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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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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노마드 시대…자퇴하는 우등생 급증하는 까닭은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대입 재수의 바람이 당초 예상보다 더 세다. 2024학년도 금년도 대입 수능 원서접수자의 35.3%가 졸업생(검정고시 포함)으로 96학년도 37.3%이래 28년만에 최고 기록이다. 재수의 형태도 예전과 다른 양상이다. 군대에서도 수능 준비를 하는 재수생(군대에서 재수를 하는 유형으로 군수),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연·고)나 카이스트와 같은 명문 상위권대를 다니면서도 대입을 재도전하는 반수생, 40대 가까운 나이에도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의대를 준비하는 만학재수생 등 형태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이미 대형 입시학원에 재수생 중 삼수생 비율은 절반을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21학년도부터 서·연·고 등 주요대학에서 정시가 확대돼 수능 준비를 하는 재수생이 증가했다고 단순화하기에는 나타나는 양상이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재수생의 형태와 유형이 그만큼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자퇴생 매년 증가…자연 계열 2배 ↑학교를 그만두는 자퇴생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22년도에 서·연·고에 재학중인 학생들 중 자퇴생은 2131명이었다. 5년전인 2018년에는 1339명, 2019년에는 1415명, 2020년에는 1624명, 2021년에는 1971명으로 늘어나면서 일반화되는 양상이다. 2022년 2131명 중도탈락자 중 인문계가 688명, 자연계가 1388명으로 2배 가까이 많았다. 공대를 다니는 학생들이 대부분 의대 등으로 대입 재도전을 하면서 전문직으로 진로를 바꾸는 경우가 많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인문계열 학생들 중에서도 그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서울대만 놓고 보면 2022년 인문계열 자유전공학부에서 17명, 인문계열에서 11명, 경제학부 9명, 경영학과 8명이 학교를 그만뒀다. 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대 다른 인문계열학과에 재도전한다는 추정은 어려워 보인다. 인문계열에서 자연계열로 전환하거나 성적대 특성으로 볼 때 자연계 중에서도 의대 등의 전문직으로 방향을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대 경영학과 49명, 연세대 인문계열 48명, 연세대 상경계열 42명, 연세대 경영계열 36명 등의 자퇴생도 서울대 인문계열 또는 서울대 중도탈락자와 동일 패턴으로 방향을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과학기술원과 같은 이공계특수대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원 재학생중 125명이 학교를 그만뒀다. 한국과학기술원 신입생 모집정원이 830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수치로 해석할 수 없다. 울산과학기술원은 66명으로 직전년도 2021년 21명에 비해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 울산과학기술원 신입생 모집정원 480명이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도 29명이 학교를 그만두었고 직전년도 2021년 7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신입생 모집정원은 230명이다. 포항공대도 2022년도에 36명이 학교를 그만뒀고, 포항공대 신입생 모집정원 380명이다. 의대 경쟁률 47대1…3년새 최고2024학년도 수시 원서접수가 종료됐다. 서울권 평균 경쟁률은 17.79대1로 최근 4년새 가장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지방권 평균 경쟁률은 5.49대1로 최근 4년새 가장 낮은 경쟁률이다. 지방권 경쟁률 가장 높은 상위 대학은 경북대, 부산대 등 지거국 중 명문대학과 연세대, 고려대 제2캠퍼스이다. 대학은 서울권 소재대학으로 지방권에서는 지방 명문대학으로 집중화 되는 양상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2024학년도 서울권 9개 의대 평균 경쟁률은 47.47대1로 최근 3년새 가장 높은 경쟁률이다. 전국 39개 의대 평균 경쟁률은 31.08대1로 서울권 4년제 대학 평균 경쟁률은 17.79대1보다 높다. 서울권 의대 경쟁률은 서울권 일반대 평균 경쟁률 17.79대1 보다 3배가까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입시에서 수험생들의 흐름이 과거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대학을 바꾸고, 전공을 바꾸는 노력과 투자가 대학생활 후부터 준비하는 취업준비 노력, 투자가치 비교에서 우선 최상위권 학생들의 상당수는 대입재도전을 통한 원하는 직업분야로 미리 이동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러한 대열에 가세하고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단순 브랜드있는 대학을 선호하는 것보다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습득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대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볼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을 사전에 하는 것이 대학입학 후 어려운 취업환경에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입재도전을 통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은 취업 환경 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상당기간 지속될 수도 있다.

2023.10.08 14:00

3분 소요
전문직 재무설계사 전성시대…서울 넘어 전라‧제주 ‘전국’으로

보험

만학으로 전문직 대열에 합류한 대구의 김태우 세무사. 그에게 합격의 기쁨은 잠시였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합격이 되다 보니 뒤쳐진 느낌도 들고, 거래처 뚫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현재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방은행 VIP센터의 자산가 상담을 총괄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메트라이프생명 T&I와 손잡은 것이 한발 앞선 성장 동력이 됐다. 메트라이프 그룹의 컨설팅 노하우와 교육이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금융서비스 확장은 물론 본업에서도 능률이 쑥쑥 올라갔다. 선윤정 노무사 역시 본업과 보험전문가로서 ‘동반성장’의 결실을 거둔 대표적 인물이다. 전문직 보험설계사에 도전 후 2년 만에 직원 수는 두 배 이상 늘었고, 노무업계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메트라이프생명의 중앙5본부(T&I본부)는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변호사·세무사·회계사·노무사 등 전문직이 가장 일하고 싶은 곳으로 꼽는 금융기관이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하는 성공 사례들이 눈앞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메트라이프생명의 T&I본부는 ‘스타’ 전문직 군단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법무법인 창천의 대표변호사로 ‘상속·증여’ 부문에서 널리 알려진 김종훈 변호사, SBS ‘동상이몽2’로 대중에게 친숙한 문재완 세무사, 세무·재무 자문 및 가업승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회계법인 베율의 김홍권 회계사 등 각계를 대표하는 전문직 ‘스타플레이어’들이 대거 포진돼있다. ━ 법률·세무와 보험 상담…본업 및 서비스 확장 ‘전문가냐, AI냐.’ 현재 금융시장은 양극화되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 토스 등 빅테크 기업들이 맞춤형 비교 등을 내세워 간단한 보험 상품 시장을 잠식해가면서, 고액 자산가를 겨냥한 VIP 시장은 세무·회계·법률 자문 등 종합 컨설팅을 제공하는 전문성이 부각되고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자산가 및 법인을 위한 고가의 금융시장은 전문적인 지식 및 정책의 변화를 읽고 앞서 나아갈 수 있는 금융 전문가들만 생존할 수 있는 시장으로 변모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보험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전문직과 손잡는 사례는 이미 오래된 얘기다. 하지만 전문직 조직은 메트라이프생명 T&I본부가 보험업계의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다. 심지어 국내 대형 생명보험사도 전문직 설계사 지점을 열었다 고배를 마셨다. 전문직과 보험의 결합이라는 출발은 같았지만, 근본적 역할부터 메트라이프생명 T&I는 달랐다. 여종주 메트라이프생명 중앙5본부장은 “다른 보험사에선 전문직의 역할이 설계사를 지원하는 역할이지만, T&I본부에서는 전문가들이 직접 보험 판매 및 상담을 병행하는 것이 차별점이다”고 설명했다. T&I는 기술(Technic)과 지식(Intelligence)의 약자다. 고객들에게 전문성에 기반을 둔 컨설팅 기술과 보험에 대한 지식을 접목한 포괄적인 재무 설계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고객들은 현장 전문가들의 세무·법률 컨설팅을 받으면서 관련된 금융서비스까지 제안받을 수 있다. 보험 영업에 도전하는 전문가들에게는 본업 성장과 더불어 부가적 소득 확대의 기회까지 동시에 제공된다. 실제 T&I에서 보험설계를 접목한 이후 본업 소득이 평균 120~130%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 관련 소득도 본업의 60~70% 육박하거나, 보험을 포함한 총소득이 800% 이상 성장한 경우도 있다. 현재 T&I본부는 세무사·회계사를 비롯해 변호사·변리사·노무사·감정평가사 등이 전체의 재무설계사(FSR)의 90% 이상으로, 뛰어난 노하우를 지닌 보험설계사와 팀을 이뤄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다. 메트라이프생명 T&I의 차별성은 우선 전문직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 으뜸으로 꼽힌다. 기존의 보험설계사 중심의 영업 방식과 차별화되는 ‘보험 영업과 전문 지식을 결합한 세일즈 콘셉트’를 개발해 ‘아카데미’를 통해 교육한다. 전문직 아카데미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FSC(Financial Sales Campus)는 보험 영업 사원과 은행·증권 등의 금융회사, 전문직 등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강의 콘텐츠로 만족도가 매우 높다. 급변하는 이슈와 금융환경을 고려한 전문적인 재무 설계를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자체 ‘연구·개발(R&D)센터’도 메트라이프생명 T&I의 남다른 자부심이 담겨있다. 메트라이프생명의 보험 본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교육은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메트라이프생명 T&I본부 관계자는 “전문직이라고 보험을 다른 관점에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 본래의 기능으로 제대로 판매하기 위해서 조직을 이룬 것”이라고 강조했다. ━ 3년 연속 ‘챔피언’ T&I 확대…지역 부지점장 ‘발굴’ 2017년 8월 27명으로 출범한 메트라이프생명 T&I조직의 설계사 수는 현재 300명에 달한다. 실적도 눈부시다. 3년 연속 지점 ‘챔피언’을 차지하며 높은 보험시장에 대한 이해와 적응력을 인정 받았다. 지난 2월에는 지점에서 본부로 승격됐다. 2022년 메트라이프생명 T&I본부는 본격적인 지방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분점을 가진 4개의 지점(블랑, 블루, 그린, 블랙)이 출범했다. 서울을 기점으로 부산, 대구, 대전, 세종, 천안, 제주 지역 등으로 확대 중이다. 여종주 본부장은 “메트라이프생명 T&I는 강남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선 전문직 사이에 ‘대세’로 받아들여진다”며 “2~3년 안에 제주에서도 고액 금융거래는 전문직 보험설계사를 통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벌써부터 청신호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최근 전주의 한 노무사 출신 FSR이 월 4000만원 상당의 고액 보험 계약을 하는 성과를 냈다. 통상 지방에선 100만원 이상 계약도 드문 실정에서 깜짝 놀랄 성과가 나온 것. 굳이 서울을 가지 않아도 선진적 금융서비스를 받고 싶었던 전주 지역 자산가의 니즈를 읽어내고, 지역 특색에 맞게 제안한 덕분이었다. 지방에서 서울 중심의 교육과 시스템에 대한 갈망이 상당함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메트라이프생명 T&I본부는 앞으로 정부 정책과 경제적 상황을 종합 분석해, 지역 실정에 특화한 영업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특정 지역에 머무르다 보면, 전국 상황과 비교한 해당 지역의 리스크는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를테면 제주도는 중국 자본이 빠지면서 건설 경기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타 지역과 달리 관광객이 늘어나서 요식업의 매출은 올라가는 상황. 이 때문에 세금 문제로 법인 전환을 희망하는 요식업체가 증가할 것을 선제적으로 진단, 영업 전략을 제시해준다. 메트라이프생명 관계자는 “지방에 선진 금융교육과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메트라이프생명 T&I의 전국 분점은 지방 전문직들의 성장을 돕는 큰 혜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메트라이프생명 T&I는 고객 만족도가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지표가 13회차 확정 유지율이다. T&I조직은 2월 오픈한 블랙지점을 제외하고 T&I 블랑, 블루, 그랑지점의 올 3월 기준 13회차 확정 유지율이 98.2%를 기록했다. 생명보험사 평균 유지율이 80% 수준인 것에 비하면 단연 돋보이는 성과다. 메트라이프생명 관계자는 “13차 유지율은 완전 판매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전문 분야의 컨설팅과 더불어 금융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보험 영업의 질도 함께 상승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2.03.06 09:00

5분 소요
[FORBES 400] 아메리칸드림은 건재하다

산업 일반

TV화면에서, 정치집회에서, 심지어 의회에서조차 이민자를 곱게 보는 눈길은 없다. 그러나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서는 훈훈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미국 외 국가에서 출생한 부자가 전체의 10%를 상회하며 사상 최고의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미국의 기업가정신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 청신호를 보내며 말이다.토마스 피터피(Thomas Peterffy)는 1944년 9월 30일 부다페스트의 한 병원 지하에서 태어났다. 소비에트연방의 공습때문에 어머니가 이곳으로 피신해 피터피를 출산한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덕분에 나치점령으로부터 해방된 헝가리는 위성국가로 전락하여, 공산주의라는 또다른 이름의 억압체제하에 신음하게 된다. 귀족 출신이었던 피터피와 그 가족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헝가리에서 우리는 죄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피터피의 말이다. 젊은 피터피는 이 감옥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꿈을 꾸었다. 20세가 되던 해, 피터피는 탈출계획을 세웠다. 피터피는 헝가리인에게 서독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한 단기비자가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했다. 당시 불법으로 미국행을 감행한 수백만의 이민자들처럼, 피터피는 비자가 만료된 이후 고국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미국으로 떠났다. 1965년 12월 피터피는 뉴욕시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내렸다. 수중에 동전 한 푼 없었고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여벌옷, 측량지침서, 계산자, 그리고 조상의 그림 한 점이 담긴 여행가방이 전재산이었다.피터피는 헝가리 출신 이민자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던 스패니시 할렘(Spanish Harlem)에 정착해 누추한 아파트를 전전했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행복했다. 피터피는 “고국을 등지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온 것은 큰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말 내가 뿌린대로 거둘 수 있고, 능력과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한 개인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미국은 무한한 기회의 땅이었지요.” ━ 400대 부자 중 42명이 이민온 귀화시민 피터피의 믿음은 옳았다. 피터피는 측량회사에서 제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피터피는 회사에서 컴퓨터를 한 대 구입했을 당시, “그 누구도 프로그램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제가 해보겠다고 자원했다”라고 말했다. 피터피는 곧 컴퓨터작업에 능숙해졌고 월스트리트의 중소 컨설팅기업에서 프로그래머 일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매매모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1970년대 말, 피터피가 20만 달러를 모아 창업한 기업은 전자주식매매의 지평을 열고, 주식거래소가 디지털화되기 이전부터 온라인매매를 실행했다. 1990년대 피터피는 주식시장의 증권거래업에 주력하기 시작했고, 인터액티브 브로커스 그룹(Interactive Brokers Group)을 창업해 오늘날 시가총액 140억 달러를 기록하는 기업으로 키웠다. 올해 72세인 피터피의 자산은 126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피터피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375억 달러),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다이어(Pierre Omidyar, 81억 달러),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창업자 엘론 머스크(Elon Musk, 116억 달러),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제리 양(Jerry Yang), 미키 에리슨(Micky Arison), 패트릭 순시옹(Patrick Soon-Shiong), 얀 쿰(Jan Koum), 제프 스콜(Jeff Skoll), 호르헤 페레즈(Jorge Perez), 피터 틸(Peter Thiel) 모두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마침내 포브스 400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부자는 스무 명이 넘는다.정확히 포브스 400대 부자 중 42명이 미국으로 이민온 귀화시민이다. 이는 전체의 10.5%에 해당하는 수치로, 귀화시민이 미국 전체 인구의 6%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대단한 성과이다. 비시민권자까지 고려하면 미국 거주민의 13% 가량이 외국태생이지만, 초바니 요거트의 오너 함디 올루카야(Hamdi Ulukaya)나 위워크(WeWork)의 창업자 아담 노이만(Adam Neumann)처럼 미국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아 400대 부자 순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미국에서 거주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비시민권자 억만장자들도 꽤 많다.국부유출, 안보위협 등 이민자를 겨냥한 온갖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이민자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 10년 전 포브스 400대 부자에서 이민자의 수는 35명이었고, 20년 전에는 26명, 30년 전에는 20명에 불과했다.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처럼 창업가의 성공이라는 잣대로 측정한 아메리칸드림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어느때보다도 더 강력한 파워를 입증하고 있다. 이민자 출신의 부자 42명의 순자산을 모두 합산하면 2480억 달러에 이른다.카우프만 재단(Kauffman Foundation)에 따르면, 이민자는 미국 태생의 미국인에 비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할 확률이 거의 2배나 더 높다고 한다. 포브스 400대 부자인 루퍼트 머독과 마이클 블룸버그가 설립한 초당적 단체인 ‘새로운 미국경제를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 for a New American Economy)’의 보고에 따르면, 2011년 미국의 창업기업 중 이민자가 세운 기업은 전체의 28%에 해당한다. 이민자가 창업한 비상장기업의 근로자는 전체고용인구의 10%를 차지했고 이들 기업은 77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물론 이 중에는 레스토랑이나 자동차 수리점처럼 영세한 규모의 사업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초당적 연구 단체인 ‘국립미국정책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American Policy)’은 가치평가액 10억 달러를 상회하는 미국 테크기업 87개 중 44개가 이민자가 창업한 기업으로, 이들 대다수는 오늘날 미국 최고의 부자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록 모두 전혀 놀라울 것은 없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의미 있는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쉬워졌고, 항상 존재해온 미국의 창업가 계급은 250여 년의 역사에 걸쳐 이민자로 구성되어왔다. ━ 이민은 기업가 정신을 내포하는 마인드셋 13세의 나이에 영국 리버풀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미국독립혁명의 자금을 대는데 일조했고, 미국독립선언서와 헌법에 서명했다. 프랑스 출신의 이민자 스티븐 지라드(Stephen Girard)는 미국에서 은행업을 시작해 미-영 전쟁 기간동안 미국정부가 발행한 전시국채의 대부분을 인수하며 미국을 재정난으로부터 구했다. 독일 출신의 젊은 악기제조가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는 미국에서 모피무역과 부동산사업을 통해 부를 일구었고 이후 미국 최초의 사회공헌사업가 대열에 합류했다.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의 이민자 프리드리히 와이어하우저(Friederich Weyerhaeuser)는 목재업의 거물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생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철강업으로 미국 최고의 부호라는 명성을 쌓았고, 애스터와 마찬가지로 은퇴 후 사회공헌에 일생을 바쳤다. 프록터&갬블, 크래프트(Kraft), 그리고 듀퐁의 기업자 모두 이민자 출신이다.피터피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스스로 리스크를 감내하기로 결정하는 이민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업가 정신을 내포한다. 이민은 마인드셋이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비행기에 올라타는 겁니다.” 올해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 70위에 오른 사히드 칸(Shahid Khan)의 말이다. “이민자는 변화에 잘 대처하고,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지요.”포브스 400대 부자 중 이민자 출신의 부자를 대략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당수는 피터피의 경우처럼 무언가를 탈출해 미국으로 왔다.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은 세르게이가 6살이 되던 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피해 러시아를 떠나왔다. 조지 소로스는 나치 점령하의 헝가리를 피해 미국으로 왔고, 이고르 올레니코프(Igor Olenicoff)의 가족은 러시아 황제와의 인맥 때문에 세계2차대전 이후 소비에트연방을 떠나 미국으로 와야만 했다.세계 어디를 가든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더 많은 기회를 찾아 미국을 선택한 사례도 있다. 엘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루퍼트 머독의 아버지는 호주에서 신문사를 경영하며 기사 작위를 받기까지 했다. 피에르 오미다이어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빈부의 정도와 관계없이, 이들 부자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미국의 기업가 정신이다. 미국을 선택한 이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기회의 가치를 알아보고 한편 기회가 필연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다. 기회를 주었다고 해서 여기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공을 일구어야 한다는 것이다. ━ 30억 달러의 부를 일군 장도원·장진숙 부부 장도원 회장과 아내 장진숙은 1981년의 한 토요일 로스앤젤레스(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바로 그 해 미국으로 떠나온 부부는 고등학교 졸업장 외에는 수중에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장회장은 미국에 오자마자 신문의 구직광고를 샅샅이 훑었고 LA의 한 커피숍에서 구직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접시를 닦고 음식을 준비하는 아침교대조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저는 최저임금을 받고 일했습니다…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주유소에서 하루에 8시간을 추가로 일했고 더 나아가 소규모로 사무실 청소업을 시작해 자정까지 바삐 일했다. 아내인 장진숙은 미용사로 일했다.장도원 회장은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의류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좋은 차를 탄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에 의류점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후 부부는 1만1000달러(약 1200만원)를 모아, 900평방피트(83㎡)) 규모의 의류점을 내고 패션2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해 7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이후 부부는 6개월마다 신규매장을 내기 시작했다. 이후 포에버21로 브랜드명을 바꾸었으며, 오늘날 부부의 자산은 30억 달러에 이른다.“저는 거의 무일푼으로 미국땅을 밟았습니다.” 장회장의 말이다. “미국이 저에게 준 기회에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할 것입니다.”파키스탄계 이민자 사히드 칸의 경우 논리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민지로 적합한 곳은 영국이었다. 하지만 본인의 말을 빌리면, “제게 미국은 항상 약속의 땅이었습니다”라고 한다. 1967년 1월, 칸은 당시 이민심사 관문인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와 같았던 JFK 공항에 내렸다. 시카고행 연결편이 눈보라로 우회하는 바람에, 16세였던 칸은 대신 세인트루인스로 향했고 비행기에서 내려 섐페인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5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밤이 되면 시급 1달러20센트를 받고 접시닦이일을 했다.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이런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칸의 말이다. “제게 바로 든 생각은, ‘와, 내가 일할 수 있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나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 였습니다.”칸은 자동차제조업체 플렉스-N-게이트(Flex-NGate)에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취직했다. 몇 년 후에는 저축한 돈 1만6000달러와 중소기업청에서 대출받는 자금으로 완성차업체에 범퍼를 공급하는 기업을 창업했다. 그리고 전 직장이었던 플렉스-N-게이트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칸의 회사는 미국시장에서 매출 61억 달러를 기록하며 1만2000여 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다. ━ 전세계 젊은 창업가들을 끌어들이는 교육시스템 칸이 현재 디트로이트에 건설 중인 공장은 주당 25달러의 시급에 최고 1000명의 직원을 고용할 예정이다. 칸의 자산은 69억 달러로 추정된다.사소한 의미에서나마 칸은 영국 이민자이기도 하다. 영국 풀햄 축구팀의 구단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제2의 조국은 미국이라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도록, 미국의 억만장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바로 NFL 풋볼팀으로, 칸은 잭슨빅 재규어스의 구단주이다.이토록 많은 이민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만이 가진 또다른 장점에 기인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교육시스템은 전세계에서 가장 명석하고 야심에 가득 찬 젊은 창업가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에 비견되어왔다.지난 수십년 동안 억만장자가 되기 위한 성공 공식은 점점 간결해졌다.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와서, 미국과 미국이 제공하는 기회 (그리고 장래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고, 졸업 후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에서 받은 교육을 활용해 혁신을 (그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2000년과 2014년 사이 미국에서 학부과정을 수료한 이민자의 수는 78% 증가했다. 이민자정책연구소(Migrant Policy)에 따르면 25세 이상의 이민자 중 30%가 학사 혹은 그 이상의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출생 성인인구에서 볼 수 있는 수치에 거의 맞먹는다. 그리고 이들 이민자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현대사회에서 부를 창출하는 원동력인 수학, 과학 혹은 기타 이공계를 전공한다. 2011년 특허출원기준 미국 상위 10개 대학에서 창출한 특허 중 4분의 3이 이민자의 손에서 탄생했다.로메시 와드와니(Romesh Wadhwani)는 위와 같은 공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인도의 전설적인 인도공과 대학을 다녔으나, 1969년 도미해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하는 대신, 와드와니는 소프트웨어 기업 애스펙트 디벨롭먼트(Aspect Development)와 기술산업에 주력하는 사모투자전문기업 심포니 테크놀로지 그룹(Symphony Technology Group)을 창업해 30억 달러에 이르는 부를 축적했다.“당시 인도에 있었더라면 창업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겁니다. 창업가를 위한 지원이 되지 않았지요.” 와드와니의 말이다. “미국에서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혈연이나 기존의 부 혹은 사회적 지원보다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을 기반으로 성공을 일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중국 출생의 앤드류 청(Andrew Cherng)도 1966년 수학과 장학생으로 베이커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캔자스주 볼드윈에 정착하면서 미국사회의 능력주의를 목도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청은 “중국인이 일본인과 어울려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년 후, 페기(Peggy)라는 이름의 미얀마 출신 신입생을 만났고, 이후 둘은 결혼했다. “미국에 왔을 때, 제가 갖고 있던 소지품은 거의 없었습니다.” 청의 말이다. “저를 성공으로 이끈 힘은 가난이었습니다.”1973년 청은 고국에서 수석주방장으로 일하다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온 아버지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판다 인(Panda Inn)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10년 후에는 아내와 함께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있는 한 쇼핑몰에 판다 익스프레스(Panda Express) 1호점을 열었다.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항공우주 소프트웨어개발 엔지니어로 일했던 아내 페기가 도입한 시스템 덕분에 판다 익스프레스는 오늘날 1900개 매장에서 24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패스드푸드식 중국요리 체인으로 탈바꿈했다. 부부는 3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1억 달러가 넘는 사회공헌기금을 모았다. “미국에서는 스스로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여러분의 앞길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청의 말이다.더글라스 리온(Douglas Leone) 역시 미국 유학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한 사례이다. 1968년 이탈리아를 떠나올 때, 리온은 중학생이었다. 리온의 부모는 아들이 “유럽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사회계층의 상향이동”이 가능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코넬 대학에 입학한 리온은 컬럼비아와 MIT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말했다.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지위로 올라섰습니다.”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휴렛패커드 등의 기업에서 세일즈 직원으로 일하던 리온은 1988년 벤처자본기업인 세쿼이아 캐피털에 입사했다. 1996년 매니징 파트너 자리에 올랐고, 리온의 재직기간 동안 세쿼이아 캐피털은 구글, 유튜브, 자포스, 링크드인 그리고 왓츠앱 등의 기업에 투자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일조했다. “세쿼이아 캐피털이 투자한 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가 100만 개 이상이냐 혹은 이하냐 중 어느 쪽인지 골라야 한다면, 저는 이상이라는 데 판돈을 걸겠습니다.” 리온의 말이다. ━ 미국 유학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한 사례 많아 리온의 현재 자산은 27억 달러로 추정된다. 리온은 자신이 이민자로 경험했던 것들이 매우 유용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민자라는 사실은 원동력이 되며, 이같은 원동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날까지도 이같은 원동력을 느낍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제가 절대 물려줄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자포자기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지요.” 하루아침에 성공한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이다.하지만 42명의 이민자 부자 이외에도, 포브스 400대 부자 명단에는 2세대 이민자가 57명 포함되어 전체의 14%를 차지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18세 이상 시민 중 2세대 이민자의 비율이 6%라는 사실과 비교해보라). 이는 미국의 억만장자 계층이 귀족혈통일 것이라는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이같은 창업가의 헝그리 정신은 적어도 1세대 동안은 지속되는 듯 하다. 유대인인 샘 젤(Sam Zell)의 부모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 침공 전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에 가면 길거리가 금으로 뒤덮여 있다고 말씀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이 미국으로 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사는 행운을 누리는 것에 대해 한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셨지요.” 사모투자와 부동산 투자로 47억 달러의 자산을 축적한 샘 젤이 말했다. “부모님은 정말 열심히 일하셨고 애국심이 투철한 분이셨습니다. 이같은 정신을 분명 저희에게도 불어넣으셨지요.” ━ 대선 기간 이민자·난민 때리기는 미국의 전통 대선기간 펼쳐지는 이른바 이민자와 난민 ‘때리기’는 미국의 오랜 전통이다. 이민자와 난민을 일자리를 훔쳐가는 범죄자로 바라보는 이같은 시각은 새로운 이민자층이 등장하며 그 표적만 바뀌었을 뿐이다. 독일 이민자는 아일랜드 이민자에게, 아시아계는 아랍계에, 그리고 천주교는 유태인에 그 바통을 넘겨주었다. 요즈음 표적이 되는 것은 히스패닉과 이슬람 이민자이다. “수년간 우리는 다양한 사이클을 거쳐왔습니다.” 이민법을 전문으로 하는 템플 대학교의 교수 피터 스피로(Peter Spiro)의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같은 사이클을 벗어난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또다른 의미있는 사실은 이 열띤 공방전 속에서도,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단연코 이민자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데 있다. 2016년 퓨리서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민자가 “근면함과 재능으로 미국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고 믿는 미국인이 전체의 59%를 차지했다(이민자를 “미국의 짐”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전체의 33%였다). 이민자의 유입으로 비숙련 노동자가 직면하는 임금하락 압력이 뛰어난 이민자들이 창출하는 경제성장과 일자리로 상쇄되고도 남는다는 것이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논리인 것이다.하지만 이같은 역동성도 도전에 직면할 지 모른다. 미국정부는 H-1B로 널리 알려진, 전문직 비자 요건을 강화해왔다. 전문직 비자에 대한 수요가 법으로 규정된 할당치를 넘어서고 있지만, 2004년 이래로 관련 비자 및 쿼터 상한선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다. 사실 2014년 이후 매년 이같은 비자 쿼터는 신청접수를 개시한 이후 5일 만에 모두 마감되는 실정이다. 글로벌화된 경제체제하에서 갓 졸업한 대학생 상당수가 고국으로 돌아가 더 많은 기회(혹은 적어도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명석한 인재를 점점 더 강력한 힘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 인재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고, 그 다음에는 이들 인재가 원하는 바와는 반대로 졸업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내몰아 자국에서 미국과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피터피, 칸, 와드와니, 그리고 청을 포함한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이민자들에게 물어보라. 다들 배경은 다르지만, 크게 세 개의 원칙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첫째, 성취동기가 강력한 고학력 이민자들이 미국에 오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격을 갖춘 투자자로부터 10만 달러의 자금을 모아 ‘스타트업’ 비자를 발급함으로써 이민 창업가들이 보다 쉽게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지지했으나, 이 법안은 양당이 대립하는 가운데 의회에서 계류 중이다. 최근 국토안보부가 발표한 차선 책격의 법안은 국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미국의 창업기업에 소유지 분을 갖고 있고 ‘능동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민자에게 임시로 비자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둘째, 불법 이민자에 대해서는 국경단속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셋째, 이미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이민자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하며, 여기에는 등록, 납세 그리고 준법 등의 의무가 포함된다.어쩌면 이를 통해 아메리칸드림의 정신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어느 정도 합의가 도출될 지 모른다. 이민자가 꿈꾸는 또다른 10억 달러짜리의 혁신으로 판명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MONTE BURKE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비자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다 미국의 이민제도가 인스타그램을 고사시킬 뻔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2009년, 브라질 유학생으로 스탠포드를 졸업하고 인스타그램의 제품 및 비전을 탄생시킨 공동창업자 마이크 크리거(Mike Krieger)는 취업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좌절한 나머지 고국 브라질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막판에 비자서류가 통과되면서, 크리거와 또다른 공동창업자이자 인스타그램의 최고경영자인 케빈 시스트롬(Kevin Systrom)은 인스타그램을 론칭해 5억 명의 사용자와 최고 500억 달러에 이르는 기업가치를 기록하는 거대 소셜미디어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스타그램은 수백 명의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했다.창업가로 시작해 투자자로 변모한 니틴 파치시아(Nitin Pachisia)와 마난 메타(Manan Mehta)는 이민자가 창업한 기업이 비자 취득 문제로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둘이 2년 전 설립한 언섀클드 벤처스(Unshackled Ventures)는 초기단계의 벤처자금 및 멘토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외국에서 출생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창업가들이 직면하는 비자문제를 해결해준다. 지분을 취득하는 댓가로 현금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 창업자를 위한 고용주 및 비자 스폰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이같은 아이디어는 하이테크 업계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섀클드는 로렌 파웰 잡스 및 제리 양과 같은 유명 투자자 80여 명 및 블룸버그의 벤처 사업부로부터 500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받았다. 현재 이보다 더 큰 규모의 펀딩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있다.“이민자를 둘러싼 국가적 담론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언섀클드의 사업모델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담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기회로 가는 길의 장애물을 없애고, 고도의 지적자본에 투자하고, 우리 모두에게 편익을 제공할 혁신을 촉진시키는 담론 말입니다.” 로렌 파웰 잡스가 이메일을 통해 한 말이다. “언섀클드는 이민자가 바로 잠재력을 대변하고 있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비자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언섀클드 뿐만이 아니다. 지난 8월 오바마 대통령은 민간 투자자로부터 최소 34만5000달러의 투자액을 확보한 이민 창업가에게 임시 취업비자를 부여하자는 새로운 규정을 제안했다. 이같은 계획은 이민 창업가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기 위한 ‘스타트업 비자’ 법안의 차선책이었다. 스타트업 비자 법안은 기술업계의 열렬한 지원을 등에 업고 백악관 역시 수용한 아이디어였지만, 의회에서 통과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같은 제안은 언섀클드의 창업가들이 보다 쉽게 비자를 취득하고, 메타와 파치시아가 멘토 및 기업육성가로서의 역할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미국은 최고의 인재를 지속적으로 유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으며, 이들 인재에게 미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제공해야 합니다.” 메타는 기술업계에서는 복음처럼 퍼지고 있는 메시지를 재차 강조한다.- MIGUEL HELFT 포브스 기자 ━ 이민자 부자의 출신 국가 올해 포브스 400대 부자 중 10% 이상이 부를 구축하고자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최초의 이민자는 194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간다. 이 중 이스라엘이 가장 많은 6명을 차지하며, 그 다음이 인도로 5명이다. 베트남을 포함한 나머지 8개 국가는 각각 1명의 부자를 배출했다.러시아 세르게이 브린 1979, 이고르 올레니코프 1957중국 앤드류 청 & 페기 청 1966,1967,존 투 1971, 로저 왕 1970호주 루퍼트 머독 1985대만 젠슨 황 1973 민 카오 1970년대, 데이비드 선 1977 제리 양 1978베트남 끼에우 호왕 1975한국 장도원 & 장진숙 1981아르헨티나 호르헤 페레즈 1960년대이스라엘 미키 에리슨 1950년대, 알렉 고레스 1968, 톰 고레스 1968, 노암 고츠만 1960년대, 아이작 펄뮤터 1960년대,하임 사반 1983케냐, 인도 바랏 데사이 & 니르자 세티 1976, 1978남아프리카공화국 엘론 머스크 1990년대,패트릭 순시옹 1980인도 라케시 강왈 1970년대,존 카포르 1964,램 시리램 1970년대,로메시 와드와니 1969파키스탄 사히드 칸 1967영국 마이클 모리츠 1976프랑스 피에르 오미다이어 1973이탈리아 더글라스 리온 1968우크라이나 렌 블라밧닉 1978, 얀 쿰 1992그리스 존 캐치마티디스 1949,딘 메트로파울로스 1956독일 다그마르 돌비 1976, 피터 틸 1968헝가리 토마스 피터피 1965, 찰스 시모니 1987,조지 소로스 1956,스티븐 우드바르-헤이지 1958

2016.10.25 10:51

15분 소요
‘자산관리의 꿈’ 빌딩① 빌딩 오너, 그들은 누구인가 - 빌딩 부자 ‘강남 사는 50대 초반 여성’

산업 일반

부자 대열로 진입하는 ‘마지막 열차’ 빌딩 매매. 저금리에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투자 환경 속에 빌딩 투자에 관심을 갖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워낙 고가인데다, 대중적인 투자처가 아니기 때문에 접근 방법과 매물 고르는 법, 세제 등 어느 것 할 것 없이 낯설다. 본지가 빌딩 투자에 도움을 주는 기획 시리즈를 준비한 배경이다. 첫 편에서는 빌딩을 보유한 사람들의 거래 내역을 중심으로 빌딩 오너는 누구인가를 다룬다. 앞으로 대기업·재벌 일가가 주로 투자하는 지역, 연예인들이 주로 투자하는 빌딩, 최근 빌딩 거래가 활발한 지역의 현황, 빌딩에 투자하는 방법과 세제 문제 등도 짚어본다.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수필집 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제 목구멍과 처자식 건사하려면, 죽으나 사나 일터에서 허리 굽혀 일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급여에서 매달 추렴한 돈을 모아 예·적금에 넣어 두고 주식에 투자하고 펀드에 쌓아둔다.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볕들 날 있겠지.”하지만 결혼·육아·자녀 교육·노후 대비 등 목돈이 들어가는 일을 치르고 나면 주머니는 금세 텅텅 비어 버리기 십상이다. “만약 50억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쓸래?” 누군가 묻는다. 내집을 장만할까, 아니면 은행에 넣어둘까, 아니면 저평가 우량주에? 여러 대답이 나오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빌딩을 사겠다고 답할 것 같다. 내가 죽더라도 월급처럼 꼬박꼬박 돈이 나오고, 예금보다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운이 좋다면 땅값이 올라 대박의 기회를 맞을지도 모른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 대한민국의 수많은 미생들이 꿈꾸는 재테크의 끝은 결국 빌딩일지 모른다.한국에서 빌딩은 부동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수도권에 빌딩 한 채 갖고 있다고 주변에 말해 보라. 놀라움과 부러움, 동시에 시기심의 눈빛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시선에는 빌딩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치관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넌 이제 걱정할 것이 없겠구나.’ 부동산 임대업자가 꿈이 돼 버린 나라라는 비하도 있지만, 빌딩을 사는 일은 가장 합리적인 재테크 수단일 것이다.하지만 빌딩 투자는 너무나도 먼길처럼 보인다. 연봉 5000만원의 직장인이 돈 한푼 안 쓰고 30년을 모아야 15억원을 쥘 수 있다. 빌딩에 가까이 가기에는 턱도 없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돈이다. 그러나 저금리 시대를 맞아 금융부채를 이용하거나, 공동 명의 구입, 경매 등 빌딩으로 통하는 경로는 여러 가지다. 돈이 없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언제든, 누구든 재테크의 끝을 모색할 수 있으며 그럴 권리도 있다. 투자자들의 헛된 욕망을 자극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투자 환경 속에 빌딩 매매를 하나의 투자 대안으로 삼을 수 있고, 그 길은 한번쯤 검토해 봄직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그간 임대사업자와 관련한 기사들이 제도적 관점에 그쳤던 것과는 달리, 본지는 지난해 실제 거래가 이뤄진 사례를 중심으로 매도 물건의 특징과 지역별 정리, 매수자들의 공통점을 다룰 예정이다. 1편에서는 실제 빌딩을 사들인 빌딩 오너들의 주된 매매 지역과 나이·성별·매매 지역별 동향 등을 분석해, 실수요자들의 이해와 접근을 도울 것이다. 2편에서는 삼성·현대·신세계·롯데·한화·CJ·효성 등 대기업 재벌가가 소유한 빌딩과 밀집 지역을 파헤쳐 빌딩 투자를 준비 중인 투자자들에게 투자 유망 지역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3편에서는 빌딩 매매의 ‘큰 손’인 연예인들의 빌딩 매매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빌딩 투자의 트렌드와 방향을 알릴 계획이다. 4편에서는 서울 시내 빌딩 매매 동향과 가격변화, 빌딩 유형별·지역별 정리, 투자자들의 동선 등을 분석해 본격적인 투자 준비 단계에 접어든 투자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5편에서는 사례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빌딩 매매의 주의점과 좋은 매물을 찾는 법, 지분 쪼개기와 세제 관련 팁 등 유용한 정보를 소개할 예정이다. 빌딩 오너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루 일과를 쇼핑으로 보내는 드라마 속 부잣집 사모님일까, 아니면 부모로부터 천문학적인 재산을 물려받은 젊은이일까. 아무리 많은 통계를 들여다 봐도 빌딩을 사들인 사람의 직업과 재산 규모, 하루 일과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매매 자료를 보면 분명한 점은 보인다. 주된 빌딩 매매가 서울 여의도 한복판이나 20~30층 규모의 대형 빌딩이 아니라는 점이다.물론 사들인 사람이 모두 수백억원을 가진 재력가도 아니다. 지난해 거래된 빌딩의 평균 높이는 고작 4.83층이었고, 연면적은 336.98m²이었다. 평균 매매가는 52억7696만원. 빌딩을 산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31억8611만원의 대출을 받았으니 실제로 들어간 자기 돈은 20억원 남짓이다. 혼자서든, 여러 명이 힘을 합치든, 분명 빌딩은 접근 가능한 시장이다. 도널드 트럼프나 왕젠린 같은 부자들만이 빌딩 매매의 주인공은 아니다. 2015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빌딩 거래를 파헤쳐 지역별 특성과 사들인 사람들의 평균적인 모습은 어떤지, 어떤 일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봤다. 이를 위해 본지는 지난 1년 동안 서울 지역에서 실제 잔금 납부까지 완료돼 거래가 성사된 734건의 빌딩 거래 매매 상세 내역을 입수해 분석했다. 자료 수집은 원빌딩부동산중개의 도움을 받았다.지난해 빌딩을 구입한 이들 중에는 개인 자격으로 구입하거나 공동 투자해 빌딩을 구매한 사람이 법인 구매자보다 많았다. 총 734건의 거래 내역 중 개인 자격으로 구매한 거래건수는 모두 561건이었다. 여기에 법인과 개인이 공동으로 빌딩을 구매한 거래까지 더하면 76.8%가 개인 구매다. 다만, 이른바 강남3구 지역에 소재한 빌딩 거래 내역만 놓고 보면 법인소유주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강남구·서초구·송파구 등 강남3구 지역의 법인소유주 비율은 27.7%로, 다른 지역보다 약 10%포인트 안팎 높은 편이다. 강남3구 지역 빌딩의 가격이 높아, 개인투자보다는 법인투자가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빌딩 거래 내역 중 개인이 구매한 빌딩만 놓고 보니, 공동소유 거래가 일반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지난해 개인이 구매한 561건의 빌딩 중 매수자가 1명인 단독소유 거래는 총 204건(36.4%)로, 공동소유 빌딩(63.6%)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거래가가 비싼 강남3구에서 공동소유자가 많았다. 강남3구의 거래 매물 중 매수자가 2명 이상인 거래건수는 206건으로 강남3구에서 이뤄진 전체 거래의 88.4%를 차지했다. 이는 강남3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매수자 2인 이상 거래 비율(46%)보다 무려 2배가량이나 높은 수치다. ━ 서울 강남권에선 공동보유·갈아타기 수요 많아 서울지역에서 빌딩을 매입한 사람은 평균 50대 초중반이었다. 최저연령은 22세, 최고연령은 84세로 나타났다. 강남3구에서 빌딩을 구입한 사람의 평균연령은 51.4세로, 비강남 지역 빌딩 구매자(54.2세)보다 약 3세 정도 적었다. 오동협 원빌딩부동산 중개 이사는 “매수자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통상 강남지역에서 빌딩을 매수하는 사람들의 연령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며, “강남 빌딩주는 조금 작은 빌딩이라고 하더라도 3~5년 후 더 큰 빌딩으로 속칭 갈아타기 하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 20~30대 부동산 투자자가 많은 편이다”라고 말했다.실제로 지난해 강남3구에서 빌딩을 구입한 빌딩 오너 중 20~30대인 투자자의 비중은 17.2%로, 강남 이외의 서울 지역에서 빌딩을 구매한 20~30대의 비중(8.6%)보다 높았다. 부동산 투자자의 명의는 여성이 많은 편이었다. 강남3구는 남성이 44%, 여성이 56%이며, 강남 이외의 지역 빌딩 거래를 살펴봐도 비율에는 큰 차이가 없다. 남성 44.6%, 여성 55.4%다. 다만, 명의는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부부가 상의해서 빌딩 투자 의사결정을 한다는 측면에서 성별에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빌딩 오너들은 주로 어느 지역에 살까. 대부분 강남구 거주자였다. 법인거래를 제외한 개인이 매입한 빌딩 거래를 대상으로 매수자의 주소지를 분석했더니, 무려 83.5%가 서울에 살고 있었으며, 이 중 강남3구 거주민은 절반가량(46%)이었다. 이들의 거래 선호 지역은 역시 본인들이 살고 있는 강남3구다. 강남3구 빌딩 거래 328건 중 강남·서초·송파에 적을 두고 있는 빌딩 오너는 59.5%였다. 범위를 넓혀 생각해 봐도, 지난해 서울 전체 빌딩 오너의 38%가 강남구나 서초구, 혹은 서초구에 살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강남3구 중에서도 강남구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강남 3구에서 지난해 빌딩을 구입한 사람의 주소지는 강남구가 31.7%, 서초구가 18.3%, 송파구가 9.5%로 나란히 1~3위다. 강남구 거주자는 비강남 지역 빌딩 투자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남3구가 아닌 서울 지역에 지난해 투자한 빌딩 오너 10명 중 1명(9.9%)의 주소지도 역시 강남구다. 서초구(6.9%) 거주민도 비강남 빌딩을 많이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비강남지역 빌딩 오너의 주소지는 마포구(7.1%)·종로구(5.2%)·광진구·서대문구·성동구·성북구·용산구(각 4.2%) 순으로 많았다.올해 빌딩 매매 동향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유의미한 사례가 쌓여 통계적 가치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 분석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저금리 여파와 부동산 경기의 회생 조짐으로 올해 빌딩 매매 시장 동향을 미리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올해 빌딩 매매 시장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흐름 중 하나는 매수자가 젊어졌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추고 노후에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한 40~50대 중·장년층의 매수세가 많았다. 그러나 저금리의 장기화 기조에 발맞춰 30대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빌딩 매매에 노크하고 있다.오동협 원빌딩부동산 이사는 “의사·변호사 등 억대 연봉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금융부채를 끼고 빌딩을 사려는 움직임이 많다”며 “이들은 앞으로 20년 이상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어 이자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빌딩 금액이 오를 것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내집 마련의 꿈? 빌딩 마련의 꿈! 지난해까지 강남에 집중됐던 매수세가 30대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홍대 인근으로 몰리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 증가 등으로 홍대의 상권이 연남동 등지로 확대되고 있어 앞으로 투자가치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식당 등 영업이 필요한 경우는 입지를, 임대 등 고정 수입을 원하는 사람들은 가격을 먼저 고려한다는 것이 시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인근 공인중개사 관계자는 “3월에만 10억~20억대 소형 빌딩 매매를 문의하는 고객이 20~25명이나 됐으며, 적극적인 매수 의사를 내비친 고객도 5명 이상이었다”고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2015.04.11 10:41

7분 소요
Omnivore SPORTS - 중국에 뿌리내리는 프로 야구

국제 이슈

메이저리그가 4년 전 진출해 정착 단계…선수 재목 부족이 과제레온 셰가 실수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자포자기한 순간이 있었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스폰서십 책임자를 맡았었다. 수십 개의 주요 경기장에서 수천가지 중요 상품의 판촉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나 6개월 뒤엔 딱 한 가지 상품의 홍보를 맡았다. 탁구·농구·비디오게임이 가장 인기를 끄는 나라에서 진행이 느리고 헷갈리는 룰을 가진 야구였다. “이제 뭘 어떻게 하지?” 메이저리그베이스볼(MLB) 중국 대표를 맡은 첫날 셰는 생각했다. 그야말로 직함 하나만 들고 허허벌판에선 격이었다.중국에서 야구가 그렇게 생소한 스포츠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중국인들이 열광하지는 않는 듯했다. 야구를 즐기는 사람은 1만 명에 못 미치는 괴짜들, 뛰어난 기량을 지닌 외국인 선수 그룹, 그리고 야구장 인기 스낵 크레커 잭의 현지 팬이 전부였다. 6개팀으로 이뤄진 신생 프로 리그에는 길가의 고장 난 자동차보다 구경꾼이 더 적게 몰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야구는 “선수와 직접적인 연고가 없으면 구경 가지 않을 스포츠”라고 당시 셰의 상사 중 한 명이 털어놓았다.야구를 세계의 보편적인 스포츠로 만들기위한 가장 유망한 시도가 그대로 무산될 뻔한 순간이었다. 다음에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이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셰의 아버지가 전 직원 3명의 MLB 차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느린 걸음으로 들어섰다. 아들의 새 직책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그 순간 그 78세의 은퇴한 기계공학자는 뜻하지 않은 기여를 했다. 아들은 두 가지를 떠올렸다. 첫째는 아버지도 이젠 나이가 드셨구나 하는, 단순하면서 슬픈 관찰이었다. 그뒤 그는 일순 눈을 의심했다. 아버지가 야구 배트를 들고 있네? 아버지가 설명했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거든.” 그리고 배트의 굵은 부분에 자신이 한 말을 한자로 큼지막하게 써넣었다.아버지는 1950년대 대학 시절 가느다란 금빛 배트를 사용했었다. 중국의 민족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야구가 사라지기 전의 시절이었다. 아들이 신세대 중국인에게 야구에 대한 열정의 씨를 심어주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배트를 기증했다. “그 일로 중국에서 야구의 역사가 길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셰가 베이징의 사무실에서 전화로 당시를 돌이켰다.4년이 흐른 지금 메이저리그 야구 시즌이 다시 돌아왔다. 셰는 야구를 현대적 특성을 지닌 유교적 여가활동, 전형적인 중국 스포츠로 포장하고 있다. 그 전략이 먹혀 드는 듯하다. 중국에서 다시 야구 경기가 열리고 팬들이 몰려든다. 때로는 원조인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10개 국영TV 채널에서 중계하며 수억 명이 시청한다. 그밖에 광고 캠페인, 기념품 판매점, 카니벌 같은 순회 행사, 국가 후원행사가 수백만 명을 끌어 모은다.베이징의 러시아워 때마다 통근자들은 시내 버스에 설치된 1만2000개 TV 스크린을 통해 금주의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함께 해요’라는 홍보 캠페인도 방송된다. 야구 선수 또는 팬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만한 매력적인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을 소개한 다음 셰의 아버지처럼 “야구를 즐긴다”는 뜻밖의 고백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그 과정에서 야구의 특성이 중국 고유의 미덕으로 선전된다. “유교사상 얘기를 해보자”고 아시아 지역 MLB 책임자이자 셰의 상사인 짐 스몰이 말했다. 그는 중국의 윤리 철학과 그 미국 스포츠 간의 유사성을 늘어놓았다. “시계가 없고,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모든 일이 3 또는 3의 배수로 진행된다….” 또한 중국 관료들과의 대화에선 야구가 지정학적 무기로 소개된다. 경쟁에 열광하는 중국으로선 수십 년 전부터 야구가 성행한 대만·한국·일본 등의 지역 라이벌들을 누를 기회라고.그렇다면 중국에서 MLB의 걸림돌이 뭐란 말인가? 한 마디로 선수 부족이다. 중국 인구는 10억 명이지만 투수가 없다. 청년이 수억 명이지만 타자가 없다. 중국의 조직력은 세계에서 알아주지만 야구선수 육성 아이디어가 없다. 대만·한국·일본 모두 여러 명의 선수를 미국 메이저 리그로 보냈지만 프로 계약을 체결한 중국 태생 선수는 5명도 안 된다. 모두 마이너리그를 전전해 왔다. 언제 미국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할지 모른다.최근 중국 야구국가대표팀은 베이징 올림픽에 앞서 캐치볼 훈련을 해야 했다. 그리고 올해 야구월드컵 격인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중국팀의 타자는 호리호리했으며 투수는 살랑살랑 공을 던졌다. 프로 유망주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쪽에는 정말 재목이 없다”고 벤 배들러가 말했다. 베이스볼아메리카 잡지에서 세계 유망주를 담당하는 기자다.그것은 셰에게는 큰 문제다. 2002년 휴스턴 로켓츠가 229㎝의 야오밍과 입단계약을 체결했을 때 2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중국 팬들을 미국프로농구(NBA)로 끌어들였다. 지난 3월의 WBC 대회는 한국·대만·일본인들에게 자국의 스타가 세계적인 선수들과 대적하는 모습을 볼 기회였다.덕분에 WBC는 21세기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스포츠 종목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것이 스타의 힘이다. 그러나 셰가 취임했을 때 중국은 인재를 발굴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중국 전체에 제대로 된 야구 경기장이 3곳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인 2008년 올림픽 스타디움은 쇼핑몰을 세우기 위해 최근 헐렸다.그러나 이 문제도 MLB는 개선해나가는 중이다. 로비를 통해 중국 120개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야구를 도입하도록 했다. 수 세대 만에 처음으로 중국의 8~12세 어린이들이 스트라이크아웃의 특별한 슬픔, 그리고 진루의 특별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밖에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MLB의 이동 타격훈련장과 피칭 연습장에서 야구의 매력을 경험한다.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은 독립적인 야구 프로그램에서 받아준다.MLB가 이들 수십 개 일반인 단체에 장비나 훈련을 지원한다. 모두 인재 발굴 목적이다. 12세 어린이까지 포함해 최고 유망주는 MLB ‘양성소’ 입소를 권유받는다. 이들은 1년 12개월동안 거의 매일 프로 선수처럼 훈련을 받는다. “이것은 큰 실험”이라고 짐 스몰이 설명했다. “야구의 전통이 없는 나라의 청소년을 데려다가 올바른 훈련·영양·코칭으로 유망주로 만들 수 있는가?”MLB는 곧 그 답을 얻게 된다. 최초의 트레이닝 센터가 2009년 우시에 문을 열었다. 중국 동남부의 에머럴드빛 양쯔강 하구에 자리잡은 회색 톤의 도시다. 올 가을에는 첫 교육생 중 최소 3명의 프로 재목이 배출된다고 MLB의 경기력향상 책임자 릭 델이 말했다. 델은 야구의 다음 개척지인 필리핀의 옥수수밭 개활지 가장자리에서 전화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말은 옆에서 진행되는 야구 경기의 소음에 파묻혔지만 자부심만은 전달됐다. “그 아이들을 보면 ‘야, 진짜 물건들이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것이다.”그들이 대단한 재목이 아니더라도 MLB는 여전히 자신만만하다. 1차 교육생의 뒤를 이어 ‘완성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매번 전 기수보다 약간 더 크고 강하다. 강속구를 던지는 호리호리하고 한 16세 선수는 두 정상급 배구선수 부부의 아들이다.“미국인들이 걸작을 그릴 수 있는 순백의 도화지와 같다”고 그의 아버지가 2012년 한 중국 기자에게 말했다. 올 여름 그 소년을 비롯한 유망주들이 미국으로 공수되어 캘리포니아와 뉴저지의 일류 고등학교 리그에 투하된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출발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고 델이 말했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면 그런 날이 온다.”그 사이 레온 셰는 2009년 초창기 막막하던 날들의 회의론자들을 떠올렸다. 그는 회의를 나타냈던 모든 전문직 친구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야구가 ‘외계’ 스포츠라서 번창하는 중국에서 잊혀질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그들의 메일 수신함에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차곡차곡 쌓인다. 경기장, 파트너십, 외계인 침공의 진척이 새로 이뤄질 때마다 “반드시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셰가 말했다.

2013.04.22 17:38

5분 소요
진정한 남성해방을 위하여

산업 일반

이제 남성은 성별의 편견을 떨쳐버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역할을 확대 재창조해야 한다 남자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지난 몇 년 동안 각종 미디어는 남성이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남성의 지위가 ‘하락했다’, ‘남자와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둥 온갖 끔찍한 예측을 내놓았다. 급기야 지난여름엔 종합시사지 애틀랜틱의 해너 로신이 ‘남성의 종말’이 목전에 닥쳤다고 선언했다.여러모로 일리 있는 주장이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 경제가 근육을 쓰는 육체 노동에서 머리를 쓰는 일로 이동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일터로 진출했다. 노동력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945년의 70%에서 현재 50% 아래로 떨어졌다.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젊고 독신이며 아이가 없는 여성 근로자(다시 말해 차세대의 주인공이다)의 소득이 동료 남성보다 8% 높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여학생 수는 남성과 같거나 더 많다.남성이 주도권을 쥐는 분야는 알코올 중독, 자살, 노숙자, 폭력, 범죄다. 거기다가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겹쳐 건설과 제조 등 남성 지배 산업이 초토화되면서 인류학자로서 언론에 기고하는 사람들은 당연스럽게 남성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남성이 처한 상황을 우려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의문은 너무도 분명했다. 만약 그런 남성성이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했다면 다시 본궤도에 올려놓을 방법이 뭘까? 하지만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일부 남성은 별다른 대책 없이 무조건 남성성의 옛 방식과 관습에서 구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럿거스대 인류학자 라이오넬 타이거는 “일종의 힘,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남성다움”을 되찾고 싶어한다. 하버드대의 정치학 교수 하비 맨스필드는 행동과 공격성을 주창한다. 잡지의 라이프스타일 섹션은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metropolitan+heterosexual: 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도시 남성을 가리킨다)’ 대신 ‘레트로섹슈얼(retrosexual: 외모에 관심을 접고 전통적인 남성다움을 지향하는 남성을 일컫는다)’이 장악했다. 그런 잡지에는 사냥복을 입고, 명품 도끼를 구입하고, 블로그에 ‘남성다움의 기술’을 논하는 부유한 도시 남성들 이야기로 가득하다.남성다움의 복고주의는 다른 미디어도 지배한다. 서점가에선 나이 불문의 남자들을 위한 모험, 도전, 게임, 운동, 역사의 모든 정보를 담은 ‘남성의 위험한 책(The Dangerous Book for Boys)’, 쓸 물건을 직접 만들자는 진심어린 호소를 담은 ‘영혼의 양식, 공작(Shop Class as Soulcraft)’ 같은 책이 인기다. TV에선 ‘더티 잡스(Dirty Jobs)’ ‘액스 멘(Ax Men)’ ‘데들리스트 캐치(Deadliest Catch)’ 같은 프로그램이 지저분하고 힘이 드는 육체 노동을 다시금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랩가수의 축 늘어진 청바지, 사냥꾼의 은닉 무기, 교외 주택의 남성전용 공간,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의 돈 드레이퍼(드라마 ‘매드맨’의 주인공으로 ‘TV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성’으로 선정됐다) 열광 등은 모두 똑같은 대처 방식의 변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 충동은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다.그러나 남자들이 옛 남성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영속화할 뿐이다. 우선 그런 발상은 남자들이 과거 격변에 대처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새 도전에 맞서도록 부추긴다. 여성을 탓하고, 숲에 들어가 은거하며, 남성다움 아래 불안감을 묻어버리는 방식을 말한다. 지금의 경제는 말버러 담배 광고에 나오는 남성다운 이미지를 급속히 탈피해 간다. 따라서 그런 태도는 학교에서 성공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얻거나 더 나은 아버지가 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진실은 이렇다. 남성성의 온전한 회복은 외모와 태도를 어떻게 취하느냐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좌우된다. 남성과 여성 문제 전문 저술가인 수전 팔루디에 따르면 시추작업, 용접, 보일러 제조에 종사하는 남자들이 과거 수세대에 걸쳐 상하의 일체형 작업복을 입은 것은 남성다움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이 특별한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남성다움을 느꼈다”고 팔루디가 말했다. “남성다움을 하나의 역할로 간주하면 장식품이 될 뿐이다. 가짜 속눈썹이 고유한 ‘여성성’이 아니듯이 그런 요소도 진정한 ‘남성성’이 아니다.”미국 여성의 이미지는 1950년대 이래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남성을 향한 기대치는 늘 똑같았다. 그 기대치에 부합할 기회가 더 적어지는데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남성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끼든지 훨씬 창의적이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직장-가정 논쟁의 재고(Reshaping the Work-Family Debate: Why Men and Class Matter)’를 쓴 존 C 윌리엄스가 말했다.그렇다면 필요한 일은 과거와의 재연결이 아닌 과거로부터의 해방이다. 옛 역할의 부활이 아닌 역할의 확대라는 뜻이다. 남성의 종말이 임박하지도, 마초(macho: 우락부락한 남성다움)가 죽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남성다움의 정의가 미스터 T(프로레슬러 출신의 우람한 배우)와 미스터 맘(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아빠) 둘 다를 아우르도록 확대돼야 할 때가 됐다. 다시 말해 ‘새로운 마초(New Macho)’의 시대가 왔다. 늘 남성의 가치를 규정해온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영역에서 남성의 역할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뜻이다.물론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미국 사회는 경쟁이 치열하며 보수적이다. 도시에 사는 아버지들, 헤지펀드 운영자들, 자동차 회사의 간부로 일하다가 해고된 남자들이 자녀를 돌보려고 여러 달 양육 휴가를 내거나 간호사 같은 새로운 분야의 일자리에 관심이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직종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낼 남성은 아직 드물다. 사실 대다수 남성은 구조가 필요하지도 않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렇다. 남성은 여전히 업계와 공직에서 과도한 비율을 차지하며, 소득이 높고, 영화를 만들어도 대형작을 제작하고, 가사일을 적게 한다.그러나 ‘성별 전쟁(gender wars)’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남성이 패하면 여성과 아이들도 피해를 본다. 따라서 한때 남성이 독점하던 위치에 여성이 오르고, 경제에서 ‘남성이 지배하던’ 부문이 더욱 줄어들면서 남성다움의 개념을 확대하는 일은 이제 사치가 아니다. 그런 확대된 개념은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태도 둘 다의 산물이다. 어쩌면 그런 개념이 21세기에 미국 남성과 미국이란 국가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일지 모른다.그런 변화를 시작하기에 자연스러운 장소는 가정이다. 소설가 마이클 셰이본은 2009년 펴낸 에세이 모음집 ‘아마추어를 위한 남성다움(Manhood for Amateurs)’에서 아들과 수퍼마켓에 갔을 때 미국 사회가 여전히 아버지에게 거의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돌이켰다. 그가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동안 한 여성이 그에게 “아주 좋은 아빠시네요”라고 말했다. “딱 보면 알아요.”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알았는지 셰이본에겐 수수께끼일 뿐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냉동식품 판매대 사이를 아이와 함께 다닌다고 해서 칭찬 받지는 않는다. 셰이본은 “아버지로서 편리한 점은 전통적인 기준이 너무도 낮다는 점”이라고 말했다.현대의 기준도 그리 높지 않다. 젊은 부부들이 자녀 양육과 가사를 분담하는 등 겉보기에 진보는 분명히 있지만 실제론 거의 변하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볼 때 미국의 아내가 하는 집안일은 남편의 약 두 배다. 전체 시간으로 따져 여성은 매주 이틀 꼬박 추가적인 집안일에 매달려야 한다. 남편은 직장이 없어도 아내가 가사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여성이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남성의 네 배다. 한편 미국의 아버지 없는 아이들 수는 1960년 이후 거의 세 배로 늘었다. 스스로 전업주부(主夫)라고 칭하는 남성의 비율은 계속 3% 미만을 맴돈다. 사회학자들은 오래 굳어진 역할은 떨치기 어렵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런 역할이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쌓여 간다. 스웨덴의 현대 가정생활을 보자. 과거에는 아이를 낳으면 부모 두 사람이 유급 출산·육아휴가 390일을 나눠 월 단위든 주 단위든, 일 단위든 시간 단위든 원하는 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휴가를 훨씬 많이 썼다. 그러나 요즘의 새 아버지들은 아기를 아내에게만 맡겨두고 서둘러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다. 현명한 공공정책 덕분에 가능해진 변화다.1995년 스웨덴은 간단하면서도 혁명적인 법을 통과시켰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가 육아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부부 전체의 휴가 일수가 한 달이 줄어든다. 2002년엔 아버지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육아휴가 일수가 한 달이 더 추가됐다. 지금은 스웨덴의 아버지 80% 이상이 아기가 태어나면 4개월의 휴가를 낸다. 10년 전엔 그 비율이 4%에 불과했다. 스웨덴 기업의 41%는 아버지의 양육 휴가를 공식 장려한다. 1993년엔 그런 기업이 겨우 2%였다. 간단히 말해 스웨덴의 남성은 일을 적게 하고 아버지 노릇을 더 많이 하도록 요구받는다.스웨덴의 남성 육아휴가법은 아버지 역할과 근로자 역할의 수정을 통해 남성의 생활관습을 바꿔놓았다. 그로 인해 여성의 생활관습도 달라졌다.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에서 일하는 네이선 헤게두스(미국인으로 스웨덴에서 그런 제도를 직접 경험했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세대와 그 아래 세대의 스웨덴 아버지들은 자녀 양육에 자신감을 갖도록 교육받았다. 아내가 기대하듯이 자신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거부하면 친구와 가족, 그리고 다른 남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정책의 변화가 개인적인 변화를 이끌면서 서서히, 하지만 확고하게 사회도 변했다.그 비슷한 변화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독일에선 2007년 스웨덴식 법을 제정한 이래 육아휴가를 내는 아버지의 비율이 일곱 배로 치솟았다. 일본에선 최근 들어 아버지에게 육아휴가를 더 많이 제공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와 함께 후생노동성은 ‘이크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크멘(아이를 키우는 남자)’을 선언한 남성의 사례를 공모해 매달 한 사람을 ‘이크멘의 별’로 뽑아 널리 알리는 프로그램이다. 영국과 호주도 유급 육아휴가법을 제정했다(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딸아이 육아휴가로 여러 주를 집에서 보냈다). 지금 부유국 중 아버지에게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뿐이다.미국도 생각보다 빨리 변할지 모른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62%, 민주당원의 92%, 무소속의 71%가 유급 남성 육아휴가제를 지지한다. 대기업(특히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언스트 앤 영 같은 남성 직원이 많은 기업들)은 적어도 2주의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뉴저지, 워싱턴, 캘리포니아주는 이미 부분적인 유급 휴가제를 시행한다. 다른 20개 이상의 주도 현재 육아 남성 육아휴가법 제정을 검토 중이다.앞으로 그런 지역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내년도 연방예산에 주정부의 유급 육아휴가 프로그램을 지원할 목적으로 1000만 달러 기금이 할당됐기 때문이다. 근로 인구의 약 절반에게 무급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가족·의료 휴가법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아 1993년 제정됐다. 여론의 변화가 민간 부문의 프로그램으로 발전한 뒤 주정부의 법개정을 촉발했으며, 궁극적으로 연방정부가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촉진제가 됐다. 유급 육아휴가의 가장 유력한 모델은 사회보장제도처럼 피고용자들이 직접 재원을 납부하는 보험 프로그램이다. 정책연구소인 미국진보센터(CAP)의 경제전문가 헤서 부시에 따르면 근로자 1인당 월 10달러만 납부하면 12주의 유급휴가가 가능하다. 급여세의 0.3% 인상 효과만 있을 뿐이다. 가장 관대한 프로그램, 예컨대 미국의 모든 근로 부모에게 1년의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제도도 국가예산에서 250억 달러면 족하다고 직장-가정 균형 문제를 연구하는 제인 월드포겔 컬럼비아대 교수가 설명했다. 연방정부는 매년 사기, 낭비, 남용으로 그 네 배를 지출한다.물론 남성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정책 변화도 무의미하다. 미국 최초로 부모 두 명에게 합해서 6주간의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캘리포니아주에선 남성의 26%만이 그 기회를 이용한다. 반면 그런 휴가를 사용하는 여성은 73%나 된다. 대다수 아버지가 아이가 태어나면 2주 미만의 휴가를 낼 뿐이다. 육아가 남성다운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개념을 불식하는 유일한 길은 이미 직장과 가정 둘 다에 충실한 이중 삶을 사는 남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떳떳이 밝히고’ 의회와 회사에 탄원서를 내는 방법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난 35년간 맞벌이 가정의 아버지 중 직장과 가정 생활 사이에서 갈등에 시달린다고 말한 비율이 35%에서 59%로 높아졌다고 존 윌리엄스가 말했다. 제러미 애덤 스미스는 근저 ‘아버지 역할의 이동(The Daddy Shift)’에서 “이제 공격에 나서는 일은 21세기의 아버지들 몫”이라고 말했다.직장 생활에서도 ‘새로운 마초’ 운동이 중단돼선 안 된다. 영화 ‘미트 페어런츠’가 나온 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그 영화에서 남성과 직장을 다루는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명한 한 장면에서 순진한 처녀의 전 남자친구인 은행 간부가 그녀의 새 애인(벤 스틸러)에게 직업을 묻는다. 스틸러가 간호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은행가는 이해하지 못한다. 신랑감이 간호사라는 생각은 너무도 뜻밖이라 간호가 취미라고 생각한다. “그런 봉사는 참 좋은 일이지요”라고 그가 말한다. “나도 시간을 내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군요.”이젠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앞으로 10년 동안 창출될 새로운 일자리 1530만 개 중 대부분이 현재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나올 전망이다. 2008년에서 2018년 사이에 가장 많이 늘어나리라 예상되는 직종 열두 가지 중 두 가지(건설 근로자와 회계사)에서만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사(창출 예상 일자리 50만1000개), 간호사(58만2000개), 가정 보건사(46만1000개), 고객 서비스직(40만 개) 등 나머지는 전부 여성이 지배한다. 경제의 사회 부문에서 2018년까지 모두 합해 69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전망이다. 그러나 노스이스턴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노동력의 성별 양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중 250만 개가 채워지지 않으리라 예상된다.그런 빈 일자리는 근로계층의 남성과 그들이 부양하려고 애쓰는 가정에 좋은 기회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여전히 용인되는 좁은 역할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고용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다. 제조업이 계속 해외로 이전되고, 이민자들이 계속 보수가 적은 육체노동을 떠맡으면서 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지속되는 경기침체가 그 추세를 악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직장을 잃었을 때 노동력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남성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도 그런 대열에 합류한다. 지난 한 달 동안만 볼 때 미국 남성 140만 명이 ‘구직’ 상태에서 ‘구직 포기’ 상태로 바뀌었다. ‘남자다운’ 일거리가 부족해지자 낙담하고 포기했다는 의미다. 신규 고교·대학 졸업자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런 남성의 실업률은 20.5%로 같은 연령층의 여성보다 3%포인트 높다.보호주의 무역과 이민 정책으로 근로계층의 고용률을 올리는 일을 상상하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화를 멈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성의 사기와 미국 경제를 되살리려면 미국 남성은 해외로 이전된 제조업에서 일자리를 찾지 말고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런 전환을 가속화하려면 전문직업인을 배양하는 학교들이 남성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홍보를 하고, 전문 기술과 경력 개선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남성 대 남성 채용운동을 펼쳐야 한다. 전문대학들은 미래의 사회 부문 일자리에 적합한 교육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입학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도 있다. 피츠버그대 간호학교는 그런 전략으로 지난 5년 동안 남성 지원자를 34% 늘리는 데 성공했다. 정부의 재정 지원도 필요하다.시도할 의욕만 있다면 이런 전환은 생각보다 고통이 적을지 모른다.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일자리 성장률이 가장 높은 30대 직종 중 약 3분의 2는 직무 연수만을 요구한다. 오랜 시간과 돈을 투자해 학교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상대 성이 지배하는 분야에 진출할 때 여성보다 고통을 덜 받았다. 또 일단 채용되면 자리를 잡는 데도 어려움이 적었다. 1992년의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직업에 뛰어든 여성은 예측 가능한 차별을 당하지만 여성의 분야에 뛰어든 남성은 ‘승진 가능성을 높이는 구조적 이점’을 누린다. 그런 이점은 자신의 능력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좀 더 남성적인’ 분야로 이동이 가능한 일종의 ‘유리 컨베이어 벨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남성은 영어 교사보다는 체육 교사가 된다. 어린이 도서관의 사서보다는 일반 도서관의 사서로 자리 잡는다. 소아과 병동의 간호사보다는 응급실 간호사로 일한다.회의론자들은 “남성이 특정한 직업에 적합하게 설계됐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녀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성은 이미 오래전에 성별 본질주의가 일자리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했다. 물론 지금도 여성은 주로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로 활동한다. 하지만 CEO, 군인, 각료도 있다. 이제는 남성의 직업도 그처럼 확대될 시기가 됐다. 일부 통계를 보면 이미 변화가 진행 중이다. 남성 간호사의 비율이 지난 25년 동안 두 배로 늘어 전체의 약 6%에 이른다. 초등학교 교사 중에도 남성이 늘어난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광부와 기계공 일자리는 미래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수는 대폭 줄어든다. 따라서 이제 남성은 그와는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얼마 전까지 남성다움의 개념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해 왔다.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키멜에 따르면 미국에서 1776년 이전에는 완벽한 남성이 상류층의 가부장으로 구세계의 생활방식이 몸에 밴 멋쟁이 지주였다. 19세기 초가 되자 이상적인 남성상이 영웅적인 장인(기능 보유자)과 서부를 개척할 만한 강건한 개인주의자(농부, 신발 제조가, 목수 등)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통나무 오두막집 모델이 좀 더 현대적인 이상형으로 대체됐다. 자수성가한 남자, 활동적이고 경쟁력을 갖춘 가장을 말한다. 그들의 남성다움은 산업화되고 물질화된 사회에서는 성공을 좌우했다.이제 미국의 남성은 새로운 교차로에 도달했다. 다만 지금은 달라진 시대적 요구에 남성다움의 지배적인 규칙이 적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성이 ‘여성과 똑같은’ 무성(無性)의 사회를 주창하려는 게 아니다. 심지어 폴 번연(만화에 등장하는 개척시대의 거인 나무꾼), 타잔, 조종사용 가죽 재킷 등 몸치장으로 상징되는 남성다움이나 남성들이 삶의 실제 알맹이가 가볍다고 느낄 때 빠져드는 현실도피주의를 비난할 의도도 없다. 오늘날의 남성이 사냥꾼, 메트로섹슈얼, 또는 사냥꾼의 복장을 한 메트로섹슈얼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하지만 그 이상도 돼야 한다. 겉보기에 ‘새로운 마초’는 역설이다. 여자들이 주로 하는 일과 더럽혀진 아기 기저귀로 포장된 남성의 길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깊게 들어가면 남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남성이 양육휴가제를 수용하면 여성은 ‘마미 트랙(mommy track: 육아 등을 위해 출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지만 보수와 승진의 기회는 적은 허드렛일과 한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남성이 자녀 양육에 참여하면 더 많은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범죄를 멀리하며, 성인이 됐을 때 가난을 면할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직장에서 성별 동등(완전 고용된 남녀의 적정한 균형)을 성취한다면 국내총생산(GDP)이 9%나 증가한다.‘새로운 마초’는 간단한 원칙으로 요약된다. 세계가 급변하는 지금 남성은 가정과 직장에서 공정한 몫을 떠맡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학교와 정책입안자, 고용주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들을 도와야 한다. 사실 어느 쪽이 더 남성다운가? 강인하고 입이 무거우며 직장이 없으면서도 늘 집을 비우는 아버지일까, 아니면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과 자녀를 양육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똑같이 잘하는 남자일까?번역·이원기THE AMERICAN MAN이상적인 남성 이미지의 변천사 미국에선 대중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은 언제나 거칠고, 백인이며, 동성애자가 아니고,전형적으로 과묵한 사람이다.1776 이전 상류층 가부장, 조지 워싱턴은 자기 시대의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명예, 인격, 구세계 생활방식을 소중히 생각한 귀족 지주를 말한다.1776~1830영웅적 장인. 새로운 미국의 남성들은 유럽의 멋쟁이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포장마차를 서부로 이끌 수 있는 강인한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했다.1830~90 자수성가형 인물. 새롭게 탄생한 거부들은 유산을 물려받지도 않았고, 운 좋은 장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상인과 기업가였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지위가 결정됐다.1890~1910 블루 칼라 영웅. 대량 생산 제조업이 부상하면서 자수성가적인 남성이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들은 집단으로 국가를 건설한 영광을 누렸다.1910년대 가정적인 남성. 최초의 아버지다움 운동은 고된 공장 바닥의 불만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남자들은 아들에게 남성다움을 가르치려 했다.1920~45 근육질형 남자. 여성들이 일터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은 타잔을 영웅으로 삼고 몸단련에 집착했다.1945~60 기업가. 전후(戰後)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돈벌기 경쟁으로 개인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했다. 하지만 돈만 잘 벌면 도덕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1960~80 플레이보이. 자수성가형 남자들과 비슷하지만 근사한 재킷과 고급 덴마크풍 현대 가구를 즐겼다.1980년대 무자비한 자본가. 월스트리트가 새로운 기업 정글이 됐다. 고든 게코(영화 ‘월스트리트’의 주인공)가 기업사냥꾼들을 이끌었다.1990년대 뉴에이지 남성. 소외감을 가진 남성들이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숲속에서 주말을 지내며 자연보호 운동을 벌이거나 그루터기를 표적으로 사격을 했다.현대 새로운 마초.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보다는 자녀 양육을 분담하면서도 생계도 전적으로 책임지는 브래트 피트가 상징적이라고 할 만하다.based on manhood in america by michael kimmel

2010.09.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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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은 깨지지 않았다

산업 일반

전형적인 여성 신입사원들이었다. 세븐 시스터스 칼리지 졸업생들로 독립심 강하고, 의지가 굳으며, 생기가 넘쳤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처음 진출하면서 포부에 부풀었다. 뉴욕에 가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내심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출세하겠다는 야망에 불탔다.하지만 면접에서 여성은 최고위직은커녕 중간간부에도 오르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편물을 분류하고, 신문 기사를 철하고, 커피 심부름을 했다. 짧은 스커트를 입고 검은 테 안경을 끼고 굽 높은 구두를 딸각거리며 사무실을 돌아다녔다.남자 일색인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고 상사들이 “예쁜이”라고 부르면 애교 만점인 미소를 지었다. 당시엔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각자는 속으로 자신이 최초로 그 높은 승진 장벽을 넘어서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현실적인 야망은 여성이 떠벌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1969년 주변에서 여권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그들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서로 은밀히 만나고, 화장실에서 나지막이 속삭이고, 동료의 책상 주변에서 옹송그렸다. 점심 시간에는 여자 휴게실에서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주고받았다. 3명이 곧 9명, 결국 46명으로 불어났다. 결국 그들은 민권법 제7장을 근거로 성별 고용차별 집단소송을 낸 언론계 종사자 중 첫 사례가 됐다.고용주는 바로 뉴스위크였다. 이 기사를 쓰는 우리 세 명(모두 뉴스위크의 젊은 여기자다)은 6개월 전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 ESPN, 지상파 CBS 방송의 심야 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먼 레이트 쇼, 타블로이드판 일간지 뉴욕 포스트에서 성추문과 성차별 스캔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선배들의 투쟁을 거의 알지 못했다.그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집단 담론에서 사라진 듯했다. 마침내 우리는 전 뉴스위크 여기자 수전 브라운밀러가 쓴 회고록 낡은 ‘우리 시대(In Our Time)’ 한 권을 입수했다. 책의 한 장이 그들의 성차별 항의에 할애돼 있었다. 우리는 메모장으로 그 부분을 표시한 뒤 돌려보았다.그 대목은 그때가 요즘과는 얼마나 다른지, 또 얼마나 똑같은지를 생생히 말해주었다. 뉴스위크 여성들이 들고 일어난 지 40년이 흐른 지금 젊은 여성들은 반 세대 전과도 확연히 다르다. 민권법 9장이 제정된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평등을 위한 투쟁이 이미 흘러간 역사이며, 뭐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고 배웠다.우리 세 명은 대학을 수석 졸업했고, 학창 시절 운동도 잘했다. 장학금을 받았고, 수업 중엔 언제나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젊은 전문직 종사자로서 우리는 세 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소냐 소토마요르) 임명을 적극 지지했고 힐러리 클린턴이 첫 여성 대통령이 되기를 고대했다(안타깝게도 첫 여성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다).우리는 여성이 미국 근로자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현상을 목격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부인 마리아 슈라이버의 지원으로 지난해 말에 발표된 성(gender) 관련 여론조사는 “성별 간의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시기상조라고 느낀다.젊음에서 오는 조바심일까? 그럴지도 모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라. 미국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대학 졸업 1년 뒤 젊은 여성은 대학 시절 모든 과목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고도 남성 동료가 받는 연봉의 80%밖에 받지 못한다(모든 직종을 종합한 평균이다). 미국의 여성고용평등 관련 비정부기구인 카탈리스트(Catalyst) 조사에 따르면 고소득 직종에서도 차이가 크다.여성 MBA(경영학 석사학위 소유자)는 첫 직장에서 남성 동료보다 연봉을 4600달러나 적게 받는다. 이런 고질적인 임금 격차는 오랫동안 육아 탓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난 상태에서 자녀가 없는 여성 근로자도 여전히 남성 임금의 77% 정도만 받는다.이번 경기침체에서는 여성 가장이 늘면서 그 23%의 차이가 어느 때보다 가계에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최근 MBA 관련 조사에 자금을 댄 컨설팅 업체 언스트 앤 영의 CEO 제임스 털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년은 ‘약속의 10년’이 돼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각성을 촉구하는 결과다.”우리 각자는 수년 동안 자잘할 수많은 일에서 좌절감을 맛보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평등을 위한 투쟁이 이미 승리로 끝났다고 배웠던 우리는 그런 느낌을 성차별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문제를 우리 자신이 아닌 딴 사람 탓으로 돌리는 일은 한낱 변명에 불과하고 나약함을 드러내는 처사라고 인식됐다.특히 1년여 전 뉴스위크의 총괄 책임자(Managing Director) 자리에 앤 맥대니얼이 올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더욱 철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도 익히 안다. 과거의 뉴스위크 ‘예쁜이’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의 불평 불만은 뭘까? 저술가 수전 더글러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언론 보도로 판단하자면 여성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듯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뜻대로 안 된다고 성차별을 들먹여선 안 되지 않을까?”일리가 있다. 그러나 친구와 동료를 만나 볼수록 직종 불문하고 똑같이 좌절하고 실망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40년 전 뉴스위크의 여직원들은 “여성은 기사를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지금은 감히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통계를 보자. 지난해 뉴스위크의 표지 기사 49건 중 여성이 쓴 기사는 6건에 불과했다.표지 제목도 ‘생각 깊은 남자(The Thinking Man)’라는 문구가 두 번이나 사용됐다. 1970년엔 뉴스위크 잡지의 판권란에 오른 편집부 기자 이름 중 25%가 여성이었다. 지금은 39%다. 많이 나아졌지만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뉴스위크의 영업과 편집 부문을 합치면 전체 직원의 49%가 여성이다). 역사학자 바버라 J 버그는 이렇게 말했다.“현대의 젊은 여성은 열정을 갖고 직장에 들어가지만 결국 실망한다. 난생 처음 성적 편견의 벽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뉴스위크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윗분들이여,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기사에서 뉴스위크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뉴스위크가 다른 직장보다 성차별이 심하기 때문이 아니다.다만 적어도 하나의 유리천장이 부서져야 마땅했던 여직원 운동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배들의 1970년 소송이 진공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았듯이 지금의 뉴스위크도 독특하거나 색다르지 않다. 주요 잡지에 실리는 기자명은 여전히 7 대 1로 남자 이름이 많다. 포춘 500대 기업 CEO 중 여성은 3%에 불과하다.변호사와 정치인 중 여성은 4분의 1이 채 안 된다. 그런 불균형은 웹에도 적용된다. 광고문안 작성 서비스를 하는 인기 웹사이트 멘 위드 펜즈(Men With Pens)의 창설자는 지난해 말 자신이 여성이면서 남성 이름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남자 이름을 선택하면 자녀 때문에 집에 앉아 있는 엄마가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리라 생각했다.”실제로 그 전략이 먹혔다. 그녀가 남자 이름을 쓰자 매출이 두 배로 뛰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어리고, 권리만 내세우고, 불평 불만이 많고, 유머 감각이 없는 여자들, 한마디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인종차별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듯이 한 회사의 최고 자리에 여성이 올랐다고 해서 성차별이 뿌리 뽑히진 않는다.사실 여성 권리 신장에 따르는 모순적인 조짐들(지속적이고 보편화된 불평등을 뒤덮는 잘 알려진 몇몇 성공담)이 진짜 문제다. 더글러스는 그런 엇갈리는 메시지를 ‘개화된 성차별(enlightened sexism)’이라고 부른다. 몇몇 여성이 이룬 성취 때문에 과거 성차별로 간주됐던 편견이 가려진다는 뜻이다.그 결과 젊은 여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남자들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다고 걱정하면서도 막상 기회가 주어지면 몸을 사린다. 최근 걸스카우트 조사에 따르면 젊은 여성은 ‘우두머리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두려워 지도자 역할을 회피한다. 다른 조사에서는 여성이 초봉을 협상하는 경우가 남성보다 4배나 드물다고 나왔다.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버드대의 연구에 따르면 높은 연봉을 요구하는 여성은 ‘성격이 좋지 않다’고 인식된다. 따라서 채용될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진다. 여성의 자신감을 다룬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여자를 망친다(The Curse of the Good Girl)’의 저자 레이철 시몬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대는 ‘원해요… 하지만(yes, but…)’이라는 사고방식 안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다.예를 들면 출세를 원하지만 너무 강하게 나서면 안 된다거나 성취를 원해도 떠벌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자신을 억제하게 된다. ‘이렇게 말하거나, 이것을 요구하거나, 이런 일을 하면 곤란하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못된 여자로 따돌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남녀 평등으로 가는 도중에서 우리 같은 젊은 여성은 목소리를 잃었다. 그래서 미묘한 성차별의 안개가 자욱한 직장에 들어가면서 좌절감과 소외감에 시달렸다. 우리의 뒤를 받쳐주는 사회적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좌절을 묘사할 용어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자신감도 없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게일 콜린스는 “과거에 기존의 법과 싸워야 했던 세대는 이런 복잡한 문제에 시달리는 세대보다 성취하기가 훨씬 쉬웠다”고 말했다.성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지금 같은 시절엔 직장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을 잘해내기가 더욱 어렵다. 서글픈 진실은 여성이 최고 자리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여성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순전히 능력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외모와 관련이 있을까? 남자가 우리 일에 관심을 보이면 우리에게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출세하라고 조언한 남자 상사나 우리 중 한 명에게 윙크를 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과자 좀 구워다 줘”라고 말한 팀장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한 젊은 동료는 그녀의 책상 부근에서 서성댄 나이 많은 남자 상사와 관련해 주변에서 놀림을 받은 사례를 돌이켰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일을 잘했다면 그 사람이 도와준 덕으로 생각해야 하나? 내가 한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그냥 내가 예뻐서 그가 그렇게 주위에서 맴돈다고 생각해야 하나?”라고 그녀는 물었다. “너무 괴로웠다.”1970년대의 ‘예쁜이’들이 극복한 어려움과는 비교가 되지는 않지만 요즘의 젊은 여성 세대가 직면한 도전 중 하나는 지금도 성차별이 미묘하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 선배들이 뉴스위크의 성차별 소송을 제기했을 때 뉴스위크지 판권란의 가장 아래 부분은 거의 여성으로 채워졌다.1962년 기자 지망생으로 뉴스위크에 ‘우편물 담당’으로 취직한 노라 에프런은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남자였다면 말이다.” 물론 여기자들도 살인사건, 국무부, 1968년 대통령 선거 등을 취재했다. 하지만 실제 기사가 작성될 때는 취재한 내용을 남자 동료 기자에게 넘겨줘야 했다. “희망이 없던 시절이었다”고 브라운 밀러가 돌이켰다.“얼마 지나면 진짜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러면 ‘기사 작성은 남자들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뉴스위크의 한 젊은 여기자가 변호사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런 좌절감을 털어놓았다. 그 변호사는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에 신고하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었다. 그 뒤 동료들이 하나둘 집단소송에 참여했다.그들은 성질이 불 같은 변호사 한 명을 고용했다. 현재 민주당 하원의원인 엘리너 홈스 노턴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적절한 시기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우리는 얌전하고 고리타분했다”고 초기 멤버 중 한 명인 팻 린든이 말했다(그녀는 뉴스위크에 기사를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애틀랜틱 먼슬리와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표지 기사를 썼다).“하지만 결국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1년 뒤 여권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뉴스위크의 경영진은 페미니즘을 표지 기사로 내기로 했다. 사내에서 끓어오르는 반란의 기운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은 뉴스위크의 숱한 여기자들을 무시하고는 외부 필진에게 기사를 맡겼다. 임원 중 한 명의 아내였다.그들은 편집 후기에서 “일류 언론인으로 여성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여기자들을 더는 참지 못하게 한 결정타였다. 잡지가 나오기 전날 밤 뉴스위크의 여직원들은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라는 공개 서한을 냈다. 용돈을 거둬 뉴스위크를 소유한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회장에게 그 사본을 전달하도록 동료 한 명을 비행기에 태워 워싱턴으로 보냈다.그레이엄은 나중에 “내가 도대체 어느 편을 들어야 하지?”라고 물었다. 1970년 3월 16일 월요일 뉴스위크 여직원들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한 타블로이드 신문은 ‘뉴스 암탉’으로 불렀다)은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임시 기자회견장에 몰려가 자신들이 만든 잡지를 치켜들었다.밝은 노란색 표지에 적힌 제목은 ‘여성들의 반란(Women in Revolt)’이었다. 이틀 뒤 레이디즈 홈 저널의 여기자들이 농성에 돌입했고, 다른 매체의 여기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희망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 운동을 계기로 1990년대에 직정 여성의 권리가 급속히 신장됐다. 뉴스위크 ‘예쁜이’들의 봉기 후 20년이 지난 뒤부터 자녀를 둔 여성들까지 대거 취직 대열에 참여했다.NOW 같은 여성단체들의 회원이 급속히 불어났다. 차별철폐 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의 확대로 모든 미국 여성은 교육의 동등한 기회를 갖게 됐다. ‘걸 파워’를 내세운 젊은 여성의 권리신장 운동이 YWCA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됐다. 2000년 새천년이 되면서 여성의 취업이 크게 늘어 많은 여성은 이제 소망이 이뤄졌다고 생각했다.그 이후 더글러스가 말한 “은밀하면서도 독성이 강한 반격”이 나왔다. 9·11 사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세계적인 대불황을 맞아 성평등은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이제는 페미니즘이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대신 저명인사로 돌출 행동을 보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패리스 힐튼이 미디어를 지배했다.그 변화는 문화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성의 교육, 건강, 정치, 금융 측면의 지위를 국가별로 순위 매기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 성별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에 따르면 미국은 2006~2009년 23위에서 31위로 떨어졌다. 쿠바 바로 뒤고 나미비아 바로 앞이다. 미국 기업들도 여성을 돕는 정책을 도입했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못했다.WEF의 케빈 스타인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언제나 직장과 사생활의 균형을 맞추는 면에서 점수가 형편 없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미국 여성은 ‘남성적이거나 가부장적인 기업 문화’를 출세의 최대 장애물로 간주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예를 보자. 미국 여성의 4대 직종이 비서, 간호사, 교사, 출납원이다.여성 근로자의 43%에 이르는 저임금 ‘핑크 칼러’ 직업이다. 간호사 대신 가사 도우미를 넣으면 1960년의 여성 4대 직종과 다름없다. 당시에는 구인 광고도 성별로 구분됐다. 뉴스위크의 우리 선배들은 40년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 올해 72세인 린든은 “우리가 그런 변화를 위해 싸웠기에 너무 서글프다”고 말했다.지금 우리는 실제로 선배들의 업적 때문에 많은 덕을 본다. 은밀하게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전국에 나가는 언론에 필요한 취재를 한다. 기사도 직접 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동등한 직업에 동등한 임금을 약속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런 법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현실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아직도 평등은 허구라는 뜻이다. 저술가 에어리얼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성에 관한 고정 관념이라는 인류 역사의 굴레를 벗었기 때문에 직장을 갖는 일만 해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여성이 ‘누가 아무리 윽박질러도 내 몫은 확실히 챙기겠다’고 생각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도 멀다.With SAM REGISTER and TONY SKAGGS

2010.03.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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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거든 ‘일로 한판 붙자’

산업 일반

일본은 지난해부터 이른바 ‘단카이노세다이’(團塊の世代)의 은퇴가 시작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기술인력 부족 현상이 심화할 것을 우려하고, 일본 정부는 민간기업들이 정년연장이나 정년폐지 정책에 적극 동참하도록 촉구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단카이세대’는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가 1976년 펴낸 『단카이의 세대』라는 책 이름에서 비롯됐다. ‘단카이’(團塊)는 불쑥 튀어나온 덩어리라는 뜻이다. ‘단카이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1949년 사이에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세대로 약 700만 명. 작년부터 육십 줄에 들어서기 시작한 이들은 일본 생산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제법 큰 ‘덩어리’다. 오사카에는 ‘마이스타-60’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입사자격은 60세 이상이다. 600명 직원의 평균 나이가 64.5세. 모두 숙련기술자다. 이 회사는 도쿄, 오사카 일대의 공장과 기업 등에 설비설계, 기술자문, 경영관리, 법무업무 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삼성엔지니어링 전문위원 김상윤씨 일흔둘의 나이가 회사 살찌운다 한국 삼성엔지니어링은 최근 플랜트 분야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적, 연령에 관계없이 능력과 체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재취업 기회를 주고 있다. 정년퇴직 후 55세가 넘어 재입사한 전문인력만 100여 명이나 된다. 2002년 삼성엔지니어링의 전문위원으로 스카우트된 김상윤(72)씨. 재작년에 고희를 넘겼지만 임원이 아닌 전문관리자로 있으면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한편, 후배들에게 표준을 설정해 주고, 가르치고, 조언하며 바쁘게 하루를 살고 있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벡텔, ABB 러머스 등에서 화공플랜트 전문엔지니어로 32년간 일하다 2002년 삼성엔지니어링에 스카우트돼 귀국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이 분야의 ‘권위자’였다. ‘섕 킴’으로 통하는 그는 후배들과 의견조정을 위해서는 며칠이라도 계속 토론을 벌인다. ‘왜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것인가’를 모두가 납득해 인정하고 넘어가야 매사가 매끄럽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올해 59세인 조성남씨. 외환위기 때 삼성엔지니어링에서 명예퇴직했다가 2001년 재입사했다. 명퇴 전에 태국 윤활유공장 건설현장에서 소장직까지 수행했던 조씨의 현재 직책은 프로포절팀 제너럴 매니저. “1년간 놀면서 금융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시야가 많이 넓어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신입사원 기분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동기생들은 모두 퇴직했고 임원급도 대부분 입사 후배다. 그러나 그가 맡은 일은 너무 중요하다. 1조원대의 플랜트 사업에 관련된 공사비 견적을 자신의 책임 아래 작성해 사업자에게 제시, 대형 프로젝터 수주를 돕는다.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버는 삼성엔지니어링은 최근 중동시장 호황으로 화공플랜트 수주량이 크게 신장되면서 숙련된 기술인력이 모자랄 지경이다. 대우조선 정년 후 재입사 박길복씨 “눈 감고도 배 짓는 일 한다” 대우조선해양 선행도장팀 박길복(59)씨. 지난해 5월 정년퇴직한 박씨는 한 달간 휴식을 갖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퇴직 전에 일했던 바로 그 부서에서, 똑같은 도장(塗裝) 일을 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은 물론 근무조건이 모두 같다. 다만 월 급여 수준이 퇴직 전과 약간 차이가 난다. 대우조선해양은 정년이 일률적으로 58세다. 그러나 지난해 3월부터 본인이 원하고 희망하는 부서에 일자리가 있을 때 재입사하는 정년 후 재입사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제도에 따라 재입사한 사원은 현재 170명. 서울 여의도 면적의 1.5배나 되는 옥포조선소에는 2만7000명의 ‘배 짓는 사람’이 바다와 바다, 대륙과 대륙,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에는 선박설계 엔지니어가 2000명이나 있다. 일본 전체 선박설계 인력보다 많은 기술인력을 대우조선해양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공업을 아직도 노동집약적 3D산업 정도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만 이젠 고도의 기술력과 월등한 관리능력이 없으면 배 건조가 불가능합니다.” 박종기 대우조선해양 이사의 설명이다. 배 한 척을 짓는 데 20만~25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기에 고도의 생산관리 능력 없이는 공기(工期) 단축 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0년 이상 배를 짓는 일에 종사한 숙련된 기술인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조선왕국으로 군림하는, 한국의 자산이란다. 기업은행 퇴역 지점장 최순식씨 노련한 ‘기업 주치의’로 재탄생 한 기업에서 근무 연한이 쌓이면 쌓일수록 경륜이나 직무 관련 노하우는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숙련된 기능을 마음껏 발휘할 때쯤이면 ‘고령’이라는 덫에 걸려 시들어버리고 만다. 특히 은행처럼 30~40년의 긴 세월을 금융 관련 업무에만 몰두하다 물러나면 ‘고숙련 다기능’은 ‘쓸모없는 고철’로 사장되기 일쑤다. ‘Co-RM(Corporate-Relationship Manager)’. 기업은행이 퇴직사원들의 ‘고숙련 다기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마련한 제도다. 기업은행에서 10년 동안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3년 전 퇴직한 후 이 일을 맡은 최순식(59)씨. 그는 이 제도를 ‘기업 주치의’ 제도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죽어가는 기업을 살리고, 병든 기업을 회생시킬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이 제도에 대한 기업들의 이해가 부족해 매우 비협조적이어서 애로가 많았다. 심지어 기업의 정보를 빼가기 위해 파견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기업도 있었다. 아직도 몇몇 기업은 컨설턴트가 필요로 하는 기업 정보를 허심탄회하게 공개하기를 꺼리기도 하지만 제도 시행 3년째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자발적으로 의견을 묻거나 의논을 청하는 기업도 많아졌다고 한다.   법정관리 CEO 된 박문성·강신찬씨 쓰러져가는 회사 살리는 마법사 기업의 별’이라는 중역이나 이른바 고용 사장들은 경영의 달인들이다. 그러나 어느 때고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법정관리인은 바로 그 물러난 경영진, CEO 가운데 경륜을 되살려 쓰러져가는 회사를 소생시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리가공 메이커 제일GMB의 박문성(64) 사장은 1년 전 이 회사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정됐다. 파산위기에 처한 이 회사가 회생 가능성이 엿보이고, 박 사장이 그 적임자라는 법원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잘나가던 제일GMB가 경영 위기에 부닥친 것은 주방기구 쪽으로 경영 다각화를 시도하다가 과다 투자의 덫에 걸린 때문. 박 사장이 2007년 6월 법정관리인으로 선정됐을 때는 3개월째 종업원 임금이 체불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부임 석 달 만에 체불을 해소하고 1년이 지난 지금은 새 수익원 발굴을 통한 중장기 비전을 짜는 데 골몰하고 있다. 박 사장은 이 회사가 외형은 그런대로 호조를 보이지만 영업이익은 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판단, 강력한 구조조정과 위기의식 공유를 통한 일체감 조성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그는 1969년 삼성에 입사해 제일모직, 제일합섬을 거쳐 1999년 새한 부사장으로 퇴직했다. 그는 안락한 여생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아직 일할 의욕도 남았고, 마침 대한상의의 권유도 있어 2000년 파산위기에 봉착한 (주)SKM의 법정관리인으로 취임했다. 세계 굴지의 오디오 테이프 생산 업체인 (주)SKM 역시 과다 투자 부작용으로 회사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박 사장은 6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이 회사를 소생시켜 인수 기업을 찾아주는 데 성공했다. 또 한 명의 놀라운 경영솜씨를 (주)대아리드선(線) 법정관리인 강신찬(58·사진)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973년 두산산업에서 기업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현대중공업을 거쳐 1997년 두레 대표이사로 퇴직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물러난 그는 1999년 수산특장(水山特裝)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됐다. 그는 부실경영으로 파산위기에 처한 이 특장차 전문 메이커를 6년 만에 위기에서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종업원 전체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 제일 어려웠지요. 그러나 노조위원장이 바뀌고 회사가 수익을 내며 모양새를 갖춰 나가니까 일이 풀리더군요.” 숨 돌릴 틈도 없이 2007년 강 사장은 대아리드선 법정관리인에 다시 선임됐다. 전임 관리인의 뒤를 이은 자리지만 1년 3개월 만에 회사를 파산위기에서 구하고 인수기업을 찾아준 다음 다시 물러났다. 한 달째 쉬고 있는 그는 “한국 기업은 연령차별을 말자는 말을 구호로만 외칠게 아니라 실제로 경륜과 경험을 활용할 무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사우디 현장에 간 정유암씨 깐깐한 시어머니가 필요하다 정유암(56)씨. 건설공정 관리기술자다. 한미파슨스의 은퇴기술자 재고용 플랜에 따라 은퇴 7년 만에 다시 사우디 리야드의 연금공단 건물 신축현장에서 공정관리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24만 평의 부지에 연건평 34만 평의 매머드 종합청사를 짓고 있다. 총 공사기간은 5년, 공사비용 1조2000억원. 50대 후반의 나이로는 공정관리 총책 일이 벅차다. 하지만 보람을 느낀다. 그는 어느 날 인터넷에 뜬 광고에 눈길이 갔다. ‘20대의 패기, 30대의 열정, 40대의 경험. 이 모든 것을 가진 대한민국의 50·60대여, 해외 현장으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한미파슨스의 주요 업종은 CM(Construction Manage- ment: 건설사업관리). 건설 발주에서 준공까지 깐깐한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현장전문가가 필요하다. “정년이라는 숫자상의 제한으로 일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경제 측면에서 큰 손실입니다. 앞으로 열정과 경륜을 가진 고령 은퇴자의 재고용을 계속 확대할 작정입니다.” 한미파슨스 김종훈 대표의 말이다. 은퇴 앞둔 전문직 임원 97만 명 일 더 하는 게 이들의 ‘운명’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기업에 소속된 임원이나 관리자 가운데 50세 이상 된 사람이 97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도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모두 직장을 떠나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일본의 ‘단카이세대’ 못지않게 열과 성을 다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이 땅의 시니어들도 곧 은퇴의 대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의 함성과 함께 자랐고, 경제성장과 외환위기, 환란극복 등을 모두 체험한 이들의 소중한 경험과 재능을 ‘은퇴’라는 강물에 그냥 흘려 보내도 되는 것인가? 전문직 은퇴자의 경험은 무형의 자산이다. 이들의 경험과 축적된 기술을 기업이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를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해야 할 때다.

2008.06.09 10:09

7분 소요
남아시아 불교의 ‘반란’

산업 일반

최근 몇 년 사이 아시아의 성난 종교인들이 대거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치 구호들을 목청껏 외치고 있다. 정부의 부패를 규탄하고, 서구식 가치의 유입을 비난하고, 전통 윤리의 쇠퇴를 개탄한다. 대중 원조단체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이들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일부는 자신들의 믿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무기를 들었다. 익숙히 듣던 얘기라고? 하지만 이런 문제에 신념을 지닌 이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보수 기독교도들만은 아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조용한 종교로 꼽히는 불교 신도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불교라면 흔히 평화주의와 명상을 연상시키는 종교 아니던가. 옛날 얘기일 뿐이다. 종교 열기로 뜨거운 요즘 아시아 전역에서는 불교가 부활하면서 승려 운동가들이 등장하고 정치적 목소리도 점차 높아진다. 그중 일부는 다른 종교의 원리주의자와 같은 경직성을 보인다. 그렇다. 대만의 대규모 츠지(慈濟) 운동처럼 대부분의 불교 단체는 여전히 비폭력과 무소유를 실천한다. 이런 명상적인 매력 덕분에 인도·중국 등지에서는 도시의 전문직업인들이 불교에 귀의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단체들은 혼탁한 현실정치 속으로 곧장 뛰어든다. 지난해 승려들이 주도한 버마 시위도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다. 2006년 태국에서는 극단적 보수주의 불교 계파의 영향으로 탁신 친나왓 총리가 실각했다. 인도에서는 불교의 지원을 받는 정당이 급속히 세를 불리며 그 정당의 대중인기영합적인 지도자가 장래 총리감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더 극적인 사례는 스리랑카의 급진적 민족주의 자티카 헬라 우루마야(JHU)당처럼 불교도들이 폭력을 옹호한 것이다. 태국 남부에서도 총을 잡는 불교도들이 등장했다. 이처럼 정치적 행동주의 불교가 등장한 현상에 대해 “전 세계에서 종교의 정치화가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우인 칼리지 종교학과의 짐 홀트 교수는 말했다. “ ‘불교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호전성이 강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의 탈피와 모든 생명에의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는 2500년 전에 탄생한 이래 전 세계 신도 수가 3억5000만 명에 달한다. 아직 테러리즘에 기대는 불교도가 없는 것은 폭력을 금하는 가르침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새로이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불교도가 늘어난다. 이런 현상은 그 숫자로 증명된다. 이 종교는 빠르게 세를 불려간다. 정확한 숫자를 꼽기 어렵지만 중국에만 현재 1억 명에 달하는 불교도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부처의 출생지인 인도는 2001년 800만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대략 3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대만의 불교도 수도 2001년 550만 명에서 2006년 800만 명으로 늘었다. 이 같은 성장세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중국과 대만의 신도 수 증가는 정치 규제의 완화를 반영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당국은 모든 종교에 대한 통제를 대폭 완화했다. 문화혁명 당시 척결의 대상이었던 종교적 가치가 지금은 정부가 내세우는 ‘조화로운 사회’의 버팀목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편 아시아 사회에서도 물질주의가 팽배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신흥 중산층들이 늘고 있다. 예컨대 뉴델리의 금융회사 직원 아카시 수리(25)는 한때 옷, 외식, 휴가여행에 돈을 안 아끼는 방탕한 생활을 누려왔다. 그러나 2년 전 “이렇게 호화롭게 살아도 행복하기는커녕 근심 걱정만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불교에 귀의했다. 인도인들에게 불교는 또 다른 강력한 동기를 준다. 바로 억압적인 계급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수단이다. 특히 1억7000만 명에 달한다는 천민계급인 달리트에 호소력을 지닌다. 마하라슈트라주의 주민 후쿰 다스(22)도 지난해 다른 5000명과 함께 뭄바이에서 집단 개종식에 참가했다. “더 이상 동물 취급을 받기 싫다”고 그는 말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지난 10년 새 개종한 달리트가 100만 명을 넘는다. 불도 수가 급격히 늘면서 정치세력화하기도 한다. 중국 당국은 여기에 가장 불안한 입장이다. 중국의 지배에 맞선 봉기 49주년을 기념해 티베트인 수백 명이 이달 가두행진을 시도한다. 망명정부가 자리 잡은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수도 라싸까지 긴 행진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가까워지면서 비슷한 시위가 잇따를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불교의 성장은 공산당 지배에 대한 오랜 도전으로도 해석될 소지가 있다. 중국 불교 전문가들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거나 탁발승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의식을 치르는 중국인들이 늘고 있다. 국가가 인정한 사원 밖이라서 당국의 통제로부터도 자유롭다. 이들 ‘생불’ 중 다수는 오늘날 중국사회의 병폐를 비판한다고 리치먼드대의 가레트 피셔 교수는 말했다. 그중에는 관료조직의 부패나 환경파괴 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들도 포함된다. 한편 인도에서는 부활한 불교 운동이 곧장 현실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7년 전 불교로 개종해 정당을 설립한 달리트 우디트 라지는 “달리트는 억압의 족쇄들을 스스로 벗어던져야 한다. 불교가 해방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했다. 달리트 계급 다수가 그의 뜻을 따라 바후잔 사마지 당(BSP)으로 몰려들었다. BSP당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큰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다수당으로 이 정당의 지도자 마야와티 쿠마리는 포퓰리즘적인 정책들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당을 이끌어 주의회 403석 중 206석을 차지해 정치권에 충격을 던졌다. 그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자신이 무엇을 지지하는지 확고하다. 우타르 프라데시주 전역에 불교 기념물을 세우려는 야심찬 계획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는 부처가 열반한 쿠시나가르에 2억5000만 달러를 들여 150m 높이의 부처 동상을 세운다는 계획도 들어있다. 불교도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난다. 스리랑카에서는 1983년부터 불교를 섬기는 다수파 싱할리스족이 소수파인 힌두 타밀족과 간헐적으로 내전을 벌였다. 승려들은 급진 민족주의 정당인 JHU당 기치 아래 의회활동을 조종해 왔다. 지금까지 JHU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225석 중 9석)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지난해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의 집권 연합에 합류해 스리랑카의 가장 국수주의적 종족인 싱할리스족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정부가 타밀 분리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비판한다. JHU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관용의 전통을 거부하고 전면적인 군사작전을 통해 타밀 전사들을 소탕하자고 주장한다. 또한 외세의 중재로 이뤄진 휴전을 철회하라고 정부를 압박한다.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포교를 금지하는 법을 추진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불교의 호전적인 측면은 태국에서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이 불교신자는 인구 6200만 명 가운데 90%를 훌쩍 넘는다. 태국에서 승려들은 국회에 들어갈 수 없지만 산티 아소케라는 소규모 불교 종파와 연관된 다르마군(軍)이란 단체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2년 전 탁신 총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르마군의 지도자는 장성 출신으로 방콕 시장을 지낸 카리스마 넘치는 잠롱 스리무앙이다. 그 금욕주의 단체(성생활을 하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다)를 일사불란하고 주의·주장이 강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국가가 지원하는 성직자 사회의 비리와 부패를 공격한다. 이 단체는 탁신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비판하기도 했다. “재계 지도층과 군부가 탁신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들에게 결정적인 힘을 실어준 것이 다르마군”이라고 보스턴 소재 시몬스 칼리지 정치학과의 자카리 아부자 교수가 말했다. 태국의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대중인기영합주의를 가리킨 말이다. 지난해 여러 불교 종파가 불교를 국가종교로 지정하려는 운동을 벌인 것도 정서적으로 비슷한 맥락이다. 이들 단체는 태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외국 풍속의 침투를 막기 위해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태국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서구문화를 모방한다”고 대학 교수이자 불교 운동가인 디라위트 피뇨나타가른은 말했다. “우리의 근본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만약 그것이 현실화하면 태국의 500만 무슬림은 불같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결국 태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왕실이 나서서 그런 움직임을 누그러뜨렸지만 ‘태국 불교 네트워크’(총괄 조직)와 불교보호센터 같은 단체들은 수만 명의 시위군중을 쉽게 끌어모을 힘이 있다. 분명히 이 문제는 다시 터져나올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한편 4년 간이나 무슬림들이 반정부운동을 벌여온 태국 남부에서는 많은 불교도가 정부 지원을 받아 군대에 가까운 ‘자위단’을 조직했다. 이 단체들은 명목상 종파와 무관하지만 무슬림 회원이 거의 없으며 종종 불교 사원에서 훈련한다. 7000명의 자원자 대부분은 총 대신 봉을 이용해 훈련하지만 한 전문가에 따르면(정보원의 안전을 위해 이름은 안밝힌다) 지난여름 태국 정부가 이들을 무장하려고 러시아산 엽총을 다량 구입했다. 아시아의 행동주의 불교도들이 모두 부처의 반폭력 가르침을 잊은 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1960년대 틱낫한이 설립한 ‘참여불교’ 운동이다. 베트남 승려인 그는 베트남전 때 운동가로 변신했다가 결국 공산당 통치자들에게 쫓겨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후 2005년과 2007년 귀국했는데 두 번 모두 국민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비폭력과 사회활동을 강조하는 참여불교는 아시아 전역에서 꾸준히 종교적 관용 운동을 벌여왔다.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나라가 스리랑카다. 이곳의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단체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종파를 초월한 반전 시위를 개최한다. 이 단체는 또 1만5000개 지역사회에서 도로를 깔고 깨끗한 물을 찾고 유치원 운영을 도왔다고 제임스 매디슨 대학에서 종교와 철학을 가르치는 샐리 킹 교수는 말했다. 참여불교는 특히 대만에서 뚜렷한 활동을 벌여왔다. 최근 수십년 동안 츠지를 비롯한 유사한 단체들이 우후죽숙처럼 생겨났다. 대만의 불교 부흥 추세에 힘입어 츠지는 전 세계에서 1000만 명의 추종자를 끌어들였다. 1966년 비구니승이 설립한 츠지는 정치와 거리를 두지만 자신들의 활동을 홍보하는 데는 적극적이다. 자체 TV 방송국과 간행물을 통해 대만인들에게 이타적인 삶의 비전을 일깨운다. 현재 츠지는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효과적인 원조기구로 손꼽힌다. 독특한 유니폼 덕분에 ‘푸른 천사’로도 불리는 구호대원들은 2004년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의 지진해일 피해자들을 도왔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본 미국 뉴올리언스에서도 원조활동을 벌였다. 츠지는 비정치적인 성향 덕분에 베이징 당국의 격려를 받으면서 중국 본토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구이저우(貴州)성 같은 가난한 내륙 지역에서 학교, 양로원을 만들고 어떤 때는 마을 전체를 조성했다. 그러나 타 지역에서 불교가 정치화하는 추세를 감안한다면 중국이 츠지의 활동을 계속 허용하리란 보장도 없다. 무엇보다 대만에서조차 불교의 정치성향이 노골화된다. 산추앙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쉬차오훼이는 1993년 생명보존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그 후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낙태 반대, 카지노 설치 반대 운동을 벌인다. “우리는 이슈가 중심이지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목소리를 내고 조직화하고 더 나아가 싸워서라도 권리를 지키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불교도가 계속 늘어나면 언젠가 막강한 중국 정부조차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With SUDIP MAZUMDAR in New Delhi, JONATHAN ADAMS in Taipei and WANG ZHENRU in Beijing

2008.03.11 14:16

7분 소요
러시아의 ‘마이티 마우스’

산업 일반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의 한 사무실. 창밖으로는 성 이삭 광장과 니콜라이 1세 황제의 멋진 승마 모습 조각상이 내려다보였다. 천장이 높은 이 방에서 작은 체구의 남자 두 명이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놓고 앉아 있었다. 나이가 좀 더 든 사람은, KGB 중령 출신의 터프가이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시장의 지시에 따라 민영화 업무를 담당했던 푸틴은 “늘 실무적이고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고 당시 그곳을 자주 방문했던 드미트리 렌코프 시의회 의원은 회상했다. 푸틴의 보좌관인 조용한 젊은 변호사의 이름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였다. 렌코프 의원은 “메드베데프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면서 “모든 결정은 푸틴이 내렸고, 메드베데프는 그 뒤처리를 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6년 뒤 푸틴은 자신의 옛 보좌관에게 러시아의 대통령직을 물려주기로 했다. 물론 오는 3월 2일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푸틴이 건설한 ‘민주적인 주권독립 국가’에서 메드베데프에게는 사실상 적수가 없다. 푸틴이 독립 언론을 질식시키고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기반을 다져 놓았기 때문이다. 대다수 관측통은 메드베데프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리라 전망한다. 그는 이미 푸틴을 차기 정부의 총리로 임명하겠다고 공언했다. 또 “현직 대통령이 조직한 효율적인 팀”을 계속 유임시키겠다는 약속도 했다. 두 사람은 거의 20년지기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지금도 자신의 상관을 지칭할 땐 공식 호칭인 ‘브이’(각하)를 사용한다. 크렘린의 고위 관리였던 한 인사는 두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이래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푸틴은 자신의 ‘꼬마’가 산 채로 먹히지 않게 하려고 필요한 만큼 권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얘기는 러시아가 푸틴의 비공식적인 3기 연임 체제로 가게 된다는 의미일까? 러시아 국민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하기야 푸틴의 인기도는 76%를 넘는다. 또 메드베데프가 취임 초기에 극적인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물론 두 사람은 과거를 상당 부분 공유하면서 끈끈한 관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두 사람 우정의 뿌리를 좀 더 들여다보면, 앞으로 언젠가는 서로 갈라설 가능성도 엿보인다. 두 사람의 차이점 중 일부는 피상적인 것들이다. 55세인 푸틴은 전형적인 러시아 터프가이다. 무술을 좋아하고 상스러운 욕설도 곧잘 한다. 지난주 그는 자신의 재산에 관한 언론의 비판적 기사를 두고 “누군가의 코에서 튀어나온 오물을 종이 위에 문질러 놓은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푸틴은 전쟁 영화를 즐겨 보고, 애국적인 러시아 록 음악을 듣는다. 이에 비해 42세의 메드베데프는 가냘픈 체격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닌 기업 전문 변호사다. 권위 있는 법률 교과서를 여러 권 집필하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수영이다. 그에게서 가장 거친 점을 들라면, 강렬한 사운드의 록그룹 블랙 사바스와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차이점들은 좀 더 뚜렷하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노동자 계층 주거지의 거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 조립식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2000년에 출간한 자서전 ‘퍼스트 퍼슨(First Person)’에서 푸틴은 꼬마들을 이끌고 계단통을 오르내리며 쥐를 잡아 죽이던 일을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 치하의 소련은 국력이 절정에 있었다. 푸틴은 공산주의의 마지막 신봉자 중 한 명으로 교육받았다. 그는 소련의 스파이 영화를 관람한 뒤 KGB에 들어가겠다는 꿈을 키웠다. 대통령이 된 뒤 푸틴은 소련의 붕괴에 대해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대재앙”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메드베데프는 레닌그라드의 지식인 계층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율리아는 러시아 언어와 문학을 가르쳤고, 아버지 아나톨리는 물리학자였다. 305호 학교에서 메드베데프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이리나 그리고로프스카야는 “그에게 아버지처럼 과학자가 돼야 한다고 설득하고 싶었다”면서 “하지만 당시 14세였던 메드베데프는 단호하게 싫다고 말했다. 그는 법조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우겼다”고 회상한다. 1980년대 말의 레닌그라드는 소련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 공산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할 때였다. ‘글라스노스트(개방)’의 열기 속에 대학생들은 강의실을 가득 메운 채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스탈린주의 비판 강의를 경청했다. 학생들은 한때 불온서적으로 금기시됐다가 다시 출간된 시집들을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졸업한 메드베데프는 자신의 은사 중 한 명인 아나톨리 소브차크 교수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브차크는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메드베데프의 행보는 위험한 처신이었다. 자유 시장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소브차크의 사상은 당시로선 여전히 매우 이단적인 것이었다. KGB는 그의 유세용 인쇄물을 정치적으로 너무 선동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간주하고 압수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동료 지지자들과 함께 낡은 회전식 복사기를 이용해 또 다른 선거 전단을 밤새 복사했다. 소브차크의 미망인 라리사 나루소바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디마(메드베데프)가 나중에 내게 말했어요. 그 다음날 자신은 밤새 이스크라(공산당의 지하 신문)를 등사기로 찍어냈던 레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이죠.” 소브차크는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푸틴은 그 격동의 시절을 대부분 동독에서 보냈다. ‘철의 장막’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봤다. 여러 해 전에 푸틴을 가르치기도 했던 소브차크는 그 전직 KGB 요원을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왔다. 소브차크가 시장이 된 후였다. 소브차크는 “이제 공직을 차지한 과거의 반체제 인사들과, 그들을 박해했던 KGB 출신들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앞서의 전직 크렘린 고위 관리는 말했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는 시정부 소유의 부동산과 사업체들을 매각하는 업무를 책임진 푸틴을 보좌하며 법률적 조언을 했다. 다른 한편, 메드베데프는 자본주의자 대열에 합류했다. 제지회사인 일림 펄프에 들어가 그 회사를 자산 수백만 달러짜리의 시장 선도 기업으로 키우는 데 일조했다. 그는 모교에서 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제자였던 파벨 티모페예프는 메드베데프가 화려한 베르사체 의상을 입고 손에는 파커 만년필을 든 채 강의실에 들어오곤 했다고 회상한다. “그분은 사치품, 성공, 전문직업인을 상징했다. 우리 학생들은 그분처럼 부유하고 성공한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푸틴은 메드베데프를 중용했다. 기업 업무에 관한 메드베데프의 지식을 활용하려고 그를 국영 에너지 독점회사인 가스프롬의 CEO로 앉혔다. 가스프롬에서 메드베데프는 구태의연한 경영진을 퇴출시키고, 회사의 재무구조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결정적인 기준은 충성심이었다. 메드베데프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불신한다는 점에서 푸틴과 생각이 같다. 일림 펄프에 근무할 때 메드베데프는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를 막기 위해 KGB와 군 첩보기구 출신자들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또 푸틴이 외교술, 협박, 무력 시위 등의 방법을 혼합해 러시아의 위상을 부활시키고 조국에 새롭고 대담한 역할을 부여한 점을 인정한다. 지난달 메드베데프는 어느 연설에서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걸맞은 지위를 되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메드베데프도 푸틴이 찬성하는 ‘거만한 민족주의’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입장이다.(최근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시스템을 유치하는 데 동의할 경우 러시아군의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겨냥하겠다고 위협한 적이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푸틴의 그 말에 대해 “비난 받아 마땅한 언사”라고 비판했다.) 메드베데프는 최근 연설에서 유럽에 공급하는 에너지와 관련해 러시아의 국익을 “조용히” 추구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달 뉴스위크 특파원은 메드베데프가 직접 수정한 연설문 원고를 봤다. 모스크바의 문화계 지도자 등을 상대로 행한 연설이었다. 두 단락이 삭제돼 있었다. 하나는 푸틴이 퇴임 후 러시아 의회에서 맡게 될 새로운 역할에 관한 언급이었다. 이것을 삭제한 것은 러시아에서 “정당제도가 더욱 정착돼 간다”는 신호였다. 또 다른 대목은 서방진영이 우크라이나에서 2004년에 일어난 오렌지 혁명과 비슷한 혁명을 다시 일으키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신 메드베데프는 이렇게 시인했다. “러시아처럼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태도가 만연된 나라는 유럽에는 없다.” 메드베데프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해도, 러시아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려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푸틴의 집권 기간에 크렘린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사들의 막강하고 은밀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러시아 부패추방위원회의 키릴 코바노프는 “메드베데프는 KGB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이들 세력과 싸워야만 할 것”이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국가의 정치구조 자체가 권력형 부정부패의 무게에 눌려 붕괴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옛 동지들이 대규모로 숙청되는 사태를 푸틴이 묵인할 가능성은 없다.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그는 퇴임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러시아에서 행정수반은… 총리”라는 그의 발언은 불길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앞서의 전직 크렘린 고위 관리는 장기적으로는 희망을 가질 이유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억해 보라. 우리는 모두 푸틴이 자신을 권좌에 앉힌 옐친 파벌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푸틴은 매우 신속하게 자신의 노선을 확립했다”면서 “러시아의 황실에서는 늘 마법 같은 일이 발생해 왔다… 메드베데프는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의 멘토인 푸틴이 누구보다도 놀랄 듯하다. With ANNA NEMTSOVA in St. Petersburg

2008.02.2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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