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일반
‘실패의 아이콘’에서 ‘포스트 스마트폰’으로…AI 날개 단 AR 글래스의 귀환
- 출하량 98% 폭증, 기술적 호기심 넘어 대중화 궤도 진입한 AR 글래스
손안의 모바일에서 ‘시야 확장’으로... 디지털 상호작용 변곡점 도래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과거 구글 글래스의 쓰라린 실패 이후 한동안 정보기술(IT) 업계의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던 증강현실(AR) 글래스가 인공지능(AI)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달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단순히 눈앞에 정보를 띄워주는 ‘보조 디스플레이’의 단계를 넘어, 스마트폰의 뒤를 이을 차세대 모바일 플랫폼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모양새다.
‘수치’가 증명하는 AR 글래스의 재도약
최근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가 발표한 보고서는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지난해 글로벌 AR 스마트글래스 출하량이 전년 대비 무려 98% 증가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적 호기심을 가진 얼리어답터들만의 전유물이었던 AR 기기가 본격적인 대중화 궤도에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성장은 제품 출시 효과가 크게 작용했다. 로키드의 ‘로키드 글라시즈’ 생산 확대와 메타의 스마트글래스 신제품 출시, 레이네오·X리얼·비처 등 주요 업체들의 신제품 경쟁이 시장을 견인했다.
시장 구조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영상 중심 AR 스마트글래스는 전년 대비 80% 이상 성장했지만, 정보 표시 중심 웨이브가이드 기반 제품은 같은 기간 600% 이상 급증하며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웨이브가이드 제품 비중은 2024년 하반기 13%에서 2025년 하반기 38%까지 확대됐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성장의 배경으로 ‘폼팩터 혁신’을 꼽는다. 과거의 AR 기기들이 무겁고 투박한 HMD(Head Mounted Display) 형태에 머물러 일상생활에서의 착용이 불가능에 가까웠다면, 최신 기기들은 일반적인 안경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가볍고 세련된 디자인을 갖추기 시작했다.
AR 글래스가 ‘안경다운 안경’이 될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하드웨어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다. 특히 ‘마이크로LED’와 ‘웨이브가이드’ 기술의 조합은 초경량화를 실현하는 핵심 열쇠가 됐다.
마이크로LED는 머리카락 두께보다 얇은 초소형 LED 소자를 사용해 전력 소모는 줄이면서도 야외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고휘도를 구현한다. 웨이브가이드는 얇은 유리나 플라스틱 렌즈 내부에 빛을 굴절시켜 상을 맺게 하는 기술로, 이를 통해 두꺼운 렌즈 없이도 가벼운 안경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착용성을 극대화하며, 사용자가 장시간 기기를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제 AR 글래스는 ‘필요할 때만 쓰는 장비’에서 ‘하루 종일 쓰고 있는 액세서리’로 진화하고 있다.
AI, AR 글래스에 ‘영혼’을 불어넣다
하드웨어가 ‘몸체’라면, 최근 급격히 발전한 생성형 AI는 AR 글래스에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AI와의 결합은 AR 글래스의 정체성을 단순한 화면 표시 장치에서 ‘지능형 조수’로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용자가 거리를 걷다 낯선 외국어 표지판을 보면, AR 글래스는 이를 즉시 인식해 실시간으로 번역된 텍스트를 렌즈 위에 띄워준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의 이력을 브리핑해주거나, 마트에서 식재료를 집어 들면 영양 성분과 관련 레시피를 제안하는 일도 이제는 상상이 아닌 현실의 영역이다.
AI는 AR 글래스에 장착된 카메라와 센서를 통해 사용자가 보는 세상을 함께 보고 분석한다. 이는 스마트폰의 좁은 화면 안에 갇혀 있던 AI 서비스가 사용자의 실제 시야와 결합하며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AR 글래스는 AI가 세상을 이해하는 ‘눈’이자, 인간의 인지 능력을 확장하는 핵심 플랫폼이 되고 있다.
시장 잠재력이 확인되자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본격적으로 주도권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메타가 공개한 시제품 ‘오라이언’(Orion)은 AR 글래스의 정점으로 불린다. 마크 저커버그 CEO는 “스마트폰 다음의 컴퓨팅 플랫폼은 AR 글래스가 될 것”이라며 확신을 내비쳤다. 메타는 레이밴(Ray-Ban)과의 협업을 통해 이미 대중적인 스마트글래스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비전 프로’를 통해 공간 컴퓨팅의 포문을 연 애플은 강력한 OS 생태계를 기반으로 AR 글래스 시장으로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아이폰과 애플워치로 다져진 연결성은 애플이 가진 가장 무서운 무기다.
삼성도 구글, 퀄컴과 손잡고 이른바 ‘XR(확장현실) 동맹’을 구축했다. 하드웨어의 삼성, 소프트웨어 플랫폼의 구글, 칩셋의 퀄컴이 협력해 안드로이드 기반의 강력한 XR 생태계를 조성, 애플과 메타의 독주를 막겠다는 전략이다.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와 과제
전문가들은 AR 글래스가 결국 스마트폰을 대체하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내다본다. 주머니에서 기기를 꺼내고 화면을 터치하는 수고로움 없이 시선과 음성, 가벼운 손가락 움직임만으로 모든 디지털 작업을 수행하는 시대가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프라이버시 문제다. 안경에 장착된 카메라가 타인의 동의 없이 일상을 기록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사회적 합의와 기술적 보완책(촬영 중임을 알리는 LED 인디케이터 의무화 등)이 절실하다. 또한 여전히 극복해야 할 배터리 지속 시간과 발열 문제 역시 하드웨어 업계가 풀어야 할 난제다.
AR 글래스는 이제 단순한 재미있는 기기를 넘어, 인류가 정보를 소비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AI라는 강력한 지능과 결합한 이 안경은 인간의 기억력을 보조하고 언어의 장벽을 허물며 시공간을 초월한 협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과거 구글 글래스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비운의 발명품이었다면, 지금의 AR 글래스는 기술과 수요, AI라는 시대적 흐름이 맞물린 최적의 타이밍을 맞이했다. 스마트폰이 우리 손안의 세상을 바꿨다면, AR 글래스는 이제 우리 눈앞의 세상을 통째로 바꾸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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