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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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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유독 싸게 팔던 볼보...4000만원대 전기차로 판 흔들까

산업 일반

스웨덴 프리미엄 브랜드 볼보자동차가 새로운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국내 공개한다. 최근 국내 전기차 시장이 역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가성비’(가격 대비 우수한 성능)를 앞세워 시장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출시 전부터 상품성 인정받은 전기 SUV27일 업계에 따르면 볼보자동차코리아는 오는 28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프리미엄 순수 전기 SUV 볼보 EX30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당일 사전계약에 돌입하며, 내년 상반기 중 고객 인도를 진행할 예정이다.이날 현장에는 요아킴 헤르만손 EX30 상품 개발 리더와 티 존 메이어 글로벌 익스테리어 디자인 총괄이 내한해 지원사격에 나선다.볼보의 새로운 전기 SUV인 EX30은 도심 주행은 물론 주말 장거리 여행까지 지원하는 후륜 기반 싱글 모터 익스텐디드 레인지 단일 파워트레인으로 국내 출시된다. 높은 에너지 효율을 위해 설계된 69.0kWh 용량의 니켈망간코발트(NMC) 배터리를 조합한 구성으로 1회 충전 시 최대 475km(유럽(WLTP) 기준)까지 주행 가능하다. 국내는 유럽보다 더 보수적이다. EX30의 1회 충전 시 최대 주행거리(국내 기준)는 최소 300km 후반. 최대 400km 초반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크기는 현재 국내 판매 중인 전기 SUV XC40 리차지, C40 리차지보다 한 체급 작다. EX30은 전장(길이) 4233mm, 전고(높이) 1549mm, 전폭(너비) 1837mm, 축거(앞뒤 차축간 거리) 2650mm 크기의 콤팩트 SUV다.EX30의 특징은 ▲전기화 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패밀리룩 ▲혁신적인 공간 설계 및 스마트 수납 기술 ▲도시 안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안전한 공간 기술’ ▲혁신적인 사용자 경험을 선보이는 첨단 커넥티비티 등이다.상품성은 이미 글로벌 무대에서 인정받았다. EX30은 출시 전부터 영국 일간지 ‘더 썬’(The Sun)이 선정한 ‘올해의 자동차’에 이름을 올렸다. ‘뉴스 UK 모터 어워즈’(News UK Motor Awards)의 ‘올해의 소형 SUV/크로스오버’에도 포함됐다. 침체된 전기차 시장서 가성비로 승부수볼보자동차는 국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매우 높은 브랜드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볼보자동차는 올해 1~10월 누적 기준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1만3770대의 신차를 판매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37.7%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전체 수입차 시장이 전년 동기 대비 2.9% 감소했음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볼보자동차의 국내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공급 물량보다 수요가 훨씬 많아서다. 볼보자동차 딜러사에 따르면 XC60 등 주력 모델의 계약 후 대기 기간은 여전히 1년 이상이다. 물량만 있으면 순식간에 완판된다. 볼보자동차코리아가 최근 출시한 S60 다크 에디션은 온라인 예약 시작 9분 만에 완판됐다. 이에 앞서 판매된 XC40 세이지 그린 에디션은 3분 만에 완판되는 진기록을 세웠다.그럼에도 EX30의 성공 여부는 쉽사리 장담할 수 없다. 최근 국내 전기차 시장이 역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1~10월 누적 기준 국내 전기차 신규 등록 대수는 13만3056대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0.3% 감소한 수치다.볼보자동차코리아도 이 같은 시장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가성비 전략으로 승부수를 띄우려는 모습이다. 출시 전부터 EX30의 가격을 전기차 보조금 100% 구간에 맞추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최소 5700만원 미만으로 가격이 책정된다는 얘기다.현재 업계에서 주목하는 것은 EX30이 국산차와 경쟁 가능한 가격대로 출시될 것인지 여부다. 그동안 볼보자동차코리아가 미국 등 해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신차를 판매해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볼보자동차의 순수 전기 SUV C40 리차지의 출시 당시 가격은 6319만원이었다. 이는 미국 판매 가격보다 약 890만원 저렴한 것이다.현재 EX30의 미국 판매 가격은 싱글 모터 기준 최소 3만4950달러(약 4560만원)부터 시작한다. 가장 높은 트림의 가격도 4만600달러(약 5300만원)부터다. 이는 국산 전기차인 현대자동차 아이오닉 5, KG모빌리티 토레스 EVX 등과 유사한 가격이다.업계 관계자는 “볼보자동차코리아는 그동안 해외보다 더 저렴한 국내 가격 정책을 강조해왔다”면서 “이로 인해 EX30 가격에 대한 업계 및 소비자들의 기대감이 더욱 높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2023.11.27 17:00

3분 소요
“그때 그 큼지막한 ‘화장품 파우치 가방’”...화장품 브랜드숍 ‘바비펫’ [망했어요]

유통

‘여성들의 매력 넘치는 모습을 일러스트로 넣은 화장품 파우치 가방.’ 이를 떠올리면 누군가는 ‘아하’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추억 속 아이템’이라 외칠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 10·20세대들 사이에서 누구나 한 개쯤 가진 ‘핫템’ 파우치 가방으로 유명세를 탔던 화장품 브랜드숍 ‘바비펫’이 있었다. 이 파우치를 들고 다니지 않고는 ‘인싸(인사이더의 요즘 말)’가 되기 힘들 정도였다.‘바비펫’은 2009년 데레온코스메틱이 론칭한 국내 뷰티 브랜드다. 서울 명동에 첫 매장을 오픈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에게 귀여움, 자유스러움, 그리고 재미를 줄 수 있는 ‘보태니컬 & E.G.F 프로젝트’를 목표로, 겉으로 보는 아름다움이 아닌 신체 내·외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제안하기 위해 자연 성분을 중심으로 한 화장품에 무게 중심을 두며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단순한 메이크업 브랜드가 아닌 과학적인 기술에 친환경적인 원료를 사용해 ‘즐거운 경험’을 선물하는 브랜드로 만들어 나간다는 게 회사 측의 대표 슬로건이었다. 여기에 세계적 톱모델을 기용해 해외에서 동시 출점하는 등 기존의 브랜드숍과 차별화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여기에 인터넷에서 이른바 '티벳궁녀'로 유명세를 탔던 단역배우 최나경 씨와 가수 FT아일랜드를 모델로 발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무엇보다 바비펫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화장품 파우치 가방과 아이섀도 등 특이한 제품들 덕분이었다. 바비펫은 다양한 화장품을 담을 수 있는 큼지막한 화장품 파우치 가방 외에도 젤 아이라이너, 듀얼 아이섀도로 ‘코덕(코스메틱과 덕후의 합성어)’들에게 유명세를 탔다. ‘싸게 더 싸게’ 시장 포화에 판매 마진까지 ‘뚝’ 하지만 브랜드숍 시장 자체가 포화상태에 이른 데다, 치열한 ‘가격 할인 경쟁’이 바비펫에겐 치명타가 됐다. 당시 뷰티 시장은 화장품 브랜드숍들은 소비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일에 나서기 시작하던 때이다. 자영업자가 다양한 화장품 기업의 브랜드를 한 곳에 모아 놓고 팔던 종합화장품전문점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브랜드숍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그야말로 시장 포화 상태였다. 여기에 경쟁적으로 세일에 나서면서 가격 신뢰도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브랜드숍들은 대부분 밀집된 경우가 많아 특정 브랜드숍에서 세일을 하게 되면 세일을 하지 않는 다른 브랜드숍들은 당장 영업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브랜드숍 화장품의 경우 중저가가 대부분이다 보니 고가의 화장품 브랜드보다 고객들의 신뢰 확보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일까지 해버리면 ‘저렇게 싸게 팔아도 남을 정도면 대체 원가는 얼마냐’는 생각하는 고객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비펫의 경우 론칭 직후부터 31% 세일에 들어가 세일을 지속했다. ‘바비펫’은 결국 직원들 월급이 밀리는 등 자금 사정 악화로 브랜드 폐업 상태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아직 일부 제품들은 온라인서 판매되고 있다. 뷰티업계 한 관계자는 “화장품 브랜드숍의 핵심적인 특징은 전략적 중요성”이라며 “이성보다는 감성이 중시되며 소비자와의 관계 지향적인 방향으로 시장이 형성돼 소비자와 가장 직접적인 접촉점이 되는 선에서 화장품 구매 이상의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처음에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며 “그만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결국 소비자 욕구에 얼마나 발 빠르게 부응하느냐에 따라 대부분 승패가 갈린다”라고 지적했다.

2023.08.12 07:00

3분 소요

자동차

수입차 대중화를 내걸고 공격적인 프로모션 정책을 펼쳐온 폭스바겐그룹 폭스바겐 부문(이하 폭스바겐코리아)이 달라졌다. 이달 말 출고를 시작하는 티구안 올스페이스의 최대 할인율은 1.5%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9일 업계에 따르면 폭스바겐의 국내 딜러사들은 최근 사전계약에 들어간 티구안 올스페이스의 3분기 프로모션 정보를 예비 고객들에게 공유했다. 오는 23일 공식 출시와 함께 출고가 시작되는 티구안 올스페이스의 판매 가격(개소세 인하분 3.5% 적용, 부가세 포함)은 5098만6000원이다. 구매 방식에 따른 할인율은 현금 0%, 폭스바겐 파이낸셜 1.5%(77만8500원)다. '수입차 대중화'라는 전략 하에 공격적인 할인 혜택을 제공했던 과거의 모습이 사라진 모습이다. 디젤게이트(배출가스 조작) 사태 이후 국내 시장에 복귀한 폭스바겐코리아는 주력 모델에 10~15% 내외의 할인율을 적용해왔다. 폭스바겐의 한 딜러사 관계자는 "반도체 부족 문제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수입차뿐 아니라 국산차의 가격이 상승하는 상황"이라며 "수입차 대중화를 줄곧 외쳐왔는데, 예전처럼 높은 할인 혜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티구안 올스페이스는 2017년 출시 후 글로벌 시장에서 150만대 이상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링 모델이다. 국내 시장에서도 티구안의 첫 가솔린 엔진 탑재 모델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3열 시트가 탑재된 7인승 티구안 올스페이스의 최대 장점은 다양한 공간 활용성이다. 트렁크 용량은 기본 230L, 3열 폴딩 시 700L다. 2열과 3열을 모두 폴딩하면 1775L까지 늘어난다. 성능은 무난한 편이다. 2.0 TSI 가솔린 직분사 터보차저 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가 조합돼 186마력의 최고출력, 30.6 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한다. 폭스바겐코리아 관계자는 "티구안 올스페이스 프로모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공식 행사 시 공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지완 기자 anew@edaily.co.kr

2022.08.09 11:40

2분 소요
[이케아 제국의 창업자 故 잉그바르 캄프라드] 볼품 없는 학력에도 혁신경영 역사 쓰다

산업 일반

DIY 가구, 고객과 소통하는 전시장 등 소비자 제일주의 기치 내세워 성공 조립식 가구를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유통 업체인 이케아(IKEA, 영어권에서는 아이케아로 읽음) 창립자인 잉그바르 캄프라드 고문이 1월 27일 91세로 별세했다. 이케아에 따르면 캄프라드는 이날 고향인 스웨덴 남부 스몰란드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캄프라드는 1926년 스웨덴의 스몰란드에서 태어나 17세인 1943년에 유통 업체인 이케아를 창업했다. AFP통신은 2017년 기준 캄프라드의 재산이 373억 유로(약 48조5000억원)에 이른다고 스위스의 경제 전문지 ‘빌란’을 인용해 보도했다. 캄프라드는 1956년 각 부분과 부품으로 나눠 납작한 상자에 넣어 파는 자가 조립용 가구를 개발해 성공의 기회를 잡았다.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도 애도 성명에서 “캄프라드 고문은 스웨덴 경제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특별한 인물”이라며 “세계 많은 사람이 집에 가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평가했다. ━ 스웨덴 총리 “많은 사람이 집에 가구 둘 수 있도록 했다” 이케아를 가구 업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가구는 주축일 뿐 다양한 인테리어상품·생활용품 등 1만2000종의 상품을 취급하는 종합 유통 업체다. 이케아는 현재 세계 49개 시장(대만을 국가로 표현하는 기업에 각종 보복을 가하는 중국 등 때문에 ‘국가’ 대신 ‘시장’이라는 용어를 쓴다)에서 412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도 광명과 고양에 매장을 열고 있다. 지난해 세계에서 10억 명이 넘는 고객이 이케아 매장을 방문했다.1943년 17세의 캄프라드는 실업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7월 28일 상업등기소에 ‘이케아’라는 이름으로 사업체를 등록했다. 자신의 이름인 잉그바르 캄프라드의 이니셜인 I, K와 그가 태어난 엘름타리드 농장의 이니셜인 E, 고향 마을인 아군나리드의 이니셜인 A를 합쳐 이케아(IKEA)로 회사 이름을 지었다. 창업자의 이름과 고향 이니셜을 합성해 기업명을 지은 것이다. 실업학교를 마친 캄프라드는 대도시 예테보리에 있는 2년 과정의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이케아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시계·스타킹·넥타이·양말 등 잡화를 우편 판매하는 업체로 시작해 취급 상품을 넓혀갔다. 본사는 아버지의 집이었고, 고향 마을과 그가 학교에 다니던 예테보리가 그의 활동 구역이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캄프라드는 사회 경험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근처인 벡시외에 있는 삼림소유자협회 사무소에 취직했다. 캄프라드는 이곳에서 ‘투잡’ 생활을 했다. 협회 사무실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으면서 회사 간부들을 상대로는 개인 장사를 했다. 간부들에게 고가의 시계를 팔기도 하고, 협회에서 사용하는 사무용품을 기존 거래처보다 더 싼값에 공급하기도 했다. 벡시외 지역의 남품업자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하고 가장 싼 값에 공급해주겠다는 업자를 찾아낸 덕분이다. 캄프라드가 이렇게 번 돈이 월급보다 많았다. ━ 세계 49개 시장에서 412개 매장 운영 1947년 캄프라드는 군에 입대해 2년 간 의무 복무를 했다.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1948년 장교 시험에 합격해 장교로 전역해 예비역에 편입됐다. 열심히 군복무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군 복무 중 개인적으로 통신판매 사업을 했다. 상관으로부터 근무가 끝난 후에는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물건을 구입해 이를 게재한 카탈로그를 돌리고 주문을 받으면 우편으로 보내주는 사업이었다. 주택가 지하실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는 동료들이 술 마시러 갈 때는 끼는 법이 없었으며 대신 지하실에서 사업에 몰두했다.제대한 캄프라드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가며 고향 집의 창고에서 통신판매 일을 계속했다. 사무용품에 더해 화장품, 넥타이, 바늘과 실 등 일상용품까지 팔던 그는 2차 대전 이후 유럽을 뒤흔든 스타일리시한 상품인 나일론 스타킹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시론 첨단 상품이다. 여러 가지 축하카드·만년필·지갑 등도 취급했으며 값싼 액자는 물론 시계·장신구·벽장식품으로 취급 품목을 늘려갔다. 익숙한 곳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승부를 건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문을 받고 제품을 포장하는 일을 도왔으며 난독증으로 장부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캄프라드를 대신해 회계 일도 해줬다. 가족경영이었다. 농장이 곧 물류창고였고, 농장에서 우유를 받아 역까지 오가는 트럭이 배송차량이었다.사업이 번창하면서 일손이 더 필요했던 캄프라드는 기나긴 면접 끝에 1952년 스벤예테 한손이라는 직원을 채용했다. 한손은 엘름타리드 농장으로 이사해 캄프라드와 생활을 함께했다. 그러면서 이케아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두 가지 결정을 했다. 첫째, 취급 제품을 가구와 생활용품으로 단순화하기로 했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세운 것이다. 경쟁이 심하고 이익이 박했던 사무용품은 정리했다. 그가 가구 사업에 집중한 이유는 바로 스웨덴 사회의 변화 때문이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주택 100만 가구 건설을 추진했다. 주택 건설 붐은 가구 판매를 늘릴 절호의 기회였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에 맞춘 아이템이라면 수요가 크고 안정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 캄프라드는 가구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둘째, 제품 전시장을 세우기로 했다. 우편 주문자들에게 제품을 실제로 보여 신뢰를 얻는 게 목적이었다. 고객이 눈으로 보고 믿고 구입하게 한다는 이케아의 전략은 이때부터 나왔다. 그래서 1953년 3월 8일 가구 전시장을 열었다. 고객들이 방문하기 쉽도록 기차역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캄프라드의 외가가 있는 엘름홀트의 제재소를 개조해서 세웠다. 이날은 이케아가 새롭게 재탄생한 날이다. 개장식을 하던 날, 1000명이 넘는 고객이 몰려들었다. 캄프라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었던 것이다. 상품을 직접 보고 구매하겠다는 욕구다. 고객의 욕구는 바뀌는데, 당시 유통 업자들은 여전히 공급자 위주의 사고와 행동에 머무르고 있었다.1950년대는 캄프라드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스웨덴 경제는 고속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던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국가와 달리 산업시설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스웨덴은 커다란 반사이익을 얻었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공장의 일부를 군수물자 생산으로 돌리면서 생긴 공백을 차지한 것이다. 급속한 경제 발전은 도시화를 촉진했고, 이는 주택난을 불렀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 주택 공급정책을 폈다. 이는 1946년부터 스웨덴을 이끈 사회민주당의 타예 에를란데르 총리가 주도한 국가 개조작업의 일부였다. 그 목적은 스웨덴을 복지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의료보험과 연금제도에 육아보조금은 물론, 주거보조금까지 정부가 국민에게 지급하는 스웨덴식 복지제도를 만든 것이다. 처음 ‘국민의 가정’이던 정부 구호는 곧 ‘사회의 가정’으로 확대됐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는 수준을 넘어 스웨덴을 하나의 거대한 사회공동체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특히 산업화한 도시지역으로 대규모 이동한 농촌 인구는 정부가 마련한 자그마한 새 주택에 입주했다. 문제는 그 집을 채울 가구였다. 기존의 가구는 새로 지어진 작은 집에는 지나치게 컸다. 그리고 그들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캄프라드는 이런 변화를 읽고 가구사업에 집중한 것이다. 기회는 발견하는 사람들에게만 가치가 있다. 스웨덴의 사회 변화 속에 그는 창의적이고 신용을 지키는 상인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 가구사업의 패러다임 바꿔 캄프라드는 가구를 중심으로 제품 전시장을 열기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다른 가구점을 살폈다. 그가 살펴본 다른 가구점은 소비자의 요구를 제대로 맞춰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 가구 업계는 고비용 고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구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거대한 가구점에 전시하고 있다가 고객이 주문하면 커다란 트럭을 동원해 비싼 배달비까지 받고 집에 가져가서 설치해주는 식이었다. 가구를 완제품으로 만드는 비용은 기본이었다. 이를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 그리고 전시에 필요한 넓은 매장에 대한 부동산 비용도 추가로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커다란 가구를 운반하려면 별도의 배달 트럭을 불러야 했다. 자가용 승용차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가구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가구 업계는 소량 판매로도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가구의 값을 더욱 높여 팔았다. 당시 스웨덴에서 가구는 고가 상품으로 분류됐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과 돈이 많은 사람은 필요한 가구를 고루 구입할 수 있었지만, 새롭게 독립하는 젊은 사람은 힘들게 가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결혼을 하는 젊은이들은 가구 마련에 드는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스웨덴의 젊은 부부들은 정부 정책 덕분에 집은 얻었어도 집을 채울 가구는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가구 업계는 소량 고가 판매로 적절한 이윤은 남겼지만, 새로 집을 얻은 젊은 부부를 위한 거대한 시장을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 방식에 안주했기 때문에 사회 변화라는 거대한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캄프라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러곤 공백으로 방치됐던 이 거대한 시장에 주목했다. 중저가로 적절한 품질을 유지하는 제품의 시장 말이다. 이러한 고객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고자 캄프라드는 원가를 낮춰 좀 더 싼 값에 가구를 파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적의 약점을 나의 장점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캄프라드는 자신이 차린 가구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독특한 영업 전략을 세웠다. 우선, 손님들이 가게에 와서 마음껏 가구를 만지고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쓸 가구를 찬찬히 살펴보고 골라가게 한 것이다. 물론 가구라는 고가 상품을 사려면 와서 열어보고 두드려 본 다음에 사는 건 기본이었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이를 넘어섰다. 손님들이 아예 두고두고 가구를 구경하며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쉬어가는 공간으로 자신의 점포를 내준 것이다. 이를 위해 손님들에게 차는 물론 식사까지 제공했다. 차는 말린 야생화 엑기스를 꿀에 절인 스웨덴 전통차를 주로 제공했다. 이 차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작용이 일부 있었다. 캄프라드의 가구점은 동네 사랑방이 됐다. 손님이 와서 주인과 대화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매장을 주인과 점원들이 물건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와서 물건을 생각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가구점을 단순하게 가구를 사고파는 공간이 아닌, 가서 쉬면서 상품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은 의외의 성과를 가져왔다. 캄프라드는 소비자들의 불만과 바라는 점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비자는 보다 싼 제품을 원했다. 하지만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랐다.품질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가격을 낮출 수 있을까. 캄프라드는 이 문제를 풀었다. 해답을 얻고 거대한 시장을 차지했다. 해결책의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나왔다. 그것은 고객이 스스로 조립하는 DIY(do it-yourself) 가구였다. 조립 전 가구를 분해해 납작하게 포장해 공간과 물류 비용을 줄였다. 분해한 가구는 납작한 박스에 담을 수 있었다. 고객들은 이 박스를 승용차에 싣고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창고 비용과 운송비용, 매장 면적이 줄어든 덕에 제품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있었다. 이는 혁신을 넘어 혁명에 가까웠다. 오늘날 이케아의 대명사가 된 DIY 가구 아이디어는 캄프라드가 가구점을 차리고 동네 사랑방으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왔다. 캄프라드는 점포를 개업한 바로 그해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았다. 실마리는 그의 새 직원이 제공했다.그는 길리스 룬드그렌이라는 이름의 디자이너였다. 룬드그렌은 캄프라드가 구상을 말로 전하면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이케아의 혁신에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했다. 어느 날 이케아에 납품하는 가구공장에서 받아온 제품 사진을 찍던 그는 촬영 후 대형 탁자를 통째로 다시 박스에 넣으려고 끙끙거리다 해결책을 발견했다. “다리를 각각 떼어내고 그것을 바닥에 담으면 되잖아. 이것 좀 도와줘.” 룬드그렌은 탁자의 다리를 몸체에서 떼어내는 등 구성물을 서로 분리해 납작한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박스 안에 몸체를 넣고 그 위에 분리했던 다리를 눕혀서 얹었다. 그랬더니 다리와 몸체가 분리된 가구는 쉽게 박스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원래 통통한 주사위 모양이던 포장 박스가 납작하게 되면서 가구 포장의 부피가 크게 줄었다. 곁에서 가구를 분해해 상자에 담는 것을 도와주던 캄프라드는 무릎을 쳤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캄프라드의 ‘유레카’였다. ━ 품질을 유지하되 가격은 더 낮춰 캄프라드는 처음에는 이러한 조립형 포장 가구가 파손도 줄일 수 있다는 점에만 주목했다. 부분으로 나뉜 가구는 파손율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가구의 파손도 막는 것은 물론 포장의 부피를 크게 줄인 덕분에 보관과 운반에 아주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간파했다. 파손율을 줄이는 것은 물론, 배송비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장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적다는 이점도 있었다.“가구를 부품별로 분리해 평평한 박스에 담은 포장가구는 전시 때는 물론이고 운반할 때도 공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 그러면 굳이 트럭을 동원하지 않아도 자동차에 싣고 갈 수 있잖아. 고객들이 가구창고로 와서 제품을 본 후 분해된 가구가 들어있는 납작한 상자를 자동차에 싣고 갈 수가 있으니 운반비만큼 싸게 팔 수가 있네. 고객들이야 당연히 운반비가 안 드는 가구를 선택할 것이고. 게다가 제조 과정에서 조립 공정을 없애주는 역할도 하잖아. 그만큼 조립공의 임금과 조립비용이 덜 들어가니 더욱 싸게 팔 수 있게 되잖아. 세상에, 품질을 유지하면서 중저가에 가구를 공급할 길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캄프라드는 납품업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조립식 가구를 납작한 포장에 담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바탕으로 캄프라드는 룬드그렌에게 지시해 막스라는 이름의 조립식 탁자를 개발했다. 이케아의 첫 조립식 포장가구다. 두 사람은 그 뒤 함께 다양한 조립식 가구를 구체적으로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케아 상품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조립식 가구는 이렇게 탄생했다. 룬드그렌은 그런 캄프라드의 손발이었다. 그는 캄프라드의 아아디어를 도면으로, 그리고 상품으로 구현할 줄 알았다. 둘은 아무리 손재주가 없는 사람도 렌치나 드라이버만 돌리면 쉽게 조립할 수 있는 다양한 조립식 가구를 고안했다.하지만 이 작은 아이디어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조립된 가구는 하나만 샘플로 내놓든지, 아예 사진으로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조립 이전 상태의 가구를 부위별로 모아 납작하게 포장해서 가게에 쌓아두고 팔 수 있게 됐다. 한정된 공간에 훨씬 많은 가구 샘플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가구 종류를 고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굳이 토지비용을 들여가며 거대한 매장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최종 조립은 집에서 손님들이 하도록 했다. 이렇게 판매하면 조립 비용이 들지 않아 그만큼 싼 값에 가구를 팔 수 있겠지만 고객들이 과연 그런 불편함을 받아들일까. 캄프라드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고객은 그렇게 게으르지 않았다. 고객들은 가구 값을 덜 내는 대신 기꺼이 최종 조립을 손수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같은 품질이라면 싼 값을 택한 것이다. 혁신은 성공을 불렀다.조립식 포장가구를 채택하면서 완제품을 흠집을 내지 않고 배달하기 위해 필요한 특수 포장도 불필요해졌다. 그전까지 완제품 가구의 배달은 하나의 작전을 방불케 했다. 흠이 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착한 가구에는 항상 몇 군데 작은 흠집이 나게 마련이어서 가구점에서는 칠을 하기 위한 락카를 든 직원을 보내 흠집을 때워주곤 했다. 모든 것이 다 가구 원가에 전가됐다. 가구가 비쌀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의 하나였다.캄프라드의 최신 포장가구는 달랐다. 따로 포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손님이 가구 부품이 들어 있는 납작한 박스를 직접 들고 갈 수 있으므로 배달 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다. 조립·포장·운반 등 불필요한 비용을 최소화하고 그만큼 원가를 낮춰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되 좀 더 싼 값에 가구를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고비용의 가구 판매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계기가 됐다. ‘싸게 팔 방법을 찾아라’는 캄프라드의 철칙이 됐다.캄프라드는 1958년 스웨덴 엘름홀트에 첫 ‘대형’ 가구매장을 세웠다. 7000㎡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1953년 제재소를 개조해 가구를 전시했던 소형 전시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캄프라드는 가장 신뢰하던 한손을 매장 총책임자에 앉혔다. 고객들은 이미 납작하게 포장한 가구를 자동차에 실어 집에 운반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매장은 개장 첫날부터 손님으로 가득 찼다. 카탈로그를 통한 우편 판매와 매장 판매를 병행하면서 캄프라드의 사업은 더욱 커졌다.캄프라드의 이케아는 스웨덴의 젊은 부부들에게 품질 좋고 값싼 가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가구는 정부가 새로 공급한 작은 집에 넣기에는 너무 컸다. 캄프라드의 컴팩트한 조립식 가구는 그런 집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제 캄프라드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포장가구의 이케아라는 사업 아이템을 창안한 그는 몇 년이 지난 1976년 ‘가구 판매업자의 헌장’을 만들어 그의 경영가치를 정리했다. 상세한 사업 지침이기도 하다. 그는 검소함과 열정을 이케아의 사업 지침으로 내세웠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우리 물건을 사지 못하거나 사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우리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불가능’이란 말은 우리 사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달려가자.’ 같은 품질의 제품의 원가를 줄여 싸게, 더욱 싸게 공급한다는 캄프라드의 모토가 여기에 담겨있다. 이 모토는 DIY 가구를 처음 만들 때부터 그가 추구했던 가치다. 추구할 수밖에 없던 가치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다른 가구점과 차별화에 확실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차별화는 성공의 열쇠이기도 했다. 캄프라드가 하면 무엇이든 달랐다.사업이 번창하면서 캄프라드는 또 다른 원칙을 확립했다. ‘고객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것이다. 이는 캄프라드가 성공에 이른 노하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그가 이케아를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원동력의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제품 소개 카탈로그에 한 번 표시한 가격은 1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켰다. 카탈로그를 보고 찾아온 손님에게 적힌 가격보다 올려서 파는 것은 약속 위반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업자들은 흔히 그동안 경기가 나빠졌다거나, 원가가 올랐다든지 하는 이유로 가격을 수시로 바꿨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1년 간 무슨 일이 있어도 가구 가격을 카탈로그에 적힌 그대로 유지했다.그의 고집은 1973년 빛을 발했다. 그해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석유파동이 일어나 세계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다. 당시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생산과 배송 비용도 함께 폭등했다. 하지만 캄프라드의 고집과 원칙은 그때도 여전했다. 끝까지 카탈로그와 전단지에 제시했던 가구 가격을 1년 내내 그대로 유지했다. 고객들과의 신용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한 것이다. 그에게 ‘소비자는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캄프라드의 성공 DNA는 소비자 제일주의였다.문제는 원가가 폭등한 상태에서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캄프라드는 손해를 다른 방식으로 벌충했다. 판매 사원들에게 이익별 인센티브를 지급한 것이다. 단순히 많이 판다고 인센티브를 더 준 게 아니었다. 인센티브는 매출액이 아닌 이익에 따라 차등 지급했다. 그는 상품의 마진에 따라 가격표에 초록색과 흰색, 그리고 검은색의 표시를 했다. 초록색은 마진이 높은 상품이었고. 흰색은 그저 그런 제품, 그리고 검은색은 팔수록 손해를 보는 가구에 붙였다. 가격표에 초록색 표시가 붙은 고마진 가구를 팔 때 가장 많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기에 직원들은 되도록 그 제품을 고객들에게 권유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 중동전쟁으로 원가 폭등해도 카탈로그 가격 그대로 그러면서 캄프라드는 원가 절감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더욱 싼 값에 가구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스웨덴에서 하되 제품 제작은 동유럽 등 인건비가 저렴한 곳에 맡겼다. 회사에 절약과 실용의 문화를 정착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직원들은 정장 차림도 하지 않고, 넥타이도 매지 않도록 했다. 절약은 이 회사 직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규정이다. 이는 캄프라드 자신도 마찬가지다. 비행기는 항상 이코노미석을 이용하고, 15년 넘은 낡은 차를 몰고, 옷은 중고품 시장에서 사입고, 식료품은 가게 문을 닫기 직전에 찾아가서 떨이로 파는 걸 구입해서 먹었다. 이케아 매장에 가서 스웨덴 음식인 미트볼을 야생 베리잼에 찍어 먹는 소박한 식사를 즐겼다. 세금을 아끼려고 본사를 스웨덴에서 덴마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옮겼다. 하지만 세율에는 불만을 표시했지만 세금은 철저하게 납부해 잡음을 일으키기 않았다. 기부도 아끼지 않고 해왔다. 본인은 스위스에서 살며 휴가만 스웨덴의 고향집에서 보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고향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러한 소박한 인간미는 캄프라드의 이미지로 남았다.

2018.02.03 18:54

13분 소요
글로벌 파워피플 [47] -  장루이민 중국 하이얼그룹 회장

CEO

빚 투성이 시영 냉장고 공장을 세계1위 백색가전 업체로 아이디어+추진력+리더십 고루 겸비 중국에는 ‘어약용문(漁躍龍門)’이라는 말이 있다. 황허(黃河)의 잉어가 룽먼(龍門)의 폭포를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는 말이다. 어떤 고비를 잘 넘겨 도약하면 비약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비유다. 최근 욱일승천 하는 중국의 산업기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싼 임금을 이용해 낮은 기술에 품질도 뛰어나지 않은 제품을 값싸게 외국에 내다팔던 중국 제품이 이제 어약용문의 단계에 와있다. 그 대상은 한국과 일본이다.일부 품목에선 중국은 이미 한국을 추월해 용의 자리에 등극하고 있다. 일부 기업도 그렇다. 그 중심에 있는 기업이 하이얼(海爾)이다. 백색가전 중심의 가전업체인 하이얼은 저가·저급품의 대명사에서 이젠 저가·고급화 전략의 선봉장으로 글로벌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냉장고 판매량 5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한 무서운 기업이다. 전 세계에서 8만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은 295억 달러에 이른다.장루이민(張瑞敏·65) 하이얼그룹 회장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떠오르는 중국 경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업인이자 이 회사를 도약시킨 주인공이다. 하이얼의 역사는 그의 비즈니스 이력이나 다름없다. 하이얼의 발전은 그의 경영철학과 전략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신중국이 건설된 1949년 1월5일 산둥성 옌타이의 라이저우시의 블루컬러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이 지역 의류공장 노동자였다.그는 학창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었으며 그 세대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홍위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국의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학생들은 오로지 문혁에만 열중하던 그 시기에 그는 후난성의 마오쩌둥 생가를 방문했으며 베이징까지 가는 행진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까스로 하방을 피했으나 대학은 갈 수가 없었다. 대부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968년 산둥성 칭다오에 있는 국영 건설업체에서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출신 성분이나 교육 정도와는 무관하게 그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으며 독서광이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부기 등 상업과 공장 운영을 가르치는 강좌에 참가했다. 12년 동안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조장·주임 등으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1980년 자신이 일하던 의류업체의 부공장장으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칭다오 시정부의 가사도구 담당 부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그는 34세이던 1984년 당시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던 칭다오 냉장고 제조창의 총공장장으로 발령 받았다. 전임자가 자리를 떠나면서 급히 그가 투입된 것이다. 그는 이 공장이 빚더미에 앉으면서 그 자리에 발령 난 넷째 인물이었다. 전임자 누구도 위기에서 이 업체를 구하지 못했다.1979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하면서 당시 중국에선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 아래 경제개혁의 행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경제 효율이 뭔지, 경쟁력이 뭔지, 혁신이 뭔지 미처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총공장장 자리는 그때까지 쌓아뒀던 것까지 까먹을 수 있는 위험한 자리일 수 있었다.어약용문(漁躍龍門)의 대명사그는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는 회사를 재창업 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먼저 독일로 출장을 떠나 생산설비 관련 파트너를 만난 그는 기술 노하우 전수를 타진했다. 이를 위해 독일과 스위스의 공장을 둘러보던 그는 자기 회사의 가장 큰 문제점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명도와 품질이었다. 이 회사는 물론 중국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부분이기도 했다. 귀국한 그는 자사 제품의 실상을 직원들에게 각인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품질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한 소비자가 냉장고에 하자가 있다며 물건을 반품했다. 공장 창고를 돌며 400대의 제품을 일일이 살폈다. 그 결과 제품의 20%에 가까운 76대가 불량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 복도에 76대의 불량품을 전시했다. 그런 다음 직원들에게 대형 망치를 나눠주고 이를 부수게 했다. 당시 냉장고 한 대의 가격이 2년 치 임금에 가까웠기 때문에 직원들은 주저했다. 일부는 눈물까지 흘렸다.그는 망설이는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불량품을 박살내지 않으면 내일 시장에서 산산이 깨질 것은 바로 우리 기업이 될 것이다.” 그러자 직원들은 일제히 불량품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당시 사용된 망치 중 하나는 지금도 본사에 전시돼 교훈을 주고 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직원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변화를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했다.이런 충격 요법은 즉시 효과를 나타냈다. 직원들에게 ‘품질제일’의 인식을 인상 깊게 심어준 것은 물론 이 사실이 소문이 나고 미디어에 보도되면서 회사의 지명도도 크게 올랐다. 이에 따라 이듬해부터 판매가 급속히 늘었다. 특히 베이징이나 텐진 같은 수도권에서 인기를 모았다. 당시 국가 주도의 경제체제를 운영하던 중국에서 나라를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개혁 정책을 숱하게 펼쳤다.대표적인 것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의 급여를 생산량에 따라 연계하면서 차별화한 것이었다. 직원이 업무상 실수를 했을 경우 직원들 곁에 서서 자신이 어떤 실수를 왜 하게 됐는지를 설명하게 했다. 본인은 물론 동료들도 같은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생산현장의 혁신뿐 아니라 소비자와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꾀했다. 소비자 피드백을 강화한 것이다. 재미난 사례가 쓰촨성에서 나왔다. 그 지역 판매가 줄어 원인을 조사했더니 지역 농민들이 세탁기에 고구마를 넣고 세척을 하는 바람에 찌꺼기가 배수구를 막아 고장이 잦았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그는 제품 특성에 맞춰 지역 농민을 교육하는 대신 디자인을 지역 농민에 맞췄다. 세탁기에서 세탁물 말고도 다른 것도 세척할 수 있게 하면서 웬만해선 배수구가 막히지 않도록 특별 설계를 했다.이런 혁신의 결과 이 회사는 1986년 흑자로 돌아섰으며 그 해 매출 성장률은 83%에 이르렀다. 칭다오 시정부는 그에게 시영 기업 중 다른 것도 함께 맡아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자레인지를 만들던 칭다오 전자를 1988년에, 칭다오 에어컨공장과 칭다오 냉동고 공장을 1991년에 각각 인수했다. 망치로 불량품 박살내 품질제일주의 강조그는 중국에선 드물게 브랜드 전략을 구사했다. 1992년 회사 이름을 하이얼로 바꾸고 이를 브랜드화했다. 스위스의 생산장비업체로 칭다오 냉장고의 파트너였던 리브헤어를 중국인들이 발음하는 리브하이얼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엔 칭다오 하이얼그룹으로 이름을 바꿔다가 이듬해 하이얼그룹으로 간략하게 줄였다.그 후로도 인수합병을 계속해 1995년엔 칭다오의 홍성전자를, 1997년에는 텔레비전 제조업체인 웅샨전자를 인수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본격적인 수출에 나섰다. 가전제품의 세계 시장 수출의 문을 연 것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이얼이라는 중국 브랜드로 전 세계 시장을 열었으며 이 브랜드를 해외에 각인시켰다. 그가 공장을 맡은 1984년 350만 위안에 불과했던 매출이 2000년에는 405억 위안에 이르렀다.이 회사를 맡은 뒤 2000년까지 17년 동안 연 평균 78%라는 고속성장을 이끌었다. 처음 맡았을 때 147만 위안(약 17만7000달러)의 빚에 허덕이는 소규모 시영공장이었던 것이 지금은 72억5000만 달러를 수출하는 세계적인 가전업체로 성장했다. 현재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백색가전은 물론 텔레비전·에어컨·컴퓨터 등 다양한 전자제품을 생산해 전 세계16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백색가전만 따지면 세계 1위 업체이며 전 세계 시장의 7.8%를 차지한다. 그는 다 쓰러져가던 무명의 냉장고 제조업체를 세계3위의 가전업체로 성장시킨 중국의 경영 영웅이 됐다.그는 일찌감치 해외 생산기지 확보에 나섰다. 중국 기업으로선 유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일찍부터 현지 생산과 글로벌화에 눈을 뜬 것이다. 지금은 산둥성 칭다오에 있는 본사와 공장 외에 미국과 파키스탄에 대규모 해외 생산기지를 둔 것을 비롯해 13군데에서 공장을 운영한다.1996년 인도네시아 공장을 시작으로 이듬해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등에 현지 공장의 문을 열고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는 소형 냉장고와 와인셀러를 중심으로 한 가전 틈새시장을 노리면서 진출을 시작했다. 2000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캠든에 생산기지의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미국 공략에 들어갔다. 현재 70억 달러의 해외 판매 중 2억 달러를 미국에서 올리고 있다.중국 기업 최초로 하버드 경영대학원 사례 연구 대상2002년 파키스탄 공장 문을 열었으며 2003년에는 요르단으로도 진출했다. 아프리카 진출도 활발해 튀니지·이집트·알제리·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현지 공장을 매입해 하이얼 브랜드와 함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제품도 생산해 현지 유통망에 공급하고 있다.2004년엔 인도에 진출해 믿을 만한 브랜드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남미 베네수엘라까지 진출했으며 2012년엔 뉴질랜드 가전업체인 피셔&페이켈을 인수해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생산 기지를 운영하게 됐다. 2008년 이후 냉장고 부문에서 최대 라이벌이었던 월풀보다 더 많은 판매를 기록하고 있다.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그는 중국에서 경영의 귀재로 불리게 됐다. 그는 중국 CCTV가 매년 선정하는 ‘감동 중국인물’의 수위를 오랫동안 차지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영을 체계화했다. 경영 현장의 혁신을 이론화해서 전파하는 능력 때문에 그는 ‘학자 기업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그 결과 그가 창안한 다양한 경영 원칙은 중국 기업의 글로벌 경영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다양한 경영 학파의 주장을 고루 흡수해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전략을 내놨다. 전통적인 중국 문화에 발달한 서양 경영기업을 결합한 형태였다. 초기에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문제 해결이 매일매일의 개선을 이끈다’ ‘항상 신중하라,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라’ 등등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현장에서 혁신과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됐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영이론을 줄이어 내놓으면서 이를 바탕으로 회사를 이끌었다.그는 1998년 3월25일 하버드대의 요청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강연을 했다. 중국 기업인 중 처음으로 하버드대에서 강의했다. 그가 이끄는 하이얼그룹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중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경영학 사례연구 대상으로 선정됐다. 1999년 12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 세계에서 올해의 가장 신망 있는 기업인 30’를 발표하면서 그를 26위에 올려놓았다.현대 중국의 경영인이 국제사회에서 얻은 최고의 영예다. 2001년 2월 미국 가전 잡지가 뽑은 ‘톱 글로벌 가전업체(물량 기준)’에서 9위에 올랐다. 중국의 하이얼이 전통적으로 가전에 강한 미국 월풀, GE, 프랑스 엘렉트롤룩스, 독일 지멘스, 일본의 샤프·도시바·히타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중국 기업에서 만든 물건은 싸구려이고 조잡하다는 인식을 바꿔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중국제 상품도 얼마든지 높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2001년 하이얼은 미국에서 중국 기업 최초의 신화를 또 다시 썼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캠든에 초대형 산업단지를 확보해 제조기지를 건설하면서 이곳에 ‘하이얼 불러 바드’라는 지명을 얻은 것이다. 그의 목표는 하이얼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다.

2014.04.2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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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 고급 시계 시장의 숨은 손들

산업 일반

명품 시계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딜러들은 해외 본사의 직영 매장 확대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골 고객 관리로 돌파구를 찾는다. 갤러리아백화점 서울 압구정점 동관 지하 1층. 브레게·파텍필립·쇼메·반클리프 아펠·까르띠에 등 시계와 고급 주얼리 매장이 즐비하다. 그런데 한 매장의 이름이 ‘BIG BEN Watch(빅 벤 워치)’다. 바쉐론 콘스탄틴·IWC·로저드뷔·예거르쿨트르·크로노스위스 시계를 팔고 있다. 딜러 매장이다.고급 수입 시계는 크게 세 가지 매장에서 살 수 있다. 각 브랜드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매장, 면세점, 그리고 딜러 매장이다. 정식으로 시계 회사에서 구입해 소비자에게 파는 딜러 매장의 제품은 모두 정품이다.해방 후부터 벽시계나 탁상시계와 함께 손목시계를 취급하던 ‘시계방’에서 수입 고급 시계를 조금씩 팔았다. 6·25 전쟁 이후부터 활동하던 시계 딜러 1세대는 보통 시계 수리 기술을 터득해 자신의 시계방부터 시작한 사람들이다. 롯데백화점 서울 잠실점과 김포공항점에서 까르띠에·보메 메르시에·IWC 등을 판매하는 월드시계 오성규 대표는 17살 때 고향인 전남 순천의 시계방에서 일을 시작했다.심부름·청소를 하면서 그 가게에서 잠도 잤다. 어깨너머로 시계 수리를 배웠다. 밤에 혼자 가게에 남으면 잠을 안 자고 손님이 맡기고 간 시계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 보기를 반복했다. 오 대표는 “내 손으로 조립한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니 신이 났다”고 했다. “6·25 전쟁 때 서울에서 순천으로 피난 와 알게 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정전(停戰)이 되자 서울 가서 저한테 편지를 보냈더라고. 서울의 시계점포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요.”얼마 지나지않아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서울 남대문 앞 점포였다. 당시 한국은행 앞에서 옛 미도파 백화점(현재 서울 명동 롯데 영플라자 자리) 앞까지는 시계와 금은보석을 파는 점포가 밀집해 있었다. 사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시계를 팔던 그에게 사장은 “고치지 말고 파는 걸 해보라”고 했다. 이후 여러 백화점의 시계 매장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다가 33세에 자신의 시계매장을 냈다. 이후 지금까지 79세의 나이에도 시계를 판다.빅 벤 워치 박영준 대표의 아버지 역시 시계 기술자로 시작해 시계 딜러가 됐다. “아버지 건강이 나빠져 제가 물려 받았죠. 그런데 얼마 안돼서 시계를 사 간 손님이 다시 찾아왔어요. 시계 태엽을 감아도 40시간이 못 돼 멈춘다고 했습니다. 시계 본사가 있던 스위스에 수리를 맡겼지만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걸 해결해준 사람이 아버지에요. 시계 태엽을 한 번 감아보더니 ‘태엽을 감는 부품이 짧아서 그렇다’며 쇳조각을 덧대주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문제없이 작동했습니다.”이 외에 이북 지역에서 시계판매를 하다가 6·25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와 자리잡은 시계 판매상도 있다. 1970~1980년대에 고급 수입 시계 중 일부는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왔다. 미군들이 PX에서 산 시계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한 두 개씩 사와서 국내에 풀기도 했다. 어떤 판매상은 이 같은 유통 경로를 모른채 시계를 사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 정부에서 ‘밀수품을 유통한다’며 가게에서 팔던 시계 대부분을 압수해 가는 일도 있었다.밀수나 미군부대가 아니어도 시계를 구하는 방법이 있었다. 세관의 압수물품 공매를 통해서다. 오 대표는 “공매에 다니면서 시계를 전문적으로 사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친해서 수입 고급 시계를 많이 가져와 팔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3년 서울 명동 옛 미도파백화점에 매장을 내면서부터 수입 고급 시계를 많이 취급했다. 당시 주로 공매에 나오던 브랜드는 롤렉스와 오데마피게 등이었다.오 대표는 “당시에는 판매상에 시계 기술이 없으면 물건을 들여올 때부터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당시 정식으로 시계를 사서 파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리를 직접 해주는 것은 물론 물건을 들여올 때 제대로 된 시계인지 확인까지 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시계가 들어오니 부품이 있을리 만무했다. 크라운을 비롯해 간단한 부품은 시계 점포에서 직접 깎아 만들었다. 복잡한 부품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곳도 있었다.1980년대 후반부터 오리엔트시계의 자회사가 오메가를 정식 수입해 팔기 시작했다. 시계의 정식 수입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직접 브랜드를 수입해 딜러들에게 공급하는 곳이 생긴 때문이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까르띠에·IWC 등으로 대표되는 리치몬트 그룹을 필두로 여러 해외 시계 브랜드가 직접 한국 법인을 세우고 국내 유통을 맡기 시작했다. 현재 많은 딜러 2세가 운영에 참여한다. 월드시계의 오 대표처럼 2세대 없이 1세대 혼자 매장을 꾸리는 일은 드물다.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의 빅 벤 워치, 서울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그리니치시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의 우노와치 등은 2세대가 운영하거나 돕는다. 시계업체에서 오랫동안 몸담다가 2004년 딜러로 변신한 노블워치의 김문환 대표, 타임포럼이라는 시계 커뮤니티를 운영하다가 2011년부터 시계를 판매하는 드로어써클의 김인식 대표는 예외적인 경우다.딜러 매장과 직영 매장의 매출 비율은 공식적인 자료가 없다. 브랜드마다 매출 비율도 다르다. 업계에서는 대략 이렇게 추정한다. 직영 매장이 강세를 보이는 곳은 딜러 매장과 직영 매장의 매출 비율이 1대 4정도다.최근 1~2년 사이에 직영 매장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1대 1 정도다. 직영매장이 잘 갖춰지지 않은 브랜드는 딜러 매장에서 판매되는 비율이 더 높다.딜러는 서울에만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전국에도 약 20명 정도다. 보통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매장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국내 유통이 백화점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백화점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드로어써클은 신세계백화점 서울 충무로 본점과 강남점에 이어 올해 부산 센텀시티점 등에 매장을 열었다. 노블워치는 서울 청담동에 로드숍과 목동 현대백화점 등에 매장이 있다. 빅 벤 워치는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 매장 등, 오로와치는 대구 현대백화점 매장과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 매장 등이 있다.직영 매장의 출현은 딜러 매장을 위축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까르띠에는 청담 부티크를 비롯해 직영점 체제를 굳혔다. 바쉐론 콘스탄틴·IWC·예거르쿨트르 등도 직영점을 내고 있다. 백화점에도 브랜드 직영 매장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딜러 매장의 강점 중 하나는 할인 판매다. 하지만 일부 브랜드가 ‘노 디씨(No DC)’ 정책을 펴서 딜러 매장에서도 직영점과 같은 가격으로 팔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딜러들은 나름의 전략을 편다. 월드시계는 고객에게 무한 친절 서비스를 제공한다. 매장을 방문한 고객의 연락처를 받아뒀다가 나중에 백화점 사은행사 정보를 알려준다. 시계가 고가이기 때문에 ‘00원 이상 구입하면 00원어치 상품권 증정’ 등의 사은행사가 있을 때 시계를 사는 게 고객 입장에서는 유리하기 때문이다.예물시계를 하러 온 손님이 ‘반지는 어디서 하지’ ‘양복은 어디서 맞추지’하고 고민하면 손님에게 매장을 소개해 준다. 오 대표는 “직원들에게 ‘우린 시계만 파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알려줄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빅벤 워치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한국에 들어온 초창기, 바쉐론 콘스탄틴의 대표 컬렉션 중 하나인 ‘1972’를 국내에 소개한 것도 빅 벤 워치다. 비대칭 사각형 케이스의 특이한 모양 때문에 다른 딜러들은 선뜻 주문하지 않았다. 박 대표의 아버지는 과감히 주문했고 국내에 소개해 인기를 끌었다. 2001년 바쉐론 콘스탄틴이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부티크(단독 매장)를 낼 때 박 대표가 함께했다. 브랜드와 딜러의 합작 형태였다.요즘 브랜드들이 직영으로 부티크를 운영하는 것과 다르다. 박 대표는 “문을 열기 전 아버지 뻘 되는 다른 딜러들이 한 가지 브랜드가, 그것도 호텔에서 팔리겠냐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부티크를 냈다. 아시아 첫 번째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였다. 2005년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부티크를 하나 더 냈다. 오로와치 임정호 대표와 만든 IWC 부티크다. 국내 첫 IWC 부티크다.박 대표와 IWC 부티크를 함께 만든 임 대표는 ‘노 디씨’ 딜러로 유명하다. 몇 억원 대 시계를 팔면서 천원 단위까지 정확히 다 받아서 고객한테 “독한 사람”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그 고객은 임 대표의 단골 고객이 됐다. 임 대표는 “직영점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계 커뮤니티 등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일부러 시계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와인이나 영화 이야기 등 취미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그러다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데 싸게 잘 하는 치과 없을까”라고 묻는 고객에게 자신이 신뢰하는 치과의사를 소개해주는 식이다. 임 대표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에게 “깎아달라”는 말 없이 시계를 산다. 임 대표는 “단순히 싸게 파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고 말했다.

2013.09.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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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결혼은 집안 행사” 예단 넉넉히, <2013년> 전셋집·신혼여행 준비에 올인

전문가 칼럼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는 결혼식이 줄을 잇는다. 5월의 신부를 꿈꾸는 여성이 많은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결혼문화가 달라졌다. 우리 삶을 크게 바꾼 1997년 외환위기가 분수령이었다. 그 전만 해도 예비 신혼부부 절반이 신랑 친구들의 함을 받는 함들이 행사를 했지만 요즘엔 찾아보기 어렵다. 주변 사람의 정보에 의존하며 발품을 팔던 혼수 마련 방식도 바뀌었다. 요즘은 전문 웨딩컨설팅 업체에 맡기거나 인터넷 검색으로 직접 품목과 가격을 알아본다. 우리 정치·경제·사회를 뒤흔든 외환위기 무렵의 결혼 문화와 2013년 현재의 결혼 문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상의 신랑·신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봤다.#1. (1998년의 신부) “엄마, 아직 더 가봐야 해?” “아유,그럼 넌 겨우 세 군데 보고 결정하려고 그러니?” 엄마 손에 이끌려 네 번째 예식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2년 동안 만난 남자 친구와 얼마 전 결혼을 결심하고 상견례까지 마쳤다. “스물 일곱이나 먹은 애가 왜 시집 갈 생각을 않느냐”던 부모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것은 좋다. 그러나 핑크빛 신혼의 꿈에 젖기에는 세상이 너무 고단하다. 외환위기의 그늘이 너무 짙다. 친구 중 결혼을 무기한 미룬 커플도 여럿 된다.당장 생계가 어찌될 지 모르는 판에 결혼은 불안하다. 서울의 4년제 사립대학을 나온 남자 친구도 몇 번의 불합격 통지를 받은 끝에 올 초 간신히 직장을 구했다. 제약회사 경영관리팀에서 일하는 나도 맞벌이라는 이유로 구조조정 대상에 오를까 노심초사다.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주말마다 내 손을 잡아 끌고 결혼 준비를 하러 다니느라 바쁘다. 결혼에 관심도 지식도 별로 없는 나는 엄마가 친구나 친척들로부터 얻어 들은 정보에 의존하며 하나 하나 공부한다. 가장 중요한 예식장 선택부터 난관이다.예식장이 마음에 들면 드레스가 별로고, 드레스가 예쁘면 가격이 너무 비싸다. 보통 드레스 대여, 화장, 야외 촬영을 묶어 예식장이 패키지 상품으로 내놓는다. 잘 사는 대학 동기의 언니는 서울 청담동에서 따로 계약을 했다는데 패키지의 두 배 비용이 들었다. 패키지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도 없는데 200만원 넘게 내야하다니 바가지 쓰는 기분이다. 어찌됐든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어디 보자, 오늘 날짜가 1998년 6월. 결혼은 앞으로 딱 석 달 남았다.#2. (2013년의 신랑) “벌써 계약됐다고요?” 부동산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허탈한 마음에 어깨가 축 처진다.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온 아파트 전세가 있다는 말에 회사에 반차를 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5월 말까지 과연 신혼집을 구할 수 있을까?누군들 로맨틱한 청혼을 꿈꾸지 않으랴. 결혼 적령기를 넘긴 서른 한 살의 여자 친구에게 끝내 당당하게 프로포즈 못한 건 집 한칸 살 돈은 모아야 한다는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식사자리에서 정색을 하는 여자 친구의 어머니를 본 순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 후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집 생각뿐이다. 여자 친구의 회사와 나의 회사, 아파트 시세, 거주 조건 등을 따져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지역으로 골랐다. 가격을 보니 기가 찬다. 전세가 2억4000만원으로, 매매가와 6000만원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지금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하지만 직장 생활 5년 동안 모은 돈이 전세 가격의 3분의 1도 안 된다. 전세자금 대출, 주택구입자금 대출은 우리 둘의 소득이 높아 받을 수 없다.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끙끙대는데 은퇴한 아버지가 빠듯한 노후자금에서 4000만원을 빼 주셨다. 고맙고 죄송하다. 그래도 1억2000만원이 모자란다. 이걸 다 대출 받으면 한 달에 이자만 50만원씩 나간다.그 때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여자 친구다. “생각해봤는데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 6000만원 중에서 쓸 건 쓰고 남는 건 전세금에 보탤 게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3000만원 정도 도와주시겠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집은 아직 못 구했지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우리는 예단과 예물을 포함한 결혼 비용을 최대한 줄여 전세금에 보태기로 결정했다. “집안의 개혼(開婚)이라 번듯한 구색을 갖추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면서도 우리 결정을 받아들였다.전셋값 부담에 프로포즈 미뤄#3. (1998년의 신부) “아무리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서울 종로의 한 금은방에 들어서며 시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외환위기로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마당에 굳이 예물을 요란하게 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결혼 반지에 다이아몬드, 순금 세트, 유색 보석까지. 저 빨간 루비, 초록색 사파이어 보석을 내가 하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긴 예단으로 드려야 하는 반상기·은수저도 딱히 실용적인 물건은 아니다.몇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한복을 나와 남자 친구, 양가 어머님 모두 맞춰 입는 것도 낭비라면 낭비다. 으레 그렇게 하는 거라는 어른들 말씀에 따를 뿐이다. 확실히 결혼은 집안끼리 치르는 행사인가보다. 엄마는 예물 구성을 듣더니 걱정하는 눈치다. “예단에 모피코트라도 얹어 보내야겠다.”경기 침체 덕분에 집을 구하기는 한결 수월했다. 아파트 매매가와 전세가가 동시에 떨어지는 바람에 서울 목동의 80㎡ 크기의 아파트를 8000만원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 시세보다 1000만원 싸게 구한 거란다. 집은 신랑이, 혼수는 내가 부담했다. 25인치 평면TV, 9kg 용량 세탁기 등 가전제품은 대기업 양판점에서 혼수 품목 패키지로 묶어서 할인 구매해 전셋집에 넣었다.가전제품과 가구까지 합쳐 1000만원 정도 들었다. 신혼여행은 요즘 많이들 가는 괌으로 정했다. 여행사 허니문 상품에 나오는 화려한 리조트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나와 신랑의 오붓한 첫 해외여행이다.결혼을 한 달 앞두고 이제 굵직한 행사는 야외 촬영과 함들이, 예단 보내기 정도만 남았다. 야외 촬영은 예식장과 연계된 사진기자가 와서 롯데월드·민속촌에서 찍어 준다. 신랑은 처음 하는 사진 촬영에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바탕 난리 쳐야 한다니 걱정되지만 뭐 어떠랴.다들하는 일인데. “함진아비는 누가 하기로 했어?” “아, 준석이. 걔가 제일 넉살이 좋거든. 함값 두둑하게 준비하라던데?” “저기요, 이불·반상기·은수저에 현금 예단, 그리고 도련님 드릴 정장 한 벌까지. 돈 들어갈 게 한 두 군데가 아니거든요?”더하기 보다 빼기가 익숙#4. (2013년의 신랑) 간소하게 결혼하기로 결정한 이상 ‘무엇을 하느냐’ 보다 ‘무엇을 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스튜디오 촬영은 생략했다. 대신 결혼식 당일에 사진작가가 와서 촬영해주는 스냅 사진을 계약했다. 직장을 다니느라 바쁜 여자 친구를 대신해 준비한 웨딩플래너는 “스튜디오 촬영을 생략하는 신혼부부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며 좋은 스냅사진 작가를 소개했다.결혼식에 조금 더 욕심을 냈다면 100명 내외의 정말 친한 사람만 초대해 치르는 하우스웨딩도 괜찮아 보였다. 복잡한 결혼식장에서 콩 볶아먹듯 순식간에 해치우는 결혼이 아니라, 아늑한 장소에서 여유롭게 식을 올린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일반 예식장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든다.부모님께 미리 말씀을 드렸다시피 예물과 예단은 ‘안 주고 안 받기’를 지키려 노력했다. 서로 주고 받을 결혼반지 한 쌍으로 예물은 끝내고 예단은 이불 한 채만 했다. 장모님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래도 반상기·은수저는 꼭 해드려야 한다”고 하시기에 부모님께 여쭤봤더니 “차라리 필요한 물건을 선물 받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대답하신다.여자 친구와 고민 끝에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선물했다. 다행히 예단 포장을 풀어보시더니 매우 기뻐하셨다. “손주가 태어나면 이걸로 사진을 찍어서 사돈어른께 보내드려야겠구나.”결혼 준비를 간소하게 하다 보니 혼수 준비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백화점은 신혼부부가 혼수를 살 경우 금액의 일정 비율을 상품권으로 돌려주는 웨딩 마일리지를 운영한다. 전자제품 판매점은 한꺼번에 혼수를 사면 전체 금액에서 할인 해준다. 돌아다니며 사고 싶은 모델을 고른 후 인터넷 최저가를 알아보고 다른 유통업체와 비교해봤다. 일부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일부는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구입했다.인터넷 검색으로 손쉽게 결혼 준비마른 수건도 짜는 심정으로 결혼 준비를 했지만 단 하나 아끼지않은 것은 바로 신혼여행이다. 화려한 결혼식을 포기한 여자 친구에게 신혼여행만큼은 근사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신혼여행지가 프랑스다. 니스·아비뇽·프로방스 등 프랑스 남부 지역을 돌면서 고성과 호텔에서 머무는 일정이다. 항공권과 숙박 모두 직접 예약해 450만원 예산 안에서 해결했다.요즘 여자 친구는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 검색하는 재미에 푹빠졌다. 폐백이 뭐고 이바지 음식이 무엇인지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좋은 가게가 어디인지 추천 받는다. 결혼 준비가 대부분 끝난 뒤에는 신혼여행 코스를 짜느라 온종일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 하긴 장모님도 멀리 떨어져 사시고 주변에 결혼한 친구도 많지 않은데 인터넷 없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둘이 어떻게 준비했을까 싶다.#5. (1998년의 신부) 드디어 결혼식 날. 나는 지금 신부 대기실에 앉아 드나드는 수많은 손님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내년에는 여동생이 결혼한다. 3개월 동안 결혼을 준비하며 알게 된 많은 노하우를 알려줘야겠다. 언젠가는 이

2013.05.07 14:47

6분 소요
CEO - 이케아, 규모 비교 안 되지만 한판 붙어볼 만하다

CEO

다국적 ‘가구 공룡’ 이케아의 진출로 국내 가구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 1위 한샘의 최양하 회장은 이케아와 한판 승부를 벼르고 있다. “이케아를 넘어서는 겁니다. 우리가 노리는 중국·일본·미국 시장에서 이케아를 넘어 성공하는 게 한샘의 비전이죠.” 최양하(64) 한샘 회장은 “이케아는 세계 최고의 가구회사지만 한샘이 이케아보다 앞선 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케아는 내년 개장을 목표로 경기 광명역에 초대형 매장 부지를 확보했다. ‘가구 공룡’ 이케아와 일전을 벼르는 최 회장을 1월16일 오후 만났다. 26㎡(8평) 가량 되는 아담한 회장실은 소탈한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오너인 조창걸 명예회장부터 의전을 싫어한다고 했다.이케아가 국내 가구업계에 얼마나 위협적입니까.“한샘은 국내 가구업계에서 독보적인 1위입니다. 그런데 이케아가 외형은 우리의 50배, 원가 경쟁력은 덤핑 제품의 경우 우리보다 최대 30% 우위에 있습니다. 국내 중소업체가 만드는 가구보다 싸게 팔아요. 매장 크기, 마케팅력 등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앞선 회사죠. 일차적인 타격은 중소 가구업체들이 입을 겁니다.”한샘은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이케아는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는 DIY(do-it-yourself) 가구 중심입니다. 한샘은 코디네이터(space coordinator)와 상담을 거쳐 택배는 물론 시공 서비스까지 해줍니다. 이런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바로 우리의 차별성입니다. 우리는 나름의 서비스 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저가 제품의 경우 소비자가 원하면 DIY를 옵션으로 선택하게 하려고 합니다.”일종의 마이너스 옵션 방식으로 시공을 소비자가 자체적으로 할 수도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케아는 가구를 전량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방식으로 만든다.이케아가 국내 중소업체와 OEM을 고리로 공존할 가능성도 있겠군요.“국내에서도 OEM을 할 거로 봅니다. 이에 대비해 중소업체들도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중국산보다 원가·품질 면에서 우위에 있어야 OEM 물량을 수주할 수 있겠죠. 이케아는 대량 구매를 하기 때문에 필요한 물량을 중국에서 저가에 조달할 수 있습니다.”한샘의 강점은 뭔가요.“우리는 고객이 매장을 찾으면 전문 코디네이터가 눈높이에 맞춰 상담을 합니다. 한샘은 전통적으로 가구가 아니라 공간을 파는 회사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침대가 아니라 침대, 사이드 테이블, 장롱, 화장대, 커튼 등으로 이루어진 침실을 팝니다. 우리 매장이 도심의 백화점이라면 이케아는 도시 외곽의 할인점에 비유할 수 있죠. 이케아는 할인점처럼 직원도 계산대 근무자와 매장 곳곳에 배치된 사람들이 다입니다.”‘공간을 파는 회사’ 정책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진입장벽이 낮지 않나요? 경쟁사도 쉽게 모방할 수 있다는 거죠.“정책 자체를 따라 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디자인과 코디네이션 경쟁력을 과연 갖췄느냐는 별개의 문제죠. 침실용 단품 가구를 잘 만든다는 회사들을 골라 주문을 했는데 돈은 돈대로 들이고도 배치와 코디네이션이 마음에 안들 때가 있거든요. 미국 같은 나라도 부엌가구는 팔지만 부엌을 설계해 파는 회사는 없습니다.”한샘이 착안한 ‘공간 전체를 세트로 파는 회사’는 실제로 많은 가구 회사들이 따라왔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부품을 팔던 회사들이 완성차 쪽으로 눈을 돌린 셈이다. 최 회장은 이 정책을 이케아도 한샘에서 한 수 배웠다고 주장했다.“이케아의 전 임원에게 들었는데 공간 판매의 개념을 익히려 한샘에 꽤 여러 번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습한 후 이케아가 해외 시장에서 쇼룸을 그런 방향으로 많이 바꿨다고 하더군요.”전통적으로 가구 선진국은 이탈리아·독일 등 유럽 국가다. 한샘은 이들 나라의 가구 제작 기술과 디자인을 벤치마킹 하지만 이들 나라에 진출할 계획은 없다. 이미 진출한 중국·미국·일본에 주력하기 위해서다. 최 회장은 이들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면 세계적인 가구 회사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CEO 장수비결, 사람과 비전장수 CEO이신데 ‘최양하 표’ 경영의 키워드는 뭡니까.“사람과 비전입니다. 우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최고를 지향하게 하면 그 목표에 근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직원들이 성공해야 합니다.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실력을 갖추는 게 회사가 성장하는 지름길입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에게 다른 데 가려면 한두 직급 상향 이동하라고 합니다.실제로 웅진코웨이개발이 부엌가구 사업에 진출할 때 우리 회사 차장을 이사로 데려간 일이 있습니다. 대리점 사장, 협력업체 사람들도 중요합니다. 이들이 잘 돼야 우리 회사가 클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상생이고 동반성장이죠. 저도 협력업체가 밤잠을 설쳐가며 원가 절감을 위해 고민하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앞뒤 안 재고 무조건 깎으려 드는 건 문제가 있죠.”가구 회사의 경우 디자인 개발이 연구·개발(R&D)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한샘은 디자인에 매출액의 몇 %를 투자하나요?“디자인이 곧 R&D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가구 소재라든가 기능도 R&D 대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이테크 산업이 아닌 만큼 핵심적인 R&D는 디자인 개발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매출액의 4~5%를 디자인에 투자합니다.”한샘의 디자인 경쟁력은 어느 수준인가요.“국내에선 가장 뛰어나고 가구 선진국 업체와 비교해도 경쟁할 만합니다. 1990년 국내 최초로 디자인연구소를 만들어 ‘DBEW(Design beyond East and West)’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서구화한 생활양식과 동양의 정신을 디자인에 구현한다는 철학을 담았죠.”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현 국가지식재산위원장)은 2009년 봄 포브스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에 입사할 당시 이 회사는 중소기업이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젊은 세대에게 “중소기업에 들어가라. 거기서 회사도 키우고 스스로도 성장하라”고 권했다.최 회장은 1990년 삼성전자 수원공장을 찾았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TV 공장 조립라인에서 벽 쪽을 바라보니 삼성 모니터와 소니 모니터를 교대로 여러 대 전시해 놓았습니다. 삼성, 소니, 삼성, 소니…. 소니와 품질에 차이가 있으니 모니터의 화질도 다르겠죠. 그 광경을 보고 ‘아, 삼성전자가 언젠가 소니를 꺾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시 윤 부회장은 부사장으로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이사를 맡고 있었다.최 회장도 대우중공업을 떠나 한샘이라는 중소기업에 몸담았는데, 회사와 함께 성장한 케이스로 볼 수 있습니까.“결과적으로 그런 셈이죠(웃음).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제가 입사했을 때 한샘의 연간 매출액이 15억원이었습니다. 목공소 수준으로 중소기업 축에도 못 끼었죠. 회사도 키우고 빨리 사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니까요. 율산·제세 같은 신흥 재벌이 일어날 때였죠. 이들이 그때 이미 조 단위 매출을 냈는데 한샘도 올해나 내년이면 1조원 할겁니다. 저의 로드맵보다는 한 십년 정도 늦어진 셈이죠”그는 1979년 서른에 한샘으로 옮겼다. 공자가 ‘자립한다’는 뜻으로 이립(而立)이라고 한 나이다.젊은 세대에게 중소기업 취업을 권하나요.“중소기업에 들어가면 비즈니스 전반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시야가 넓어야 안목이 생기죠. 반면에 대기업 구성원은 다 짜인 구조의 부품 같은 존재로 일부를 볼 수 밖에 없어요. 물론 대기업은 경쟁력이 있으니까 배울 것도 많죠. 그래서 우수한 사람들이 대기업으로 몰려가는데 그 중에 성공하는 사람 몇 안 됩니다.더욱이 CEO는 한 명밖에 될 수 없죠. 공로주를 받을 수도 없고요. 발전 가능성을 생각하면 중소기업에 들어가야 돼요.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CEO도 되는 겁니다. 그래야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고 그 중에서 대기업도 나오죠. 똑똑한 젊은이가 중소기업을 선택하는 건 나라를 돕는 길이기도 합니다.”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에 대해 어떻게 보나요.“대기업이 돼야죠. 그런데 대기업으로 크겠다는 그런 꿈을 품은 중견기업 경영자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중소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책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쟁력을 키워 세계시장에 뛰어들겠다는 비전이에요. 이런 꿈을 꾸는 중소·중견기업 사장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오너인 조 명예회장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대학 10년 선배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인연은 없습니다. 한샘에서 근무하던 선배에게 끌려와 여기까지 왔죠.”경영 멘토가 있습니까.“명예회장님에게 많이 배웠죠. 특히 두 가지를 꼽고 싶습니다.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목표의식과 사람에 대한 욕심입니다. 매출 15억 하는 부엌가구 회사의 캐치 프레이즈가 ‘세계 최고의 부엌가구 한샘’이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죠. 당시 부엌가구 1위 회사는 외형이 우리의 대여섯 배였고, 가구회사 1위 보르네오는 우리보다 열 배 이상 컸습니다.의욕적인 목표를 세워야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성장이 빨랐던 건 우수한 직원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투자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합니다.”오너와 전문경영인 간에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는 게 바람직

2013.01.25 15:54

6분 소요
Only One 정신으로 다지고 또 다진다

산업 일반

지난 5월 7일 서울 필동 CJ인재원. 임직원 400여 명이 참석한 2010 CJ 온리원 콘퍼런스에서 CJ그룹은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목표는 2013년 글로벌 CJ, 2020년 그레이트 CJ의 완성이었다.이재현 CJ 회장은 “2013년까지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한편 전 세계에 CJ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 2020년엔 그룹의 4대 사업군 가운데 2개 이상을 세계 1등으로 키우겠다”고 청사진을 밝혔다. 4대 사업군은 전통적인 식품사업,바이오·제약 등 생명공학 사업, 홈쇼핑 및 물류, 영화·극장·케이블 TV 등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사업을 가리킨다.2013년은 CJ 창립 60주년이 되는 해. 연간 목표 매출액은 38조원이다. 이 회장은 5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겠다고 벼른다. 그 전진기지가 중국이다. 그가 해외진출에 역점을 두는 것은 CJ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내수형이기 때문이다. 내수시장이 작은 우리나라 기업이 성장을꾀하려면 해외진출은 필수적이다. CJ는 4대 사업군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면서 인수합병(M&A)을 적극 활용했다. 해찬들·온미디어 등 핵심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업들을 사들여 성장 스피드를 높인 것이다. 글로벌 시장 진출도 M&A를 지렛대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1953년 창립된 CJ그룹은 식품회사에서 종합생활문화기업으로 변신했다. 모기업인 CJ제일제당과 대응하는 식문화와 CJ엔터테인먼트와 대응하는 대중문화를 조합해 ‛한류’ 문화를 해외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상품화하겠다는 것이다. 글로벌화와 문화의 상품화란 두 가지 방향성은 CJ가 직면한 두 개의 위기에서 탈출을 겨냥한 것이다. 하나는 내수업종 위주의 포트폴리오, 다른 하나는 제조업의 조락이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 대표 제조업이 조만간 중국과 인도에 추월당할 것”으로 내다본다. 제조업은 싸게 잘 만드는 게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CJ는 문화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도 문화지만 먹는 것도 문화입니다. 문화를 들고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내수형 제조업의 한계 극복그가 제시하는 항로는 원천 콘텐트에 대한 집중과 ‘규모의 경제’실현이다. 이에 따라 CJ엔터테인먼트, CJ미디어, 엠넷미디어 등이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 자체 콘텐트 생산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국내 2위의 유료방송 채널 사업자이자 케이블 TV 사업자인 온미디어를 인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레드오션화한 국내 방송시장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고 그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독창적이고도 경쟁력 있는 콘텐트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CJ는 국내 최대의 콘텐트 기업이다.글로벌화에 주력한 덕에 CJ의 해외매출액 비중은 삼성으로부터 독립 경영한 첫 해인 1995년 3.1%(541억원)에서 지난해 27.3%(3조9282억원)로 커졌다. 9배에 가까운 성장이다. 1995년 1조7334억원 규모였던 매출액은 지난해 14조3925억원으로 15년 만에 8.3배로 늘어났다. 종업원도 같은 기간 6800명에서 1만7000명으로 늘었다. 역사가 60년 가까운 기업으로서 식품 등 내수산업에만 주력했다면 이룰 수 없는 성장세다.CJ그룹의 전신 제일제당그룹은 1997년 삼성에서 법적으로 분가했다. 이재현 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손이다. 삼성에서 독립할 당시 사령탑은 손경식 CJ그룹 회장(현 회장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다. 손 회장은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 2002년 이 회장이 제일제당 대표이사 회장이 됐지만, CJ는이 회장과 손 회장의 공동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제일제당은 설탕·조미료·밀가루 등을 만들어 팔던 종합식품회사였다. 삼성에서 분리독립한 후 제일제당은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식품·외식 부문의 매출액 구성비는 지난해 46%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7년 CJ주식회사가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됐고 사업회사는 CJ제일제당으로 재출범했다. ▎CGV는 CJ가 개관한 국내 첫 멀티플렉스 극장이다. 사진은 최근 한국을 방문해 CGV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앤절리나 졸리. 직원들도 ‘이재현님’이라 불러CJ는 1999년 12월 직급 호칭 대신 회장에서 사원에 이르기까지 서로 ‘님’으로 부르는 호칭 혁명을 시작한다.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고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CJ측은 이런 수평적 호칭 문화가 완전히 정착됐다고 말한다. 이재현회장도 그룹 내에서는 이재현님으로 불린다. 이 회장의 누나로, 전문경영인으로 통하기를 바라는 이미경 엔터테인먼트·미디어 (E&M) 총괄 부회장도 그를 이재현님이라 부른다. 호칭 혁명을 주도한 사람은 이 회장이었다. “회사 경영과 호칭 문화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불평이 박탈감이 큰 간부들에게서 나왔다. 시행 초기 한 간부가 애로사항을 토로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과거의 리더는 자리가 90% 를 결정했다. 요즘은 윗사람이라고 해도 자격이 없으면 아랫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 호칭으로 대접 받을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리더가 되어야 한다.”파격적인 ‘님’ 호칭 문화는 조직 내 소통과 구성원 간 배려를 증진하는 작용을 했다. 아래로부터의 의견 개진이 활발해졌고 업무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졌다고 CJ측은 자평했다. 대기업으로서는 파격적인 복장 자율화, 플렉서블 타임제 등도 조직의 유연성을 높여줬다.CJ의 기업문화는 유연하면서도 강한 것을 지향한다. 내부적으로는 유연하고 외부 경쟁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강한 조직이 CJ가 추구하는 문화적 DNA다. 내유외강이랄까? 유연한 문화는 창의성의 토양이다. 이재현 회장은 “이런 유연한 조직이라야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위해 언제든 변신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엔터테인먼트, 유통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던 제조업체에 이런 수평적이고 유연한 내부 환경이 순풍으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CJ를 관통하는 기업혼은 온리원(Only One)이다. 최초의(First) 것, 최고의(Best) 것, 남다른(Differentiated) 것을 만들어 내는 정신이다. CJ 측은 신제품 개발, 인력 충원, 사회공헌등 모든 경영활동을 지배하는 철학이자 원칙이라고 강조했다.이재현 회장은 “어느 업종이든 진정한 온리원이라면 1등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석밥 시장을 창출한 햇반, 국내 첫 멀티플렉스 극장 CGV, ‘한국형 드러그 스토어’ 올리브영 등의 제품·사업·서비스가 바로 온리원의 산물이다. 소비자의 잠재적인 니즈를 발굴해 사업화에 성공한 것이다.이재현 리더십은 겸허와 뚝심이재현 리더십을 읽는 키워드는 겸허와 뚝심이다. 조부 이병철회장의 인생철학이기도 한 겸허는 그의 좌우명이다. 그가 말하는 겸허는 목표와 현실 간의 괴리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가리킨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 도전정신까지 그는 겸허란 말로 아우른다.지난 2월 CJ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그가 한 강연을 들어보자. “1등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그 순간부터 쓰러 집니다. 2등, 3등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아요.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바로 겸허입니다.”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E&M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콘텐트 산업에 CJ는 16년째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한국형 블록버스터 로 대박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줄곧 적자였다. 이 회장의 이런 뚝심은 한국인 특유의 민족성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람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일본인의 꼼꼼함, 독일인의 정교함, 프랑스인의 예술성 등 여러 민족의 우수성을 두루 갖췄습니다. 우리나라가 제조업을 비롯해 거의 전 부문에 걸쳐 잘나가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이런 가능성에 투자하는 겁니다. 콘텐트 분야도 10년 더 투자하면 우리나라가 큰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CJ는 사회공헌 활동과 그린 경영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내놓은 ‘햇반 저단백밥’은 기업이 벌인 재능 나눔 사업의 모델 케이스로 꼽을 만하다. 희귀병인 단백질대사질환 환자들을 위해 이 제품을 개발하느라 CJ는 8억원을 썼다. 소비자는 단 200명. 시장이 작아 만들어 팔수록 손해다. 김진수 CJ제일제당 대표는 “CJ의 햇반 기술력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제품을 출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CJ는 중국에 ‘제2의 CJ’를 축성 중이다. 중국은 CJ에 제2의 내수시장이자 글로벌 시장 진출의 교두보다. 베이징에서 CJ 현지 공장 포장두부의 시장점유율은 70%가 넘는다. CJ는 영토를 점차 동남아로 확장한 후 미국·유럽 등 선진국 시장을 뚫을 계획이다

2010.08.3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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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비즈니스 판이 바뀐다!

산업 일반

명품 시장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세계 경제위기에도 이들 브랜드 매출은 쑥쑥 늘어나고 있다. 한국 시장이 커지면서 해외업체들이 진출을 서두르고 있고 국내 백화점, 면세점들은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현재 국내 명품 시장 규모는 5조원대로 추산된다. 명품 산업의 겉과 속을 들여다봤다. 지난 5월 신라호텔에서 결혼한 장동건·고소영 커플은 톱스타의 결합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매번 최신 명품을 온몸에 두르고 나타나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명품 커플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 특히 대중 매체들은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날 때의 사진에 화살표까지 곁들여가며 어떤 브랜드인지 설명해 연일 화제가 됐다.두 커플이 입고, 들고, 신고, 찬 명품은 이제 막 국내에 소개된 따끈한 것들이다. 브랜드는 대부분 생소했다. 특히 장동건이 들었던 ‘발렉스트라’ 가방이 관심을 끌었다. 이 제품은 이건희삼성 회장의 둘째 딸인 서현(제일모직 전무)씨가 수입하고, 첫째 딸인 부진(호텔신라 전무)씨가 판매한다. ‘이탈리아의 에르메스’라고 불리는, 가죽으로 만든 보스턴 트래블 백 하나가 600만원이 넘는다.브랜드 놓고 치열한 수입경쟁명품 산업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교체되고 있다. 과거엔 유로통상이나 웨어펀 등 중소기업들이 브랜드 수입을 이끌었으며 대기업은 신세계 인터내셔널 정도뿐이었다. 지금은 판도가 바뀌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대기업 2, 3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것. 특히 삼성가 딸들의 행보가 이목을 끌고 있다.이서현 전무가 이끄는 제일모직과 정유경(이명희 신세계 명예회장의 딸) 부사장이 있는 신세계 인터내셔널이 적극적으로 브랜드를 들여오고 있다. 두 기업은 브랜드를 놓고 경쟁도 벌인다. 일례로, 신세계가 3년간 공들여온 브랜드 ‘꼼데갸르송’을 최근 제일모직이 가져갔다. 또 두 기업은 명품업체 인력을 스카우트하면서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해마다 7~8월은 패션계의 비수기다. 그래서 이때 대부분 업체는 휴지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해외 브랜드를 들여오는 데 계절이 따로 없는 것이다. 최근 제일모직이 ‘발렉스트라’를, 신세계 인터내셔널은 일본 브랜드인 ‘요지 야마모토’를 들여왔다. 수입하는 브랜드도 대부분 기존 유명 브랜드가 아닌 유럽에서 뜨기 시작한 ‘핫’ 한 브랜드나 소수 멋쟁이만 아는 것들이다. 미국, 일본 등 패션 선진국에도 진출하지 않은 낯선 브랜드를 들여오는 사례도 잦다.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대기업에서 브랜드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중소기업들이 상품성 높은 명품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런 상황이 외국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다. 여기에 최근 LG패션도 합류해 큰손들끼리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멋지게 열어주는 대기업에 브랜드 수입권을 넘기고 싶은 게 사실이다. 자금력으로 보나 사업 규모로 보나 명품은 이제 대기업 비즈니스가 됐다.”백화점 사상 초유의 매출명품을 사려면 백화점에 가라? 옛말이다. 오히려 백화점에서 사면 좀 손해 본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노 세일’은 명품의 자존심을 지키는 도구였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다. 백화점은 자존심이 구겨지든 말든 세일 기간에 앞다퉈 가격을 후려친다. 백화점들이 명품을 ‘폭탄 세일’ 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요즘 명품의 판매 루트는 다양해지고 있다. 백화점, 면세점에서만 팔던 것을 이제는 아웃렛, 매스티지백화점, 온라인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말이다. 이러니 콧대 높던 백화점도 손님을 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값을 내려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올 상반기 롯데, 현대, 신세계 등 백화점 빅3는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렸다. 롯데백화점의 상반기 총 매출은 5조200억원, 영업이익은 47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각각 14%, 11% 늘어난 것.현대백화점도 상반기 매출 신장률이 점포별로 6∼10%로 반기기준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상반기 매출이 작년 동기 대비 33% 늘어난 2조4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반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라고 신세계 측은 밝혔다. ▎신세계 센텀시티 샤넬 매장 백화점들의 이 같은 약진은 명품의 덕이 컸다는 분석이다. 원화 약세로 관광객이 늘고 소비 심리가 호전되면서 명품 소비가 많아진 것이다. 명품 업계 10년차인 롯데 장승호 애비뉴엘 브랜드 매니저의 말이다.“명품이 백화점 매출에 많은 영향을 준다. 애비뉴엘에서만 한달 기준 매출이 루이뷔통 50억원, 샤넬 25억원, 구찌 15억원 정도다. 곧 에르메스도 입점시킬 예정이다. 요즘은 고가 유명 브랜드보다 대중화된 명품의 성장이 가파르다. 소비자의 안목이 높아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명품 판매 루트가 다양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백화점은 상품권역이 다르다. 유통채널이 완전히 다르고 물량이나 제조 일자가 차이 나기 때문에 같은 명품이라도 신뢰도에서 차이가 난다.”멋쟁이들의 천국, 편집숍아직 편집숍이라는 단어가 낯선 사람이 대다수다. 하지만 이미 편집숍은 패션 카테고리의 하나로 자리 잡았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양한 브랜드와 독특한 아이템을 한 장소에서 만나볼 수 있는 곳이 편집숍이다.편집숍은 10년 전만 해도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일대에 개인들이 병행수입이나 직수입한 물건을 전시해 놓고 파는 개성파 매장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 대기업들이 분더숍, 10꼬르소꼬모 서울 등 ‘엣지’ 있는 편집숍을 오픈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요즘에는 백화점도 한 층 전체를 편집숍으로 꾸미는 등 트렌드에 맞춰 가는 추세다.가로수길 편집매장 엘본의 김예정 MD는 “유럽 브랜드들이 아시아 시장 안테나 역할을 하는 한국에 들어올 때 편집숍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잘되면 브랜드가 통째로 들어오기도 하고 정식 독점 수입상을 찾는 게 수순처럼 굳어졌다. MD가 필요할 때마다 직접 사오기 때문에 가격도 10%가량 싸고 트렌드에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 대기업 MD들이 틈만 나면 편집숍을 돌면서 체크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알뜰 명품족은 아웃렛·매스티지로!명품 가지고 다닌다고 ‘된장’ 소리를 듣던 시대는 지났다. 잘만 사면 오히려 일반 패션 상품보다 합리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 중심에 아웃렛과 매스티지 백화점이 있다. 예전엔 명품 아웃렛 하면 유럽, 홍콩 여행에서나 볼 수 있는 ‘미지의천국’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국내에 신세계 첼시 여주 아웃렛이 들어서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조금 철이 지났어도 베이식한 아이템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아웃렛을 즐겨 가기 시작했다.그리고 올해 이랜드가 서울 송파구에 NC백화점이라는 매스티지 백화점을 오픈하면서 그 열기가 더 뜨거워졌다. NC백화점 황우일 대리의 말이다.“6월 3일 오픈해 첫 달 목표 대비 115%를 달성하고 매출 180억원을 올렸다. 명품매장 ‘럭셔리 갤러리’ 매출이 가장 높았다. 코치나 마이클코어스 등 매스티지급 브랜드가 잘나간다. 고객이 줄을 서고 있다. 강남 뉴코아 아웃렛, 야탑, 불광에도 추가로 오픈할 예정이다.”그는 “백화점보다 싸면서도 면세점에서 구매한 제품의 문제였던 A/S를 1년간 자체 보증하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온라인 마켓 활성화 ▎NC백화점은 명품을 구입하려는 고객들로 늘 북적인다. 사실 고가의 명품을 클릭 한 번으로 사기는 쉽지 않다. 콧대 높은 명품 업체들도 웬만하면 온라인에 물건을 올리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명품 브랜드들이 온라인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취하겠다는 계산이다.브랜드 가치만 50억 달러가 넘는 패션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는 자사 제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온라인 쇼룸을 만들고 9월 정식 오픈할 예정이다. 휴고 보스는 지난 4월부터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지미추를 비롯해 랑콤, 쌘존, 띠어리, 도나카렌 등도 여기에 동참할 계획이다.이런 변화가 비단 불황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소비자가 온라인을 선호하는 마당에 마냥 외면했다간 경쟁사에 뒤처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는 듯하다. 실제로 지난해 경기침체로 전 세계명품산업의 매출액은 8% 하락했지만 온라인 명품 매출은 20%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엔 패션 명품 브랜드들의 아이폰애플리케이션도 한몫했다.롯데, 현대, 신세계 등 대형 쇼핑업체도 온라인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온라인 명품 시장 규모는 아직 1000억원대에 불과하지만 디지털 세대인 젊은 층의 소비패턴과 맞아떨어져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닷컴은 초기 명품 매출이 미미했지만 지난해 100억원을 돌파하며 2008년보다 20% 늘었다.현대H몰도 2008년 67억원이었던 명품 매출이 지난해 50%가량 늘어난 1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50% 성장한 150억원으로 온라인몰 1위에 오르겠다는 구상이다. 신세계닷컴은 2008년 매출이 60억원에서 매년 20억원씩 늘어 올해 100억원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신세계는 온라인 명품 시장에서 한발 뒤처졌지만 향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을 통해 모바일 명품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계획이다

2010.08.1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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