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군함 고치러 韓 온다] ②
한화오션·HD현대중공업, 미 군수지원함 정비 잇달아 수주
정비 실적 쌓아 미 함정 건조시장 진출 교두보 마련
[이코노미스트 박세진 기자] 배를 만드는 한국 조선업이 ‘배를 고치는 시장’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은 미국 군사해상수송사령부(MSC) 소속 군수지원함의 유지·보수·정비(MRO)를 잇달아 맡았다.
아직 미 해군의 핵심 전투함을 정비하는 단계는 아니다. 확보한 물량은 군수지원함이 중심이다. 다만 미국이 한국 조선사의 함정 건조 역량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업계에서는 MRO가 미 함정시장 진입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길 여는 한화오션·HD현대중공업
선체 부식과 프로펠러, 방향타 등 300건이 넘는 작업이 이뤄졌다. 손상된 방향타는 기존 설계도가 없는 상황에서 역설계해 새로 제작·교체했다.
MSC는 월리 쉬라 정비를 통해 한국 조선소의 공급망과 자동화 설비, 숙련 인력의 역량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선박을 잘 만드는 한국이 미 군함도 제대로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국내 조선사들이 MRO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정비 매출만이 아니다. 미국 군 함정을 직접 정비하며 품질과 보안, 납기, 검수 등 미 군수시장의 까다로운 절차를 경험할 수 있다.
정비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수행 실적과 신뢰가 쌓인다. 이를 추가 MRO는 물론 함정 건조 사업으로 연결할 수 있다. 조선업계가 MRO를 미 함정시장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으로 보는 이유다.
배 만들 여력 부족한 美, 韓에 눈 돌려
미국이 한국 조선업을 주목하는 배경에는 자국 조선·정비 산업의 병목이 있다. 미 회계감사원(GAO)은 2024년 12월 보고서에서 2020~2022회계연도에 정비를 시작한 미 해군 상륙전함 14척 가운데 계획대로 작업을 마친 사례는 3척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나머지 11척에서는 누적 1200일이 넘는 지연이 발생했다.
함정 건조 일정도 밀리고 있다. GAO가 지난 4월 미 하원 군사위원회 소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DDG-51 플라이트Ⅲ 구축함의 인도는 계획보다 22~58개월 늦어졌다.
버지니아급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 속도도 2025년 6월 기준 연간 1척에 머물렀다. 미 해군 목표의 절반이다. 2025년 인도된 잠수함 2척도 예정일보다 3년 넘게 늦었다.
문제는 앞으로 필요한 배가 더 많다는 점이다. 코트라(KOTRA)에 따르면 미 해군은 2024년 296척인 함정 규모를 2054년 381척까지 늘릴 계획이다. 퇴역과 대체 수요까지 고려하면 새로 건조해야 할 함정은 총 364척이다. 연평균 12척꼴이다.
필요한 예산은 연평균 약 300억달러(약 45조원), 총 1조750억달러(약 1600조원)로 추산된다. 함정 전력은 늘려야 하지만 건조와 정비 모두 제때 소화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인도·태평양에서 운항하는 함정을 미국 본토가 아닌 한국에서 정비하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한국에는 대형 상선과 군함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와 기자재 공급망, 숙련 인력이 있다.
MRO 넘어 함정 건조까지 노린다
미국의 관심은 정비를 넘어 건조로 향하고 있다. 미 국방부와 해군은 올해 국내 조선사들에 전투함과 급유함의 설계·건조 역량을 묻는 정보요청서(RFI)를 보냈다.
전투함 관련 요청에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급유함 관련 요청에는 두 회사와 삼성중공업이 회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한국 조선사의 ‘배를 고치는 능력’을 넘어 ‘배를 만드는 능력’까지 공식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RFI가 실제 발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과 생산능력, 가격과 인도 조건을 확인하는 사전 조사에 가깝다. 그래도 미 정부가 한국 조선사를 잠재적인 함정 공급자로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제도 변화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8월 13일 미국 해군과 조선산업 기반을 재건하기 위한 각서에 서명했다. 미국 조선소에 투자하고 현지 인력 양성과 기술 이전에 나선 외국 조선업체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초도 물량 일부를 모기업의 해외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넘어야 할 문턱은 여전히 높다. 미국 법은 원칙적으로 자국 군함의 해외 건조를 제한한다. 예외가 인정되더라도 의회 통보와 예산, 보안 규정, 미국 내 투자와 공급망 구축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MRO에도 제한이 있다. 미국이나 괌 등을 모항으로 하는 미 해군 함정은 원칙적으로 해외 조선소에서 대규모 정비를 받기 어렵다. 한국 조선사들이 군수지원함 중심으로 실적을 쌓는 이유다.
MRO가 신조선보다 수익성이 높은 사업도 아니다. 수조원이 오가는 함정 건조와 비교하면 개별 정비 계약 규모가 작다. 까다로운 미 군수 절차를 충족하기 위한 투자와 인력도 필요하다.
그래도 조선업계는 MRO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군수지원함을 성공적으로 고칠수록 미국이 한국에 맡길 수 있는 함정과 작업 범위도 넓어진다. 정비 실적이 쌓이면 함정 건조시장에 도전할 명분도 강해진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MRO는 목적지라기보다 시작점에 가깝다”며 “미국 군수지원함 정비에서 신뢰를 쌓아 추가 물량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는 함정 건조까지 사업 범위를 넓히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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