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보르도’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감은 특별하다 [와인인문학]
- 와인 한 병 속에 담긴 장엄한 역사
묵직한 고전 명작 같은 특별함 담겨
[김욱성 와인칼럼니스트] 와인 애호가에게 '보르도'(Bordeaux)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감은 매우 특별하다. 그것은 단순히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산지를 넘어 와인 세계의 '절대 기준'이자 흔들리지 않는 '왕도'로 통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훌륭한 와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유독 보르도 와인은 애호가의 서재 가장 중심에 꽂힌 묵직한 고전 명작과도 같다. 어떤 이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교과서'이며,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함께할 '삶의 동반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보르도에 감동하고, 그토록 열망하는가. 그 이유는 한 병의 와인 속에 수백 년을 관통하는 장엄한 역사, 불가능에 도전한 인간의 의지, 그리고 견고하게 확립된 질서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처럼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로 뻗어나간 보르도 와인의 토대
보르도의 포도 재배 역사는 2000년 전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를 정복하며 이곳에 포도나무를 심었고, 지롱드강을 통한 해상 무역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들이 닦은 길은 오늘날 보르도 와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문명의 토대가 됐다.
그러나 보르도 와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중세의 한 정략결혼이었다. 1152년 프랑스 왕비였으나 이혼한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재혼하게 되는데, 결혼 지참금으로 바쳐진 광대한 보르도 영지는 300년간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보르도 와인은 영국 귀족들의 식탁을 독점하며 ‘고급 와인’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왕위 계승 문제로 100년 전쟁이라는 기나긴 혈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보르도 와인은 아이러니하게 적국인 양국을 잇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경제적 연결고리였다.
우리가 오늘날 찬미하는 보르도,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의 심장부인 메독 지역은 처음부터 축복받은 땅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메독의 상당 부분은 지롱드강의 범람으로 인한 물웅덩이와 저습지가 많았다. 포도나무가 자랄 수 없는 이 버려진 땅에 인간의 위대한 의지가 개입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물 관리 기술을 가졌던 네덜란드의 기술자들이 이 땅에 투입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바다를 상대로 싸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둑을 쌓고 수로를 파내어 늪지의 물을 빼내는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감행했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자갈이 풍부한 토양이 기적처럼 드러났고, 배수가 잘되고 태양열을 머금는 이 척박한 자갈밭은 카베르네 소비뇽이 뿌리 내릴 최적의 터전이 됐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위대한 메독 와인의 탄생 뒤에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황무지를 황금의 땅으로 바꾼 17세기 인간의 땀과 집념이 오롯이 서려 있다.
보르도 와인이 다른 와인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질서’와 ‘계급’이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전 세계에 내놓을 보르도 와인의 등급을 정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1855년 ‘그랑 크뤼 클라세’ 분류법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등급이 와인의 맛이나 떼루아(포도 재배 환경)의 잠재력이 아닌, 수십 년간 시장에서 거래된 ‘가격’을 기준으로 매겨졌다는 사실이다.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이 견고한 피라미드는 지난 170여 년간 단 한 차례의 승급(1973년 샤토 무통 로칠드의 1등급 승격)만을 허용하며 보르도 와인의 권위를 지탱하는 기둥이 됐다.
이런 명확한 체계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하나의 ‘지도’를 제공했다. 5등급에서 시작해 1등급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애호가 자신의 취향과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과도 같다. 이 질서는 와인 애호가에게 정복하고 싶은 분명한 목표와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며 보르도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질서는 현대에 와서 새로운 권위에 의해 강화됐다. 20세기 후반 로버트 파커와 같은 강력한 와인 평론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날카로운 비평과 100점 만점의 점수는 보르도 와인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특정 빈티지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애호가들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길잡이 삼아 위대한 빈티지를 찾아 나서는 탐험을 즐겼고, 이는 보르도 와인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앙 프리뫼르’(En Primeur)라는 독특한 판매 제도는 보르도 와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는 와인이 병에 담기기 1~2년 전에 오크통 샘플(참나무통 표본)을 시음하고 선물(Futures)처럼 미리 구매하는 방식이다. ‘플라스 드 보르도’(Place de Bordeaux)라는 수백 년 된 강력한 유통 시스템을 통해 보르도 와인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투자 자산이자 문화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결국 와인 애호가에게 보르도 와인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그 안에는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장구한 역사, 격동의 시대를 견뎌낸 생명력, 황무지를 개척한 인간의 위대한 집념, 가격으로 증명된 견고한 질서, 그리고 현대 자본 시장의 역동성이 모두 담겨 있다.
보르도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이 모든 복합적인 의미와 감동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것은 과거와의 대화이자, 현재의 질서를 확인하며, 미래의 가치를 소유하는 가장 지적이고도 가슴 벅찬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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