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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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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화’가 ‘패션템’으로…‘다이애나비’도 신은 167년 된 부츠는 [브랜도피아]

산업 일반

‘다이애나비가 즐겨 신던’, ‘장마철 20억원 매출 내는’, ‘160년 전통’ 브랜드. 노동자를 위한 고무장화 제조사에서 레인부츠계의 대표 브랜드가 된 영국의 ‘헌터(HUNTER)’의 이야기다. 올여름 5일 빼고 비가 내린다는 이른바 ‘장마 괴담’에 레인부츠가 품절 대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 세기 넘는 시간 동안 사랑받은 헌터의 인기도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공식 부츠였던 헌터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헌터의 시작은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헌터의 창업자는 미국 출시의 ‘헨리 리 노리스’로, 그는 궂은 영국 날씨 속 고무 부츠의 상품성을 높게 보고 영국에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에 헌터는 군인과 농부, 노동자를 위한 고무장화 제조사였으나 세계대전을 거치며 브랜드를 알리게 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물이 찬 참호와 홍수로 인해 진흙이 많은 환경에서 전쟁을 해야 했던 영국군들을 위해 헌터는 200만 켤레의 부츠를 만들게 되면서 영국군의 공식 부츠가 됐다. 헌터의 대표 아이템인 ‘웰링턴 부츠’의 명칭은 1815년 워털루 전쟁의 승리를 이끈 웰링턴 공작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됐다. 웰링턴 공작은 전쟁에서도 편하게 신을 수 있는 부츠를 주문했고, 이때 만들어진 부츠가 영국군 군화로 사용되면서 웰링턴 부츠라 불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영국에선 레인부츠를 ‘웰링턴 부츠’, ‘웰리스’, ‘검부츠’ 등 다양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전해진다.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품질을 인정받은 헌터는 1977년 영국 여왕과 에든버러 경으로부터 ‘영국왕실보증서(Royal Warrant)’를 부여받았다. 그 이래로 40년 넘는 기간동안 헌터는 영국 왕실에 제품을 공급하는 브랜드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헌터의 웰링턴 부츠는 다이애나비가 착용하며 당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헌터의 레인부츠가 방수를 넘어 ‘패션’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대표 모델 ‘케이트 모스’의 영향이 컸다. 2005년 영국 최대의 록 페스티벌인 ‘글라스톤베리’에서 케이트 모스는 숏팬츠에 진흙이 묻은 헌터 부츠를 찍은 파파라치컷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헌터 부츠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가게 됐다. 이후 안젤리나 졸리, 린제이 로한, 힐러리 더프 등 셀럽들이 헌터 부츠를 착용한 모습이 노출되면서 인기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됐다.헌터는 ‘비 오는 날에만 찾는 브랜드’가 아닌 일상에서도 소화 가능한 캐주얼 아이템들도 선보이고 있다. 부츠를 통해 보여주던 워터프루프 기술을 의류에도 구현하여 다양한 가방, 슈즈, 우산, 장갑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레인부츠도 길이와 소재, 색상이 매우 다양하고 가격은 14만~19만원대다. ‘장마 괴담’에 더 잘 나간다…월매출 1억원 돌파국내에서도 여러 연예인들이 헌터 부츠를 착용하며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2013년까지 레인부츠는 여름 시즌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이후 인기가 식으며 한동안 업계는 여름 시즌 비인기 아이템으로 전락한 레인부츠 출시를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1년부터 장마 기간이 길어지고 셀린느·샤넬 등 명품 브랜드들이 레인부츠 라인을 강화하면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자)를 중심으로 구매력이 폭발하며 헌터와 ‘락피쉬’ 등 대표적인 레인부츠 브랜드들의 매출이 크게 늘었다. 헌터는 올해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 새로 매장을 내 최근 월매출이 1억원을 넘어섰다. ‘락피쉬’ 레인부츠는 최근 매출 급증에 한남동·성수동에 잇따라 쇼룸을 새로 열고 있다. 현재 국내에 헌터 제품을 단독 수입하고 있는 곳은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포랩(FOURLAB)’으로, 지난해 기준 7월 중순까지 매출이 100억원을 돌파했고, 지난해 매출은 140억원으로 추정됐다. 올해 ‘헌터’ 플래그십 등의 오프라인 유통망도 확장한다. 현재 롯데 잠실과 신세계 대구, 더현대 등의 오프라인 매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롯데월드몰에 ‘헌터’ 플래그십스토어가 새로 오픈했다. 레인부츠 수요는 보통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는 6월부터 몰리지만, 올해는 5월 말부터 많은 양의 비가 내린 데다 장마 괴담까지 퍼지며 이른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패션기업 LF에 따르면 5월 1~23일 LF몰 내 ‘레인부츠’ 키워드 검색량은 전년 대비 26배, 전달 대비 6배 급증했다. 인기 검색어 상위에도 꾸준히 ‘레인부츠’, ‘핏플랍’ 등의 여름 슈즈 연관 키워드가 랭크돼 있다. 패션 플랫폼 W컨셉에선 지난달 1일부터 30일까지 약 한 달간 레인부츠, 아쿠아슈즈 등 장마 용품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레인부츠는 같은 기간 매출이 20배 이상 늘었다. 신세계백화점에선 앞서 지난 4월부터 5월 15일까지 헌터 등이 포함된 여름 신발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65.8% 증가했다.업계에선 레인부츠가 MZ세대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고, 올해 긴 장마가 예상된단 추측이 이어지며 레인부츠의 인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레인부츠를 구매했다는 20대 직장인 홍모씨는 “장화라고 하면 어린 시절 신었던 노란 장화가 떠올라 사지 않았었는데 최근 부츠 형태로 많이 나온데다가 길이도 다양해져 선택의 폭이 넓어져 하나 마련했다”며 “올여름 많은 비가 쏟아진다는 이야기도 많아 일찌감치 마련하려고 했던 것인데 구매하는 도중에 품절이 돼 알림 신청까지 해서 구매했다”고 전했다.패션업계 관계자는 “올해 장마가 유난히 길어진다는 소식에 고객들이 미리부터 장마 준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개인의 취향과 용도에 따라 다양한 색상과 길이의 레인부츠 제품들이 나오고 있어 기능과 패션 모두 만족스럽다는 고객 반응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2023.06.06 07:00

4분 소요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유럽 왕실, 미디어 시대에도 살아남은 이유

국제 이슈

왕실 가족의 자유로운 결혼은 오히려 왕가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다. 왕가는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런 왕실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 유럽에서 21세기형 왕실 전통이 형성되고 있다. 그 핵심은 자기존중과 가족애일 것이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94) 여왕의 부군인 에딘버러공 필립(1921~2021년)이 4월 9일 서거하면서 새삼 군주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17일 필립 공의 장례는 코로나19로 인한 제한 때문에 왕실 거처의 하나인 런던 서부 윈저 성의 성조지 성당에서 간소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럼에도 필립 공의 서거에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애도했다. 영국을 비롯해 영국 군주를 국가원수로 삼는 16개국은 물론이고 영국과 관련이 적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유럽 12개국이 군주제 왕족은 흔히 혈통을 바탕으로 지위와 재산, 특권을 세습 받는다.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런데도 필립 공의 서거에 전 세계적인 관심과 추모가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현재 유럽의 군주제 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유럽에는 군주가 국가원수인 주권국가가 모두 12개국이 있다. 규모가 큰 나라로는 영국(인구 6788만, 1인당 GDP 4만2300달러)·스페인(4745만·3만1178달러)이 있다. 네덜란드(1146만·5만2448달러)·벨기에(1149만·4만6117달러)·룩셈부르크(63만·11만4705달러) 등 베네룩스 3국도 모두 군주국이다. 스웨덴(1030만·5만1610달러)·덴마크(583만·5만9822달러)·노르웨이(539만·7만5420달러)의 스칸디나비아 3국도 포함된다. 리히텐슈타인(3만8800·17만3356달러)·안도라(7만7000·4만886달러)·모나코(3만8300·18만5741달러) 같은 미니 국가도 있다. 1929년에야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유엔회원국은 아닌 바티칸 시국(825명)도 따지고 보면 신정 군주국이다. 인구를 보면 영국·스페인이 인구 4000만 이상이며, 네덜란드·벨기에·스웨덴이 1000만 명대, 덴마크·노르웨이가 500만 명대이며 룩셈부르크가 60만 명대이고 안도라·리히텐슈타인·모나코는 수만 명대에 지나지 않는다. 바티칸은 1000명도 안 되는 초미니 국가다. 이 가운데 모나코·리히텐슈타인·룩셈부르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이 2019년 세계은행(WB) 기준으로 10만 달러를 넘는 부자나라다. 유럽의 군주국은 작지만 부유한 나라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유럽 군주국에는 층위가 있다. 군주를 부르는 칭호의 급에 맞춰 왕국·대공국·공국이 있다. 영국·스페인·네덜란드·벨기에·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 7개국이 왕국이고, 룩셈부르크는 대공국, 안도라·리히텐슈타인·모나코 등 3개국은 공국이다. 바티칸은 교황이 통치한다. 과거 유럽에는 허울뿐인 신성로마제국과 나폴레옹·나폴레옹3세의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1871년 통일 뒤의 독일, 러시아 등이 제국을 자처했지만 모두 사라졌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유럽 열강의 의해 무너졌다. 프랑스 제2 제국은 황제인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사라졌다. 왕국인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를 통치할 때 인도제국을 세워 대영제국을 자처했으며, 군주가 이를 세습했다. 하지만 1947년 인도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더 이상 제국을 자처할 수 없게 됐다. 바티칸과 안도라를 제외하면 모두 세습 군주가 국가원수를 맡는다. 바티칸은 종신 교황이 선종하면 추기경들이 후임을 선출한다. 안도라는 바티칸에서 임명하는 대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이 공동 국가원수를 맡는 독특한 제도를 유지한다. 신권국가인 바티칸과 국민이 세금을 받지 않고 군주가 제공하는 복지와 일자리로 사는 모나코와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군주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상징적인 존재에 머문다. 그런데도 유럽에선 군주제 폐지 목소리를 듣기 힘들다. 유럽은 20세기가 시작될 때 유럽에선 프랑스·스위스·산마리노만 공화국이고 나머지는 모두 군주국이었으나 지금은 전세가 역전됐다. 프랑스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제2 제정의 군주였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면서 파리에서 정변이 일어나 군주제가 사라졌다. 산마리노와 스위스는 공화국으로 건국됐다. 20세기에 군주제가 사라진 이유로 혁명·전쟁·국민투표 등이 꼽힌다. 혁명으로 군주제가 사라진 나라는 러시아 제국(1917년), 포르투갈 왕국(1910년)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은 1918년 사라졌다. 아이슬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이탈리아(1946년)와 불가리아(1946년)는 종전 뒤 국민투표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이 됐다. 유고슬라비아(1945년)와 루마니아(1947년)는 공산주의자들이 군주제를 무너뜨렸다. 국민투표로 1924년 군주제를 폐지했던 그리스는 1935년 국민투표로 치러 군주제를 부활했다. 하지만 1973년 국민투표로 군주제를 완전히 포기했다. ━ 미디어, 소탈한 왕실 일상 공개하는 도구로 작용 그런데도 지금은 군주제 폐지를 추구하는 정치적인 움직임은 보기 힘들다. 미디어와 인터넷을 앞세운 여론 정치가 발달하고 수많은 온라인 모임의 조직이 가능한데도 그렇다. 디지털 시대가 됐는데도 군주제는 살아남은 셈이다. 오히려 인터넷은 왕족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전달하고 국민의 마음을 얻는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이다. 과거 거대한 성벽 뒤에 숨어 그들만의 삶을 살던 왕족들이 매스컴과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일거수일투족이 오히려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 그러면서 대중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필립 공과 같은 글뤽스베르크 왕실이 왕위를 차지한 덴마크는 결혼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우선, 1972년 즉위한 마르그레테 2세 여왕(81)은 1967년 프랑스 외교관 앙리 드 라보르드 드 몽페자(87)와 결혼했다. 몽페자는 결혼 뒤 덴마크에서 ‘여왕 부군 헨리크’로 불린다. 프랑스 남부로 휴가를 떠나 마을 시장에서 줄을 서서 맛있는 치즈를 기다리는 모습은 국민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특권이나 호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소탈한 모습이었다. 결혼으로 부모의 속을 태우는 자녀들의 모습도 인간적으로 비쳤다. 여왕 부부는 두 아들을 뒀는데 모두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 장남 프레데리크(53) 왕세자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만난 호주 여성 메리 도널드슨(49)과 2004년 결혼해 슬하에 이란성 쌍둥이를 포함해 2남 2녀를 뒀다. 메리는 프레데리크가 왕자인줄 모르고 사귀기 시작했다. 차남 요아킴(52) 왕자는 두 차례 결혼을 모두 외국 출신과 했다. 1995년 첫 결혼의 상대는 홍콩 출신 알렉산드라 맨리(53)였다. 알렉산드라는 혈통이 복잡하다. 알렉산드라의 부친 나이젤은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부계는 중국과 영국 혈통이고 모계는 프랑스다. 알렉산드라의 모친 크리스타는 체코와 오스트리아 혈통이다. 요아킴과 알렉산드라는 2남을 뒀지만 2005년 이혼했다. 알렉산드라는 2007년 14세 연하의 영상작가 마르틴 죄르헨슨과 재혼했지만 2015년 가치관 차이를 이유로 헤어졌다. 요아킴 왕자는 2008년 프랑스 출신의 마리 카발리에(45)과 재혼해 1남 1녀를 뒀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휘게의 삶은 덴마크 왕실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글뤽스베르크 왕실이 지배하는 노르웨이의 하랄 5세(84) 국왕의 결혼 사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순애보다. 왕세자 시절이던 1968년 그는 부왕인 올라프 5세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이 여자가 아니라면 저는 평생 독신으로 살겠습니다.” 하랄 왕세자는 동갑내기 평민 소냐 하랄드센과 9년간 비밀연애를 한 끝에 결혼하겠다고 부왕 앞에 나타났다. 당시까지 노르웨이에서 평민 출신 왕세자빈은 없었다. 왕족의 연애결혼도 드물었다. 하지만 하랄 왕세자는 아버지 앞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그는 올라프 5세의 유일한 직계 계승자였다. 아들의 굳은 의지 앞에 아버지는 마음을 움직였다. 노르웨이 정부도 둘의 결혼을 지지했다. 이들은 그해 결혼하며 왕실에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국민은 왕족도 귀족도 아닌 왕세자빈을 반겼다. 이들의 사랑은 민주주의 시대에 신분이란 건 왕가에서도 별 의미가 없음을 확인시켰다. 하랄 왕세자는 1991년 하랄 5세로 왕위에 올랐으며 소냐는 노르웨이의 첫 평민 출신 왕비가 됐다. 하랄 5세 부부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뒀다. 모두 평민과 결혼했다. 마르타 루이세 공주(50)는 2002년 비주얼 아트 작가인 아리 미카엘 벤과 결혼해 세 자녀를 뒀지만 2017년 이혼했다. 호콘 왕세자(44)는 2001년 8월 결혼하면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 왕세자빈이 된 메테마리트 회이비(48)는 미혼모였다. 둘째, 왕세자빈이 데려온 아들 마리우스 보르그 회이비의 아버지이자 이전 동거남인 모르텐 보르그는 마약과 관련 있는 인물이었다. 셋째, 왕세자 커플은 2000년 12월 약혼을 발표하며 이미 1년 전부터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유럽에서 젊은이들의 혼전 동거는 일반적이지만 왕가에선 드물었다. 일부에선 노르웨이에서 왕실이 과연 필요하냐는 논쟁까지 벌였다. 하지만 호콘 왕세자는 아버지 못지않게 현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젊은층은 왕세자의 선택이 왕실 품위손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념 있는 결합이라며 커플을 지지했다. 이 결혼은 결과적으로 현대 왕실의 참된 권위가 격식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과 용기 있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호콘은 약혼식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과거 약혼할 때 사용했던 반지를 약혼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법이다. 두 사람은 딸 잉그리드와 아들 스베레를 낳았다. 전 남자친구와 사이에서 낳은 마리우스도 왕실 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왕위계승권만 없을 뿐이다. 두 사람의 결합은 ‘21세의 최초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 왕실결혼, 혈통이나 지위보다 ‘사랑’이 먼저 스웨덴 국왕인 칼 16세 구스타프(74)도 1976년 평민과 결혼했다. 왕세자 시절인 1972년 뮌헨올림픽 참관 당시 통역과 수행을 맡았던 실비아 조머라트(77)가 상대였다. 결혼식 전야제 갈라 콘서트에서 그룹 아바가 초연하며 실비아 왕세자빈에게 헌정한 노래가 바로 ‘댄싱 퀸’이다. 실비아 왕비는 독일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거쳐 뮌헨의 아르헨티나 영사관에서 근무하다 스웨덴 왕자를 만났다. 스웨덴어는 독일어·포르투갈어·프랑스어·스페인어·영어에 이어 실비아 왕비가 6번째로 구사할 줄 아는 언어다. 결혼 뒤 스웨덴 수화도 익혔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어도 스웨덴에선 74년 만들어진 새 헌법에 따라 76년 왕비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헌법이 왕실 규범이나 왕위계승법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국왕 부부는 1남2녀를 뒀는데 80년 왕위계승법이 바뀌어 ‘장남’ 대신 ‘첫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이에 따라 장남 칼 필립(41) 대신 장녀 빅토리아(43)가 왕위를 잇게 됐다. 빅토리아 왕세녀는 2009년 자신의 헬스 트레이너였던 평민 다니엘 베스틀링(47)과 결혼해 1남1녀를 낳았다. 칼 필립 왕자는 2015년 글래머 모델 출신인 소피아 헬키브스트와 결혼했다. 2010년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이 드러나면서 소피아는 왕세자빈 자격이 없고 왕실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봇물을 이뤘다. 하지만 왕자는 “사실은 추측과 반대”라며 “소피아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왕실에서 환영받고 있다”라고 여자 친구를 용기있게 감쌌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난독증으로 왕따를 당했던 것처럼 소피아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두 사람은 2남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차녀 마들렌(39) 공주는 2013년 영국 태생의 미국인 금융인 크리스토퍼 오닐과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뉴욕에서 거주한다. 외국 평민과 결혼해 해외로 이주한 셈이다. ━ 시대 흐름 거부하지 않는 왕실의 ‘자유결혼’ 자리와 지위를 위해 사랑을 버리는 왕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스칸디나비아 뿐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막시마 왕비(50)는 아르헨티나 출신에 부친이 군부독재 시절 농업장관을 지냈다. 빌럼알렉산더르 국왕(54)은 왕세자 시절 이런 문제를 정면 돌파해 사랑을 쟁취했다.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53)의 왕비 레티시아(45)는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으로 이혼 경력이 있지만, 왕실의 격려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차남인 해리 왕자(37)가 미국 할리우드 배우 메건 마클(40)과 결혼한 것도 왕족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사례다. 마클은 결혼 경력이 있는데다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영국 왕실은 이를 계기로 비로소 ‘열린 시대’를 맞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결혼에선 인간적인 매력과 끌림이 중요할 뿐, 신분·나이·과거·인종은 장애 요인이 되지 못하는 21세기 사회 풍속도를 반영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와 비교하면 영국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더욱 매력적이고 개방적이며 가슴을 적시게 하는 왕실 로맨스가 펼쳐져 왔다.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왕실의 ‘결혼 혁명’은 왕족들의 인간성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런 일을 통해 여왕·국왕·공주·왕자라는 지위, 왕실 가족으로서의 위치, 국가에서 제공되는 금전적인 혜택과 상속 등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왕실 가족의 자유로운 결혼은 오히려 왕가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다. 왕가는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런 왕실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 유럽에서 21세기형 왕실 전통이 형성되고 있다. 그 핵심은 자기존중과 가족애일 것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04.16 14:00

8분 소요
[세계 골프 장타대회 우승자의 비밀은] 긴 비거리는 어퍼블로와 상체 꼬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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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샤프트에 낮은 로프트의 드라이버 사용 … 티펙은 대개 높게 꽂아 2010년 리맥스세계장타대회에서 우승한 영국인 조 밀러(31)가 6년 만에 2016 세계롱드라이브챔피언십에서 423야드를 날리며 타이틀을 되찾았다. 밀러를 포함해 무시무시한 장타자 제이미 새들로스키가 말하는 비결은 어퍼블로와 상체 꼬임에 있었다. ━ 조 밀러의 비결은 어퍼블로 지난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미국 오클라호마 트래커빌의 윈스타월드카지노&리조트에서 세계 장타대회가 열렸다. 조 밀러는 4강전에서 437야드를 치면서 준결승에 진출했다. 캘러웨이 XR16 LDA 드라이버(샤프트는 후지쿠라, 강도 3x)에 길이 50인치 드라이버를 2개 들고 나온 밀러는 총 8번을 칠 수 있는 준결승전 다섯 번째 샷에서 이 대회 최장타 기록인 439야드를 날리면서 ‘감이 좋은 날’임을 느꼈다.결승전에서 맞붙은 라이언 스텐버그는 412야드를 날렸다. 무덤덤한 듯 바라보던 밀러는 티를 높이 꽂아 셋업한 후에 전광석화처럼 클럽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날아가는 볼을 확인할 생각도 않고 야수처럼 그라운드를 어슬렁거렸다. 사냥을 마친 맹수가 먹이 앞에서 포효하는 것 같았다. 어둠을 뚫고 끝없이 날아가던 볼이 떨어지고 굴러 423야드 지점에서 멈췄다. 우승이었다. 대회 주최 측은 지난해까지 주던 트로피가 아니라 올해 새로 만든 챔피언 벨트를 수여하고 밀러에게 12만5000달러의 상금을 안겼다.밀러의 장비부터 살펴보자. 대부분의 장타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로프트 5도를 사용했고, 우승을 확정지은 샷을 할 때 사용한 클럽은 로프트 4도였다. 호젤을 조정해 1도를 낮췄으니 실제 밀러의 우승을 이끈 드라이버 로프트는 놀랍게도 3도였다. 일반적으로 PGA투어 선수들의 드라이버 로프트는 9~10도를 오간다. 남자 아마추어 골퍼는 로프트 10.5~11.5도, 여성은 요즘 14도까지도 사용한다. 그래야 볼이 공중에 뜨기 때문이다. 밀러의 로프트 3도짜리 클럽이 볼을 띄우기나 할까 싶다.장타 대회에 나오는 체격 좋은 근육질 선수들은 PGA투어 선수들보다 더 길고 단단한 샤프트를 끼우고 더 낮은 로프트의 드라이버를 사용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티펙을 더 높게 꽂는다. 장타대회에서는 PGA투어의 드라이버 한계치보다 2인치 긴 50인치 길이 샤프트까지 쓸 수 있고, 티 높이도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영국왕실골프협회(R&A)는 2004년부터 정규 투어에서 티펙의 길이가 4인치(10.16cm)를 넘지 않도록 규정하지만 장타대회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 R&A에선 정규 투어 티펙 길이 4인치 이하로 규정 때문에 장타대회에 나오는 선수는 긴 클럽을 들고 나와 티를 높게 꽂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어퍼블로(upper blow)로 임팩트가 되면 볼이 파워의 손실 없이 날아간 후 지면에 떨어지고 나서도 더 많이 굴러가게 된다.밀러는 자신의 홈페이지(joemillerldc.com)에 장타 비결을 5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티를 높이 꽂는다. 둘째 볼을 왼발 끝 선에 놓는다. 셋째, 왼쪽 어깨가 높고 오른쪽이 낮게 셋업하고 스윙 중에도 그 기울기를 유지한다. 넷째, 백스윙에서 상체를 최대한 꼬아라. 마지막으로, 가능한 한 빠르게 스윙하라는 것이다.다섯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볼이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궤도 즉, 어퍼블로로 치라는 것이다. PGA투어 선수 중에서 장타대회 선수처럼 드라이버 샷을 하는 선수는 왼손잡이 버바 왓슨이다. 왓슨은 로프트 7.5도 드라이버를 들고서 티를 최대한 높게 꽂은 후 123.72mph로 빠르게 스윙한다. 임팩트가 이뤄지면 볼의 타출각 즉 런치앵글(launch angle)이 8.47도를 이뤄 300야드를 훌쩍 넘기는 것이다. 티펙의 높이 제한이 없다면 왓슨은 더 높은 티와 더 낮은 로프트 드라이버로 더 멀리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미국 NBA에서 팬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슬램덩크 콘테스트’를 열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홈런더비’를 벌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의 골프 이벤트가 바로 세계 장타대회다. 1976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41년의 역사를 쌓은 이 대회는 오랫동안 리맥스(Re/max)가 스폰서가 되면서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 사막에서 주최했으나 올해부터 골프채널이 스폰서가 됐고 장소도 옮겨 오클라호마로 옮겨 밤에 중계했다.올해는 흥행을 위해 인도에서도 지난 8월 말 이틀 간 예선전을 치러 선수를 파견하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9월 초에 드라곤 장타대회를 열어 챔피언을 뽑아 매년 출전 선수를 파견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권의 우승은 아직은 요원한 얘기다. 상체 근육형 서구인들의 무대다. 대회장은 길이 450야드, 폭 60야드의 하키 필드 같은 평평한 경기장에서 치러진다. 3단계의 예선을 치러 본게임을 치르는데 몇 년 전부터는 시니어부와 여자부까지도 만들어졌다.1995년 이전까지는 절대 비거리로 챔피언을 가렸으나, 이후부터는 16강 토너먼트 매치방식으로 챔피언을 가리고 있다. 장타자들의 비거리 역시 2000년을 분기점으로 갈린다. 90년대까지 340야드를 넘지 못하던 비거리는 이제는 통상 400야드를 넘는 정도까지 성장했다. ━ 적어도 400야드는 넘겨야 우승 도전 초창기 76, 77년 첫 두 해는 이반 윌리암스가 319, 353야드를 날리면서 우승해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냈으나 인지도는 거의 없었다. 골퍼들로부터 관심을 받은 계기는 타이거 우즈가 장타를 휘두르면서 화려하게 투어에 데뷔하고부터다. 캐나다의 약사 출신 제이슨 주백은 1996년부터 99년까지 4년 간 최장타자를 지켰고 2006년에 다시 우승하는 저력을 보이면서 ‘고질라’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였다. 이제 50대를 넘긴 주백은 지난해 시니어 부문에 출전해서 우승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올해는 리맥스에서 골프채널로 주최사가 바뀌면서 우승 상금이 다소 줄었으나 매년 이 대회만 출전하는 선수도 있다. 그들은 각종 골프 이벤트에 초청자로 다니면서 송판을 뚫거나 무릎을 꿇고 300야드를 날리는 장타쇼를 하면서 돈을 번다.그들이 정식으로 골프 라운드를 하면 스코어는 시원찮다. 장타대회란 주로 평평한 레인지에서 여러 번 볼을 쳐서 그중 가장 멀리 나간 볼을 겨루기 때문에 그들의 샷 정확성은 별로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만 제대로 걸리면 그걸 점수로 치기 때문에 오로지 장타 한 방을 노리는 게임이다. 또한 장타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은 어렸을 때 다른 종목의 스포츠를 하다가 골프로 들어온 선수가 많다. 타 종목에서 쌓은 파워를 골프 샷으로 응용해내는 것이다. 2012년 우승자 라이언 윈터는 마이너리그 야구선수 출신이다. 윈터는 신장 193cm 몸무게 114kg 거구로 장타 전용 드라이버인 로프트 4.5도 크랭크 모델을 들고 다닌다. 이 대회에서 469야드를 친 세계 최장타 기록도 가지고 있다.2008, 2009년 리맥스장타대회 우승자인 캐나다의 왼손잡이 장타자 제이미 새들로스키(28)는 장타를 내는 스윙이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주니어 시절 아이스하키 선수를 했다지만 신장 177cm 체중 75kg에 깡마른 체형을 봐서는 장타 대회 2연패자로 보기 어렵다.아담한 새들로스키의 장타 기록은 비공식이지만 475야드까지 기록된다. 14도 하이브리드로는 350야드, 피칭 웨지로는 180야드를 보내지만 퍼터로는 300야드까지 보낸다. 퍼터가 더 멀리 나가는 건 이유가 있다. 퍼터는 길이가 짧고 페이스도 작지만 로프트가 10도 미만이기 때문에 장타의 공식인 티를 높게 세우고 어퍼블로로 맞히면 아이언보다도 멀리 보낸다.캘러웨이 X2핫 드라이버(로프트 4~5도, 길이 48인치)를 쓰는 새들로스키의 스윙을 3D 입체영상으로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도 발견되었다. 백스윙 톱에서 손이 12시를 가리킬 때 클럽헤드는 거의 5시를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백스윙을 마쳤을 때 허리는 49도를 도는데 비해 어깨는 최대 166도를 돈다. 여기서 117도의 ‘엑스팩터(X-factor)’가 발생한다.‘엑스팩터’란 백스윙 톱에서 허리와 어깨의 회전 각도의 차이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대체로 백스윙 톱에서 허리는 50도, 어깨는 최대 90도를 돌려서 40도의 꼬임, 즉 엑스팩터를 만들어내는 데 비해 새들로스키는 그 각도가 3배에 가깝다는 의미다. 이런 큰 꼬임이 마치 스프링처럼 빠른 스윙 스피드를 이끌어낸다. 새들로스키도 자신의 장타 비결을 ‘스윙을 빠르게 하려 노력하지 강하게 치려 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의 헤드스피드는 148mph로 버바 왓슨보다도 20% 더 빠르고 일반 아마추어보다 두 배 정도 빠르다. 하지만, 새돌로스키는 지금은 아시안투어에서 선수로 있으며 GPS프로그램 업체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드라이버는 캘러웨 이XR 16 서브제로(길이 44.75인치, 로프트 8.5도)의 일반 모델을 가지고 다닌다. 물론 그 걸로도 350야드 정도는 거뜬하다고 한다.

2016.10.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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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문호 여는 해외 명문 골프장] ‘개와 여성은 출입금지’는 옛말

산업 일반

종전까지 여성 골퍼에게 문을 꽁꽁 닫아걸었던 남성 중심의 명문 골프장들이 내장객을 늘리고 최신 트렌드에 부합하기 위해 여성에게 문호를 활짝 열고 있다.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세인트앤드루스만에 위치한 영국왕실골프협회 즉, 로열앤에인션트(R&A)클럽의 입구에는 20여년 전만하더라도 ‘개와 여성은 출입금지(No dogs or women allowed)’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여성을 개와 빗댈 만큼 여성 차별이 심했던 곳. 그래서 남성들만의 비밀 결사와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이 골프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골프(Golf)라는 단어가 신사들만의 게임이니 숙녀들은 금지(Gentlemen Only, Ladies Forbidden)에서 나왔다’는 철지난 우스갯소리를 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지고 ‘마초’라고 면박당하기 십상이다. 영국·미국의 오랜 남성들만의 클럽들은 이를 새로운 운영 시스템의 변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콧대 높던 로열앤에인션트 클럽의 전향적 결정 피터 도슨 R&A회장은 지난 2월 초 ‘앤 공주, 안니카 소렌스탐, 로라 데이비스 등 7명이 260년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회원이 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도슨 회장은 “3년 내에 여성 회원 수는 15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면서 여성 회원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뜻을 시사했다. 앤 공주는 1976년 몬트리얼올림픽에 승마 선수로 출전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일 정도로 스포츠계에서 비중이 있는 인물이다. 소렌스탐이야 골프여제로 전설이된 인물이며, 로라 데이비스도 메이저 4승을 한 선수다. 1754년에 설립된 R&A는 ‘지난해 9월 전 세계 회원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해 85%의 찬성으로 이번 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유럽 골프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R&A의 여성 회원 입회 허용 조치는 주변의 완고한 골프장들에 메가톤급 파장을 가져왔다. 한 달여가 지나자 세인트앤드루스와 함께 브리티시오픈을 순회 개최하던 로열세인트조지 골프장도 개장 128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회원 허용을 발표했다. 이 골프장은 2011년을 포함해 브리티시오픈을 14번이나 개최한 명문 코스로 회원의 81%가 참가한 투표에서 90%의 회원이 이를 찬성했다고 한다.R&A를 비롯한 브리티시오픈 개최 코스들은 그동안 여성 회원을 받지 않는 규정으로 인해 다양한 압박을 받아왔다. 지난 2013년 남성 전용 클럽인 스코틀랜드 뮤어 필드에서 열린 브리티시오픈 때 여성인 마리아 밀러 영국 문화장관이 항의 표시로 참관하지 않기도 했다. 브리티시오픈 10개 코스 중에 뮤어필드와 로열트룬은 남성들만의 회원 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나 여기도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1878년 창립돼 137년간 남성 클럽으로 있던 로열트룬은 내년에 개최하는 브리티시오픈에 맞춰 여성 회원 입회를 허용할 전망이다. 로열트룬 위원회는 이웃한 여성클럽인 트룬과 공동으로 내년 남녀 브리티시오픈을 공동 개최하기 위한 합작위원회를 만들었다. 현재 여성 골퍼는 로열트룬에서 라운드는 가능하지만, 회원이 될 수 없고, 클럽하우스에도 들어갈 수 없다.뮤어필드는 유일한 남성 클럽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골프사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생겨난 회원들의 모임이 뮤어필드였다. 골프장의 별칭도 ‘영광스런 신사의 클럽’이다. 오늘날에도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려면 넥타이를 매야 하는 등 이곳만의 특수 의례가 엄격하게 지켜진다. 심지어 게임 방식도 오전에는 포섬(2인 1조로 볼을 번갈아 치는 방식), 오후에는 포볼(2인 1조로 두 명중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방식)로 플레이해야 한다. 여성은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수 없고, 라운드는 허용되지만 여성 4인이 한 팀으로 플레이 하는 것은 금지되며 남성이 한 명이라도 동반해야 한다. 뮤어필드가 여성 회원을 받는다면 클럽 이름 변경부터 고민해야겠지만 여성 참여를 반영해야 하는 추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미국의 전통 명문 클럽들은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종과 여성 문제의 첨예한 대결장이기도 했다. 미국 최상류층인 백인 사회의 폐쇄적인 커뮤니티 문화가 온존한 곳이 프라이빗 회원제 골프장들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PGA챔피언십 개최를 두 달 앞둔 개최 코스 쇼울크릭의 오너 홀 톰슨이 멤버십에 관한 답변을 하면서 “우리는 흑인만 빼고 회원에 어떤 차별도 없다”고 말했다가 흑인과 시민단체의 극심한 시위에 직면했다. 스폰서인 IBM이 후원을 철회했고 주관 방송국도 이듬해부터는 갈릴 정도였다. PGA투어 등 골프 유관단체들이 공동으로 ‘대회장을 선정할 때 인종과 차별 문제를 중시하겠다’고 천명하자, 오거스타내셔널은 첫 흑인 회원인 가넷TV 대표론 타운젠드를 받아들이며 발 빠르게 위기를 모면했다. 이와 달리 AT&T페블비치내셔널프로암을 개최하던 사이 프러스포인트와 웨스턴오픈을 개최하던 시카고의 버틀러내셔널은 남성 회원만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대회 개최권을 잃었다.하지만 2002년에 여성 인권 운동가 마사 버크가 오거스타내셔널의 여성 차별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논쟁은 다시 불붙었다. 여러 스폰서 기업이 이에 동조하자 골프장 측은 스폰서들을 배제하는 초강수로 맞섰다. 대회장에 기업 광고가 없고 순수한 대회만 있는 고집은 마스터스의 특징으로 자리잡았고 오거스타는 판정승을 했다. 그러던 2011년 새로운 딜레마에 봉착했다. 메인 스폰서인 IBM의 회장은 의례적으로 명예 회원으로 마스터스에서 그린재킷을 입도록 초청된다. 그런데 당시 IBM 회장은 여성인 버지니아 로메티였다. 고심 끝에 오거스타는 로메티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녀는 결국 핑크재킷을 입고 마스터스를 참관했다. 이듬해 오거스타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인다고 발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투자회사인 레인워터의 달라 무어 부회장을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작년에는 로메티 IBM 회장까지 입회하면서 여성 회원은 세 명으로 늘었다. ━ 폴라 크리머 “여자 마스터스 열어달라” 최근에는 인기 여자 골퍼인 폴라 크리머가 “여자 마스터스를 오거스타에서 열어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이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호응했으나, 오거스타는 ‘회원들만의 라운드로도 빠듯하다’면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면서 무시했을 상황이다.미국에는 남성만 회원으로 받는 폐쇄적인 회원제 코스들이 더러 있다. 일리노아주 오크브룩의 버틀러내셔널, 메릴랜드주 베데스타의 버닝트리클럽, 텍사스주 휴스턴의 로킨바 등이 대표적이다. ‘시카고의 오거스타내셔널’에 비유되는 버틀러내셔널은 최근 내장객이 줄고 골프에 대한 관심이 줄자 여성을 받을지 회원 투표까지 했으나 40%로 부결됐다고 한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놀이터를 빼앗길까 반대하고, 젊은이들은 골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1922년 설립된 버닝트리는 워싱턴과 가까워 역대 대통령들이 회원으로 있던 골프장으로 유명하다. 슬로우 플레이를 하는 여성 골퍼들에 짜증이 난 설립자가 ‘여성 회원은 받지 않는다’고 공표한 것이 오늘날까지 골프장 운영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최근 칵테일파티에는 여성의 클럽하우스 입장이 허용되고, 프로숍에서 물건을 사도록 문호를 열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족 클럽’임을 표방하고 있다. 이곳에서 여성이 라운드할 때가 멀지 않았다는 뉘앙스이기도 하다.

2015.05.1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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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The Full Harry 벌거벗은 왕자님

산업 일반

영국 육군 해리 윈저 대위는 곧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처한 여느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신나는 휴가로 스트레스를 풀었다(let off steam on a lively furlough). 그가 휴가를 떠난 곳은 라스베이거스. 친구들을 비롯한 여러 한량들과 어울렸다. 그중 한 명이 엘리자베스 여왕 손자가 군복을 벗은, 눈길을 확 사로잡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그리고 팔았다). 그 초점이 흐릿한 사진들 속에서 한 알몸의 여성이 마찬가지로 전라의 해리왕자 뒤에서 몸을 바짝 밀착했다. 왕자는 몸 앞쪽으로 양손을 모아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제스처를 취했다.그 사진들은 곧바로 미국의 외설 사이트에 실렸다.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그 사진들의 게재는 해리의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영국왕실의 입장을 존중해 곧바로 움직이지않고 꾹 참았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24일)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더 선’이 해리 왕자의 전라 사진을 1면에 실었다. 그리고 평소 어휘로 기발한 기교를 발휘하던 그 신문의 기준에 비하면 다소 유치한 제목을 달았다(a punning headline that was rather lame by the paper’s usual standards of sassy word-play).게다가 사진을 게재하는 이유로 내놓은 변명은 더 썰렁했다. ”수억 명이 인터넷에서 이미 그 사진들을 봤기” 때문에‘더 선’이 싣지 않으면 “대세에 반하는 (perverse) 행동”이라고 편집국장은 주장했다.

2012.08.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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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작년 말 국내에 한 와인 테이스팅 클럽이 문을 열었다. 이름은 르끌로(Le Clos). 프랑스어로 ‘담장에 둘러싸인 포도원’이라는 뜻이다.전 삼성물산 영국법인 사장 박흥규(56) 대표와 부르고뉴 와이너리 소유 가문의 프레데릭구베(Frederic Goubet·45) 대표가 공동 창업했다. 이들이 의기투합한 이유는 뭘까.박대표와 구베 대표를 6월 11일 만났다.와인은 이미 친숙한 술이다. 와인 애호가가 늘면서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귀한 와인일수록 가격은 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활성화되는 것이 각종 테이스팅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에서 ‘어떤 와인을 마시는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누구와 어떻게 마시는가’이다. 와인을 마시는 행위가 곧 사교와 친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누구와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르끌로의 박흥규 대표는 “제대로 된 클럽문화를 구축하고 싶다”며 “성숙한 와인문화를 통해 시장도 덩달아 성숙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멤버·비멤버를 위한 정기적 테이스팅 디너와 프라이빗 테이스팅 컨설팅, 그리고 프랑스 베스트 소믈리에 도미니끄 라뽀르뜨(Dominique Laporte)와 함께 하는 올드 빈티지 디너 등이 현재 르끌로의 주 사업내용이다. 와이너리 투어와 셀러링 서비스등도 계획하고 있다.“르끌로는 파인 와인(fine wine)을 둘러싼 비지니스다. 내가 생각하는 파인 와인은 스토리가 중요하다. 포도밭과 생산자의 역사가 깊고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와인. 그리고 장인정신이 드러나는 와인이어야 한다.”르끌로는 박 대표에게 제 2의 도전이다.그는 “삼성은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며 “근 30년간 쌓은 인맥이 지금 이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와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가 프랑스와 영국에 주재할 당시 생겼다. 그러다 와인공부를 본격 시작한 것은 2004년 삼성물산런던 지사장으로 발령 나면서다. 경험에 비해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처음엔 베리브라더스의 테이스팅 행사에 다녔다. 베리브라더스는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와인상으로 영국왕실에 와인을 공급하는 회사다.100회에 달하는 테이스팅에 참여한 박 대표는 “베리브라더스의 와인문화 사업을 벤치마킹하고 싶었다”며 “2009년 말 퇴임 후 2년간 와인 공부에 전력했다”고 말했다.미국 UC Davis에서 와인마케팅 전문가과정,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과 프랑스와인교육기관 OIV를 거쳤다. OIV 마스터 프로그램은 15~20명의 학생들이 2년간 24개국을 돌며 와인산지와 시장을 견학하는 코스이다.거기서 지금의 동업자 프레데릭 구베를 만났다. 구베 대표는 “OIV를 통해 글로벌한 입맛을 가지게 되었다”며 “이는 각 시장에 알맞은 와인을 선별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말했다.구베 대표도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광고계에 20년간 종사하며 한 때 업계 정상까지 올랐다. 세계적인 광고회사 오길비&매더스를 시작으로 WPP 그룹의 프랑스 지사장을 지냈다. 구베 대표는 2년 전 자신의 열정을 따라가기로 결정, 와인사업으로 커리어를 전향했다.그는 “집안이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어 업계 진출이 비교적 수월했다”고 말했다. 그의 삼촌은 부르고뉴 뽀마르 지역의 도멘 드 꾹셀(Domaine de Courcel)의 소유주이다. 이 와이너리는 17세기부터 7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어 업계 인맥이 돈독하다.구베 대표는 현재 프랑스에서 고급와인을 취급하는 와인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품질이 뛰어나고 가격 경쟁력이 좋은 와인을 발굴해 시장에 소개하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밝혔다.프랑스 와인뿐만 아니라 좋은 품질의 이탈리아, 스페인산 와인도 거래하고 있다. 보르도·부르고뉴 와인 가격 상승으로 프랑스 소비자들조차 이탈리아, 스페인 산 와인을 많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구베 대표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생산 와인 중에서도 남다른 스토리를 가진 와인을 선호한다”고 덧붙였다.친구들과 함께 스토리를 공유하는 것도 와인을 즐기는 문화 중 큰 기쁨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와인을 진정 사랑하려면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6월 7일 르끌로는 신라호텔 라 컨티넨탈에서 보르도 5대 샤토 올드 빈티지 디너의 첫 회를 가졌다. 샤토 무통 로쉴드(1960년산), 라투르(1971), 라피트 로쉴드(1975), 오브리옹(1984), 마고(1986) 등 기라성 같은 와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디저트 와인으로는 디켐(1986)이 등장했다.주목할 점은 이 와인들의 출처다. 각 샤토에서 직접 공수해 항공운송 했다. 프랑스 현지에서 이 과정을 총괄한 구베 대표의 말이다.“디너 전 와인들을 오픈 했을 때 상태가 완벽했다. 진동은 올드 빈티지 와인에 치명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와인들은 몇 십년간 저장고에서 흔들리지 않고 보관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라피트 3병 중 한 병은 버려야 했다. 일반인은 감별하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손상이었지만 디너의 퀄리티 유지를 위해 과감히 버렸다.이후 참가자들의 소감을 들어보니 라피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고 하더라. 만약 버리지않고 서빙했다면 다른 평가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박 대표와 구베 대표는 최고급 와인을 최상의 서비스로 제공하려면 최고의 소믈리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OIV 후배이자 2004년 프랑스 베스트 소믈리에 타이틀을 거머쥔 도미니끄 라뽀르뜨를 객원 소믈리에로 영입했다.라뽀르뜨는 6월 7일 올드 빈티지 디너에서 베스트 소믈리에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와인 디캔팅과 서빙 시기, 음식과의 마리아주를 총 지휘했다. 디너 도중에는 각 코스마다 친절하고 디테일한 설명으로 참가자들을 가이드했다. 라뽀르뜨는 올드 빈티지 디너 외에 ‘도미니끄의 와인스쿨’이라는 커리큘럼으로 일반 테이스팅 수업도 진행했다.앞으로 지속적으로 방한하여 르끌로와 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올드 빈티지는 보존 상태가 관건박 대표에게 올드 빈티지 디너를 마친 소감을 물었다.“3개월 동안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과정은 힘들었지만 하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들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참가 비용만큼이나 기대치도 높았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올드 빈티지 디너는 르끌로를 고급 클럽문화 브랜드로 키우는 데 중요한 행사이다.”이 날 참가자들은 “세계적인 퀄리티를 경험해 그동안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영역에 들어온 것 같다”, “일반 와인 동호회에서 여는 올드 빈티지 테이스팅과 차원이 다르다”라는 소견을 보였다.구베 대표는 한국 와인 시장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다.“보통 시장에 와인이 처음 소개되면 부유층을 위한 고가 브랜드들이 먼저 들어온다.그리고 대중적인 저가 와인들이 들어온다.그 사이에 폭 넓은 중저가, 중고가 와인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중국의와인시장은 돈은 많지만 문화가 성숙하려면 한참 멀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너무 앞서 있다. 한국은 아직 성장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보인다.”

2012.08.03 15:44

4분 소요
2011년 승자와 패자

산업 일반

다사다난하고 혼란스럽고 짜릿하고 무시무시하고 파멸적인 잠재력을 지닌 그리고 가끔씩 승리를 안겨줬던 해에 누가 웃고 누가 울었을까? 2011년을 어떻게 평하든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환희의 비상과 비참한 추락, 질주하는 영웅과 코웃음치는 섬뜩한 악당의 한 해였다. 영국 왕실 커플은 동화 같은 결혼식을 치렀다(32쪽).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불륜은 공개 망신을 당해 마땅했다. 지상 최고의 악당은 다부진 체격의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씰(Navy SEAL) 요원들로부터 얼굴에 총격을 받고 숨졌다.물론 달콤한 정의의 승리와 버킹엄궁에서 춤추는 왕자비가 전부는 아니었다. 깊은 불확실성, 결말 없는 혁명의 한 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제 불평등과 싸우고(40쪽) 무자비한 독재를 타도하고 변화를 요구했다(26쪽). 미국 의회는 정부를 폐쇄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몇 개월 뒤 또 그랬다. 미국이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일지 모른다는 약하지만 집요한 느낌이 12개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진이 완전히 빠지는 듯했다.그러나 우리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유럽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안간힘을 쓴 덕분에 아직 갈라서지는 않았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발을 뺐으며 리비아 사태를 뒤에서 이끌었고 지금은 중동지역이 멀고 먼 평화를 향해 힘겹게 나아가는 모습을 희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미국에선 리얼리티 쇼 같은 예비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러 진짜 공화당 대선 후보를 확정하기 직전에 있다.근래 들어 해마다 그랬듯이 2011년은 나쁜 남자들의 해이기도 했다. 2010년 타이거 우즈와 관계를 맺은 레이첼 우치텔을 변론해 그의 몰락을 이끌었던 스캔들 전문 변호사 글로리아 알레드가 전성기를 맞았다. 우즈를 필두로 앤서니 위너 하원의원(38쪽), 허먼 케인 대선 후보, 배우 찰리 신,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의 추문이 잇따랐다. 그런데 2012년에는 제발 정치인들이 휴대폰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찍는 짓을 그만둘 수 없을까?어쩌면 2011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최대 승자는 24세의 숫총각일지 모른다. 프로 미식축구팀 덴버 브롱코스의 쿼터백 팀 티보는 팀의 잇따른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지금은 미국 전역의 십대들이 그를 따라 기도하는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는 ‘티보잉(Tebowing)’을 한다. 반면 그들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을 따라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모두가 티보를 좋아하는 만큼 의회를 싫어한다는 증거다).모두 함께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의 승자를 축하하고 패자에게 야유를 보내자. 그리고 환영한다, 2012년! 빨리 와줘서 정말 다행이다.2011 승자들윌리엄과 케이트 부부 대사를 틀리거나(flub a line) 드레스 자락을 밟는 실수를 저지르기 십상이었지만 이 영국 왕자 커플은 4월 19일 20억 명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서도 완벽하게 결혼식을 치러냈다. 왕자비의 드레스는 눈부셨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윌리엄의 속삭임은 세상의 모든 소녀가 꿈꾸는 말이었다. 그 뒤로 그들은 신혼의 단꿈(newlywed bliss)을 상징하는 커플이 됐으며 영국왕실의 마법을 되찾아줬다.앙겔라 메르켈 한 여자가 유럽을 구할 수 있을까? 유럽대륙의 경제와 존재의 위기 한복판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올해의 원더 우먼이 되려 애썼다. 재정위기 해소를 위한 협약(debt deals)을 막판에 이끌어내고 붕괴의 위협을 연거푸 막아냈다. 가슴 떨리는 줄타기(balancing act)였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회복으로 가는 먼 길에서 “인내”를 요구했다.스타의 자손들 족벌주의(nepotism)로 부르든 운명으로 부르든 상관 없다. 올해는 유명인들의 자녀가 부모의 그늘 속에서 뛰쳐나와 자력으로 각광 받은 해였다. NBC의 첼시 클린턴과 제나 부시 헤이거(조지 부시 딸), MSNBC의 메건 매케인(존 매케인 상원의원 딸) 등 TV 뉴스에 그런 엄친딸이 많다. 한편 영화배우 미아 패로가 전 남편 우디 앨런 감독 사이에서 얻은 엄친아 로넌 패로는 로즈 장학금(a Rhodes scholarship)을 받았다. 네이비씰 팀(ST) 6 군인인형 GI 조는 한물갔다. 미국의 새로운 수퍼맨은 해군 특수부대의 이 정예요원들(elite Navy squad)이다. 이들은 지난 봄 파키스탄에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급습하는 작전을 거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수행해 그를 제거했다. 미국인들이 힘과 배짱을 아쉬워하던 시점에 ST6는 진정한 영웅을, 그리고 벙커에 은신한 그 알카에다 주동자를 잡으려는 10년에 걸친 노력에 승리의 피날레를 안겨줬다. 팀 티보미국 미식축구리그(NFL)는 지난 가을 덴버 브롱코스 팀의 기적을 만드는 쿼터백 덕분에 예수에게 다가갔다(came to Jesus). 터치다운 뒤 한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듯한 자세가 미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a full-blown phenomenon). 호사가들은 그 노골적인 복음주의자의 정계 진출을 예상한다. 덴버 팬들은 그저 극적인 승리를 더 많이 올리기만을 바랄듯 싶다.9·11 테러 이후 거의 10년 만에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한 뒤한 네이비씰 요원:“하느님과 나라를 위해제로니모, 제로니모, 제로니모(Geronimo, ‘해냈다’는 뜻).”얼마 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백악관에서: “그를 해치웠다(We got him).” 2011 승자들점령 지난 가을 미국 좌파가 마침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found its voice).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높은 실업률과 월스트리트가 누리는 특혜에 분노를 터뜨렸다. 완벽하게 조리 있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정치인들이 오늘날 미국에 존재하는 현격한 빈부격차(wealth disparities)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번 대선기간 중 점령이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모르몬교올해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에 최고의 해(a banner year)였다. 모르몬경(The Book of Mormon)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 후보 중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 미트 롬니와 존 헌츠먼 단 둘뿐인데 모두 모르몬 교도다. 갑자기 노출이 많이 돼도 문제가 있지만 그들은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관심을 선교의 기회로 삼았다.중국2011년 대부분의 나라가 혼란과 마이너스 성장(contractions)을 겪은 반면 중국은 10년 연속 두 자리 수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군사력을 과시하고(flexed its military muscle) 국제 문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는 그 세계 강대국에는 부상의 시작에 불과하다. 중국의 타이거 맘(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엄마)들이 우리에게 겁을 주고 미국은 중국에 진 빚이 산더미 같다.중성미자 최근까지는 거의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작은 소립자였다. 지난 9월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하는 중성미자(neutrinos)를 발견했다고 일단의 물리학자들이 발표했다(0.0025% 빠르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물리학 지식이 상당부분 완전히 뒤집어진다(be completely upended). 이들 작은 점들이 우리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은 명백하다.시리 모르는 게 (거의) 없는 이 개인 비서(all-knowing personal assistant) 프로그램 덕분에 애플의 아이폰 4S가 역대 모델 중 가장 판매증가율이 높은 제품이 됐다. 덕분에 스티브 잡스 사후에도 애플의 영업실적은 고공비행을 계속했다. 물론 시리의 답변이 항상 맞지는 않는다(지난 가을 낙태찬성론자들의 질문에 터무니 없이 틀린 대답을 했다). 하지만 이 초대형 히트작 휴대전화 모델이 내는 목소리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기술적인 경이다.3억 달러 가까운 흥행수입을 올린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Bridesmaids)’의 코미디 전문 배우들 덕분에 유머러스한 여자들의 주가가 높아졌다. 케이블 뉴스 토론은 가두시위와 마찬가지로 2011년 정치 무대의 감초가 됐으며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와 릭 페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줬다. 그리고 세 번째 승자는 남편 루퍼트 머독을 지키려고 강스파이크를 날린 웬디 머독이다.2011 패자들 1% 미국에서 부자로 지내기에 아주 힘든 한 해였다. 상위 1% 소득자가 미국 전체 부의 40%를 차지하니 나머지 99%가 열 받을 만하다. 헤지펀드 운영자 라지 라자라트남이 초대형 내부자거래 스캔들(insider-trading scandal)로 몰락했다. 잘난 척하는 월스트리트 금융인들이 ‘점령’ 시위대를 보며 샴페인을 마시는 모습도 미국 ‘살찐 고양이들’의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트위터 일단의 실력자들이 스스로 인터넷의 혜택을 누릴 자격이 없음을 증명한 해였다. 앤서니 위너 하원의원은 자신의 아랫도리 사진을 실수로 트위터에 올렸다가 의원직을 잃었다. 호색한 애시턴 커처는 한 코치의 성폭행 사실을 은폐하려 했던 조 패터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미식축구팀 감독을 지지하는 트위터를 올렸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 찰리 쉰은 자신이 할리우드의 악동(buffoon)임을 또 다시 증명했다. 존 코진 자신의 자산 관리자(financial manager)가 의회 청문회에 나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누구나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돈이 어디로 갔는지 정말 모르겠다.” 뉴저지 주지사 자리에서 밀려난 뒤 MF 글로벌의 CEO로도 실패한 코진은 고객이 맡긴 돈 12억 달러가 MF 글로벌의 계좌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해명하지 못해 월스트리트의 또 다른 악당이 됐다. 그루폰앤드루 메이슨의 이 온라인 쿠폰 사이트를 둘러싼 기대에 찬 온갖 소문이 지난 가을 또 다른 첨단기술 거품을 키웠다. 계속 미루던 기업공개(IPO)를 실시한 후 할인쿠폰을 제공하는 이 소셜 커머스 사이트의 주가가 창고정리 수준(bargain-basement levels)으로 떨어진 건 어쩌면 회사의 성격과 너무도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알뜰 소비자(thrifty shoppers)들은 무료 생활정보지를 계속 이용하는 편이 낫겠다. 미국 프로농구리그의 수입분배 방식을 둘러싼 협상이 가을까지 계속 늦춰지면서 프로농구 시즌이 크게 단축됐다. 5개월에 걸쳐 소모적인 투쟁이 지속되는 동안 노조가 해체되고 반독점 소송(antitrust suit)이 제기되고 철야회담이 교착상태로 끝나곤 했다. 마침내 협상을 타결하고 보니 그동안의 노고는 엄청난 시간낭비이자 팬들에 대한 모욕(a bird-flip)에 지나지 않았다.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 연방정부 축소계획을 밝히려다가지도자 자질만 의심받게 됐다.“내가 백악관에 입성하면정부 부처 세 곳을 폐지할 계획입니다.상무부, 교육부, 그리고세 번째가 뭐더라? 가만 있자.내가 없애려는 세 번째 정부기관은교육부, 상무부 … 그러니까. 생각이 잘 ….죄송합니다. 에구.” 2011 패자들등외 패자들 NBA 마이애미 히트의 스타 르브론 제임스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돈과 명예를 좇아 소속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헌신짝처럼 버렸지만 약체 댈라스 매버릭스에게 참패하며 시즌을 마감하는 굴욕을 당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어처구니 없는 혼외정사 사건은 앤서니 위너의 트위터 사진 스캔들에 다시 묻혔다. 끝으로 ‘화성은 엄마가 필요해(Mars Needs Moms)’. 그 붉은(red) 행성을 다룬 탓인지 결국 1억50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그 4분의 1을 벌어들이는 적자(in the red)를 기록했다. 그리스이 유럽의 경제파탄 국가(basket case)가 거의 1년 내내 벼랑 끝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시장은 숨 죽이고 지켜봤다. 거기에 폭동, 총파업, 국유지의 폭탄세일(fire sale), 프랑스 칸에서 총리가 공개적으로 질책을 받는 대망신까지 당했다. 한때 위대한 문명을 이뤘던 이 나라가 EU의 문밖을 맴도는 부랑자가 될지도 모른다. 미국 의회 미국 의회가 올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정부의 기능이 정지되지만 않게 한다면 대단한 성공(a major accomplishment)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한 해였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의회 지지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닉슨, 걸프만 석유유출 사건 때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보다 낮은 사상 최저 수준인 13%다. 미움을 사는 현 의원들의 다음 선거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글리’ 온갖 장치와 외부 스타들을 한없이 동원해도 이 고등학교 음악 드라마의 팬들을 붙잡아두지 못했다. 한때 인기가도를 달렸지만 이번 시즌 시청자가 25% 가까이 떠나고 드라마에 기초한 3D 영화(the 3-D–movie spinoff)가 흥행에 실패하고 음악 판매는 급감했다. 소문에 따르면 출연진이 책임 프로듀서 라이언 머피를 “미워하게” 되면서 이 왕년의 인기 프로그램이 대실패작으로 전락했다. 무아마르 카다피리비아 최대의 미치광이 성형수술 애호가(plastic-surgery aficionado)가 2011년 한 해 사이 무자비한 독재자에서 관광객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34년에 걸친 독재 끝에 혁명이 일어나 그를 타도한 결과다. 저항군들은 전국 각지를 수색한 끝에 카다피를 찾아내 살해했다. 그뒤 몸에 총알 구멍이 난 그의 시체를 쇼핑 센터 냉장고에 보관해 군중들이 카다피 정권의 종말을 기뻐하도록 했다. 미국 의회 미국 의회가 올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정부의 기능이 정지되지만 않게 한다면 대단한 성공(a major accomplishment)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한 해였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의회 지지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닉슨, 걸프만 석유유출 사건 때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보다 낮은 사상 최저 수준인 13%다. 미움을 사는 현 의원들의 다음 선거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상황이 더 나빠졌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는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소피텔 호텔 청소원 나피사투 디알로의 강간 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스캔들로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자리를 잃고 성욕에 눈먼 짐승(an oversexed brute)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국내에서의 원대한 정치적 야망에 큰 구멍이 뚫렸다.

2011.12.22 16:45

9분 소요
[100대 코스 선정위원 김운용이 만난 명사들] 데이비드 V 스미스 골프 컨설턴트

산업 일반

내가 데이비드 V 스미스 위원을 처음 만난 것은 제주 나인브릿지가 완공될 무렵인 2001년이었다. 나인브릿지는 구상 단계부터 세계 명문 클럽을 지향했기에 코스 설계나 부대시설은 최고 수준이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였다. 골프장 CEO를 처음 맡은 나로선 세계 명문 클럽들의 브랜드 파워와 운영 노하우가 절실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스미스 위원이다.그는 미국 현지에서 이재현 CJ 회장의 요청을 받고 직접 한국을 찾았다. 세계적인 골프장 전문가라고 했지만 처음엔 컨설팅비만 챙기고 떠나는 부류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단순한 골프장 컨설턴트가 아니었다. 전 세계 명문 클럽들이 가진 가치들을 우리에게 전해줬고, 인맥을 동원해 우리 골프장을 세계에 알렸다.그의 조언과 노하우를 통해 나인브릿지는 2005년 한국 최초로 미국 골프매거진이 선정하는 ‘세계 100대 골프클럽’에 오를 수 있었다. 골프업계에서 그의 파워와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골프와 얽힌 그의 인생사다.김운용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2001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스미스 어느 흐린 수요일 오후였어요. 당시 미국 LA에서 함께 일하던 한국 여자 프로골퍼가 이재현 회장을 소개해주더군요. 이 회장은 자신이 제주도에 독특한 골프장을 짓고 있다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습니다.제 의견을 듣더니 갑자기 한국에 3~4일 머물며 구체적인 조언을 해달라고 제안하더군요. 전 이 회장이 나인브릿지를 세계적인 골프장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높게 봤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한국 골프를 위한 꿈이라고도 했습니다. 이틀 뒤인 금요일, 저는 이 회장을 따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우리는 골프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김운용 나인브릿지 골프장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스미스 골프장 코스나 시설은 누가 봐도 최고였습니다. 문제는 마케팅이었어요. 당시 세계 골프업계에선 한국 골프장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었죠. 한국 최고 명문이라는 안양 베네스트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드물죠. 전 나인브릿지를 보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골프장 회원들에게 아시아의 골프장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나인브릿지’라는 대답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김운용 처음 우리에게 제안했던 것이 세계 100대 클럽 대항전인 ‘월드클럽챔피언십’(WCC)을 개최하자는 것이었지요? PGA나 LPGA 같은 프로 경기가 아니라 아마추어 경기를 열자고 해서 의아했습니다.스미스 최근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도 세계적인 프로 경기가 매년 열립니다. 그런 대회는 타이거 우즈 같은 참가 선수나 스폰서만 주목 받습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아마추어 대회를 열면 선수나 스폰서보다 골프장이 주인공이 되죠. 특히 WCC는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포함해 골프계 유력 인사들에게 한번에 나인브릿지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실제 경기를 주최하자 유력 인사들이 찾아온 것은 물론 ESPN과 같은 방송사도 중계를 했죠.김운용 지금도 해외에 나가면 그 위력을 실감합니다. 미국 명문인 LA 컨트리클럽을 방문했을 때였어요. 클럽 내에서 기념품을 사려는데 회원이 아니면 못 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한국의 나인브릿지라는 골프장 대표 자격으로 방문했는데 안 되겠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갑자기 TV에서 저를 봤다며 환대하더군요. 기념품은 물론 자긍심까지 챙길 수 있었습니다.WCC는 나인브릿지가 세계 명문 클럽 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위해 창설한 대회다. 2002년 첫해 6개국 18개 클럽 회원들이 참가한 이 대회는 해를 더할수록 발전했다. 2004년 골프 양대 협회 중 하나인 영국왕실골프협회의 승인을 받고 미국 골프매거진 후원으로 치러지면서 그 권위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2005년까지 4년 연속 나인브릿지에서 열린 이 대회는 현재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나인브릿지와 해외의 세계 100대 코스에서 번갈아 열리고 있다. 나인브릿지는 세계 유수의 골프 매체로부터 ‘퇴색돼 가는 아마추어 골프 본연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회원이 회원 모집해 사교의 장 돼야김운용 명문 클럽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스미스 무엇보다 회원입니다. 한국 대부분 골프장에서 강조하는 멤버십은 진정한 멤버십이 아닙니다. 4주 전에 라운드를 예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이럴 경우 회원들은 골프장을 단순히 골프를 치고 폭탄주를 마시는 곳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미국과 유럽 클럽들은 회원들 사이 교감이 이뤄지는 사교의 장입니다. 기념품 가게에서 비회원이 제품을 사지 못하게 할 정도로 회원만의 특전도 중시합니다. 김운용 회원들이 멤버십을 중시하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스미스 한국인들은 골프 회원권을 투자나 접대 목적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 최상위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여러 골프장의 멤버십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에선 10년 동안 1~2개 클럽을 다니지만, 한국에선 1년 동안 10개의 클럽을 다니는 셈이죠. 골프장으로선 회원들의 방문이 적다 보니 수익을 올리기 위해 주중 회원권도 팔고 비회원들에게도 골프장 문호를 개방하죠. 그것이 문제의 시작입니다. 회원을 더 자주 찾게 만들어야지, 주중 회원권을 팔거나 비회원의 플레이를 받아들이면 그 클럽의 권위는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한국에선 명문 클럽 중 5~6개만 생존하리라 봅니다. 나머지 골프장들은 퍼블릭 골프장과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김운용 회원들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스미스 한국에선 골프장을 처음 열면 대부분 외부에서 영업하는 사람이 회원권을 파는 시스템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원들 사이에 유대감이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회원이 회원을 모으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골프장에선 골프 외에 와인이나 자동차 등 회원 대상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회원 간 친목을 높여야 합니다. 특히 회원 가족을 위한 이벤트나 공간도 필수적입니다. 직원들의 마인드도 중요합니다. 한국 골프장 직원들은 친절할지 몰라도 서비스가 메마른(dry) 편입니다. 미국 명문 클럽에 가면 직원들이 회원 기호는 물론 아이들 이름까지 알 정도로 가족적입니다. (언젠가 미국 명문 클럽의 한 회원에게 ‘왜 그 클럽에 속해 있느냐’고 물어보자 ‘난 이 클럽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클럽은 내 인생의 일부’라고 답하더군요.) 전 그런 클럽 문화를 한국에서 보고 싶습니다.김운용 한국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처음 온 게 언제인가요?스미스 88년 이건희 삼성 회장을 만난 것이 한국과 첫 인연이었습니다. 당시 전 LA에 위치한 셔우드(Sherwood) 클럽의 책임자였는데 이 회장이 그 회원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회원권을 보내자 한국에 있는 자신의 골프장인 안양 베네스트로 초대하더군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당시 장난감 말을 타고 다녔을 정도로 어렸던 것이 기억납니다.프로 골프선수였던 스미스가 비즈니스에 본격 뛰어든 것은 87년 미국 골프계의 거물인 데이비드 머독을 만나면서였다. 스미스는 “머독의 이름을 대고 연결을 원한다면 전 세계 골프업계에 종사하는 그 누구도 전화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머독은 당시 스미스에게 LA에 세계 최고의 클럽을 지어 달라고 의뢰했다. 스미스는 코스 설계를 세기의 골퍼 잭 니클라우스에게 맡겼고, 자신은 머독의 전용기를 타고 미국 63개 명문 클럽을 다니며 아이디어를 찾았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셔우드 클럽이다.셔우드는 케니 로저스 등 스타들을 비롯해 미국 유력 정치인들이 회원으로 있는 골프장으로 명성이 높다. 스미스는 “셔우드에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시니어, 제럴드 포드 등 전직 대통령들과 골프를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셔우드의 성공을 발판으로 골프 플랜 인터내셔널(GPI)을 세웠다. 지금은 사업 영역을 골프장 개발에서 건설, 마케팅, 매지니먼트까지 확대했다. 시장도 일본과 아시아로 넓히며 승승장구하고 있다.숀 코너리가 들려준 골프 교훈 ‘경청하라’김운용 일본 시장은 어떻게 진출했나요?스미스 80년대 후반 일본인들은 페블비치(Pebble Beach) 같은 미국 명문 클럽들을 사들이며 회원권을 일본 현지에서 100만 달러에 팔았죠. 당시 일본은 골프가 붐이었습니다. 전 페블비치의 오너를 통해 일본에 진출한 후 처음 3년 동안 일본 골프 최대 호황기를 함께 누렸습니다. 하지만 거품이 곧 걷힐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일본인들은 골프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즐기기엔 회원권 가격이 너무 비쌌어요.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90년대 중반이 되자 100만 달러였던 회원권 가격이 10만 달러로 폭락했고, 부도가 나는 골프장도 속출했습니다. 현재 한국 상황과 비슷합니다.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만나는 골프장 오너들에게 절대 일본 모델을 따라가지 말라고 충고했어요. 하지만 이미 우려하던 상황이 제주에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김운용 미국 골프업계가 타이거 우즈 덕택에 90년대 후반부터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지요.스미스 2000년 타이거 우즈가 페블비치에서 15타 차로 우승할 때가 절정이었어요. 전 당시 일본의 부도난 골프장 매각을 컨설팅하면서 90년대 말부터는 미국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안방과 같은 캘리포니아에서 우즈가 연이어 우승을 차지하면서 저로선 수많은 사업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미국 골프는 고급 스포츠로 탈바꿈하고 있었는데, 전 퍼블릭 골프장 안에 멤버십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업도 했었죠.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어요. 일본, 미국, 한국이 번갈아 골프 호황기를 맞을 때마다 제가 있었거든요(웃음).김운용 미국인들은 골프장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스미스 미국인의 28%가 골프클럽을 다니지만 대부분 사교와 휴양을 위해서입니다. 미국인들은 골프 클럽을 제 2의 집으로 여기고 골프장 근처에 별장을 삽니다. 부동산 개발 회사들도 골프 코스를 주변 집을 팔기 위한 부대시설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김운용 LA 최고 명문 클럽들을 맡으면서 할리우드 스타와의 인맥도 화려하다고 들었습니다.스미스 75년 처음 프로가 됐을 때입니다. 당시 대회가 열리기 전 선수들과 아마추어가 함께 경기하는 프로암 대회에 나갔어요. 하지만 신인이다 보니 새벽 첫 번째 티오프 타임에 모르는 사람들과 경기를 했죠. 경기가 끝나고 클럽하우스에서 쉬는데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토니 재클린이 찾아왔어요. 팔에 부상을 입었는데 자기 대신 경기에 다시 나가 달라는 거였어요. 요청을 수락해 필드에 나갔는데 당시 제임스 본드였던 숀 코너리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전 너무 기쁜 나머지 골프 치는 내내 그에게 질문을 쏟아부었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숀이 저에게 한마디 해주더군요. “넌 나에게 질문만 했지, 정작 내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이후 제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김운용 재미있는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스미스 벨 에어라는 클럽에서 당대 최고 배우였던 존 웨인, 조지 스콧 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톰 크루즈가 갑자기 우리 자리에 끼어들었어요. 그는 아직 신인이었는데 대선배들 앞에서 자신의 인기에 대해 자랑을 하더군요. 그가 자리를 떠난 후 우리는 그를 놀려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할리우드 스타의 집을 투어 하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우리는 미리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톰 크루즈가 골프장에 오는 시간을 알려주면서 ‘할리우드 대스타가 나타날 것’이라고 귀띔했습니다. 다음날 관광객들이 골프장에 왔을 때 마침 톰 크루즈가 등장했고, 일본인들은 사진을 찍기 바빴죠. 그때 여행사 직원이 일본인 관광객들을 향해 ‘저 사람은 스타가 아니다’라고 하자 모두가 사진을 그만 찍고 다시 차에 타버렸어요(웃음).김운용 다루기 힘든 회원들은 없었나요?스미스 세계 최대 부자 중 한 명인 워런 버핏이 기억납니다. 그는 당시 클럽 내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타고 싶었는데 어느 회원의 아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어요. 그 회원의 아들이 계속 자리를 비키지 않자 버핏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그러곤 그 회원을 탈퇴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클럽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버핏은 아이는 2년, 아이 아버지인 회원은 1년간 회원 자격을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들었어요. 결국 아이는 6개월, 아버지는 3개월간 자격이 정지됐습니다. 버핏은 그 뒤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이처럼 힘 있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그들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클럽은 반드시 소명 절차를 거쳐 회원을 보호해야 합니다.김운용 당신에게 골프는 무엇인가요?스미스 제 아버지는 영국의 광부이자 스트리트 파이터였습니다. 변변치 못했던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저는 15살에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죠. 이때 저에게 유일한 희망이 골프였습니다. 처음엔 돈을 벌기 위해, 그 후엔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골프를 쳤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골프에 대한 재미가 열정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인생 자체가 됐습니다.

2011.03.07 18:46

8분 소요
바람과 잡초…황량한 자연미

산업 일반

올해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는 로열트룬 올드 코스는 링크스 코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척박한 땅에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해 꾸민 코스로 황량한 느낌을 주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묘미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는 음산하다. 그 옛날 교수대가 서 있던 그래스 마켓의 ‘마지막 교수형(The Last Drop)’이란 으스스한 이름의 선술집에서 기네스 맥주에 스코틀랜드 순대 하기스(Haggis)를 먹고 늦은 오후 트룬(Troon)으로 향했다. 오는 7월 15일 전 세계 골프 팬을 열광시킬 메이저 중 메이저인 ‘디 오픈(The Open: 콧대 높은 영국인들은 브리티시 오픈을 디 오픈이라 부른다)’이 열리는 로열트룬(Royal Troon) 올드 코스로 라운딩하러 가는 길이다. 기네스의 취기가 가슴 터지는 흥분을 지그시 가라앉힌다. 좋은 코스엔 좋은 동반자가 금상첨화다. 동반자는 계량경제학자 세계 20걸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든버러대학 교수 신용철(44) 박사다. 이번에 리즈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어 여기저기서 축하 받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까다로운 로열트룬 취재 허가까지 받아낸 것이다. 신 박사는 전혀 근엄하지 않은, 전혀 교수답지 않은 너무나 소탈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다. 휴일에 우리 유학생들과 야구를 하다가 멱살잡이 싸움을 하고는 맥주를 마시며 낄낄 웃는 다혈질이면서도 단순한 사람이다. 호텔방에서 먹은 중국 음식 쓰레기 봉투를 버린다는 게 엉뚱하게 쇼핑한 옷 보따리를 버리고 와서 천장을 보고 욕을 퍼붓는 사람이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 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작은 소읍 트룬은 서쪽 해안에 붙어 있다. 그러나 두 곳을 잇는 횡단선은 영국 땅의 목에 해당되는 곳이라 자동차편으로 불과 세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트룬에 가까워질 때 찻길은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를 관통한다. 그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많은 공장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가 하늘을 검게 덮었다고 소개된 풍요의 도시(그 당시에 환경오염의 개념은 없었다) 글래스고는 굴뚝 산업의 퇴조로 한때 200만 명이던 인구가 70만 명으로 줄어 적막감마저 감도는 회색도시로 바뀌었다. 남서쪽으로 50여km를 달리면 트룬에 닿는다. 작은 어촌이었던 트룬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이 어둠이 내리자 북해의 세찬 바람소리뿐 거리는 한적하기만 하다. 명문 골프코스들이 대부분 자체 리조트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로열트룬은 클럽하우스뿐이다. 그러나 클럽하우스에서 몇 발짝 떨어진 마린호텔이 로열트룬 리조트 행세를 한다. 마린호텔에서 수영과 사우나를 하고 바에서 술 한 잔 마시고 자리에 누워도 다음날 아침 로열트룬에서 라운드한다는 감격에 잠이 오지 않는다. 날이 밝았다. 창밖의 풍경은 오늘도 음산하기만 하다. “바람과 먹구름 ·후두두 뿌리는 빗방울은 링크스 코스 골프의 일부분이지요.” 클럽하우스 창을 두드리는 바람소리를 가리키며 로열트룬의 캐디 마스터가 이야기한다. 도대체 링크스(Links) 코스란 무엇인가. 콰르르 해변을 때리는 북해의 파도는 백사장이 늘어진 비치를 만든다. 몰아치는 바람은 비치의 입자가 작은 모래를 해안으로 날려 보낸다. 천 년 만 년 바람에 날려온 미세한 모래는 해안에 쌓이고 또 쌓여 작은 언덕들을 만든다. 해질녘 햇살이 사선으로 누우면 작은 언덕들은 공동묘지처럼 봉곳봉곳 솟아올랐다. 이곳을 링크스 땅(Links Land)이라 부른다. 비치와 링크스 랜드가 다른 것은 비치는 굵은 모래에 바닷물에 잠겼다 나오기를 반복하지만, 링크스 랜드는 모래 입자가 섬세하고 엄청난 해일이 올 때 외에는 바닷물에 잠길 때가 없다. 하지만 강풍에 날려 온 바다의 물거품과 해무가 링크스 랜드에 항상 염분을 뿌린다. 링크스 랜드는 작물의 경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연은 이 척박한 땅에도 놀랍게 적응하는 힘을 준다. 벼과의 억센 풀인 페스큐(Fes- cue)가 링크스 랜드를 덮고, 관목인 가시금작화(Gorse)가 띄엄띄엄 혹은 군락을 이루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놀라운 생명력을 보인다. 이 황량한 링크스 랜드 위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가시금작화를 피해 페스큐를 짧게 깎아 페어웨이를 만들고 그린을 만들었다. 여기서 만든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풀을 깎아 공이 가는 길을 정했을 뿐이다. 캐터필러가 굉음을 울리며 산을 깎고, 바위를 깨고, 땅을 자르고 붙이고, 인공 워터 해저드를 만들고, 수로를 만들고, 배수거를 구축하고, 배수관을 묻고, 자갈을 깔고, 모래를 얹고, 표토를 얹고, 잔디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링크스 코스에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천 년 만 년 세월 속에 자연이 빚어놓은 지형 그대로인 링크스 랜드에 인간은 조심스럽게 풀만 깎고 구멍만 뚫었을 뿐이다. 지형에 따라 골프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내륙(Park Land) 코스 ·해안(Sea Side) 코스 그리고 링크스 코스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코스는 내륙 코스다. “페블비치 링크스는 링크스 코스가 아닌가” 라는 질문에 로열트룬의 비서(우리의 매니저격)는 웃으며 말한다. “해안 코스를 미국 사람들이 링크스라 이름 붙였다. 우스운 얘기다.” 스코틀랜드의 바닷가 골프코스라고 모두가 링크스 코스는 아니다. 그곳에도 해안 코스는 많다. 해안 코스는 위치만 해변에 있다 뿐이지 코스를 조성하는 과정은 내륙 코스와 다를 바 없다. 링크스 코스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다. ‘디 오픈’은 영국 내 8개 링크스 코스 가운데 영국왕실골프협회(R&A)가 지정한 코스에서 개최된다. 올해는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바로 이곳 로열트룬에서 4일간 치러진다. 지금껏 로열트룬에서 ‘디 오픈’을 일곱 번 개최했으니까 이번이 여덟 번째가 되는 것이다. 로열트룬에서 우승트로피인 클래럿 저그(Claret Jug)를 높이 쳐든 골퍼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아널드 파머(1962년)를 위시해 톰 왓슨(1982), 마크 캘커베키아(1989) 그리고 최근엔 97년 저스틴 레너드가 주인공이 됐다. 올해는 최경주를 포함한 156명이 열전을 벌인다. 비서에게 올해의 예상 챔피언 다섯 명만 꼽아달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빙긋이 미소를 흘린 후 대답했다. “물론 타이거 우즈 ·어니 엘스 그리고 콜린 몽고메리 ·대런 클락이다.” 그가 최근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는 콜린 몽고메리를 꼽는 것엔 다른 이유가 있다. 몽고메리의 아버지가 로열트룬의 매니저로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콜린 몽고메리의 잔뼈가 굵은 곳이라 눈을 감고도 코스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열트룬은 1878년에 트룬의 몇몇 골프광들에 의해 문을 열었으니 126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색창연한 골프코스다. 전형적인 링크스 코스로 클럽하우스 옆, 1번 홀 티 박스에서 바라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다. 레이아웃은 단조롭다. 오른쪽 바다를 끼고 프런트 9홀이 계속 이어지다가 백 나인은 방향을 틀어 프런트 나인과 평행을 이루며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파71 ·전장 7,174야드. 전체적인 레이아웃은 단순하지만 한 홀, 한 홀은 샌드듄의 모양새와 페스큐 러프와 항아리(pot) 벙커 ·가시금작화에 따라 저마다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다. 로열트룬의 시그니처홀은 8번 홀이다. 우표 딱지(Postage Stamp) 홀이라는 이름처럼 그린이 작다. 챔피언티가 불과 123야드 밖에 안 되는 짧은 홀이지만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티 박스가 이 골프코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강풍에 완전히 노출돼 있다. 그린은 티 박스보다 훨씬 아래에 있지만 포대그린이라 풍속을 잘 읽고 내리막을 계산해서 온 그린 시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홀이 아니다. 포대그린을 둘러싼 다섯 개의 항아리 벙커에 공이 들어가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다. 오른쪽 옆으로 흘렀다 하면 가시금작화 덩굴 속에 처박히고 만다. 디 오픈이 열리는 8개의 골프코스를 통틀어 가장 짧은 홀이지만 멕시코 고추만큼 매운 홀이다. 로열트룬은 최근 올해 디 오픈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1 ·6 ·11 ·15번 홀 티 박스를 뒤로 빼 전체 길이를 100야드 늘리고 10개의 새 벙커를 만들었다. 대회까지 방문객에게는 라운드를 허용하지 않는다.3월엔 바람이 프런트 나인에 역풍이 되지만, 7월엔 거꾸로 백 나인이 역풍을 맞는다. 바람이 관건이다. 로열트룬은 7월 15일을 기다리고 있다.

2004.05.1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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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모델이 회사의 命運 좌우

산업 일반

프링글은 로베르트 프링글에 의해 1815년 스코틀랜드의 소도시 하윅에 세워진 오래된 의류생산업체다. 19세기 동안에는 주로 양말이나 메리야스류를 생산하면서 굴곡 없는 길을 걸어왔다. 20세기에 들어 프링글은 획기적인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전천후 남성용 스웨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걸치기만 하면 끄떡없는 질 좋고 따뜻한 스웨터를 만들면서부터 프링글은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33년에는 면과 염소 털 카슈미르로 짠 스웨터를 선보여 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프링글의 성장은 1년 후 오스트리아 출신 디자이너 오토 봐이츠를 영입하면서 시작됐다. 봐이츠의 성공작은 스웨터와 니트 잠바를 조화시킨 트윈 세트. 같은 색에 같은 소재로 만든 스웨터와 잠바의 멋진 앙상블은 십여년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48년 영국왕실로부터 궁중 납품업체로 지정됐고,이후 탄탄한 성장의 행진을 계속했다. 80년대에 레저와 스포츠복의 선두주자로 시장을 장악해 갈 즈음, 프링글은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된다. 엄청난 돈을 들여 닉 팔도를 광고 모델로 선정하면서부터다. 팔도는 지난 9월 코오롱배 제44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킥오프까지 당해 국내 팬들을 실망시킨 영국 골프선수다. 프링글은 브리티시 오픈에서 세 차례 정상에 올랐고 모든 영국인들이 존경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광고모델로 선정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링글이 쇠퇴로 접어드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고객들은 프링글의 제품이라면 골프용 스웨터로만 인식하기 시작했다. 프링글의 다른 상품들은 자연히 관심권에서 벗어나며 매출이 급감했다.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팔도가 골프선수로 영국에서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프링글의 상품은 젊은 고객의 취향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심플했다는 분석도 있다. 2천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에서 종업원 수백명 수준의 회사로 수직하강하던 프링글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반격에 나선 사람이 킴 윈저다. 지난해 프링글의 경영이사로 스카웃된 윈저는 영국 최대의 의류·식품 유통업체 막스앤스펜서에서 20년간 마케팅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다. 윈저는 프링글 제품의 모델로 영국의 세계적인 5인조 팝그룹이자 댄스그룹인 스파이스걸스의 전 멤버 포쉬스파이스를 기용했다. 직접적인 광고 모델이 아니라, 포쉬스파이스로 상징되는 화려하고 선정적인 색상의 의류들에 승부를 걸었다. 알록달록한 점퍼와 바나나, 딸기 색깔 등으로 마치 아이스크림을 연상케 하는 여성용 스커트 등은 지금 고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스파이스걸스의 화려한 복장과 선정적인 댄스는 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멤버였던 포쉬스파이스의 복합적인 이미지는 단연 압권이었다. 포쉬 스파이스를 닮기 위해 많은 젊은 여성들이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시도하기도 했다. 영국 PA통신사가 만든 세계 최초의 사이버 앵커 아나노바도 포쉬스파이스를 닮았다고 한다. 포쉬스파이스의 남편 데이비드베컴 역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축구 팬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미남 축구선수다. 프링글은 곧 영국의 고급 백화점 헤로드 등에서 윈저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는 액세서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2001.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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