 사회가 용인하는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모두가 복장 규정을 따르던 시절이었다.오로지 부를 향해 달리는 효율 제일주의의 새마을운동의 획일화 정책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겼고 군사정권 특유의 상명하복 문화도 어설픈 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경직시켰다. 특히 필자에게 성장(盛裝·훌륭히 몸을 단장)이라는 이미지가 뇌리에 각인된 장면은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식 사진이다. 당시 그는 군주제에 기반한 강력한 군사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연미복과 훈장을 착용한 복장을 입었다. 이러한 복식문화가 반영된 대통령의 취임식은 과거 소공동 맞춤 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격식에 따라 갖춰 입는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맞춤 양복 시장은 꾸준히 인기를 구가했다. 군사 정권의 후광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맞춤복 위주 복식문화의 틀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시대적 전환점이 됐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모토는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였다. 군 출신 대통령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손수 가방을 들고 국정에 참여하는 등 좀 더 캐주얼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취임식 역시 당시 일반 회사원들과 같은 타이를 착용한 평범한 양복 차림이었다.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 도입된 다양한 해외 문화는 보다 자유로운 복식문화에 불을 당겼다.해외 여행 자율화에 따라 국민들은 여러 해외 문화를 경험하고 체험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이들은 점차 개성을 중시하고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던 새로운 복식문화를 수용하고 추구해 왔다. 통신과 교통의 발전도 이런 편안하고 자유로운 개성 표현에 크게 기여했다. 인터넷을 통한 동호회 활동은 심도 깊은 취향과 개성의 자가발전 계기를 마련했고 자연스럽게 취미와 관심은 기능을 동반한 의복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눈부시게 분화 발전했다. 다만 냄비 끓듯 한 두 가지 유행에 유독 집착하는 경향도 이때 시작됐다. 또래 집단이 입는 옷은 '나의 패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복장자율화의 이면1997년 4월 발매돼 9월 가요프로그램 차트를 석권했던 DJ DOC의 'DOC와 춤'을 이라는 노래말엔 이런 부분이 있다.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여름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 사람들 눈 의식하지 말아요.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내 개성에 사는 이세상이에요. 자신을 만들어 봐요.”돌발행동으로 유명세를 타던 한 음악 집단의 노랫말은 고스란히 시대상을 반영했었다. 자유와 개성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청바지는 근무복으로는 금기시됐고 여름 교복으로 반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따라 대기업들이 자율복장제도를 도입하면서 청바지와 반바지, 샌들이 점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이뤄진 복장 자율화, 근무복 자율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기업들이 복장 자율화의 이유에 대해 '유연한 조직 구조'나, '창조적인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편함 감정을 느낀다. 지난 2008년, 삼성그룹은 비즈니스 캐주얼을 도입하며 근무복 자율화를 시작했다. 당시 교복처럼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던 직장인들에게 이는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복장 자율화는 실로 의류 시장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중차대한 일이었고 이를 계기로 맞춤복 시장에 큰 변화가 일게 된다. 갑자기 도입된 비즈니스 캐주얼은 그 정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배우자에게도 큰 혼란을 야기했다. 자연스럽게 맞춤복과 관련 업종 종사자들의 일터가 줄면서 인력난이 과중됐다. 또 당시 노동시간과 임금제도의 변화로 소규모 자영업 형태의 맞춤복·완성복업계는 사양산업이 됐다. 현재 이 시장에는 극소수의 업체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오며 맞춤복·완성복업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외출을 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수준 높은 맞춤복과 완성복을 생산하던 기술인력들이 업계를 떠나게 됐기 때문이다.자율화로 퇴색된 격식과 예 복장 자율화에 대해 필자가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비단 이런 산업적인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옷을 갖춰 입고 상대를 배려하는 격조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붕괴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관혼상제와 같은 행사를 위해 번거롭고 복잡한 복식을 갖추고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도리와 마음을 준비하게 하는 강력한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례식장에서 단정하게 예를 갖춘 어두운 색상의 정장과 넥타이는 황망한 상주를 향한 예의를 갖춘 위로나 다름없다. 혼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 결혼식은 신부를 위한 일생일대의 돈 잔치로 변질됐다. 이에 요즘 결혼식은 복식문화의 중요성보다 시각적 욕망과 살림살이 자랑만 남았다. 이런 결혼식의 변질이 부부를 더 쉽게 헤어지게 만들진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폴리에스테르 소재로 만들어 주름이 가지 않는 셔츠, 공장에서 찍어낸 셋업 수트는 우리의 출근 일상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셔츠 다림질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들여 좋은 옷을 준비하는 간곡한 마음의 공간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아무리 덥고 습해도 긴 바지를 입어 예의를 갖추고 정성들여 타이를 매는 것은 중요한 업무에 앞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일본은 우리보다 빠르게 산업화를 경험하고 일찌감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격식과 예를 갖추는 가치를 중시한다. 이는 최근 문예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소중한 문화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간결하게 만든 중국의 경우와 대비된다. 이런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통해 전 세계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앞으로도 줄곧 그 성과를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와 걱정이 앞선다. 무조건적인 자율화와 간소화보다는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일이다. 자율복장제 속에서도 시간을 들여 자신을 꾸미고 상대를 배려해 예를 다하는 이들이 우리 부서와 우리 회사에도 한 둘쯤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박수와 존경의 눈빛을 보내보자. 그러면 복장의 자유보다 더 큰 배포와 우아한 격조를 얻게 될 것이다.이헌 패션칼럼니스트 이헌 패션칼럼니스트는_'한국신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스타일리스트, 디자이너다. 뉴욕 FIT에서 패션 머천다이징(MD)을 전공했고 후에 패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사용품', '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 등의 저서가 있고 번역 및 감수로 패션 저술에 관여했다. 현재는 '스타일 인문학', '한국신사 유람일기'로 예술과 문화 등에 관한 다양한 칼럼을 쓰고 있다.

2024.10.27 10:02

7분 소요
독재로 억압받던 1984..위기 속에서 찾은 기회

산업 일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걸 4번이나 반복했다. 긴 시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1984년 ‘푸른 쥐의 해’ 갑자년(甲子年)에 창간돼 국내 경제의 방향성을 제시했던 ‘이코노미스트’의 시간도 벌써 40년이 흘렀다.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그 시절을 되짚어 보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를 조금은 더 안정적으로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1980년대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시기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 여파와 국내 정치 불안 등이 맞물리면서 위태로웠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저금리·저유가·저달러 등의 영향으로 경제 성장에 속도가 붙었다. 일례로 1986년부터 3년간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1%를 상회했다.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은 침체기에서 회복 및 성장기로 가는 과도기였다.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고, 서민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기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한 혁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4년 현재 고물가·고금리·국내외 정세 불안 등의 영향으로 서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새로운 변화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지만 1984년과 2024년은 어떤 점에서 닮은 부분이 있다.그 시절을 돌아보면 낯익은 것들도 눈에 보인다. 그해 처음 출시돼 현재까지 판매 중인 식료품들이 그렇다. 대표적으로 ▲농심 ‘짜파게티’ ▲동양제과(현 오리온) ‘고래밥’ ▲한국야쿠르트유업(2012년 계열 분리 팔도에서 판매) ‘팔도 비빔면’ ▲롯데제과 ‘칸쵸’ 등이 있다.당시 물가는 어땠을까. 시대별 물가 흐름을 볼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짜장면 값이다. 이를 보면 그 시절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고급 음식으로 분류됐던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한국물가정보 집계 기준)은 572원이었다. 현재 짜장면 한 그릇의 평균 가격은 7069원 정도다. 금값은 g당 1만517원, 쌀값은 80kg 기준 6만1428원이었다.1984년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5060세대는 당시를 회상하며 “찢어지게 가난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해 1인당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GNI)은 2300달러(약 317만원)에 불과했다. 국민총소득은 국민이 국내외 생산활동에 참여하거나 자산 제공을 대가로 받은 소득의 합계를 말한다. 국민 소득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만든 경제지표다. 당시 한국의 GDP 수준은 세계 상위 50위 내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은 1987년 이후부터 50위권에 포함됐다.소득 수준이 높은 그룹에 속하는 현대·럭키금성·삼성 등 대기업 신입의 월급(대졸 기준)은 29만원에서 30만원 사이였다. 이들을 제외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일급은 500원에서 800원 사이였다. 하루 일하면 짜장면 한 그릇을 겨우 사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인 3만3745달러(약 4646만원)와 비교하면 격차가 상당하다. 현재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은 14만~18만원 정도다.사회적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제5공화국, 당시 군부정권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다.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등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작품 ‘1984’도 떠오른다. 독재 권력 아래 저항하다 처참하게 사라지는 개인의 모습을 매우 비관적으로 그려낸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말) 소설이다.해당 소설은 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집필한 미래 소설이다. 전체주의(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해 모든 영역에서 통제하는 것) 체제를 비판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사회주의자였다. 작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통치하기 원했던 소련식 체제에 회의감을 갖고 1984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1984년 한국의 모습은 이 소설과 비슷하다. 한국은 독재 정권 하에 통제당했다. 그 시절 지구촌엔 어떤 일이1984년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사건이 유독 많았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 대항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가 성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민정당사 농성 사건’이다. 1984년 11월 14일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 소속 대학생 264명은 민주정의당 중앙당사를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노동악법 개정·선거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농성 약 12시간 만에 경찰병력 등의 투입으로 해산됐다.대규모 인명 피해를 불러온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도 있었다. ‘서울 대홍수’ 사건이다. 1984년 8월 31일 서울·경기·충청 일대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태풍 준(June)의 영향으로 5일간 폭우가 계속된 것이다. 한강은 위험수위인 10.5m를 넘어섰다. 도로 곳곳이 침수됐고, 휴교령까지 떨어졌다. 이 사건은 사망자 189명·실종자 150여 명·재산 피해 1300억원·이재민 23만명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불러왔다. 당시 인재의 요인이 많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사건 직후 북한이 수재 복구를 위한 지원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정치적으로 보면 한일 관계 개선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합의 이후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같은 해 7월 7일 한일 양국 외무장관들의 합의로 이뤄진 공식방문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1년 전 한국을 방문한 것에 대한 일종의 답방이었다.외교부가 2015년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과 일본에서 만난 히로히토 일왕은 “양국의 불행한 역사는 진심으로 유감이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의 상징인 일왕의 말이라 의미하는 바가 더욱 컸다.이외에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6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5월 3~7일) ▲LA올림픽 종합순위 10위(7월 28일~8월 12일) ▲남북회담(11월 15일, 20일) ▲소련인 마투조크의 판문점 망명 사건(11월 23일) 등이 있었다.그해 해외에서도 굵직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16년간 인도를 이끌어온 인디라 간디 수상(66세)이 10월 31일 시크 교도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됐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1월 6일 선거에서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11월 12일에는 미국의 유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세계 최초로 고장난 통신위성을 회수하는 데 성공하며 우주개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월 3일 인도 보팔시에서는 유니언 카바이드라는 다국적 기업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돼 2500여명이 사망했다.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첫걸음경제적으로 보면 1984년은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한 시동이 본격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1981년 발표한 증권시장 국제화 계획을 차근차근 이행하고 있었다. 1984년 1월 재무부는 종합금융회사의 회사채 상장을 허용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코리아펀드가 상장됐다.표류하던 부동산 신탁제도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도 1984년이다. 당시 정부는 모든 시중은행에 신탁업 겸업을 처음 허용했다. 당시 전체 신탁 규모에서 부동산 신탁이 차지하는 비중은 0.0001%로 크지 않았다. 남에게 자신의 토지·자산을 관리 및 처분하게 하는 것이 생소했던 것이다.1984년은 한국과 글로벌 기업의 반도체 격차를 단축한 시기다. 이전까지 10년 이상 벌어졌던 국내외 반도체 산업의 격차가 4~5년 수준으로 좁혀졌다고 업계는 평가한다. 그해 3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대단위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생산 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 세계에서는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동한 첨단 반도체 공장이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직전 해(1983년)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반도체를 월 600만 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당시 화폐가치로 1000억원을 투자해 기흥 공장을 완성했다. 그해 말 럭키금성의 반도체 회사인 금성반도체는 64K D램 양산 및 판매를 개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이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반도체가 안착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현대전자산업(현 SK하이닉스)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설립된 이 회사는 1년 뒤인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반도체 1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에는 자체 개발한 16K S램을 시범생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 제조업 중 하나인 자동차도 1984년에 한 단계 도약했다. 독자 기술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첫 번째 자동차 ‘포니’로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976년 1월 시판된 현대차 포니는 단일 차종 기준 국내 최초로 생산 대수 50만대를 돌파했다. 8년간 포니는 국내 36만5207대, 수출 15만3281대 등 총 51만8488대가 생산·판매됐다. 한국의 포니가 세계의 포니로 발돋움한 해였다. 그해 현대차는 총 1억6600만 달러의 승용차를 수출했다. 자동차를 제작하기 위해 수입한 부품액(납품계열사 포함) 1억3200만 달러보다 3400만 달러를 더 수출한 것이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로서는 처음으로 무역 흑자를 달성했다.한국이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IC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해가 1984년이기도 하다. 당시 통신 불모지였던 한국에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다. 포문을 연 것이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다. 이 회사는 1984년 처음으로 카폰(차량 내 설치된 전화) 서비스를 공식 개시했다.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는 일찍이 카폰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은 미국 벨시스템(AT&T)이 갖고 있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 각료(장관) 관용차에 카폰을 도입했다. 당시 가격은 1000만원을 웃돌았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내놓은 카폰의 가격은 400만원 수준이었다. 이전보다 가격이 많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격 부담은 컸다. 당시 현대차 포니의 가격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다소 무모했던 이 도전은 성공했다. 오늘날 SK텔레콤을 국내 1위 이동통신사업자로 도약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1984년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현실이 됐다. 정확히 40년이 흐른 지금, 경제 위축·정치 갈등·세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2024년.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의 위기도 우리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구절이다.

2024.05.07 05:00

7분 소요
격동의 한국경제와 함께해 온 ‘이코노미스트’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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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의 새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성공을 마음속 깊이 빈다. 제명(題名)에서 보는 것처럼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길 바란다. 지금은 경제저널리즘의 새 장을 여는 데 정열을 쏟을 아주 좋을 때다. 성공을 빈다.” 이코노미스트는 격동의 한국경제와 함께 했다. 역사의 과정을 기록했고, 그 기록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예고하고 있다. 그 시작점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앤서니 새뮤얼슨이 위와 같은 한 편의 글을 전달했다. 1984년, 한국 이코노미스트 창간을 기념한 그는 이 창간을 ‘경제 저널리즘의 새 장을 여는 것’이라고 지칭했고, 성공을 기원한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한 이코노미스트에는 한국경제의 역사가 차곡차곡 담기고 있다. “경제현상·이론도 재미있게 전달할 것” 창간사에는 의외의 단어가 등장한다. ‘즐거움’이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창간에 즈음하여’ 제목의 창간사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라고 밝혔다. 오직 국가번영과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던 당시의 무거운 시대상에서 ‘재미’를 찾아 전달하겠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음에 틀림없다. 당시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적혔다.“흔히 경제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경제기사 하면 딱딱하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경제 소식을 알고 싶어 하는 국민도 이를 외면하는 수가 허다합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같은 폐단을 불식하고 아무리 복잡한 경제 현상이나 경제이론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교양을 쌓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외국에서 새뮤얼슨이 기고문을 전달했다면, 국내에선 최창락 15대 한국은행 총재가 인터뷰에 나섰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서 통화정책의 집행 권한을 정부가 아닌 한은으로 가져오자고 주장하며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한 인물이다. 그는 창간 인터뷰 말미에 “중앙은행의 감독 기능도 중요하지만 자율적 책임경영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최 전 총재는 이코노미스트를 통해 한은의 자율성, 즉 독립적 통화정책의 시작을 알렸다. 한발 앞서 외환위기 예고이코노미스트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1997년 11월 10일에 이뤄진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도 닥쳐올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11월 4일 “태국의 경제회생대책 ‘약효’ 의문” 제목의 기사를 독점 게재했다. 태국 정부의 경제 회생을 위한 종합대책이 미흡하다는 내용이다. 태국의 외환 반출 등 위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전했고, 그렇게 태국에서 발원한 금융위기 태풍은 동남아 국가들을 거쳐 한국을 강타했다. 정부는 1997년 12월 3일 IMF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중요 내용도 이코노미스트에 담겼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한 재벌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라며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회생이 절대적 과제지만 재벌기업에 대한 지원으로 이를 달성할 생각은 전혀 없다. 즉 재벌기업을 특혜 지원해 수출을 늘려 달러를 벌어들여야 하는 방안과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생산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를 택한다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재벌 특혜는 없고 정부가 재벌 문제에 ‘관여’하고 ‘시정’할 것이란 분석이다. 이렇게 IMF 이후 재벌 중심의 사회는 오히려 다소나마 약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한 획을 긋고 사라진 기업인도 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그런 인물이다. 김 회장은 1984년 이코노미스트 제5호 ‘커버스토리’ 인터뷰에서 “나는 없어지더라도 대우재단의 이름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김 회장은 한국 최대의 종합무역상사를 비롯, 자동차·중공업·전자 등 25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총수였고 나이는 48세에 불과했다. 잘 나가던 대우는 급작스러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코노미스트는 김 회장의 퇴진과 관련해 1999년 8월 3일 “대우의 위기는 ‘김우중의 실패’”라고 명명했다. 또 대우그룹 여신만 당시 기준으로 49조3000억원, 담보부족액은 7조5000억원에 달했다고 전하면서 “언제 은행들이 대우의 재무제표를 보고 돈을 빌려줬냐”라는 김 회장의 말에 주목했다. 이 말이 ‘제2의 금융위기’ 불안감을 키운, 잘 알려지지 않은 대우사태의 또 다른 진원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샐러리맨의 우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곽재선 KG그룹 회장 “세상을 올바르고 따뜻하게”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후 격주로 발행됐다. 1994년 10월 5일부터는 주 단위로 발행하며 주간지 면모를 갖췄다. 이후 큰 변화 없이 경제주간지로 운영된 뒤 2021년 3월 말 온라인 전환에 나섰다. 주간지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기사를 제공하는 온라인 체계를 갖추게 됐다. 더 이상 종이 매체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언론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 결과 지금은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뉴스콘텐츠 제공(CP)사로 100만 구독자를 확보한 온오프라인 경제 미디어로 성장했다.이코노미스트는 2022년 6월 13일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중앙그룹으로부터 KG그룹에 인수되며 이데일리 자매사 이데일리M에 ‘일간스포츠’와 함께 편입됐다. 곽재선 KG그룹 회장은 이날 이데일리M 출범식에서 “성냥 하나라도 켜는 것이 언론계 종사자들의 제 역할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가자”고 했다.이코노미스트는 2023년부터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CEO가 머무는 공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CEO의 방’이라는 의미의 ‘C-스위트’(C-SUITE)는 업무를 보는 집무실이라는 의미를 넘어 영감을 얻고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경영자의 창의적 공간을 말한다. 2023년엔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 허연수 GS리테일 부회장 등 CEO 44인의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올해 창간 40주년을 맞아 ‘CEO의 방’을 책으로 출간했다.

2024.05.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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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민주당과 연대하되, 합당은 안 한다”

정책이슈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14일 “더불어민주당과 항상 손잡고 연대하겠지만 합당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조 대표는 이날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국혁신당은 범민주진영이고 형제당이라 같은 부분이 많지만 민주당보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며 이같이 말했다.그는 “국회법상 좋은 법안 통과를 위해 민주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더 필요한 점도 그 이유”라고 설명했다.검사장 직선제와 기획재정부 예산처를 독립해 국회 산하로 두는 검찰·기획재정부 개혁안을 추진하려면, 국회 안건조정위원회 통과를 위한 복수의 정당 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조 대표는 “2022년 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안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을 탈당했다가 복당했는데 당시 국회에 조국혁신당이 있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며 “민주당 외에 개혁적인 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창당 후 지지율 상승에 대해 “윤석열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점에 지지를 보내주신다고 생각한다”며 “머리를 쳐들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행군하겠다”고 말했다.이날 기자회견에서 조 대표는 국민의힘이 대구 중·남구에 공천한 도태우 변호사를 5·18 특별법 위반 혐의로 즉각 고발하겠다고도 밝혔다.그는 “도태우 후보의 사과문 어디에도 북한 개입설 주장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목이 없고 공천받기 위한 변명문에 불과하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전두환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고 비난했다.조 대표는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전남 순천을 방문해 조곡동 상가 시민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민주당과의 연대를 강조했다.조 대표는 “일부에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또는 이재명 대표와 저를 이간질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조국혁신당은 민주당 발목을 잡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이어 “민주당은 수권 정당을 꿈꾸면서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민주당이 하고 싶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을 앞서 나가 싸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조 대표는 이날 오후에는 광주 구도심인 충장로와 광주송정역까지 지하철로 이동하며 광주 시민과 만났다.창당 이후 처음으로 광주·전남을 찾은 조 대표를 보기 위해 순천과 광주 현장 모두 많은 시민과 지지자가 몰려 조국혁신당에 대한 관심을 보여줬다.

2024.03.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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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대통령도 신은 ‘왕자표 고무신’…40년 전통 ‘K-스포츠’ 운동화 [브랜도피아]

산업 일반

2023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를 한 윤석열 대통령은 국산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마운드에 섰다. 윤 대통령 부부의 커플 신발로 다시 한번 주목 받은 이 브랜드의 시작은 고무신 회사였다. ‘왕자표’ 고무신으로 시작해 40년 전통의 토종 국산화 브랜드로 성장한 ‘프로스펙스(PROSPECS)’ 이야기다. 프로스펙스는 한때 침체의 늪에 빠지기도 했지만 2000년대 ‘워킹화’ 카테고리를 개척하며 국내 스포츠업계의 선두주자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왕자표’ 고무신으로 시작, ‘나이키’ 대항해 자체브랜드 ‘프로스펙스’ 론칭프로스펙스를 만든 국제상사는 1947년 정미소를 경영하던 양태진 사장과 아들 양정모 상무가 부산에 설립한 고무신 제조회사 국제고무와 국제화학주식회사가 그 전신이다. 양태진 사장은 아들 양정모가 장사에 소질을 보이자 정미소 가게 한편에서 고무신 사업을 해보도록 했다. ‘국제고무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왕자표’ 고무신을 만들며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고, 1949년엔 국제화학주식회사를 설립했다.국제화학은 6.25 전쟁 중에도 군수품 제조공장을 운영하며 생산 기술을 발전시켰고, 1950년대 삼화고무, 태화고무, 동양고무(현 르까프)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62년부터 국내 신발 기업 최초로 미국에 운동화를 수출하면서 1970년대 총 수출액 10억달러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고 1972년엔 부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 공장을 짓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 양태진 회장을 떠나보내고 회사를 물려받은 양정모 회장은 1976년 국제상사로 상호를 변경하며 새 출발을 알렸다. 이후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며 국내 신발 산업의 전성기와 함께 호시절을 보내던 국제상사는 1980년대에 나이키 등 외국 스포츠 브랜드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양정모 회장은 국제상사의 운동화를 납품받아온 해외 브랜드들이 한국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1981년 자체 브랜드 ‘프로스펙스’를 론칭했다.프로스펙스는 ‘전문가’(Professional)와 ‘성능·사양’(Specification)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합쳐 줄인 말로, 프로 선수들이 착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다는 점을 내세운 브랜드다. 국제상사가 3년 전 인수한 미국 브랜드 ‘스펙스’(Specs)에 ‘프로’(Pro)가 덧붙여진 의미도 있다. ‘우수한 국산품, 프로스펙스’라는 광고 문구를 내세우며 1981년 지금의 롯데백화점 본점인 서울 소공동 롯데쇼핑센터에 1호 매장을 열면서 국산 스포츠 브랜드의 시작을 알렸다.학의 날개를 형상화한 ‘F’ 모양의 로고를 달고 탄생한 프로스펙스는 수출을 통해 이미 다져진 기술력 덕분에 미국 내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되고 세계적 스포츠 잡지 ‘러너스월드(Runners World)’로부터 5성급 등급을 받으면서 빠르게 운동화 시장을 접수했다. 토종 스포츠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며 고급화 전략을 고수한 덕에 수입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버틸 수 있었다.1997년 외환위기 맞아 법정관리까지…LS그룹에 안기고 ‘워킹화’로 대박 양 회장이 이끌던 국제그룹은 재계 7위까지 올라갔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로 부채가 늘어나 1985년 전두환 정권 시절에 부실기업 정리대상으로 지목돼 강제 해체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직후 프로스펙스는 ‘국산 스포츠 브랜드’라는 프리미엄으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공식 후원업체로 선정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국내 브랜드 최초로 해외 진출을 이뤄내며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프로스펙스의 진짜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왔다. 점차 나이키와 리복 등에 밀리며 국내에서의 인기도 줄기 시작한 프로스펙스는 부도를 피할 수 없었고, 1999년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2007년 법정관리 8년 만에 국제상사는 LS그룹에 인수되면서 재도약에 나섰다. 프로스펙스는 대표 상품인 운동화로 승부수를 던졌고, 걷기 열풍을 반영해 기존의 러닝화와 차별화된 ‘워킹화’라는 답을 찾고 걷기에 특화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그렇게 2009년 9월 워킹 토탈 브랜드 ‘W’를 론칭했다.패션모델 이선진에 이어 배우 김혜수를 등장시킨 광고로 대중에게 워킹화를 알린 프로스펙스는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후 나이키와의 계약이 만료된 ‘피겨여왕’ 김연아를 모셔오는데 성공했다. 프로스펙스의 전개를 맡은 LS그룹 산하 LS네트웍스는 국제상사 인수 후 ‘프로’와 ‘스펙스’ 사이의 하이픈(-)을 없앤 ‘PROSPECS’로 브랜드 이름을 정리하고, ‘F’ 심볼마크 대신 곡선형 모티브로 모습을 바꿨다.2011년 모던한 로고체와 유선형 심볼마크로 재단장한 프로스펙스는 김연아를 브랜드의 얼굴로 내세워 적극적으로 스타 마케팅을 펼치면서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 냈다. 2013년엔 ‘연아라인’을 출시하며 누적 100만 족 판매 신화를 썼다. 프로스펙스는 후발주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워킹화 부문 압도적인 1위 브랜드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나이키’ ‘리복’ 공세에 주춤…‘뉴트로’ 열풍 타고 다시 날까 2015년엔 신발제품 분야에선 국내 최초로 KAS 인증마크를 획득해 품질을 인정받으며 워킹화 시장을 주도했지만, 김연아 선수와 계약이 만료되고 후발주자들의 공격적인 도전으로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후 주춤했던 프로스펙스는 최근 뉴트로 열풍을 타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 2018년 9월 선보인 뉴트로 대표 라인 어글리 슈즈 ‘스택스’는 10대 학생들의 호응에 힘입어 지난해 10만족을 판매했다. 중·장년층 위주였던 고객 연령층이 10~20대까지 넓어졌다. 최근엔 올해 39주년을 맞아 81년 출시 당시 썼던 ‘F’ 모양으로 브랜드 로고를 통합했다. 앞서 2017년 뉴트로 트렌드에 발맞춰 재출시한 프로스펙스 오리지널 라인에 F 모양 로고를 다시 선보인 바 있다. 최근엔 프로스펙스의 40년 역사와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담은 책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를 펴냈다. 책은 각각 글과 이미지로 풀어낸 텍스트북, 이미지북 총 2권으로 구성됐다. 먼저 텍스트북은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 김도균의 글을 수록했다. 또 40년의 브랜드 역사와 함께한 주역들과 현재 구성원의 인터뷰를 담았다. 이미지북에는 프로스펙스의 사진 아카이브 자료를 수록했다.프로스펙스 관계자는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브랜드이기에 가능한 일들을 해오며 쌓아온 역사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프로스펙스가 앞으로 만들어 나갈 새로운 기록에 대한 선언이 될 책”이라며 “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관점의 변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프로스펙스가 지켜온 스포츠에 대한 믿음과 가치는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새로운 브랜드 역사를 써갈 것”이라고 밝혔다.

2023.06.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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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동자탄압·임금억제로 물가 안정…조작사건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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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대상엔 노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불순분자로, 그들의 파업·집회를 사회혼란으로 여겼다. 정권에 대항하는 노동운동가들을 삼청교육대에 강제수용하는 등 인권유린은 다반사였다. 심지어 근로자 임금 인상 억제를 강제해 국가 차원에서 물가 안정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1980년 9월~1988년 2월)는 앞서 박정희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96년 총 7차) 중 5차(1982~1986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경제개발 계획은 5차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0~1970년대에는 먹고 사는 생존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1980년대엔 자유·문화·복지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을 이어나가 박정의 정부를 잇는 적통 정권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회 변화를 반영해 신군부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정권의 안착을 도모했다. 그 예로 국풍81 축제, 한국프로야구·축구 창설, 야간통행금지 해제,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진행했다. 사회·근로·연금·의료 관련 복지제도도 개선해나갔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농어촌을 떠나는 이농과 대도시 집중화가 심화하고, 소득불평등과 도시빈민이 증가하던 사회구조 변화도 복지 확충의 한 배경이 됐다. 근로복지 분야에서는 1984년 최저임금제 시행 방안, 1986년 의료보험 전국민 확대 방안과 국민연금제도·최저연금제 도입 방안, 1986년 최저임금법 제정, 부당 노동행위 처벌을 담은 노동조합법 개정 등을 발표했다. 최저임금제는 195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근거를 마련했으나 기업주들의 반발과 사회여건 부족으로 보류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 1986년 국민복지 증진의 일환으로 도입을 결정, 그 해 연말에 법을 만들어 정권 말기인 1988년 시행에 들어갔다. 최저임금제를 통해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도록 강제성을 못박았다. ━ 사회복지망 확충으로 도시빈민·소득불평에 대응 전두환 정부는 사회복지제도도 확충했다. 당시 산업화를 좇아 농어촌을 떠난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의 하층민을 형성하면서 소득불평등과 고령인구·도시빈민 증가, 도시화·핵가족화 확산, 부모부양의식 퇴조 등으로 사회보장 수요가 급증하던 때였다. 대책의 하나로 국민의 절반에 머무르던 의료보험 혜택을 모든 국민이 받도록 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조기 정착’ 방안을 1987년에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을 1988년 농어촌으로, 이듬해엔 도시 전역으로 확대했다. 국민복지연금도 1986년 법 개정을 거쳐 수혜 폭을 넓혔다. 18~60세 미만 모든 취업연령층으로 확대,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우선 실시, 사용자와 근로자 균등 분담, 정부가 제도운영관리비 부담 등의 내용으로 개선했다. 1987년엔 근로자의 주거 안정과 목돈 마련을 지원하는 법도 만들어 이듬해 시행했다.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엔 노동관계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등을 개정했다. 이를 통해 행정관청의 재량권 남용 축소, 노동조합 요건 축소와 설립 자유화, 단체교섭권한 위임절차 간소화와 사후신고, 노사 간 세력 균형을 위한 근거 마련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에 노후생활 연금신탁제를 도입하고 남녀고용평등법을 만들어 여성차별 철폐 기반도 마련했다. 이렇게 전두환 정부 때 기틀을 마련한 사회·근로 복지정책들은 신군부 차기 정권인 노태우 정부 때도 계속 이어졌다. ━ 정권의 폭압에 청년 노동자들 분신자살 잇따라 하지만 전두환은 국민에게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정당·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영장 없는 구금 등을 강행했다. 정권 말기에 각종 복지제도 확충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항거하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는 철저히 분쇄했다. 산업·재벌을 앞세우고 노동·인권을 묵살하던 박정희 정권과 닮은꼴이었다. 옛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의 노사분규 통계를 살펴보면 1985년에는 노사분규 265건, 노사분규참가자 2만8700명, 노동손실일수 6만4300일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권 말기인 1987년엔 3749건, 126만2300명, 694만6900일로 급증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노동자·학생·시민들의 민주·자유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억눌렸던 민심은 대통령직선제와 정당·언론 자유화를 추진한 차기 노태우 정부 때 봇물처럼 표출됐다. 이 때문에 전두환의 철권통치 때 적지 않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부산에서 상경한 김종태씨는 1980년 서울 신촌역 부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사건을 알리고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는 앞서 2년 전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을 운영하다 정부 감시에 걸려 강제 해산됐다. 1984년엔 택시운전사 박종만씨, 1985년엔 건설노동자 홍기일씨, 1986년엔 금속노동자 박영진씨 등이 노조탄압 규탄,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했다. 이 밖에도 노동운동을 하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의문사·행방불명·행려병자 등으로 사라져갔다. 당시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연금,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등 온갖 박해가 이어졌다. ━ 조작사건·경제정책에 희생되고 강제 수용되기도 전두환 정권은 정치범수용소라 할 수 있는 삼청교육대를 운영해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는데, 수많은 노동운동가들도 이곳으로 끌려갔다. 또한 1987년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일화로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비극을 낳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 1980년 12월에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을 추가하는 등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개악했다. 제3자 개입 금지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이나 노동운동 전개를 외부 세력이 돕지 못하도록 원천 금지한 조항이다. 제3자 개입 금지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계를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일부 법 개정이 이뤄졌지만 그 잔재는 20여년동안 이어졌다. 결국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발로 2005년 노사관계선진화 방안에 채택돼 2006년에 결국 폐지됐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임금 인상 억제를 물가 안정 정책의 하나로 악용하기도 했다. 집권 초기 1980~1981년에 유가와 물가가 급등하자 인상을 부추기는 나쁜 심리를 내쫓자며 ‘부정적 심리 추방운동’을 벌였다. 그 대상 중 하나가 노동자 임금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임금 동결을 선언하며 노동자 임금 인상을 통제했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1.11.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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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고도성장’ 대신 ‘물가 안정’…공권력으로 물가 잡은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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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군부독재, 노동운동 탄압 등으로 정권을 이어가는 동안 국내 경제는 3저(저금리·저유가·저환율) 호황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그렸다. 이 시기 국내 경제는 성장과 함께 물가안정이 이뤄졌다. 전두환 집권 초기였던 1980년대 초에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 2차 국제석유파동(오일쇼크) 충격이 겹쳐 경제적 불안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로 역성장 했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실업률도 5.2%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정부에서 이어받아 추진한 정책이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이 계획은 무리한 고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경제·사회기반을 만들어 경제도약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취지였다. 고도성장을 대신해 물가안정을 추구한 것은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을 추진한데 따른 것이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조세제도를 바꿔 기업·산업의 경쟁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제도적 금융지원이나 세제혜택을 없앴다. 당시 국내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수출 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시행하던 주요 공산품 가격과 서비스 요금 통제, 수입 억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금리의 수출 지원 금융과 같은 정책자금과 관치 금융제도, 각종 보조금 지급 등 지원 제도도 남아 있었다. 이들 제도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왔다. 한 예로 저금리 특혜를 적용한 수출 자금을 부동산 투기자금으로 활용하며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농촌 주택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시멘트 수급 사정이 악화했으며, 이렇게 지은 주택은 이촌향도 현상에 장기적으로 빈집이 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는 성장 지원 대신 기업이 경쟁력을 갖춰 물가안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이 밖에도 수입자유화 정책를 시행, 수입규제를 풀어 공급비용이 상승할 여지를 줄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5월 약사법·마약법 등 특별법에 의해 수입이 금지된 344개 품목의 수입자유화 조치를 시작으로 1985년 7월에는 국제경쟁력을 보유한 품목,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비경쟁 품목 등 총 235개 품목을 수입자동승인 품목군에 포함했다. 이에 국내에서 수입산 농산물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도 했으며, 1986년 기준 수입자율화율은 약 92%에 달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정부는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세출 예산을 동결하고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한편, 추곡수매가를 인상하지 않았으며 근로자 임금도 동결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극심한 반대에도 전두환은 공권력을 활용해 이들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 같은 조치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1년 21.4%, 1982년 7.2%, 1983년 3.4%로 안정화하는 흐름을 보였다. 물가가 안정되자 수출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무역수지는 적자를 줄여 나갔고, 1986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42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규모는 1988년에 114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강력한 물가안정책에 오일쇼크 뒤 3저 호황기에 들어서며 경제성장률(국내총생산 성장률)도 높아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 경제성장률은 1980년 -1.6%에서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올랐다. 전두환 집권기(1981~1987년)에 한국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10.2%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의 물가안정책을 두고 공권력을 동원한 노동 탄압으로 임금 상승을 억제, 물가를 관리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거세다. 거시경제 안정화를 바탕으로 기업은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근로자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물가안정책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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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강소기업 육성했지만…목숨줄 쥐락펴락에 정치자금도 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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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쏟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고 계열사를 빼앗기도 했다. 앞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한 고도성장의 지속에는 이바지했지만 각종 부작용도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들어 한국 경제에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중복·과잉시설 심화 등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목표지향적 계획에서 유도적 계획 체제로 바꾸었고, 중소기업 육성을 지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웠는데, 대·중소기업 격차 해소도 그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이에 그가 재임하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년) 기간 중엔 각종 중소기업 육성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1차년도인 1982년 4월초에 수립한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1982~1991)을 기반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전문화를 유도했다. 대기업들과 상호보완적 분업체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성장기여율(고용과 생산 등 전체 산업 성장에 기여한 비율) 증가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3~1979년 사이 중소기업의 수는 전체 기업의 80~90%를 차지했지만 성장 기여율은 20%(제3공화국, 1963~1971년), 33%(제4공화국, 1972~1979년)에 불과했다. 전두환 정부 시기 중소기업 진흥 정책 실시 결과, 생산부문에서 중소기업의 성장 기여율은 41%까지 높아져 대기업(59%)과의 격차를 줄였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경제성장 등을 들어 전 전 대통령의 당시 경제정책에 후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사례도 많다. 전두환 본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제그룹을 해체한 것이 대표적이다. 1949년 왕자표 고무신을 시작으로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을 만들며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던 재계 7위 국제그룹이 ‘부실기업 정리 및 산업 합리화’를 명분으로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의 구조재편을 단행하며 재벌 산하의 기업을 빼앗기도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원중공업을 빼앗겼다. 아울러 정 회장에게는 1977년부터 맡고 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 사퇴 압력을 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현대양행 창원공장(현 두산중공업)을 넘겨야했다. 동명그룹의 사례도 있다. 동명그룹은 목재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1965년 국내 재계서열 1위의 재벌이었고, 해체 전까지 해운·중공업·식품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룹은 1979년 원목 가격 상승과 사업 다각화에 따른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강석진 회장 등을 악덕 기업주로 지목하고 빼돌린 은닉재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동명목재를 수사했다. 이에 동명그룹은 자구노력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부도를 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계에 손을 뻗친 사례로는 일해재단이 있다. 당시 그는 여러 재단을 설립해 국내 주요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일해재단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전 전 대통령은 운영비 명분으로 정치자금을 모집했다. 재단은 1984년 3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재벌로부터 약 598억5000만원의 기금을 모았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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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 최대 호황’…풍요 향수 남긴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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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거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향년 89세)이 대통령직을 떠난 지 28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가 재직 당시 도입했던 경제 정책들은 역대 정부들을 거쳐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는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 시작점이 노태우 정부 때였을 정도로 당시 한국 경제는 성황을 이뤘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는 노태우 정부의 경제 성과는 앞서 박정희·전두환 정부가 만든 토대에서 나온 과실이라는 시선과, 당시 동아시아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흐름을 잘 이용했다는 시각으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국민에겐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한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자가용 대중화, 주식시장 활황, 해외여행 급증, 1인당 국민총소득(GNI) 5000달러 등으로 풍요를 안겨준 정권으로 향수에 남아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대외 국격도 크게 상승해 자부심도 일깨워줬다.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과 군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탓에 대통령 임기(1988년 2월~1993년 2월) 내내 박정희·전두환의 바통을 이어받은 군사정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안으로는 언론 자유화와 부동산시장 개혁으로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밖으로는 북방 정책과 대외교역 확대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 역대 정부와의 차별을 꾀했다. 2018년 서강대를 정년 퇴임한 손호철 전 정치외교학 교수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역대 정부들 중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라고 평가한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혁신적 부동산 정책들 시도 특히 노 정권이 도입한 부동산 정책들은 오늘날까지 역대 정권들마다 차용했을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 중 하나가 ‘토지공개념’ 시도다. 토지공개념이란 토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재화지만 동시에 국토의 일부이기 때문에 공공복리와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국가가 적절하게 규제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권 초기인 2018년 3월 헌법 개정을 통해 추진하려 했으나 야권의 공세에 보류한 정책이다. 1987~1988년에 경제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시중의 풍부한 유동 자금이 부동산 투기로 몰렸다. 그 전까지 안정세를 보였던 땅값은 노 정권의 주택 200만 가구 건설 공약, 서울 올림픽 개최, 급격한 도시화·산업화 등의 여파로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는 토지 공급 제약, 건축 가능한 대지비율 감소, 소득불균형·불로소득 심화, 물가 불안 등을 부추겼다. 이에 노 정부는 올림픽 직후인 1988년 8월 10일 부동산투기억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때 토지공개념 3법(택지소유상한·개발이익환수·토지초과이득세 관련 법)을 꺼내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개인 당 150평을 넘는 집을 갖지 못하게 하는 규제도 시행하려 했다. 건설업이 국가경제를 떠받치던 때여서 경제계와 건설업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도 안 된다”며 격앙했다. 정치권도 크게 반발했다. 이후 토지공개념 법안들은 위헌 결정으로 점차 폐지됐지만 부동산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단골 정책으로 등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부동산 시장 규제책으로 지난해 12월 꺼낸 공시지가 현실화 정책도 1989년 노 정부에서 시작한 제도다. 공시지가는 정부가 땅값을 조사해 공시하는 제도로, 오늘날 국가가 국내 부동산을 관리하고 양도세·증여세·상속세·종합부동산를 매기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잡았다. 노 정부는 이와 함께 대기업을 향해 5·8 부동산특별조치도 내렸다. 법인들이 토지를 과잉 소유해 막대한 개발이익을 독점하자 대기업들이 갖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부동산 폭등을 억제하기 위해 주택 200만 가구 공급과 수도권 1기 신도시 건설도 추진했다. 이러한 부동산 정책들은 노 정권 말기 때 부동산 시장의 폭등세를 꺾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정책 기조는 차기 김영삼 정권 때도 이어졌다. ━ 중산층 확대 ‘마이카·주식투자·해외여행 시대’ 열어 노 정권은 최저임금제를 처음 시행한 정부이기도 하다. 최저임금제는 1986년 법률로 제정됐으며 노 정권 초기인 1988년부터 시행됐다. 당시 최저임금은 노 정권 초창기인 1988년 약 462원에서 정권 말기인 1993년 1005원까지 올랐다. 상승률이 약 117%에 이른다. 노 정권 시기는 경제 호황 덕에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라는 3저 흐름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한국 경제는 노 정부 임기 때 연 10% 안팎의 고도성장을 누렸다. 국제수지가 국가경제 틀을 갖춘 이래 처음 흑자를 기록했으며 실업률 2%대, 수출 600억 달러 돌파(1988년) 등을 나타냈다. 참고로 한국경제연구원(KDI) 조사 자료에 따르면 현 문재인 정부의 지난해 기준 전체 실업률은 4%, 청년 실업률은 9%를 나타냈다. 이 덕에 당시 국민들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부를 쌓게 되고 구매력도 증가했다. 자가용을 구입하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마이카 시대가 열렸으며, 주식시장은 종합주가지수가 1989년 1000포인트를 넘고 주식투자 인구도 급증하면서 활황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당시 사회분위기는 국민들이 박정희·전두환 때 “우리도 잘 살아보세”를 외쳤다면, 노태우 땐 “나도 잘 살수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시기였다. 국가도 이 때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이르던 외채를 20% 밑으로 감축했다. 이와 동시에 그 동안 남의 나라의 도움으로 연명하던 빚쟁이에서 해외 빈국을 돕는 원조 국가로 탈바꿈하게 됐다. 한편, 국민적 호응을 얻은 민주화 정책은 노 정권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다. 철권통치를 앞세웠던 전두환 정권과 달리 노 정권 때는 권위주의를 내리고 자율과 타협을 내세우다 보니 사회 곳곳에서 기강 해이, 공권력 훼손, 친인척 섭정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특히 경제민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 정권의 경제정책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공권력을 어지간해선 집행하지 않다 보니 노동계에선 불법 집회와 사건사고 등이 끊이질 않았다. 역대 정부의 억압정치를 갑자기 없애면서 일각에선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민간인 사찰 사건도 노 정권의 실정으로 꼽힌다. 국군보안사령부와 국세청을 통해 정계는 물론 경제계와 노동계 주요 정적들을 사찰한 사건이 노 정권 중반기에 드러났다. 이 일로 정권 퇴진 운동이 연일 이어졌으며 국군보안사령부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1.10.2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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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국적항공사 영욕의 30년] 난기류에 흔들리는 ‘88년 체제’

항공

88년 제2민항사 선정, 89년 해외 여행 자유화… LCC 등장으로 과점구조에 균열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난기류에 흔들리고 있다. 두 항공사를 이끌던 경영자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새벽 미국에서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이보다 앞서 3월 28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거래정지 등 아시아나항공의 회계 파문의 책임을 지고 퇴진을 발표했다. 두 회사의 수장이 물러나면서 30년 간 유지된 항공 업계 투톱 체제는 전환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두 회사의 과거를 돌아보면, 경영권 문제뿐 아니라 항공정책과 저비용항공사(LCC)의 성장 등 시장환경 변화도 두 대형 항공사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20년 간 유지된 ‘1국 1항공사’ 체제 국내 항공운송산업의 양강체제는 1988년 제2민항인 아시아나항공의 출범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1969년 출범한 대한항공이 약 20년간 독점체제를 유지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창업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적자가 지속되던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이후 1972년 보잉747과 에어버스의 A300 등 당시의 최신 기종을 구매하면서 규모를 키웠고, 미국·유럽의 취항지도 서서히 늘리면서 성장했다. 특히 1970년대 대한항공은 1·2차 오일쇼크라는 산을 넘으면서 크게 성장했다. 조 회장이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당시 연료비 부담으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이 수천 명의 직원을 감원하는 와중에도 시설과 장비 가동률을 오히려 높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진행했다. 불황 넘어 호황을 대비한 것이다. 이 결단은 오일쇼크 이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 중동 수요 확보와 노선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운수권 독점을 무기로 자국 항공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한 정부의 역할도 컸다.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막대한 규모의 항공기 도입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고, 공직자는 의무적으로 대한항공 항공편을 이용했다. 자국 산업 육성과 국위선양 등 외교적 목적을 위해 철저한 규제를 통해 보호를 해준 셈이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1국 1항공사’라는 자국기 보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이기도 했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자국기 보호를 통해 운송수입을 높이는 데 주력해온 각국의 항공정책이 항공산업 규제 완화 조치로 항공수요가 급증하면서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해 관광수지를 극대화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먼저 국가가 항공산업을 보호한다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경쟁을 통한 서비스 강화 등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1978년부터 자유화 정책을 채택했다. 이어 일본·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도 복수항공 취항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 서비스 미흡과 항공료 인상 문제로 복수민항 허용 국내에서도 복수민항 허용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대한항공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항공사로 키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서비스 미흡과 항공료 인상, 외국과의 항공협상에서 복수항공사 취항 요구에 대응할 수 없는 문제점 등이 지속적으로 지적됐다. 더구나 88서울올림픽 등 폭발적인 항공수요 급증 요인을 목전에 두고 대한항공에만 공급을 의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1987년 국내선 승객은 507만 2000명으로 전년에 비해 무려 24%가 늘었다. 국제선도 같은 기간 10%가 증가했다.결국 1988년 2월 12일 정부는 국내 항공 업계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며 제2민항사로 금호그룹을 선정했다. 전격 발표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하기 13일 전이었고, 실제로 인가를 내준 것은 퇴임 하루 전이다. 교통부가 공식발표에 앞서 통고하면서 경제부처들도 당일에야 알았다. 당정협의와 노태우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인가까지 극비리에 이뤄졌다. 당시 재무부의 한 고위 관계자가 “신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며 섭섭한 기색을 나타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또 당시 재계 20위권인 금호그룹에 특혜를 주었다는 시비가 뒤따랐다. 박성용 회장이 그룹을 이끌 때다. 교통부는 “▶자본력이 건실하고 ▶운송사업 경영능력이 풍부한 업체로 하되 ▶대재벌은 제외한다는 선정 기준을 세웠으며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민항 설립을 희망한 금호그룹에 허가를 내줬다”고만 밝혔을 뿐 금호가 선정되기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했다. 이에 시장에서는 전 대통령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의식해 호남을 근거지로 커온 금호그룹에 특혜를 준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 투톱 체제 이후 양사 서비스 질 높아져 약 20년 동안 항공운송을 독점해온 대한항공은 독재정권 시절이라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우려했던 일”이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시기상조다” “금호가 과연 해낼 수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항공은 그전까지 제2민항 얘기가 나올 때마다 “국적 항공사는 하나로 충분하다”며 항공사업의 전문성과 안전성 등을 들어 제2민항 허가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에도 정부에서 단행한 복수민항화 조치에 대해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는 근시안적인 항공정책으로 자국 항공기업의 경쟁력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라며 비판을 이어갔다.어쨌든 금호그룹은 그 해 12월 23일 국내 제2민항의 첫 비행기를 띄웠다. 2월 17일 출범 당시 사명은 ‘서울항공’이었지만, 취항 직전 아시아나항공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두 기업은 조종사 스카우트, 노선 배분 등을 놓고 다투기도 했지만 나란히 세계적인 규모와 노선망을 갖춘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했다. 아시아나항공이 적극적으로 신형 기종을 도입하고 공항 외투 보관, 기내 금연 등 참신한 서비스를 제공하자 대한항공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항공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기내식, 공항서비스, 항공요금 등 항공 서비스의 질도 높아졌다.정책 변화에 따른 호재도 있었다. 1989년 1월 1일부터 내국인의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로 항공수요가 크게 확대됐다.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 첫해인 1989년 내국인 출국자수는 전년 대비 약 53% 증가했다.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에는 수요가 부족한 국제선은 일본을 비롯한 해외발 국내 입국 수요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마저도 국내 항공사는 저가 정책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어 이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로 아웃바운드 수요를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두 항공사는 승승장구했다. 이렇게 두 회사가 본격 성장궤도에 오르던 1991년, 박삼구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사장으로 취임했다.이렇게 자리 잡은 두 항공사는 안정적인 운수권 확보로 성장을 이어갔다. 운수권은 특정 국가의 영공을 이용하거나 착륙하기 위한 허가다. 따라서 어떤 노선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항공사의 생사를 좌우한다. 신규 운수권은 정량평가의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항공사를 선정한다. 때문에 대형항공사가 운수권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LCC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운항을 시작한 2006년까지 운수권을 사실상 과점했다.물론 두 회사에게도 외환위기는 힘든 시기였다. 당시 대한항공은 자체 소유 항공기를 매각 후 재임차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대처했다. 또 힘든 시기에 오히려 항공기를 대량 구입하면서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의 신뢰를 얻었다. 이 관계는 이후 대한항공의 안정적인 항공기 수급에 큰 도움이 됐다. 한편 아시아나항공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체질 개선에 주력했다. 기내식사업부를 매각하는 등 수익성이 나쁜 한계 사업과 비주력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이 시기 글로벌 항공 업계에는 ‘동맹체’ 바람이 불었다. 1997년 ‘스타얼라이언스’’가 설립됐고, 2년 후 ‘원월드’가, 2000년엔 ‘스카이팀’이 등장했다. 항공사 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좌석 공유, 코드쉐어(공동운항), 공동 마일리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동맹체별 전용 라운지·체크인카운터 등의 혜택으로 고객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대한항공은 2000년 델타·에어프랑스 등과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했고, 아시아나는 2003년 스타얼라이언스에 15번째 회원사로 합류하면서 글로벌 항공사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 중장거리 노선 경쟁력 여전하지만… 업계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온 건 2000년대 중반이다. 세계적인 항공자유화 확산과 주요국과의 항공협정을 통한 운수권 확대가 이뤄진 시기다. 특히 국내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2000년대 중국 노선의 운수권 확대와 2011년 시행된 일본의 항공자유화다. 또 한국을 동북아 허브로 만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태국·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를 연결하는 하늘길이 이 과정에서 두 대형항공사 외에 LCC가 운수권을 확보해 단거리 국제선에 안정적으로 진출하면서 양대 항공사의 과점체제에 균열이 갔다. 2006년 각각 37.7%, 23.9%였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점유율은 지난해 20.5%, 14.6%로 낮아졌다. 이를 기반으로 2010년대 들어 LCC 업계의 비약적인 성장에 따라 두 대형항공사의 실적은 급감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영업이익은 2010년부터 줄어들어 2013년엔 나란히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아시아나항공은 2010년 채권은행단과 자율 협약을 체결하고 재무구조 건전성 확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두 회사의 실적은 2014년부터 반등해 다시 상승세를 탔다. 미주·유럽·중동 등 여전히 두 회사가 대다수 운수권을 갖고 있는 중장거리 경쟁력을 유지한 효과로 분석된다. 입·출국하는 승객수가 많고, 비례해 운항편도 많은 이른바 ‘황금알’ 노선이다. 그러나 두 항공사가 예전처럼 이들 운수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할지는 미지수다. LCC들이 최근 장거리 노선 확대와 대형기 도입에 과거보다 적극적인 데다, 두 회사의 총수 일가가 연이어 ‘갑질’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정부가 항공산업의 진입 규제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각각 정부의 제안과 허가로 시작된 항공 투톱의 미래는 결국 얼마나 정부의 비호에 의존하지 않고 있느냐에 달린 셈이다.

2019.04.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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