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추억] ‘청량리대학 경험학과’ 나온 버스왕
64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한국의 버스왕’ 권영우 대원고속 명예회장의 서울 아산병원 빈소에는 유달리 눈에 띄는 세 명의 지우가 있었다. ‘모자왕’으로 유명한 백성학(64) 영안모자 회장과 박학선(68) 전 한국양복총판 회장, 곽창선(68) 평안산업 사장이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저녁 7시30분에 모여 밤 11시까지 장례기간 닷새 내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네 사람은 한 달에 한두 차례씩 만나 회포를 나누던 사이. 올해로 꼭 40년째다. 백 회장의 ‘4인방’ 소개가 재미있다. “저이(작고한 권 회장)와 곽 사장은 ‘청량리대학 경험학과’(청량리 일대)를 나왔고, 이이(박 전 회장)와 나는 ‘청계대학 경륜학과’(청계상가)를 나왔어요. 왜 만났느냐고요? ‘빈손’으로 시작했으니까 통했지!” 4인방에게는 네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단 적수공권으로 출발했다. 고인은 안동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태어난 백 회장은 미군 ‘쇼리(잔심부름꾼)’로 세상살이를 시작했다. 다른 두 사람 역시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하나도 없다. 네 사람은 모두 은행 빚이 없다. 백 회장은 “경인방송 인수를 위해 최근 200억원을 빌렸지만 40년 넘게 은행 신세를 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소리없는 봉사’도 이들 몫이다. 국내 최초로 기성복을 선보인 박 전 회장은 30년째 서울 이문동에 있는 상록야학을 후원하는 ‘인간 상록수’다. 곽 사장 역시 “이익의 10분의 1은 무조건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이 있다. 고인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충북 제천에 세명대를 세웠다. ‘30년 꿈’이었다. 그리고 순수했다. 박 전 회장의 회고다. “76년인가, 함께 미국 여행을 갔어요. (백 회장의 손목을 가리키며) 저게 그때 산 전자시계라오. 아직도 차고 있지. 고인이 얼마나 순진했던지. 라스베이거스에서 슬롯머신을 하는데 옆에 있던 ‘S. H. 백(백성학 회장)’이 ‘여기서 돈을 따면 마피아가 총으로 쏜다’고 해서 돈을 잃어주느라 땀깨나 흘렸어.” ‘4인방의 막내’였던 고인은 경북 안동이 고향이다. 일제 때 일본으로 간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반(半)유복자다. 덜 익은 수박을 서리해 사카린을 쳐서 먹을 정도로 가난했던 고인은 13세 때 서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신문팔이로 시작해 약국 허드렛일을 하던 그는 한움큼 수면제를 삼키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사⇒목욕탕 사장⇒버스회사 고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전농동 외숙모 집으로 이사하면서부터다. 외숙모 소개로 과외자리를 얻었는데 자신이 맡은 학생이 경복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과외 잘하는 영우 학생”으로 통했다. 한 사람당 3000원씩 받고 본격적으로 과외를 시작했다. 그 돈으로 집을 마련한 고인은 안동의 어머니를 불러들였고, 사대문 밖에 있는 논을 사들였다.
서울문리사범대(명지대의 전신) 영어과에 입학했지만 단 하루도 달콤한 대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특별한 꿈이 생겼다. 대학 동창으로서 비보를 듣고 코스타리카에서 왔다는 민영진 목사는 “이때부터 그는 3000억원을 벌어 대학을 세우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했다. ‘나처럼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에게 꿈 터가 되도록 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흐느꼈다. 사업다운 사업은 목욕탕이 시작이었다. 답십리에 ‘ㄱ’자 형태의 가정집을 짓고 한쪽에 목욕탕을 개업했다. 어머니는 탈의실 청소를, 고인은 카운터와 보일러 화부를 맡았다. 이때 “12시 취침해서 무조건 6시에 일어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버스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우연이었다. 당시 서울 시외버스 터미널은 신설동에 있었다. 목욕탕을 처분하고 신용금고를 운영하던 고인은 인근 버스 터미널과 거래하면서 운수업이 엄청난 ‘현금 장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버스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자 주위에서 “그러면 지입 버스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지입은 버스 차주는 따로 있으면서 버스를 회사에 빌려주는 것이다. 버스 한 대를 구입해 강원여객에 넣었다. 고인은 새벽이면 일어나 직접 버스 청소를 했다. 덕분에 준비가 덜 된 차들보다 고인의 차는 항상 1번으로 출발했다. 한 번이라도 더 운행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71년엔 적자 회사이던 삼용운수를 인수했다. 의정부에서 종로5가를 다니던 노선이었는데,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궁리 끝에 동대문 시장을 경유하도록 했다. 청계5가∼종로5가∼청계4가∼종로4가로 돌아가게 조정했다. 사업은 불을 지핀 듯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시내버스에 기사와 안내양이 있던 시절이다. 안내양들에게 애로사항을 물으니 ‘사람 대접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삥땅(횡령)’ 사고를 막기 위해 수시로 안내양 몸수색을 했는데 “도둑 취급을 당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는 얘기였다. 고인은 안내양이 쓸 수 있도록 기숙사를 지어 입주시켰다. 1층에 목욕탕과 휴게실을 만들어줬다. 당시 버스업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영업에 관한 한 기발한 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버스 회전율을 고민하다가 공무원을 상대로 출퇴근 버스를 운행하고, 낮 시간에는 관광지를 뛰도록 하는 등 ‘3중 운행’을 했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급여를 부인에게 주기도 했다. 일단 부인에게 환영받았음은 물론이다. 경제권을 빼앗긴 운전기사들은 술 마시는 횟수가 줄었다. 당연히 사고도 줄었다. 78년엔 경기여객을 인수했고 이후 대원관광·남일여객 등을 더 사들여 지금은 8개의 버스회사가 있다. 보유한 버스만 3000대가 넘는 ‘대한민국 버스왕’이다. 11, 12대 국회의원으로 정치 외도도 했다. 함께 의정활동을 했던 홍사덕 전 의원은 “여의도(국회의원)의 소문난 선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의 오랜 꿈은 대학 설립이었다. 특히 고향에 대학을 세우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동에 이미 국립대학이 있었다. 마침 내륙의 중심에 있으면서 14만 인구에 대학이 없던 제천이 떠올랐다. 91년 400명의 첫 신입생을 선발했을 때 고인은 학생 이름을 줄줄이 외웠다고 한다. 지병인 당뇨로 고생하면서도 그의 학교 사랑은 유별났다. “학생이나 교수들이 보면 부담스러워 할까봐 제천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렀어요. 자장면이나 설렁탕을 시켜먹는 것이 유일한 외식이었어요. 그러다가 휴일이면 학교에 나가셨어요. 일요일 저녁 때 담배꽁초를 줍고, 책상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할아버지가 있다면 틀림없이 명예총장님이었습니다.”(김영로 세명학원 총무부장)
"부고 돌리지 마라” 유언 고인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박종철 남선스텐 사장은 “제천 인구의 10분의 1을 만들어 준 분이다. 지역의 큰 별이 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씀씀이 얘기를 꺼낸다. “허투루 돈 쓰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어요. 4명이 가서 삼겹살을 시켜도 한꺼번에 4인분을 시키면 혼이 나요. 일단 2인분을 시키고 그 다음에 추가하라고 하십니다. 실속을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막내(?)를 먼저 보낸 ‘남은 3인방’은 새로 모임을 만들었다. “2020년에 예약하자고 했어요. 그때 가서 새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남 돕는 일도 계속 할 겁니다. 그래야 편안히 묻히지.”(곽창근 사장) 고인은 제천 용두산 자락에 묻혔다. 아래로 70만 평 대학을 굽어본다. 1남4녀를 둔 고인의 유언은 간단했다. “부고를 돌리지 마라. 가족장으로 하라.”
사⇒목욕탕 사장⇒버스회사 고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전농동 외숙모 집으로 이사하면서부터다. 외숙모 소개로 과외자리를 얻었는데 자신이 맡은 학생이 경복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과외 잘하는 영우 학생”으로 통했다. 한 사람당 3000원씩 받고 본격적으로 과외를 시작했다. 그 돈으로 집을 마련한 고인은 안동의 어머니를 불러들였고, 사대문 밖에 있는 논을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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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돌리지 마라” 유언 고인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박종철 남선스텐 사장은 “제천 인구의 10분의 1을 만들어 준 분이다. 지역의 큰 별이 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씀씀이 얘기를 꺼낸다. “허투루 돈 쓰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어요. 4명이 가서 삼겹살을 시켜도 한꺼번에 4인분을 시키면 혼이 나요. 일단 2인분을 시키고 그 다음에 추가하라고 하십니다. 실속을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막내(?)를 먼저 보낸 ‘남은 3인방’은 새로 모임을 만들었다. “2020년에 예약하자고 했어요. 그때 가서 새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남 돕는 일도 계속 할 겁니다. 그래야 편안히 묻히지.”(곽창근 사장) 고인은 제천 용두산 자락에 묻혔다. 아래로 70만 평 대학을 굽어본다. 1남4녀를 둔 고인의 유언은 간단했다. “부고를 돌리지 마라. 가족장으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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