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7

[이슈] 신화통신 선정 '2022 중국 국내 10대 뉴스'

차이나 포커스

(베이징=신화통신) 신화통신이 올해 10대 중국 국내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1. 세계인의 축제, 베이징 동계올림픽∙패럴림픽 개최제24회 동계올림픽과 제13회 패럴림픽이 각각 지난 2월 4~20일과 3월 4~13일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코로나19 등 여러 가지 악재 속에서도 세계인들의 축제인 올림픽이 무사히 개최됨으로써 베이징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도시가 됐다. 이번 올림픽에 참여한 중국 선수들은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대회를 마쳤다.2. 홍콩 주권 반환 25주년 기념행사 열려지난 7월 1일 홍콩 주권 반환 25주년 기념 대회 및 홍콩 특별행정구 제6기 정부 취임식이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참석했다. 시 주석은 담화를 통해 25년간 실천해 온 '일국양제'가 홍콩에서 세계가 인정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며 '일국양제'를 홍콩에서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과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고 강조했다.3. '타이완 독립' 분열 세력과 외부 세력의 간섭 시도 엄중 차단지난 8월 2일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이 중국의 강력한 반대와 엄정한 교섭에도 불구하고 타이완 지역을 방문한 것에 대해 중국 외교부, 국방부 등 대변인은 각각 성명 또는 담화를 통해 중국 정부와 인민이 타이완 문제에서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며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해 국가 주권과 영토 완전성을 굳건히 수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밤부터 중국인민해방군 동부전구는 타이완 섬 주변에서 일련의 연합군사행동을 전개했다. 8월 5일 외교부는 펠로시 의장과 그의 직계 가족을 제재하고, 미국 측에 8개 반격조치를 취한다고 발표했다. 8월 16일 중공 중앙 타이완업무판공실 대변인은 권한을 위임받아 '타이완 독립' 완고분자 등 사람들을 제재 대상 리스트에 포함시킨다고 발표했다.4.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성공 개최지난 10월 16~22일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당대회는 제19차 중앙위원회 보고서를 통과시켰다. 또한 지난 5년간의 업무와 신시대 10년의 위대한 변혁을 회고하고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수립했다. 10월 23일 중국 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선출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게 됐다.5. 중국 우주정거장 건설, 역사적 발자취 남겨지난 11월 1일 오전 4시27분(현지시간) 중국 우주정거장의 두 번째 실험실 모듈 멍톈(夢天)이 앞서 발사된 우주정거장 실험실 모듈 톈허(天和)와 도킹에 성공한 후 'T'자형 기본 구조 결합을 완수했다. 11월 30일 새벽 선저우(神舟) 14호 우주인과 15호 우주인 등 6명이 우주에 집결했고 12월 2일 밤 중국 우주 개발 역사 최초로 궤도 내 임무 교대를 완수했다. 이로써 중국 우주정거장은 장기간 우주인이 거주하는 방식을 시작하게 됐다.6. 시 주석, 중국 특색의 대국 외교 이끌어지난 11월 14~19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인도네시아 발리를 찾았고 제29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지도자회의 참석차 태국을 방문했다. 그 기간 동안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미 지도자 간 대면 만남을 가졌다. 올해 들어 시 주석은 일련의 중요한 정상 외교 행보에 나섰다. 2월 '올림픽에서의 만남' '신춘 회담'에 이어 6월 '브릭스 정상회의', 9월 중앙아시아 순방, 11월 동남아시아 순방, 12월 중동 방문 등이 이어졌다. 시 주석의 정상외교에 발맞춰 중국은 전 인류 공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와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의 실천을 추진하며 '일대일로' 공동 건설의 고품질 발전을 이끌어 세계에 확실성과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었다.7. 민생 안정 및 보장에 힘써지난 11월 25일 개인양로금 제도가 중국 36개 도시(지역)에서 선행적으로 시행됐다. 올들어 코로나19의 산발적 발생과 경제 하방 압력에 직면하면서 당 중앙과 국무원은 민생 안정과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놓고 민생 복지 증진, 최저 생활 보장 등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퇴직자 기본 양로금 4% 추가 인상, 취약계층 보조금 지급, 주민 의료보험금과 기본 공공 보건서비스 비용에 대한 1인당 재정 보조금 지급 기준 일괄 인상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중국은 취업, 물가 안정에 힘썼으며 빈곤에서 벗어난 3천200만 명 노동자가 취직하는 등 빈곤퇴치 성과의 공고와 향촌 진흥을 효과적으로 연계시켜 이끌었다.8.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서거지난 11월 30일 중국 공산당 제3대 중앙지도자그룹의 핵심이었던 장쩌민 중국 전 국가주석이 상하이에서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비통에 젖은 중국 각계각층은 여러 방식으로 추도대회를 거행하며 그의 서거를 애도했다. 12월 6일 오전 장 전 주석 추모대회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됐다. 이날 시진핑 총서기가 애도사를 읽었다.9. 中 경제 안정적 성장세 이어가중국 경제∙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적 성장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올 1~3분기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3% 증가했고 올해 연간 경제 규모가 120조 위안(약 2경1천858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5~16일 중앙경제업무회의가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내년 경제와 관련해 안정 속 성장이라는 업무 기조를 이어가며 내수 확대 전략과 공급 측 구조 개혁을 연계해 성장∙취업∙물가 안정에 힘쓰고 경제를 전반적으로 호전시키며 효과적인 질적 성장과 합리적인 양적 성장을 실현해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의 전면적 건설을 위한 좋은 출발을 알리겠다고 강조했다.10. 과학적 코로나19 방역 조치의 최적화 추진코로나19 변이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인민의 생명과 안전, 신체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상황에 따라 코로나19 예방∙통제 조치를 최적화시켜 왔다. 지난 11월 10일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코로나19 예방∙통제 업무를 위한 20개 조치를 검토했다. 이어 12월 7일 국무원 예방 및 방역 연계 메커니즘은 '코로나19 예방∙통제 조치 최적화 및 실천에 관한 통지'(새로운 10개 조항)를 발표했다.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는 12월 26일 코로나19 감염병을 2023년 1월 8일부터 '을(乙)류 갑(甲)단계 관리'에서 '을류 을단계 관리'로 조정한다고 밝혔다.

2022.12.31 16:01

5분 소요
[게임업계 큰 별 지다] “韓 게임·벤처업계의 개척자” 각계 애도 잇따라

IT 일반

김정주 넥슨 창업자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각계에서 애도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누구보다 김 창업자와 함께 한국 온라인 게임업계를 일궈온 기업인들은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 창업자의 서울대 공대 1년 선배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1일 저녁 페이스북에 “사랑하던 친구가 떠났다. 살면서 못 느꼈던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올렸다. 김 대표는 “같이 인생길 걸어온 나의 벗, 사랑했다. 이제 편하거라 부디”라고 애도했다. 2일 방준혁 넷마블 의장도 “지난해 제주도에서 만났을 때 산악자전거를 막 마치고 들어오는 건강한 모습과 환한 얼굴이 떠오른다”며 “갑작스런 비보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임업계의 미래를 고민하며 걸어온 고인의 삶에 깊은 애정과 경의를 표한다”고 전했다. 같은 날 남궁훈 카카오 대표이사 내정자는 페이스북에서 “업계의 슬픔”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남겼다. 남궁 내정자는 1999년 한게임 창업 멤버로 참여한 뒤 위메이드·카카오게임즈 등 게임사를 거쳤다. 김 창업자의 족적은 한국 벤처기업의 역사이기도 했다. 벤처라는 말도 생소할 무렵이었던 1994년 넥슨을 설립한 뒤 세계 최초 대규모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바람의 나라’를 선보이며 성공가도에 올라섰다. 이날 국내 벤처기업 1만6904곳을 회원사로 둔 벤처기업협회는 김 창업자를 추모하면서 “국내 인터넷벤처산업을 이끈 선구자이자 진정한 벤처기업인”이라고 말했다. 협회는 또 “벤처업계는 대한민국 인터넷벤처의 역사와 함께해 온 김 회장의 도전과 열정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넥슨코리아 본사가 있는 경기 성남시 판교 일대에서도 침울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김 창업자는 게임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이후에도 숱한 역사를 만들어온 분”이라며 “영광만큼이나 무게감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라고 애도의 말을 전했다. 김 창업자의 빈소를 국내에 마련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유족 결정에 따라 미국 하와이에 안치될 가능성도 있다. 넥슨 측은 “유가족 모두 황망한 상황이라 자세히 설명해 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린다”며 “조용히 고인을 보내드리려 하는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상덕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2022.03.02 15:22

2분 소요
[‘권력의 균형자’ 푸미폰 국왕 사후 태국은 어디로]  왕위 승계 과정에서 정국 혼란 불가피

산업 일반

왕세자 즉위 때 탁신 세력 입지 강화... 프렘 섭정 기간 동안 군부 움직임도 주목 태국 정치의 구심점이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1927~2016년)이 10월 13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46년 6월 9일 국왕에 올랐으니 재위 기간만 70년 126일에 이른다. 생전에 ‘살아있는 최장수 군주’ 기록을 세웠다. 국왕의 서거는 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푸미폰 국왕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국왕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태국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통곡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오열하며 진심으로 애도했다. 태국 국민의 군주에 대한 존경심은 유별나다. 공무원이 일하는 공적 시설이나 지폐에 초상화를 새긴 것은 군주제 국가에선 통상 볼 수 있는 장면이긴 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호텔이나 식당, 가게 등에도 푸미폰 국왕과 왕비의 사진이 걸려 있다. ━ 살아있는 최장수 군주 기록 국민이 보여주는 뜨거운 국왕 사랑은 단지 군주라는 이유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푸미폰 국왕은 실천의 국왕이었다. 국왕은 항상 국민 곁에 다가가는 군주였다. 가난한 농촌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국민과 가까이 했다. 저소득층 복지와 농촌개발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국왕은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년 한 해 200일 넘게 ‘현장’을 다녔다. 왕궁이 있는 수도 방콕 주변의 멋진 장소, 성대한 행사에만 참석한 게 아니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고산지대를 비롯한 오지까지 다니며 국민이 어떻게 사는지를 직접 체험하며 고충을 청취했다. 직접 자동차를 몰고 농촌과 산촌을 누비거나 도보 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헬리콥터로 지방을 시찰할 경우에도 손에서 지도를 내려놓지 않은 채 꼼꼼히 지형을 살피곤 했다. 부친의 지방 시찰에 자주 동행한 둘째 딸 마하 차크리 시린돈 공주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후일담은 푸미폰 국왕의 성품을 짐작하게 한다. 푸미폰 국왕은 시린돈 공주가 헬리콥터를 함께 타고 가다 졸기라도 하면 “국민의 혈세로 기름을 넣은 헬리콥터를 타는 것은 특전이기 때문에 국민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하는 데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자면 되겠느냐”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농촌의 가난에 가슴 아파했던 국왕은 1950년대부터 태국판 새마을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로열 프로젝트(국왕 개발 계획)’를 제창해 30여개 농촌 지역에서 성공시켰다. 로열 프로젝트는 자급자족형 농업개발계획이다. 책상머리로 국가개발계획을 짜지 않았다. 직접 지도와 카메라·필기구 등을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철저한 현장 경험을 쌓아 이를 개발계획으로 활용하는 실사구시의 자세를 보였다. 푸미폰 국왕은 가뭄이 들어도 벼농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관개시설을 완비하도록 하는 한편 상습 가뭄지역에 대해서는 인공강우로 가뭄을 해소토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북부 치앙마이 등의 고산지대에서 화전을 일궈 연명해온 소수민족들에게는 고냉지 채소와 포도와 딸기 등 황금작물 재배로 안정적인 생계를 도모토록 하는 한편 이를 통해 환경도 보전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뒀다.국왕은 그 자신이 세계적인 인공강우 전문가다. 1970년대 초부터 자체 개발한 인공강우 기술로 가뭄 해소에 직접 나섰다. 푸미폰 국왕은 태국 전역에 가뭄이 계속되면 별궁이 있는 휴양지 후허힌에 ‘인공 강우 지휘센터’를 설치해 ‘구름씨 뿌리기’ 작전을 직접 진두지휘해왔다. 국왕의 인공강우기술은 유럽 특허사무소(EPO)로부터 특허권을 인정받았다. 기술의 독보적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EPO가 발급한 특허는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스위스, 영국, 독일을 비롯한 30개국에서 공인됐다. 푸미폰 국왕은 또 크고 작은 부정부패 스캔들에 어떤 형태로든 연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최고의 도덕성을 갖춘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푸미폰 국왕을 알현한 외국 정부 고위인사는 푸미폰 국왕이 낡고 오래된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 세계적인 인공강우 전문가로 가뭄 해소에 직접 나서 태국 헌법에는 ‘국왕은 불교도로서 종교의 수호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불교국가 태국에선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인 담마(法)를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여겼다. 군주는 이 담마를 따르고 실천하며 구현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믿어왔다. 이를 따르는 군주를 탐마라차(法王)라고 부른다. 불법과 통치를 하나로 구현한 불교국가의 이상적인 통치자다. 푸미폰 국왕은 일평생 탐마라차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런 헌신의 결과 푸미폰 국왕을 생불(生佛), 즉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여기는 국민이 상당수다.태국은 1932년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헌법에 따라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다만 헌법 제7조에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국가 상징으로서 국왕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애매모호한 조항이 있다. 이는 태국에서 군주가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어 왔다. 푸미폰 국왕은 공식적인 정치 관여는 자제하지만 헌법 제7조를 활용한 실질적인 정치적 위력은 막강하다. 국왕은 태국 역사상 중요한 시기마다 정치에 관여했다. 크게 세 차례 현실정치에 개입해 정권을 교체했다.첫째는 1973년이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시위자를 향해 군부가 발포하면서 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인심이 흉흉했다. 푸미폰 국왕은 타놈 군부정권에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며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군부정권은 국왕을 위협했지만 국왕은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서”라며 버텼다. 결국 타놈 정권은 무너졌다. 서슬 퍼런 군부도 국왕의 권위를 이길 수 없었다.둘째는 1992년이다. 쿠데타 세력에 대항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다. 당시 국왕은 시위대 대표였던 잠롱 당시 방콕시장과 쿠데타 세력의 지도자였던 수친다 장군을 집무실로 불렀다. 국왕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질책했다. 국왕의 한마디에 수친다는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났고, 태국은 민주주의를 지켰다. 당시 이 두 사람이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궁 응접실에 들어가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공개됐는데, 이들은 국왕으로부터 거의 100m나 떨어진 곳부터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면서 접근해갔다. 국왕을 알현할 때의 태국 전통 예절이라고 한다. 이 장면은 세계에 방송돼 태국에서 국왕이 갖는 높은 위상을 생생하게 보여줬다.셋째가 2006년 9월 4일이다. 이번에는 쿠데타 지도자가 아니라 선거로 뽑힌 총리였다. 이날 오후 방콕의 왕국에서 푸미폰 국왕을 알현하고 나온 탁신 친나왓 총리의 얼굴은 어두웠다. 탁신은 이날 밤 “차기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시위로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바로 전날까지 물러나길 거부하던 탁신이 푸미폰 국왕의 요구 앞에 마음을 돌렸다. 태국 역대 총리 가운데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다는 탁신도 국왕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힘을 잃은 탁신은 9월 19일 유엔총회에 참석하던 중 발생한 군부쿠데타로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2006년 당시 국왕은 두 달여 동안 계속된 탁신 총리 사퇴 요구 시위에도 선뜻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선 결과 절반가량의 국민이 현 정권에 등을 돌린 것으로 나타나자 그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다. 결국 국민의 평화시위에 국왕이 마음을 움직여 탁신 총리의 사퇴를 이끌어낸 것이다. 군부도 국왕이 탁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군대를 움직인 것으로 볼 수 있다.총칼로 쿠데타를 일으킨 서슬 퍼런 장군은 물론 국민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부여한 탁신 총리까지 단 몇 분 간의 설득으로 물러나게 하는 국왕의 권위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국왕이 몸소 보여준 행동을 통해 그 힘의 원천을 짐작할 수 있다. 사례를 하나 보자. 2005년 3월 태국 동북부 전역은 수개월째 계속된 가뭄으로 땅이 말라갔다. 곡물 값이 치솟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끼니를 걸렀다.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갔다. 푸미폰 국왕은 가뭄에 고통 받는 국민을 걱정하며 1주일 간 식음을 전폐했다. 결국 가뭄 대책 책임자를 자처한 후 내각에 인공강우를 시도하도록 지시하고 방콕의 왕궁을 떠나 가뭄 피해 현장을 찾았다. 이재민들과 함께 지내며 고난을 함께한 국왕은 단비가 내린 후에야 왕궁으로 귀환했다.푸미폰 국왕은 태국 화합과 의지의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 갈등을 봉합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상징적인 역할만 한 게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도 발휘했다. 대표적인 것이 2007년 12월 5일 80회 생일을 앞두고 보여준 모습이다. 푸미폰 국왕은 생일 하루 전인 4일 저녁 총리와 내각 각료 전원, 그리고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을 왕궁으로 불렀다. 태국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이들 앞에서 국왕은 이렇게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화합을 강조했다. “나의 두 다리는 병이 들어 똑같이 걷지 못합니다. 그러니 몸이 제대로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지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화합하고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군과 민간이 지금처럼 반목하며 화합하지 못하면 반드시 국가 위기가 닥칩니다.”이 연설은 2006년 9월 군부의 쿠데타로 탁신 총리가 물러나고 군부와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민정 이양이 자꾸 미뤄지고 있는 현실을 치유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담았다. 더구나 그해 12월 23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온갖 유언비어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 국왕으로서 경종을 울린 것이다. 국왕의 준엄한 연설을 들은 수라윳출라논 당시 과도정부 총리는 그 자리에서 “국민화합을 이루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군인들도 고개를 조아렸다. 국왕 생일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왕국 밖에 모였던 시민들도 전국에 생중계된 연설을 듣고 ‘화합’을 외쳤다.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지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실질적인 태국 최고 통치자 역할을 한 푸미폰의 리더십은 80회 생일을 맞아 더욱 빛났다. 국왕의 생일인 5일 방콕 시내 왕궁 주변은 국왕을 상징하는 노란 색으로 넘쳐났다. 전국에서 찾아온 10만 명 이상의 국민이 노란 셔츠를 입고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국왕의 장수를 기원했다. 이날의 연설과 국민의 반응은 태국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국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태국 국민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하나로 기억하는 장면이다. ━ 스캔들 없었지만 즉위 기간 중 벌어진 쿠데타 대부분 추인 국왕은 일평생 단 한번의 부정이나 스캔들도 없었다. 그만큼 자신을 경계해왔다. 푸미폰 국왕의 전기를 쓴 미국 언론인 폴 핸드리는 “국왕의 삶은 부처님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최고의 절제와 도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푸미폰 국왕은 재위 기간 동안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국민의 모범이 돼 온 것으로 평가받아왔다.어두운 면도 없지는 않다. 태국은 1912년부터 2014년까지 모두 21차례의 성공하거나 실패한 쿠데타가 반복돼왔다. 그가운데 15차례가 푸미폰 국왕 재위 중 벌어졌다. 국왕은 임기 중 벌어진 쿠데타의 대부분을 사실상 추인해왔다. 국왕이 군부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영향력과 권위를 유지하면서 민주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빈곤층의 지지를 받았던 탁신 전 총리를 몰아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탁신 치나왓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거세지는 등 정치 혼란이 심화하자 탁신의 사임 발표를 유도해 극적으로 사태 해결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군부와 부유층, 중산층과 지식인이 싫어하는 탁신을 끌어냈다는 외신의 관측도 있다. 푸미폰 국왕은 이미 2003년 12월 5일 자신의 76회 생일 때 만난 탁신 총리에게 “자만하지 말고 비판의 소리를 경청하라”고 따끔하게 야단쳤다.태국에서 국왕에 대한 비판은 법으로 금지돼있다. 형법 제 112조에 왕실모독 처벌에 관한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고 1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탁신 전 총리의 측근인 작라폽 펜카이르 전 총리실장관은 외신기자클럽에서 한 발언이 왕실모독죄에 해당한다며 기소됐다. 외국인도 예외가 없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토론회 사회를 본 영국 BBC방송 기자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이 법에 따르면 모욕 내용을 공표하는 것도 금지돼 있어 그 내용조차 알 수 없다. 태국 곳곳에 수없이 게시된 국왕 사진을 훼손하거나 심지어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혼이 날 수 있다. 유죄 판결을 받고 반성문을 제출해 국왕의 사면을 받아 추방된 외국인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푸미폰 국왕은 생전에 국왕에 대한 비판이 헌법상 금지돼 있어 잘잘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총리보다 더 힘든 위치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왕은 “나에게 (잘못을) 이야기 해 줄 사람은 어머니뿐인데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다”라고 말하며 슬퍼하기도 했다.이런 국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태국은 ‘권력의 균형자’를 잃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왕 후임으로 외아들 마하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계승하게 되는데 부왕만큼의 권위를 얻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이혼에다 문란한 사생활로 국민의 신망이 두텁지 못하다. 탁신 전 총리의 자금 지원을 받아 도박에 빠졌다는 위키리크스의 자료도 있다.이와 달리 여동생인 마하 짜끄리 시린톤 공주는 구호활동 등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1년 간 섭정을 맡은 프렘틴술라논다 전 총리가 왕세자보다 시린톤 공주를 더 신뢰한다는 관측도 있다. 이에 따라 왕위 승계 과정에서 정국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왕세자를 뛰어넘어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길 원하는 세력도 있다. 이처럼 결점투성이인 왕세자가 국왕이 되면 태국이 진정한 입헌군주제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인품이 뛰어난 푸미폰은 국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지만 도덕적으로 흠집이 있는 왕세자는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 시린톤 공주에 대한 국민의 신뢰 두터워 왕세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1년의 애도기간이 끝나고 즉위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군 장성 출신의 프렘 섭정이 군부와 손잡고 어떤 정국을 구상할지에 관심이 몰린다. 군부가 세력을 확대하고 후계자 교체 등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탁신 진영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왕세자가 즉위하면 정치 관여와 무관하게 탁신 진영이 세력을 집결해 정국에 격변이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태국은 가난한 나라다. 인구 6800만 명에 명목금액 기준 국내 총생산(GDP)이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 예상치로 3905억 달러로 세계 28위다. 1인당 GDP는 5742달러로 87위다. 동남아시아에선 인도네시아(3362달러)·필리핀(2962달러)·베트남(2088)보다는 높지만 말레이시아(9501)보다는 한참 낮다. 태국의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 경제발전이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푸미폰 국왕은 1927년 12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마히돌 아둔야뎃 왕자(왕이 되지는 못했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하버드 대학에서 보건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부모를 따라 귀국한 그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6세가 되던 해 스위스로 떠나 초·중·고교를 마쳤다. 하지만 숙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형 아난타 마히돌이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자 1946년 6월 귀국해 국왕에 올랐다. 하지만 대관식을 하지 않고 다시 스위스로 떠나 로잔 대학에서 과학과 법학·정치학을 전공한 후 졸업했다. 대학을 마친 후 귀국해 비로소 대관식을 치렀다. 작곡가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2016.10.23 11:32

10분 소요
좌우 아우르는 통큰 여장부

산업 일반

차기 칠레 대통령으로 압승 유력 … 반미 좌파연대 대신할 중도 좌파연대 출현할까 미셸 바첼레트(62) 전 칠레 대통령은 중남미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정치인이다.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남미에서 남편 후광 없이 집권한 첫 여성 대통령이다. 중도 좌파로 2006년 3월부터 2010년 3월까지 4년 임기의 단임 대통령을 지낸 그는 84%의 높은 지지율로 대통령에서 물러났다.연임이 금지된 헌법 때문에 임기 종료 후 일단 정계를 떠났다. 그 뒤 2010년 9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유엔기구인 세계여성기구(UN Women) 총재를 맡아 전 세계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뛰었다. 그러다 올해 3월 물러나 11월로 예정된 칠레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칠레 첫 여성 대통령으로 국난 극복3년의 정치 공백 끝에 돌아온 바첼레트는 놀라운 속도로 지지율을 회복했다. 6월30일 치른 예비후보 경선에서 중도좌파연합인 ‘콘세르타시온(합의)’의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정치적 분열이 일종의 전통이 된 중남미에선 대선 때마다 좌우파가 선거를 위해 힘을 합친 연합체가 공동 후보를 내서 선거를 치르는 게 다반사다. 여론 조사에선 7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인다.집권 세력인 우파연합 ‘알리안사(동맹)’의 파블로 론게이라(55) 후보나 무소속의 마르코 엔리케스 오미나미(40) 후보를 초반부터 멀리 따돌렸다. 칠레는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1,2위 후보만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2005년 대선에선 1차에서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결선 투표까지 갔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이번엔 1차 투표에서 압승할 것으로 보인다.바첼레트에 주목하는 건 인상적인 리더십 때문이다. 84%라는 엄청난 지지 속에 대통령 임기를 마친 그였지만 임기 내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건 아니다. 사실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할 일을 한 믿음직한 대통령으로 칠레 국민에게 기억된다.대통령 선거에서 1차 투표 46%, 2차 투표 53.3%의 지지를 받고 당선돼 2006년 3월11일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65%의 지지율을 자랑했다. 그러나 한때 지지율이 35%로 떨어지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바첼레트는 취임 직후인 4월부터 공교육 개선을 요구하는 학생시위로 골머리를 앓았다. 5월이 되자 전국적으로 79만명이 동시에 수업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하며 대형 시위를 벌였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고교생 시위가 벌어졌다. 취임 초 50%를 웃돌던 바첼레트의 지지율은 단박에 40%대로 떨어졌다.취임 직후 이처럼 전국이 시위에 휩싸일 때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전국의 경찰을 다 긁어 모으고 여차하면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까지 동원해 힘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를 택하면 사태를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권이주의적이고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인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국민의 존경을 잃고 지지율이 곤두박질칠 수 있다. 다른 한 방법은 요구를 대충 들어주고 달래서 시위대의 자진 해산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피를 흘리지 않고 비난도 덜 받겠지만 남은 임기 내내 반대파에 끌려 다닐 수 있다. 리더십을 상실하고 ‘식물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과거 한국을 휩쓴 광우병 촛불시위 때 우리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선택을 목격했다.이런 상황에서 바첼레트는 제3의 선택을 했다. 그는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위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제 진압 명령을 내리지도, 적당히 타협하는 미봉책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시위는 내가 미처 몰랐던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할 일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기회”라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조했다.그는 전국의 모든 정파·종교·인종·지역을 망라한 전문가·교사·학부모에 학생 대표까지 참여하는 교육개혁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해법 마련을 일임했다. 그러자 일단 시위가 그쳤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자문위 최종 보고서가 나와 이듬해 교육개혁법 제정으로 이어졌다.바첼레트는 칠레에서 30년 만에 처음 벌어진 대규모 시위 사태를 충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목소리와 의견을 모으는 대통합·대타협의 장으로 바꿔놓은 정치력을 인정 받았다. 바첼레트의 리더십을 연구한 울산대 이순주 교수(중남미 정치학)는 “‘국민은 투표할 권리만 원하는 게 아니라 주장할 권리도 원한다’는 취임사 내용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쪽 편만 들지 않고, 생각이 다른 국민 사이의 갈등 해결을 대통령의 임무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바첼레트 리더십의 장점”이라고 강조했다.하지만 바첼레트는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는 단호함을 보였다. 교육개혁 자문위가 한창 활동 중이던 그 해 8월 2000여명의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에 돌을 던지자 최루탄과 물대포로 강경 진압했다. 요구 사항을 충분히 들어주고 자문위까지 만들어 해법을 강구하고 있는데도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폭력 시위를 벌인 것은 받아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이듬해인 2007년 2월 다시 악재가 터졌다. 바첼레트 이전 정권에서 계획해 바첼레트 취임 2년 차에 수도 일원에 도입한 대중교통 시스템 ‘트란 산티아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큰 혼란이 일어났고 항의 집회 과정에서 사망자까지 나왔다. 충분한 준비 없이 종전 시스템과 새 시스템을 한꺼번에 바꾸려다 일이 꼬인 것이다.고교생 시위 사태로 떨어진 지지율이 2007년 2월엔 55.2%로 회복됐지만 교통 혼란으로 불만이 커져 3월엔 지지율이 42.7%, 4월에는 35%로 떨어졌다. 이때 바첼레트는 솔직함의 리더십을 보였다. 전임 정권에서 계획한 것이지만 이 시스템을 계획대로 도입하기로 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으니 책임지고 개선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바첼레트의 사과와 시정 약속으로 사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의회가 교통시스템 개선을 위한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않자 그는 범미개발은행으로부터 4억 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그 결과 1년 뒤에는 버스 노선이 56%, 운행 버스가 31%, 버스정류장이 163%, 버스전용차선이 36% 늘었다. 버스 대기시간은 평균 30분 이상에서 4~8분으로 확 줄었다. 대통합 강조하되 위기 때는 단호함 보여하지만 계속되는 정쟁 속에서 이듬해 9월 헌법재판소가 차관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바첼레트는 비상조치를 발동해 이를 밀어붙여 교통시스템을 계속 정돈했다.그 뒤 임기 말 칠레가 대지진을 당하자 발로 뛰며 국민을 위로하는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퇴임 때 민주국가 지도자로는 드문 84%의 높은 지지를 얻은 것은 이런 리더십 덕분이다.그 덕분에 그는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남미 전체의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도 크다. 그를 주목하는 이유다.바첼레트는 대통령이 되기 전 전임자인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 정권에서 중남미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도 이런 대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다.오랫동안 군사정권을 유지하다 민간 정부에 권력이 넘어간 칠레는 그가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도 여전히 군부를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언제 다시 쿠데타로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 출신으로 2000~2002년 보건장관을 지낸 그는 칠레와 미국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뒤 2006~2010년 국방장관을 맡았다. 국방장관 재직 중 그는 군사정권의 잔재를 없애는 데 힘썼다.명분으로만 밀어붙여 이룬 게 아니었다. 그는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구사했다. 군 연금제도를 개혁해 봉급이 적은 군인들에게 적절한 연금을 보장하고 군이 원하는 군사 장비와 해외 평화유지군 파병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자 군이 먼저 손을 들었다. 바첼레트는 군부 수장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다시는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받아냈다. 군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국가 과제인 군의 정치 중립을 얻어낸 것이다. 때론 강경한 원칙주의보다 부드러운 실용주의가 상대를 무장해제하는 법이다.그렇다고 군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1973년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1974~1990년 대통령을 지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2006년 12월 숨지자 독재자에게 국장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군사장을 치르도록 명령했고, 애도 기간도 선포하지 않았다. 다만 군 기지에 조기를 게양하고 관에 국기를 덮을 수 있도록 했다.전직 대통령임에도 군 기지 외에는 조기 게양을 거부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여성 국방장관인 비비아네 블랑로트를 유일한 정부 대표로 식장에 파견했다. 대통합과 독재에 대한 대응은 별개라는 것이다. 국민화합을 내세울 때와 원칙을 앞세울 때를 구분한 셈이다.바첼레트는 칠레의 ‘혁명 유자녀’다.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페트가 이끄는 군부는 선거로 집권한 좌파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집권했다. 공군 장성으로 친아옌데파였던 바첼레트의 아버지 알베르토는 쿠데타 직후 군부에 끌려가 몇 달간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군부가 요구하는 해외 망명을 거부하고 버티다 심장마비로 숨졌다.하지만 바첼레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권력을 이용해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하지 않았다. 바첼레트가 물러난 지 2년이 흐른 뒤인 지난해 7월 칠레의 우파 정권은 알베르토를 고문한 전직 공군대령 두 명을 체포해 기소했다. 바첼레트는 비극적인 개인사와 국정 운영을 철저히 구분했다. 비록 개인사와 국가의 역사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말이다.바첼레트는 남미의 성공한 중도 좌파 정권의 전형이다. 우파가 시행하던 시장경제 정책을 계속 추구하면서 거기서 얻은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사회보장을 합리적으로 늘려 빈부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펼쳤다. 남미 특유의 포퓰리즘을 포기하고 대신 성장과 분배의 합리적인 조화를 꾀한 것이다. 미국과도 외교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어려서 아버지가 워싱턴의 칠레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할 때 미국 생활을 적도 있다.어려서 해외 망명을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숨진 뒤 군사 정권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상당 기간 구금 생활을 했던 그는 군부에 있던 아버지 친구들의 연줄로 1975년 해외 망명을 떠날 수 있게 됐다. 호주를 거쳐 옛 동독에 도착한 그는 칠레에서 망명한 건축가 호르헤 레오폴도 다발로스 카르테스를 만나 1977년 결혼했다. 이듬해 6월 아들을 출산한 그는 그 해 9월 베를린의 흠볼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그러다 이듬해 칠레로 귀환허가를 받자 미련 없이 돌아가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983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0년 칠레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에 능숙하다. 19세기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건너온 포도주 상인의 후예다.외국어 능통한 의학박사 출신바첼레트는 여러 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가톨릭이 주류인 중남미 국가의 정치 지도자인데도 종교가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세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이다. 막내는 아버지도 다르다. 첫 남편과는 이혼했으며 그 뒤 사귄 의사 남자 친구와 사이에 막내를 낳았다. 이 의사는 군사정권과 관련 있는 우파 인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정과 정치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바첼레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집권 때 중남미에 강력한 중도좌파 연대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3월5일 세상을 떠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과거 이끈 강력한 반미 좌파연대를 대신할 합리적인 중도 좌파연대의 출현이 기대되는 것이다. 남미는 차베스 식의 포퓰리즘 좌파가 시들한 분위기다. 좀 더 합리적·효율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빈곤층을 줄이는 정권이 인기를 회복하는 추세다. 그런 변화의 한복판에서 바첼레트의 칠레 대통령 재선이 기대된다.

2013.07.08 16:07

7분 소요
스릴러 작가의 ‘원초적 본능’

산업 일반

데이비드 발다치는 미국 의회 도서관의 희귀본·특별소장본 책임자를 암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전에는 주로 MP5 기관단총, 단검, 권총, 독극물 주사, 주문 제작한 반자동 SR75 소총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의회 도서관 안으로 총과 단검을 들여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창의력이 필요했다. 발다치는 소설가다. 따라서 상상력을 얼마든지 동원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일을 했다 하면 제대로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발다치는 희귀본 책임자인 마크 디뮤네이션의 안내로 도서관 내부를 샅샅이 둘러봤다. 미국 초기의 의학 서적을 모아둔 서가를 지나 어린이 도서가 진열된 중2층으로 올라갔다. 발다치는 계단 맨 위에서 작은 대리석 흉상의 머리를 가볍게 치고는 좁은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확히 무엇을 찾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다. 그러던 중 책이 빼곡히 꽂힌 높은 서가들 사이의 벽에 튀어나온 가스 노즐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죠?” 발다치가 물었다. 바로 그 노즐이 발다치의 인기 정치 스릴러 중 하나인 ‘수집가(The Collectors)’ 38쪽에서 살인 도구로 사용된다. 암살자가 할론 1301 가스통을 치명적인 이산화탄소로 바꿔치기한 뒤 희귀본 책임자로 나오는 극중 인물 조너선 디헤이븐은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다(원래 구상에서는 그 살인이 그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지만 발다치는 등장인물의 모델이 된 디뮤네이션이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어” 몇 페이지를 더 할애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얼마 전 발다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희희낙락했다. 그는 도서관 내부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 한 큐레이터를 만나러 의회 도서관을 다시 찾았다. 늘 그렇듯 발다치는 이 도서관에서 소설 속에서 활용할 만한 또 다른 장치가 눈에 띌까 싶어 주의를 늦추지 않았다. “어느 누가 의회 도서관을 첩보 공작 무대로 삼을 생각을 하겠나?” 발다치가 우쭐대듯 한쪽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 그러나 사실 여러 작가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를 쓴 댄 브라운, ‘4의 규칙(The Rule of Four)’을 쓴 이언 콜드웰, ‘비밀의 계절(The Secret History)’을 쓴 도나 타트가 그랬다. 하지만 사회부적응자로 이뤄진 팀(강박증에 시달리는 천재 기술자, 약물중독에서 회복 중인 전 국방정보국 요원, 늘 노심초사하는 도서관 큐레이터, 정부가 고용한 건달 암살자)이 숱한 음모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지어내려면 그 정도의 허세는 있어야 한다. 발다치의 ‘캐멀 클럽’ 시리즈 2탄인 ‘수집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발다치로서는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그가 쓴 소설 16권(스릴러가 아닌 작품이 두 권이다)이 전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의 최신 작품 ‘천벌(Divine Justice)’은 1위로 출발했다. 그 바로 6개월 전에 나온 ‘진실(The Whole Truth)’도 그랬다. 4월 말이면 서점에 도착할 다음 작품 ‘대통령의 가족(First Family)’도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문학비평가들은 발다치의 소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평이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만 어쩌다가 나와도 모욕적인 혹평이 많다. 뉴욕타임스의 한 비평가는 발다치의 소설 ‘승자(The Winner)’를 읽고 이렇게 썼다. “어지러운 은유, 단어의 우스꽝스러운 오용이 가득하며, 영어 구사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쓴 습작처럼 읽힌다.” 대다수 일반인, 특히 뉴욕타임스 독자들도 발다치를 진지한 작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발다치? 공항 서점 진열대에 꽂힌 3류소설을 쓴 사람 아냐?’라는 식이다. 대중시장을 겨냥한 스럴러는 대개 패스트푸드 취급을 받는다. 맛은 있을지 모르지만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하고 심장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생각이 발다치의 부아를 돋운다. “만약 내가 10년이 걸려 책 한 권을 쓴다면 누구누구만큼 훌륭한 작가라는 말을 들을까? 글쎄…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이 문제를 스릴러가 해롭니 이롭니 하는 찬반 논쟁으로 끌어간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섭섭하다.” 읽기 수준이 초보 또는 초보 이하로 추정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 나라(미국)에선 그렇게 많은 사람의 손에 책을 쥐여줄 만한 능력이 일종의 공공 서비스에 속한다고 발다치는 말했다. “흔히들 독서라고 하면 해변에 드러누워 책을 읽다 졸다 하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사실 독서가 민주주의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 사람들은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실제로 발다치는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읽기 능력 증진을 위한 ‘위시 유 웰(Wish You Well)’ 재단을 설립해 운영하며 그의 소설 중 페이퍼백으로 나온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당신이나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읽기 능력을 향상하고 싶다면’ 그 재단의 상담소로 연락하라는 안내문이 들어 있다.물론 스릴러 읽기가 일종의 시민적 의무라는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3류소설을 읽으면 좀 더 진지한 책을 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발상을 반박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발다치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책을 읽으며 그 다음 쪽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 하는 데는 짜릿한 흥분이 따른다.아울러 스릴러가 사람들의 마음에 해롭다는 주장은 이롭다는 주장보다 더 터무니없을지 모른다. 지금처럼 경제위기로 암울한 시기에 발다치는 정신적 휴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책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발다치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스릴러가 민주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지 여부는 논외로 치더라도 스럴러는 출판사에는 분명히 필수적이다. 좀 더 문학적인 책은 하드커버로 5만 부가 팔리면 성공작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발다치 같은 작가의 소설은 100만 부 이상 팔린다. 평균으로 볼 때 한 주 동안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의 3분의 1가량이 스릴러다. 베스트셀러의 제왕은 제임스 패터슨이다. 뉴욕타임스 하드커버 부문에서 그의 작품 19권이 연속 1위에 올랐다. 패터슨은 너무 자주 책을 내느라 집필 협력자 팀이 있다. 해쳇 북 그룹에서 발다치의 소설을 내는 그랜드 센트럴 퍼블리싱 출판사의 대표 제이미 라브는 이렇게 말했다. “끊임없이 책을 내는 작가들, 또 그 책이 몇 십만 부씩 팔리는 작가들을 확보해야 출판계에서 성공한다. 그런 작가들을 출판사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 육성하기도 한다. 그런 작가들을 저변에 깔아두면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대할 여지가 생긴다.” 패터슨과 뱀파이어 소설 ‘트와일라잇’을 쓰는 다수의 작가를 포함해 베스트셀러 작가 여러 명을 확보한 해쳇 북 그룹이 특히 그런 면에서 뛰어나다. 그 결과 2008년 출판업계가 구조조정에 들어가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한창일 때도 해쳇은 모든 직원에게 연말 상여금을 지급했다. 스릴러가 왜 먹히느냐고?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백만 달러짜리’ 질문이다. 하지만 스릴러가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물론 발다치의 문장이 어설픈 면도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가위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안전정치가 풀린 장전된 총을 들고 뛰어다니지 말아야 한다(As with scissors, one should avoid running with a loaded gun while the safety was off).” 하지만 발다치처럼 쓸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그처럼 책을 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스릴러가 시장에서 먹히려면 독자가 가능한 한 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독자가 계속 책장을 넘기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손쉬운 방법은 서스펜스 제공이다. 가장 궁금한 점을 교묘하게 지속해 가는 전략이다. 그러나 블록버스터가 되려면 서스펜스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다수 스릴러 작가처럼 발다치도 작품에 독창적인 플롯, 호소력 있는 등장인물, 행운, 그리고 일관성을 혼합한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과 달리 발다치의 책은 첨단 기술이나 극적인 반전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상호관계에 더 기댄다. 발다치는 잠수함이나 기발한 장치보다는 워싱턴 교외지역을 무대로 삼는다. 법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물론 변호사 출신이기에 발다치는 약간의 수사 과정을 포함시킨다). 아무튼 발다치는 뭔가 색다른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그의 소설에는 대통령이 등장하고 언론 조작과 스파이, 비밀, 음모가 난무한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워싱턴도 다른 소설에서처럼 늘 일반 밴으로 위장한 당국의 감시차량이 어디엔가 주차해 있고 근처에 암살자가 숨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들은 대개 뜻밖이다. 부자도, 천재도, 미남도 아니다.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멀다.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편집증이 있고, 어두운 과거를 가졌다. 그들 중 일부는 자유세계 지도자의 목숨을 구하기보다는 TV로 스포츠 경기나 보며 게으름 피우기를 더 좋아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발다치가 그리는 워싱턴에선 늘 외부자들이 구원의 투사로 나선다. 그래서 워싱턴 내부자만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도 그의 책을 읽는다. 어느 누구도 워싱턴 내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진 않지만 영웅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발다치가 데뷔한 1996년 이래 그의 책은 전 세계에서 모두 7500만 부가 인쇄됐다. 그러니 그의 소설이 각계각층에서 같은 취향을 가진 부류에 호소력을 갖는다고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지난 12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아침 버지니아주 레스턴에 있는 그의 사무실 서재를 찾았다. 발다치는 기자에게 “지금 새 책을 마무리하는 단계인데 당신은 진짜 흥미진진한 순간에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물론 흥미로운 순간이겠지만 그에겐 드문 일도 아니다. 발다치는 약 7개월마다 책을 한 권씩 써낸다. 혼자서 자료를 찾고 글을 쓰는 작가로서는 지옥 같은 일정이다. 발다치는 정식 직원 3명을 고용했다. 비서, 사무실 관리자, 그리고 위시 유 웰 재단 운영 책임자다. 가족들도 거든다. 그날 아침 그의 장인은 회의실의 커다란 나무 탁자 앞에 앉아 온라인 저자 서명회를 위한 편지봉투 겉봉에 주소를 적어 넣었다. 그의 작업 방식은 매우 열정적이다. “내게는 정신적인 스승이 한 명 있다”고 발다치가 말했다. “법정 변호사다. 그는 실제 재판에서 본 최고의 변호사였다. 그 변호사는 줄담배를 피우고 지나치게 안달하는 성격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는 반드시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한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열변을 토한다. 그를 보고 경탄하며 ‘그냥 토해 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비슷하다. 늘 산만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레이저처럼 집중한다.” 그리고 한 작품이 끝나면 곧바로 새 작품을 시작한다. 그래서 독자가 한 책의 마지막 쪽을 넘길 때 또 다른 책의 첫 장이 기다린다. “책 한 권을 방금 끝냈는데 또 새 작품을 갖고 온다”고 그의 에이전트인 에어런 프리스트가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아이디어가 쏟아지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발다치는 올해 48세다. 갈색 머리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인다. 턱이 뾰족하고 어깨가 넓고 단단한 체격이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교외에서 자라면서 일찍이 성실한 생활을 체득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등교 전에 신문을 배달했다. 버지니아 주립대와 버지니아대 법학대학원 시절에는 야간에 경비원, 건설 현장 인부, 진공청소기 외판원으로 일했다. 법학대학원 졸업 후에는 9년 동안 법정 변호사, 기업 전문 변호사로 현장에서 뛰었다(그의 소설 여러 권에서 변호사가 등장하는 데 개업 변호사들은 한결같이 딱한 처지다).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밤이면 영화대본과 소설을 썼다. 하지만 연거푸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가 1994년 그는 한 도둑이 우연히 대통령이 연루된 살인사건과 진상 은폐를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 그 작품이 ‘앱솔루트 파워(Absolute Power)’였다. 그러자 마침내 여기저기서 큰 관심을 보였다. 발다치는 프리스트와 계약했다. 프리스트는 대중시장을 겨냥한 스릴러 작가를 대표하는 에이전트로 유명했다. 당시 타임워너 북그룹의 책임자였던 래리 커시봄이 프리스트에게서 ‘앱솔루트 파워’를 넘겨받은 그날 저녁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출판계에서 오래 활동하면서 그 책처럼 ‘바로 이거야!’라며 무릎을 친 경우는 드물었다”고 커시봄이 전했다. “끝까지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 4시였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는 한 시간 동안 누워있다가 바로 사무실에 나갔다. 출근하자마자 발다치의 에이전트인 프리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책의 판권을 사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벌써 다 읽었다고요?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 나는 ‘진짜 다 읽었소. 의심스럽다면 내게 내용을 물어보시오’고 대답했다.”계약금 200만 달러에다 영화(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겸 주연을 맡았다) 판권 300만 달러와 외국어판 판권까지 거둬들이면서 발다치는 갑자기 부자가 됐다. 우선 빚을 갚은 뒤 그의 가족(아내와 두 자녀)은 버지니아 북부의 침실 일곱 개짜리 저택을 현금으로 구입해 이사했다. 발다치는 불어난 재산에 아직 거리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물론 레스턴에 있는 사무실도 잘 꾸며져 있다. 회의실의 거대한 나무탁자는 반들반들 윤이 나고 서재의 소파는 부드럽고 푹신하다. 그는 서재를 둘러보며 “늘 이런 방을 갖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흡족함보다는 놀라움에 가까운 말투였다. 발다치는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자녀를 워싱턴 지역의 고급 사립학교가 아니라 가톨릭 교구 학교에 보낸다. 워싱턴의 단골 식당은 소박한 네이선스다. 첫 데이트를 할 때 아내를 데려갔던 조지타운의 선술집 겸 식당이다(네이선스 식당은 발다치의 소설에 빈번히 등장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당연히 돈과 애증의 관계다. 그는 돈 문제를 쓰는 대목에선 글에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부자들은 “가운이 몇 벌씩 있고” 옷들은 단순히 “아주 비싸다”고만 묘사된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저택을 벽화로 장식한다. 또 끊임없이 불륜을 저지른다. 가장 지독한 악당은 돈에만 혈안이다. 발다치 자신은 돈 때문에만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테러리스트의 머릿속에 들어가고, 국민이 정치인들의 권력 남용에 신경을 곤두세우도록 촉구하고, 선량한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응을 하는지 보려고 그들을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을 설정하고 싶어한다. 발다치는 자기 소설이 정의를 다시 세우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변호사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불의를 숱하게 목격한다. 처벌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수없이 본다. 또 부당하게 처벌 받은 사람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소설은 그런 부당함을 바로잡는 방법의 일환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정의가 실현 가능하며 인과응보가 분명히 이뤄진다고 믿도록 해준다.”그는 부친의 올곧은 성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은 주말이면 아들을 자신이 일하는 운송회사에 데려갔다. “회사엔 흑인용 화장실과 백인용 화장실이 따로 있었는데 백인용이 훨씬 좋았다”고 발다치가 말했다. “아버지는 정비기사였는데 승진해서 주임이 됐다. 주임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백인용 화장실을 폐쇄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화장실 하나만 사용합니다. 그 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폐쇄하고 백인용 화장실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화장실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내가 소설에서 주제로 삼는 정의 실현 중 일부가 거기서 나왔다.” 발다치가 자기 소설에서 악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고, 대통령들이 인간 쓰레기일지도 모른다는 도덕적 복잡성을 다룬다고 얘기할 때 그의 부드러운 남부 말씨는 갑자기 빨라졌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실제로 믿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선과 악 사이의 경계선을 흐려놓기를 좋아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책을 끌고 나가는 힘은 도덕적 계산법보다는 열정적이고 폭넓은 그의 상상력이다. 그는 집필을 위해 현장 조사와 자료를 파고든다. 발다치가 책에서 다루는 분야에 종사하는 팬들은 그가 자신들의 세계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말한다. 발다치는 박제술과 테러리즘을 다룬 책을 읽고, 로또를 조작하는 방법을 꾸며내고, 자기 책에 지리, 역사, 탄도학, 희귀본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약간씩 섞는다. 때로는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재미있는 실제 정보를 가득 제공하는 전략이 스릴러의 성공을 보장하는 또 다른 열쇠다. 그는 공항 활주로에 나가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을 관찰했고, 기관총을 쏴 보았으며, 저격수·경호원들과 친분을 텄다. 물론 발다치에게도 한계가 있다. 최면술과 관련된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 한 심리학자가 그에게 직접 최면을 걸어보겠다고 제의했지만 발다치는 겁이 나서 거절했다. “그는 인터뷰를 할 때 아주 꼼꼼하게 묻는다”고 의회 도서관의 디뮤네이션이 말한다. 발다치는 저술 활동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거대한 실습 현장으로 바꿔 놓았다. 한때 그의 이웃에 살았던 친구 로버트 슐레(카터 대통령의 특별 비서관이며 로비업체 설립자)는 어느 날 직장에서 귀가할 때 발다치의 집 앞에 서 있는 마필 운송용 트레일러를 보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저게 도대체 뭐야?”라고 말했다고 슐레가 돌이켰다. 당시 발다치는 버지니아 교외의 목장에서 일꾼으로 위장한 첩보요원을 다룬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 트레일러 안에 직접 들어가 그곳에 마약을 어떻게 숨길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발다치의 팬은 일반인에서부터 정치인까지 다양하다. 그의 사무실은 국토안보부와 록히드 마틴(군수업체) 중간에 끼어 있다. 사무실은 액자에 넣은 베스트셀러 목록과 자기 소설의 포스터로 장식돼 있고, 응접실 벽에 늘어선 서가는 거의 그가 쓴 책으로 가득하다. 그중 일부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된 책이다. 퍼스트레이디 여러 명, F W 드 클라크 전 남아공 대통령,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 그리고 미국 대통령 두 명이 쓴 팬레터도 액자에 들어 있다. “대통령에게서 편지를 받으면 액자에 넣어둬야 한다”고 발다치가 말했다. 1999년 빌 클린턴은 발다치의 ‘단순한 진실(The Simple Truth)’을 그해 자신이 가장 좋아한 책이라고 말했다. 조지 H W 부시는 한 편지에 “휴스턴에서 당신의 No.1 팬이 보냅니다”라고 서명했다. 부시는 발다치의 책을 너무 좋아해 메인주 케네벙크포트 별장으로 그를 초대했다. “대통령은 정말 보트를 잘 몰더라”고 발다치가 말했다.발다치는 유력인사들과 어울리는 기회를 즐기는 듯하다. 민주당 전국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버지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테리 매콜리프가 다음날 사무실에 온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했다. 그는 정부와 계약한 경비업체가 ‘대참사 시나리오’(예컨대 수퍼보울 경기장 폭탄테러)를 구상하려고 자신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정부 기관들이 소설에 좀 나오게 해 달라고 로비했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그런데도 발다치에게서는 평범한 남자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연히 아주 특별한 상황에 놓이게 된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하지만 모든 일이 음모로 귀결되는 발다치의 세계에선 ‘진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009.04.28 16:01

12분 소요
[이호 객원기자(작가)의 재계 거물들의 육성 기록⑤]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김종필 때문에 佛 재고 비행기 6대 사”

산업 일반

지난 1982년 조중훈 회장(좌)은 프랑스와 인연이 깊어 프랑스 정부가 주는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그랑오피시에’훈장을 받았다. 이호 객원기자. 2002년 11월 정석(靜石)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타계했을 때 각계 원로들은 ‘수송 외길’을 걸어온 거목이 떠난 것을 애도했다. 조 회장은 한국의 민간 항공사를 새로 쓴 인물이다. 1990년 7월 12일 조 회장을 인터뷰했다. 후발주자인 아시아나항공이 첫 취항을 마치고 1년여가 지난 다음이라 ‘민감한 문제’가 많을 때였다. 그는 가끔 불편한 심기를 삭이기도 했지만 톤을 낮추면서도 원칙을 강조했다. 이때마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렇게 급하게 하지 말고 순리대로, 라이선스 있는 대로, 시간을 가지고 해도 늦지 않다고…. 몇 번이나 그 사람들(아시아나항공)한테 충고했어요. 항공사업이라는 것이 절대 쉬운 게 아닙니다. 비행기 값만 70억 달러 넘는 돈을 투자해 지금까지 왔는데도 부족한 것이 이 항공사업입니다. 70억 달러면 포항제철을 23개나 건설할 수 있는 돈입니다. 이런 막대한 투자를 감안해 자금 사정도 규모 있게 생각하면서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어요.” 조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의 취항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요는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었다.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기술적인 면이라든지 항공기 확보, 인원 문제, 정비시설, 훈련 등 준비가 된 연후라면 모르겠어”라는 말을 쏟아냈다. “그런 것들이 전혀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5공화국 말기에 후다닥 내줬잖아요! 그러니 피해를 누가 보고 있습니까? 그런데 정부는 허가만 내주고 모른 척하고. 교통부가 민항기 조종사 한 사람이라도 길러봤소? 뭘 알고서 일을 해야지!” 쌓였던 울분을 털어내려는 것일까. 한 번 질문하면 그는 10분 넘게 ‘항변’했다. 특히 그는 조종사 문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항공기가 준비되니까 취항했을 것 아니냐? 그것만 있으면 항공사업이 됩니까? 사람이 중요해요. 그런데 몇 년씩 훈련시켜 놓은 조종사들을 유혹해 우리를 골탕 먹이고.” 조 회장은 흥분한 듯 보였다. 그는 얼마 전 한 중역에게 역정을 내기도 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국제선 청사에 아시아나 간판을 내걸지 못한다고 그랬는데. 저놈의 인간들이 어떤 수작을 했는지 모르지만 간판이 내걸렸어! 당신들은 뭐했어!” 그에게 이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원로는 자신의 역사 앞에서는 기운이 솟는 법이다. ‘조중훈의 역사’는 수송의 역사였고 민항사의 기록이기도 했다. 어떤 질문을 해도 대한항공의 역사가 나올 것 같았다. 마침 조 회장이 프랑스 정부가 주는 ‘레지옹 도뇌르-그랑 오피시에’ 훈장을 받았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인연부터 물었다. 그는 ‘한·프랑스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그때가 양택식 서울시장인가 그랬는데. 서울의 지하철 시대를 열 때 프랑스에서 들여오기로 하고 전부 섭외를 마친 상태였어요. 그런데 정치적인 이유인지, 누군가 로비를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일본 업체로 바뀐 겁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한국과 단교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말이지요. 그런 와중에 한국이 외교 무대에서 일이 터진 겁니다. 마침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하겠다고 나서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막아!’ 이랬단 말이죠. 문제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터졌어요. 프랑스가 반기를 들고 나온 거예요.” 반기를 들다니요? “유엔에서 북한 편을 들겠다는 얘기지요. 이건 상상도 못한 거지. 지하철 때문에 정부가 꼼짝없이 당하게 된 거지요. 그런데 프랑스는 ‘1표’가 아닙니다. 그 당시 프랑스 식민지 표가 전부 17표예요. 프랑스가 지금도 그 표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걸 배워야 합니다. 외교력을 배우라는 겁니다. 프랑스가 자기 식민지를 독립시켜줬지만 그 식민지들은 프랑스에 의존하지 않고는 유지가 안 돼요. 세네갈 같은 나라는 프랑스가 1년에 몇십 억달러를 원조해줍니다. 그럴 수 있는 나라가 17개국이나 되는 겁니다.” 하루는 김종필 총리가 조 회장을 찾았다. 김 총리의 첫 인사는 “빨리 프랑스로 날아가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양반이 당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을 만나 에어버스(항공기) 6대를 사는 것으로 합의한 겁니다. 어떡합니까. 제작만 해놓고 팔리지 않던 에어버스 6대를 구입했죠.” 그 후 조 회장은 프랑스 정부가 경제 협력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20여 년 동안 한·프랑스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그의 장남인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벤츠 탄 한국 기업인 1호 조금 다른 얘기지만 ‘프랑스통’이 된 조 회장은 88올림픽 유치도 확신했다. 프랑스의 외교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도 프랑스 표가 없었으면 안 됐습니다.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고생을 했지만 나는 프랑스를 설득하느라 애를 썼어요. 근데 프랑스에서 나한테 사인을 보내오는 거예요. ‘됐다!’ 하고선 발표도 나기 전에. 그래서 서울 본사에 연락해 특별기를 보내라고 했어요.” 그 후에도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민간 외교는 은밀하게 하는 건데 그런 게 알려지면 특히 국제적인 항공사를 운영하는 사람한테는 부담이 될 때가 많지요. 저 사람은 목걸이(신분증) 없는 외교관이니 조심하라고 경계할 때가 많고 말이지요, 하하.” 우리나라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벤츠를 타신 분이라고 하던데요. 내가 10년 가깝게 미군 수송을 했거든요.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57년인데, 그때 벤츠를 탔어요. 당시만 해도 미군 장교들이 한국을 생각할 때 남자는 전부 ‘도둑놈’이고, 여자는 ‘양부인’이고, 집은 ‘하꼬방’이고, 길은 전부 먼지투성이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사업가들은 ‘짚차(지프)’면 최고였어요. 사장이라는 사람도 짚차를 타면 아주 우쭐하고 말이지. 그러나 그건 순전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이었어요. 미군들하고 얘기해 보니까 짚차 타고 온 사람, 저건 분명히 도둑질한 차를 타고 온다 그거예요. 미군 차를 훔쳐 개조했다는 거지요.” 그래서 벤츠를 산 겁니까. “나는 이날까지 남이 하는 것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전부 개척만 해왔습니다. 차도 짚차는 안 되겠다 해서 없는 무리를 해가지고 벤츠를 샀어요. 그런데 이게 저를 확 바꿔놓은 겁니다. 벤츠 타고 미군들을 만나니까 저를 완전히 달리 보는 거예요. 게이트를 통과할 때도 일일이 패스포트를 보여주지 않아도 되고 귀빈 대우를 받으면서 사업을 한 겁니다. 8군 장교니 뭐니 자기네들이 벤츠를 타봤습니까? 오히려 내가 백만장자 대접을 받는 겁니다, 하하.” 오늘날의 대한항공도 뿌리는 베트남에서 수송으로 급성장한 한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조 회장은 대한항공이 아무리 성장하고 규모가 커져도 ‘한진그룹’을 고집했다. 물론 동생인 조중건 사장(현 대항항공 고문)의 공도 컸다. 친화력과 사업적인 직관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은 역시 ‘노는 물’이 달랐다. 외교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큰 덩어리는 조 회장 몫이었다. 1964년의 일이다. “장기영씨가 부총리를 지낼 때입니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인데, 장 부총리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지요. 64년에 그 양반이 부총리가 됐는데, 그때 대한민국에 가용 외화가 4700만 달러밖에 없었어요. 그 숫자를 내가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국가 재건을 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는데. 쓸 수 있는 외화라곤 4700만 달러밖에 없고, 그것도 씨티은행에 조건부로 들어가 있는 돈이에요. 그런데 1964년 7월께인가? 장기영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다나카 대신 하고 친하다는 것을 알고 나를 부르더니 일본에 가서 2000만 달러만 빌려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오네가이시마스(부탁합니다)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어요. 생각 끝에 묘안을 짜냈어요. ‘이승만 라인’이라고 있잖아요? 어선들이 못 들어오게끔 이 대통령이 고집스럽게 그어 놓은 바다 경계수역, 그걸 얘기했어요. ‘이 라인에 들어온 일본 어선을 한 서너 척만 잡아버리세요’라고 했지요.” “日 어선 잡으면 2천만달러 빌려오겠다” 돈 빌리러 가는 처지에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인다고요? “장 부총리도 처음엔 ‘그걸 잡으면 교섭을 어떻게 해요’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부탁하려면 일본이 들먹거리게 만들어 놓고 가야지 덮어놓고 가서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장 부총리가 당장 잡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진짜 다음날 되니까 일본이 난리예요. 어선 세 척이 나포됐다 이거지요. 이때 내가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다나카를 만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선물을 주겠다고 했지요. 자기 정치력으로 나포 사태를 해결했다고 하면 대단한 게 될 테니까 환영할 수밖에요. 빨리 한국 정부에 선을 대라면서 좋아하는 겁니다. 어려운 척하면서 부총리에게 전화했지요. 그것도 다나카 대신이 옆에서 들으라고 일본말로 말이죠, 하하하. 그렇게 해서 문제를 풀었지요. 그런데 장 부총리 말이 이자가 비싸다고 깎아오라고 하잖아, 하하하. 그때가 우리 아버님이 고희(古稀)셨거든요? 그래도 빨리 가라는 거야. 그 대신 자기가 부총리로서 아버님께 가서 절을 하겠다 이거예요.” 이런 일이 있었으니 65년 베트남 파병 때 장 부총리가 조 회장을 돕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된 배경을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찾은 것이 68년 초일 겁니다. 물론 박 대통령께서 찾는다고 할 땐 예상했지요. 그 전에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얘기가 왔었으니까요. 그런데 솔직히 정부 쪽에서 타진이 왔을 때는 조 사장(조중건)도 강력히 반대했고…. 그런데 대통령께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고 맡으라고 하시는데 뭐라고 그래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했지요.” 한진은 항공사를 경영해본 경험이 있지 않았습니까? “5·16 이전에 ‘에어 코리아(Air Korea)’를 세워 쌍발 여객기 컨베이-240을 들여다가 서울~부산을 1년 남짓 운항했습니다. 그러다 61년에 5·16이 나자 항공 면허를 반납하게 됐지요.” 반납한 게 아니라 빼앗긴 것 아닙니까. “그때 정부에서 항공사업을 하니까 민간인이 하는 것은 좀 삼가해서 자진 반납했죠.” 대한항공을 인수하기 전에 청와대 이후락 비서실장하고 정일권 총리가 한진에다 맡겼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 실장과 몇 차례 만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장기영 부총리가 더 많이 얘기해 왔습니다. 장기영씨가 부총리를 그만 둘 때가 67년 9월인가 그렇습니다. 박 대통령이 말씀한 게 68년 초쯤이고 우리가 대한항공으로 출범시킨 것이 69년 3월이거든요. 장 부총리 때부터 정부에서는 항공사 때문에 몹시 골치를 앓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이 실장이든, 정 총리든 나하고 가깝다고 한진에 넘겨주자고 한 것이 아니다 그거예요.” 결국 조 회장은 경영난을 겪던 항공공사 인수와 에어버스 도입으로 궁지에 빠진 박 대통령을 두 번이나 구한 셈이다. 조 회장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자리를 떴다. 곧이어 조중건 사장과 심이택(현 대한항공 부회장), 고충삼 전무(전 대한항공 고문)를 만났다. 조 사장의 말이다. “KNA를 인수할 때부터 우리는 두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한 겁니다. 청와대 들어가기 전에 우리도 회의를 했습니다. 내가 ‘베트남에서 번 거 몽땅 손 털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형님이 ‘내가 미쳤느냐’고 하더군요. 이러고선 그 골칫덩어리를 등에 업고 나온 거 아닙니까. 완전히 사색이 다 된 형님이 ‘야 임마, 대통령 앞에 가서 싸움을 하냐?’고 하더군요. 아시아나가 출범할 때는 특혜를 받았다는 말이 무성했지만 우린 그야말로 도살장을 눈앞에서 봤다니까요!” “야 임마, 대통령 앞에서 싸움을 하냐?” 말씀을 듣고 보니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겠습니다. “한진이 가지고 있던 자본금, 저축 외화, 또 한진의 신용도까지 몽땅 투입해 보잉 707을 사기 시작한 겁니다. 실패하면 한진까지 거지 되는 겁니다. 한진이 거지가 된다는 건 전장에서 죽음과 맞바꾼 ‘피의 달러’가 물거품이 된다는 의미예요. 정말 처량하게 시작했던 거예요. 그런데 운이 좋았던 게, 70년대가 되면서 방콕 박람회와 오사카 박람회가 열리고, 아시안게임 같은 국제대회가 개최되니까 매년 파도를 타는 거예요. 그래서 72년에 보니까 흑자야! 하하하. 얼마나 좋던지 이틀 연달아 마셨네 그랴. 하하하.” 비행기 도입 때도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중 하나가 대한항공이 세계 최초로 A-300 기종의 화물기 2대를 구입할 때였다. 심이택 부회장의 회고다. “A-300은 처음에 리비아에 팔았던 비행기예요. 착수금만 받고 만들었는데 미국과 리비아 관계가 나빠지고, 프랑스 하고도 틀어지면서 공매 처분을 하려고 내놓은 거였어요. 그걸 회장께서 알고 가보자고 했어요. 근데 출발한 차 안에서 회장님이 손에 뭘 쥐고 계시면서 이게 뭔지 아느냐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게 뭐였습니까. “‘콤파스(나침반)’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 말씀이 기가 막힙니다. ‘내가 꿈을 꿨어. 새벽 4시쯤 됐는데 서북쪽에서 이만한 환한 별 3개가 확 내 앞으로 달려드는 거야. 그래서 깼는데 오늘 봐서 비행기가 서북쪽으로 향하고 있으면 내가 살 거야.’ 그때 비행기가 독일 브레멘이라는 곳에 있었어요. 여기서 서북쪽은 바다 방향입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엔진에 바닷바람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전부 돌려놓게 돼 있거든요. 당연히 동남쪽을 봐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비행기 사기는 틀렸다, 그러면서 갔어요. 그런데, 억? 비행기들이 항구 쪽으로 향하고 있단 말이죠. 그 비행기 2대를 샀는데 지금 동남아 쪽 화물기로 쓰고 있습니다.” 가격 흥정할 때는 어떻습니까? “하여간 남의 비행기 막 깎는다고요. 당시에 그 사람들이 3200만 달러인가 달라고 했는데 2400만 달러인가 주고 샀으니까요, 하하하.”

2005.09.12 00:00

9분 소요
냉전을 뛰어 넘은 미국인의 우상

산업 일반

American Dreamer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타이밍은 언제나 절묘했다. 1984년 6월 6일 노르망디 절벽에서 거행된 D데이 상륙작전 기념 행사에서 멋진 경례로 참전 노병들을 치하한 지 꼭 20년만인 지난 5일 밤 그는 캘리포니아 벨에어의 자택에서 알츠하이머병에 맞선 길고도 당당한 싸움을 끝내고 영면에 들어갔다. 임종을 지킨 가족들 중 한명은 “아주 평온하게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레이건의 타계 소식은 세계가 다시 한번 나치 통치를 종식시킨 연합군의 승리를 기리는 동안 타전됐다. 지난 주말 바로 그 노르망디 해변에서 각국 정상·참전용사·유가족들은 미국인들과 더불어 레이건의 죽음을 애도하며 녹음 테이프를 통해 20년 전 그가 남긴 연설을 다시 들었다. 1984년 전승기념일에 레이건은 해방의 선봉대였던 유격대원들을 기리며 “그들은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전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확신이요, 정의의 신이 끝내 은총을 내리리라는 믿음이었다”고 말했다. 레이건의 목소리는 감정에 북받친 듯 떨리고 있었다. 품위와 신념, 그리고 강력한 힘이 깃들인 그의 연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가장 냉소적인 비판이라야 레이건 자신은 2차대전 당시 할리우드에서 군대용 교육 영화나 찍지 않았느냐는 게 전부였다. 그 노르망디 연설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직생활 내내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인들에게 암흑의 세계에서 한줄기 빛이 되자는, 용기있고 선한 사람들의 나라가 되자는 미국의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노르망디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언제나 자부심을 느낄 것이고, 늘 준비돼 있을 것이며, 늘 자유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유란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소련의 압제, 그리고 미국의 국력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것은 레이건이 미국에 안겨준 큰 선물이었다. 레이건의 나이 향년 93세였다. 낸시 레이건(80) 여사에게 남편의 죽음은 반세기의 사랑, 그리고 투병과 간병의 고통스런 10년 세월에 종지부를 찍레이건의 나이 향년 93세였다. 낸시 레이건(80) 여사에게 남편의 죽음은 반세기의 사랑, 그리고 투병과 간병의 고통스런 10년 세월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각계에서 쏟아지는 애도의 물결에 얼마간 위안을 얻을 것이다. 미국 역사상 레이건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도 많지 않다. 그의 장례식은 이번주 의사당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뒤이어 워싱턴 대성당에서 추도 예배가 거행될 예정이다. 그후 그의 시신은 사우스 캘리포니아 시미 밸리에 있는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의 뜰에 안치될 것이다. 낸시 여사에게 그것은 남편의 ‘긴 작별인사’가 끝남을 의미할 것이다. 그 밖의 미국인들에게 제 40대 대통령의 별세는 미국의 역사라는 대하 드라마에서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불가사의한 지도자의 탄생과 집권에 관한 이야기의 대단원의 막이 내림을 뜻할 것이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하며 수년간 꽤 선전했다. 그 오랜 싸움의 끝을 앞둔 1990년대 말부터는 어린 시절만 기억할 수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면서 그는 스포츠 캐스터에서 배우, 주지사에서 대통령으로 살아온 기억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린 듯했다. 그의 가장 생생한 기억은 일리노이주에서 보낸 유년기였다. 그는 LA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방문객들과 이야기할 때나 벨에어의 자택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 어린 시절 고향집 베란다에서 어머니에게 신문 읽기를 배운 기억, 형 닐과 놀던 기억, 집을 떠나 교정이 아름다운 유레카 칼리지에 간 기억 등에 대해 말했다. 또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던 록리버에 관한 추억도 기억했다. LA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는 이 강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방문객들이 이 사진에 대해 물을 때마다 레이건은 “거기서 인명 구조대원으로 일하면서 77명을 살려냈다”고 말하곤 했다. 한 측근은 “그는 구조대원 시절의 일을 늘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때의 경험이 그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다른 기억이 사라진 때에도 그 이미지만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구조대원은 자라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미국 역사의 행로를 바꿨다. 1981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은 지미 카터가 ‘자신감의 위기’라고 칭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2차대전의 승리와 1950년대의 호황 이후 정점으로 치닫던 전후 미국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존 F. 케네디의 암살을 계기로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같은 불행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카터 집권기에는 인플레가 기승을 부렸고 재정적자가 쌓였다. 또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고 이슬람 민병대가 이란 주재 미국 외교관 52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일부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의 임무는 누가 하든 혼자 수행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레이건이 칠순에 가까운 고령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알콜 중독증이 있는 중서부 출신의 구두판매원인 아버지와 신앙심 두터운 연극애호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정서적 유대가 없었다. 비평가의 호평을 받은 출연작이 거의 없는 2류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그는 개인으로서는 낙천적이고 겸손하며 붙임성 있는 캘리포니아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국내의 관료주의와 해외의 공산정권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며 보수강경 정책을 폈다. 백악관에 입성한 레이건은 여러 면에서 상충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첫부인과 이혼했고, 종종 자녀들과 불화를 겪었다. 균형 예산을 열렬히 옹호하면서도 실제로는 단 한번도 의회에 균형 예산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골수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냉전 종식에 앞장섰다. 또 그 자신이 엄격한 도덕성을 상징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정부는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그리고 그는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으면서도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신봉했다. 그는 자주 문제를 잘못 이해하곤 했다. 복지 지원금 수혜자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가 1980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한 곳은 3인의 인권운동가들이 흑인 차별정책 철폐를 주장하다 살해당한 미시시피의 필라델피아였다. 심각한 불황기였던 1982∼1983년 미국을 통치했고 새롭게 출현한 에이즈 위기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특히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된 그의 행동은 탄핵당할 수 있는 위법행위에 위태로울 정도로 가까웠다(어쩌면 실제로 위법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레이건은 빌 클린턴이나 조지 W. 부시만큼 국민들의 찬반이 팽팽히 양분된 지도자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퇴임할 때 63%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현재 미국이 당면한 갈등의 정치와 이념적 대립의 뿌리는 레이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레이건 자신은 정치대결의 장에서 멀찌감치 물러선 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이 그의 발언과 정책의 거친 점을 유화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재치있고 호소력이 있었으며 대담했다. 1981년 3월 30일 흉부에 저격당한 후 수술실에 실려 왔을 때 그는 의사들에게 “당신들 중에 혹시 민주당원이 있는 것 아니겠지?”라며 농담했다. 수술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아내 낸시에게 “깜박 피하는 것을 잊어버려 사고를 당했소”라고 속삭였다. 1987년에는 분단된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서 “고르바초프는 들으시오. 이 문을 여시오. 이 벽을 무너뜨리시오”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결국 몇년 후 그 장벽은 실제로 무너졌다. 레이건은 프랭클린 델라노어 루스벨트 대통령 이래 가장 백악관을 내집처럼 여긴 대통령이었다. 대중 앞에서 발산되는 그의 품위와 TV라는 매체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기술은 이후 대통령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1989년 그의 대통령 퇴임시 소련은 그의 말처럼 실제로 ‘역사의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미국 경제도 그런 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레이건을 좋아했다. 정적들조차 그의 매력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힘은 배우로서의 능력 그 이상에서 왔다. 그는 “어서 덤벼, 한 번 해보자고” 같은 거친 수사를 종종 사용했지만 사실은 그의 지지자나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하는 말은 단호했지만 행동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성향은 그가 할리우드에서 미국 영화배우조합장을 지내던 시절에 얻어진 것이었다. 당시 그는 여느 유능한 노조 협상가들처럼 궁극적으로는 처음 제안했던 것보다 더 적은 것을 얻어내게 된다는 점을 감안해 처음에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야 함을 배웠다. 그가 1983년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86년에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스타워즈’ 우주방어계획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핵무기를 전부 폐기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1987년 그는 냉전시대 최초로 진정한 무기감축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레이건이 구축해 놓은 정치세계에서 살고 있다. 밖으로는 미국의 힘을 과시하고 안으로는 감세정책에 골몰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레이건의 신화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레이건의 행적(특히 1984년 대선에서 월터 먼데일 후보에게 50개 주 중 49개 주에서 압승한 것)은 클린턴의 신민주당 온건노선을 태동시켰다. 레이건의 선례가 없었다면 클린턴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 첫 재선에 성공한 1996년, 의회에서 “거대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레이건 자신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타고 달려와 사기가 떨어진 미국을 구해낸 그의 이야기는 수줍음 많은 소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을 추구한 그의 이면에는 평화에 대한 감상적인 갈망이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실제의 레이건은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세계를 선과 악의 거대한 투쟁으로 보면서도 모든 것이 결국은 좋게 마무리될 것이며,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1920년대 소년 시절 인명 구조대원이었던 레이건은 전체주의와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는 소련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역사에서 옳지 못한 방향에 서있다는 것을 개인적인 설득으로 깨닫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헬리콥터에 태워 미국 전역을 구경시키며 집 뒷마당에 있는 수영장과 보트, 그리고 한집에 두대씩 있는 자가용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에게 두나라 체제의 차이점을 인식시킬 수 있다면 소련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런 공상의 단면 속에는 세계를 구하겠다는 그의 꿈과 자신이 수행하려던 주인공 역할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연기하고 꿈꾸는 법을 배웠다. 1922년 겨울 열한살이었던 레이건은 아버지 잭이 문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1965년 회고록에서 당시 “아버지는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못본 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추운 날 밤 레이건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어머니나 형이 사태를 수습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그냥 아버지를 넘어가 침대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지만 손수 아버지를 구했다. “아버지에게로 몸을 구부렸더니 독한 위스키 냄새가 났다. 나는 아버지 코트 자락을 움켜쥐고 문을 연 다음 아버지를 방안으로 질질 끌고 가 겨우 침대에 눕혔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리고 적어도 레이건 마음 속에서는 모든 일이 다 해결됐다. “며칠이 지나자 아버지는 다시 내가 알고 있었고, 사랑했고 앞으로도 항상 그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 허풍많고 유쾌한 아버지로 돌아왔다.” 어른스럽게 위기를 잘 처리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쓰러진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레이건은 전설적인 모험담 속에서 위안을 구했다. 그것은 위인들의 어린 시절에서 흔한 일이다. 부모에게 외면받았던 윈스턴 처칠은 자라면서 상상 속의 삶을 구축해 나갔으며 수천개의 장난감 군인 모형을 모았고 영국의 위대한 군인들 이야기를 읽었다. 레이건은 어린 시절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우주 모험기를 섭렵했다. 또 그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 나갔다. 어린 시절 레이건은 자식이 없던 이웃집 ‘에마 아주머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레이건에게 용돈 10센트와 과자뿐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위안을 주었다. 그는 “아주머니 집에서는 꿈을 꿀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기이한 모양의 가구와 책, 그리고 이상한 향내로 가득찬 에마 아주머니 집 거실의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커다란 흔들의자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모험담과 교회처럼 에마 아주머니도 그에게 폭풍 속의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가 몽상에 잘 빠져든 데는 신체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등학교때까지 그는 자신이 심한 근시라는 사실을 몰랐다. 레이건은 “교실의 맨 앞줄에 앉아도 칠판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수업을 다 알아듣는 척 했고 그에 비하면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경쟁심이 강했던 그는 야구보다는 미식축구를 택했고 힘을 쓰는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미식축구를 할 때는 “공이나 상대방의 얼굴이 잘 안보여 고생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상대 선수를 잡고 쓰러뜨리기만 하면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차 안에서 형 닐은 볼 수 있는 도로 표지판을 자신은 볼 수 없는데 화가 나서 어머니의 안경을 한 번 써봤다. 그는 이렇게 돌이켰다. “안경을 쓰자 갑자기 선명하고 찬란한 세계가 또렷이 보였다. 나는 나무들이 그처럼 하나하나 뚜렷한 나뭇잎들을 가지고 있는데 놀랐다. 집들은 분명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언덕은 하늘과 대비되며 뚜렷한 실루엣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또렷한 것이라고는 생각과 느낌뿐인 자신만의 세계에 너무 오래 침잠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선생님·친구들 등 자신 이외에는 모두 실체를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몇십년 뒤 낸시 여사는 “레이건은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아무도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하지 않는다. 그의 주위에는 벽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나 자신조차 그 벽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삶의 불공평함을 푸념하기보다는 현실을 실제보다 훨씬 덜 심각하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어머니 넬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넬은 알콜중독자인 남편 잭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알콜중독을 비롯해 여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명랑한 표정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레이건은 “아버지가 아내나 자녀들을 학대하는 알콜중독자는 아니었지만 술을 마시면 상당히 무뚝뚝해졌고 어머니가 그의 음주를 나무랄 때면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넬은 아들들 앞에서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늘 사람의 좋은 점을 찾으려 했다”고 레이건은 회고했다. 다시 말해 넬은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을 연기로 견뎌냈다. 그것을 자기 부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극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레이건은 어머니의 그런 성격을 물려받았다. 레이건은 순전히 자력으로 입신했지만 그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있었다. “우리 가족이 완전히 빈곤층은 아니었지만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레이건은 출세를 위해 자기가 속한 세계를 먼저 정복했다.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고, 여름철이면 인명구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유레카 칼리지의 우수한 남학생 클럽에 가입했고, 대공황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포츠캐스터로 취직했으며,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있었던 시카고 컵스 야구팀의 춘계훈련을 취재하면서 우연히 워너 브러더스의 오디션에 참여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한치의 착오도 없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의 생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연기 재능은 어머니가 물려준 선물이었다. 어머니는 일리노이주에서 독후감 발표 대회 및 연극 공연을 주최했다. 어머니는 어느날 밤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웅변을 시켰다. 수줍음이 많던 레이건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쟁심이 그를 부추겼다. “형은 이미 여러차례 웅변을 해서 인기가 좋았다”고 레이건은 돌이켰다. 그래서 자신도 해보기로 했다. “그날 밤 용기를 내 무대로 올라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내 생애의 첫 연기를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청중은 내 말에 웃고 박수를 쳤다.” 그의 앞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무대 위에서는 아버지의 알콜중독은 문제되지 않았다. 또 그의 나쁜 시력과 가족의 방랑벽 때문에 갖게 된 수줍음도 관중의 따뜻한 환호 속에서 저절로 녹아버렸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난 그런 경험이 무척 좋았다. 어린 시절의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나에게 관중의 환호는 달콤한 음악 그 자체였다”고 레이건은 말했다. 그는 그 이래 할리우드에서,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바로 그런 환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할리우드에서 그는 B급 영화(활달한 첩보원 브래스 밴크로프트역을 맡아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에서 배우 훈련을 마친 다음 인기있는 중간급 스타가 됐다. 레이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배우라는 직업의 많은 부분이 겉치레와 비현실적인 역할의 해석에 매달려 있다. 따라서 배우는 깨어 있는 시간중 적어도 절반은 공상이나 리허설 또는 촬영에 할애해야 한다.” 레이건은 뛰어난 배우는 아니었지만 배우로서 자부심은 있었다. 몇년 뒤 그는 자신의 전기작가 루 캐넌에게 자신이 한 연기에 대한 비판(그의 1951년 코미디 영화 ‘베드타임 포 본조’를 조롱한 것을 말한다)이 “노출된 신경을 건드리는 것처럼 아렸다”고 털어놓았다.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 레이건은 영화활동 덕분에 할리우드에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1940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레이건은 이미 한차례 실연의 슬픔을 맛보았다. 그의 고교시절 연인 마거릿 클리버는 국무부 직원과 눈이 맞아 레이건을 저버렸다. 그녀는 레이건이 준 남학생클럽 배지와 약혼반지를 우편으로 되돌려주었다. “내 어머니처럼 그녀는 적갈색 머리카락에 키가 자그마하고 예뻤으며 지성적이었다”고 레이건은 돌이켰다. 그는 완전히 낙담했지만 늘 그렇듯 그 아픔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다. “내면의 무엇인가가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래도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마거릿이 나를 버린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그녀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더이상 사랑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와이먼이 그 빈자리를 채워줬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평범한 로맨스의 정석을 따르지 않았다. 그 결혼은 부분적으론 할리우드식 언론 플레이의 결과였다. 두 사람은 영화 ‘브러더 래트’를 찍으면서 만났고, 가십 칼럼니스트인 루엘라 파슨스가 둘 간의 관계를 부추겼다. 그들은 41년 딸 모린을 낳았고, 레이건이 컬버시티에서 문선대 복무를 마친 뒤에는 아들 마이클을 입양했다. 훗날 그들은 딸 크리스틴을 잃기도 했다. 레이건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폐렴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입원한 레이건은 자신이 죽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나는 간호사에게 지쳐서 더 이상 숨을 못 쉬겠다고 말했는데 그때가 밤 몇시였는지 모르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흔히 알려진 두 사람의 이혼 사유는 이렇다. 와이먼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레이건은 영화배우 생활이 잘 안 풀리면서 정치와 영화배우조합장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레이건이나, 와이먼도 자신들의 파경에 대해 수십년간 공식적으로 일체 함구하면서 품위를 지켰다. 레이건은 두 사람간에 어떤 어려움도 느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리처드 닉슨 당시 하원의원이 이끌던 하원 반미 활동위원회에서 증언한 뒤 캘리포니아로 돌아왔을 때 와이먼이 이혼을 추진 중임을 알았다. 고교 시절 애인 마거릿 클리버와 헤어질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상처는 입었지만 늘 그랬듯 자신을 추스른 뒤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또 그로 하여금 인생의 역경 속에도 웃고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침착함과 안정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레이건이 에마 아주머니 집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집 베란다에서 모친에게 신문 읽기를 배우면서, 또 록 리버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자신이 즐겨 읽던 영웅담 속의 주인공 중 한명이 돼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에겐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찾아 왔다. 레이건은 믿을 수 없는 부친을 두었지만 고교 및 대학 시절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또 대공황이 한창일 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구했다. 또 두차례 실연도 경험했지만 52년엔 낸시 데이비스와 결혼했다. 낸시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레이건은 영화배우 생활은 잘 안 풀렸어도 TV 출연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위의 소개로 낸시를 만난 레이건은 그녀의 웃음을 좋아했다. 레이건에게 낸시는 질서·사랑·안정, 그리고 전진을 의미했다.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는 한때 “만일 레이건이 첫 결혼을 낸시와 했더라면 그는 아카데미상을 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했을 당시 레이건은 이미 배우 생활을 접은 상태였다(딸 패티는 결혼 7개월 후에, 아들 론은 58년에 태어났다). 그 후 8년 간 레이건은 매주 일요일 밤 방송되는 TV 프로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의 진행자로 미국인들의 안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기술 발전 탓에 쫓겨나고 말았다. 62년 컬러 서부극 ‘보난자’가 등장하면서 그가 출연하던 흑백 프로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모친이 주최한 연극 공연무대에 선 이래 최초로 일자리를 찾는 신세가 됐다. 레이건은 정치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는 30년대 당시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우상’으로 삼았으며 민주당 대선후보 해리 트루먼의 선거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주의, 높은 세금, 그리고 그가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의 진행자로 일하면서 갖게 된 정부의 규제에 대한 우려는 그를 우파로 기울게 했다. 공화당은 64년 10월 배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지지부진하자 레이건에게 30분짜리 대국민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40년이 지난 요즘에 봐도 그는 매우 젊고 똑 부러지며 자신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넘치는 듯하다. 그 후 25년 간의 공직 생활을 거치면서도 그런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린든 존슨이 골드워터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캘리포니아의 재계 인사들은 66년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운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상대는 막강한 민주당 현직 주지사 에드먼드 (팻)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은 레이건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최초로 저지른 정치인이었다. 레이건은 영화 ‘누트 로크니, 올 아메리칸’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인 미식축구 코치 조지 ‘기퍼’ 깁의 이미지를 활용하고픈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기퍼’ 레이건은 미국 정계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교외 거주 보수주의자들의 상징인 동시에 그 세력의 결집자였다. 66년 주지사로 선출된 그는 보수주의의 새로운 얼굴이 됐다. 67년 뉴스위크는 ‘레이건, 서부에서 뜨는 별인가’란 표지 제목을 달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예스’였다. 이듬해 그는 주지사 임기를 2년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도 마이애미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닉슨을 이길 뻔한 저력을 보였다. 그 후 몇년 간 그는 자신의 전략을 가다듬으며 대권 도전을 준비했다. 많은 정치 제휴 세력들이 그렇듯 레이건의 정치 제휴도 절충주의적이었다. 그는 감세에 관심 있는 부유층 공화당원과 복음파 개신교도, 그리고 60년대의 혼란상에 불만을 품은 전통적 민주당원들을 규합했다. 레이건은 특히 남부에서 흑인들의 평등운동이 지나치다고 느낀 보수파 백인을 공략한 닉슨의 ‘남부전략’을 물려받았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의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주지사 역은 맡은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재치있게 응수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똑 부러지게 일처리를 했고, 의사소통에도 능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특유의 엄격한 일처리 방식을 고수해 일명 ‘아야툴라’(이슬람 종교 지도자)로 통하는 민주당의 진보파 의원 윌리 브라운은 레이건에 대해 자신이 함께 일해본 주지사 중 유일하게 제때 일처리를 한 사람으로 회상했다. 76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레이건의 도전을 받은 제럴드 포드는 레이건에 대해, 회의가 끝난 뒤 언론 보도자료에 들어갈 적절한 문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인물로 기억했다. 76년이 되자 그는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일에 지쳤고, 포드 대통령이 소련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팽팽한 접전을 펼친 예비선거에선 포드가 승리했지만 포드는 보수주의자들, 특히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지미 카터에게 매료된 보수파 기독교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레이건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포드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레이건의 정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듯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그는 4년 뒤인 80년이면 69세가 되는 상황이었다. 미 역대 최고령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그 나이에 은퇴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80년 레이건이 카터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사전에 예견된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이건은 아이오와주 당원대회에서 조지 부시 1세에게 패했지만 나중에 만회했다. 본 선거 1주일 전인 10월 28일까지도 레이건과 카터는 각종 설문조사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그러던 중 클리블랜드에서 후보 토론회가 개최됐다. 단 한차례 열린 이 토론에서 레이건은 상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했다. 첫번째 공격은 카터가 레이건이 노인·장애인의료보험(메디케어)의 축소를 바란다고 비난하자 레이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분노하기보다 유감스럽다는 어조로 “또 똑같은 얘기를 하시네요”라고 말한 것이다(레이건은 실제로 메디케어의 축소를 원했지만 유권자들이 기억한 것은 그같은 사실이 아니라 레이건의 극적인 몸짓이었다). 토론이 끝날 무렵 레이건은 간단한 두개의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4년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습니까. 미국이 예전만큼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인플레이션과 금리 문제, 이란 인질극 사태에 시달리던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 마지막 주 레이건은 우위를 확보했고 결국 압승을 거뒀다. 레이건은 말 그대로 ‘백악관 체질’이었다. 낸시는 “남편은 대통령직에 크게 만족했다. 공식 행사와 회의에 참석하거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의사결정·책임감·협상 등 대통령직에 수반되는 그 모든 것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들을 믿었다. 예컨대 그는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를 혼동해 나무가 공해를 유발한다고 믿었다. 레이건의 전기를 집필한 루 캐넌에 따르면 콜린 파월 당시 국가 안보보좌관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면 전세계 국가가 사이 좋게 지내게 된다는 ‘초록색 외계인’론을 레이건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때면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재미있는 발상으로 받아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핵무기 통제권을 가진 대통령이었기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국내 정책은 다수가 실패로 돌아갔다. 레이건은 감세 결정을 내리고도 지출을 줄이지 못해 적자예산을 운용했고, 퇴임시엔 1천5백25억달러의 재정적자를 남겼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그의 재임기간 중 무려 세배 증가했다. 그같은 결과는 90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수뇌부가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가진 회담에서 발표됐다. 그러나 레이건은 이미 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덕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88년에 내건 선거공약을 깨고 다시 세금을 올리는 결정을 내려야 했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지지도 함께 잃었다. 국가적으로는 득이 된 이 결정(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를 계기로 클린턴 재임기간 중 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이 부시에겐 악재로 작용했지만 정작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인종과 관용이란 문제에선 상당수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갈등을 느꼈던 것 같다. 레이건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인종적 특혜, 빈곤층을 위한 지출, 공권력 남용, 홈리스 문제 등에 대한 자신의 불분명한 태도가 무관심이나 심하게는 노골적인 적대심으로까지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에게 비친 레이건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즐겨 말하던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좀 더 신경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고무적인 말만으론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마리오 쿠오모는 ‘빛나는 도시’라는 레이건의 대표적 이미지를 이용해 그에게 역공을 가했다. 쿠오모는 8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 현관과 공식 별장의 베란다에선 모두가 잘 사는 ‘빛나는 도시’밖에 안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빛나는 도시 옆에 또 다른 도시가 있다. 그곳에선 주택융자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 주택융자를 받을 형편조차 안되는 젊은이들이 산다. 또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 자녀들을 위해 키웠던 꿈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부모들이 산다.” 그것은 많은 진실이 담겨 있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레이건이 말하는 미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릴 뿐이었다. 레이건은 냉전시대 전사의 상징으로 권력을 잡았다. 소련에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편 닉슨·키신저·포드 시대에 대해 회의를 느껴 우주 미사일 방어망 구축 등 군사력 강화에 열정적이었던 레이건은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분명히 전하려 했다. 매파 인사들은 이를 반겼지만 비둘기파는 크게 반발했다. 매파와 비둘기파 양 진영은 만일 좀 더 냉철한 시각을 가졌더라면 레이건의 접근방식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음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명명한 83년 바로 그해, 조지 슐츠 당시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아나톨리 도브리닌 미국 주재 소련 대사를 불러오게 해 비밀회담을 가짐으로써 제2의 데탕트를 가능케 한 조용한 대화 채널을 마련했다. 당시 소련이 굴복하게 된 원인을 두고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레이건의 추종 세력들은 레이건의 단호한 언변과 군사력 증강을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소련은 본질적으로 나약했으므로 80년 카터가 재선에 성공했다 해도 언젠가는 내부적으로 붕괴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진실은 그 중간 어디엔가에 있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공산주의와 민주자본주의간의 “오랜 여명의 투쟁”이라고 부른 것에는 많은 것들이 변수로 작용했다. 그러나 일명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어구상(SDI)의 추진 등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인 외교전을 펼치는 레이건의 양동작전이 소련 전체주의의 멸망을 가속화했을 가능성은 크다. 레이건에겐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개인적 친분도 중요했다(이를 바탕으로 그는 80년대 중반 무장해제를 위한 양국 회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소련의 개혁에 힘썼던 고르바초프도 처음엔 배우 출신의 레이건을 미심쩍어 했지만 나중엔 그를 인정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이같은 냉전적 사고로 인해 재임 기간 중 최대 사건인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터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불법으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 얻은 수입으로 니카라과 반군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레이건은 아마도 세부사항은 잘 몰랐을 것이다. 세부 사항은 본래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는 “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레이건 대통령이 세부사항을 싫어한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백악관이 위법행위를 저지름으로써 통치권에 대한 헌법상의 위기를 불러 왔다.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관련해 그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동기는 순수했을지라도 그가 선택한 수단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상황은 절박해졌다. 레이건이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제의하기 위해 하워드 베이커 전 상원의원(테네시주) 집으로 전화하자 베이커의 아내가 전화를 받아 “남편은 손자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간 터라 집에 없는데요, 각하”라고 말하자 레이건은 “내가 그를 위해 더 흥미로운 동물원을 생각해뒀다”고 재치있게 대답했다. 베이커는 도널드 리건의 후임이었다. 사실 낸시 여사에게 해고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리건은 복수의 칼을 빼들었다. 리건은 레이건의 재임 기간 중 출간된 저서를 통해 영부인이 샌프란시스코의 점성가 조앤 퀴글리와의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 대통령의 공식 일정을 짰다고 폭로했다. 낸시 여사는 81년 남편에 대한 저격 사건 이후 점성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변명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살다가 나이가 지긋해서 대통령이 됐고, 스캔들에 연루돼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문제까지 거론되는 마당에 이 사건은 레이건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레이건은 주위의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고르바초프와의 군축 협상 타결과 굳건한 경제에 힘입어 그의 지지도는 88년이 다가오면서 다시 회복됐다. 조지 부시 1세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던 레이건은(80년 대선 당시 포드를 러닝메이트로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88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자신의 충성스런 부통령이었던 부시의 선거운동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4년 뒤인 92년 부시가 세금 인상과 지나치게 중도로 돌아선 듯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보수파로부터 공격을 받자 골수 보수진영 간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레이건이 부시를 러닝메이트로 택한 뒤 “내가 80년 대선 때 크게 실수한 것 같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게 연설문 작성자인 존 포드호레츠의 회고록 내용이다. 1백% 믿을 수는 없지만 레이건은 고향 목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기를 바란다고 수년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은퇴의 즐거움도 비극적으로 짧았다. 9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지겨운 듯 대중들과의 말을 삼가며 이례적으로 지쳐보였다. 그같은 모습은 그가 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당시 보였던 활기찬 태도와는 천양지차였다. 당시 그는 지지자들의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모르자 재치있게 “이러다간 프라임타임대가 다 지나가고 말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2년 후 처음으로 보인, 노인이 된 듯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건망증도 더 심해졌다. 91년 브리태니아호 선상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만찬을 가진 후 그는 카페인 없는 커피를 구하는 데만 정신을 팔아 한동안 만찬장 분위가 어색해졌다(이 장면은 B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촬영했다). 여왕이 “우리도 노력은 한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낸시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다. 94년 워싱턴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절정에 달했다. 연설 도중 더듬거린 것이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원인은 알츠하이머병이었다. 94년 11월 5일 레이건은 검은 펜을 들고 국민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권력의 정점에 선 ‘기퍼’가 보여주는 우아하고 대가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 때가 언제가 되든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나는 정녕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의 미래를 영원히 낙관하며 떠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나를 내 인생의 황혼으로 인도할 여행을 떠납니다. 나는 항상 밝은 여명이 미국의 앞날에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내 친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늘 주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그는 벨에어의 세인트 클라우드 드라이브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사무실에도 들르고 샌타 모니카 부둣가도 산책하며 골프도 했다. 나중엔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레이건의 힘과, 생존에 대한 원초적 의지는 놀라웠다. 고관절 골절에서 회복됐고, 버티고 또 버팀으로써 그는 해마다 살아 남았다. 정신이 병에 굴복한지 한참 뒤에도 그의 몸은 생명을 위해 싸웠다. 그는 일생 동안 꿈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의 상상력은 크든 적든 수십년간 그를 지탱해준 삶의 원동력이었다. 50년대 7월의 어느날 뉴욕 맨해튼 59번가와 5번가 사이 모퉁이의 셰리-네덜란드 호텔에서 쓴 놀라운 편지에서 레이건은 인생의 고단함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승화시키는 재능을 보여줬다. 그는 배우로 일하기 위해 혼자 뉴욕에 왔고 식사도 혼자 해결해야 했다. 나중에 호텔로 돌아온 그는 낸시에게 자신이 함께 했었으면 하는 저녁에 대해 편지를 썼다. “비둘기 배설물로 가득한 이 메트로폴리스에는 8백만명이 살지만 갑자기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고 보니 그들에게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는구려. 시간은 해결책이 아니었소. 이윽고 저녁 시간이 되자 나는 ‘21’로 걸어가 혼자 쓸쓸이 끼니를 때웠소. 자기 연민이 엄습하는 순간 갑자기 당신이 내 테이블로 다가왔소. 그렇지, 당신과 나는 로스트 비프를 들었지… 와인 반병만 주문하고 싶었던 우리에게 선택의 폭은 제한돼 있었지. 그러나 우린 와인 웨이터가 권하는 술을 거절했지… 그리곤 47년산 ‘피숑 롱그빌’을 택했지. 맛은 참 좋았지?” 식사 후 레이건의 상상력은 계속 이어졌다. “우린 황혼 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갔고, 거기서부턴 글로 적으면 안 될 내용인 것 같아. 단지 내가 오늘 아침 나의 대사를 못 외운 상황이라고만 말해두지. 오늘 밤 우린 그냥 호텔에서 식사를 할까 해. 그리고 당신은 내가 잠시라도 공부하도록 놔둬야 해. 사람들은 나와 당신이 3천마일 거리를 이렇게 쉽게 건너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참 자연스럽지 않아? 남자는 심장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당신은 나의 심장이야. 가장 좋은 것이 당신이고 그래서 내게 필요하지. 당신이 없으면 삶도 없어. 그런 삶은 원치도 않아.” 낸시는 50년 이상 그래왔듯 이번주도 그의 옆을 지킬 것이다. 워싱턴에서 의식이 끝나면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의 석양이 비치는 가운데 베를린 장벽 기념물 근처의 언덕에 편안히 묻힐 것이다. 그럼으로써 1911년 겨울 일리노이주의 한 조그만 집에서 시작된 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것이다. 그의 무덤은 미국에서 매일 저녁 태양이 지는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선 이미 어둠이 깔릴지라도 대륙 서쪽 끝에서는 여전히 빛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얼마나 레이건다운가. 태양의 마지막 한줄기 빛까지 머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낮을 음미할 수 있다니 말이다. With ANDREW MURR, ELEANOR CLIFT, TAMARA LIPPER, KAREN BRESLAU and JENNIFER ORDO껬

2004.06.10 13:56

24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