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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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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조사 앞둔 공수처, 수사 준비 속도…성탄절 출석 응할까

정책이슈

12·3 비상계엄 사태를 수사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사흘 뒤로 요구한 윤석열 대통령 조사에 대비해 휴일을 반납하고 수사에 매진하고 있다.공수처 비상계엄 수사 태스크포스(TF)는 일요일인 22일에도 대부분 출근해 윤 대통령 등의 내란 및 직권남용 혐의 사건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이날 오전 10시께부터는 지난 20일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 혐의로 구속된 문상호 정보사령관을 구속 후 처음으로 불러 조사했다.공수처는 문 사령관 등 비상계엄 관련자들을 직접 조사한 내용,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수사 기록 등을 토대로 윤 대통령에게 캐물을 질문지를 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라며 내란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이에 따라 공수처는 국회·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헌법기관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군·경찰을 투입했는지 규명해 ‘국헌문란’ 목적을 입증하는 데 수사력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다만 공수처는 검찰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나 여인형 방첩사령관, 곽종근 특수전사령관 등 군 지휘부를 조사한 자료를 아직 공유받지 못한 상태다.지난 18일 윤 대통령과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사건은 검찰이 공수처에 이첩하기로 합의했지만, 사건 기록은 아직 넘어오지 않았다.자료 정리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양측은 구체적인 공유 범위를 계속 협의하고 있다.공수처와 경찰 등으로 꾸려진 공조수사본부는 윤 대통령에게 성탄절인 오는 25일 오전 10시 정부과천청사 공수처로 출석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으라고 출석요구서를 보낸 상태다.윤 대통령 관저와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실, 부속실 등 세 곳에 특급 우편과 전자 공문으로 출석요구서를 보냈는데, 우편은 월요일쯤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함께 보낸 전자 공문은 아직 읽지 않은 상태로 파악됐다. 선임계를 낸 윤 대통령 변호인도 아직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현재로서는 윤 대통령이 25일 출석할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일단 공수처는 대비에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이다.

2024.12.22 17:48

2분 소요
尹 하야 거부…

정책이슈

윤석열 대통령은 긴급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권 행사는 사면권 행사, 외교권 행사와 같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라며 '12·3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라는 뜻을 내비쳤다.윤 대통령은 12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저는 이에 당당히 맞설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며 하야를 거부했다.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지난 2년 반동안 거대 야당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리기 위해 퇴진과 탄핵 선동을 멈추지 않았다"며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이 됐다"고 언급했다. 이어 "이것이 국정 마비요, 국가 위기 상황이 아니면 무엇이라 말이냐"며 반박했다.계엄선포가 내란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병력을 국회에 투입한 이유는 거대 야당의 망국적 행태를 상징적으로 알리고, 국회 관계자와 시민들이 몰릴 것을 대비해 질서 유지 하기 위한 것"이라며 "국회를 해산시키거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다면, 평일이 아닌 주말을 기해서 계엄을 발동했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어떻게든 내란죄를 만들어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수많은 허위 선동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또 "10시 30분 담화 방송을 하고 병력 투입도 11시 30분에서 12시 조금 넘어서 이루어졌으며, 1시 조금 넘어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가 있자 즉각 군 철수를 지시했다. 결국 병력이 투입된 시간은 한두 시간 정도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퇴진 의사가 없다는 것도 밝혔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와 관련해서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다"며 "대통령 취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개인적인 인기나 대통령 임기, 자리 보전에 연연해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에 대한 저의 뜨거운 충정만큼은 믿어달라"며 담화를 마무리했다.

2024.12.12 10:40

2분 소요
윤 대통령과 금주령[전형일의 세상만사]

전문가 칼럼

조선시대 정치는 술(酒)과 불가분의 관계였다.임금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졌다. 또 술은 임금의 일등 하사품이기도 했다. 심지어 죄수들에게도 술을 내렸다. 술은 통치행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조선 임금으로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최장기 집권한 영조는 호주가(好酒家)였다. 어릴 때부터 권력투쟁의 불안감 속에서 성장했던 그는 자기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술을 무척 좋아했다.영조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절대왕권의 왕이었음에도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로 둘러댔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이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한다는데, 신은 그 허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함을 보존토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목이 마를 때에 간혹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간혹 소주(燒酒)인 줄 의심한다”라고 했다.(조선왕조실록)영조와 더불어 태종과 세조, 정조 역시 술을 좋아했으며 주량 또한 셌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힘든 과정을 거쳐 즉위했고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들은 신하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방편으로 잦은 술자리를 활용했다. 특히 세조는 14년의 재위 동안 공식적으로만 총 467회의 술자리를 가지며 여타 왕들의 회식 기록을 압도했다.반면 순탄한 계승과 재위 기간을 보낸 세종, 성종 등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주량 또한 약했다.생활화된 음주, 왕들도 걱정조선시대에 술은 음식이고 약이었다.전통적으로 술은 ‘먹는’ 음식이지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다. 또 술은 오곡(五穀)의 정기가 들어있으므로 적당히 마시면 보약으로 생각했다.주식(酒食)과 약주(藥酒)란 말도 이를 나타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문종이 승하한 후 상주였던 단종이 허약해지자 신하들이 술을 약으로 권했다.이 같은 인식과 풍습은 오히려 음주를 장려하고 대중화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중기에 이르러서는 술을 숭상하는 숭음(崇飮) 풍조가 만연해져 신분과 지역을 막론하고 음주가 생활화됐다.하지만 과음은 결국 국가적인 문제가 됐다. 음주로 업무에 태만한 관리들이 늘면서 조정에 큰 부담이 됐다. 술에 취한 양반들의 횡포도 심했다. 백성들 또한 술로 인한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사회적인 부담을 줬다. 또 곡식으로 술을 담그면서 경제적인 손실도 발생했다.결국 세종은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글을 발표한다. “술은 몸과 마음을 해친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잃게 한다….”세종은 이 교서를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관청에 걸어두게 했다. 술의 역기능은 조선 초에도 심했다. 우선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가 술병으로 죽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태조 4년부터 금주령(禁酒令)을 시행했다.역사상 가장 길고 세게 금주령을 내린 왕은 오히려 애주가인 영조로 10년간 이어진 적도 있었다. 그는 금주령에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호남 지역 군사를 통솔하던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을 숭례문에서 참수하는데 직접 참형을 지켜봤다.(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하지만 왕의 강한 의지도 큰 소용이 없었다. 본능을 이기는 제도도 없거니와 예외가 많았기 때문이다.먼저 국가 제사와 임금이 베푸는 연회, 외국 사신 접대 등은 적용에서 제외됐다. 또 약으로 먹는 경우나 친지를 영접하고 환송하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축하연 등은 술이 허용됐다. 게다가 제사, 환갑, 혼인, 장례 등의 행사에도 술이 가능했다. 활쏘기 장소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도 술이 허락됐다.대책들이 만들어졌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기 십상이었다. 세종도 법령 등으로 술을 금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이 금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국가 지도자의 금주, 기대난망이네이중적이었던 영조의 금주령은 손자인 정조에 들어와서 폐지됐다. 정책의 실효성과 더불어 그 스스로도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신하들과 술자리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현재까지 술과 관련된 끊임없는 잡음이 나오고 있다. 후보 때 지지율이 폭락했던 지난 2022년 1월엔 ‘술을 끊겠다’는 선언까지 나왔다. 대통령으로 2023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룹 총수들과의 술자리가 문제 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3월 일본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이 건배를 하면서 술을 다 마셔 깜짝 놀랐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급기야 최근 조국 대표가 기자회견을 통해 윤 대통령에게 ‘음주 자제’를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과하고 잦은 음주가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건강한 몸과 맑은 정신에 도움이 될까. 지지율이 20%대면 금주로 결기를 보이겠건만 이 또한 기대난망(期待難望)으로 보인다.효종은 세자로 책봉된 때부터 금주를 시작해 그 후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2024.05.04 08:01

4분 소요
[개성공단 재가동 될까] 남북 해빙 무드에도 산 넘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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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합의해도 유엔 대북 제재 등 남아…손실 커진 입주 기업들 일단 지켜보기로 2016년 2월 10일, 군사작전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개성공단 폐쇄 결정이 떨어졌다. 정부의 방침이었고, 신속히 진행됐다. 북한이 한 달 전 진행한 4차 핵실험이 기폭제가 됐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개성공단 임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용한다”고 폐쇄 이유를 밝혔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4곳은 하루 아침에 공장을 잃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대표들은 당시를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상한다. 신한용 개성공단기업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은 당시 상황에 대해 “물건을 많이 가져와야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예고도 없이 정부가 1사 1인 1차량으로 제한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통보에 입주 기업들은 공장을 수습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쫓기듯 개성공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기업들은 이후 2년 간 공단 근처도 못가고 있다. 공장의 설비나 시설 점검을 위해 정부에 4차례 방북을 요청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남북관계가 전쟁 위기설까지 도는 등 악화일로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나 매섭게 한반도를 몰아치던 한파가 물러가고 봄이 오고 있다. 4월 말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5월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위원장의 제의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격 수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는 깜짝 놀랐다. 외신들은 ‘대사건’ ‘중대 변화’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앞둔 사전 접촉과 회담 결과에 따라 비핵화에 이어 65년 간 이어져온 한반도 휴전 상태를 종식시키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정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결이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과도 같던 개성공단 재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비대위는 논평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군사회담 등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경협 분야에서는 개성공단 문제가 먼저 거론되리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개성공단 재개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분석이 나온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법적 지시에 가동 멈춰 개성공단은 현대아산과 북한이 2000년 8월 개성과 강원도 통천·신의주 등 3곳에 공단을 건설하자는 ‘공업지구개발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면서 사업이 시작됐다. 2003년 6월 330만㎡ 규모의 1단계 공단이 착공했고, 이듬해 4개 업종 15개 기업이 시범단지에 입주했다. 같은 해 말 개성공단 첫 제품으로 ‘통일냄비’가 생산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과 2007년 각각 24개, 183개 기업이 입주 신청을 했고, 2012년 공단 내 북한 근로자가 5만 명을 돌파하는 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2016년 2월 개성공단은 가동을 멈췄다. 군사작전을 하듯 전격 진행된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 당시 박근혜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통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지난해 말 통일부 정책혁신위의 조사 결과는 달랐다. 혁신위는 “개성공단 가동 중단 조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두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초법적 통치행위”라고 규정했다. 공식 의사결정 체계의 토론과 협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의 일방적인 구두 지시로 개성공단의 전면 중단이 결정된 것이라는 얘기다.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입주 기업들은 휘청거렸다. 애초 정부의 투자 권고와 사업 보장을 믿고 입주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개성공단기업협회에 따르면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4곳 가운데 현재 휴업 중인 곳은 10여곳에 이른다. 국외에 대체 생산시설을 마련한 곳이 30여곳이고, 국내에서 기존 공장을 증설하거나 대체 생산시설을 확보한 업체는 80여곳이다. 국내외에서 공장을 돌린 기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협회에 재무제표를 제출한 108곳의 2016년 매출은 2015년 대비 평균 26.8% 감소했다. 매출이 50% 이상 떨어진 기업(사실상 휴업·사업축소)도 23%인 25곳이었다. 2015년에 비해 영업이익에서 영업손실로 전환된 기업은 40곳, 영업이익이 감소한 기업은 26곳, 영업손실이 증가한 기업은 14곳이었다. 생존이 불가한 폐업 직전의 입주 기업은 지금까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폐업을 하면 당장 대출금을 반환해야 하고, 추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대출이자만 쌓아가면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입주 기업 한 곳은 공단 폐쇄 직후 법원에 법정관리 신청을 했지만 개성에 자산(공장)이 있다는 이유로 기각되기도 했다. ━ '이르면 올해 안에 재가동’ 기대감 솔솔 그럼에도 입주 기업들은 2년 간 공장의 설비나 시설 점검조차 못했다. 입주 기업들은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 다음 날인 2월 26일 다섯 번째로 정부에 방북신청서를 제출했다.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컸다. 남북 단일팀이 출전한 평창올림픽이 무사히 끝나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해빙 무드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3월 15일 방북 신청을 유보했다. 기업인들이 방북하려면 북측의 초청장이 필요한 데 이와 관련 북측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통일부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큰 틀에서 국면이 전환되고 어떤 요건이 정리되면 다른 길이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입주 기업들도 4월 남북 정상회담까지 다시 방북신청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비대위는 3월 15일 보도자료를 내고 “4월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경협 사업이 의제로 다뤄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개성공단은 언제쯤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재계에서는 남북, 북미 회담 결과에 따라서는 올해 안에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확산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의제에 민간교류 확대에 대한 부분도 포함될 텐데 당연히 개성공단 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가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남북이 함께 참가한 동계올림픽도 잘 끝났고, 올해 초 1년 11개월 만에 판문점 연락채널이 재개된 만큼 정상회담 이후 (개성공단 가동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실제 재가동까지는 난관이 적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유엔의 북핵 제재와 연계된 상황으로 남북이 합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2년 간 가동을 중단한 만큼 기계설비나 시설 등을 보수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 공조시스템이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며 “연이은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대화가 열리고 낮은 단계에서라도 의미 있는 합의가 나와야 경제협력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8.03.24 07:34

4분 소요
[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정치·외교의 필수품으로 쓰인 차(茶)

전문가 칼럼

중국, 주변국 유화정책에 활용... 일 사무라이들은 다도문화 즐기고 고려는 외교수단 삼아 #. 차는 중국에서 주변 국가로 전해지는 선린과 우호의 상징이었다. 중국 황실에서 사용하는 어용차는 조공을 바치려고 황제를 알현한 외국사신에게 주는 회사품(조공의 대가로 상국이 조공국에 내려 주는 하사품)으로 사용됐다. 사신을 통해 전달된 차는 해당 국가의 왕이 조정에서 신하와 왕족에게 하사하며 군신 간의 서열을 확인하는 표상이 됐다. 중국인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화이사상에 바탕을 둔 유화정책의 대표적 수단이었던 차는 오늘도 각국의 수반이 중국을 방문하면 빠지지 않는 답례품으로 등장한다.#. 차를 마시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북바치는 기쁨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히데요시가 주군으로 모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다회를 주최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것이 사무라이 계층의 고급 문화로 정착했지만 마음대로 다회를 할 수 없었다. 전국시대 최고 실력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같은 심복에게만 다회를 허락했다.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평민출신의 히데요시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다도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이어 전국을 평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 차를 수탈대상 삼은 조선 차 마시는 행위를 정치수단으로 활용한 노부나가는 당대 최고의 다도 선생 센노리큐를 ‘다두’로 모시고 다회를 개최하며 무장들의 논공행상과 서열을 조율했다. 센노리큐는 차노유라고 하는 다회를 통해 일본의 독특한 미학인 와비사비(侘び寂び)를 구현하는 일본 다도를 완성한 일대종사다. 1582년 6월 2일 미쓰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49세에 사망한 노부나가의 대업을 물려받은 히데요시는 센노리큐를 다도 선생으로 영입해 다도정치를 전수받아 세력 확장에 활용했다. 이 무렵 조선의 차는 사대교린의 외교정책과 군신관계를 이어주는 상징성을 넘어 주요 과세 대상이었다. 조정과 지방 관리의 과도한 세금폭탄을 피해 차는 암암리에 즐기는 골방문화로 퇴색의 길을 걷고 있었다.차를 과세와 수탈 대상으로 삼은 조선에 비해 고려는 차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의 세가와 열전에 의하면 송나라 황실에서 받아온 대표적인 어용차인 용봉단차를 신하들에게 골고루 하사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냈다고 한다. 고려는 한약재로 유명한 용뇌향을 가미한 뇌원차를 자체 개발해 989년부터 어용차로 사용했다. 뇌원차를 송나라에 공물로 가져갔을 뿐 아니라 거란족이 일으킨 요나라와 여진족이 창업한 금나라와 예물을 주고받을 때에도 사용했다. 송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차지한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충렬왕은 조공사신을 보내며 화친과 복종의 상징으로 뇌원차를 보냈다.차는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큰 축인 토지와 노비를 대체하는 대표적인 하사품이었다. 공신에게 내리는 토지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고 노비를 많이 갖게 하는 것은 신하의 힘을 과도하게 키우는 불안 요인이 있었다. 어용차를 하사하는 것은 군신 관계의 충성과 국가 사이의 신뢰 관계를 유지시키는 효율적인 통치행위였다. 어용차를 하사품으로 사용한 최초의 나라는 당나라다. 안사의 난으로 힘을 잃은 현종에 이어 황제에 오른 숙종은 금주령을 반포했다. 안사의 난을 수습한 곽자의 장군에게 숙종은 어용차를 하사하며 궁중 피로연과 제사에 술 대신 차를 사용하도록 했다. 황실에 차를 바치는 공차제도도 숙종 때 시작됐다.차 산업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당나라 때부터 차는 중화사상을 실천하는 유화정책의 상징인 동시에 부를 창조하는 교류 품목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그 당시 토번으로 불렸던 티베트의 왕 송찬간포(松贊干布)의 아들 공송공찬에게 문성공주를 출가시키며 결혼 예물로 차를 보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를 화번공주로 삼아 시집보낸 사건은 주변국과의 갈등을 화전 양면 전략으로 풀어 중원을 지켜온 역대 중국 정권에서 가장 성공한 외교사례로 평가받는다. ━ 시진핑, 박 전 대통령에게 차 선물 차를 마시지 않았던 티베트인은 문성공주가 차를 소개한 이후 필수 품목이 되어 지금은 가장 차를 많이 마시는 민족이 됐다. 641년 장안을 출발해 티베트로 향한 문성공주는 당태종의 친 딸이 아닌 먼 친척의 딸로서 급히 공주로 포장된 외교관이었다. 18명이나 되는 당나라 화번공주의 상당수는 이처럼 급조된 경우가 많았다. 화번공주를 맞이하는 나라에서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화친의 상징으로 시집오는 공주는 진위 여부보다 중국황실의 공주라는 ‘타이틀’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문성공주와 결혼한 공송공찬이 643년 사망하자 문성공주는 시아버지였던 송찬간포와 646년 재혼했다.차를 비롯한 곡식종자를 축하 예물로 보내며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을 인정한 당 고종은 송찬간포를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서해군왕으로 책봉했다. 문성공주를 맞이한 송찬간포도 649년 병사하고 만다. 문성공주는 송찬간포의 어린 손자가 등극하면서 섭정이 된 재상 녹동찬(祿東贊)을 앞세워 송찬간포가 못 다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녹동찬은 송찬간포가 문성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했던 사신이었다. 서역의 패자로 부상한 티베트는 당나라의 서쪽 변방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벽이 되어줬다. 옛날부터 차를 외교수단으로 활용한 중국의 전통은 21세기에도 살아있다. 2013년 6월 중국을 공식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호남성에서 생산되는 안화흑차(安化黑茶)를 선물했다.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에 출연했다.

2017.04.22 11:35

4분 소요
[브라질의 탄핵정국 어디로] 핑크 타이드 저물고 블루 타이드 시대로

산업 일반

브라질이 정치적인 혼란에 빠졌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8월5~21일)을 무사히 치른 지 불과 열흘 만이다. 우파가 주도하는 브라질 상원은 올림픽으로 뜨거웠던 8월을 넘기지 않고 좌파 대통령을 권좌에서 밀어냈다. 브라질 상원은 8월31일 표결에서 전체 의원 81명 중 찬성 55대 반대 21, 무효 5표로 지우마 호세프(68) 대통령의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탄핵정족수인 전체 의원 3분의 2 이상(54표)을 한 표 넘어섰다. 상원 표결은 지난 4월 하원의 탄핵 표결에 이은 최종 절차다.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탄핵안이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절차를 최종 마무리했다.호세프는 표결 전 8월29일 열렸던 마지막 변론에서 인간적으로 호소했다. “과거 20년 간 독재에 맞서 싸웠다. 내 몸엔 당시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군부 독재시절 고문으로 겪었던 죽음의 공포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쿠데타로 인한 민주주의의 죽음이 더 무섭다” “경제 기득권이 아닌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해 달라” “일흔 살 가까이 됐고 엄마와 할머니가 됐지만 평생 나를 이끈 신념을 버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 격정적인 호소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우파가 주류인 브라질 상원의원들은 호세프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3분의 2 이상의 찬성 표결로 그를 권좌에서 쫓아냈다. 이날 수도 브라질리아 의회에서 탄핵 심판을 주재한 히카르두 레반도브스키 대법원장은 “이날 부로 호세프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미셰우 테메르(75)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직을 승계해 남은 임기인 2018년 말까지 맡게 된다”고 선언했다. ━ 좌파 정권 집권 13년 만에 막 내려 2011년 1월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오른 호세프는 이로써 5년 8개월 만에 탄핵으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좌파 민주 투사에서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권력 정상에 올랐던 그는 이 나라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 당한 대통령이 됐다. 1992년 탄핵 당한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전 대통령에 이은 탄핵이다. 이번 탄핵으로 2003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1) 전 대통령 이후 지속됐던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좌파 정권도 13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호세프는 대변인을 통해 “연방대법원에 탄핵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지만 결정을 뒤집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룰라 전 대통령을 비롯한 노동자당 지지자들은 대선을 새로 치러 새 대통령을 뽑자고 주장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과반수인 62%의 국민이 ‘대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고 응답한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대통령 직을 승계하는 테메르에 대한 지지율이 불과 10% 정도에 그친 것도 명분이 된다. 하지만 국민의 여론이 법과 제도를 앞설 수는 없다. 현행법에서 새로운 대선을 치르려면 대통령 직을 승계한 테메르가 사퇴해야 한다. 하지만 우파의 기수로 좌파 대통령 호세프를 쫓아낸 테메르가 자리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없다. 이 때문에 테메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대선이 다시 치러질 가능성은 없는 상황이다. 브라질의 권력은 국민이 선택한 좌파의 손에서 의회가 선택한 우파로 넘어갔다.탄핵 전날 호세프는 “테메르가 이번 탄핵 쿠데타의 배후”라며 “그가 대통령직을 강탈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번 탄핵 정국의 최대 수혜자가 테메르다. 호세프는 “테메르가 대통령에 오르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크게 후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장주의자이며 친기업 정치인으로 통하는 테메르는 최저 임금을 올리는 호세프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어왔다. 테메르는 중도우파 브라질민주운동당(PMDB) 소속의 정치인이다. 한때 노동자당과 연정을 이뤘다. 룰라의 노동자당이 중도 좌파로 경제 재건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세프가 들어서면서 사사건건 맞서왔다. ━ 꼼수 쓴 우파, 빌미 제공한 좌파 문제는 호세프가 탄핵당한 이유가 그리 깔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탄핵 사유는 호세프가 연임을 위한 2014년 10월의 대선을 앞두고 연방정부의 대규모 재정 적자를 숨기려고 국영은행의 자금을 끌어 쓰고 이를 제때 갚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대한 재정 적자는 호세프의 실정으로 대중에게 각인돼 대선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인이다. 이를테면 기업이 주가를 높이려고 분식회계를 하듯, 재정 적자라는 자신의 실정을 숨기려고 국영은행의 돈을 불법 전용한 것이다.우파는 호세프의 전용이 정부재정회계법을 위반한 것으로 탄핵 사유가 된다고 주장한다. 안토니오 아나스타시아 상원의원은 “2010년 8억 헤알 정도였던 국영은행 자금 전용이 2014년엔 무려 59억 헤알(약 2조88억원)로 불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호세프 정권이 상습적으로 재정 적자를 국민에게 숨겼다”며 “이는 명백한 범죄”라고 주장했다. 우파의 보루인 브라질 검찰도 호세프가 재정 ‘분식회계’로 국가에 해를 끼쳤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호세프 측은 물론 좌파 지지자들은 국영은행 자금 차입은 정상적인 통치 행위이며 탄핵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호세프는 의회에서 “국영은행 자금 전용은 전 정부부터 이어진 관례”라고 맞섰다. 그는 국영은행에서 차입한 자금은 최저임금을 올리고 연금을 확대하는 데 사용했다”며 정당한 통치행위라고 반박했다.브라질 법과 제도상 탄핵의 칼자루는 의회가 쥐고 있고, 의회는 우파가 장악하고 있다. 의회를 장악한 브라질 우파 세력에게 정부재정회계법 위반은 좌파 대통령 호세프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탄핵을 통한 정권 재 탈환이었다. 선거로 얻지 못한 권력을 법률 해석과 의회 표결을 통해 이룬 것이다. 이는 의회에 이어 대통령직도 장악한 우파정치권력의 취약점이기도 하다.좌파는 잇단 부패 혐의와 실정으로 명분과 신뢰를 잃어갔다. 정부재정회계법 위반이 우파가 만든 탄핵 명분이라면 좌파의 부패는 호세프의 무장을 해제한 강력한 변수였다. 특히 과거 룰라 정부와 관련된 좌파 정치인들의 부패 혐의가 드러나면서 호세프는 기운이 빠졌고 우파는 힘을 더했다. 집권당인 노동자당은 물론 함께 연정을 이룬 브라질민주운동당(PMDB) 소속의 주요 정치인들이 브라질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 뇌물수수 스캔들에 연루돼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심지어 브라질 좌파의 기수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존경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룰라 전 대통령도 연루 혐의를 받고 있다. 호세프는 이 스캔들과 관련해 룰라가 수사를 받게 되자 그를 수석장관에 임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종의 ‘방탄 공직 임명’을 시도한 셈이다. 이런 무리한 방식으로 룰라를 보호하려고 했던 호세프의 반격은 여론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수석장관 임명은 취소되고 호세프와 룰라가 동시에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다. ━ 재정 적자 불어나고 성장률 마이너스 호세프가 우파에게 발목을 잡힌 결정적인 이유는 부진한 경제 성적표다. 브라질 경제는 호세프가 재선한 2014년 이후 계속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3.8%로 1990년 이후 25년 만에 최저 수준이었다. 올해도 -3.3%로 계속 뒷걸음질 칠 것으로 전망된다. 룰라 집권 당시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하나로 꼽히며 신흥경제국의 핵심이던 브라질의 명성은 호세프에 이르러 사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9%대의 인플레이션에, 11%에 이르는 실업률이 호세프의 발목을 잡았다. 세계적인 불황도 영향을 끼쳤지만 한때 브릭스의 맨 앞줄에 섰던 브라질의 자존심은 이런 초라한 성적을 허용하지 않았다.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좌우파 할 것 없이 호세프에게 등을 돌렸다. 급기야 지난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우파 중심의 시위였지만 곧 빈민들까지 나서는 등 좌우파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호세프 퇴진’을 외치기 시작했다. 올림픽이 다가오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시위가 열린 것이다. 우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브라질 하원은 지난해 말 호세프 탄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8월31일 나온 것이다.결국 정부재정회계법 위반과 좌파의 부패, 호세프의 경제 실정 등이 겹쳐 국민이 등을 돌리면서 우파가 장악한 의회가 ‘탄핵을 통한 정권 교체’라는 꼼수를 부려 성공한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도한 일을 벌인 우파도 문제지만 그런 빌미를 줘서 좌파 정권을 종식한 호세프도 문제가 만만치 않다. 호세프는 2011년 대선에서 56%를 득표하며 당선했다. 당시 80% 수준의 경이적인 지지율을 자랑하던 룰라의 지지가 결정적인 힘이 됐다. 호세프의 지지율은 2013년 3월 79%로 올랐다. 그런데 2014년 대선에서 연임에 성공한 후 경기 침체에 따른 높은 실업률에 좌파 정치권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여론은 곤두박질쳤다. 올해 3월 10%로 떨어졌다. 결국 이번 탄핵으로 호세프는 대통령직을 잃었고, 2003년 룰라 이후 13년에 걸친 좌파 노동자당 정권도 막을 내리게 됐다.호세프는 경제적·도덕적·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당한 셈이다. 서민을 위한 복지에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경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일자리를 잃은 서민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정부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분 것도 문제의 하나다. 브라질은 현재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10% 수준이나 된다. 나라 빚도 많아 대외채무를 갚는 데 전체 예산의 50% 정도가 들어갈 정도다. 세금을 많이 거두고 국영은행에서 차입을 해도 정작 호세프가 그렇게 생각했던 서민들에게 돌아갈 몫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이처럼 경기 침체 속에서 호세프가 분배를 강조한 것도 하나의 빌미가 됐다. 룰라 시절만 해도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고민했다. 재정 운용에서도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이 때문에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극빈층에 대한 복지도 확대할 수 있었다. 중산층이 50%로 늘어나는 등 경제 성장의 효과가 고루 확산했다. 하지만 호세프 정권에 오면서 성장보다 복지에 무게를 두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호세프가 재선되던 2014년 무렵 전 세계는 ‘분노하라’라는 말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경험했다.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이며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좌파 정부의 의무라는 믿음이 전 세계로 뻗어갔다. 이에 영향을 받은 호세프 정권은 취약계층인 저소득 층을 위한 분배정책에 무게를 실었고 이 때문에 전체 경제 운영 기조가 흔들렸을 수도 있다. ━ 룰라와 달리 원칙과 고집으로 일관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인 호세프의 단호한 성격도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호세프는 젊은 시절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다. 20세 때인 1967년 브라질 사회당의 한 분파인 ‘노동자의 정치학(POLOP)’이라는 조직에 가담해 본격적으로 좌파활동을 시작했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를 완수하는 방법을 놓고 분열했다. 제헌의회 구성을 위해 매진하자는 파와 무장활동을 벌이자는 파로 나뉜 것이다. 호세프는 무장활동을 선호했다.호세프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으며 좌파 군사조직인 민족해방사령부 소속으로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게릴라 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노조에서 활동하며 ‘피케트’라는 이름의 좌파 매체에서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브라질 언론은 호세프가 청년기에 조직업무에만 가담했다고 보도했으나 일부에선 무기를 직접 들기도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런 활동으로 호세프는 1970년부터 2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호세프는 자신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실용적인 자본주의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자신의 급진적 활동에 대해서는 긍지가 있다. 이 시절에 대해 호세프는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더 나은 브라질을 건설하기 위한 꿈에 동참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게 우리의 특징을 만든 건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나섰다는 게 우리들의 특징이다.”사실 호세프는 2세 좌파 정치인이다. 그는 1947년 불가리아에서 이민 온 페드루 호세프와 농장주의 딸로 학교 교사였던 지우마 제인 다 시우바 사이에서 벨라 호리존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20년대 불가리아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정치적 박해를 피해 1930년대에 브라질로 이주했다. 변호사이자 기업인으로서 성공해 재산을 모았다. 이런 핏줄과 전력의 호세프는 전임 룰라와 달리 타협과 협상 대신 원칙과 고집으로 일관했다는 평이다. 룰라가 중도우파까지 모아 탄탄한 정권을 유지한 데 비해 호세프는 자신의 고집으로 스스로 정치 영역을 좁혔다는 평가를 받는다.이런 다양한 이유와 함께 중남미 전역에서 좌파가 쇠퇴하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도 호세프의 퇴장에 일조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중남미 국가는 지난 10년 간 ‘핑크 타이드’로 불리며 중도좌파 정권이 하나의 조류를 이뤘다. 하지만 2013년 무렵부터 중남미 전체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다. 산유국 베네수엘라는 경제 실정으로 국민이 정권에 등을 돌리고 다음 선거만 기다리는 형국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브라질에서 탄핵 사태가 생긴 것이다. 핑크 타이드가 가고 이제 블루 타이드가 새롭게 오고 있다.

2016.09.0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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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는 없다

산업 일반

▎이란-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세계 불량국가들과 관계를 재개한 지 1년, 이제 그 정책의 성적표가 나왔다. 미얀마와 북한, 베네수엘라부터 이란까지 모두 미국이 화해하자며 내민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미얀마 양곤에선 아웅산 수 치가 가택연금 상태에 있고, 평양은 미사일을 쏘아대며,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는 미 제국주의를 성토하고, 테헤란은 연말로 못박은 핵프로그램 협상 시한을 묵살했다. 포용정책은 실패했다. 따라서 오바마는 이제 제재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위협을 이행하려는 태세이며 또 그래야 한다.과연 그럴까? 다시 한번 따져보자. 미국 정부는 ‘불량국가’를 낳은 세계가 사라졌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불량국가라는 용어는 1980년대 미국에서 주로 유행한 말로 냉전질서를 위협하는 비주류 국가 독재체제를 일컬었다. 곧이어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미국의 지배를 위협하는 걸림돌은 주로 ‘역사의 종말’을 수용해서 미국의 가치를 따르려 하지 않으려는 나라들이었다.‘불량국가’ 개념은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서구 가치와 이해의 기치 아래 뭉친 국제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했다. 이런 국제사회는 누가 이단이며 그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합의가 가능했다.하지만 그 국제사회는 1990년대 후반 이미 해체되기 시작했다. 중국이 일어서고, 러시아가 부흥하고, 인도·브라질·터키 등이 실질적인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저마다 나름의 이해와 가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적 가치에 따라 규정된 ‘국제사회’는 허구이며 ‘불량’이라는 용어는 미국이 고립시키려는 이단 국가뿐 아니라 미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보는 국가가 많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앞으로는 기성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그런 국가들에 맞서 미국 혼자서 당근을 내밀거나 채찍을 휘두르는 방식은 통하지 않을 듯하다. 국가나 단체가 제기하는 핵확산, 테러, 지역 불안정 위협에 대처하려면 미국의 압력에 이끌려 마지못해 움직이기보다 진정성을 지닌 국가의 연합이 필요하다.앞으로는 미국(오바마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이 자국 또는 나아가 서방의 어젠다를 위해 국제적인 지지를 끌어 모으는 일이 더는 불가능해진다. 세계는 미국으로부터 포용의 축소가 아니라 확대를 원하며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기보다 동반자 관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기존의 미국 지도력은 버락 오바마로 바뀌었더라도 조지 W 부시만큼이나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새로 국제 공동체를 구축하지 않은 채 미국 주도 아래 기존의 불량국가들을 제재할 경우 분명 역풍을 맞게 된다. 이미 서구의 제재는 불량국가들이 결속을 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얀마는 북한과 군사장비 그리고 어쩌면 핵 비밀을 거래하며, 이란은 시리아와 유대를 강화하고, 베네수엘라는 쿠바 지원규모를 확대한다.그런 비교적 힘이 약한 말썽 국가들 간의 밀월관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합법적인 (신흥) 강국들이 이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는 점이다. 브라질·터키·러시아·중국 등은 모두 미국의 불량국가 제재 외교정책에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낸다.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당시 더 즉각 반응하는 외교정책을 펼치면 기존의 서구 어젠다에 세계의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어조의 변화나 미국의 정책검토보다는 서방이나 동방에 치우치지 않고 전 세계에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를 두고 기준을 새로 정해야 한다.그리고 이런 목표는 미얀마·북한·이란 같은 나라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강대국들과 협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의 세계 위상을 재검토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래야만 세계적 위협에 대처하는 데 따르는 재정적·군사적 부담을 다른 강국들도 나눠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게 된다.오늘날 대국이든 소국이든 선량한 국가든 불량한 국가든 모두 동반자를 찾지 보호자를 찾지는 않는다. 미국은 당장 행동을 바꾸게 할 요량으로 불량국가를 응징하려 들지만 라이벌 강국들은 투자와 방위계약을 들고 그들을 찾아가 존엄과 존중에 기초한 관계를 제안한다. 미얀마에서 중국이, 이란에서 러시아가, 쿠바에서 브라질이 그렇게 하며 앞으로도 그런 사례는 계속 이어진다.그리고 유엔안보리,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등 핵심적인 국제통치기구들이 그 새로운 강국들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회의석상의 한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제재조치를 지지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신흥 강국들은 새로운 독립적 지위에 조심스러워하기는커녕 더 강력하게 자신들의 위상을 주장한다. 최근 이란을 국빈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거침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여길 권리가 없다.”이 발언은 서방세계 밖에서는 모두 힘을 모아 불량국가를 제재하자는 외침보다 더 큰 공감을 얻는다. 그 며칠 전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초대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슬람 국가 정상회담에서 이란 총리를 포옹하고 이란의 핵프로그램은 ‘평화적’ 목적이라고 강조했다.아니나 다를까, 서방 언론은 룰라와 에르도안이 민주적 가치와 결속을 저해한다고 공격했지만 이는 완전히 핵심을 벗어난 주장이다. 룰라와 에르도안 같은 중견 민주주의자들이 이란 정부의 시위대 강경 탄압이나 비밀 핵프로그램을 지지해서 아마디네자드 편을 드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누가 불량국가이며 그 대처방법을 정하는 문제에서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도(그리고 그보다 능력)를 과시하려는 목적이다.불량국가에 관한 서방의 낡은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시아의 한 구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렇다 할 서방의 개입 없이 지정학적 각축장으로 빠르게 부각되는 미얀마다. 이란은 핵프로그램 때문에 오늘날 가장 세계안보를 위협하는 불량국가일지 모른다. 수단은 집단학살을 묵과한 전력 탓에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나라일지도 모른다.번번이 사회 체제의 자멸을 자초하는 짐바브웨는 가장 짜증스러운 나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로지 압제적인 정권을 차단하기 위한 서방 전략이 가장 철저하고도 뚜렷하게 실패한 나라는 미얀마인 듯하다.20년에 걸친 미얀마 고립정책은 지금 돌아보면 그 나라의 합법적인 경제를 황폐화하고 국민의 인권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는 한편 서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중국에 문호를 개방하려고 주도면밀하게 꾸민 음모처럼 보인다.오늘날 양곤은 시간이 정지해버린 도시다. 1950년대 고물차가 인력거와 나란히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빛바랜 식민지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듯 황폐하고 버려진 도시의 빌라들 사이를 걷는 소수의 관광객에게 맨발의 어린이들이 중국산 기념품을 판매한다. 이곳에선 서방의 정책이 거의 하나도 주효하지 않았다.군사정부는 여전히 정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반체제 민주진영은 사분오열됐다. 서방의 대미얀마 정책은 전에는 주로 정권의 국내 통치행위만 대상으로 했지만 지금은 장성들이 핵협력 문제를 포함해 북한과 손잡은 의혹도 다뤄야 한다. 그렇다고 제재가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다만 완전히 역효과를 초래했다는 뜻이다. 최근 양곤의 시민단체 지도자, 사업가, 외국 외교관들과 잇따른 대화를 통해 암담한 실상이 드러났다. 중산층은 말살되고 망명을 떠났으며, 교육시스템은 국가의 인적 자본을 전혀 양성하지 못하고, 민간부문은 공동화되어 정권의 추종자들만 천연자원을 팔아서 이익을 챙긴다.나와 대화를 나눈 한 미얀마 사업가가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두 번 제재를 받는다”고 그는 탄식했다. “첫 번째는 정권에 의해, 둘째는 서방에 의해서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최근 그런 문제를 인식한 듯 “우리가 선택한 제재조치는 미얀마 정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그러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포용하려는 노력도 그들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제 미국-미얀마 관계에서 나타나는 잠재적인 해빙의 신호는 포용정책이 실효를 거둘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말해준다. 다만 서방 정책입안자들의 단기적인 필요성과 극적인 양보 요구를 충족시키는 성과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불량국가들의 입장에서 신흥 강국들은 외교적인 명분과 정치·경제적 대안 모델 역할을 한다. 미얀마의 경우, 서방의 제재는 중국과 인도로 하여금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나라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란의 경우, 서방 압력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대안 연합(러시아·중국 등)을 결성하고 제재를 빠져나가는 기술을 연마할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다.제재조치로 인해 이란 에너지 부문의 발전이 둔화되고 경제성장이 멈췄지만 정권은 제3국을 통해 금지품목을 밀거래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미국 달러 이외의 다른 통화로 그런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비서방 국가들을 초청해서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어 인프라·에너지·전자통신 같은 경제 핵심부문에 참여를 유도했다.제재 조치가 이란의 핵농축 프로그램, 그리고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지역의 꼭두각시 단체를 통한 무력행사를 저지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실패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당초 오바마 정부는 (자신과 세계에) 솔직하게 제재조치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대신 포용정책을 펼쳐서 이란의 합법적인 안보이해를 배려하면 핵프로그램의 무기화를 중단하도록 이란 정권을 설득할 수 있을지 타진했다.그러나 이제 협상진전을 위한 연말 시한을 넘기면서 오바마는 대이란 무역의 보험과 재보험을 포함해서 에너지·운송·금융 부문에 대한 ‘더 지능적인’ 종합 제재 방안을 추진하리라 예상된다. 그 목표는 다름아닌 이란 경제의 숨통을 조여 현 정권이 표면상 견디기 어려운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취지다.그러나 금수조치가 주효하려면 다른 강국들도 동참해야 한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오바마 정부는 당초부터 미국의 포용정책이 이란 정부에 통하지 않더라도 그 정책이 대단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강력한 유엔 제재의 이행에 러시아와 중국이 동참하리라고 가정했다.지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더 타협적인 미국을 선호할지도 모른다(미국이 또 다른 중동 사태에 휘말려 수십 년 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고 비싼 대가를 치르는 꼴을 양국이 가장 보고 싶어할 가능성은 당장은 제쳐두더라도). 그러나 미국의 타협적인 정책이 러시아나 중국과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바꿔놓을지는 설명되지 않았다.러시아는 이란과 통상관계를 원하고, 중국은 석유와 가스를 원한다. 그리고 양국 모두 페르시아만에 전략적인 입지를 확보해서 미국의 지배를 견제하고자 한다. 미국은 이란을 바라보는 시야를 좁혀서 오로지 핵에만 초점을 맞추는 반면 다른 신흥 강국들은 핵 문제를 이란 관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미얀마나 이란의 경우 다른 불량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에 걸친 서방 제재는 국민들을 헐벗게 만들고, 지배자들에게는 재산과 정권 안정을 주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비난에 꿈적하지 않는 정부에 전략적 영향력을 안겨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실제로 억압적인 정권을 고립시키려는 서방의 노력이 오히려 그 정권의 눈엣가시인 개혁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에게 외세개입에 맞서 단합하도록 촉구하는 명분을 주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실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불량국가 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을 실현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광범위한 경제제재를 완전히 끝내고, 전통적인 상업계층과 통상을 개방하고 자유화하며, 학생들을 교환하고, 일반 대중의 여행제한을 완화하는 방법 등이다. 무기금수와 집권 지도층의 비자 제한은 유지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정책은 신흥강국과 라이벌 강국(불량국가 국민들뿐 아니라)들의 지지를 얻고 일련의 변화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어 세계의 안전과 책임 있는 정부를 낳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이런 규모의 정책변화에는 물론 미국 정계의 반발이 가장 심할 듯하다. 미국 보수파들은 오바마가 ‘악의 축’ 국가들과 ‘타협’하려는 증거라며 들고일어날지 모른다. 진보파들은 인권 어젠다를 외면한다며 비난할 가능성이 크다.하지만 오바마가 다른 어느 미국 지도자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진실은 불량국가를 고립시키는 미국의 정책이 명백히 실패했으며 오늘날 비중 있는 강국들과 다시, 그리고 진정으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야 불량국가들의 안정과 인권상황을 개선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이런 접근법이 단시일 내에 우고 차베스의 독설이나 로버트 무가베의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김정일의 피해망상을 완화하거나, 아마디네드의 철권통치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저항을 촉구하는 그들의 외침에 덜 민감하고 그들이 (나라 안팎으로) 정통성 시비에 더 취약해지도록 글로벌 환경을 바꿀 수는 있다.정통성 시비는 시간이 지나면 어떤 정권에나 아킬레스건이 된다. 끝으로, 오바마의 포용정책이 단순히 말뿐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띠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21세기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010.02.02 13:43

8분 소요
지방분권이 활력의 힘

산업 일반

인도네시아는 이제 멕시코·브라질 등 신흥 공업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요즘 자카르타의 모습은 아시아의 여느 21세기 신흥 도시와 다름없다. 쇼핑몰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교통이 막히며 현대식 오피스타워가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이 도시가 나락에 떨어질 뻔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눈부신 발전이라 하겠다.장기 독재자인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1997~98년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 때만 해도 많은 전문가는 아시아 제3의 대국(인구 2억3500만 명)인 인도네시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오히려 단결되고 탄탄하며 상당히 민주적인 온건 무슬림 국가로 거듭났다. 경제가 워낙 잘나가다 보니 아시아의 또 다른 대국인 인도와 비교되기도 한다.양국 모두 여전히 부패하고 혼란스러우며 고통스러울 만큼 복잡하다. 그래도 두 나라 모두 매력적인 신흥 경제다. 인도는 말 그대로 개발도상국 세계의 총아라 할 만하다. 다음은 인도네시아의 차례인가? 이 나라의 경제는 지난해 6.3% 성장률을 기록했다. 주요 증권거래소는 2003년 이래 세계적 수준의 실적을 올렸고, 지난해 외국인 직접투자는 세 배 가까이 늘어 40억 달러를 기록했다.이 모든 것이 개혁으로 대형 경제의 잠재력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1990년대의 인도를 빼닮았다. 다만 외부인들은 IT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성장률이 8%를 넘어설 때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산업은 에너지, 광산, 고무·야자유·코코아 같은 농산품이다.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애칭 SBY) 대통령은 뉴스위크와 단독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 같은 큰 민주국가가 근년에 10% 성장률을 기록한 중국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인도네시아는 많은 잡지의 커버를 차지할 것이다. 실제로 이 나라는 두 가지 점에서 이미 인도보다 나아 보인다.1인당 국민소득(3348달러)이 3분의 1가량 더 높고, 정부의 긴축 재정 덕분에 세계적으로 낮은 외채 비율을 자랑한다. “동남아의 최대 경제가 10년의 구조조정 끝에 건강을 회복했다”고 CLSA 증권의 자카르타 법인 대표 겸 수석 연구원 니콜라스 카시모어가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 발전도 경제 발전만큼이나 극적이다.유도요노 대통령은 육군대장 출신이지만 2004년 중반 당선 이후 가장 효율적인 민주 지도자로 변신했다. 4년 뒤 고질적인 테러리스트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이 2004년의 쓰나미 피해를 딛고 일어서게 했다. 그보다는 인정을 덜 받긴 하지만 더 항구적인 조치는 정치권력의 분산 프로그램을 지원해 수백 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강화한 일이다.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는 포고령이 아닌 합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린다. 여기에는 약점도 있다. 중국처럼 대규모 국가 개발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유도요노는 이렇게 말했다. “지자체가 정부 프로젝트에 찬성하지 않아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같은 민주주의에서 변화·개혁·저항은 정상적이다.”인도네시아의 주요 정당들은 경제정책, 부패 추방의 필요성, 법치주의 개선, 정부의 능률 향상 등에서 기본적으로 뜻을 공유하고 있다. 자유언론, 공정한 법원, 유권자들이 뽑는 입법부 등 핵심 민주제도는 매우 튼튼하며 과거 막강한 권력을 구사했던 군부도 대체로 정치에서 손을 뗐다. 한편 지방자치가 변두리 지역의 경제발전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동남아의 전형적 모델과 대비된다.“미국이나 영국 혹은 홍콩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지닌 잠재력의 규모를 이해하거나 이 나라에 자카르타 말고도 얼마나 많은 것이 더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카시모어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GDP 가운데 수도권이 차지하는 부분은 15%에 불과하다. 아시아 다른 나라의 수도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작은 비율이다. 인도네시아는 수도권의 경제적 비중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처럼 크지 않다. 인도네시아가 얼마나 멀리,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가를 떠올린다면 이 나라가 이룬 성취는 더 인상적이다. 10년 전 수하르토의 신질서(독재자 일당에 절대 권력을 부여한 고도로 중앙화된 체제)가 무너지고 극심한 금융 붕괴가 이어지면서 IMF 체제를 맞았다. 인도네시아는 또 분리독립주의자들의 격렬한 저항, 기독교-무슬림 폭력사태, 2002년의 발리 폭발사고로 대변되는 이슬람 급진주의를 맞았다.나라가 통째로 무너질 듯이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국립대학의 경제학자 앤드루 매킨타이어와 아시아재단의 더글러스 라메이지가 최근 보고서에서 주장했듯이 오늘날 관측통들은 인도네시아를 “인도·멕시코·브라질처럼 국민소득이 중간 수준인 대형 민주주의 개도국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도전과 씨름하는 정상적인 나라”로 보고 있다.어떤 점에서 보면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는 여타 국가들보다 오히려 발전했다. 지방분권의 경우를 보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방·치안·재정·외교·사법제도를 감독한다. 그러나 인도 정부와 달리(2001년과 2006년 통과되고 유도요노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두 차례의 ‘빅뱅’ 개혁안 덕분에) 대부분의 나머지 통치행위는 33개 지방과 500개에 이르는 지자체와 협의해야 한다.그 지자체들에서는 선출직 지도자들이 정책을 세우고 전체 공무원의 3분의 2를 관리하며 학교와 경제발전 등 모든 것을 감독한다. 세계은행의 연구원 볼프강 펭글러와 베르트 호프만이 곧 출간될 보고서에서 설명하듯이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중앙화된 나라에서 분권형의 나라로 바뀌었다.”그것이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돈의 흐름을 살펴보면 된다. 2001년 시행된 새 회계제도 아래 각 지역은 국가 예산의 막대한 몫을 배정받아 어느 정도 자기네 입맛대로 쓸 수 있다. 가난한 오지가 머릿수로 따져 가장 많은 돈을 받는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자원 개발로 얻는 세입을 정부와 나눠 갖는다.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지자체들이 쓰는 돈은 전체 공공지출의 36%로 모든 개도국의 평균치 14%와 비교된다. 각 지역은 자기네가 원하는 정책목표를 따로 추진해도 된다. “이것은 진정한 혁명”이라고 이 나라에서 세계은행의 지방자치 계획을 지휘하는 에르만 라만이 말했다. 진취적 지도자를 둔 지역은 실험장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혁신적인 부패추방, 보건, 경제성장 계획들이 출현했다.한편 SBY는 거시경제적 질서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그 과정을 가능케 했다. 그가 지방자치를 지원하자 분리독립주의, 급진주의, 지역사회의 폭력은 발을 붙이지 못했다. 지방의 개척자 가운데 가마완 파우지가 있다. 2001년 웨스트수마트라의 솔록 지역에서 권력을 쥐자마자 불투명하고 복잡한 과거의 관청과 브로커 조직망을 대체하는 원스톱 행정 서비스센터를 만들었다.부패 근절의 수단으로 모든 행정 서비스를 한 지붕 밑에 모아 정액 수수료를 명시하고 자동납부를 촉진하며 신속봉사를 보장하자는 개념이었다. 그것이 주효했다. 그 뒤로 이 모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국제투명성기구는 부패가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크게 줄었다고 보고했다. 혁신적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명성을 얻는 지방 지도자도 있다.관광지 발리섬의 아홉 개 섭정 통치구 중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다스리는 게데 푸트라야사는 만인 의료보험과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걸고 2001년 선거에서 당선됐다. 무상교육은 상대적으로 쉬웠다(그가 월사금 5000루피아를 면제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방 예산의 범위 안에서 보다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옛 체제에선 자금이 병원과 지방 관리들의 몫이었고 이들은 뇌물을 주는 회사의 약품을 구입해 쌓아두곤 했다. 푸트라야사의 혁신은 각 가정이 병원에서 실제로 제공받는 서비스를 보상하는 방식의 무료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것이다. “크게 절약되는 돈은 없지만 모두가 보험 혜택을 받으며 더는 부패가 없기 때문에 훨씬 더 능률적”이라고 푸트라야사가 말했다. 그런 개혁이 경제성장을 자극했다. 푸트라야사의 의료보험과 교육 계획(아울러 일거리가 부족한 농민을 일본에 보내는 취업알선 프로그램)으로 이 지역의 빈곤율은 4분의 1로 줄어든 고작 5.5%에 그쳤다. 지방자치의 개선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세계적 농산품 붐의 큰 수혜자가 되기도 했다.CLSA의 계산에 따르면 4대 작물(고무·코코넛·야자유·코코아)의 총가격이 2000년의 23억 달러에서 2008년에는 190억 달러(추정치)로 올랐다. 술라웨시섬의 가난한 고론탈로 지방의 주지사 파델 무하마드 같은 지도자들 덕분이다. 그는 농업 컨설턴트 팀을 배치해 선거구 유권자들을 이 나라 최고의 옥수수 재배농으로 바꿔놓았다. 보조금을 통해 농민에게 종자·비료·임대 기계를 제공했다.작물 생산을 늘리는 마을 지도자에게는 현찰로 상금을 줬다. 2002년 이후 고론탈로의 빈곤율은 49%에서 29%로 줄었다. 물론 지방분권에 문제도 있다. 분석가와 감시단체들은 500개 지자체의 지도자 가운데 뛰어난 이들이 유도요노 집권기에 들어서 극소수에서 50명 정도로 늘었지만 이들은 국가적 개혁과 프로젝트를 봉쇄하는 데도 가끔은 특출난 능률을 발휘한다고 말했다.그 결과 발전이 “혁명적이지 못하고 점진적”이라고 라메이지가 말했다. 예컨대 자카르타를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와 잇는 트랜스자바 고속도로는 2009년 완공을 목표로 2004년 착공했지만 지방의 반대에 부닥쳐 10% 공정밖에 진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이미 동남아와 이슬람 세계에서는 안정의 등대 역할을 한다.그들의 반테러 캠페인(인도네시아는 급진적 종교학교를 폐쇄하고 효율적인 테러 대항 부대를 설립했으며, 의심스러운 세포를 강경 단속하면서도 인권 유린은 피해 갔다)은 이 지역에서 귀감으로 여겨진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인구대국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맹목적 신앙, 불관용, 극단주의의 대안을 예시했다는 점에서 모로코에서 민다나오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 시사하는 바 크다.“인도네시아는 우리가 세계 도처에서 보는 급진주의의 무풍지대는 아니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온건하고 관용적인 나라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유도요노가 말했다. “그것이 문명의 충돌을 막아준다.”유도요노 대통령은 내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할 공산이 크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분석가들은 정책의 급변을 예상하지 않는다. 자카르타의 주요 정당들이 모두 현재의 개혁 청사진을 찬성하기 때문이다. 인도조차 중국을 따라잡을 방법을 놓고 그런 식의 안정적 합의를 누리지 못한다.

2008.10.21 11:35

6분 소요
친환경 시대의 ‘녹색 리더’

산업 일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따라서 환경보호 업적으로 칭찬받을 일은 없을 듯하다. 사실 이제까지 부시는 녹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1년 대통령 취임 후 첫 통치행위 중 하나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해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세계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또 알래스카 국립북극야생보호구역의 석유 채굴 허용이 국가안보에 꼭 필요하다며 의회를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시의 색깔이 바뀌었다. 완전한 녹색은 아니어도 적어도 푸르죽죽하거나 연두색 정도는 된다. 4월 중순 부시 대통령은 미국에 부과된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또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동차 연비 기준을 강화하고, 대체연료를 사용하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이렇게 부시가 임기 말에 와서 환경 문제에 대해 심경 변화를 일으킨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미국 내 여론 때문이다. 환경에 대한 우려가 미국인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07년 퓨 세계 태도조사 프로젝트(Pew Global Attitudes Project)에 따르면 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가 환경 문제라고 인식하는 미국인이 37%나 됐다(5년 전보다 61% 증가한 수치다). 부시 대통령은 이런 환경보호주의 물결을 외면하면 역사책에서 세계가 직면한 환경 위험을 무시한 지도자로 낙인찍힐 위험이 크다는 점을 깨달았다. 차기 미국 대통령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도 모두 탄소 배출을 줄이는 총량거래제를 포함해 기후변화를 되돌릴 야심 찬 계획을 내놓았다. 환경 문제가 갑자기 주목 받는 것은 비단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퓨 세계 태도조사 프로젝트에는 미국 말고도 46개국의 조사 결과가 포함됐다. 그중 3개국(요르단, 레바논, 아이보리코스트)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2002∼2007년 환경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서유럽 사람의 45∼66%, 중국인의 70%가 환경 문제를 지난해 최고의 위협으로 꼽았다. 인도, 브라질 등 영토가 큰 개발도상국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이유는 과학자들의 종말론적 예측이 쇄도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환경보호 캠페인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의 홍보 덕분일지도 모른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친환경 지도자를 원하고, 국민도 과거와 달리 지구가 처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할 태세다. 아울러 교토의정서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기후회의도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환경 문제를 중시한다는 점을 입증하고 싶은 지도자라면 지구의 북쪽을 바라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청정기술보다는 대구(大口)로 더 잘 알려진 아이슬란드에선 전력의 80%가 하천(수력)이나 땅속의 증기, 더운 물(지열)을 이용하는 발전 등 재생가능 에너지원에서 나온다. 수십 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게이르 H 하르데 아이슬란드 총리는 이제 그런 대체에너지 기술을 해외로 수출하고 싶어 한다. 아이슬란드의 기업들은 정부 지원 아래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을 지부티, 중국, 남부 캘리포니아 등 세계 각지로 이전한다. 물론 아이슬란드는 지열이 풍부하고 인구가 적은 아주 특이한 경우여서 이 기술이 다른 지역에서 효과를 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를 연구함으로써 적어도 아이디어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환경을 위해 국민에게 소득의 일부를 희생하도록 하는 것은 일본이나 영국보다 스웨덴에서 더 쉽다. 서유럽과 일본이 환경기술에서 세계 여타 지역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건 사실이지만 구태의연한 정치가 발목을 잡는다. 환경운동가들이 촉구하고, 정치인들이 입에 발린 말로 주창하는 조치 가운데 상당수는 로비스트와 복지부동하는 관료들의 강한 반발에 부닥쳤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환경보호를 자신의 상징적 이미지로 삼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과 유럽연합에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조치를 제안했다. 하지만 메르켈과 블레어의 후임 고든 브라운 현 영국 총리는 그런 친환경 의제를 실행에 옮기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브라운은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소와 히스로 공항의 새 활주로 건설을 지지했다가 거센 비난을 불렀다. 메르켈은 독일의 막강한 석탄, 철강, 시멘트 업계에 탄소배출 감축을 강요하기가 어렵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프랑스의 친환경 대통령이 되려고 애썼지만 최근 유전자 변형 식품을 둘러싸고 환경운동가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도 환경을 우선 과제로 삼았지만(오는 7월 일본이 주최하는 G8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예정) 아직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외 다른 지역, 특히 아시아에서는 변화의 욕구가 더 거세다. 호주의 최근 총선은 ‘정치의 기후’가 얼마나 변했는지 잘 보여줬다. 호주에서 둘째로 장기 집권한 존 하워드 총리는 이번 총선에서 패했다. 그는 친기업 정책으로 이름을 날렸고, 호주의 석탄산업을 옹호했으며 탄소배출거래 제도를 “아무런 생각 없이 내놓은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그의 라이벌인 케빈 러드 노동당 후보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더 잘 호응했다. 교토의정서 비준을 공약으로 내세워 큰 표차로 하워드를 눌러 이겼다. 한국의 이명박 신임 대통령 역시 환경문제를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듯하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의 최대 기업 중 하나인 현대건설 회장에 올라 한국의 산업화에 앞장섰다. 그동안 한국은 철강, 석유화학 등 중공업 부문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다른 노선을 택했다. 2002∼2006년 서울시장 재직 중 수도 서울을 친환경 도시로 만들어 전국적 지명도를 높였다(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1970년대 콘크리트 도로로 복개됐던 청계천의 복원이다). 한국 국민도 환경 우선주의에 동의한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53%가 환경보호가 개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같은 아시아 지도자들은 아직도 한 발을 구세계에 담그고 있다. 경제성장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척도인 곳을 말한다. 중국이 특히 그렇다. 어떤 잣대로 봐도 중국의 생태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제 후진타오 주석도 중국의 환경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충분히 인식하는 것 같다. 또 환경 피해가 좀 더 진행되면 경제가 비틀거리고 사회불안이 촉발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실히 아는 듯하다. 후 주석은 에너지 효율성 개선을 위한 야심적인 정책을 선보였고, 지속가능성과 재생을 기초로 한 ‘순환경제’ 구상을 내놓았으며 “다른 나라보다 한 발 앞선”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홍콩의 공공정책 연구그룹 시빅익스체인지의 CEO 크리스틴 로가 말했다. 중국처럼 급속히 산업화하는 나라에서는 환경운동의 원동력이 현지의 환경오염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국제 환경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후변화 대책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그런 지엽적인 감정을 억제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과학·기술·공공정책 프로그램 책임자 존 홀드런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후변화가 현 시대 최대의 환경문제”라고 말했다. 과거 개도국들은 기후변화를 선진국들의 산업화에 따른 산물(일리가 있다)로 인식하고, 자신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경제개발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해 발리에서 열린 세계 기후회의에서는 “그런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고 홀드런이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가뭄, 홍수, 빙하 해빙 등으로 기후변화가 개도국에서도 이미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홀드런은 “이제 그들도 ‘기후변화가 우리에게도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에 그 해결책에 우리도 포함돼야 한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기후변화를 되돌리는 일은 이제 각국 지도자들의 환경보호 의지에 대한 시험대가 됐다. 사실 정치인들은 새로운 진실에 즉각 반응하는 현실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예컨대 호주의 러드 총리는 오래된 나무로 이뤄진 숲의 벌목을 지지한다. 중국의 지도부는 2020년까지 30기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풍력발전 시설을 설치할 계획이지만 2006년 90기가와트를 추가로 생산하는 석탄연료 화력발전소들을 건설했다. 이런 양면성이 ‘녹색 시대’의 특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조지 W 부시에게 물어보라. With WILLIAM UNDERHILL, B. J. LEE, STEFAN THEIL and MELINDA LIU

2008.05.14 10:26

5분 소요
힐러리 클린턴과 엘리자베스 1세

산업 일반

여왕은 쳐다보는 존재이지 만지는 대상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골든 에이지(Elizabeth: The Golden Age)’ 초반부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케이트 블란쳇 분)은 재미없는 데이트 상대 때문에 따분해졌다. 주위에선 궁전의 신하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두 사람을 지켜본다. 유럽 대륙의 왕가에서 건너온 구혼자는 그런 구경꾼들의 시선에 당황해하며 말까지 더듬는다. 언제나 친절한 여왕은 그에게 충고를 해 준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이 ‘유리 칸막이’ 안에서 산다고 상상해야 한다는 충고다. 그러면 안전해지고 군중으로부터 차단된다고. “그러면 그들은 내 몸에 손대지 못해요. 당신도 그렇게 상상해 보세요.” 멋진 궁중 의상들만 없다면,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는 위기의 영국은 오늘날의 미국과 매우 비슷하다. 국가는 심각하게 분열됐고, 국민은 양대 권력집단 사이에서 동요한다. 해외로부터는 어둠의 세력이 도전해 온다. 또 국민은 하나의 대제국이 부상하고 또 다른 대제국이 몰락하는 운명의 시간이 임박했다고 걱정한다. 여성 지도자는 한편으론 여성다움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론 여느 남성 못지않게 통치를 잘한다는 점을 증명하려 애쓴다. 관객들은 ‘골든 에이지’를 보면서 힐러리 클린턴을 떠올릴지 모른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유리 칸막이 속에서 살아가듯 보일 때가 많은 여성이다. ‘골든 에이지’는 여성과 권력을 소재로 하는 우리의 일상 대화가 얼마나 단세포적이고 무의미한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한 장면에서 여왕의 점성가는 “여자 군주들”이라고 언급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곧바로 “여성으로 태어난 군주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꾼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듣는 둥 마는 둥 한 표정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점성가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경우 빌 클린턴에게 어떤 호칭(First Gentleman? First Husband? First Laddie?)이 붙을지를 놓고 벌써 얼마나 많은 언론 지면이 낭비됐던가? 엘리자베스의 슬픈 여성 전사 같은 이미지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다. 승리를 거둬 의기양양해 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또 여러 세대를 거쳐 칭송 받으면서도 개인적 사랑에 목말라 한다. 사실 우리는 여성 지도자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강요한다. 대처 영국 총리를 기억해 보라. 제1차 걸프전이 임박했을 때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에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아니다”고 독려하던 여걸의 모습 말이다. 또 우리는 뒤늦게나마 엘리자베스 2세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망했을 때도 왕실에서 영국인답게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던 모습을 기억해 보라. 그리고 힐러리도 있다. 미국 최고의 권좌를 추구하면서 언제나 감정을 감추려 애쓰는 정치인 말이다.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 때문에 힐러리는 차가운 로봇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골든 에이지’를 보면 힐러리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매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우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부여된 정서적 공간보다 더 좁은 공간을 힐러리에게 허용한다. 처녀 여왕은 “영국”과 결혼하고, 여성적 부드러움을 자신이 통치해야 할 나라를 위해 희생하며, 국가의 어머니인 동시에 아내였다. 그러나 현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힐러리가 확신에 차서 여왕 같은 사랑을 쏟아 붓기는 불가능하다. 그녀는 지금도 ‘완벽한 힐러리’라는 냉소적인 대중적 이미지에 시달린다. 힐러리는 엘리자베스의 가장 강력한 도구인 분노를 활용하기도 어렵다. 영화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적인 스페인의 필립 왕이 보낸 대사에게 자신을 가지고 놀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왕의 위엄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그 장면에서 그녀는 이렇게 으름장을 놓는다. “짐 역시 바람을 움직일 능력이 있소. 짐의 몸속에는 허리케인이 들어 있소. 그대들이 감히 짐을 시험하려 들면 그 태풍으로 스페인을 쓸어 버리겠소.” 힐러리 역시 자신의 강인한 면모를 신속하게 보여 줄 능력을 지녔다. 어느 토론에서 버락 오바마가 독재자들과 직접 대화하겠다고 말하자 힐러리가 그를 질타하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그녀에게는 보수파 언론의 풍자만화에서 묘사된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전등을 집어 던지고 남성들을 파멸시키려 들며,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격분한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성난 여성’이라는 이미지다. 유세 과정에서 힐러리는 분노를 약간 드러낸 뒤에는 곧바로 부드러운 모습을 되찾는다. 지난 여름의 한 토론회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난 15년간 보수파를 상대로 싸워 왔다. 그런 만큼 여러분이 그들을 공략할 방법을 터득한 승리자를 원한다면, 내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러나 힐러리는 처녀 여왕의 무기 중 하나인 ‘성적 매력’을 좀 더 거리낌없이 사용해야 한다. 블란쳇이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모든 통치행위에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한다. 심지어 점잔 빼는 월터 롤리 경조차 여왕의 매력에 넘어가 경망스러운 볼타춤을 추게 된다. 그러나 힐러리로선 대중 앞에서 그런 교태를 부리기가 훨씬 더 어색할 듯하다. 남편의 백악관에서 겪은 체험을 통해 그녀는 정치인이 자신의 성적인 측면을 너무 많이 드러내면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음을 깨달았다. ‘골든 에이지’의 끝 부분에서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뒤 번영하는 대영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끈다. 자신의 유리 벽 뒤에서 여왕은 승리를 구가하고, 잔혹해지며, 처절한 고독을 느낀다.

2007.12.0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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