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가상 경계를 허문다, ‘가상 인플루언서’ 시대 [허태윤 브랜드 스토리]
미국 ‘미켈라’, 한국 ‘로지’, 일본 ‘이마’ 등장
물리적 공간 뛰어넘고 스캔들 휘말릴 일 없어
기술 발전으로 현실과 가상을 연결해 거부감↓
‘릴 미켈라(Lil Miquela)’를 아는가? 미국 LA에 사는 19세 브라질계 미국인 소녀다. 얼굴에 살짝 주근깨가 있고 짙은 눈썹, 처피뱅(눈썹이 보이게 앞머리를 더 짧게 자른) 헤어 스타일을 한 이 소녀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310만명의 팔로워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직업은 팝 가수이자 인플루언서다. 2016년에 데뷔해서 무려 13개의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노래는 물론 댄스에도 능하고 패션 감각까지 뛰어나 패션 잡지인 ‘보그’의 표지 모델을 하는가 하면, 타임지에 의해 인터넷상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에 뽑히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의 미국 내 광고 모델로 출연해 화제가 되었는데 샤넬, 프라다, 버버리, 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의 모델도 맡고 있다. 지난해 벌어들인 돈만 우리 돈으로 130억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켈라는 현실 세상에는 존재 하지 않는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낸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 인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로지’라는 인물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통 사람처럼 활동을 하다가 2020년 12월에 자신이 가상 인간임을 커밍아웃하며 ‘신한 라이프’ 라는 신생보험회사의 모델로 픽업 된 사건이 있었다. 어떤 누구도 가상인간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로지가 정체를 밝히자, SNS는 발칵 뒤집혔다. SNS를 통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던 많은 남성들은 충격 빠졌지만, 1만이었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이후, 10만을 넘었고 그녀가 출연한 뮤직비디오는 조회수가 1000만이 넘어섰다. 로지의 본명은 ‘오로지’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22살의 나이와 동양적인 마스크, 171cm의 서구적인 체형, 개성 넘치는 패션 센스,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MZ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신한라이프 광고에 출연해 화려한 춤 실력을 뽐내며 화제를 모은 로지는 가상 모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더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1998년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탄생한 ‘아담’
당시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인간이라는 SF영화 같은 개념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었으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한계와 불과 몇 분간의 입모양을 립싱크로 만드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자 결국 ‘아담’을 만든 회사인 아담 소프트는 파산하고 ‘아담은 컴퓨터 바이러스로 사망했다’는 소문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담의 일시적 성공으로 당시 사이버 가수로 ‘류시아’ ‘사이다’같은 이름의 사이버 가수가 등장했지만 가상과 현실의 경험을 연결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결국 관객이 현실과 가상을 구분 지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의 논문 Uncanny Valley에서 유래)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상 인간은 3D그래픽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SNS의 시대가 되자 가상 인플루언서 개념으로 다시 등장한다. 2020년 8월에 한국에 등장한 ‘로지’는 확실히 다르다. SNS를 통해 나타난 그녀는 스스로가 가상 인간임을 드러내기 전까지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심지어 강남의 한 성형외과로부터 시술을 협찬해주겠다는 제의가 올 정도였다. 오히려 그녀가 가상 인간임을 밝히자 MZ세대는 현실의 인간과 같은 로지에게 더 열광하며 단숨에 인스타그램을 달구었다. MZ세대들이 로지에게 더욱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가상과 현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경험은 게임과 플랫폼을 통해 이미 경험한,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래픽 기술에 의해 탄생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으면서도 그녀의 세계관 속에 투영된 인간적인 매력과 외모, 그리고 SNS의 다양한 콘텐트 속에서 보이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가상 패션모델이 등장 했다. 팔등신 몸매로 매끈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최초의 디지털 슈퍼 모델이다. 2017년 영국 패션사진작가 카메룬 제임스 윌슨 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이 모델의 이름은 ‘슈두’. 실제 모델로 사진을 찍는데 한계를 느낀 그가 3D 이미지를 만들던 중 남아프리카 공주를 형상화한 바비인형을 모티브로 자신이 원하는대로 모델을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우를 시작했다.
현재는 21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새로운 가상모델 6명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카메룬은 이들 가상 모델들로 모델 에이전시를 만들어 각종 패션쇼와 광고에 출연시키고 있다. ‘슈두’는 최근에 ‘오버 더 리밋’(Over the Limit)이라는 콘셉트로 한국의 ‘로지’와 콜라보레이션을 깜짝 공개하기도 했다.
일본 가상 모델 ‘이마’도 일본에서 뜨거운 존재가 됐다. 글로벌 가구회사 이케아는 일본 동경의 하라주쿠 매장을 런칭하면서 ‘이마’를 모델로 등장 시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녀가 이케아 매장에서 3일 동안 먹고, 자고, 요가하고 청소하고,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며 페이트칠하는 일상을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와 매장 입구에 설치한 거대한 초고화질 모니터로 공개한 것이다. 이마는 핑크 단발머리에 서양인과 동양인이 섞인 것 같은 오묘한 외모로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갇혀 사는 일본인들의 피폐해진 일상을 의미 있는 라이프 스타일로 제안해, 사람들을 위로하며 32만명의 팔로워를 모았다. 이제는 화장품, 패션, 식품등 수많은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는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 대사가 됐다.
인간 관계에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메우는 가상 인간
가상 인플루언서는 주로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사진과 SNS상의 동영상 대화나 립싱크가 필요 없는 모델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가수, 뉴스 진행자, 홈쇼핑의 쇼호스트처럼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 커버곡과 여행 브이로그를 주요 콘텐트로 하는 ‘루이’는 단연 압권이다. 뛰어난 외모와 가창력으로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그녀의 노래를 4명의 가수에게 영상과 함께 보여준 유튜브 영상이 있다. 4명의 가수들은 아무도 이 가수가 가상인간 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몸은 기존의 대역 인간이지만 얼굴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만들고 디오비엔진이라는 툴과 AI를 이용, 합성을 했는데 브이로그까지 만들어 올리는 루이가 가상 인간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들 모두는 ‘루이’가 가상임을 알려주자 충격에 휩싸이며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한편으로 인간보다 더 노래를 잘하는 매력적인 가상 인간과 어떻게 차별화 하고 또, 조화롭게 함께 할 것이가를 고민한다.
SNS의 시대가 오자, 물리적 공간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가상 인간(vertual human)의 시대가 시작됐다. 영상을 통해 보이는 가상의 인물들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과 몸매, 그리고 매력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나타나고, 시공간을 초월하며 현실세계의 인간들에게 위로를 준다.
또 가상인간 인플루언서는 브랜드 엠배서더(대사)로 현실세계의 연예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물리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브랜드를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 스캔들에 휘말려 모델의 부정적 이미지가 브랜드에 전가되는 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격체처럼 행동 하지만 브랜드의 이념에 위배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디지털 트윈’을 통해 이룰 수 었는 메타버스의 시대가 본격화 되면 가상의 인간은 상당 부분 현실인간의 역할을 대체될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아 졌다.
그러면 현실세계 속의 모델, 셀럽, 브랜드엠베서더는 그리고 보통 사람인 나는 어떠한 존재로 남게 될까? 문득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하고 스파이크 죤스가 연출한 2014년 영화, ‘her’가 떠오른다. 인간과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OS)와의 사랑을 빌어 관계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탐구해 가는 이 영화는 현대 기술이 발달할수록 소외되고 고립되어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함께, OS와 사랑에 빠진 한 남성의 경험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사랑하는 사랑의 본질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의미상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네트워크가 열어놓은 시·공간의 제약 없는 삶, 가능성이 무한해질수록 정작 자신은 고립되어가고, 자신을 대리하는 디지털 분신이 많아질수록 자아를 잃어가게 되며, SNS로 묶인 디지털 관계가 촘촘해질수록 진실한 관계로부터 멀어져간다는 현대인의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진정한 소통이 필요한 시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진정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현실로 다가온 가상 인간의 시대는 인간 간의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또 채울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가상인간이 메울 것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들이 사람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고민보다 이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허태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대학교수다. 제일기획과 공기업, 플랫폼과 스타트업에서 광고와 마케팅을 경험했다. 인도와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글로벌마케팅에 관심을 가졌고, AR과 플랫폼 기업에 관여하면서 최근엔 플랫폼 기업의 브랜딩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외대에서 광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교수다.
허태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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