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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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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의 CEO를 위한 창조적 삶 (2) 손지애 전 아리랑TV 사장

CEO

운명은 바람처럼 다가온다. 국내의 작은 영어잡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여성 최초의 아리랑 TV 대표에 이르기까지. 동양인 최초의 CNN 서울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손지애(52)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를 만나 숨은 노력과 도전의 스토리들을 들어봤다. 뉴욕타임스 서울기자→CNN서울지국장→서울G20 준비위원회 대변인→청와대 해외홍보비서관→아리랑TV(국제방송교류재단) 대표. 그러고 보면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30년이다. 아리랑TV 대표를 그만둔 2014년 중반부터 1년간은 미국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방문학자로 ‘30년 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거기서도 멈춤은 없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손지애. CNN. 서울』이란 책을 들고 돌아왔다. 책 속에는 끝없는 도전으로 존경받는 멘토의 자리에 선 그녀의 노력과 도전의 과정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 김일성 사망 보도 인연이 CNN 서울지국장으로 1985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직후 손 씨가 택한 첫 직업은 국내의 작은 영어잡지사 기자였다. 뭔가 일이 잘 풀리는 인생을 보면 시대의 흐름이 운명의 순풍처럼 작용하는 듯하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영어로 기사를 쓰는 일은 대단히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외국의 관심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88 서울올림픽이 계기였다. 세계가 한국에 주목했다. 국제 언론사들이 한국에서의 활동을 넓히며 한국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손씨 역시 적극적으로 국제 언론사에 노크를 했고, 그러던 어느날 희망 1순위였던 뉴욕타임스에서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영어에 승부를 건 도박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국가적 비상상황이 개인의 운명엔 역설적으로 순풍 역할도 한다. 무더웠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 전 세계의 관심이 한반도에 집중된 순간, 미국의 보도채널 CNN에는 이 소식을 서울에서 타전할 기자가 없었다. 뉴욕타임스 서울주재기자인 그에게 CNN 본사에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서울 상황을 생방송으로 전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 수락했다. 김일성 사망과 서울 상황에 대해선 이미 머릿속에 정리돼 있었고, 단파방송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에서 프리랜서로 일한 경험도 있었다. 첫 생방송이 나가고 몇 시간 후 CNN 애틀랜타 본부에서 다시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당시만 해도 방송기자는 신문기자에 비해 권위가 떨어지는 직업이었다. 전통 깊은 뉴욕타임스에서 볼 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방송의 미래를 예감하고 그는 새로운 길찾기에 나섰다. 초등학교 시절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가서 5년간 살며 배운 영어는 그에게 ‘황금열쇠’였다. 영어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진로탐색의 기준도 영어실력 활용이었다. 영어잘하는 비결에 대해 그는 “외국어는 평생을 활용해야 하는 소통수단이므로 자기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과 접목할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다. TV 드라마, 스포츠, 인터넷게임, 여행, 음악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를 만나 나눈 대화는 CNN으로 옮길 무렵부터 시작해 국제 언론의 보도 경향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됐다.책 제목인『손지애. CNN. 서울』은 CNN 뉴스 보도할 때의 마지막 멘트인데, 손지애라는 사람을 세계적으로 알린 계기였군요. 94년 김일성 사망이라는 국가적 비상상황이 손지애 개인에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네요.영어에 승부를 건 도박의 수확이 가장 컸던 날이죠. 그전에 했던 일은 모두 그날을 위한 준비라고도 할 수 있어요.국제 언론의 한국 관련 보도는 북한발 위기가 많은데, 한국의 뉴스밸류 기준은 뭔가요?한국 뉴스의 밸류는 북한을 빼면 굉장히 낮아져요. 북한이 잠잠해지면 특파원 수가 줄어들정도죠. 전 세계에 북한 같은 나라가 없어요. 잊어버릴 때쯤 되면 뭐가 또 일어나고. 북한이 참 외국인 기준으로 보면 특이한 나라이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나라죠. 또 우리나라처럼 군사적인 대치상황에서 경제가 발전한 나라가 없죠. 그래서 북한 발 한국 위기의 뉴스가치가 커지는 겁니다.통일 전 독일도 그런 상황이었는데.동독은 핵무기 개발하고 그러지 않았잖아요. 한국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도 하고, 이산가족 휴먼스토리도 있고,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기도 하고, 또 남북한이 화해한다고 하고. 외국에서 볼 때는 북한이 참 특이하고 관심이 가는 나라예요.기자에게도 조국은 있죠. 국제 언론에서 일하는 한국출신 기자들은 어느 나라 입장을 반영하나요?CNN의 경우 미국 언론이니까 미국 시청자를 생각해야 해요. 사실이나 객관성에서는 미국 사람보다 더 경계해야 해요. 그러면서 한국인이니까 한국 뉴스를 더 상세하게 알려주길 원해요. 그러다가 상세하게 하기위해 한국 쪽에 좀 치우쳤다 하면 그건 또 안 된다고 해요. ━ 북한발 한국 위기 때마다 바빠지는 외신 미국의 관심을 반영한 기사의 예를 들면.예컨대 핵무장은 안 된다는 거죠. 또 김정일 시대를 예를 들면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났다하는 이상한 리더십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에 부응하는 것도 있고요.한·일관계 보도는 어때요.한·일 관계는 조금 달라요. 미국은 한국과 일본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일본에 별도의 지국이 있잖아요. 예컨대 독도문제를 다룰 때 제 기사에서는 독도라고 하지만, 일본특파원은 다케시마라고 하는 식이죠.그럴 경우 본사에서 취사 선택을 할 때는 어떻게 하죠.한·일간 긴장관계를 본사에서도 알기 때문에 신경을 써요. 일본해(Sea of Japan)냐 동해(East Sea)냐 표기 문제와 관련해서도 본사에서 고생을 해봐서 균형을 잘 잡으려고 하는 편이에요.(웃음)북한 뉴스가 한국의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텐데, 청와대비서관이나 아리랑TV 대표를 맡으며 그런 점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외국 언론에서 한국은 어쩌다 다뤄집니다. 평상시 인맥을 잘 유지해서 무슨 일이 터졌을 때 바로 신뢰 관계 속에 한국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야 그들 언론에 정확히 반영돼요. 서울주재 특파원이 대개 한 명인데, 북한이 주 업무이긴 하지만 예컨대 안숙선 명창 취재, 황우석 줄기세포 취재, 삼성 신제품 출시 취재 등도 혼자서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특파원들이 물어보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죠.기자, 청와대비서관, 방송사 사장 등을 지냈는데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종은?엄마요.엄마 일을 잘할 수 없었을 텐데요.그래도 남는 게 엄마인 것 같아요. 청와대비서관은 정권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CNN도 제 뒤에 다른 사람이 특파원 하면 그만이고, G20도 지금은 사람들이 기억도 못하고, 아리랑TV도 제 뒤로는 조금 그렇고.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끝까지 남거든요. 제가 가진 생각이나 그런 것이 고스란히 담긴….세 딸의 엄마시죠. 딸들도 영어 잘하나요.큰 딸은 잘해요. 대학원 석사논문을 쓰고 있어요. 외국여행은 가봤지만 어려서 미국에 오래 가본 적은 없어요.어려서 영어교육을 어떻게 시켰나요.거의 안 시켰어요. 원더랜드 다니다가 거기서 스펠링 가르쳐줄 때 싫다고 해서 그만뒀고, 중학교 때 영어 학원 다닌 정도예요.남편도 외신기자 출신의 대학교수인데, 영어 잘하는 부모의 유전자가 전해진 걸까요. 영어비디오 같은 것은 활용 안했나요.어렸을 때 많이 틀어줬죠. 인어공주도 수십 번 보고, 책도 많이 보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집에서 영어 거의 안 씁니다.방법 몇 가지만 나열해 주세요.우선 영어를 어렵다고 생각하게 한 적이 없어요. 미국 드라마, 미국 팝송, 랩 있잖아요. 제가 시킨 것은 아닌데, 큰애를 보면 노래가사를 프린트해서 외우더라고요. 미국 드라마 볼 때 TV 밑에 포스트잇을 붙여요. 자막을 안 보려고. 자막 보려면 떼어서 보고 다시 붙이고 그랬어요. ━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 됐으면 딸들이 어떤 인생을 살면 좋겠어요.선한 인생.밖에 일 안하고 집안에서 좀 편히 살기를 바라지 않나요.세 딸이 다 다른데, 무엇을 하며 살든 간에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세상을 좀 더 낫게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여성으로서 성공적인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을텐데.정신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산 적이 많았어요. 세 아이를 다 모유로 키웠는데, 제가 아내로서 할 일은 다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2000년 무렵 어느날, 청와대 본관의 여자화장실 한쪽 칸에 앉아 모유를 짜기도 했어요. 모유를 짜서 냉장 주머니에 넣어놓지 않으면 다음날 아이가 굶거든요. 2002년 대통령 선거 전날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빈소를 지키다 나와서 방송 리포트하고 다시 빈소에 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내 일을 소홀히 했으면 ‘너는 바깥일만 하냐’고 했을 텐데, 그런 소리 안 나오게 하고 싶었습니다.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며 외신의 관심이 컸었는데,그 때 외신은 노무현대통령 당선을 레프트(좌파) 등장으로 바라보았죠. 한·미관계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노무현대통령 당선은 관심이 높은 뉴스였습니다.5년이 지나고 나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도경향은 어땠나요.당선 초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실제 정책이 나올 때는 김대중대통령 정책의 연속선상에 있었기에 북한에 대한 정책은 생각보다 그렇게 큰 차이나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보다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죠.미선이효순이 사건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보았나요.어쨌든 간에 두 소녀가 죽은 사건이잖아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거죠. 그러나 너무나 크게 확대된 것은 이상하게 생각하죠. 이명박정부 때 광우병쇠고기 파동도 마찬가지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왜 그렇게 됐을까 이해가 안가는 거죠.외신기자로서의 자신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한국인이란 것. 외국 사람이 한국 상황을 파악하는 속도와 한국 사람이 파악하는 속도가 차이 나죠. CNN같이 속도전을 하는 방송에선 더 그래요. 한국의 생방송을 보면서 CNN 생방송을 한 적도 있어요.약점은?그것도 한국인이란 것. CNN은 외국인의 경우 매년 재계약을 해요. 재계약할 때 ‘당신의 기사는 정확하고 사실에 근거한 것은 좋다. 그러나 외국 사람이 당신처럼 한국 상황을 아는 것처럼 전제하고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하곤 합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황우석 보도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는 김일성 사망 보도겠죠.그렇기도 한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황우석 박사 보도예요. 그렇게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했던 기사는 없었던 것 같아요. 한 없이 올라갔다가 금방 땅으로 떨어지는.각종 음모론이 나돌았죠.제가 황우석 관련 기사를 쓰던 초기부터 CNN 본사의 의학PD나 기자는 황우석 박사를 의심하는 목소리를 냈어요. 저는 한국에서 황우석이나 주변 사람을 인터뷰하다 보니, CNN 본사 사람들과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티격태격했어요.황우석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CNN 본사에선 황우석의 성과를 의심했다는 겁니까.네. 본사의 의학PD, 기자와 제가 건강한 긴장관계였다고 할까요. 제가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 더 열심히 취재하고 다녔는데,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아요.기자생활 중 후회되는 일은?CNN을 좀 더 일찍 떠나고 싶었어요. 북한기사가 많다보니 같은 말이 되풀이되고 특별히 나아지지도 않는 거예요. CNN 생활 12년이 지나면서부터 그랬어요. 그때부터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사과정 시작하고, 이화여대 강의도 시작하고 그랬어요. 보완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계속 있었으니까 그 이후의 일이 전개됐겠죠.(웃음)한국 언론과 미국 언론을 경험에 비춰 비교해본다면.어려운 질문이에요. 사회적 역할이 좀 다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정보제공이라는 역할보다는 선도, 교육, 뭔가를 좀 더 낫게 하고 고치는 기능이 언론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역사적으로 그랬으니까. 미국에서는 철저히 사실보도, 정보전달이 출발이었어요. 사실을 조금 틀리게 얘기하면 그 언론사의 생명이 죽는 걸로 생각하죠. 한국은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면 비판을 받고요.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제 자리를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미디어정책 관련 일을 하고 싶어요.마지막 질문인데요, 내 인생에서 영어란?황금열쇠. 제가 젊은이들 대상으로 특강할 때 하는 말이 있어요. 영어는 평생 가는 황금열쇠이고, 누구든 그 열쇠를 쥐고 있어야 원하는 문을 연다. 그리고 독서는 마법의 양탄자다. 가고자하는 모든 곳에 데려다 준다. 이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해요.배영대 - 2014~15년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문화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서강대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6.03.29 09:34

8분 소요
periscope EXCLUSIVE INTERVIEW - “북한은 지금 변화를 꾀하는 중”

국제 이슈

박한식 미 조지아대 교수, 오바마의 남은 임기에 미국 대북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으리라고 전망해 박한식 미 조지아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북한 전문가다. 매년 최소 2회 이상 방북하며 평양에 족히 수십 번은 다녀왔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해 당시 미국의 북한 핵시설 공격을 막은 것으로도 유명하다.북한이 말하는 ‘전승절’ 을 전후해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박 교수는 1일 방한한 뒤 다음날 인 2일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이 주최하는 석학초청강연회에서 ‘정전 60주년,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하고, 이후 뉴스위크 한국판과 독점 인터뷰를 가졌다.강연회와 인터뷰에서 박 교수는 북한이 변화를 꾀하는 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 북한 전승절 행사에서도 그런 변화를 확인했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작년보다 행사 규모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박 교수에 따르면 2011년 4월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 행사 때는 미국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은 차량이 4대나 등장했지만 올해는 그런 미사일을 보여주지 않았다. “미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수많은 외신기자들 앞에서 드러낸 것”이라고 박 교수는 분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150여 명에 달하는 외신기자들이 초청됐다.박 교수는 북한이 변화하는 이유가 경제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경제 발전이야말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나름대로 저마다 역할을 해냈다. 김주석의 경우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정체성을 확립했고, 김 위원장은 사회주의 붕괴 후 기댈 곳이 없어진 북한의 안전을 도모하기위해 선군주의를 앞세워 핵무기를 개발했다. 이제는 김 제1위원장의 차례다.”북한의 정책 노선이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은 냉전 후 격변하는 국제정치 속에서 체제확립을 위해 일관되게 움직였으며 대부분 의도한 대로 성공시켰다고 박 교수는 평가했다. “북한을 괴물의 나라라고 생각하기보다 그들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경제 성장은 북한에 쉽지 않은 과제다. “김 제1위원장이 가진 자원이라고는 노동력뿐이다. 지하자원은 외국기업이 들어오지 않는 한 개발하기 어렵다. 경제 성장을 하려면 개혁개방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러자면 국제금융 시장을 틀어쥐고 있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가 필수적이다.”북한이 도발과 대화 요구를 반복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관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승절을 앞두고 펼쳐진 대규모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에서도 러시아인, 중국인, 유럽인이 함께 등장하는 ‘친선 아리랑’을 가장 크게 부각시키며 전 세계에 적극적인 화해 메시지를 보냈다고 박 교수는 전했다.북한의 개방 의지는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국제인재양성을 목표로 2010년 10월 문을 연 평양과학기술대에는 전자컴퓨터공학, 농업생명과학 등 이공계 과목뿐만 아니라 국제금융경영학부, 외국어과 등도 개설돼 있다. 모든 교직원이 해외동포 및 외국인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든 강의가 영어로 진행된다.교풍이 자유로워 인터넷 이용도 가능하고 국제금융경영학부에서는 시장경제, 국제무역 등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관련 과목을 가르친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매체를 교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개성공단 실무회담에서도 북한은 개성공단에 외국기업을 유치하자는 한국측 제안에 긍정적인 의향을 보였다.이처럼 강력한 변화 의지를 보이고 있음에도 북한의 국제관계 개선에는 좀처럼 진전이 없다. 미국에 직접 대화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비핵화 조치가 선행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미국측의 대응에 막혔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북한이 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북한은 핵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미국에 침략당했으리라고 믿는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같은 사례를 보면 크게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 실제로 1990년대에는 미국 정계에서 북한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박 교수는 북한 고위층과 나눴던 대화를 바탕으로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 전제조건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면서 주변국의 불가침 조약을 받아낼 수 있다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식량이나 경제지원만으로는 비핵화를 관철시키기 어렵다.”그럼에도 박 교수는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남은 임기 내에 미국의 대북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미국은 오랫동안 전략적 인내로 북한을 상대했지만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세계 비핵화를 달성해야 할 중대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북한이 그 과제 달성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과 이제 막 핵을 개발 중인 북한이 협력해 세계 비핵화 프로젝트를 구성한다면 그 파급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관심을 가질 만한 구상이다.”박 교수는 개성공단 재가동 또한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남북관계가 2012년 말부터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그 끝에 13년 간 중단없이 가동됐던 개성공단도 실무회담이 연이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며 폐쇄 직전의 운명에 처했지만 박 교수는 “개성공단 재가동을 향한 길은 항상 열려 있다”고 말했다.“그 길을 걷느냐 마느냐는 남북의 의지에 달렸는데 현재로선 양쪽 모두 뜻이 없어보인다. 무엇보다 실무회담이 아닌 정책결정자 간 비공개 회담이 필요하다. 실무회담으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회담장에 와서 서로 지시 받은 사항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합의가 이뤄지겠나.”박 교수는 “개성공단은 8월 15일 이전에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이면서도 그 근거에 대해서는 “학자로서의 전망”이라며 말을 아꼈다. 박 교수가 현재 추진 중이라고 밝힌 카터 전 미 대통령 방북 건과 관련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는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박 교수는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해 남북 양측이 모두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먼저 북한에 대해서는 “한국에 협조를 많이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선거가 없어서 정책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지만 한국의 대북정책은 여론에 크게 좌우되고, 북한의 반응 역시 한국 정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 한국은 정권 교체마다 대북정책에 변화가 일어나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 북한이 한국에 비해 정책 변화가 용이한 만큼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한국의 대북정책에도 개선 여지가 있다고 박 교수는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정책이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구호에 그치는 측면이 있다면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그렇게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훌륭하지만 지금까지 그 목표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남북 간 신뢰를 구축하려면 우선 문화나 스포츠 교류부터 시작해야 한다.”

2013.08.13 16:26

5분 소요
periscope inside the HERMIT KINGDOM - “북한은 환상적인 여행지다”

전문가 칼럼

뉴저지 소재 ‘우리투어’의 CEO 안드레아 리 그녀는 뉴욕 필하모닉,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등의 방북도 주선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압제적인 전체주의 정권일 성싶다. 2500만 명에 가까운 주민의 3분의 2가 영양실조, 굶주림 또는 더한 고통에 허덕인다. 강제수용소에는 20만 명의 정치범이 억류돼 있다. 인권단체의 추산으로는 40만 명이 고문·처형·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거나 말거나 기가막히게 환상적인 여행지이기도 하다.어쨌든 그것이 우리 투어 CEO인 안드레아 리(31)의 선전문구다. 뉴저지주 포트리에 자리잡은 우리 투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왕따 국가로의 여행을 주선하는 얼마 안 되는 서방 여행사 중 하나다. 북한은 70년 가까이 기괴하고 호전적인 김씨 왕조의 지배를 받아왔다.“우리가 관광에서 찾는 가치 중 하나는 우리 문화를 수출하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는 것”이라고 리는 말한다. 그녀는 변호사 출신으로 칠레 산티아고 태생의 귀화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녀의 한국인 아버지가 산티아고에서 수출업을 했다. 그녀는 맨해튼에서 회사법 변호사로 일했다. 두카티 몬스터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곤 했다. 헬멧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설 때면 파트너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아버지가 10년 전에 창업한 여행사 경영을 맡았다. “아무도 북한과 북한 사람을 모른다.” 맨해튼 웨스트 빌리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그녀가 말했다. “그 나라에는 역사와 문화가 풍부하다. 석기시대부터 존재했던 민족이다.” 우리 투어는 직원 5명의 작은 여행사다. 하지만 북한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의 유일한 비정부 티켓 판매대행사가 됐다. 북한을 방문하는 전체 외국인 여행자의 33%를 그녀의 회사가 담당한다고 리는 주장한다.실제로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지난 1월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 그리고 3월 미국 농구 스타 출신 데니스 로드먼과 미국 잡지 바이스의 방북을 그 여행사가 주선했다.그 여행이 6월 14일 HBO 다큐멘터리 시리즈 ‘바이스’의 시즌 피날레 주제였다.“물론 북한 사회에 정말로 좋지 않은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리가 인정했다. “하지만 북한을 방문해 현지 주민들과 어울리고 교류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더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한다.”한편 그 여행은 “대단히 조직화되고 통제를 받는다. 북한의 한쪽 면만 본다고 따져도 할 말이 없다. 북한에 들어가면 모든 걸 보지는 못한다”고 그녀가 말했다. “강제수용소 같은 건 보지 못한다. ‘공개처형을 볼 수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턱도 없는 소리다. 절대! 우리는 공개처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모른다.”북한은 가끔씩 핵무기 개발 능력을 과시하고 미사일을 발사해 한국과 나아가 미국 도시들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면서도 관광산업을 적극 육성하는 중이다. 북한의 29세 또는 30세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 이 그 사업에 직접 관여한다. 그는 스위스 베른의 공립학교에서 유학했다고 전해진다(그의 연령과 교육 모두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북한의 이른바 건설사병들이 강원도에 “세계 수준”의 스키 리조트를 건설 중이다. 강원도 지역에는 11월부터 3월까지 많은 눈이 내린다. 게다가 북한 주민들은 7월 27일의 ‘전승절’ 60주년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다. 평양에서 열리는 그 기념식에는 “광장에서의 단체무용, 군대 퍼레이드, 대규모 축제행사가 열린다”고 우리 투어 팸플릿은 소개한다.“이는 또한 아리랑 매스 게임을 직접 목격하는 좋은 기회다. 북한에서 DMZ를 관광하고 7일간의 여행일정 동안 동해안 도시 원산과 유명한 금강산을 방문해 최상의 북한 여행을 즐긴다.” 가격은 5일 일정에 2500달러 선에서 더 오래 머물 경우 4000달러에 이른다. 베이징에서 출발하는 고려항공편 왕복 요금이 포함된다. 여름철 성수기 동안 러시아제 투폴레프 항공기로 한 주 5회의 비행편이 운행된다. 하지만 고려항공은 세계 최악의 민간 항공사로 평가받았으며 유럽에는 대체로 착륙이 허용되지 않는다.예상대로 리는 경쟁사인 중국항공(중국국제항공공사)보다 고려항공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중국항공도 베이징에서 평양의 순안국제공항 간 비행편을 운행한다. “다소 편견일지 몰라도 중국항공을 이용한 적이 몇 번있었는데 장시간 연발착이 발생했고 탑승감이 몹시 나빴으며 서비스도 썩 좋지 않았다”고 그녀가 말했다. “고려항공은 항상 정시 운항하고 서비스도 다소 편차가 있지만 좋은 편이다.”리가 말을 잇는다.“비행기에 탑승하면 스피커를 통해 록밴드 크랜베리의 인스트루먼트 음악 ‘Linger’를 배경으로 안전수칙이 흘러나온다. 읽을거리로는 영어신문 평양타임스와 각종 북한 잡지들이 있다. 가장 최근에 본 기내영화는 ‘꽃 파는 처녀’다. 김일성 전 주석이 창작한 유명한 북한 영화다. 타임캡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다소 들지만 북한여행의 전반적인 독특한 체험에 얹혀 나오는 보너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 관광객들은 그런 체험에 정말 만족한다.”물론 주민 대다수가 가난하고 굶주리는 딱한 나라에 유람여행을 다니면서 달러를 쓰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부패하고 잔인한 정치 지배계급을 후원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정말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블레인 하든이 말했다. 그의 베스트셀러 저서 ‘14호 수용소 탈출 (Escape From Camp 14)’은 신동혁의 오랜 모험을 기록한다.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태어나 그곳을 탈출했다고 알려진 유일한 인물이다. 신씨는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행을 겪었다.“북한관광에는 큰 돈이 들며 철저히 관리되고 통제된다. 모든 수입은 국가에 귀속된다. 수행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음식을 먹고, 그들의 일방적인 선전을 듣는다. 데니스 로드먼같은 방문객에겐 평양을 비롯한 몇몇 도시의 보기 좋게 꾸며 놓은 쇼케이스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들의 현실인식이 왜곡되기 쉽다.”그러나 우리 투어의 고객 에릭 힐(30)은 지난 2월 6일간의 여행 중 판단을 유보했다. 그는 개성, 유명한 38선 DMZ, 김정일 묘소가 있는 금수산태양궁전, 묘향산 국제우의 전람관,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링크 등을 방문했다. “미소 짓는 얼굴을 많이 만나 의외였다”고 힐이 말했다.그는 치과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세계일주를 하는 중이다(195개 유엔 회원국을 모두 방문하려는 ‘대모험’이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기록돼 있다). “음울함과 슬픔을 예상했지만 진정한 행복을 목격했다”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의 눈이 살아 있었다. 그것이 세뇌든 진정한 사랑이든 그들은 쉬지 않고 위대한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모토롤라 중역 출신의 샌드라 쿡은 곧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의 부학장을 맡게 된다. 그녀는 지난 4월 미국과 남한을 겨냥한 김정은의 도발적 발언이 극에 달했을 때 8일간 북한을 방문했다. 그녀는 북한방문의 도덕적 의미를 분명히 검토했다. 북한을 다뤄 퓰리처상을 받은 애덤 존슨의 소설 ‘고아원 원장의 아들(The Orphan Master’s Son)’까지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이 어떤 가책보다 강했다.“우리 가이드인 미스터 김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많이 던졌다”고 쿡이 말했다. 그녀는 위대하고, 경애하고, 존경하는 지도자들의 조각상을 더는 볼 필요가 없어서 다행으로 여긴다. “가이드는 대단히 지적이고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터무니없거나 우스꽝스러운 일반화로 빠지지 않았다. 어떤 질문을 던지든 답을 내놓았다. 모든 상황에서 이런 질문에는 이런 식으로 대답하라는 대응방법을 정한 매뉴얼이 어딘가 있는 듯했다. 그들은 상당히 세련되고 아주 똑똑하며 철저하게 교육받은 사람들이다.”최근의 블로그 게시글에서 리는 “북한 주민들이 대단하다”며 온갖 찬사를 늘어놓았다. “북한 주민들이 오랫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다른 주민에 상당한 호의와 관심을 가진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사람들로 변한 듯하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북한관광을 주선한다고 비판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10년간 북한에서 관광과 사업을 하면서 하나의 확신을 갖게 됐다. 북한과 국제사회 간에 조화와 이해를 확대하는 데는 문화적 접촉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이다.”

2013.07.16 14:14

5분 소요
덩그런 빈 고궁은 죽은 것 세월·삶의 ‘켜’ 있어야 문화유산

산업 일반

국립중앙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한 김홍남(64)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대표를 만났다. 그는 문화유산 보존에 열심이다. “쟈(쟤)가 나중에 박물관에서 일할라꼬 저러는갑다.”집안 어른들은 수학여행에서 골동품 항아리를 보느라 대열에서 이탈했다는 열 세 살 아이를 신기하게 바라봤다.어머니 선물로 산 뚜껑 달린 항아리는 아이의 첫 수집품이 됐다. 46년 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김홍남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공동대표는 어려서부터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벌이는 김 대표를 6월26일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만났다.끼익, 묵직한 나무 대문을 열고 안마당에 들어서자 오른쪽에 툇마루, 정면에 발코니를 연상시키는 쪽마루가 보였다. 아래층, 위층 두 채를 연결해 지은 현대식 한옥이다. 안쪽 계단을 내려가니 모던한 가구와 하얀 벽면이 눈길을 끄는 현대적 공간이 나타났다. 5월2일자 뉴욕타임스는 ‘Connecting the Centuries(수 세기를 이어주는)’란 제목으로 이 집을 소개했다. 전통미와 현대미를 고루 갖춘 공간이라는 내용이다.인터뷰는 위층 안채에서 진행됐다. 양쪽에 큰 창호 문이 있어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창 밖을 보면 저 멀리 인왕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김 대표가 이 집을 지은 것은 2000년대 초. 이전에는 소격동 길가 양옥에 살았다. “이화여대 박물관장이었을 때 전남 영암의 구림마을 보존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어느 날 창 밖을 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도 보존해야 할 문화 현장이었어요. 북촌(종로구 제동·가회동·삼청동에 걸친 마을)을 어떻게 지속가능한 주거지역으로 보존할지 늘 고민하죠.”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 등과 함께 북촌문화포럼을 창설한 200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참여했다.내셔널트러스트는 환경을 보호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민간단체로 1985년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김 대표는 문화유산 관련 지식과 노하우를 전한다.그는 아시아 소사이어티 미술관·스미소니언 동양미술관·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대 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장·국립중앙박물관장 같은 굵직한 직책을 맡으며 문화계 유력 인사로 이름을 알렸다. 현재 ‘직업’은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지만 아름다운재단 이사, 동물보호단체 카라이사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박물관장 물러난 후에도 활발히 활동“교수, 큐레이터, 행정가, 사회운동. 이름만 다를 뿐 결국 문화유산이라는 한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존하는 것 못지 않게 문화현장을 지키는 것도 중요해요. 정부가 챙기지 못하는 역사문화의 현장을 보존할 책임을 느낍니다.” 속한 단체는 다르지만 결국 우리문화를 보살피는 것이 그의 일이라는 얘기다.내셔널트러스트의 활동은 크게 자연보호와 문화유산보존으로 나뉘지만 김 대표는 둘을 따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문화유산은 유·무형의 요소가 공존하기 때문에 자연과 어우러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마을이다. “마을에는 산천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가 있잖아요. 그게 바로 문화유산이죠.”요즘 보존에 힘을 쏟는 분야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특별한 역사적 유례가 없는 근대 유산은 대개 정부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김 대표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故) 혜곡 최순우 선생의 옛집을 예로 들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아시죠?한국 근대기에 전통문화 찾기 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역사 속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국 문화계에서는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분 심미안의 산실이 바로 유품이 보관된 성북동 옛집입니다.” 근대 인물들의 삶의 흔적을 보존하고 역할 모델이 될 수 있게 하는 게 김 대표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교육이다.그는 최순우 옛집을 ‘켜’가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표현했다. 도시에 텅 빈 고궁만 덩그러니 있는 것은 켜가 없는 죽은 문화라는 것. “종묘만 지키면 뭐합니까. 제사 때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을 함께 보존해야지요.” 김 대표는 외국에서 베토벤, 톨스토이 같은 대가의 생가를 보존하듯 최순우 옛집 보존이 새로운 전통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2002년 최순우 옛집에 이어 한국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권진규 작가의 서울 동선동 아틀리에를 비롯한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전남 벌교 보성여관, 나주 도래마을 옛집 등이 시민 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이런 근대 문화 유적지는 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하거나 소유자가 기증, 위탁관리 하는 방법으로 보존된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이유다. “지원 없이 도심의 십 수억원 대 부동산을 어떻게 사들이겠어요. 최순우 옛집만 해도 연립주택을 지으려고 계약을 한 상태라 급하게 기금을 모아야 했어요. 평소 문화유산 보존에 관심이 많은 홍라희 리움미술관장과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홍라희 관장 도움으로 최순우 옛집 보존김 대표는 기금 모금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무턱대고 돈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고 후원 받기 참 쉽지 않습니다. 또 언제 바뀔지 모르는 윗사람의 말 한마디에 보존 여부가 결정 나니 지속성이 약하지요.” 그는 일부 기업이 원칙보다 여론이나 감정에 이끌려 선심 쓰듯 후원하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최근 프랑스 명품 회사 구찌가 5년 동안 매해 1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나선 것은 고마운 일이다.“파트리지오 디 마르코 회장이 먼저 제안했어요. 한국문화유산 보존에 도움이 되면서 구찌 직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오늘 아침에도 회의를 했습니다. 영국 역시 찰스 황태자를 비롯한 부유층이 보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운동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그렇지 않죠. 상호보완 관계를 원하는 구찌 같은 기업이 한국에서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최근에 그는 기존의 시민문화유산을 잘 운영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소유자들의 신뢰를 높여 기증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회원들의 기금으로 최순우 옛집에서 축제를 열고 작가들에게 권진규 아틀리에를 제공하는 등 꾸준히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문화유산 보존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앞장서는 이유가 뭘까. “제 전공이 미술사입니다.미술사는 곧 문화사입니다. 연구해야 할 대상이 문화유산이라는 얘기죠. 문화의 현장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 우리 선조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까요.” 김 대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일할 때 한국관 개관 기념으로 청동기 붉은 토기를 기증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란다.그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중국이 무엇 때문에 아리랑을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저렇게 애를 쓰겠습니까.요즘 K-POP이 인기지만 아무리 해외에서 성공해도 문화의 켜가 없는 나라는 외국에서 무시당합니다.” 김 대표는 현대 미술작가들 역시 외국 작품을 흉내내거나 트렌드만 좇으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하버드대 미술사 교수들과 갤러리에 갔습니다. 한국 근현대미술실의 김종학 작가 작품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더군요. 한국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역사문화의 현장이 중요한 겁니다.” 자연과 문화유산 따로 생각할 수 없어현장을 중시하는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길에 오른다. 얼마 전에는 터키에 다녀왔다. “트로이의 유적, 히타이트 왕국의 유적, 모세가 태어난 곳,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 다 보고 왔어요. 직접 가 본 곳에 대해 강의할 때는 더 신이 나요.”현재 그의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명함’은 이화여대교수다. 국립중앙박물관장까지 지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직책으로 이화여대 박물관장을 꼽았다. “목숨 내놓고 했어요. 오기가 생겨 대학 박물관의 역할을 꼭 확인시켜주고 싶었죠.” ‘애쓴 만큼 관람객 수가 늘었느냐’고 묻자 표정이 굳어졌다. “박물관은 10명이 앞사람 머리만 보고가는 ‘뒤통수 관람’을 하는 것보다 한 명이 제대로 느끼고 가는 게 중요해요. 수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 양적으로 평가할 일은 아니죠.”다시 행정직으로 돌아갈 생각도 있을까. 조심스레 묻자 답이 명쾌하다. “뭘 하면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지금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요.”2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나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몰래 책을 읽던 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냉정하면서도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 곡선과 직선이 적절히 배열된 그의 집과도 비슷했다. 인터뷰가 끝을 보이자 김대표는 푹 끓인 콩나물 국밥을 권했다. “한 그릇 후룩 들고가요. 한옥집에 오면 구수한 맛이 있어야지~(웃음).”

2012.07.27 17:35

6분 소요
[2011 GLOBAL MARKETING AWARD] 세계가 부러워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

산업 일반

뉴스위크 한국판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2011 글로벌 마케팅 대상’을 선정했다. 국내 성장을 발판으로 해외에서 코리아 돌풍을 일으키는 이들 기업은 기업의 수익 증대는 물론‘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에 경쟁력과 자부심을 심어준다. 각종 판매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스마트폰의 판매 세계 1위를 눈앞에 둔 삼성전자의 ‘갤럭시S2’, 현지화 전략 없이 토종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빙그레 아이스크림 메로나, 비(非)용광로 쇳물 제조법인 파이넥스 공법으로 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포스코가 그 주인공이다. 친환경 제철공법으로글로벌 최강 꿈포스코‘파이넥스’ 방식 상용화로세계 최고 쇳물 제조 경쟁력 확보지난 6월 세계적인 철강전문 분석기관인 ‘월드스틸다이내믹’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회사로 포스코를 선정했다. 이 조사는 세계 34개 철강회사를 대상으로 기술력, 수익성, 원가절감, 재무건전성, 원료 확보 등 총 23개 항목을 평가해 이뤄졌다. 포스코가 세계 최고 철강회사로 선정된 것은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2002년~2004년 3년 연속, 지난해에도 정상에 올랐다. 특히 올해는 포스코의 해외투자 확대를 통한 성장동력 확보, 파이넥스 등 선진기술 개발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 가장 주목 받는 포스코의 미래 성장동력으론 친환경 제철공법인 파이넥스(FINEX) 공법을 꼽을 만하다. 2007년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 공법 상용화에 성공한 포스코는 지난 6월 28일 포항에 200만t 규모의 파이넥스 공장을 착공했다. 1조3000억원을 투자해 2013년 6월 준공 예정인 파이넥스 3공장은 비(非)용광로 쇳물 제조법으론 세계에서 최대 규모다. 파이넥스 3공장이 완공되면 포항제철소 전체 쇳물 생산량의 25%인 410만t을 파이넥스 방식으로 생산함으로써 연간 1772억원의 원가를 절감할 수 있게 된다.파이넥스 제철공법은 용광로 방식과 비교해 설비투자비 20%, 운영비 15%가량을 줄이는 장점 말고도 황산화물은 3%, 질산화물은 1%, 비산먼지는 28%만 배출하게 돼 미래형 친환경 녹색기술로 각광 받는다. 전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 규제 등 친환경 제철기술 개발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글로벌 철강업계를 선도할 최고의 무기로 각광 받는다.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세계적으로 고급 철강원료가 고갈되고, 온실가스 배출과 환경오염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이넥스 공법은 세계 철광석 매장량의 80%를 차지하는 저급 분철광석과 일반탄을 사용할 수 있고, 기존 고로공법에 비해 환경오염 물질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신기술”이라고 설명했다.포스코는 연간 3540만t가량의 철강을 생산해 조강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4위권이지만 글로벌 경쟁력에서는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진출 기본 전략은 ‘제품생산은 고객사가 있는 시장근처에서, 쇳물생산은 원료가 있는 광산근처에서’라는 원칙에 충실하려고 한다. 글로벌 생산기지를 늘려 시장을 선점해 점유율을 높이고 해외광산 근처에 제철소를 세워 자원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포석이다.특히 올해에는 인도네시아 일관제철소, 인도 냉연공장, 터키 스테인리스 냉연공장 착공에 나선다. 전 세계 14개 국가에서 운영하는 해외가공센터도 중국과 인도에 각각 3개씩 늘려 54개의 글로벌 생산기지 네트워크를 만들어 장기적인 성장 기반을 더욱 강화한다.세계인이 즐기는‘한류 아이스크림’빙그레의 메로나내년이면 해외 판매량이 국내 판매량 앞설 전망 1992년 고가 과일인 멜론을 재료로 한 아이스크림이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빙그레 메로나다. 입안을 가득 메우는 듯한 달콤하고 향긋한 멜론 향과 색다른 초록색 사각형 바가 어린이들과 젊은 층의 마음을 움직였다. 출시 2년 만인 1994년 메로나는 판매고 2억8000개라는 기적을 일궜다.그로부터 18년이 흘렀지만 메로나는 지금도 한국인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으로 꼽힌다. 국내 아이스크림업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자리 잡은 이 제품이 이제는 세계 시장에서 인기몰이를 이어 간다. 2008년 해외시장 매출이 35억원이었지만 올해는 벌써 100억원 매출을 바라볼 만큼 성장 속도가 빠르다. 내년에는 해외 매출(300억원 예상)이 국내 매출(200억원 예상)을 앞서게 될 것으로 회사 측은 예상한다.2008년 메로나가 처음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린 곳은 브라질. 이 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아이스바 형태였지만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멜론 맛이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메로나 맛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불과 2~3년 만에 메로나 돌풍이 일었다. 요즘은 상파울루시의 장사가 잘되는 웬만한 식료품점에선 어김없이 메로나 전용 냉동고가 설치돼 있을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 월마트와 같은 대형 할인점에서도 어김없이 메로나를 만날 수 있다.현지 판매 가격이 2000원을 넘을 정도로 고급 아이스크림으로 통하지만 여름이 시작되는 2월부터 매달 수백만 개씩 주문량이 밀린다. 2014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현지의 점포개설이 늘면서 물량 요청이 더 증가했지만 이를 모두 소화할 수 없을 정도다. 광활한 브라질 시장 곳곳에서 주문이 밀리는 바람에 수입업자는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다. 현지 국영TV인 EBC는 메로나의 돌풍을 과거 ‘스시’ 인기에 비교하면서 “메로나가 브라질의 디저트와 기호식품 문화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고 소개했다.빙그레는 메로나의 수출에서 고집하는 원칙이 한 가지 있다. 모든 나라에 한국에서 생산한 메로나를 판다는 것이다. 메로나 제품의 기술보호를 위해서다. 결국 계약을 맺은 수출국가의 냉동운송회사가 한국산 메로나를 실어 나른다. 브라질에 처음 수출할 때 열악한 물류체계 때문에 운송 중에 아이스크림이 모두 녹아버리는 사고를 여러 차례 겪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차근차근 운송망을 완성해 왔다.브라질 외에도 현재는 미국, 캐나다, 베트남 등 전 세계 30개국으로 수출시장이 확대되면서 글로벌 식품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아시아 주요 거점인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서는 확실히 기반을 다졌다. 최근에는 전 세계로 확대되는 한류(韓流) 바람을 타기도 한다. 빙그레는 2010년 KBS World 채널을 통해 전 세계 70여 개 나라에 방영된 ‘김범의 월드데이트’, 2011년 아리랑TV를 통해 전 세계 188개국에 방영된 ‘유키스와의 스타데이트(홍콩)’의 제작지원을 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도 해왔다. 몇몇 나라에서는 수출 7개월 만에 수입 아이스크림 브랜드 가운데 판매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끈다.메로나는 최근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뉴욕 맨해튼에도 상륙해 뉴요커의 입맛을 공략하는 중이다. 이 회사의 홍보 관계자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디피아(Wikipedia.org)가 메로나를 등재했다”며 “최근에는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메로나의 맛이 알려져 해외 판매상의 수입문의가 급증한다”고 설명했다. 세계는 갤럭시S2로 통한다삼성전자 출시 55일 만에 세계 누적판매 300만 대 돌파아시아 넘어 유럽·중동에서도 인기몰이스마트폰에서도 삼성전자의 글로벌 경영이 빛을 발한다. 4월 말에 출시된 갤럭시S2가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서 잇따라 판매기록을 갈아치우며 세계 1위를 눈앞에 뒀다. 일본, 동남아 등 아시아와 중동, 유럽 등에서도 판매량이 급증한다.갤럭시S2는 국내 휴대전화 판매기록도 모두 갈아치웠다. 출시 두 달 만에 개통량 140만 대를 넘어섰고 7월 중 150만 대 돌파는 무난하리라 전망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출시 55일 만에 누적판매 300만 대를 깼다. 하루에 5만 대 이상, 1.5초에 1대씩 팔린 꼴이다. 이는 갤럭시S의 300만 대 돌파 시점인 85일 기록을 30일이나 앞당긴 것이다.지난 2009년만 해도 삼성전자의 연간 스마트폰 판매량은 640만대에 불과했다.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직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지난 1분기 블랙베리 스마트폰 제조사인 림(RIM)과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판매량은 각각 1380만 대와 1260만 대로 120만 대 차이가 났다. 하지만 림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력 상품인 블랙베리 스마트폰의 경쟁력 약화로 판매가 주춤한 상태며, 최대 경쟁자로 꼽히는 애플의 신제품 출시가 늦어진 것도 삼성전자로서는 호재다.갤럭시S2는 갤럭시S의 성공 요소인 초고속(Speed), 초고화질(Screen), 초슬림(Slim)의 3S를 더욱 진화시켰다. 1.2GHz 듀얼코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에 구글의 최신 안드로이드 플랫폼 진저브래드를 최적화해, 강력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고, 동영상·사진을 빠르게 로딩해 3D게임 등에서 강력한 속도감을 제공한다. 또한 국내 최초로 일반 3G망 대비 최대 3배 빠른 HSPA+ 21Mbps를 지원하고 4.3형 수퍼아몰레드 플러스를 탑재했다. 갤럭시S보다 화면은 14% 크고 두께는 1mm가 작은 8.9mm이며 무게는 121g으로 동일하다.삼성전자의 차세대 터치위즈 UX 탑재로 개인 취향에 맞는 콘텐트와 서비스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맞춤형 매거진 ‘라이브 패널’, 앞뒤로 기울여 밀면 작아지고 당기면 커지는 ‘모션UI’ 등 간편하고 편리한 실생활 기능을 제공한다.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선 한류 열풍에 힘입어 판매율이 증가세를 보인다. 일본에서는 일본 최대 통신사 NTT 도코모를 통해 7월 10일부터 예약판매가 시작됐다. 삼성전자는 말레이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다. 지난 6월 말 ‘갤럭시S2’를 전시한 말레이시아 중심가 미드 밸리 쇼핑몰에는 ‘갤럭시S2’를 서둘러 구매하려는 사람이 몰려 1400대가 순식간에 판매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삼성전자는 이 기세를 몰아 갤럭시S2로 전체 휴대전화 시장 1위를 노린다.중동 아랍에미리트의 최대 통신사업자인 에티살랏은 갤럭시S2를 출시하기도 전에 3000대 선공급을 요청하는 등 소비자뿐만 아니라 현지사업자의 반응이 뜨겁다. 6월 22~25일 에미리트몰에서 열린 갤럭시S2 출시 행사에는 현지 언론, 거래처, 사용자 등 4000여 명이 몰렸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 출시 이후 두바이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4배 이상 높아진 상승세를 이번 ‘갤럭시S2’ 열풍으로 이어가 중동 시장의 교두보인 두바이 시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유럽에서는 독일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갤럭시S2는 5월 중순 출시 이래 5월 말 누적 판매량 10만 대를 넘어서며 스마트폰 시장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독일 스마트폰 시장에서 43.5%, 휴대전화 시장에서 41.5% 를 차지한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갤럭시S2가 출시된 영국에서도 17주 연속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2011.07.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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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과 베토벤이 ‘한류’를 말하다

산업 일반

단돈 8만원으로 시작했다. 경기도 장호원 거리에서 만두를 팔았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일을 접었다. 와신상담. 이번엔 서울 대림동 시장거리에 밥집을 차렸고, 맛깔난 포기김치로 이름을 날렸다. 이를 밑천으로 1997년 강남 역삼동에 한식전문점 봉우리를 열었다. 이하연(51) 김치협회장. 그는 현대판 대장금이다. “그가 담근 김치 맛이 최고”라고 평하는 이가 많다. 자신도 “김치를 담글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회장의 꿈은 원대하다. 김치 하면 한국이 떠올랐으면 한다. 김치의 세계화. 대장금의 목표다.고전파 작곡가 베토벤을 존경했다. 베토벤의 정서를 느끼고 싶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갔다. 그렇다고 외국 클래식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그의 앙코르곡은 언제나 아리랑이다. 클래식 음악가로선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의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누군지 알아챈 사람이 있을 게다. 그렇다. ‘베토벤 바이러스(2008)’의 실제 모델 서희태(46) 밀레니엄 심포니 감독이다. 그는 ‘다울(다함께 어울어짐) 프로젝트’의 지휘자다. 한국의 멜로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시작된 다울 프로젝트에선 오케스트라로 아리랑·도라지·옹헤야 등 전통음악을 연주한다. 서양 연주기법으로 한국의 울림을 전하는 거다.같은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은 지난해 만났다. 서희태 감독이 자신의 저서 『클래식 경영 콘서트』에서 ‘클래식 김치론’을 주장한 게 인연이 됐다. “…나는 클래식을 김치라고 표현한다… 김장김치는 몇 년을 묵혀도 곰삭은 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클래식 음악도 (김치처럼) 변하지 않는 매력이 있다….”두 사람은 경기도 덕소에 있는 ‘봉우리 김치문화원’에서 조만간 김치 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이 회장이 김치를 담그고, 서 감독은 한국 전통음악을 (오케스트라로) 들려준다. 대장금과 베토벤의 합동 공연이다. 지난 5일 봉우리 본점에서 두 사람을 만나 한국문화 세계화의 전략과 가능성 그리고 개선점을 들었다.서희태 감독 일본 기무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죠?이하연 회장 한국 김치와 일본 기무치를 비교하시다니요(웃음). 근본이 달라요. 김치는 발효음식이지만 기무치는 겉절이예요. 깊은 맛이 없고, 달기만 하죠. 김치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건강식품이잖아요. 깊은 맛을 제대로 알릴 수 있다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어요. 한국 전통음악도 경쟁력이 있지 않은가요? 이를테면 아리랑처럼….서희태 물론이죠. 외국 음악인 중 아리랑이 한국 전통음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아요. 베토벤이 살았던 오스트리아 빈에 작은 와이너리가 있어요. 동양사람이 오면 아리랑을 연주하죠.오스트리아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아리랑이쯤 되면 분명하다. 음식이든 음악이든 한국문화는 세계를 유혹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문화는 아직 세계 속에 없다. 김치가 기무치가 되고, 갈비가 가루비로 통하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우리 전통문화를 중국의 아류쯤으로 생각하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오스트리아엔 유명한 한국사람이 있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수행하고 한국에 왔을 정도다. 그는 외식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일본 스시바를 운영한다. 서브 메뉴는 김치와 한국 라면이다. 애국심이 없는 걸까. 아니다. 스시바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야 할 때다. 막걸리가 뜬다고 마냥 흥분하고 감탄해선 안 된다. 21세기는 컬처노믹스 시대다. 문화가 곧 경제라는 얘기다.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실패하면 경제적으로 잃는 게 많다. 제2의 기무치 사태는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을까.이하연 산업화만 강조하는 게 문제입니다. 무작정 만들어서 많이 수출하면 된다고 여기죠. 김치도 그랬어요. 내실을 다지기보단 숫자(수출액 등)에 집착했죠. 겉으론 한국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전통문화는 경시하기 일쑤였죠. 한식 셰프의 월급은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숫자도 턱없이 부족해요. 이런 상황에서 세계화라니요. 문단속을 잘해야 안심하고 밖에 나가지 않겠어요? 서희태 (고개를 끄덕이며) 2006년 오스트리아 빈에 한국 국악팀이 공연을 왔어요. 수많은 현지인이 관심을 보였죠. 외국인 친구에게 물었어요. “국악을 국제무대에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고요.” 답은 이랬습니다. “저 악기를 누군가 배워야 한다. 꽹과리·장구를 연주할 수 있는 외국인이 늘어야 세계화가 되지 않겠는가.” 안타까웠죠. 정작 우리나라 사람은 국악에 별 관심이 없잖아요. 배우는 사람도 없고요.전통만 고집하면 세계화는 멀어질 수 있다. 세계화는 일정한 규격을 통해 진행된다. 공통언어로 소통하고, 기축통화로 교역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규격의 또 다른 말은 현지화다. 현지에서 통할 만한 규격을 갖춰야 세계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린다. 일본 스시는 이제 세계적 음식이다.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는 조리법을 개발해 거부감을 덜었다. 기술로 규격을 만든 거다. 서 감독이 아리랑 등 우리 전통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음악의 세계 규격”이라고 했다. 이 회장도 공감했다. “묵은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외국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외국인에게 김치를 알리려면 ‘그들의 맛’이 (김치에) 들어 있어야 해요. 일종의 퓨전 김치죠.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는 식초절임 김치와 비슷해요. 매운 음식을 즐기는 멕시코 사람에겐 고추소박이가 제격일 거예요. 안에선 전통문화를 육성하고, 밖에선 철저하게 그들의 문화에 맞추자는 겁니다.”현지화만큼 중요한 건 또 있다. 지금은 융·복합 시대, 모든 게 얽히고설킨다. 음식·음악만으로 승부 짓기 어렵다. 다른 문화도 함께 세계로 나가야 한다. 와인·사케·위스키 등 세계 각국의 전통주가 전해질 때 그 나라의 문화·역사·이야기가 함께 따라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실패했다. 김치 세계화를 외치면서 김치만 수출하는 데 급급했다.생선 비린내 없앤 스시의 교훈이하연 무엇보다 스토리텔링 전략이 필요해요. 김치에 얽힌 독특한 이야기가 함께 알려져야 효과가 크죠. 따지고 보면 얘깃거리는 많아요. 막걸리만 해도 김삿갓과 시인의 막걸리 내기 이야기,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막걸리 찬사 등이 있잖아요.서희태 제가 빈 유학을 결심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어요. 베토벤이 살았던 곳에 가보고 싶었죠. 베토벤처럼 차를 마시면 멋진 교향곡이 탄생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랄까. 외국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리랑에 감동하면 아리랑에 얽힌 얘기를 듣기 위해 한국에 올 거예요. 이걸 준비해야 합니다.세계화에 성공하려면 전략을 잘 짜야 한다. 현장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는 전례 없는 글로벌 불황에도 성장엔진을 계속 돌렸다. 도요타·소니·파나소닉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이 휘청일 때도 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닌텐도DS와 닌텐도위는 각각 1억 대가 넘게 팔렸다.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는 왜 닌텐도 같은 제품이 없는가”라고 탄식한 이유다. 작은 화투업체에 불과했던 닌텐도를 바꿔놓은 건 게임 전문가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그가 개발한 스토리게임 ‘동키 콩’(1981)이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닌텐도의 DNA가 단숨에 변했다. 서 감독은 “21세기는 전문가 한 명이 조직의 운명을 바꿔놓는 시대”라고 했다. 아쉽게도 한국 전문가의 현실은 씁쓸하다.이하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식 세계화가 본격 추진됐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죠. 한식 세계화 추진단이 구성됐는데, 현장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어요. 식당을 단 한 번도 운영해 본 적 없는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대부분이었죠. 한식을 대체 무엇으로 만드나요? 젓갈·장 등 재료가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또 한식을 어디에 담을지, 한식 전문점을 어떻게 꾸밀지도 논의해야 해요. 각 분야 전문가의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었죠. 한식 세계화의 밑그림은 탁상공론으로 그려졌습니다. 서희태 지난해 열린 G20 서울 정상회의는 우리의 국격(國格)과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저도 동참했죠. 다울 프로젝트에서 연주하는 아리랑 등 전통음악을 화상중계로 각국 정상에게 들려줄 계획이었어요. G20 준비위원회도 동의했습니다. 수년간 연주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죠. 하지만 무산됐어요. 대신 아이돌 가수와 일부 성악가가 ‘그들만의 공연’을 열었죠. 한국 전통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만든 다울 프로젝트가 무시된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꽤 컸죠.(※ 서 감독은 무산 이유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추측한 게 맞냐”고 물으니 “그럴 거다”고만 했다.)이하연 정부가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수용해야 하는데, 반대인 것 같아요.서희태 지난해 ‘무한도전’이라는 연예프로그램에서 뉴욕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비빔밥 광고를 냈어요. 뉴욕 한복판에 한국 광고를 실은 것도 대단했지만 더 놀란 건 그들의 협력이었어요. 비빔밥 광고 하나 만드는데 기획자·공연가·한복 전문가·한식 전문가 등이 두루 참여했죠. 세계화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돼야 합니다.레코드사업·우주사업 등 손대는 것마다 화제를 일으키는 괴짜 CEO 리처드 브랜슨 영국 버진그룹 회장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즈니스는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한국의 세계화는 국가적 비즈니스다. 세계인의 관심을 끌어야 알찬 열매를 딸 수 있다. 이게 쉽지 않다. 냉정하게 말하면 중국·일본에 밀린다. 한국 하면 북핵을 떠올리는 외국인도 많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책의 연속성이 필요하다. 세계화 전략을 꾸준히 추진하는 거다. 세계 최고의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계가 많은 지휘자였다. 나치 전력으로 독일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스튜디어 녹음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숱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LP의 정교함을 CD가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일 때도 CD녹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됐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20여 년. 많은 사람이 카라얀을 기억한다. 연속성의 힘이다.베네수엘라 바꾼 엘 시스테마서 감독은 다른 예 하나를 더 들었다. “엘 시스테마 운동 아시죠? 마약·총기·빈곤의 나라 베네수엘라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은 운동입니다. 음악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는 1975년부터 빈민가 소년에게 음악을 가르쳤죠.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를 청소년 예술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로 만들었습니다. 35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성과가 어떤지 아세요? 엘 시스테마에 참가한 베네수엘라 청소년은 30만여 명에 달합니다. 그중엔 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연소 상임지휘자인 구스타보 두다멜이 있습니다. 감동은 세계 각국에 전해졌고, 마약천국으로 불렸던 베네수엘라는 ‘문화예술국가’로 거듭났죠. (※아브레우 박사는 지난해 10월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면 국가 이미지도 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우리는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책이 사라진다. 서울시 김치축제는 딱 세 번 만에 끝났다. 예산 부족이 이유였다. 이하연 회장은 “김치를 세계적 먹을거리로 만들겠다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서울 축제를 없앤 건 촌극 중 촌극”이라고 쏴붙였다. 서 감독이 말을 받았다.서희태 정부 정책의 연속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해요. 독도 보세요. 정부가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DO YOU KNOW’라는 독도 광고를 뉴욕 타임스에 실은 주인공이 누구죠? 홍보전문가 서경덕(성신여대 객원교수)씨와 가수 김장훈씨 아닌가요? 이하연 연속성이 떨어지니까 자꾸 어설프게 홍보해요. 막걸리 열풍이 그런 것 같아요. ‘막걸리가 떴다’는 말이 나온 지 2년가량 흘렀는데, 성과 등 후속 얘기가 없어요. 정부 정책과 홍보에서 기승전결을 찾을 수 없죠. 이러다 뒤통수 맞을 수 있어요. 일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탁주가 있어요. 니고리자케·도부로쿠 등이죠. 기무치처럼 자신들의 전통음식인 양 포장해 세계에 내다 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비해야 해요.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박사는 “일본 다카라주조 같은 대형 주류업체는 막걸리와 비슷한 탁주를 생산해 유통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1003호·2009년 9월 8일자 참조). 우리의 세계화 전략, 어설픈 신기루만 키우고 있을지 모른다.서희태 유행가를 양산해선 안 되는데…. 우리가 그래요. 막걸리가 조금 뜨면 소주도 내보내자고 나오죠. 세계화에 성공하고 싶다면 정부 정책이 장기적이고 꾸준해야 합니다.이하연 회장과 서희태 감독의 대화는 2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다. 수많은 말이 때론 덤덤하게, 때론 매섭게 오갔다. 아쉽지만 지면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많았다. “정부 정책의 연속성이 없으니까 언젠가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겠나”라며 농을 섞어 물어도 야릇한 미소만 지을 뿐 답을 주지 않았다. 대장금과 베토벤의 첫 번째 김치콘서트는 짙은 여운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 회장은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김치를 알리느라 정작 김치 담글 시간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서 감독은 “외부활동이 많으니까 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들의 김치 콘서트는 또 열릴 거다. 누가 뭐래도 한국의 세계화를 위해 지금껏 뛴 두 사람 아니던가.

2011.01.10 10:48

8분 소요
성격 비슷해 토론도 싸우듯이

산업 일반

첼리스트인 정명화(66)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과 구삼열(69) 서울관광마케팅 대표 부부가 사는 서울 구기동 빌라에 찾아간 것은 지난 10월 10일 해 질 무렵이었다. 북한산이 병풍처럼 두른 그곳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집은 간소했다. 거실 벽 한쪽에는 어린 손자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진열돼 있고 앤티크풍 소파, 명화 두 점이 걸려 있다.3층 다락방을 개조해 만든 정명화 감독의 연습실. 하얀 카펫 위에는 1731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우리나라엔 하나밖에 없다)가 든 은빛 하드케이스가 피아노 옆에 세워져 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정 감독이 직접 공을 들여 아기자기하게 만든 그녀만의 작은 공간이다. 한쪽 벽면에는 그녀가 첼로에 기대 활짝 웃고 있는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아내가 연습을 할 때 구 대표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간식이나 물을 챙겨주고 연주에 대한 코멘트를 해 준단다.그녀는 연습을 끝내고 나면 바로 옆 테라스로 나와 남편과 와인을 즐긴다. 부부는 밤늦게까지 이곳에서 음악부터 세상사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성격 비슷하지만 토론은 치열“누가 들으면 우리가 싸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워낙 의견을 주고받는 걸 좋아해요. 토론을 해 문제점을 찾지 서로 덮어놓고 따라가진 않죠.” 구삼열 대표는 “보는 관점이나 취향, 성격이 비슷한 편이지만 내가 많이 참는 편”이라고 말했다.정명화 감독은 내년 대관령국제음악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저명한 해외 음악가들을 섭외하고 페스티벌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자주 듣지 않던 음악까지 열심히 듣는단다. “이 음악이 이렇게 좋았나 깨닫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힘들어도 이 일이 너무 즐거워요.” 그녀는 그동안의 연주 경험을 살려 깊이 있고 즐거운 페스티벌을 만들 계획이란다. 예술감독뿐 아니라 전국 순회 연주에 마스터클래스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다.줄리아드 음대 졸업 후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첼리스트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이젠 세계적인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정 감독은 이제껏 해외 순회 연주가 많아도 한 번도 펑크 낸 적이 없다. “연주자는 컨디션이 나쁘면 연주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항상 시간관리를 철저히 하는 게 중요해요. 늘 1순위가 뭔지 생각하고, 계획을 적절히 바꿔가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죠. 장단기 스케줄을 잘 알고 있어야 해요.”구삼열 대표도 요즘 아내 못지않게 바쁘다. “서울을 해외에 알리는 일은 1년 내내 계속되거든요. 얼마 전 애를 많이 쓴 ‘2010 서울 고메(Gourmet)’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한식 세계화가 화두였죠. 유명한 셰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식자재로 한식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계적인 요리 전문 기자도 15명 초청했죠. 곧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국제 컨벤션이 있고 G20 정상회의 관련 준비도 합니다. 연말엔 코리아MICE마켓 행사에 유럽 출장도 다녀와야 해요.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아내의 대관령국제음악제 준비를 돕고 있지요.”구 대표는 65년 코리아헤럴드 기자를 시작으로 AP통신 유럽 특파원으로 15년간 활동했다. 89년엔 유니세프 대변인을 맡았고 9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유엔에 진출해 유엔본부에서 공보국장과 특별기획본부장을 거쳤다. 아리랑TV 사장도 지냈다. 현재 서울관광마케팅 초대 대표이사 겸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관광위원장을 맡고 있다. 40년간의 해외생활에 에피소드가 없을 리 만무하다. “AP통신 유럽특파원을 할 때 큰 실수를 했어요. 유엔에서 수많은 회의가 매일 열리는데 기자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어요. 하루는 ‘뻔한 회의’라 생각하고 한 회의장을 안 갔는데 하필 그날 정말 중요한 결의안이 갑자기 올라와서 표결이 된 거죠. 당연히 AP가 다른 곳보다 보도가 늦었지요. 얼마나 애먹었는지 몰라요.”비슷한 실수가 또 있었다고 그는 ‘실토’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제네바를 방문했을 때였어요. 78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전담 취재를 했는데 교황이 어디를 가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 땅에 키스를 하셨어요. 그날 바빠서 다른 사람을 공항에 보내고 저는 TV스크린을 보며 기사송고를 했는데 교황이 내려오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땅에 키스를 하셨다’고 내보낸 거예요. 그런데 그날은 교황께서 그냥 내려오셨어요. 정정기사를 써야 했죠. 교황은 그때 제네바 방문이 두 번째였기 때문에 키스를 안 하셨던 거예요.” 그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했다.이들 부부는 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떨어져 지냈다. 1970년 뉴욕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처음 만나 이듬해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로마에 정착했다. 두 딸은 모두 로마와 뉴욕에서 자랐다. 구삼열 대표는 87년 유니세프에서 일하려고 뉴욕으로 돌아왔고 아내는 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 제의를 받아 먼저 귀국했다. 부부는 오래 떨어져 살았지만 자신들만의 부부애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된장국 끓여 먹는 집은 아니에요. 한자리에 모여 먹진 않지만 다른 방법으로 가족애를 느끼죠.” 정 감독은 “서로에 관한 일들, 예를 들어 회사일과 출장이야기 등은 남의 집에 초대 받았다가 자연스럽게 듣는 경우가 많아요. 남들은 평소 들은 얘기 또 듣고 하는데 저는 처음 듣는 거라 재미있어요”라며 웃었다. 구 대표는 “나는 음악에 대해 많이 아는데 아내는 내 세계를 잘 모른다”고 말했다.비행기 옆좌석엔 첼로가 앉아 그는 아내와 함께 요즘도 주말마다 음악회 나들이를 다닌다. 지금은 모두 바빠 서로 시간을 내기 힘들지만 로마에서 살 때만 해도 매일같이 음악회를 가거나 함께 골동품을 보러 다녔다. “남편이 맛있는 집을 찾아놓으면 저는 졸졸 따라가서 맛있다, 없다 평가하고 그랬죠. 둘 다 와인과 요리를 좋아해 참 즐거웠어요.”무거운 첼로가방은 누가 들까. “20대 때는 멋 부린다고 하이힐 신은 채로 무거운 첼로가방을 메고 다녔어요. 아주 피곤할때만 남편에게 맡겼죠. 동생 명훈이는 음악가니까 자주 맡겼는데…. 첼로가방을 자주 들어야 팔의 근육도 생기고 체력적으로 도움이 돼요. 특수한 경우 아니고는 잘 안 맡기죠.”그녀는 해외 순회 연주를 할 때 비행기 옆좌석 티켓을 끊어 첼로를 앉혔다. “남편과 셋이 비행기를 타면 나는 첼로랑 앉고 남편은 따로 앉았던 적이 많았어요. 저보다는 남편이 외조를 많이 했죠. 신혼 땐 서신 작성이나 커리어 관리를 많이 해 줬고요.” “제가 대서소 역할을 했어요. 문서 대필을 해 주는 거요.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구 대표가 외조를 자랑하자 아내는 “나도 처음에는 내조를 했다”고 ‘반격’한다. “남편은 로마에 있을 때 손님 초대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나름대로 잘하고 싶어 만날 요리책 보고 연구하고 그랬죠. 남편이 은수저 같은 걸 좋아해 자꾸 사오는데 얄미웠죠. 안 쓰면 검게 되니까 닦느라 고생했어요.”두 딸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 큰딸은 미국에서 브라운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작은 딸은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영양학을 공부하며 유니세프에서 일하고 있다. “e-메일과 전화로 자주 연락해요. 서로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영어로 장문의 e-메일을 쓰죠.” 부부는 지난 여름휴가를 미국 워싱턴 근교 해변에서 결혼한 두 딸 가족과 보냈다. “휴가 때는 가끔 경화, 명훈이도 함께해요. 내년엔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있어 거기로 불러 모을 생각이에요.”부부의 소망은 소박하다. “스페인에 가서 음식기행을 하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결혼 40주년, 부부는 바쁜 와중에도 아름답게 서로를 보듬으며 살고 있었다

2010.11.05 17:08

5분 소요
평소 하고 싶던 일 이젠 맘껏 즐긴다

산업 일반

구덕모(62) 전 LG디스플레이 부사장이 와인바 사장으로 변신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며 탤런트, 예술가, 대학교수, 의사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폭넓게 인맥을 쌓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명창 박옥초 선생의 구성진 가락에 청중은 와인 잔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지난 2월 19일 저녁 8시 청담동 와인바 와인&프렌즈에서 열린 ‘와인과 국악의 만남’ 행사 자리다. 음식도 한식에 외국 소스를 이용해 동서양의 만남을 선보였다. 백김치에 봄나물을 섞어 만든 샐러드, 이탈리아 고르곤졸라 치즈를 얹어 구운 너비아니 등 7가지 요리가 코스로 나왔다.여기에 시원한 민트향으로 입맛을 살려주는 알자스 화이트 와인부터 메를로의 풍부한 자두향이 가득한 프랑스의 말러베세 블라비아, 너비아니와 환상의 마리아주로 평가 받은 스페인의 마르케스 드 리스칼 리제르바 와인이 차례로 선보였다. 와인과 국악의 이색적인 만남을 기획하고 준비한 사람은 구덕모 와인&프렌즈 대표다.2006년 5월 LG디스플레이 부사장에서 와인바 사장으로 변신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며 얘기할 수 있고, 지인과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장소를 찾던 그에게는 와인바가 안성맞춤이었다. 바 명칭도 와인과 친구들이다. 이곳에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친구가 되자는 의미다.요즘 구 대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친해졌다고 자랑한다. “와인을 마시며 얘기하다 보면 저보다 30년 이상 젊은 회사원부터 기업가, 대학교수, 의사 등 직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좋은 말동무가 됩니다.”와인과 국악의 만남 행사에 참석한 탤런트 전광렬과 오페라 가수 한규원씨도 단골로 시작해 형제처럼 돈독한 사이로 발전했다.명창 박옥초 선생 역시 지난해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와인바를 찾은 후 열성 팬이 됐고, 구 대표의 제안으로 행사까지 마련했다. 단골이 느는 데는 구 대표의 와인 지식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6년부터 와인을 공부한 전문가다. 당시는 한국 최초의 와인으로 불리는 마주앙조차 없던 때였다.KOTRA 뉴욕무역관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구 대표는 와인 문화를 접하면서 와인이 훌륭한 의사소통 도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와인 관련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시며 공부를 했다. “식사하면서 업무 얘기만 계속 할 수는 없잖아요. 와인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도와줍니다. 특히 외국 바이어들은 와인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입니다. 이때 자연스럽게 비즈니스 얘기를 꺼내면 일처리가 수월합니다.”와인 덕분일까. 그는 81년 금성사(현 LG전자)로 스카우트된 이후 LG전자 상무, LG반도체 영업본부장을 거쳐 2000년 LG디스플레이 부사장이 됐다. 20년 넘게 줄곧 마케팅을 담당한 그는 와인으로 수많은 계약을 따냈다. 그가 LG디스플레이 부사장 시절 단일 계약으로 최고 금액을 따낸 것은 지금까지 업계에서 회자될 정도다.당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유명 업체 사장을 모시고 그가 간 곳은 제주도의 허름한 횟집. 바이어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내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곳으로 데려간 것. 그리고 59년산 프랑스 보르도의 그랑 크뤼 와인인 샤토 랭쥐 바주를 내놨다. 바이어가 1959년생임을 알고 도착하기 3시간 전부터 디캔팅을 해 놓은 히든 카드였다.구 대표의 정성에 바이어는 감동했고, 그 인연으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는 자신의 와인 비즈니스 성공 비결을 고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와인은 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것. 중요한 점은 잘난 척하며 와인 지식을 자랑하기보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와인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는 것도 방법이다.구 대표는 프랑스의 샤토 칼롱 세귀르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 와인은 라벨에 큼지막한 하트가 그려진 게 특징입니다. 생산업자인 칼롱 세귀르 후작은 프랑스 보르도에서 가장 훌륭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원인 샤토 라피트와 샤토 라투르를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샤토 칼롱 세귀르를 소유하게 된 후작은 모든 와인 중에서 자신의 마음은 칼롱에 있다고 얘기했죠. 그의 마음을 담아 라벨에 하트가 그려진 겁니다. 이후 사랑이나 감사의 마음을 전할 때 애용되고 있죠. 실제로 제 얘기를 들은 바이어가 이 와인으로 고백하고 6개월 후 결혼에 골인했죠. 하하”와인바를 창업한 이후 그는 “얼굴 좋아 보인다”와 “부럽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LG 쪽 직원들이 놀러 오면 다들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고 하더군요.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그런가 봅니다. 친구들은 부러워하죠. 자영업 하는 친구 빼곤 대부분 은퇴했습니다. 그중 80%가 집에 있어요. 시간 보내며 노는 것도 힘들다고 하더군요.”구 대표는 본인 스스로도 성취감이 크다고 말한다. “대기업에서 근무할 때 느끼는 성취욕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지금은 제 만족도를 높이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고객들이 제가 추천한 와인을 마시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친구들과 와인 마시기 좋은 와인 바를 운영하는 게 목표다. 요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프랑스 샹볼 뮈지니. 밝고 고운 루비 색상을 띠고 와인 잔 가득 꽃향기가 피어오르는 게 특징이다. 맛 역시 부드럽고 달콤해 작업주로 불린다. “이 와인은 여성은 물론 와인 초보자들도 한번 마시면 좋아합니다. 반하는 거죠. 저도 고객들에게 와인 작업을 걸어 보려고요. 넘어올까요?(웃음)”

2010.03.0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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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가슴을 울린다 - 1

산업 일반

낯선 땅의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성공’을 손에 잡고자 세계 각지에 뿌리를 내린 한국의 ‘드림 캐처’들. 음악가, 조각가, 방송인, 소설가, 배우, 모델, 네고시앙 등 문화예술계 종사자 50명을 소개한다. 그들은 한국과 현지의 문화를 어떻게 접목시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을까?문재원(미국) | 조각가장난감 레고 가방에 뉴욕을 담다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의 미로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과연 그 길을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도나도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리려고 뉴욕엘 온다. 뉴욕은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주지만 문 뒤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올해 뉴욕예술 재단 펠로십을 수상한 조각가 문재원(46)의 작품은 삶의 공간을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개념이 아니라 가방처럼 어디든지 들고 다니는 휴대형 공간으로 형상화시켰다. 하얀 형광 아크릴 판 밖으로 빛을 발하는 작품은 우리를 유혹하는 뉴욕처럼 화려하지만 몇 개만 열려있는 작은 창문이 예술가의 힘든 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문씨 작품의 기본 형태는 다양한 크기의 런치 박스, 여행 가방 그리고 서랍 등이다. 그리고 장난감 레고를 이용해 표면과 내면에 생활 공간을 구성하는데 실제로 가방을 열면 창문과 계단 등이 보인다. 마치 어릴 적 형상화할 수 없어 막연히 꿈꾸었던 나만의 공간을 현실에 만들어 낸 듯하다.1989년 상명대 조각과를 졸업한 다음해 문씨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4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조각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작품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외부와 단절한 채 7년간 작업에만 몰두했다. 2001년, 뉴욕의 화랑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아는 큐레이터 하나없이 어떻게 작품을 알릴까 고민하다가 슬라이드만으로 작품을 평가해 전시 작가를 선정하는 덤보 아트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룹전에 참여하라는 연락이 바로 왔다. 이 첫 그룹전에서 문씨의 작품은 휘트니 미술관 위원에게 팔리는 행운을 잡았다.2003년 문씨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당시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였던 래리 린더(현재는 버클리 아트 박물관 관장이다)가 그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그때 문씨는 레고 문 392개를 이용한 144개의 ‘단순히 연결된(Simply Connected)’이라는 조립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스튜디오가 좁아 설치하지 못했던 미로찾기 형태의 이 작품에 린더가 관심을 보이자 완성품을 린더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문씨는 프랫 인스티튜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술계에서 워낙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 학교에서도 린더가 온다면 학교 학생전용 화랑을 빌려주겠다고 선뜻 승낙했다.래리 린더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기발함과 오싹함이 이상하게 균형을 이루었고, 밝은 색깔의 레고 블록이 멋지고 편집증적 실내의 미로와 결합되어 마치 출구 없는 월마트가 끝없이 계속되는 듯했다. 후기 자본주의 비참한 광경을 디즈니스럽게 축약해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그 작품에 대한 소감을 전해왔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월간지 아트포럼의 웹사이트에 그녀의 전시 소식이 알려지면서 뉴욕 딜러들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 문씨는 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아팠다. 너무 많은 접착제 사용 때문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몸이 아파 작품 근처에조차 못갔다.유명한 드로잉 화가인 남편 제프 게이블과 조수가 도와줘 작품들을 완성했다. 몸이 아프다는 얘기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혹시 큐레이터들 사이에 더 이상 작품을 못한다는 소문이 돌아 힘들게 잡은 기회를 놓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2005년 문씨의 첫 개인전이 뉴욕 첼시에 있는 뉴먼 포피아시빌리 갤러리에서 열렸다.이 전시회 소식은 예술전문 월간지 아트 인 아메리카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작 총 14점이 전량 팔리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2007년에는 스페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뉴욕 메이시 백화점 쇼윈도에도 그녀의 작품이 전시됐다. 문씨는 현재 뉴욕 첼시에 있는 뉴먼 포피아시빌리 갤러리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맥시 에스트렐라 갤러리 소속 아티스트다. 올 가을 문씨는 모교인 상명대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려고 20여 년 만에 귀국했다. ■조셉 칸(미국) | 뮤직비디오 감독‘마이너’의 시선으로 팝음악을 재해석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조셉 칸(36)은 언뜻 한국과 인연이 없는 이름이다.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A’로 시작하는 ‘안(Ahn)’씨 성 때문에 늘 첫 번째로 호명당하는 게 지겨워 성을 ‘칸(Kahn)’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 만화책과 TV, 영화에 푹 빠져 지냈던 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뮤직비디오 제작에 관심을 가졌다.그가 살던 동네 밴드들에 40달러씩 받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줬다. 호텔 접수처나 식품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며 뮤직비디오 제작비를 벌었다. 칸의 부모는 여느 한국 부모가 그렇듯이 그가 열심히 공부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길 바랐다. 하지만 칸은 뉴욕대 영화과에 진학한 지 1년 만에 자퇴한 뒤 곧바로 뮤직비디오 스튜디오를 열었다.그 후 2년간 연출, 촬영, 편집, 미술 등 1인 다(多)역을 소화하며 30여 편의 저예산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그러는 동안 독특한 영상 연출 기법을 시도해 주목할 만한 신예 감독으로 떠올랐다. 칸의 뮤직비디오들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화려한 색채감과 만화같이 빠르고 재기발랄한 연출이 특징이다.40달러짜리 뮤직비디오를 만들던 청년은 이제 150편 가까운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유명 감독으로 성장했다. U2, 브리트니 스피어스, 머라이어 캐리, 레이디 가가 등 세계 대중음악계의 스타들이 그를 선택했다. 상복도 쏟아졌다.브랜디&모니카의 ‘The Boy is Mine(1998)’과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2004)’으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 최우수 비디오상을 수상했고 에미넴의 ‘Without Me’로 2002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비디오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칸은 자신의 커리어가 어느 한순간 비약했다기보다 한 발씩 딛어가며 지금의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대중음악은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항상 남들이 하지 않은 신선한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단거리 경주라기보다는 마라톤이라고 봐야죠.” 칸이 말하는 자신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상당수의 유명 감독들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지만 저는 그 반대로 갑니다.”그는 가수 개개인의 작업 방식을 존중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다. “아티스트들이 저를 믿고 선택해줘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애씁니다.”함께 작업했던 가수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아일랜드 출신의 대형 록그룹 U2다. “그들이 뮤직비디오 콘셉트를 정하려고 저한테 U2 공연 투어에 동참해달라고 부탁했을 땐 온몸이 짜릿하더라고요.”칸은 스스로를 “문화적 스펀지”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처럼 여전히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감상한다는 말이다.그것이 급변하는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20년 가까이 장수하는 비결이 아닐까?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란 점도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대중문화를 좋아하지만 한번도 주류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었어요.” 물론 아시아인으로서 한계에 부닥친 적도 없지 않았다.“최근 한 대형 아티스트에게 뮤직비디오 연출을 거절당했어요. 제가 그와 ‘통하지’ 않을 거란 이유였죠. 예전보단 상황이 훨씬 나아졌지만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미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선입견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최대한 히트작을 내야 그런 현실을 이겨내겠죠?”한국은 그에게 매혹적인 나라다. 가끔씩 스스로 한국계라는 뿌리를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철저한 프로 정신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산물이라 여긴다. “부모님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수성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그가 말했다.2004년 ‘토크’라는 바이크 액션 영화로 할리우드에 데뷔한 칸은 현재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검토 중이다. 또 조만간 한국에서 한국말도 된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제작사들, 이 기사 보면 연락 주세요!”■클로이 조(싱가포르) | CNBC 앵커‘꼬마 코니 정’이란 격려가 나를 키웠다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클로이 조(37)는 미국의 경제 전문 케이블채널 CNBC의 유일한 한국인 앵커다. 세계 각국의 경제 현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CNBC는 지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CNBC의 시청자는 전 세계 4억 가구에 이른다. 클로이 조는 지난해부터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총괄하는 CNBC 싱가포르에서 일한다.클로이 조가 처음 언론계에 관심을 싹 틔운 계기는 뜻밖에도 초등학생 시절의 ‘별명’ 덕분이었다. “일곱 살에 미국에 건너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수업 시간에 제 발표를 들은 선생님과 아이들이 ‘꼬마 코니 정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칭찬 한마디가 내게 꿈을 심어줬어요(코니 정은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공중파 뉴스 앵커로 이름을 떨쳤다).”중학교 때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EBS의 어학 프로그램이나 공중파 TV 아침방송의 리포터로 일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96년부터 아리랑TV에서 일하다가 2004년 싱가포르의 채널 뉴스 아시아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해 CNBC로 스카우트됐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자신의 커리어를 글로벌 무대로 넓힐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누구보다 맹렬히 일에 매달리는 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늘 새로운 도전을 꿈꿨어요. 낯선 환경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더 ‘큰물’에서 일하고 싶은 갈증이 나를 이끌었습니다.”한국에서의 방송 경력도 큰 자양분이 됐다. “한국의 방송업계는 프로 정신이 강하고 규율이 바르다고 할까요? 그때 배웠던 엄격한 자기관리법이 큰 도움이 됐어요. 이 업계에서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으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거든요.”CNBC에서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새벽 5시 30분쯤 출근해 간밤에 일어난 미국과 아시아 경제 관련 뉴스를 정리한다. 가장 먼저 ‘스쿼크 아시아(Squawk Asia)’란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 시장 소식을 전한 뒤 2~3개 생방송 프로그램에 앵커나 기자로 투입된다. CNBC의 모바일 서비스에도 시장 동향 뉴스를 전달한다.특별한 업무나 인터뷰가 없으면 오후 2시쯤 퇴근한다. 곧바로 요가 학원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와 아시아 시장 마감과 유럽 시장 동향을 살피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국 시장 개장을 다시 확인한다.“과거에 제아무리 큰 특종을 보도했더라도 시청자들은 늘 현재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늘 긴장의 연속이죠. 또 뉴스 진행은 대본을 읽지 않고 실시간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라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하지만 기술 문제가 생기기 쉬운 해외 취재 생방송을 순조롭게 마치거나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때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한다. 취미로 하는 요가는 그녀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청량음료와 같다. 지난 3년간 섭씨 40도의 고온에서 하는 ‘비크람 요가’를 매일 해왔다. 일을 향한 그녀의 뜨거운 열정에 딱 어울리는 취미다. ■ 윤형(42, 미국) 오페라 가수(바리톤)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음대와 커티스음악원에서 오페라를 공부했다. 2004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한국인으로서 처음 주역을 맡았다. 뉴욕시티 오페라, 워싱턴 오페라,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등 모두 최초의 한인 바리톤으로 무대에 선 윤형 씨의 부친은 2007년 타계한 바리톤 윤치호 씨다.이기희(55, 미국)큐레이터오하이오주 센터빌에서 미국 중서부 최대 규모의 ‘윈드 파인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기희 씨는 현대미술품을 전문으로 판매하고 세계적인 작가 기획전을 유치한다. 미 주류사회에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딜러로도 활동 중이다. 또한 건축 디자인 컨설팅과 인테리어 디자인, 고급 가구 직판을 전문으로 하는 하이드렌지아 홈 퍼니싱도 운영한다.엘레나 리(38, 미국)CNN 아·태 본부장조지타운대에서 국제관계학을, 뉴욕대에서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마친 엘레나 리는 1997년 CNN에 입사했다. CNN 창사 이래 가장 빠른 승진으로 2007년 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프로듀서로 입사한 뒤 중국과 인도의 발전상을 심층 분석한 ‘아이 온 차이나(Eye on China)’ ‘아이 온 인디아(Eye on India)’등 기획 프로그램을 히트시켰다. 권정달·도영심 전 의원의 딸이다. 정의신(일본) | 극작가재일 한국인 이야기로 일본을 감동시키다도쿄=박 소 영 중앙일보 특파원10월 4일 오전 10시. 도쿄 기치조지(吉祥寺) 시어터 정문 앞에 한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주륜장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달려온 그는 “제가 정의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마땅한 인터뷰 장소를 찾지 못해 쩔쩔매는 기자를 이끌고 그가 간 곳은 근처 편의점. 캔커피를 사더니 극장 복도로 기자를 안내했다.요즘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로 꼽히는 정의신(52). 일본 연극계에서 크고 작은 상을 휩쓸면서 주목을 받는다.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재일동포 2세다. 기자가 추석선물로 준비한 송편을 받아 든 그는 “어린 시절 할매가 추석 때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가르쳐줬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보통의 재일동포 2세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15세 어린 나이로 일본에 혈혈단신 건너온 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이주한 어머니 사이에서 1957년 효고(兵庫)현 히메지(姬路)에서 태어났다. 전쟁 때 일본군 헌병으로 활동한 탓에 아버지는 해방 후에도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다.‘일본군 앞잡이’란 낙인을 각오하면서 한 차례 귀국길에 올랐지만 탔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일본 땅에 정착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히메지 성곽 주변의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곳에는 재일동포와 가난한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다.아버지는 고철과 폐품을 수집해 생계를 꾸렸다. 아들 5형제 중에서도 유독 정씨는 외할머니와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 어머니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할머니 집은 높은 언덕에 있었어요. 발 아래로 빈민가가 내려다보였고 근처 화장터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마시며 자랐습니다.”어린 시절 비록 가난했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웃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라서 재일한국인이라고 놀림 받는 일도 드물었다. 어려서부터 남을 웃기는 일을 좋아했던 넷째 아들 정씨의 집은 언제나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 성장과정 때문일까? 그가 무대에 올리는 대부분의 작품은 일상적인 내용이지만 그 속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유머가 녹아 들었다.그는 고교 시절부터 한국 이름 ‘정의신’을 썼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했던 시절, 주위 선배와 친구들은 그에게 “원래 네 이름을 찾으라”고 충고해줬다. 데이 요시노부(手井義信)라는 일본 이름과 영영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히로시마대 재학 중에 징병으로 군대에 끌려간 아버지는 대학을 마치지 못해선지 자식 교육에 각별했다.아버지는 늘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살려면 남에게 없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과 출신인 다른 형제들은 모두 의사, 치과의사, 약사가 됐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교토의 도지샤(同志社)대 문학부에 진학했다. 이후 영화사의 촬영소 조수로 영화 일을 시작한 그는 1983년 극단 ‘구로텐트’에 입단하면서부터 연극인의 길을 걸었다.1987년 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 뒤로 전속 작가로 활동했으며 1990년 ‘천년의 고독’을 시작으로 ‘더 데라야마(寺山)’ ‘인어전설’ 등으로 일본 연극계의 스타로 떠올랐다.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로 장르를 확대해, 1993년에는 현대 일본 사회를 택시운전사의 눈으로 바라본 ‘달은 어느 쪽으로 뜨는가’로 일본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했고, 마이니치(每日) 영화콩쿠르 각본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지난해엔 처음으로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을 그린 ‘야키니쿠 드래곤’을 한국과 일본 무대에 올렸다.이 작품은 오사카엑스포가 열린 1970년 전후 간사이지방의 재일동포 거리에 있었던 작은 불고기집 ‘야키니쿠 드래곤’을 무대로 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뒤편으로 떠밀린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을 진지하고 유머 넘치게 그렸다. 극본과 공동연출을 맡은 정씨는 “재일 한국인의 작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연일 만석을 이뤘다. 정씨는 이 작품으로 요미우리 연극상 대상과 최우수작품상, 우수연출상, 아사히무대예술상 그랑프리, 기노쿠니야 연극상, 쓰루야난보쿠 희곡상, 문화청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 등 일본에서만 7개의 상을 휩쓸었다.올 한해 중앙대 연극영화과 초빙교수로 활동하는 그는 11월에는 서울 대학로에서 새 연극 ‘바케레타’를 무대에 올린다. 그는 일본에서 김치와 야키니쿠(불고기), 호르몬(곱창)이 인기를 끄는 데 놀라워하는 눈치다. “데이트하는 젊은 커플들이 야키니쿠집에서 밥 위에 김치를 얹어 먹는 모습은 70~80년대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이라며 “한류 덕분 아니겠느냐”고 말했다.“어려서부터 한국인이라는 의식은 있지만 저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일본 교육을 받았어요. 한국을 ‘조국’이라고 절실히 느낀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인터뷰 말미에 기자는 그에게 좋아하는 음식과 가족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 간장게장 맛에 푹 빠졌어요. 얼마 전에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색시는 언제 얻을 거냐고 잔소리를 하더군요.” 50년 넘게 일본에서 살았지만 그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이민숙(34, 캐나다)다큐멘터리 감독1997년 불법입국 노동자의 암울한 삶을 날카롭게 파헤친 ‘국경을 넘어(Borderless)’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캐나다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핫 독스에서 ‘호그타운’이 2005년 베스트 캐네디언 다큐멘터리로 선정됐다. 릴아시안 국제 영화제에 소개된 ‘타이거 스피릿’은 남북분단과 탈북자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올 1월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됐다.백나라(20, 칠레)가수칠레에서 태어난 백나라는 2003년 14세 때 나라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3인조 남녀 혼성 일렉트로니카 밴드 ‘룰루잼’에 합류했으며 노래뿐만 아니라 독특한 외모와 패션으로 남미 청소년의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칠레의 MTV격인 VIAX의 생방송 버라이어티쇼 ‘블로그 TV’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신세대 만능 엔터테이너다.진위(46, 중국)화가베이징에서 활동하는 흑룡강성 출신의 화가 진위는 중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작품성을 인정 받는다. 대표 작품으로는 회색의 배경을 바탕으로 유리에 짓눌려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과 몸을 통해 현대인의 고달픔과 스트레스를 표현한 촉점 시리즈가 있다. 올 9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품전을 열었으며 현재 북경청년정치대학 예술계 부교수로 일한다.짐 리(미국) | 만화가미국 만화계의 ‘800만 부 사나이’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짐 리(45)는 미국 만화계에서 ‘800만 부의 사나이’로 통한다. 그는 1991년 마블코믹스의 인기만화 ‘엑스맨(X-Men)’의 두 번째 시리즈인 ‘엑스맨 넘버 원’의 일러스트레이터 겸 공동작가로 참여해 800만 부가 훌쩍 넘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미국 만화계에서도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다.마블코믹스의 전 대표이자 엑스맨의 원작자인 스탠 리는 직접 짐 리를 인터뷰한 방송에서 “만화책은 보통 한 권이 100만 부만 팔려도 빅 히트작으로 꼽는다. 800만 부 판매기록은 짐 리의 그림 한 장 한 장이 독자들을 흥분시켰다는 뜻”이라고 말했다.‘엑스맨’ 외에도 그는 ‘배트맨’이나 ‘슈퍼맨’ ‘판타스틱 4(Fantastic Four)’와 같이 미국을 대표하는 픽션 영웅들의 형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현대화하면서 업계와 팬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또 ‘와일드스톰’이라는 만화제작사를 설립해 많은 창작 만화를 발표하기도 했다.짐 리는 5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그림을 처음 배웠던 곳은 한국이다. “노란색 크레파스로 윤곽을 그린 다음 차차 짙은 색으로 색칠을 하라고 하셨던 미술선생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당시 한국에서 한창 인기리에 방영됐던 만화영화 ‘황금박쥐’와 ‘슈퍼맨’도 그의 뇌리에 각인됐다.“황금박쥐를 특히나 좋아했어요. 그래서 황금박쥐 껌도 정말 열심히 씹었죠.”어린 시절부터 짐 리는 만화를 유독 좋아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만화가가 되겠다고 꿈꿔본 적은 없었다. 리의 부모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 또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프린스턴대에 입학해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는 교양수업으로 듣던 회화 강의에 금세 마음을 뺏겼다.“뉴욕에서 활동하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강사였어요. 그들이 제 소질을 인정해주고 저도 몰랐던 제 꿈을 살려냈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 리는 ‘의사보다는 만화가로서 제 몫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곳이 바로 마블코믹스였다.리는 일러스트레이터일 뿐 아니라 작품의 줄거리를 구상하는 ‘플로터(plotter)’로 일하기도 한다. 등장인물의 세세한 대사까진 아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과 캐릭터를 만드는 역할이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를 묻자 “배트맨과 조커”를 꼽았다. “그들만큼 사랑을 많이 받는 캐릭터는 없을걸요.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되지만 한편으론 매우 닮았어요.”요즘 그는 젊은 만화가들과 창작 작업을 계속하면서 게임업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마블코믹스와 미국 만화계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DC코믹스의 게임을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다.“현재 DC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개발 중이에요. 오래전부터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에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스스로 재미있는 일을 한다.’ 짐 리의 성공 비결은 이 간단한 원칙에 있는 듯하다. ■박영희(독일) | 작곡가 유럽 현대음악에 한국 정서를 심다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박영희(64) 독일 브레멘 음대 교수는 ‘파안(琶案)’이란 예명을 쓴다. ‘책상에 놓인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인인 도올 김용옥 선생이 붙여줬다고 한다.평소 수양하는 마음으로 한음한음 곡을 쓴다는 그녀의 진중한 음악세계를 나타내는 말인 듯하다. 그녀가 주로 활동하는 유럽에선 ‘영희 팍-파안(Younghi Pagh-Paan)’이라는 이름을 쓴다.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박 교수는 유럽의 현대음악계에서 확실한 자기 영역을 구축한 작곡가다. 1974년 서울대 작곡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독일정부 학술교류재단의 장학생으로 유학 길에 오른 그녀는 음을 짜임새 있게 ‘건축’하는 이성적인 작곡법과 한국적 정서에 뿌리를 둔 작품세계로 명성을 쌓아왔다.1978년 ‘만남’이란 곡으로 스위스 보스윌 세계작곡제에서 1등을 수상한 이래 1980년에는 파리 유네스코 주최 작곡 콩쿠르와 독일 슈튜트가르트시 주최 작곡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았다. 또 작곡가들의 ‘꿈의 무대’라고 불리는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에 여성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초청돼 관현악곡 ‘소리’를 초연했고 1994년에는 유서 깊은 브레멘 음대에서 여성 최초로 주임교수에 발탁됐다.국내 음악평론가들은 그녀를 ‘제2의 윤이상’이라고 부를 정도다. 박 교수는 작곡을 “생각을 음으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작품들엔 유럽의 철학 사상, 중국의 노장 사상, 조선시대의 가사문학, 성경, 그리스·로마신화 등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제가 담겼다.어디서 그런 영감을 얻을까? “책이나 음악, 공연 등을 보면서 간접체험을 하다 보면 내 안에 어떤 생각이 싹트게 되고 그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한다”고 그녀가 말했다. “음악을 만날 때는 늘 ‘내면의 귀’로 음악 속의 생각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건축가가 ‘공간’에 자신의 생각을 담는다면 작곡가는 흐르는 ‘시간’ 속에 음악으로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실제로 그녀의 음악 세계는 건축가였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충북 청주가 고향인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같은 건축가를 꿈꿨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평소 시 낭송과 퉁소 불기를 즐기는 등 예술을 가까이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장터에 나가 민요와 판소리 같은 우리 소리를 만나기도 했다.한국의 전통문화에 그녀의 애정은 이런 경험에서 싹텄다. 그래서일까? ‘만남’ ‘소리’ ‘흰 눈’ 등 박 교수의 작품명은 대부분이 한국말이다. 영문 제목도 한국말의 음운 그대로 제목을 표기한다. 한국말이 아름답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녀의 음악에서 한국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제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제가 있었을까요? 한국문화 안에서 형성된 제 정체성을 여과 없이 표현하기 때문에 유럽무대에서 작곡가로 당당히 활동하는 거지요.”강의가 없는 날이면 박 교수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물며 곡을 쓴다. 1980년대부터 그녀는 줄곧 이탈리아에 보금자리를 꾸려왔다.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다. “이탈리아는 기후나 사람들의 기질이 한국과 매우 닮았어요. ‘유럽 속의 한국’이라고 할까…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이란 점도 제 고향과 꼭 빼닮았어요.”요즘 박 교수는 내년 9월 뮌헨 초연을 앞두고 ‘높고 깊은 빛’이라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이중주와 오케스트라 곡을 다듬고 있다. 한국의 두 번째 가톨릭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서한을 바탕으로 한 연극 음악도 구상한다. 세계 각지에서 공연과 음악제 심사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없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젊음을 선물한 듯하다. ■팀 강(미국) | 증권맨 출신의 근육질 배우 ‘미드’에서 아시아 편견을 뒤집다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얼마 전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미국 드라마에서 멋진 아시아 청년이 눈에 띄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혹시 한국인? 호기심에 알아봤더니 과연 팀 강(37, 한국명 강일아)이란 한국계 배우였다.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2008~2009 시즌 미국 드라마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한 ‘멘탈리스트’.영매사로 활동했던 주인공(사이먼 베이커)이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의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겪는 일을 다룬 범죄 드라마다. 극 중 팀 강은 주인공의 영적 능력을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수사에 매진하는 ‘킴벌 조’ 역을 맡았다. 기존의 범죄물에서 아시아계 역할과 달리 지적이면서도 근육질의 남성 캐릭터다.미 전역에 방송되는 이 드라마로 팀 강은 미국 안방 시청자들에게 눈 도장을 찍었다. 팀 강은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일보 기자였던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 앞에 서길 좋아했지만 연기자의 길은 우연히 다가왔다.버클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월스트리트의 한 증권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우연히 회사 근처에 초심자를 위한 연기 강좌를 들었다가 연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래서 하버드대 부설 연기학교(ART)에서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고 여러 ‘미드’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번듯한 직장 대신 신인 연기자의 길을 택했을 때 불안감은 없었을까? 그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출세작이 된 ‘멘탈리스트’는 “남들과 똑같이 오디션을 통과해서” 출연했다. 수차례에 걸쳐 캐스팅 디렉터와 감독, 드라마 제작사, 방송사 면접을 거친 뒤에야 출연 통지를 받았다.하지만 ‘멘탈리스트’가 이렇게 인기 가도를 달릴지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팀 강은 “요즘 확실히 전보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극 중 킴벌 조는 수사에만 집중하는 ‘진지 청년’이다. 실제 팀 강의 모습은 어떨까? “킴벌이 일에 워낙 집중하기 때문에 차가운 인상을 주기도 하지요. 저는 좀 더 활동적인 편이에요. 쉴 때는 스쿠버 다이빙이나 드라이브를 나가요. 그리고 킴벌과 달리 전 곧잘 웃는답니다! 하하.”■ 박서원(31, 미국)광고 디자이너단국대 경영학과를 자퇴한 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재학 중 광고회사 ‘빅앤트 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20~30대 초반의 다국적 젊은이 10명이 근무하는 작은 회사지만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반전 포스터로 올해 세계 5대 광고제에서 모두 12개의 상을 받았다. 총을 겨누는 병사의 총구가 기둥을 감고 돌아와 다시 자신을 겨누는 아이디어가 뛰어난 작품이다.마이클 김(45, 미국)ESPN 스포츠 해설자미국 미주리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미주리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4시간 스포츠 채널 방송 ESPNews에 1996년에 입사했으며 ‘핫 리스트(The Hot List)’와 ‘스포츠센터(SportsCenter)’에 출연한다. 1993년에 에미상 스포츠 보도부문을 수상했으며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일일프로에 출연하는 스포츠캐스터다.백주현(39, 미국)동화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파슨스 디자인 스쿨과 메릴랜드 미술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워싱턴 포스트, 볼티모어 선 등 유명 신문과 잡지에 삽화를 그린다. 지난해 유명 출판그룹 ‘펭귄’에서 출간된 백씨의 동화책 ‘Be Gentile With the Dog, Dear(국내에서는 지경사에서 ‘다정한 친구’라는 제목으로 출간)’는 2008년 여름 추천 도서로 선정돼 미국내 학교와 도서관 등에 대량 보급됐다.재니스 리(미국) | 소설가‘피아노 교사’로 동·서양을 잇다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소설 ‘피아노 교사(The Piano Teacher)’의 주인공 윌과 두 연인과의 관계를 거침없이 풀어나간 필력에 독자들은 매료된다.” -뉴욕 타임스“얽히고 왜곡된 러브 스토리와 전쟁을 다룬 서사시 이상이다.” -시카고 트리뷴“품위 있는 산문체와 뛰어난 공간 감각으로 완성된 소설… 2차 세계대전 무렵 겉으론 화려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공황과 부패가 만연했던 당시 홍콩의 모습을 재현한다.” -마이애미 헤럴드지난 1월 재니스 Y K 리(36, 한국명 이윤경)의 소설 ‘피아노 교사’는 세계 유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첫 작품이었는데도 ‘성공’ ‘베스트셀러’라는 묘사가 자연스레 어울렸다. 2007년 프랑크프루트 도서전에서 픽션 부문 우수작품으로 선정됐으며 세계 26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이미 14개국어로 출간됐기 때문이다.미국에서는 발매 2주만에 뉴욕타임스 소설 부문 11위, 홍콩에선 다이목스 서점 체인이 선정한 소설 부문 1위에 올랐다. 재미동포 작가 재니스 리는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미국으로 갔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한동안 ‘엘르’ 등 몇몇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에디터라는 직업이 불만족스럽진 않았다.하지만 에디터에 안주하면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작가의 꿈이 더 멀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 어느 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자신의 이름이 찍힌 소설을 꼭 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리씨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헌터대 대학원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하면서 재미소설가 이창래 씨를 만났다.“창작의 열정과 진지함을 그에게서 배웠어요.” 리씨의 정신적인 스승은 리씨의 처녀작을 이렇게 평했다. “‘피아노 교사’만큼 매력적이며 확실한 데뷔작을 내놓긴 쉽지 않다. 동·서양의 매혹적인 상호작용과 생생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독자들을 뇌쇄시킨다.”‘피아노 교사’의 시대적인 배경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940~50년대 홍콩. 영국인 윌이 이곳에서 유라시아 혼혈 여자와 영국 여자를 만나 전쟁 속에서 사랑하고 번민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이 소설을 두고 “시공을 초월해 가공의 세계를 마치 생생한 실제 상황처럼 느끼게 된다”고 찬사를 보냈다.문학은 작가의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피아노 교사’는 작가가 체험하지 못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삼았는데도 많은 평론가들은 “사실적”이라고 칭찬했다. 리씨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홍콩대 도서관에서 역사책과 오랫동안 씨름했다.홍콩에서 전쟁을 체험했던 영국인들이 쓴 전기와 소설들을 모조리 탐독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날짜는 실제 역사의 날짜와 모두 일치한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가의 의무는 이야기지 진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사실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주인공 세 사람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상상력’과 ‘사실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하다. 리씨는 2002년 작업을 시작해 5년 동안 ‘피아노 교사’에 매달렸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런 기쁨을 독자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는 리 씨는 지난 10월 말 서울에서 ‘피아노 교사(문학동네 펴냄)’의 한국어판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한국인의 외모 그리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리씨는 홍콩·영국·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들 사회에 진정으로 섞이기 어려웠던 그녀는 ‘피아노 교사’를 통해 그들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소설의 마지막 묘사처럼. “일단 저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그녀는 거리 풍경 안으로 녹아 들고. 거리의 리듬에 흡수돼 어렵지 않게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피터 손(미국) | 픽사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영화광 어머니가 내 창의력의 원천”뉴욕 = 정 보 라 프리랜서올해 상영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업(Up)’은 또 다른 이유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 제작에 한국인이 참여했으며 그 한국인의 어린 시절이 영화의 내용에 녹아 들었기 때문이다. ‘업’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인 피터 손(31, 한국명 손태윤) 얘기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주인공 꼬마 러셀이 손씨와 무척 닮은 듯하다.통통한 얼굴에 순박한 얼굴은 친근감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상당히 좋아했어요. 그 뒤로도 그림 그리기를 천직으로 생각했죠. 애니메이션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꿈의 세계였습니다.” 손씨는 ‘업’의 제작 과정에서 장면 장면마다 스토리 아이디어를 감독에게 제공했다.영화 ‘업’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칼과 경로 배지를 받으려고 거침없이 덤벼드는 사랑스런 꼬마 러셀의 모험담이다. “제작 초기 꼬마 러셀의 캐릭터는 조금 달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피트 닥터 감독이 내게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내가 자란 도시가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꼬치꼬치 물었어요. 내 유년기가 영화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제작기간 내내 나를 흥분시켰어요.”손씨는 뉴욕 브롱스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낮에 일하는 동안에는 두 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1970년대 미국에 이민 온 아버지는 과일과 야채 가게를 운영했으며 어머니는 간호사로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런 어머니가 애니메이션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손씨에게 만들어줬다.매주 금요일이면 어머니는 꼭 두 아들을 이끌고 영화 구경을 갔다. “어머니는 굉장한 영화광이었어요. 함께 영화를 보면서도 어머니는 모르는 영어가 나오면 어린 내게 무슨 뜻이냐고 묻곤 하셨어요. 그런데 디즈니 만화영화를 볼 땐 잠잠하시더라고요. 그 시절에 애니메이션이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장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애니메이션과 친해지면서 손씨의 그림 그리기는 더 이상 무료함을 달래는 시간 때우기가 아닌 꿈이 됐다. 그림의 재능도 뛰어났다. 일찌감치 아들의 능력을 알아본 부모님은 손씨가 고등학생에 입학한 뒤 아예 미술용품점을 열었다. 그 덕분에 애니메이션업계에서 일하는 한 고객을 알게 됐고 아들의 진로를 상의하기도 했다.“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 “학교는 어디가 좋은가” “장래는 밝은가” 등등.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대학교의 야간 수업을 들었다. 낮엔 고등학교에서, 밤에는 대학생과 함께 공부했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 입학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오랫동안 꿔왔던 꿈이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대학 2학년 때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 ‘아이런 자이언트(Iron Giant)’를 제작한 브래드 버드 감독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인비트위닝(inbetweening: 수석 애니메이터들을 돕는 일종의 어시스턴트)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버드와의 만남으로 손씨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도 인연을 맺었다. 버드가 픽사와 손잡고 만든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The Incredibles)’에서 그는 스토리보드와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다.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에서는 스케치 아티스트로 참여해 디자인과 테크니컬 드로잉을 맡았다.‘라따뚜이(Ratatouille)’에선 성우로 에밀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런 과정에서 단편영화 ‘파틀리 클라우디(Partly Cloudy)’를 직접 제작해보기도 했다. 손씨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의 마술은 그의 가족을 넘어서 전 세계인을 감동시킨다. 그 스토리의 원천이 마르지 않도록 그는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배운다”고 말했다.‘업’에서 할머니 엘리가 남편인 칼에게 남겼던 ‘새로운 모험을 지금 시작하라(Now go have a new one)’는 글처럼 또 다른 작품을 통해 손씨의 모험은 시작된다. ■이규정(이집트) | 코리아TV 사장 중동 사막에 한류 열풍을 일으키다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요즘 한류는 식어가는 듯하지만 사업가에게는 여전히 좋은 사냥감이다. ‘코리아TV’의 이규정(49) 사장은 좋은 사냥감을 중동에서 찾았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이집트에서 이 사장은 한류 태동의 첫 전파를 끊었다.위성 채널 방송 코리아TV는 지난 5월 이집트 국영 위성인 나일샛의 주파수 10719MHz(v)를 통해 방송을 시작했다. 한 달에 60~70개의 드라마,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 등을 방영한다.나일샛과의 계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장은 지난해 7월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개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의 허가가 생각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이 사장은 이집트 투자부 공무원에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고 말았다.그러나 곧 후회했다. 자신의 입장만 생각한 항의가 문화를 파는 사람의 행동으론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현지의 질서와 문화에 반하는 행동이 장기적으로 사업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뒤 이슬람 문화를 익히고 존중하면서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14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허가를 받았다.그런데 왜 그는 중동을 선택했을까? 이 사장은 “나의 자산은 돈이 아니라 언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첫째, 외국어 전문 제작 프로덕션을 운영했던 경험이 그에게 자신감을, 그리고 아리랑 TV에서 일했던 경험이 방송 진출에 힘을 더해 주었다. 둘째, 중동은 아시아처럼 국가별로 고유 언어를 쓰지 않고 아랍어로 통일돼 있기 때문에 사업 영역이 아무런 장애 없이 넓어진다.무려 44개국 5억 명의 잠재 시청자를 둔 거대한 시장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부국인 데다 지상파 방송은 국가 홍보에 치중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위성방송이 현지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있으리라는 판단도 주요했다. 중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이집트의 소비시장은 한류 방송의 발판을 다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점이었다.전 주한 이집트 대사 레다 엘 타이피는 한국·이집트 간 경제·문화 교류가 아직 활발하지는 않지만 코리아TV를 계기로 확대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가 역사적이고 로맨틱한 점이 이집트 드라마와 많이 흡사하다”며 ‘겨울연가’ 팬이라고 밝혔다.내년에는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할 계획도 있다. 이집트 현지 대학생들이 직접 창업 아이템을 선정, 돈 버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리얼리티 쇼다. 또 현지 중고생을 대상으로 중동판 장학퀴즈도 제작할 예정이며. 그리고 한국 드라마를 힌두어로도 번역해 인도 전역에 송출할 예정이다. ■이말용(58, 일본)유리공예가재일동포 2세인 이말용씨는 도자기 장인의 길을 포기하고 오사카와 나고야의 유리공장에서 견습기간을 거쳐 1976년 세토시에서 자신의 공방을 차렸다. 1988년에는 2년 동안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현재 아이치현 현립 예술대에서 유리공예 강사로 일한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 연간 6억 원 정도의 공예품이 팔려나간다.김영성(45, 프랑스)샤넬 원단구매 책임자부산대 불문과를 나와 프랑스에서 미술과 패션을 배운 뒤 1998년 샤넬에 입사한 김영성 씨는 샤넬 본사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샤넬에서 만드는 의류 등의 시즌 콘셉트와 색상 그리고 트렌드를 결정하는 일을 한다. 지난해 대구국제섬유박람회에 참석해 샤넬이 한국 원단을 구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그 이유로 샘플 제작의 무성의 등을 들었다.존 조(37, 미국)배우여섯 살 때 미국 내시빌로 이민을 갔다. 대학 시절 연극 출연을 계기로 배우가 됐다. ‘아메리칸 파이’ 1편에서 처음 얼굴을 알렸고 주연으로 출연한 ‘해럴드와 쿠마‘란 공전의 히트작으로 유명세를 탔다. 최근 ’스타트랙: 더 비기닝’에 주연급으로 출연했다. 언론을 통해 한국 진출 의사도 밝혔다.

2009.11.03 16:30

25분 소요
[Seoul Serenade] ‘시골 밥상’ 예찬

산업 일반

최근 한 소규모 한식당 체인이 영어교사, 전문직, 군인 등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을 초청한 ‘포커스 그룹’ 모임 개최를 도왔다. 해외 진출을 꿈꾸는 이 식당이 외국인들의 입맛을 미리 파악해볼 요량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한국 정부도 한식을 세계화해 2017년까지 세계 5대 음식으로 만들겠다는 희망찬 계획을 세웠다.우선 그런 순위는 어떻게 매기는지 궁금하다. 또 한국 정부가 말하는 ‘한류’식 접근법이 일반적인 ‘외국인’ 상에 꿰맞춘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외국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일방적인 문화 소통은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는 전국 방방곡곡마다 지방의 색깔이 그대로 살아있는 훌륭한 ‘시골 밥상’이 있다.현지를 찾은 외국인 방문객들이 저마다 감탄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한식의 세계화’ 관계자들은 한식을 자꾸 ‘고급스럽게’만 포장하려 한다. “한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십억원을 들여 떡볶이의 영문명(‘Ddokbokki’)을 일본식 발음의 ‘toboki’로 바꾸려 하는 일이다.이렇게 이름을 바꾼다고 외국인들이 서울 신당동의 떡볶이 거리로 몰려들까? 한식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소박한 한식 밥상을 자랑스러워 하기보다 ‘럭셔리’한 외양을 더 중시하는 듯한 풍조는 얼마 전 열린 ‘한식 세계화 2009’ 심포지엄에서도 눈에 띄었다.그 심포지엄에서는 한식을 전파할 때 각국 시장의 수요와 입맛에 맞추는 ‘현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견이 강조됐다. 하지만 주최 측 의사결정자들은 결국 궁중 요리를 주요 메뉴로 내세우기를 고집했다. 글로벌 불황으로 전 세계 소비자가 지갑을 닫은 요즘, 굳이 값비싼 고급 요리로 한식을 홍보할 필요가 있을까?2년 전 나는 뉴욕타임스 기자의 부탁으로 서울의 식도락 세계를 안내한 적이 있다. 그때 찾아갔던 한 식당이 한식을 ‘파인 다이닝(최고급 재료와 조리법을 사용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해석한 곳이었다. 그 식당의 주인은 한식 세계화를 고급 음식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그가 차려서 내온 요리는 과연 아름다웠지만 가격이 너무나 비싼 데다가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았다. 기자와 나는 한식 자체보다 ‘파인 다이닝’에 주력한 그 식당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 그날 말고도 외국에서 온 주방장, 요리 전문가, 언론인들을 데리고 한식 체험을 여러 차례 해보았지만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고급스럽고 정갈하게 꾸민 한식보다는 시골 어딘가에서 만난 서민 음식을 선호했다.얼마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음식 여행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앤드루 지먼이 방한했을 때도 그랬다. 산낙지부터 파인 다이닝까지 온갖 한식을 두루 섭렵했던 그가 과연 어디를 최고 식당으로 꼽았을까? 그곳은 서울 마포 거리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허름한 삼겹살 식당이다. 외형은 초라하지만 좋은 품질의 삼겹살과 김치를 숯불에 구운 맛이 일품이라고 그가 말했다.그런 경험을 하면서 내 머리 속에 이런 생각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시골음식에 비교할 만한 동아시아의 음식이 없는데 한식이 그 공백을 채우게 되지 않을까?’ 투박하지만 푸짐하고 다채로운 맛에다 영양마저 듬뿍 담긴 한국의 서민 음식 말이다. 그게 바로 한식이 세계에서 공략해야 할 틈새 시장이라고 감히 나는 주장한다.보통 정부 고위 관료나 기업인들의 타깃은 다른 나라의 고위 관료나 기업인들이다. 이런 ‘양반 대 양반’의 접근법으로 한식의 세계화를 추진한다면 분명한 한계가 있다. 최근 해외에서 화제가 된 한식의 사례를 봐도 그 대부분은 역시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경우다.미국 시애틀의 줄리아 양이 운영하는 ‘줄’이라는 식당이나 캘리포니아의 트럭에서 판매하는 갈비 타코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 정부가 한식의 적극적인 해외 마케팅을 원한다면 외국인들의 의견부터 경청하길 바란다. 또 한식이라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 아무런 포장이나 꾸밈이 없어도 ‘아시아의 프로방스(프랑스 남부 지방)’로서 본래의 매력을 발산하게 되리란 사실을 유념하길 바란다.

2009.09.01 15:20

3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