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대신 창업 선택한 약사…글로벌 시장서 우뚝 서다 [이코노 인터뷰]
- [창업도약패키지 선정 기업] ① 정지희 메디아이플러스 대표
메디씨·파이크로 서비스로 깜깜이 임상의 비효율 해결
74만건의 정제된 글로벌 임상 데이터가 무기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의 ‘창업도약패키지 지원사업’은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겪는 3~7년 사이의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이 사업에 선정된 스타트업 창업가의 생생한 이야기는 후배 창업가들의 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다. <편집자주>
[이코노미스트 최영진 기자]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 면허를 취득한 그가 꿈꾼 일은 약국 개업이 아닌, 글로벌 제약사의 ‘의학 학술 담당자’(Medical Science Liaison·MSL)였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약사가 아닌 제약사 영업 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경력을 쌓은 뒤 2010년대 초반, 운 좋게도 그토록 원하던 글로벌 제약사의 MSL이 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MSL은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만큼 업계에서 인정받는 희소한 직군이었다. MSL은 신약 기획부터 임상, 허가, 론칭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관리하는 전문가다. 주요 연구자들과 소통하며 데이터를 수집·정리하는 것은 기본이고, 신약 개발의 핵심 관문인 인허가 규제와 임상 시험을 조율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바이엘(Bayer), 로슈(Roche) 같은 글로벌 제약사에서 신약 3종의 론칭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성과 뒤에는 하루 20시간씩 일해야 하는 ‘철인’ 같은 삶이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그는 퇴사를 결심했지만, 회사는 유능한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10여 개월 동안 사직서를 세 번이나 제출한 끝에야 회사를 나올 수 있었다.
창업을 위해선 개발자와 자본금이 필수였다. 교육 과정에서 만난 동료들과 지인들이 힘을 보탰고, 2019년 의료기기 임상시험 전문 스타트업 ‘메디아이플러스’가 탄생했다. 왜 신약이 아닌 의료기기였을까? 그는 “신약 임상보다 의료기기 임상 분야를 깊이 있게 다루는 전문 기업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의 창업 도약 패키지에 선정된 것은 지난 5년간 끈질기게 글로벌 데이터를 축적해 온 뚝심과, 글로벌 기업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기대 덕분이었다.
주인공인 정지희 메디아이플러스 대표는 “MSL 시절 데이터를 찾고 정리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다”며 “임상이 필요한 기업에 데이터를 즉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의료기기 임상 시장의 성장성 무궁무진
그를 창업으로 이끈 건 ‘답답함’이다. 글로벌 제약사에서 신약 론칭을 담당하며 목격한 것은 거대한 비효율이었다. 수조 원이 오가는 시장이지만, 정작 임상시험을 위한 데이터를 찾고 정리하는 게 비효율적이었다. 흩어진 데이터를 찾기 위해 밤새 구글링을 하고, 수천 페이지의 논문을 일일이 뒤져야 했다. 정 대표는 “환자에게는 마지막 희망일 수 있는 임상시험이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지연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며 창업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길은 험난했다.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지만 코딩은 문외한이었다. 개발자를 구하기 위해 예비 창업자 캠프를 전전했고, 수없이 거절당했다. 초기 액셀러레이터인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이용관 대표가 투자를 결정하며 “대표가 약간 ‘똘끼’가 있어서 끝까지 해낼 것 같다”고 평했다는 일화는, 정 대표가 얼마나 집요하게 이 시장에 매달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임상은 신약 시장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의료기기 시장에서도 보험 급여 적용이나 마케팅 등 다양한 이유로 임상 데이터가 필수적이다. 정 대표는 바로 이 틈새시장을 노렸다.
그는 임상시험을 ‘건축’에 비유했다. 건물을 지으려면 땅부터 파는 게 아니라, 정밀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에 맞는 시공사를 선정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임상기기 업계는 설계도(데이터 분석) 없이 삽부터 뜨려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목적에 딱 맞는 임상시험수탁기관(CRO)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글로벌 임상 시험 데이터 74만 건 보유
메디아이플러스가 미래 핵심 서비스로 ‘파이크로’ (FiCRO)를 내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이크로는 기업의 목적에 맞는 CRO를 매칭해주는 플랫폼이다. 이는 메디아이플러스가 운영 중인 ‘메디씨’(MediC)에 축적된 74만 건의 글로벌 임상 데이터가 있기에 가능하다. 의료기기 임상 데이터를 원하는 기업에 제공하는 40~50페이지 분량의 리포트는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그만큼 데이터의 질이 높다는 방증이다.
이 두 서비스를 통해 올해 2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2026년에는 300%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정 대표는 “지금까지 시드 투자만으로 성장해왔으나, 글로벌 진출 가속화와 전문가 영입을 위해 프리 A 라운드를 올해 안에 마무리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메디아이플러스는 전 세계 74만 건 이상의 임상시험 데이터를 확보해 표준화했다. 연구자들은 클릭 몇 번으로 ▲경쟁 약물의 임상 진행 상황 ▲특정 질환의 최신 트렌드 ▲적합한 임상 대상 국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거 수개월이 걸리던 자료 조사와 CRO 선정 과정을 AI 기술을 통해 며칠 단위로 단축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데이터를 임상 전문 지식으로 큐레이션하고 가공하는 능력, 그것이 메디아이플러스의 독보적인 경쟁력이다.
지난 8월부터는 해외 투자사와 기업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해외에서 열린 바이오 포럼 등에 참가하면서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25’에서 혁신상을 수상하며 기술력도 입증했다. 정 대표는 “창업 후 5년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제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면서 “폐업 위기도 겪었지만, 이젠 유럽과 미국의 기업들이 투자나 인수를 타진해 올 정도로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며 웃었다.
실제로 메디아이플러스는 최근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CRO 데이터를 확보하며 아시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영미권 기업들이 아시아 시장에 진입할 때 겪는 정보 비대칭을 해결하겠다는 전략이다. 정 대표는 “임상시험의 핵심 지표 중 하나인 ‘첫 번째 환자 등록(First Patient In)’ 시점을 우리의 데이터와 매칭 서비스를 통해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안정된 길을 버리고 데이터의 바다에 뛰어든 정지희 대표. 그의 ‘무모한 도전’은 이제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의 ‘확실한 혁신’으로 영글어가고 있다. 임상시험의 비효율을 걷어내고 데이터로 생명을 구하겠다는 그의 집념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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