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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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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어디서 즐길까”…황홀한 겨울밤, 야경 명소 6곳

유통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크리스마스 트리와 조명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곳곳의 핫플레이스를 찾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야경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유통 업계의 크리스마스 ‘핫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밤을 즐길 수 있는 명소 6곳을 소개한다. ━ 크리스마스 마켓부터 아이스링크장까지 즐길거리 가득한 ‘호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엔 나흘 사이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호텔 광장에 조성된 크리스마스 마켓 때문이다. 축구장 보다 큰 크기인 2700평에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마켓은 저녁이 되면 반짝이는 전구들과 장식들이 어우러져 있다. 마치 북유럽 산타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파라다이스시티 측은 3년 만의 대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MZ들 사이에 SNS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파라다이스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는 호텔 곳곳에서 가스펠, 합창단 등 음악 공연에 산타와의 포토타임, 미디어 파사드 쇼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빙판 위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지난 2일 재개장한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아이스링크장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커플이나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다. 호텔 측은 “은빛 얼음 위 황홀이 빛나고 있는 불빛들 뒤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서울의 야경은 동화처럼 아름다워 인증샷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포토 스폿”이라며 “반짝이는 얼음과 불빛 그리고 야경을 조명 및 배경 삼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고 전했다. ━ 입구부터 내부까지 크리스마스 불빛 가득 '백화점' 백화점 업계의 크리스마스 야경 전쟁도 치열하다.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 크리스마스 장식의 핵심은 서울 중구 소공동 본점 외관에 길이 100m, 3층 높이의 대형 파사드를 구축한 것이다. 구조물 전체를 트리와 조명으로 꾸미고 쇼윈도를 설치했다. 가족과 연인, 친구 단위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신세계는 지난 19일부터 'Magical Winter Fantasy'라는 주제로 본점 본관 미디어 파사드를 비롯해 전 점포의 외관 장식을 소개했다. 작년에도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미디어파사드는 인생샷 명소로 인기를 얻으면서 많은 인파가 몰렸다. 신세계의 외관 장식은 오고 가는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총 3분여가량 선보이는 이번 파사드 영상은 크리스마스 기차를 타고 아름다운 설경 위를 달려 도착한 마법의 성에서 펼쳐지는 파티를 담았다. 현대백화점은 '피스 앤 러브' 테마로 더현대 서울 5층 사운즈포레스트와 무역센터점 정문 광장 등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와그랑지(곡물창고), 조명 등 다양한 조형물로 구성된 'H빌리지'를 전시했다. 현대백화점 측은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지친 고객들에게 행복과 희망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행사로 바라보는 구조가 아니라 고객이 직접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도록 공간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 크리스마스의 원조 명소 '테마파크'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앞 ’샤롯데 가든‘에 회전목마가 들어섰다. 1900여 개 조명으로 장식된 회전목마는 빨간색·하얀색·금색 위주로 칠해져 클래식한 느낌을 더했다. 총 40인승 규모로 롯데월드타워·몰 3만원 이상 구매 영수증을 제시하면 탑승할 수 있다. 지난 11월 12일 오픈 후 5만6000여 명이 탑승했다. 주말에는 1시간가량 줄을 설 만큼 인기를 끄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롯데물산 측은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돋보여 회전목마 앞에서 사진을 남기는 고객들로 북적인다고 전했다. 경기 과천 서울랜드에는 밤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찾아온다. 야간 공연인 '스노우 뮤직 글로브'는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하얀 함박눈으로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했다. 서울랜드 크리스마스 야경 명소는 정문 앞에 마련된 대형 LED 트리다. 8m 높이의 거대한 LED 트리는 반짝이는 조명과 장식물로 화려함을 뽐낸다. 밤엔 하얀 눈이 내리는 야간 공연과 레이저쇼, 캐릭터 인형극과 패밀리 매직쇼, 눈썰매장과 얼음 빙어낚시 등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즐길 거리가 준비된다. 김연서 기자 yonso@edaily.co.kr

2022.12.24 08:20

3분 소요
‘크리스마스 핫플’된 서울 특급호텔, ‘장식 경쟁’ 불붙었다

유통

한 해 중 호텔이 가장 화려하게 꾸며지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자 호텔업계가 화려한 장식으로 소비자 사로잡기에 나섰다. 크리스마스트리부터 실내외 장식과 이색 조형물까지 연말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사진 명소’ 호텔들이 ‘인증샷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 남산에 위치한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지난 10일 ‘오아시스 아이스링크’를 개장했다. 아이스링크는 약 1070㎡로 국내 호텔 아이스링크 중 가장 큰 규모다. 아이스링크는 크리스마스 조명과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졌다. 남산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자연 속에 있는 것처럼 야외 스케이트를 만끽할 수 있다. 올해는 프리미엄 러기지 브랜드 ‘리모와’와의 협업으로 아이스링크 중심에 스노우 글로브 모양의 조형물과 리모와의 알루미늄 트리·거대 오너먼트 등이 들어서면서 이색적인 포토존이 탄생했다. ‘리모와 페스티브팝업존’은 12월 18일까지 운영되며 팝업존에 방문하거나 이벤트 참여를 하는 고객에게는 핫팩, 알루미늄 콜드 브루, 스티커를 선물로 증정한다. 지난 2일에는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아이스링크가 재개장했다. 호텔 측은 “은빛 얼음 위 황홀이 빛나고 있는 불빛들 뒤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서울의 야경은 동화처럼 아름다워 인증샷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포토 스폿”이라며 “반짝이는 얼음과 불빛 그리고 야경을 조명 및 배경 삼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고 전했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는 또 다른 포토존, 약 6m 높이의 거대한 로비 시그니처 크리스마스트리에서도 연말 ‘인생샷’을 남길 수 있다. 서울 잠실에 위치한 ‘시그니엘 서울’ 로비에 들어서면 79층부터 81층까지 이어지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다. 레드·골드·실버 색의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 밑 작은 통나무들이 겨울 감성을 더한다. 낮에는 통유리창 너머로 스카이라인이 보이고, 해가 진 후에는 나선 계단을 따라 비치된 랜턴 조명과 꽃장식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간대별로 바뀌는 자연 채광으로 다양한 분위기의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서울드래곤시티’는 연말 맞이 메인 로비의 캐릭터 조형물 ‘드라코’를 장식한 크리스마스 포토존을 선보인다. ‘드라코’는 용(Dragon)이 되고 싶은 ‘아기 요정’ 콘셉트로 제작된 서울드래곤시티의 브랜드 캐릭터다. 높이 약 5m의 압도적인 크기로 MZ세대는 물론 가족 단위 고객에게도 ‘인증샷 명소’로 인기다. 인스타그램 인증샷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드라코’와 사진을 촬영한 후 지정된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하면 추첨을 통해 소정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서울 시청과 명동 사이에 위치한 ‘롯데호텔 서울’에서는 반짝이는 외관 조명과 금빛 계열 장식으로 꾸며진 다섯 그루의 대형 트리와 루돌프 등을 볼 수 있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맞아프랑스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와 협업을 진행한다. 또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은 호텔 1층에 위치한 호텔 로비와 6층에 위치한 쟈뎅디베르 야외 가든 공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한다. 김연서 기자 yonso@edaily.co.kr

2022.12.17 16:00

2분 소요
[조원경의 ‘IF’ㅣ부자를 꿈꾸는 당신에게(10) 좋은 사업 파트너가 있다면] 서로를 믿고 같은 꿈을 꿔야 멀리 간다

전문가 칼럼

인연이자 악연이었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상반된 성격과 음악적 취향으로 보완관계 되기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있어야 한다. 만나도 좋을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업을 할 때 피해야 할 사람이 있다. 개인적인 욕심이 너무 강한 사람은 멀리하는 것이 좋다.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남의 탓을 잘하기에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인간미가 없는 사람은 언제 변할지 모르기에 꺼리게 된다. 부정적인 사람은 긍정의 에너지를 앗아갈 수 있어 시너지 효과가 생기기 어려울 듯하다. 원칙이 없는 사람도 멀리 할 필요가 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함께 일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과 동업하지 말라 했다. 돈이 개입되면 오랜 우정과 친분에 금이 가기 쉬우니 사업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방법이리라. 하지만 친구이면서도 잘 된 경우도 있으니 사업을 함께 하는 것이 맞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하다.하지만 하나의 고독한 천재보다 둘이 모여 서로를 보완하고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기도 하다. 환상의 콤비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었다. 부부 간에도 궁합이 맞아야 금슬이 좋다고 했다. 남인 경우 좋다가도 싫어지는 게 사람 사이인데 오랜 우정을 지속하기는 참 어려울 것 같다. 세기의 4인조 그룹 비틀즈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어땠을까? 그들의 노래를 차례로 들으며 문득 인생과 사랑, 우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날 존은 자신의 부인이 싫어진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잔소리로 가득했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들의 노래를 요즘 시대의 가사로 변형해 우리네 삶을 조명해 보자.“그녀의 말이 끊임없는 빗줄기가 됩니다. 그 말이 종이컵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잖아요. 이내 구멍 난 종이컵 사이로 미끄러져 우주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슬픔의 웅덩이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지만 나는 마음을 활짝 열고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어 봅니다. 즐거움의 파도를 타는 생각을 해 보니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파도가 나를 소유하려 듭니다. 거친 파도가 나를 부드럽게 만져 주네요. 나는 그 파도에서 소우주의 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누군가 내게 깨달음을 준다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단지 나일 뿐이지요. 저 멀리 불빛이 부서집니다. 나는 은하수 저편에서 수많은 불빛이 춤을 추며 내게 손짓하고 있음을 느껴요. 많은 생각이 정처 없이 ‘생각이란 우체통’에서 방황합니다. 불멸의 사랑을 나도 믿었는데 그렇지 못한 나를 자책해 봅니다. 우주를 가로질러 나는 외쳐 봅니다. 누구도 나의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나의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존에게 여자가 생기자 그의 아이는 풀이 죽는다. 친구 폴은 실의에 빠진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노래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존이 미워지는 마음도 생기지만 어찌할 방법도 없다.“아이야, 세상 짐을 네 어깨에 다 올려놓으려고 하지 마. 슬픈 노래를 하나 끄집어 내서 경쾌한 노래로 바꿔 봐, 그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려고 해봐. 그러면 네 마음이 훨씬 나아질 거야. 너는 언젠가 그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거야.” ━ 비틀즈에게서 듣는 세상의 명과 암 그녀는 누구일까? 존은 새로운 연인 오노 요코를 생각해서 폴이 그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 주었다고 여겼을까? 세간에는 폴 역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고, 그녀를 받아들이려는 자기를 위로하는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존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의 불장난으로 그녀가 임신을 했고 가정을 소홀히 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존과 그의 첫 부인 신시아 사이에서 ‘둘의 힘’은 느껴지지 않고 각자가 따로 노는 느낌이 만연했던 게 사실이다. 그냥 서로가 각자였을 때가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존은 사랑 없는 결혼에 방황하며 더욱 철학적이 되어 가는 자신을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본다.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도 세상을 지배한 음악가는 많다. 비틀즈의 존 레논, 롤링 스톤즈, 도어스…. 누군가는 널리 알려진 록 스타 가운데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은 런던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졸업한 엘튼 존뿐이라고 한다.“그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아요. 누구의 소유도 아닌 땅에 앉아, 아무 소용없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어떤 관점도 없고요. 행선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 친구, 당신과 나를 닮지 않았나요.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당신이 뭘 잊고 사는지 말해줄게요. 그래도 당신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그는 정말 눈이 멀었어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지요. 부족한 무언가를 말해주면 좋을 텐데.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너무 걱정 말아요.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져봄은 어떨까요.”존의 사후에도 전쟁은 이어지고 차별과 억압은 여전히 존재한다. ‘평화로운 세상’을 일구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늘 그렇듯 좌절되고 있는 것이다. 흑과 백의 차별이 만연했던 당시에 비틀즈는 1964년 투어에서 관객들이 피부색에 상관없이 어디에나 앉을 수 있도록 요구했다. 그는 위대한 뮤지션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는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자기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음악에 대한 격렬한 사랑이 끊임없이 솟아남을 느끼고 있었다. 존은 그의 분신인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을 위해 ‘굿나잇’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존은 혈육의 정을 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외로운 날 아들을 생각하며 자장가를 부르는 존을 생각해 본다.“나를 위해서 꾸었던 달콤한 꿈, 너를 위해서 꾸었던 달콤한 꿈, 이제 ‘잘 자’ 하고 말할 시간이야. 태양은 어둠속에 자취를 감추고 ‘잘 자’ 하고 인사를 하네. 눈을 감고 잘 자. 나도 그럴게.”비틀즈가 해체되고 존은 ‘이매진(Imagine)’ ‘우먼(Woman)’ 등의 노래를 만들며 세상을 향한 외침을 노래한다. 언론이 부추긴 것인지 모르나 존과 폴은 서로를 헐뜯는 존재로 비치기도 한다. 노동자의 아들이자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그의 환경을 떠나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물론 ‘천국은 없다’는 그의 생각에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해보면 쉬운 일이죠. 우리 발 아래 지옥은 없어요. 오직 푸른 저 하늘만 있죠. 모든 사람이 오늘을 위해 사는 세상을 생각해봐요. 국경은 없다고 상상해 봐요. 어렵지도 않아요? 서로 죽일 일도 없고, 종교 역시 없는 세상, 이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 봐요. 나를 몽상가라 할 수 있겠지만, 혼자만의 꿈은 아닙니다. 하나 되는 세상을. 내 것이 없다고 해봐요. 할 수 있을 거예요. 탐욕과 궁핍도 없고, 인류애만 넘치는, 이 모든 사람이 그런 세상을 나누어갑니다.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 파트너에서 적이 되는 것은 백지 한장 차이 무정부주의자일까? 무신론자일까? 사후에도 돈을 벌고 있는 그가 무소유를 주장했다니 상상이 안 간다. 어쩌면 한번 살고 가는 세상에서 그는 어린 시절 돈에 궁핍했지만, 인기를 얻은 후 돈에 초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매진이 존 레논의 대표작이라면 예스터데이와 헤이 주드는 폴 매카트니의 대표작이다. 비틀즈가 해체된 후 그들은 역사 속 라이벌 관계가 된다, 사사건건 반목했던 그들은 존이 죽기까지 서로의 존재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팝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폴은 존의 사후에 이런 말을 한다.“비틀즈 해체 후 우리가 서로 불편한 관계로 알려져서 속상했습니다. 실제로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존재였죠.”애증의 관계란 게 있다. 어쩌면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아닐까? 인류의 “함께”를 부르짖은 존조차 첫 아내에게 사랑을 온전히 바치지 못했다. 존의 사후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관계라고 했지만 폴이 존에 대해 질투심이 없었을까? 비틀즈의 해산 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큰 심리적 고통을 겪었고, 해체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린 채 서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71년 둘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통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먼저 선제공격을 한 쪽은 폴 매카트니였다. ‘Too Many People’이란 곡에서 “너는 굴러 들어 온 복(비틀즈)을 둘로 쪼갰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 앨범의 뒷면에 딱정벌레가 교미하는 사진을 넣었다. 존 레논은 격분했다. 이를 자신과 오노 요코에 대한 비꼬기로 여긴 것이다. 이에 존 레논은 훨씬 세게 응수한다. 자신의 앨범 이매진에 폴의 앨범의 커버를 비꼬는 사진을 넣는다. 그리고 폴 매카트니를 비난하기 위해 ‘How Do You Sleep?’이란 노래에 “그딴 곡이나 써놓고 잠이 오냐?”는 내용으로 도배를 한다. 이는 오노 요코와 함께 쓴 가사라고 알려져 있다. 폴은 이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다행히 존 레논의 같은 앨범에 수록된 ‘Jealous Guy’라는 곡 내용이 그의 마음을 다소 진정시킨다. 폴 매카트니는 가사에서 존이 그래도 일면 그를 인정해 줌을 알게 된다. 존이 폴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돌이켜 보면 폴은 비틀즈 이후 윙스(Wings)를 이끌며 비틀즈에 버금가는 막대한 성공을 거뒀다. 빌보드 톱10 싱글만 22곡이었고 1위곡도 My love, Band on the run, Ebony and ibory를 포함해 9곡이나 된다. 그렇다고 폴이 마냥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성공한 자는 그에 걸맞은 왕관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폴은 자신이 ‘예쁜 레코드를 만드는 팝 가수만으로 기억되지나 않을까’라고 걱정했다. 그는 실제로 음악의 깊이가 없고 상업적이며 존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How do you sleep?에서 가장 뼈아픈 지적을 해댄 존의 이야기는 정말 상처가 됐다.“예쁜 얼굴은 1, 2년 정도 갈지 모르지만 곧바로 사람들은 네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야. 네가 만드는 사운드는 내 귀에 무작(Muzac)으로 들릴 뿐이야.”무작이란 방송에서 들려나오는 평범한 스탠더드 팝을 가리킨다. 폴은 존에 대한 적의를 감추지 않았으나 가슴이 쓰라린 쪽은 폴이었다. 존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성향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폴은 얼마나 뼈아팠으면 1976년 과의 인터뷰에서 존을 ‘지구상의 최고 악인’이라고 말했을까.“존은 ‘In my life’를 내가 쓴 사실도 망각해 버렸다. 사실 그 곡은 내가 작곡했다. 그는 파렴치한 돼지일 것이다. 그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깊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다. 존의 사후에도 폴의 증오는 이어졌다. 1992년에도 “난 아직 상처를 받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용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스스로 여유를 찾으려고 했어요. 난 발라드가 좋습니다. 난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흔히들 가정적이라고 하면 예술의 적이라고 하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단지 가정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런던으로 가 일주일에 3일 밤을 보내고 야간업소에 출연해 때로 바지를 내리고 공개적으로 많은 것을 서약할 것인가로 고민할 수 있습니다. 난 결정했습니다. 발라드와 아이들로요.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 잘 관리된 라이벌 의식은 성공의 원동력 분명한 사실은, 서로가 싸우기도 했지만 존과 폴은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서로에게 의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성공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노래에 담긴 의미를 다 새기며 들을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글이 다르게 읽히듯이 노래도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어제를 그리워하는 노래 ‘예스터데이’가 연인을 잃은 상실감을 표현하든 폴이 존을 미워해 존이 모든 것을 잃고 어제를 그리워하는 노래로 만든 것이든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모습이 서로를 키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했다. 존 레논이 없는 비틀즈를 상상할 수 없듯이 폴 매카트니가 없는 비틀즈도 상상할 수 없다. 둘의 라이벌 관계가 존이 죽은 지금에도 비틀즈를 추억하는 이유가 된다. 비틀즈가 해체된 후의 존과 인터뷰한 1980년 죽기 얼마 전 기사를 각색해 본다.“비틀즈 멤버가 다시 모여서 자선 콘서트를 여는 건 어떻습니까?”“자선 같은 건 하기 싫어요. 이미 죽을 만큼 자선을 했어요.”“네?”“비틀즈가 마지막으로 공연한 1966년부터 내 이익을 위해 콘서트를 열어 본적은 한번도 없어요. 록의 부활을 위한 토론토 공연을 빼고는요. 십일조라고 들어봤나요?”“자신의 소득을 얼마만큼 기부하는 것 말이죠?”“그래요. 난 그걸 개인적으로 하고 있어요. 세계 평화를 무대 위에서만 외치진 않을 겁니다.”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에게 사인을 받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한 남자가 뉴욕 맨해튼의 다코타 아파트 밖에서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존 레논의 등을 향해 5발의 총을 쏴 4발을 맞췄다. 그는 소설 을 읽으며 경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존 레논의 팬으로 자기 자신과 존 레논을 동일시했다. 본명 대신 존 레논이라는 이름을 썼다. 존 레논이 1970년 긴 머리를 자르고 단발 스타일을 하자 자신도 단발을 고수했다. 존 레논이 7살 연상의 일본인 오노 요코와 결혼한 것을 보고 4살 연상의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그는 존 레논 때문에 자신이 위험해졌다고 생각했다. 존 레논의 이매진이 반향을 일으키고 인기가 치솟자 미국과 영국 정부의 감시를 당해야만 했고 자신도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범인은 결국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존 레논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슬픈 운명이었다. 존과 폴은 상반된 성격과 음악적 취향을 지녔기에 서로를 보완할 수 있었다. 존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노래를, 폴은 서정적인 음악을 선호했다. ━ 투자계의 명콤비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 사업에서 좋은 파트너를 얻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하는 것이 낫다. 어쩌면 우리는 남의 흠을 보기가 쉽다. 그럴 때 파트너의 실수를 고치려 들지 말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파트너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는 과감히 그와 헤어지는 것이 좋다. 믿음이 없는 사업은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으로 끝나기 쉽다. 상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그래서 동업에 필수이다. 서로에 대해 믿음을 갖고 함께 꿈을 꾸어야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하고, 상대의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는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헤어지기 쉽다. 물론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경우에서의 얘기다. 임계치를 넘는데 계속 관용을 베푸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서로가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한다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된다.투자에도 이런 명콤비가 있다. 여든을 훨씬 넘긴 두 투자가는 아직도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다. 그들은 버크셔해서웨이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워런 버핏이 유명한 이유는 지속적이고 높은 투자 수익률 때문인데, 그 과정에서 의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찰리 멍거다. 워런 버핏은 찰리 멍거를 스승이자 최고의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를 보면 서로가 보완재가 되어 좋은 화음을 냈지만 서로에게 질투심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죽음과 세월이 그들에게 용서와 그리움이라는 선물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워런 버핏의 찰리 멍거에 대한 진심을 더욱 본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찰리 멍거는 투자에서 워런 버핏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인물로 보인다. 그가 말한 투자 철학이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지금 ‘만약에 좋은 사업 파트너가 있다면’을 생각하며 찰리 멍거의 조언을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그의 나이만큼 인생을 관조적으로 보는 혜안이 돋보인다.“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 같은 단 한개의 모델만 사용하고, 모든 문제를 그것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격언을 하나 예로 들어 보지요.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세상이 못처럼 보인다’. 그런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미련한 방식입니다. 한두 개의 모델만 사용한다면,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무시하고 당신의 모델에 현실이 맞춰지도록 진실을 이리저리 변형해 곡해하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혹시 애꾸눈으로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있지 않나. 존 레논의 성향이 어떻든 그가 이루고자 했던 평화의 세상은 이뤄져야 한다. 폴 매카트니의 성향이 어떻든 어제에 대한 그리움과 진한 신뢰가 오늘과 내일의 우리를 만든다. 존 레논이 죽은 지 40년이 되어 간다. 그의 사후에 애정 어린 친필 편지를 34년 후에 받은 이가 있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스티브 틸스턴. 1971년, 21세에 신인 가수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음악 잡지 와의 인터뷰에서 성공과 부유함이 음악적 재능을 해치게 될까봐 걱정이 된다고 털어 놓는다. 존 레논은 이 인터뷰를 인상 깊게 보았다.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신인 가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써서 잡지사로 보냈다. 스티브 틸스턴에게 편지가 전달된 것은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34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존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부유해지는 것이 당신이 우려하는 것처럼 당신의 경험까지 바꾸진 않는답니다. 유일한 변화는 돈·먹을거리·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 뿐이죠. 감정이나 인간관계 등 다른 모든 경험은 똑같아요. 나와 요코도 풍요와 가난을 모두 맛보았죠. 사랑을 담아, 존과 요코”부는 어쩌면 우리에게 걱정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지는 모르겠다. 인생의 대가들을 보면 결국 부를 좇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필자는 국제경제 전문가로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이다. 대한민국OECD 정책센터 조세본부장, 대외경제협력관 등을 지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19.02.1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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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장식된 빈 번화가에서 쇼팽의 음악을…

전문가 칼럼

오스트리아 빈(Wien)은 이탈리아식 표기 비엔나(Vienna)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도시명이 주는 어감처럼 빈은 뭔가 달콤하고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을 지닌 우아한 미인과 같은 인상을 주는 도시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불빛이 거리를 장식할 때는 빈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더욱더 돋보인다. 사실 빈은 크리스마스 절기에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 명품거리 콜마르크트 화려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곳곳에 배어 있는 빈 시가지의 심장은 고딕식의 높은 첨탑이 있는 슈테판 대성당이다. 대성당 앞 광장은 빈의 최고급 쇼핑구역 ‘황금의 U’(Goldenes U)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황금의 U’라고 불리는 것은 3개의 번화가, 즉 캐른트너 슈트라세, 그라벤, 콜마르크트가 마치 U자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특히 크리스마스를 맞는 12월이 되면 쇼핑인파로 넘쳐나며, 새해를 맞기 직전인 12월 31일 저녁에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서로 엉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과 같은 왈츠 음악에 맞추어 흥겨운 춤판도 벌인다. 황금의 U에서 콜마르크트가 끝나는 곳에는 고딕 양식의 미하엘 성당의 첨탑과 바로크 양식의 우람한 황궁 입구 미하엘러토어(Michaelertor)와 그 위에 솟은 화려한 푸른색 돔이 시선을 끈다. 이 웅대한 황궁은 거대한 제국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이었다. 황궁 입구와 직선으로 연결된 콜마르크트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리이지만 옛날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콜마르크트’(Kohlmarkt)는 문자 그대로 ‘석탄 시장’이란 뜻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황궁이 증축되면서 귀족들의 저택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그 후 길의 분위기는 완전히 180도로 달라져 지금은 빈 최고의 명품거리가 되었다.이 길에서는 세계적인 명품브랜드 매장을 비롯 보석매장도 많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황실에서 지정한 보석공들이 이곳에서 작업하고 살던 전통을 이어온 것처럼 보인다. 지금 빈에서 최고의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케이크 및 과자 전문점이자 카페인 데멜(Demel)이 지금도 성업 중인데, 원래는 황실에 케이크를 납품하던 곳이었다. 데멜 건너편 콜마르크트 9번지에는 1900년대 건물이 세워져 있고 1층 매장의 기둥에는 쇼팽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명판에는, ‘쇼팽(1810~1849)이 1830년 11월부터 1831년 7월까지 4층에서 살았으며, 이 집은 1900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판에 새겨진 쇼팽의 옆모습을 보니 그의 피아노곡 ‘혁명’이 폭풍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듯하다. 이 격렬한 곡은 그의 작품 중 12번째 곡이다. ━ 정치적 격동기 속 젊은 쇼팽의 고뇌 빈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클래식 음악의 성지이다. 빈은 하이든·글룩·모짜르트·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말러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를 포용했던 도시이다. 하지만 모든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제대로 대접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쇼팽의 경우, 빈은 매우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왜 그랬을까?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정직하고 온순하고 차분하고 평화스럽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지만 나치장교로 복무하면서 유대인, 유고슬라비아인, 그리스 주둔 이탈리아군 학살 명령 혐의가 나중에 밝혀져 여러 나라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아오던 발트하임을 ‘보란 듯이’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했으며, 또 유럽연합의 여러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아오던 극우파 정당에 ‘보란 듯이’ 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런 기질이 장점으로 작용한 경우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위기에 처하자 국민들은 좌·우익 간의 정쟁(政爭)을 접고 일치단결하여 기지로 그 위기를 모면했으니 말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나른 나라의 간섭이 있을 때나 국익과 관련된 대외적인 일이 있을 때는 철저하게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청년 쇼팽이 청운의 꿈을 안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한 것은 1830년 초겨울. 그러니까 음악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베토벤이 죽은 지 3년, 슈베르트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당시 빈 사회는 향락의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11월 22일에 빈에 도착한 후 쇼팽은 콜마르크트에 있던 어느 백작 부인의 호화스러운 아파트에 방 몇 개를 세 얻어 살면서 희망찬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여러 곳에 초대받기도 하고, 유명한 음악가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 총리 메테르니히와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유명한 말팟티와도 친분을 갖게 되었는데 이탈리아계인 말팟티의 부인은 폴란드 사람이었다. 그런데 쇼팽의 달콤한 꿈은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그해 11월 30일 폴란드에서 반러시아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모든 상황이 완전히 180도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폭동’을 방관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폴란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신의 실수’라고까지 공공연히 말하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 사람들이 폴란드에서 온 젊은 음악가를 환호할 리 없었다. 쇼팽은 혁명, 즉 반러시아 저항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총이 아니라 재능으로 조국에 충성하라면서 귀국을 만류했다.절망 속에서 쇼팽은 경제적 압박과 가족에 대한 염려와 외로움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몇 달 후 다행히 어느 귀족 부인의 주선으로 관중 앞에 설 기회를 가진 쇼팽은 19세 때 작곡한 을 연주했다. 그러나 연주회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신문에서는 그의 연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가 몇 줄 보였다. 그 후 캐른트너 극장의 극장장은 쇼팽에게 다른 연주회를 제의했다. 하지만 문제는 무보수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또 쇼팽이 빈에 처음 왔을 때 그에게 눈독을 들였던 출판업자 하슬링어는 쇼팽의 작품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만 보일 뿐이었다. ━ 절망과 고뇌 속에서 탄생한 명곡 그동안 빈의 유행은 서서히 바뀌어 왈츠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폴란드에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날이 갈수록 더욱 천박하게 여겨졌다. 쇼팽의 오스트리아 친구들은 하나 둘 멀리 떨어져 갔고, 한때 그를 열렬하게 대하던 피아니스트 체르니도 예의는 지켰지만 태도는 몹시 차가워져 있었다. 게다가 폴란드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이 말로만 그치자 폴란드 혁명은 러시아 군대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짓밟혀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쇼팽은 하루속히 빈을 떠나 ‘열린 도시’ 파리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경찰의 방해로 심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쇼팽은 빈에서 여덟 달을 보내면서 절망과 고뇌 속에서도 일부를 완성했고 작곡에 착수했다. 스케르쪼(scherzo)는 이탈리아어로 ‘농담’ ‘유머’ 등을 뜻하는데 음악에서는 해학적이며 빠르고 경쾌한 기악곡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 곡에는 이런 것과는 격렬한 감성이 녹아들어 있다. 즉,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국의 상황과 빈에서 겪은 고통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리라. 한편 중 12번 ‘혁명’은 쇼팽이 빈을 떠나 파리로 가던 중 반 러시아 봉기가 1831년 9월에 러시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이런 쇼팽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명품거리 콜마르크트를 걸을 때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 이 거리가 화려한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밝혀져 있어도 말이다.※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및 옛 건축 복원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2017.11.29 09:43

5분 소요
‘드라이브스루’ 성매매

산업 일반

스위스 취리히의 성매매 복합시설 ‘섹스 박스’, 안전과 근로조건 개선하고 인신매매 막는 효과 커 세계의 금융 중심지인 스위스 취리히에 자정이 찾아왔다. 나는 택시를 타고 성매매 여성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네온 사인을 보고 그 근처에 왔다고 직감했다. 내 왼쪽으로 기다란 칸막이 주차장의 각 칸을 비추는 붉은색, 녹색, 청색 네온 불빛이었다. 내가 탄 택시가 나무로 지은 칸막이 시설(‘섹스 박스’로 불린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붉게 반짝이는 립스틱을 칠한 20대 성매매 여성 2명이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나는 차창을 열어 탈색한 벌집 모양의 머리를 한 여성에게 물었다. “영어 할줄 알아요?”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기자라고 밝히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자신만이 아니라 이곳의 어떤 여성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긴 철저히 감시된다”며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청색 상의를 입은 체격 좋은 여성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리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특수 훈련을 받은 사회복지사였다. 취리히는 사생활 보호와 무엇이든 사전동의를 요구하는 법이 엄격하다. 드라이브스루(차를 타고 이용한다는 뜻) ‘섹스 박스’ 구역을 돌아보려면 화대에 해당하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뒷차가 경적을 울렸다. 내가 탄 택시가 길을 막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꺾자 축구장만한 크기의 공간에 버스 정류소만한 크기의 칸막이 공간 10개가 약 3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중엔 스프레이 페인트로 가격이 적힌 곳도 있었다. 봉사료는 성 구매자(고객)와 매매자(섹스 근로자) 사이의 흥정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태운 택시 운전기사(자칭 ‘성매매 전문가’)에 따르면 기본은 50달러, 풀 서비스는 100달러, 예외적인 경우는 200달러 이상이다.각 칸막이 공간엔 성매매 여성이 2∼6명 있었다. 전부 도발적인 차림의 여성이었다. 남성이나 트랜스젠더는 없었다. 그 여성들은 대부분 ‘로마’로 불리는 중·동부 유럽 출신의 집시였다. 그들은 담배를 물고 스위스 맥주를 마시고 잡담하며 손님이 차를 타고 와서 자신을 선택해주길 기다렸다. 택시를 타고 유혹하는 차림의 매춘부들이 있는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마치 섹스 테마공원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취리히의 홍등가는 일반적인 생각과 많이 다르다. 패스트푸드 드라이브 인 매장을 연상시키는 성매매 복합시설인 ‘섹스 박스’로 이뤄져 있다. 이 시설은 차를 탄 채로 햄버거를 주문하는 드라이브 인 매장이나 자동차 극장을 이용하는 것처럼 성 구매자가 성매매 여성을 선택해 흥정이 이뤄지면 차에 태운 뒤 주차장처럼 생긴 ‘섹스 박스’에 들어가 성매매를 하도록 설계돼 있다. 성 구매자는 반드시 차로만 드나들 수 있다.취리히는 여러 조사에서 삶의 질이 세계 최고이며 유럽 최고의 부유한 도시로 선정됐다. 하지만 환락산업도 번창한다. ‘섹스 박스’ 성매매 복합시설 개발에 참여한 취리히의 전직 공무원 미카엘 헤르지히는 “수요가 아주 많다”고 말했다. “사업체가 많아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도시는 섹스 산업이 번성하게 마련이다.”취리히에선 1942년부터 매춘이 합법화됐다. 현재 시 당국에 등록한 성매매 여성이 약 1200명이다. 헤르지히는 “미국 언론은 왜 스위스가 성매매를 불법화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매매는 불법화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성매매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계속된다. 그러니 안전하게 성매매가 이뤄지고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을 줄이고 성매매 종사자들의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려는 의도로 ‘섹스 박스’ 구역을 개발했다.”취리히 구시가지 번화가의 고급 양품점과 시계 부티크 사이 사이엔 사창가와 라이브 섹스쇼 비디오 부스가 박혀 있다. 취리히 시청 주변의 랑스트라세 구역은 과거 마약과 매춘으로 악명 높았던 스트립 클럽 중심지다. 그러나 요즘은 그곳도 고급 치즈와 골동품 가게 부근의 니더도르프에 있는 자갈길에서만 남성 행인을 상대로 한 길거리 여성의 성매매 호객이 허용된다. 차를 탄 남성 성 구매자에게 취리히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곳은 강변의 실콰이 구역이었다.그러나 실콰이의 성매매 산업은 현지 주민에게 부담이 됐다. 포주들이 그 구역을 조직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었다. 성매매 여성이 폭력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취리히 중독·마약단속실의 바바라 루드비히 실장에 따르면 그곳 주민인 여성까지 공격을 받았다.주민들은 집 뒤뜰과 문간에 콘돔 포장지가 버려져 있다고 불평했다. 취리히 시당국으로선 교통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대부분은 노출 심한 성매매 여성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간 운전자들이 일으킨 체증이었다. 이런 야외 섹스 시장의 대체 장소가 시급하다고 판단한 취리히 시당국은 2012년 주민투표를 거쳐 건설비 260만 달러와 연간 운영비 76만 달러를 예산에서 조달해 성매매 복합시설을 개발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위생적인 성매매 시설을 직접 제공하면서 성매매 종사자의 치안 문제나 건강보험가입 등의 노동조건에도 개입하겠다는 의도였다. ‘섹스 박스’가 개발된 이래 실콰이에선 폭력행위 신고가 한 건도 없었고 성매매 여성들도 그곳과 인근 동네에선 영업하지 않았다. 취리히의 사회복지사들은 새로 개발된 드라이브스루 ‘섹스’ 박스가 취약한 섹스 근로자의 안전을 지켜주고 포주의 접근을 막아 인신매매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섹스 박스’는 예술가와 난민이 좋아하는 취리히 교외 산업단지에 있다. 프리랜스 성매매 여성들의 사업공유 공간인 이곳 시설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성매매 시설을 참고했다. 그러나 취리히에선 성매매 여성을 위한 상담·경비 인력을 상시 배치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취리히의 ‘섹스 박스’에선 성매매가 고리 형태 도로에 있는 대기 장소에서 시작돼 네온 사인이 켜진 주차장 같은 칸막이 시설로 이어진다. 성 구매를 원하는 남성은 고리 형태의 도로를 돌다가 마음에 드는 성매매 여성을 선택해 가격에 합의하면 주차장 같은 시설로 직접 차를 몰고 들어가 빈 박스를 고른 뒤 서비스를 받고 셈을 치른 뒤 차를 타고 떠난다.‘섹스 박스’ 근로자들은 하루 약 5달러를 내고 공간을 임대한다. 그러나 내년 초가 되면 임대료가 없어진다. 낮에는 경비원이 그곳에서 순찰을 돈다. 입구 쪽에 설치된 도로표지판은 콘돔 사용을 권장하며 ‘섹스 박스’에서 지켜야 할 규칙(사진 촬영 금지, 자전거·도보 이용 금지, 18세 미만 입장 금지, 쓰레기 투척 금지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곳에 있는 간이 쉼터엔 화장실, 샤워, 콘돔, 무료 세탁기, 작은 주방이 마련돼 있으며 무료 피임약, 성교육, 에이즈 예방 프로그램, 의료 서비스, 상담, 성병 검사를 제공한다. 성매매 여성은 시내의 산부인과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섹스 박스’는 ‘차내 서비스’를 위한 8개의 드라이브인 칸막이 공간과 판자 침대와 고무 매트리스가 놓여진 4개의 칸으로 구성된다. 각 칸엔 에이즈 예방과 성교육 포스터가 붙어 있고 콘돔 버리는 쓰레기통과 섹스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비상벨 버튼이 설치돼 있다. 버튼을 누르면 그곳 전체에 경보가 울려퍼지며 문제의 박스 안에 경고등이 켜진다.비상벨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울린다고 루드비히는 말했다. 주로 남성 고객과 성매매 여성이 돈문제로 다툰 뒤다. “한번은 여성이 구타당했을 때, 또 한 번은 고객이 여성의 목을 조르려 했을 때 울렸다.”‘섹스 박스’에서 일하는 여성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산다. 그들은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 출신 집시로 1년에 한차례 3개월 한도로 체류할 수 있다. 루드비히는 “그들은 교육은 생각할 수도 없고 심지어 수도도 나오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 “그들로선 성매매가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일부는 성매매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대다수는 고국에 있는 자녀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다.” ‘섹스 박스’에서 일하는 여성은 사창가나 술집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보다 돈을 적게 받는다. 루드비히는 “하지만 그런 곳에서 일하면 착취에 시달릴 위험이 아주 크다”고 말했다. “남성은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즐기기 위해 길거리의 성매매 여성을 찾는 것 같다. 이곳보다 더 지저분하다.”성매매가 아무리 합법화돼도 인신매매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섹스 박스’가 등장하면서 포주의 사업이 더 어려워졌다. 포주로 의심되는 사람은 그 구역에서 쫓겨나며 무단출입으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되면 평생 그 구역에 들어갈 수 없다. 지금까지 그곳에서 붙잡힌 포주는 없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성매매 여성이 일을 마치고 이곳을 떠난 뒤엔 어떤 일이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게다가 인신매매는 추적하기 어렵다. ‘섹스 박스’ 시스템의 한 가지 이점은 성매매 여성이 도움을 받기 쉽다는 사실이다. 루드비히는 그곳의 간이 보건소에 사회복지사가 상근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쉽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섹스 박스’는 연중 무휴로 운영되며 영업 시간은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저녁 7시~새벽 3시,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진 저녁 7시~새벽 5시다. 주말엔 자정 후에 손님이 많다고 루드비히는 말했다. 그들은 대개 술집에서 원하는 상대를 구하지 못하면 그곳을 찾는다. 스위스 팀의 축구경기가 끝난 뒤엔 늘 장사가 잘 되며 특정 명절 기간에는 찾는 고객이 뜸하다. 루드비히는 특히 크리스마스가 ‘섹스 박스’에선 아주 한산한 시기라고 말했다.- 고고 리즈 뉴스위크 기자

2016.12.12 11:33

6분 소요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

산업 일반

꿈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우리는 왜 꿈에 매료될까?인류의 초기부터 꿈은 삶의 매력적인 수수께끼였다. 과거엔 꿈이 미래를 보여주는 비전이나 징조로 생각됐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저서 ‘꿈의 해석’을 통해 보편화시킨 이론에 따라 지금은 꿈이 주로 내면의 잠재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문으로 인식된다.꿈은 개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 다수는 비슷한 꿈을 꾼다. 그래서 우리가 자는 동안 본 반복되는 이미지를 해몽가가 풀어줄 수도 있다. 꿈에 관해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아직 많지만 잠재의식을 알면 자신의 의식을 더 잘 이해하고 그 아래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예를 들어 지난밤 치아가 빠지는 ‘기이한’ 꿈을 꿨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더 깊이 생각해보라고 잠재의식이 의식에 경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꿈 해석 전문 상담사 브래드 존슨은 “이가 빠지는 꿈은 우리가 자신을 속이려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뭔가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자기 몸이 무너진다는 뜻일지 모른다.”어떤 사람은 흔히 반복되는 요소가 들어 있는 비슷한 꿈을 꾸지만 우리 대다수는 자신의 삶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에만 적용되는 고유한 꿈을 꾼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분석하려 하는데 그 과정이 꿈을 꾸면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긴 크리스마스 장식이 꿈에 계속 나타난다면 무척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꿈의 사전에선 찾을 수 없다. 스스로 그 이미지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존슨은 “해몽이란 꿈의 사전에서 새가 무슨 의미이며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 보는 식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꿈의 특별한 순서를 통해 모든 것이 서로 어떻게 연결됐는지 이해하는 게 해몽이다.”그러나 꿈을 해석하기 위해선 꿈을 기억해야 한다. 대다수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존슨은 메모장이나 녹음기를 침대 곁에 두고 일어나자마자 꿈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는 방법을 권한다. 또 자명종이 울릴 때 벌떡 일어나지 말고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천천히 깨어나는 습관을 권장한다. 그래야 꿈을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존슨은 “어떤 면에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수수께끼를 분석하는 방식이다.”꿈 해석에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인 자각몽(lucid dreaming, 꿈을 꾼다고 자각하면서 꾸는 꿈)으로 옮겨갈 수 있다. 꿈을 꾸면서 자신의 꿈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존슨에 따르면 자신이 꾼 꿈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이 자각몽을 시도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단계다. 꿈을 시각화하지 못하면 꿈을 통제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자신의 꿈속에 들어가 꿈을 통제하려할 땐 먼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존슨은 잠 잔다는 것, 깬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트리거(trigger)’에 의존할 것을 권한다. 현실 테스트 수단의 일종이다. 명상을 하는 동안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동작이든 물체가 그 예다(존슨의 경우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내는 것이다). 그런 트리거는 깨어 있을 때 반복 훈련하면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럴 수 있다. 그 외 LED 불빛 신호와 미묘한 진동으로 자각몽을 돕는 수면 마스크가 시중에 나와 있다.존슨은 “나도 몇 번 자각몽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꿈속에서 과거 사건과 풍경을 바꿀 수 있었다. 친한 친구를 내 꿈에 불러오기도 했다. 하늘을 날 수도 있었다. 난 내 꿈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방식을 좋아한다. 잠재의식이 내게 말해주려는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존슨은 누구든 가능하다며 자신의 잠재의식을 더 깊이 분석하는 방법으로 자각몽을 권한다. “자각몽을 꾸면서 현실을 여러 방식으로 개조할 수 있는 의식의 창의성을 갖는 것은 아주 놀라운 체험이다.”- NEWSWEEK SPECIAL EDITION ━ 할리우드가 만든 ‘꿈의 세계’ ‘인셉션’(2010)드림머신이라는 기계로 타인의 꿈과 접속해 생각을 빼낼 수 있는 미래사회. 꿈을 공유하는 기술로 중요한 비밀을 훔치는 도둑(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한 CEO가 잠든 사이에 그의 머리에 아이디어를 이식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영화는 꿈속의 꿈을 다루며 잠재의식이 만들어낸 세계를 통제하고 바꾸며 때로는 그곳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이터널 선샤인’(2004) 조엘(짐 캐리)은 헤어진 연인(케이트 윈슬릿)이 최신 의학 기술로 머리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조엘은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 행복한 기억, 가슴 속에 각인된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진다. 마지막 순간 그는 그녀의 기억을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숨긴다.

2016.04.11 14:04

4분 소요
[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게릴라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산업 일반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의 땅 한반도. 분단의 태초 원인과 뼈아픈 비극, 여태껏 아물지 않는 상처 등을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왜 60년이 지나도록 이 모양 이 꼴이냐는 대목에 가서는 말문이 턱 막힌다. 관광 삼아 한가하게 DMZ를 둘러보는 외국인들이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생각할지 착잡하기만 하다.우리처럼 두 개의 국가로 나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전쟁이 한창인 나라가 또 있다. 바로 커피로 유명한 콜롬비아다. 콜롬비아에는 한반도의 약 5배 면적에 4000만 명이 살고 있다. 땅도 비옥하고 생물자원도 풍부하다. 에메랄드 생산 세계 1위고, 원유 수출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부와 좌익 반군 간에 치열한 내전이 이어져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해묵은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이다. ━ 1960년대부터 치열한 내전 반군 중에서도 특히 1964년에 결성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Fuerzas Armada Revolucionarias)이 두드러진다. FARC는 주로 농민들로 구성돼 있는데, 기득권 층을 타파하고 좌익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해왔다. 지금은 그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2000년대 초까지는 2만 명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유괴나 강탈, 마약 밀거래, 그리고 불법 광산업 등을 통해 돈을 마련해서 테러와 무차별 폭탄 공격을 자행했다. 지난 50년 동안 5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2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콜롬비아 정부는 반군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피해가 커지자 기존의 군사적, 정치적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찾아 보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콜롬비아 출신으로 세계적인 광고대행업체 뮬런로웨 그룹(Mullen Lowe Group)을 이끌고 있는 호세 미구엘 소코로프(Jose Miguel Sokoloff) 회장에게 FARC의 무장 해제와 전쟁 종식을 위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의뢰했다.처음에 호세 회장은 게릴라들이 총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가장 전통적인 선전 방법을 시도해 봤다. 과거에 자진해서 반군을 뛰쳐나온 게릴라들의 사연을 TV나 라디오에 실어 보내고, 헬기로 게릴라가 밀집한 정글 상공을 돌며 귀환을 독려하는 육성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게릴라들은 정부군이 뭔가 꿍꿍이가 있거나 혹은 협박을 받아서 억지로 꾸며낸 얘기라 여기며 선전 내용을 믿지 않았다.호세 회장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먼저 과거에 정부군에 투항했던 게릴라 60여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게릴라가 된 동기가 무엇이고, 게릴라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고충과 애환을 들었다. 이를 통해 그는 게릴라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들도 자신들이 납치했던 인질들과 다를 바 없이 사실상 죄수에 가깝다는 것도 알았다. 일단 반군에 가입하면 제 발로 걸어 나오기 어려웠던 것이다.호세 회장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설득보다는 공통적인 가치와 인간애에 호소하기로 했다. 일명 ‘크리스마스 작전(Operation Christmas)’이다. 2010년 크리스마스 때, 그는 기발한 방법을 시도했다. 반군들의 정글 속 이동 루트를 파악하고 눈에 잘 띄는 주요 길목 9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해서 불을 밝혔다. ‘정글에도 크리스마스가 왔습니다. 당신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엔 안 되는 게 없으니까요(At Christmas, everything is possible)’라는 메시지도 함께 적었다. 효과는 놀라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331명의 게릴라가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숫자는 당시 전체 반군의 5% 정도였는데, 숫자 자체보다는 캠페인이 먹혔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이 캠페인은 칸 국제 광고제에서 티타늄상을 받았다. 티타늄상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광고의 틀을 깨는 아이디어에 주어진다).여기서 끝이 아니다. 2012년 크리스마스 때는 일명 ‘베들레햄 작전(Operation Bethlehem)’을 전개했는데, 게릴라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쉽게 찾도록 콜롬비아 산간 마을 위에 반짝이는 별을 달았다. 그 다음 해에는 게릴라 가족들의 선물이나 편지 약 6000개를 일일이 플라스틱 공에 담아 정글 속을 흐르는 강에 띄우는 일명 ‘불빛 강물(Rivers of Light)’ 캠페인을 펼쳤다(플라스틱 공에서 불빛이 난다). 이것을 집어 든 게릴라들은 평균적으로 매 6시간 마다 1명씩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 감성 캠페인에 게릴라 1만7000여 명 집으로 또 있다. 2014년 크리스마스에는 게릴라들의 어릴 적 사진을 구해서 정글 곳곳에 붙였다. 어릴 적 사진은 게릴라 본인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주변 게릴라들의 시선과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사진에는 게릴라 어머니들의 메시지를 적었다. ‘게릴라가 되기 전에 너는 내 아이였단다. 집으로 오너라. 엄마가 널 기다리고 있단다.’ 사진을 본 많은 게릴라가 집으로 향한 것은 당연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즈음해서는 TV를 비롯한 모든 매체를 통해 게릴라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뿌렸다. ‘어서 정글에서 나와. 네 자리도 맡아 놨어.’ 콜롬비아는 FIFA 랭킹 8위의 축구 강국이며,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정부군, 반군을 떠나 전 국민이 축구광이다.지성이면 감천인 걸까. 아님 가랑비에 옷 젖은 걸까. 호세 회장이 게릴라들을 상대로 온갖 종류의 ‘감성’ 캠페인을 펼친 지 8년여 동안 1만7000여 명의 게릴라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다음은 뻔하다. 게릴라들의 계속되는 이탈로 인해 FARC는 거의 개점휴업 상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명분도 여력도 없었으리라. 결국 FARC는 2013년 11월에 정부군과 평화협상을 통해 토지 개혁과 FARC의 정치 참여, 마약 밀매 퇴치 등의 안건에 합의했다. 2015년 9월에는 2016년 3월까지 공식적으로 내전 종식을 선언하고 반군들은 모두 무장해제 할 것을 합의했다.TED 무대에 선 호세 회장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캠페인이 변화를 부르는 강력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세상을 바꾸거나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꼭 연락 주세요.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호세 회장의 자신에 찬 말이 유난히 솔깃하게 들린다. 허나 애기봉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도 맘대로 못 밝히고, 전단지 담은 풍선 날리기도 여의치 않은 우리 실정을 그가 알기나 할까. 어수룩한 콜롬비아 반군과 대놓고 핵무기를 휘두르는 북한을 비교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하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 뾰족한 방도도 없지 않았는가. 밑지는 셈 치고 한번 연락해 보는 건 어떨까(호세 회장은 2015년 8월에 부산 국제광고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2015.12.27 12:31

4분 소요
김정윤의 ‘요리로 본 세상’ ⑤ 독일 ‘슈톨렌’ - X-마스에 어울리는 새콤달콤한 부드러움

국제 경제

디저트 전성시대다. 싱글족은 간단한 디저트류와 음료로 식사를 해결한다. 주말마다 디저트를 찾아다니는 젊은 맞벌이 부부도 많다. 이왕 먹는 거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분위기다. 다이어트를 하더라도 디저트는 포기할 수 없다는 여성도 많다. 해외 유명 디저트 브랜드 ‘몽슈슈’, ‘제르보’ 등이 국내 시장에 잇따라 진출하는 것도 디저트 열풍을 반영한다. 국가별 대표 디저트와 이에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빠진다. 행여 모양 흐트러질까, 지난해 고이 간직해두었던 트리를 꺼내 장식하거나, 연인과 함께 떠나는 로맨틱한 여행계획을 세우기도 한다.빨강·초록 등 형형색색 불빛으로 단장을 마친 대형 빵집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 가게 앞 쇼케이스에 각종 케이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걸 보면 크리스마스가 1년 중 최고 대목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요즘에는 케이크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유명 디저트들이 속속 등장해 총총걸음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과 입맛을 당긴다. ━ 커피숍·대형마트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 ‘빵의 나라’, 저 멀리 독일에서 건너온 ‘슈톨렌(Stollen)’도 그중 하나다. 사실 볼품없는 이 디저트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이젠 일반화됐다. 슈톨렌이 이처럼 단 시간 내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 답은 독일 고유의 맛과 실용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먼저 뭉퉁한 외관 대신 내실을 살펴보자. 첫인상은 아기 포대기처럼 생긴 넓적한 타원형의 빵에 눈처럼 하얀 슈거파우더로만 덮어씌운 투박한 모습이다. 그러나 슈톨렌 안에는 각종 럼에 절인 말린 과일과 아몬드 크림인 마지팬이 들어있다. 덕분에 부드럽고 고소한 향은 물론이고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특히 다른 빵과 달리 버터를 듬뿍 넣은 부드러운 질감이 슈톨렌을 여느 나라 호화 디저트에 뒤지지 않을 만큼 실하게 만들어준다.그러나 500년 전의 슈톨렌은 향긋하거나 달달하지도, 더욱이 부드럽지도 않았다. 16세기 유럽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끼치던 중세 카톨릭은 모든 생활양식에서 ‘절제’를 강조했다. 먹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당시 슈톨렌 역시 귀리와 밀가루·물·이스트만 들어가던 독일의 질긴 빵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맛보다는 양이 중요하던 시대였으니까. 특히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며 버터와 우유 사용을 전면 금지하기도 했다. 대신 식물에서 짜낸 기름은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당시 무에서 얻던 식물성 기름은 구하기도 어려웠고 가격도 비싸 빵에 넣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말린 과일과 럼 역시 사치품으로 지목돼 디저트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입맛에 동서고금이 따로 있으랴. 예나 지금이나 성대한 만찬 뒤에는 달고 부드러운 ‘진짜 디저트’가 당기는법. 독일의 동쪽에 위치한 작센의 귀족이었던 에른스트와 그의 동생 알브레히트는 크리스마스 슈톨렌에 버터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황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8세는 1491년 이들의 요청을 허락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버터편지(Butter brief 혹은 butter missive)’ 사연이다. 편지 한 장으로 어떻게 버터 사용이 허가됐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슈톨렌의 고향 드레스덴 제빵사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버터를 듬뿍 넣은 디저트는 눈깜짝할 사이에 팔려나간다. 이렇게 모인 성금 덕분에 프라이부르크 교회는 무사히 완공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제빵사들은 버터를 쓸 수 있게 됐고, 교황은 교회를 늘렸으니 서로 윈-윈 한 셈이다. 이후 슈톨렌에는 향신료와 말린 과일 등이 첨가돼 오늘날의 달콤한 슈톨렌이 완성된다.슈톨렌의 고향 드레스덴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장인 슈트리첼마르크트(Striezelmarkt)와 함께 슈톨렌 축제가 진행된다. 사실 ‘슈톨렌’의 다른 이름인 ‘슈트리첼(Striezel)’은 여기서 유래되기도 했다. 대림절(크리스마스 4주 전 일요일) 두 번째 토요일에 진행되는 이 축제에는 마을 제빵사들이 참여해 2~4t에 달하는 거대한 슈톨렌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슈톨렌은 자체 품질이 슈톨렌 보존협회의 엄격한 심사를 받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파는 제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12월 겨울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날짜를 맞춰 독일 슈톨렌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협회의 인증을 받은 진짜 슈톨렌을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재료 함량, 맛, 향 엄격하게 평가 드레스덴의 제빵사들은 축제 외에도 슈톨렌의 품질을 지키기 위해 슈톨렌 보존협회를 만들어 제품에 들어가는 재료 함량과 맛, 향, 종류, 형태 등을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다. 독일다운 발상이다. 현재 이들의 인정을 받은 빵집은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금색 씰을 받는다. 이렇게 인증 받은 매장은 드레스덴 슈톨렌 협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슈톨렌은 대개 크리스마스가 되기 한 달 전에 미리 만들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럼에 절인 과일과 마지팬에서 배어 나온 습기가 밀가루 빵에 제대로 흡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드레스덴의 제과점들은 12월 초에 슈톨렌 선 주문을 마감하기도 한다. 느긋하게 기다렸다가는 맛보지도 못하고 한 해를 넘길 수 있다. 앞서 말했던 재료들은 원래도 보존 기한이 길기 때문에 빵이 상하는 걸 막아준다.슈톨렌은 하루에 한 조각씩 얇게 잘라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조금씩 먹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곶감 빼먹듯 먹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재미가 쏠쏠하다. 취향에 따라서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뜻하게 먹어도 상관없다. 오래 두고 먹어야 하기 때문에 자른 단면이 마르지 않도록 가운데부터 잘라 남은 두덩이를 붙여놓고 보관해야 한다.만드는 방법재료: 오렌지 필 등 설탕에 절인 과일, 말린 건포도, 크렌베리등 말린 과일, 아몬드 약간, 럼주(혹은 오렌지 주스), 강력분 500g, 설탕 100g, 활성 이스트 10g, 소금 10g, 무염버터 150g, 우유 250ml, 넛맥 약간, 정향 약간, 계피가루 약간, 마지팬 225g, 슈거파우거 약간우선 과일과 견과류를 럼에 넣고 하루 이상 절여 놓는다. 큰 볼에 강력분과 설탕을 넣고 밀가루에 구멍 두 개를 뚫어 한쪽에는 이스트, 다른 한쪽에는 소금을 넣어 이 둘이 서로 닿지 않게 만든다. 준비된 가루에 실온 놔둔 말랑한 버터와 우유를 넣고 잘 섞어준다. 이때 글루텐이 형성되지 않도록 너무 치대지 말아야 일반 빵과 다른 부드러운 식감이 나온다. 어느 정도 반죽이 섞이면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면포를 덮어 30분 정도 1차 발효시킨다. 발효가 끝나면 반죽에 넛맥과 정향, 계피가루(없으면 생략 가능), 럼에 절여놓은 과일과 견과류를 넣고 잘 섞어준다.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10분간 휴지시켜준 다음 반죽을 타원형으로 밀어 타원형을 만들어준다. 타원형 반죽 가운데 원기둥 모양으로 둥글린 마지팬을 올려놓고 다시 반으로 접어 어린아이 포대기 모양으로 만들어준다. 이 상태에서 다시 반죽에 면포를 씌워 약 1시간 동안 (반죽이 두 배정도 커질 동안) 2차 발효를 시켜준다. 발효가 끝난 반죽은 19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50분 정도 익혀준다. 완성된 슈톨렌이 식으면 그 위에 슈거파우더로 코딩해준 뒤 상온에 놓고 한 조각씩 잘라먹는다. 이때 볕이 들지 않는 선선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김정윤 - 쉐프이자 푸드칼럼니스트. 경기대 외식조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스타 쉐프로 유명한 제이미 올리버가 운영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Jamie’s Italian’에서 쉐프로 일했다.

2014.12.21 21:13

5분 소요
Travel - 비극·아름다움 교차하는 성스러운 땅

산업 일반

분리장벽·올리브숲·물담배 볼거리 … 현지 사정 밝은 사람 안내 받아야 지난해 8월 라마단 마지막 주말의 서늘한 저녁. 팔레스타인 사와레 마을 부근의 올리브 농장 안에 돌로 지은 3층짜리 집 옥상 테라스의 안락소파에 편안히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발 알-칼릴이라고 부르는 유대산이 농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산은 빛나는 별들 사이를 헤엄치는 거대한 검은 고래처럼 보였다. 서쪽 하늘은 예루살렘의 희미한 불빛으로 노랗게 빛났다.내 곁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다. 내가 머무는 집 주인 할라세 부부의 장성한 자녀 3명도 옥상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녀와 차녀 라나와 레함은 둘 다 아름답고 박식하며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막내 아들 타메르는 36세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박사학위는 없지만 수난을 겪는 조국 팔레스타인의 모든 면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이라는 뜻으로 이슬람력에서 9번째 달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는 이 기간을 신성한 달로 여기고 한 달 동안 일출에서 일몰까지 매일 단식한다.모든 게 평화로웠다. 술과 담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부인이 팔레스타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온한 생활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팔레스타인에선 평화가 영구하지 않다. 앞으로 3주 동안 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매혹적인 자연을 직접 목격할 계획이었다.팔레스타인에도 관광산업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베들레헴의 종교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버스를 타고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를 찾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중심부,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 헤브론과 나블루스, 또는 데이셰와 예닌의 난민촌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드물다. 그런 곳에 가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알 수 있다.나는 ‘납치당하거나 살해당하지 마라!’라는 친구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고 서안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전에 잠시 방문했을 때 만난 타메르 할라세는 스카이프를 통해 아무런 걱정 없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와 보면 아시겠지만 아주 정상적인 곳이지요.”난민촌 방문객은 드물어텔아비브 외곽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자 타메르가 기사 딸린 차를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 할리드가 검은 세단의 트렁크에 내 가방을 던져 넣은 뒤 우리는 사와레를 향해 출발했다. 30분 뒤 장벽이 눈에 들어왔다. 머지 않아 690㎞ 길이로 확장될 콘크리트 벽이다. 이스라엘과 서안의 경계선으로 이스라엘이 2003년 건설을 시작했다. 그 장벽은 뱀처럼 산을 끼고 돌며 올리브 농장까지 분할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그 도시의 이슬람 성지를 방문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었다.20분 뒤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마침내 마을로 들어섰다. 1주 동안 내가 머물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사와레는 예루살렘에서 8㎞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그러나 분리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러 검문소를 거치며 우회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그곳까지 차로 1시간은 족히 걸린다.물론 팔레스타인을 찾는 모든 방문객이 공항에서 자가용으로 안내 받거나 개인 집에 머물진 못한다. 매일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게이트에서 출발하는 팔레스타인 버스가 있고 여기 저기 괜찮은 호텔도 있다. 그중에서도 뫼벤피크 라말라는 특급호텔에 속한다.곧 나는 렌터카 직원이라는 야윈 젊은이에게 미국 뉴멕시코주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주고 지폐를 건넸다. 그는 내가 모르는 아랍어로 작성된 렌터카 계약서를 내놓은 뒤 내가 건넨 지폐를 왼쪽 주머니에 넣으면서 오른손을 뻗어 자동차 키를 내게 건넸다.처음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타메르는 라말라에 가서 재스민이라는 인기 카페에서 한잔 하고 싶어했다. 성스러운 축제일이라 악명 높은 칼란디아 검문소에 수만 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이슬람의 3대 성소 중 하나인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기도하려는 순례자들이었다.그렇다. 타메르는 폭동의 현장처럼 보이는 곳으로 곧바로 나를 안내했다. 다행히도 성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에 지연되는 통과절차에 좌절한 폭도 대다수는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의 보닛을 두드리고 열린 차창으로 생수병을 던졌다. 라말라에 도착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너무 많이 해 손바닥이 쓰라렸다. 라말라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혼란스러운 시장, 아름다운 공원, 야세르 아라파트의 ‘거의 성스러운’ 묘지가 있다.카페 재스민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성과 멋진 드레스와 화려한 히잡을 쓴 여성이 가득했다. 거기서 우리는 물담배를 피우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타이베 맥주를 마셨다. 타메르의 집에 도착하자 새벽 3시가 가까웠다.오전 8시가 되자 타메르가 내 침실 문을 두드렸다. 그날 헤브론을 관광하려 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그는 전했다. 서안 여행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골탕을 먹지 않으려면 뉴스를 잘 들어야 한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타메르가 말했다. “서안 곳곳에서 충돌이 있어요. 헤브론에 가기는 너무 위험해요.”폭력사태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타메르는 아이폰으로 읽은 뉴스를 나에게 전달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헤브론 외곽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가득 탄 택시에 화염병을 던져 5명이 심한 화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지나면 헤브론도 안전할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예리코에 갑시다. 예리코는 언제나 안전한 곳이지요. 하지만 먼저 이발을 하세요. 난 면도를 해야 해요.”알라를 위해 몸을 깨끗이 한 우리는 예리코로 향했다. 인구 1만9000명인 예리코는 요르단강 부근의 무성한 오아시스에 위치한다. 해발 260m 지점이다. 내가 삐걱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온통 붉은 시험산(신약 성서에서 사탄이 예수를 시험했다고 알려진 곳) 정상에 오르는 동안 타메르는 아래에 남아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사람을 태우려고 대기하는 낙타와 노닥거렸다. 예리코의 기온은 49℃였다. ‘목자들의 들판’에서 저녁 식사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목동들이 베들레헴의 별을 봤다는 ‘목자들의 들판’ 부근에 있는 베이트 사호르의 ‘텐트’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요구르트 소스로 요리한 베두인 양고기 전통요리 만사프, 양고기와 닭고기를 서서히 익혀 육즙이 풍부하게 만든 요리, 케밥, 마나키시 자타르(참깨, 올리브유, 타임, 수막을 뿌려 구운 난)를 맛봤다.사와레의 할레시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계단 세층을 올라 옥상으로 가 별빛 아래서 사과향 물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그만이었다. 다음날은 나블루스로 갈 계획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는 도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타메르의 아이폰이 진동했다. 통화를 끝낸 뒤 타메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쉽게도 나블루스 부근에서 유대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대요. 오늘은 베들레헴으로 가야겠어요. 거기가 더 안전할 겁니다.”사와레에서 차로 약 45분을 달려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기독교 순례자 1000명이 북새통을 이룬 예수탄생 교회에 겨우 들어가 예수가 태어난 곳을 표시한 별 모양이 새겨진 곳을 구경했다. 그 다음 타메르의 팔레스타인 친구 두 명과 중동식 샌드위치 팔라펠을 먹었다. 점심 후 타메르는 나에게 차를 몰라며 길을 안내했다. 몇 분 뒤 “여기 세우세요”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요?” 내가 물었다. “벽 바로 곁에 말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분리장벽 바로 곁에 차를 세웠다. 높이 7.6m에 철조망까지 쳐 있다. 불길해 보이는 포탑에는 저격수들이 숨어 있었다. 그 장벽은 팔레스타인 자살폭탄테러범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나도 그 앞에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어떤 이념과 정치를 따르든 간에 장벽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폭력의 슬픈 상징이다.마침내 폭력사태가 잦아들면서 헤브론과 나블루스를 방문할 수 있었다. 벌집 같은 헤브론 중심지에 도착해 구시가지 시장 곁에 주차했다. 헤브론에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25만 명이 살고 있다. 유대인은 언제나 극소수였지만 최근 몇 십 년 동안 주로 미국 출신인 이스라엘 유대인 수백 명이 도심으로 이주해 약 700명의 정착촌을 형성했다.그 정착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군 3000명 이상이 그곳에 파견 나와 검문소를 설치하고 그 구역을 차단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양쪽에서 숭상되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혔다는 동굴 위에 2000년 전 헤롯대왕이 지은 돌궁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조치는 당연히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우리는 구시가지 시장 곁에 주차한 뒤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시장은 과일주스부터 속옷, 면봉까지 모든 것을 팔려는 상인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타메르가 위쪽을 가리켰다. 쓰레기가 가득한 철망이 길고 좁다란 시장을 뒤덮고 있었다. “저 위의 아파트에서 유대인들이 내버리는 쓰레기를 차단하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철망을 씌웠다”고 타메르가 설명했다.분리장벽은 폭력의 슬픈 상징마침내 시장이 더욱 좁아지면서 검문소로 이어졌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갔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젊은 군인은 19세 정도로 보였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그곳에 서 있는 게 따분한 듯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종교가 뭐죠?”처음엔 역사적인 유적지에 들어가기 전에 묻는 질문 치고는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만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는 게 당연하다. 사실 난 불가지론자다. 그러나 타메르는 그렇게 대답하지 마라고 했다. “기독교인으로 가톨릭을 믿는다고 말하세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출입이 허용됐다.나중에 타메르는 그 군인이 내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곳의 무슬림 전용 구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라고 손짓했다. 나는 지갑을 꺼내고 시계를 풀었다. 그들은 내 가방을 뒤진 뒤 입장을 허락했다. 내부는 전형적인 모스크였다. 정교한 카펫, 나무 설교단, 이삭, 리브가, 사라, 아브라함의 기념비가 있었다.모스크를 벗어난 뒤 다시 신발을 신었다. 타메르가 다른 검문소로 안내했다. 그는 그곳을 넘어갈 수 없었다. 다시 군인이 내 가방을 검색한 뒤 그 건물의 유대인 전용 구역 출입구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경비원이 가방을 검색한 뒤 내 몸도 수색했다. 금속탐지기를 지나자 아름다운 유대교 회당이 나타났다. 촛불이 밝혀진 그곳에는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가득했다.팔레스타인에서 머문 마지막 날 우리는 북쪽으로 차를 몰아 나블루스에 갔다. 인구 12만6000명인 이 도시는 해발 약 910m인 에발과 게리짐이라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위치한다. 무슬림과 유대인 양쪽이 성지로 생각하는 산이다.로마인, 십자군, 맘루크인, 하심요르단인 등 시대에 따라 여러 세력이 통치했던 나블루스는 과거엔 문화 중심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나 이 전쟁과 투쟁의 도시에서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나블루스는 밀가루, 치즈, 시럽으로 만든 페이스트리 쿠나페로 유명하다.서안 관광상품 많아2000년 시작된 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봉기) 동안 나블루스는 폭력사태가 가장 심한 도시였다. 이스라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지금 나블루스의 구시가지의 모습은 음울하다. 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건물들, 건물 벽에는 팔레스타인 ‘순교자’들을 기리는 문구가 페인트로 적혀 있다.관광을 마치고 떠나려고 했을 때 타메르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나블루스 외곽의 한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을 구타하고 올리브 농장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이었다. 도시를 벗어날 때 구급차 여섯 대가 쏜살같이 우리를 지나쳐 도시로 들어갔다. 타메르는 예리코를 거쳐 집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예리코는 언제나 안전해요.” 그가 다시 나를 안심시켰다. 분리장벽에 도착했을 때 타메르도 나블루스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지친 듯 얼굴이 창백했다.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관광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덧붙인다. 서안은 혼자서 둘러볼 수도 있지만 상황이 자주 변하기 때문에 그곳 사정에 밝은 사람의 안내를 받는 게 좋다. 나를 안내해준 타메르 할라세는 최근 관광 안내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일 코스에서 몇 주에 이르는 장기 코스까지 ‘개인 맞춤형 관광체험’을 제공한다.그의 이메일 주소는 info@tamertours.com이다. 서안 여러 도시의 당일 코스 관광상품을 제공하는 업체도 여럿 있다. 그중에서 예루살렘 아브라함 호스텔이 제공하는 헤브론 ‘2부제’ 관광상품을 권하고 싶다. 유대인 안내자가 오전을 책임지고 팔레스타인 안내자가 오후 일정을 맡는다. 그들의 이메일 주소는 tours@abrahamhostels.com이다.

2013.08.28 18:03

8분 소요
FEATURES TRAVEL - 분리장벽과 올리브숲, 그리고 물담배

산업 일반

팔레스타인 서안은 위태롭기도 하지만 비극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매력적인 관광지다2012년 8월 라마단 마지막 주말의 서늘한 저녁. 팔레스타인 사와레 마을 부근의 올리브 농장 안에 돌로 지은 3층짜리 집 옥상 테라스의 안락소파에 편안히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발알-칼릴이라고 부르는 유대산이 농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산은 빛나는 별들 사이를 헤엄치는 거대한 검은 고래처럼 보였다. 서쪽 하늘은 예루살렘의 희미한 불빛으로 노랗게 빛났다.내 곁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다. 내가 머무는 집 주인 할라세 부부의 장성한 자녀 3명도 옥상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녀와 차녀 라나와 레함은 둘 다 아름답고 박식하며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막내 아들 타메르는 36세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박사학위는 없지만 수난을 겪는 조국 팔레스타인의 모든 면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이라는 뜻으로 이슬람력에서 9번째 달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는 이 기간을 신성한 달로 여기고 한달 동안 일출에서 일몰까지 매일 단식한다. 나는 라마단 단식을 마무리하며 먹는 저녁으로 배가 불렀다. 우리는 높이 1m 정도 되는 물담뱃대 주변에 둘러 앉아 뱀 같이 기다란 파이프를 돌려가며 사과향 물담배를 뻐끔뻐끔 빨고 아라크(독한 전통주)를 마셨다. 초콜릿 과자도 나눠 먹었다.모든 게 평화로웠다. 술과 담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부인이 팔레스타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온한 생활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팔레스타인에선 평화가 영구하지 않다. 앞으로 3주 동안 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매혹적인 자연을 직접 목격할 계획이었다.팔레스타인에도 관광산업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베들레헴의 종교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버스를 타고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를 찾는다. 예수가 탄생했다고 알려진 동굴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다. 몇몇 순례자들은 갈대가 늘어진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1시간 정도 더 이동한다. 번잡한 수도 라말라에는 각박한 상황을 호전시키려고 애쓴다고 말하는 정부와 민간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많다.그곳에 멋진 하이킹과 산악자전거 코스도 있다(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기온이 49℃나 됐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중심부,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 헤브론과 나블루스, 또는 데이셰와 예닌의 난민촌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드물다. 그런 곳에 가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알 수 있다. 나는 지난해 8월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그곳을 둘러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매혹적이면서도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지역의 혼란상과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싶었다.먼저 현황부터 살펴보자. 팔레스타인의 요르단강 서안은 이전에 ‘트란스요르단’으로 불렸던 아랍국의 일부였고, 그 이전에는 악명 높은 영국 통치령이었다. C자를 뒤집은 모양을 한 지대(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있다)로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한다. 서안은 1967년 6일전쟁 이래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서쪽 경계선은 유대산이다. 유대산은 가파르며 갈색을 띤다. 마치 사포로 문지른 거대한 암반처럼 보인다.동쪽 경계선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이 사해와 만나는 곳에선 기온이 산악 지역보다 10℃ 정도 높다. 구릉진 목가적인 풍경을 구성하는 올리브숲과 가끔씩 베두인 천막촌이 눈에 띈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마을엔 하늘을 찌르는 높은 첨탑을 가진 모스크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 동예루살렘 아랍 구역을 포함하면 서안의 인구는 약 320만 명이다. 그들 중 90%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 라말라, 베들레헴, 헤브론, 나블루스, 예리코, 예닌에 산다.나머지는 약 120개 정착촌에 사는 이스라엘 유대인이다. 유엔이 불법으로 규정하는 그 정착촌은 이스라엘군이 이곳을 점령한 이래 계속 늘어났다. 유대인 정착민 대다수는 서안이 성서의 땅 사마리아와 유대를 포함한다고 믿는다. 무슬림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이 땅은 똑같이 중요하다.나는 “납치당하거나 살해당하지 마라!’라는 친구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고 서안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전에 잠시 방문했을 때 만난 타메르 할라세는 스카이프를 통해 아무런 걱정 없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와 보면 아시겠지만 아주 정상적인 곳이지요.”텔아비브 외곽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자 타메르가 기사 딸린 차를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 할리드가 검은 세단의 트렁크에 내 가방을 던져 넣은 뒤 우리는 사와레를 향해 출발했다. 동쪽으로 향하자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와 모래로 이뤄진 풍경이 계단식 올리브숲 언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가파른 유대산으로 변했다.도로는 가파른 고지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사막 계곡 와디로 깊숙이 내려갔다. 30분 정도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한 뒤 장벽이 눈에 들어왔다. 머지 않아 690㎞ 길이로 확장될 콘크리트 벽이다. 이스라엘과 서안의 경계선으로 이스라엘이 2003년 건설을 시작했다. 그 장벽은 뱀처럼 산을 끼고 돌며 올리브 농장까지 분할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그 도시의 이슬람 성지를 방문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었다.검문소에 다가가자 올리브색 군복 차림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보였다. 할리드는 내가 불안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안심하세요”라고 그가 서툰 영어로 말했다.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길은 문제가 없어요. 나올 때가 문제죠.”20분 뒤 우리는 또다른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마침내 마을로 들어섰다. 거리의 어린이들이 우리 차에 플라스틱 총을 겨눴고 야생 개떼가 외곽에 몰려 있었다. 사와레 마을이었다. 청색 별이 낙서처럼 그려진 콘크리트 벽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했다. 할리드가 경적을 울리자 기다란 철문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열렸다.앞서 묘사한 아름다운 올리브 농장이었다. 1주 동안 내가 머물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사와레는 예루살렘에서 8㎞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분리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러 검문소를 거치며 우회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그곳까지 차로 1시간은 족히 걸린다.물론 팔레스타인을 찾는 모든 방문객이 공항에서 자가용으로 안내 받거나 개인 집에 머물진 못한다. 매일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게이트에서 출발하는 팔레스타인 버스가 있고 여기 저기 괜찮은 호텔도 있다. 그중에서도 뫼벤피크 라말라는 특급호텔에 속한다.할라세 집의 거실 소파에 앉아 차와 대추야자를 먹었다. 염소 수염을 한 타메르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치는 것을 본 순간 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차를 빌려야 해요. 택시나 대중교통보다 렌터카가 싸지요. 차가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훨씬 더 잘 보여줄 수 있어요.”곧 나는 렌터카 직원이라는 야윈 젊은이에게 미국 뉴멕시코주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주고 지폐를 건넸다. 그가 렌터카 직원이 맞다고 해도 그는 수리공도 겸하는 듯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는 나무 패널로 지은 비좁고 담배 연기 가득한 사무실에서 차 밑에 들어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내가 모르는 아랍어로 작성된 렌터카 계약서를 내놓은 뒤 내가 건넨 지폐를 왼쪽 주머니에 넣으면서 오른손을 뻗어 자동차 키를 내게 건넸다. 나는 그 키를 뜨거운 감자인 듯 타메르에게 곧바로 넘겨 주려고 했지만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그냥 서 있었다.“지금 뭐하는 거요?” 타메르가 화난 듯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당신이 운전해야 해요.”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사와레까지 오면서 가파르고 꼬불꼬불하고 움푹 패인 도로 때문에 시달리지 않았는가? 내가 타메르라고 해도 나보고 운전하라고 했을 것이다. “이봐요, 타메르.” 내가 간청했다. “여긴 당신 나라요. 내가 길을 몰라 잘못해서 유대인 정착촌으로 들어가면 어쩌란 말이요?”유대인 정착촌에 팔레스타인 번호판을 단 차를 타고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다. “또 검문소는 어떻게 통과하라고…” 서안으로 진입하는 검문소에선 별 일이 없었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매우 까칠하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시간 동안 사람을 잡아두고 심문할 수 있다. 가족에게 통고하지도 않고 며칠 동안 억류하기도 한다. “검문소에서 뭐라고 해야 하죠? 타메르 당신이 군인들에게 설명해야 하지 않아요?”타메르가 빙긋이 웃었다. “내가 왜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죠? 난 팔레스타인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미국인이고. 이스라엘인과 미국인은 서로 좋아하지 않나요? 이제 당신이 운전자요. 난 안내자고. 내 말대로 하면 문제 없어요.”처음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타메르는 라말라에 가서 재스민이라는 인기 카페에서 한잔 하고 싶어했다. 성스러운 축제일이라 악명 높은 칼란디아 검문소에 수만 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이슬람의 3대 성소 중 하나인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기도하려는 순례자들이었다.그렇다. 타메르는 폭동의 현장처럼 보이는 곳으로 곧바로 나를 안내했다. 다행히도 성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에 지연되는 통과 절차에 좌절한 폭도 대다수는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의 보닛을 두드리고 열린 차창으로 생수병을 던졌다. 라말라에 도착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너무 많이 해 손바닥이 쓰라렸다. 라말라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혼란스러운 시장, 아름다운 공원, 야세르 아라파트의 ‘거의 성스러운’ 묘지가 있다.카페 재스민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성과 멋진 드레스와 화려한 히잡을 쓴 여성이 가득했다. 거기서 우리는 물담배를 피우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타이베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난 한 병으로 족했다. 폭동과 꼬불꼬불한 길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운전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이 좀 들어도 뫼벤피크 호텔에서 묵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타메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와레에 가서 닭모이를 줘야 하거든요.” 타메르의 집에 도착하자 새벽 3시가 가까웠다. 닭들이 배가 고파 꼬꼬댁거렸다.동이 트기도 전에 수탉 울음 소리에 잠을 깼다. 8시가 되자 타메르가 내 침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밤새 자지 않은 듯했다. 그날 헤브론을 관광하려 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그는 전했다. 서안 여행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골탕을 먹지 않으려면 뉴스를 잘 들어야한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타메르가 말했다. “서안 곳곳에서 충돌이 있어요. 헤브론에 가기는 너무 위험해요.”타메르는 아이폰으로 읽은 뉴스를 나에게 전달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헤브론 외곽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가득 탄 택시에 화염병을 던져 5명이 심한 화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지나면 헤브론도 안전할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예리코에 갑시다. 예리코는 언제나 안전한 곳이지요. 하지만 먼저 이발을 하세요. 난 면도를 해야 해요.”채소, 후무스(병아리콩 으깬 것과 오일, 마늘을 섞은 중동 지방 음식), 난, 라브네(고체 요구르트)로 아침 식사를 한 뒤 몇 분 차를 몰고 이웃도시 베타니에 갔다. 죽은 나사로를 예수가 되살렸다는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곳에 있는 깨끗한 이발소에 들어갔다.젤을 발라 머리를 뾰족하게 세운 젊은 이발사 무함마드가 내 머리를 자르고 면도를 해준 뒤 실로 눈썹 모양을 잡아주고, 귀 안에 난 털을 라이터로 태워주었다. 그동안 내내 그는 평면 TV를 쳐다봤다. 메카에서 카바 신전을 도는 무슬림 순례자들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알라를 위해 몸을 깨끗이 한 우리는 예리코로 향했다. 인구 1만9000명인 예리코는 요르단강 부근의 무성한 오아시스에 위치한다. 해발 260m 지점이다. 내가 삐걱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온통 붉은 시험산(신약성서에서 사탄이 예수를 시험했다고 알려진 곳) 정상에 오르는 동안 타메르는 아래에 남아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사람을 태우려고 대기하는 낙타와 노닥거렸다. 예리코의 기온은 49℃였다.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목동들이 베들레헴의 별을 봤다는 ‘목자들의 들판’ 부근에 있는 베이트 사호르의 ‘텐트’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요구르트 소스로 요리한 베두인 양고기 전통요리 만사프, 양고기와 닭고기를 서서히 익혀 육즙이 풍부하게 만든 요리, 케밥, 마나키시 자타르(참깨, 올리브유, 타임, 수막을 뿌려 구운 난)를 맛봤다.사와레의 할레시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계단 세 층을 올라 옥상으로 가 별빛 아래서 사과향 물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그만이었다. 다음날은 나블루스로 갈 계획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는 도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타메르의 아이폰이 진동했다. 통화를 끝낸 뒤 타메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쉽게도 나블루스 부근에서 유대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대요. 오늘은 베들레헴으로 가야겠어요. 거기가 더 안전할 겁니다.”사와레에서 차로 약 45분을 달려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기독교 순례자 1000명이 북새통을 이룬 예수탄생교회에 겨우 들어가 예수가 태어난 곳을 표시한 별 모양이 새겨진 곳을 구경했다. 그 다음 타메르의 팔레스타인 친구 두 명과 중동식 샌드위치 팔라펠을 먹었다.한 명은 악명 높은 분리장벽에 추상화를 그리는 낙서 화가였다. 그는 곰처럼 몸집이 크고 수염이 매우 짙었다. 나머지 한 명은 힙합 음악가가 되려는 친구로 말총머리에 반항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검문소에서 12시간 동안 잡혀 있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사실 외엔 다른 이유가 없다.”점심 후 타메르는 나에게 차를 몰라며 길을 안내했다. 그는 인간 GPS(위성위치확인 시스템)였다. “우회전 다음에 좌회전. 이제 똑바로. 검문소 통과 후 로터리를 돌아 다시 좌회전.” 몇 분 뒤 “여기 세우세요”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요?” 내가 물었다. “벽 바로 곁에 말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분리장벽 바로 곁에 차를 세웠다. 높이 7.6m에 철조망까지 쳐 있다. 불길해 보이는 포탑에는 저격수들이 숨어 있었다. 그 장벽은 팔레스타인 자살폭탄테러범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나도 그 앞에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 콘트리트 장벽이 해를 가려 부근의 기온이 훨씬 서늘하게 느껴졌다. 벽은 화려하고 신랄한 낙서로 덮여 있었다. ‘사상 최초의 여성 비행기납치범’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살아있는 국보로 간주되는 레일라 할레드의 초상화도 그려져 있었다.내 눈은 크고 검은 글자로 쓰여진 어구에 머물렀다. ‘이제 당신은 이곳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몇 분 동안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머물렀다. 어떤 이념과 정치를 따르든 간에 장벽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폭력의 슬픈 상징이다.마침내 폭력사태가 잦아들면서 헤브론과 나블루스를 방문할 수 있었다.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아 헤브론으로 갈 때 타메르는 바짝 긴장하는 듯했다. 다행히도 가는 동안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벌집 같은 헤브론 중심지에 도착해 구시가지 시장 곁에 주차했다. 헤브론에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25만 명이 살고 있다. 유대인은 언제나 극소수였지만 최근 몇 십 년 동안 주로 미국 출신인 이스라엘 유대인 수백 명이 도심으로 이주해 약 700명의 정착촌을 형성했다.그 정착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군 3000명 이상이 그곳에 파견 나와 검문소를 설치하고 그 구역을 차단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양쪽에서 숭상되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혔다는 동굴 위에 2000년 전 헤롯대왕이 지은 돌궁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조치는 당연히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우리는 구시가지 시장 곁에 주차한 뒤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시장은 과일주스부터 속옷, 면봉까지 모든 것을 팔려는 상인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타메르가 위쪽을 가리켰다. 쓰레기가 가득한 철망이 길고 좁다란 시장을 뒤덮고 있었다. “저 위의 아파트에서 유대인들이 내버리는 쓰레기를 차단하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철망을 씌웠다”고 타메르가 설명했다.마침내 시장이 더욱 좁아지면서 검문소로 이어졌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갔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젊은 군인은 19세 정도로 보였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그곳에 서 있는 게 따분한 듯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종교가 뭐죠?”처음엔 역사적인 유적지에 들어가기 전에 묻는 질문치고는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만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는 게 당연하다. 사실 난 불가지론자다. 그러나 타메르는 그렇게 대답하지 마라고 했다. “기독교인으로 가톨릭을 믿는다고 말하세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출입이 허용됐다.나중에 타메르는 그 군인이 내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곳의 무슬림 전용 구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라고 손짓했다. 나는 지갑을 꺼내고 시계를 풀었다. 그들은 내 가방을 뒤진 뒤 입장을 허락했다.내부는 전형적인 모스크였다. 정교한 카펫, 나무 설교단, 이삭, 리브가, 사라, 아브라함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족장들의 동굴’은 보안이 삼엄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헤브론의 유대인 정착민들도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이슬람 둘 다의 족장이기 때문이다.1994년 의사인 유대인 정착민이 이스라엘제 IMI 갈릴 공격용 소총을 들고 그곳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111발을 쏜 뒤 자살했다. 그날 29명이 사망했고 125명이 부상했다. 그후 이스라엘 정부는 모스크 내부에 벽을 쌓았다. 유대인 전용 구역은 ‘족장들의 무덤 회당’으로 불렸고, 무슬림 전용 구역은 ‘이브라히미 모스크’로 불렸다. 아브라함의 기념비도 절반으로 분리돼 한쪽은 모스크에 속하고 나머지는 유대인 회당에 속한다.모스크를 벗어난 뒤 다시 신발을 신었다. 타메르가 다른 검문소로 안내했다. 그는 그곳을 넘어갈 수 없었다. 다시 군인이 내 가방을 검색한 뒤 그 건물의 유대인 전용 구역 출입구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주머니를 비우고 가방을 넘겨 주었다. 경비원이 가방을 검색한 뒤 내 몸도 수색했다. 금속탐지기를 지나자 아름다운 유대교 회당이 나타났다. 촛불이 밝혀진 그곳에는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가득했다.팔레스타인에서 머문 마지막 날 우리는 북쪽으로 차를 몰아 나블루스에 갔다. 인구 12만6000명인 이 도시는 해발 약 910m인 에발과 게리짐이라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위치한다. 무슬림과 유대인 양쪽이 성지로 생각하는 산이다. 로마인, 십자군, 맘루크인, 하심요르단인 등 시대에 따라 여러 세력이 통치했던 나블루스는 과거엔 문화 중심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으로 더 잘 알려졌다.팔레스타인의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블루스도 번잡하고 교통체증이 심하며 혼란스럽다. 대부분 3층짜리 건물이며 높은 빌딩은 소수에 불과하다. 희한하게도 검은 급수탑이 도처에 세워져 있다. 이스라엘이 수도 공급을 차단할 경우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이 전쟁과 투쟁의 도시에서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나블루스는 밀가루, 치즈, 시럽으로 만든 페이스트리 쿠나페로 유명하다.2000년 시작된 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봉기) 동안 나블루스는 폭력사태가 가장 심한 도시였다. 이스라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자살폭탄으로 악명 높은 파타당의 무장조직 알-아크사 순교여단의 거점이 나블루스였다.지금 나블루스의 구시가지의 모습은 음울하다. 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건물들, 건물 벽에는 팔레스타인 ‘순교자’들을 기리는 문구가 페인트로 적혀 있다. 우리는 나블루스에 도착하자마자 알 야스민 호텔로 가서 아랍 샐러드와 후무스를 난과 함께 먹고 민트 레모네이드를 마셨다.무함마드라는 남자가 구시가지 관광을 안내했다. 관광을 마치고 나블루스를 떠나려고 했을 때 타메르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나블루스 외곽의 한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을 구타하고 올리브 농장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이었다. 도시를 벗어날 때 구급차 여섯 대가 쏜살같이 우리를 지나쳐 도시로 들어갔다. 타메르는 예리코를 거쳐 집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예리코는 언제나 안전해요.” 그가 다시 나를 안심시켰다.분리장벽에 도착했을 때 타메르도 나블루스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지친 듯 얼굴이 창백했다. “타이베 맥주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워야 진정이 되겠는데요”라고 그가 말했다. 덤으로 하는 말이지만 만약 당신이 팔레스타인에 가서 타메르를 만난다면 민트 레모네이드와 사과향 물담배를 사주면 그를 영원한 친구로 만들 수 있다.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관광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덧붙인다. 서안은 혼자서 둘러볼 수도 있지만 상황이 자주 변하기 때문에 그곳 사정에 밝은 사람의 안내를 받는 게 좋다. 나를 안내해준 타메르 할라세는 최근 관광 안내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일 코스에서 몇 주에 이르는 장기 코스까지 ‘개인 맞춤형 관광체험’을 제공한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info@tamertours.com이다.서안 여러 도시의 당일 코스 관광상품을 제공하는 업체도 여럿 있다. 그중에서 예루살렘 아브라함 호스텔이 제공하는 헤브론 ‘2부제’ 관광상품을 권하고 싶다. 유대인 안내자가 오전을 책임지고 팔레스타인 안내자가 오후 일정을 맡는다. 그들의 이메일 주소는 tours@abrahamhostels.com이다.- 필자 브래들리 웨츨러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GQ, 와이어드, 멘스 저널, 아웃사이드지에 기고하는 언론인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에 살며 현재 팔레스타인 여행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중이다.

2013.08.2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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