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빅테크 사로잡은 인도계 CEO들-‘주가드’에 답 있었다 [CEO 110인 긴급진단]⑨
- 글로벌 빅테크 리더십의 원천으로 부상
자원 결핍 환경에서 체득한 유연성과 소통 역량 장점
[이코노미스트 최영진 기자] 여행 유튜버들 사이에서 인도는 이른바 ‘조회수 보장 성지'다. 화면 속 유튜버는 어김없이 고생한다. 오염된 물 한 모금에 시작되는 설사와 식중독, 길거리에서 날아드는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성희롱, 예고 없이 끊기는 전기와 에어컨 없는 침대칸 야간열차. 이 고생담이 편집본에 담기는 순간 조회수는 폭발한다. 시청자들은 영상을 보며 "나는 절대 안 간다"를 다짐하고, 유튜버는 다음 인도 여행을 예약한다.
비즈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도를 다녀온 한국인들의 반응은 더 직설적이다. 귀국편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뭄바이든 델리든 방갈로르든, '대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물 조심, 음식 조심, 사람 조심의 3계명은 기본이다. 길에서는 쓰레기와 오물이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찌르고, 왕복 6차선 도로가 오토릭샤와 소떼와 보행자로 뒤엉키는 광경이 펼쳐진다. 14억명 인구를 보유한 국가의 미비한 하수도 시설에 대한 의문은 귀국길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그런데 수치상으로 인도는 강대국이다. 2024년 기준 인구수 14억4000만명(2023년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인구 대국으로 등극), 국내총생산(GDP)은 2024년 기준 3조9000억달러로 미국·중국·독일 등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인당 GDP는 2500달러 수준으로 여전히 중하위권이다. 세계 강대국 인도의 이면은 이와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가난과 부족한 사회 인프라라는 민낯이 숨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나라 출신들이 지금 실리콘밸리를 지배하고 있다.
결핍 환경이 조성한 실용적 유연성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IBM의 아르빈드 크리슈나, 어도비의 샨타누 나라옌, 세계은행 총재 아자이 방가 등 글로벌 대형 기업의 수장 명단에 인도 출신 인사가 줄줄이 이름을 올리는 현상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미국 전체 인구 대비 1.4%에 불과한 인도계가 최고 경영 자리를 이렇게까지 차지하는 이유를 인도의 교육 열풍과 언어 능력 그리고 인도공과대(IIT) 출신의 엔지니어링 역량을 먼저 거론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들이 왜 유독 위기 국면에서 그토록 강한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델라가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2014년의 마이크로소프트는 모바일·클라우드 전환에 뒤처져 있던 성장 정체기에 직면해 있었다. IBM 역시 크리슈나가 CEO에 부임한 2020년에 매출 감소가 8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이 두 회사의 반전 서사에는 스펙 이면에 자리 잡은 강한 생존 본능, 힌디어로 ‘주가드’(Jugaad)가 있다.
주가드는 ‘제한된 자원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즉흥적이고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뜻한다. 경영학자 나비 라주와 자이딥 프라부가 ‘주가드 이노베이션’(2012년)에서 이 개념을 체계화했다. 서구식 R&D가 막대한 자본과 구조화된 연구실을 떠올리게 하지만, 주가드는 처음부터 결핍 상태를 조건으로 설정한다. ‘싸게 실패하고·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라’는 설명은 현대 소프트웨어 산업의 애자일(Agile) 방법론과 일치한다.
과거 기자와 인터뷰했던 인도 스타트업 전문가 라슈미 반살은 “주가드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체화된 방식”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쏠리드 그룹 최초의 외국인 최고경영자라는 기록을 남긴 인도 출신의 므린모이 차크라보티 쏠리드 인스파이어 대표 역시 “AI 기술 하나로 BCG·맥킨지 등의 글로벌 컨설팅기업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 것도 주가드 정신 때문”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22년 근속과 내부 구조 혁신 전략
인도 출신 CEO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긴 내부 경력이다. 나델라는 1992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해 클라우드·엔터프라이즈 부문을 거쳐 22년 만에 CEO 자리에 올랐다. 피차이는 2004년 구글에 합류해 크롬과 안드로이드를 키워낸 뒤 11년 만인 2015년 최고경영자가 됐다. 외부에서 영입한 파괴적 창업자형 인물이 아니라, 내부의 이해관계와 구조를 속속들이 파악한 관리자들이다.
이들이 이사회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수만 명 규모의 다국적 인력을 거느린 빅테크 기업은 조직 내 파벌 갈등을 중재하고 외부 규제 기관과의 마찰을 최소화할 리더를 필요로 한다. 나델라 취임 이후 마이크로소프트가 폐쇄적인 윈도우 중심 구조에서 개방형 클라우드 파트너십(Azure)으로 전환한 과정은 한정된 내부 자원과 한계 상황을 타개한 전형적 주가드식 경영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시가총액은 3000억달러에서 3조달러 이상으로 10배 뛰었다.
인구통계학적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인도 헌법이 인정하는 지역 공식 언어만 22개다. 힌두교·이슬람교·시크교·불교가 공존하고,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섞인 다문화 사회에서 성장한 인도인들은 이질적인 집단 간 합의를 도출하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거쳤다. 이들의 포용적 소통 방식은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환경이 빚어낸 산물이다.
IIT 중심의 수리·공학 엘리트 교육과 스탠퍼드·와튼 스쿨 MBA의 결합도 결정적이다.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주주 자본주의의 재무적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은 이사회 신임을 얻는 가장 확실한 경로다.
글로벌 기업 내 인도 출신 CEO의 부상은 우연도, 일시적 유행도 아니다. 결핍을 기회로 바꾸고 한계 상황에서 최적의 해답을 뽑아내는 주가드의 필연적 승리다. 한국 기업인이 배워야 할 리더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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