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오콘의 부활
▎브렛 스티븐스
지난해 9월 미국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운동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이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용히 치러졌다(아니, 어쩌면 바로 그 명성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이 참석하리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체니도 다른 공화당 지도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톨이 공화당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인상마저 풍겼다. 그는 자신이 한 때 ‘아둔한 정당’이라고 불렀던 공화당에 지적인 정통성과 힘을 실어준 실력자였다.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에선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2012년 대권을 노리는 공화당 인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세라 페일린도 참석하지 않았다(크리스톨의 아들 빌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페일린을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밀었다). 참석자는 약 200명이었다. 사실 적은 수는 아니다. 그러나 웅장한 아다스 이스라엘 유대교 회당이었기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맨 뒤의 진홍색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다스 회당은 1951년 어빙 크리스톨과 같은 세대인 미국의 유대인들이 마침내 미국에 상륙해서 한동안 눌러앉을 계획이라고 선언한 시기에 세워졌다. 아다스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가장 막강한 보수 유대교 회당이다. 역대 미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들이 전부 그 회당에 다녔다.
그러나 크리스톨의 장례식에선 저명인사들의 추도사가 이어지지도 않았다. 랍비와 크리스톨의 아들 빌만이 단상에 섰다. 그들의 추도사마저 짤막했다. 영결식은 약 40분 만에 종료됐다. 그러나 크리스톨이 창시하고 이끌어온 신보수주의(한때 그는 그 이념을 지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이라고 불렀다)의 저력은 언제나 그 머릿수가 아니라 열정에서 나왔다.
크리스톨의 관은 연단 아래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 사이에 눈에 잘 띄지 않게 놓여 있었다. 만약 그가 관에서 일어나 누가 참석했는지 살펴봤다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듯하다. 좌석을 메운 사람들은 전부 그의 자손들이었다. 생물학적 자손 만이 아니라 지적인 자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빌 크리스톨이 편집인으로 있는 정치 잡지 위클리 스탠더드처럼 네오콘(neocon: neoconservative의 줄임말로 신보수주의 운동을 지지하거나 주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이 직접 운영하는 조직, 또는 워싱턴 포스트·월 스트리트 저널처럼 네오콘과 관련이 있는 쟁쟁한 언론사에서 일하거나, 미국 기업 연구소(AEI)를 비롯해 네오콘이 포진해 있는 정책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모처럼 공식 석상에 나온 폴 울포위츠 전 국방 부장관, 폴 브레머 전 이라크 최고행정관 등 이라크 전쟁에 직접 관련된 얼굴들도 비쳤다(아무튼 이라크전은 네오콘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닌가?) 워싱턴 포스트의 열정적인 네오콘 칼럼니스트 찰스 크라우트해머와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보였다.
그 두 사람은 수년 동안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AEI가 주최한 2004년 ‘어빙 크리스털 강연회’에서 크라우트해머가 제시한 이라크전 낙관론에 후쿠야마가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톨의 죽음이 그들을 잠시나마 한자리로 불러들였다(하지만 나란히 앉지는 않았다).
후쿠야마는 네오콘으로서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네오콘과 결별했다가 뉘우치고 다시 돌아왔다. 저명한 언론인 조지 F 윌처럼 신보수주의 운동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공화당 골수파도 크리스톨의 장례식에 공손하게 정좌했다(윌은 이라크전이 엄청난 실수라고 주장했다). 아들 빌 크리스톨의 추도사는 평소와 달리 정치색이 없고 심지어 상냥하기까지 했다.
▎I 루이스 ‘스쿠터’ 리비
하지만 신보수주의 운동의 줄기찬 확산에 만족을 표했다.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구름떼처럼 많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 중엔 어빙 크리스톨처럼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다가 특정한 계기로 인해 우익으로 선회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빌 크리스톨처럼 선대로부터 그 신념을 물려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사가이자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케이건, 네오콘 기관지로 불리는 코멘터리지의 편집인 존 포도레츠 같은 전통적인 보수파에겐 ‘네오(neo: 새롭다는 뜻)’란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 각자는 신보수주의 운동 창시자들의 2세다. 사실 미국 정치에서 이들처럼 세습적인 파벌은 없다. 이스라엘의 우익 리쿠드당의 사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정의와 비유가 정확하진 않지만 네오콘과 리쿠드는 공통점이 많다. 종교와 정치, 세계관을 종종 공유하며,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그런 피해의식 때문에 그들은 모든 일에 의심이 많고, 호전적이며, 세상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또 수십 년 동안 정치적 황야에 유배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정상적인 세대 간 갈등을 거부하고 위풍당당한 부친들을 신봉하는 ‘왕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날 아침의 장례식에서 빌 크리스톨이 어빙의 업적을 찬양하려고 일어섰을 때 그는 사실상 왕위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크리스톨이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나흘 뒤인 영결식 날 구글에서 ‘neoconservative’와 ‘death’를 검색해 봤다. 오랫동안 소문으로 무성했으며, 일각에선 고대하고 기뻐하던 신보수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부고’가 무수히 떴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신보수주의는 이제 한물갔다는 이야기였다.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네오콘의 사상은 이라크의 모래 속에 파묻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부고가 오보인 경우도 종종 있다. 사실 현재로선 네오콘이 부활한 듯하다. 우선 AEI의 프레드릭 케이건(로버트 케이건의 동생)이 이라크 미군 증파를 고안하고 밀어붙여 이라크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더욱 최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네오콘의 편으로 돌아선 듯하다(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는다). 처음에 오바마의 외교 정책은 뉘앙스, 다변화, 상호의존을 중시했고 스타일 면에서는 저자세, 자기비판, 회유, 평등한 입장에서의 합의를 근간으로 했다. 그런 접근법은 네오콘의 이념과 상반됐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고 네오콘들은 말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첫째 증거는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 3만 명을 추가 파병한다는 사실이다. 주요 네오콘이 바라는 수준에 거의 육박하는 규모다. 둘째 증거는 오바마의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이었다. 무력 사용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란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반체제 인사에게 힘을 실어줬으며, 선과 악의 대결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네오콘들은 오바마 연설의 요지가 놀라울 정도로 자신들의 성미에 맞다며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성탄절에 나이지리아의 한 청년이 속옷 하의에 폭탄을 숨기고 디트로이트 상공에서 미국 여객선을 폭파하려 했다. 그러자 네오콘은 ‘거 보라’며 자신들의 강경한 대테러 전략이 더욱 옳다고 생각했다.
성탄절 자폭테러 기도에 대한 오바마의 초기 반응을 두고 빌 크리스톨을 비롯한 주요 네오콘이 너무 미온적이라고 평했다. 그러자 오바마가 더욱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크리스톨은 이제야 오바마가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선언했다. 아버지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어빙 크리스톨은 오래 전에 ‘네오콘’을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진보주의자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페이스
“오바마를 칭찬하든 비난하든 간에 네오콘은 승승장구하는 추세”라고 제이컵 하일브런이 말했다. 그는 보수 잡지 내셔널 인트레스트의 수석 편집자이며 ‘네오콘의 부상(They Knew They Were Right: The Rise of the Neocons, 2008)’이라는 책을 썼다. “네오콘은 오바마가 아프간 병력 증파를 수용하도록 설득했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무르다’는 비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도록 만들었다.
어느 쪽이든 오바마는 네오콘의 구미에 맞춘 셈이 됐다.” 이제 오바마가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의 민주당 패배로 더욱 허약해졌기 때문에 그 추세가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네오콘의 그런 고집과 끈기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역사가들이 지적하듯 네오콘이 표방하는 신념의 뿌리는 미국의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 이주한 청교도 집단의 지도자 존 윈스롭에서 시작해 에이브러햄 링컨, 우드로 윌슨, 존 F 케네디로 이어졌다. 선과 악의 투쟁으로 요약되는 마니키안(Manichaean) 세계관, 선교사 같은 열정, 거의 맹목적인 애국주의,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can do’정신, 뉘앙스를 참지 못하는 성격 등을 가리킨다.
물론 지금은 그들의 고유한 색이 바랬다. 이제는 자신들을 ‘네오콘’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른다(실제로 대표적인 네오콘인 울포위츠와 리처드 펄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네오콘’이라는 명칭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아직은 무대에서 사라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오콘의 종언을 섣불리 선언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신보수주의 운동의 이력을 되돌아봤다. 1930년대 말 뉴욕 시립대의 구내식당 한 구석에서 신보수주의 운동이 탄생한 이야기[당시 젊은 유대인 지식인들은 트로츠키주의(사회주의 혁명)의 다양한 분파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파시즘이 자유 세계를 위협하면서 그들이 뉴딜 민주당원이 된 과정, 1960년대 들어 복지와 인종 문제에서 린든 B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에 실망하면서 우익으로 이동한 과정 등.
그런 이념에 계속 불을 지펴 레이거니즘까지 이르게 한 사람이 바로 어빙 크리스톨이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코멘터리지의 편집인 노먼 포도레츠라는 다른 네오콘 거목의 주도로 이 운동은 주로 외교 문제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소련과의 데이탕트(긴장완화)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아랍 독재자들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조지 F 윌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 국내적으로 폄하했던 호전적인 개입주의를 국제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이 마지막 노선 변경에서 네오콘은 ‘미국의 독보성(American exceptionalism)’을 내세웠다. 미국은 도덕적 차원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이며, 따라서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전통 보수주의보다는 진보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들은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를 부도덕하고 냉소적이라고 경멸하면서, UN 같은 국제기구를 부패하거나 겁이 많다며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세계 전체에서 문제를 예견하는 동시에 (필요하면 군사력을 사용해서) 선제 조치를 취하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촉구했다.
레이건 시절 국무부 부차관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수석 보좌관을 지냈으며 현재 케임브리지대 선임 연구원인 스테펀 핼퍼는 네오콘의 그런 정책을 두고 “험비(군용 지프) 뒷문으로 민주주의를 배급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네오콘의 수그러들지 않는 영향력을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는 공화당 내부에서 그들이 일으키는 좌절과 분노일지 모른다.
네오콘이 표적으로 삼은 인사 중 다수(키신저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등)는 네오콘이라는 용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네오콘 일각에선 키신저도 자신들의 그룹에 들려고 애썼다고 놀린다). 공화당의 자유의지론자 중 한 명은 네오콘을 “기식자”라고 부른다. 그는 네오콘의 모험주의 외교 정책을 혐오하며(특히 비용 문제 때문이다), 지난 대선과 상·하원 선거의 공화당 패배를 그들 탓으로 돌린다.
▎데이비드 프럼
네오콘은 독자적으로는 표심을 잡을 역량이 없기 때문에 예컨대 조지 W 부시 같은 거목에 빌붙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오콘은 익명의 가면 뒤에 숨은 집단이라고 그는 격분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계속 재발하는 전염병”에 비유하며 그들의 지구력과 실효성에 탄복하기도 한다.
“정말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자신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힘이 얼마나 센지,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리고는 사람들이 그들에 관해 글을 쓰도록 만든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책이 큰 혼돈을 야기했다는 인식이 퍼지면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존재마저 부정한다. 그런 나쁜 결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자신들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며 아주 야비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은 모두 반유대주의로 몰아붙인다.”
극우 논객 패트릭 뷰캐넌은 “진정한 보수주의 운동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네오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앙심을 잘 품고 협력적이지 않다. …한번 틀어지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뷰캐넌의 설명에 따르면 네오콘은 1980년대에 우익의 세계에 교묘히 스며들어 자금력으로 공화당의 지적인 기반을 탈취했다.
그런 다음 자신들의 정교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좌익의 어떤 조직보다 자금이 풍부하고 호전적이며 획일적이다. 신보수주의 운동의 진원지는 미국 기업 연구소(AEI)이지만 허드슨 연구소(부시 행정부에서 상처를 입은 네오콘 더글라스 페이스와 I 루이스 ‘스쿠터’ 리비의 피난처다)와 민주주의 수호재단(FDD: 클리퍼드 메이가 운영한다) 같은 다른 조직들로 뻗어나갔다.
신망 높고 전통 깊은 미 외교협회(CFR)의 경우 네오콘은 그 단체의 외교와 협상, 온건 노선, 고매함이라는 가치를 끔찍이 싫어한다. 그런데도 CFR은 네오콘 두 명을 받아들였다. 군사 역사학자 맥스 부트,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관리로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관련해 의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가 댄 퀘일 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빌 크리스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사면 받은 엘리엇 에이브럼스다.
네오콘의 비판자 중 한 명인 스티븐 월트(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면피 재주가 뛰어나다. 공직자로서 일을 완전히 망쳤거나 기고문에서 주장한 내용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에 대한 진정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곧바로 AEI나 위클리 스탠더드지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자기 주장을 펴고 토크쇼에 등장한다.”
하지만 월트도 네오콘의 지구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아무리 신용을 잃어도 계속 총공세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키진 않지만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버트 케이건, 랜디 슈네만, 게리 슈미트 같은 네오콘은 지난 대선 당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브렛 스티븐스, AEI의 프레드릭 케이건과 대니얼 플레트카, 외교정책구상(FPI: 이 역시 빌 크리스톨이 만든 조직이다)의 제이미 플라이와 댄 세너 같은 2세 또는 3세 네오콘 논평가도 현재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이루는 폭스 뉴스 시청자들은 엄밀히 말해 네오콘은 아니지만 호전적인 대외 정책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네오콘과 세계관이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낸 빈 웨버는 “신보수주의는 여전히 공화당의 외교 정책 입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키신저, 스코크로프트, 콜린 파월, 제임스 베이커 같은 ‘현실주의파’는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 CFR의 리처스 하스 같은 극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현실주의파는 마치 금욕주의자들처럼 자손 번식이 불가능하거나 그럴 마음조차 없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곧 출간될 신보수주의에 관한 책을 쓴 저스틴 베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상가들에게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현실주의적 계산보다는 네오콘의 이상적이고 애국적인 이념이 구미에 더 맞는다. 젊은 현실주의자가 되는 게 뭐가 재미 있겠는가?” 한편 뷰캐넌이 이끄는 공화당의 극우 보수주의는 이미 시들었다. 고립주의적이고 구식이기 때문이다. 위클리 스탠더드의 객원 기자이기도 한 맥스 부트는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체니
“극우파 대다수는 괴짜 자유의지론자들이다. 정신 나간 신(新)남부연합주의자들이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인 동시에 외국인 혐오주의자들이다. 네오콘은 인간 짐승으로 불리며, 아기들을 산채로 먹지 않게 하려면 그들을 우리에 가둘 수밖에 없다는 욕을 먹는다. 하지만 보수주의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네오콘은 실제로 상당히 중도 노선에 속한다. 뉴트 깅그리치파, 러시 림보파, 숀 해니티파 등 공화당 전체를 아우른다. 공화당원들은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심적으로 지지한다.“
네오콘이 실제로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통계를 내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을 엉큼하고 음모를 좋아하는 집단으로 보는 비판자들은 경박스럽게도 그들의 수를 64명, 17명, 아니면 6명이라고 주장한다. 때로는 네오콘은 그보다 수가 더 적고 더욱 배타적인 듯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코멘터리지가 주최한 알래스카 크루즈 행사에 등장한 연사 8명 중 절반이 포도레츠 가문이었다(가장인 노먼 포도레츠. 아내 미지 덱터, 아들 존, 사위 엘리엇 에이브럼스).
코멘터리지에서 존 포도레츠는 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자 비판자들은 아니나 다를까 족벌주의와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 배려 정책으로 네오콘이 혐오해야 마땅하다)의 냄새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확히 누가 네오콘에 들 자격이 있는지 따지는 일은 매우 성가신 문제다. 특히 사람들은 네오콘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갖는다.
또 그렇게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며 시대에 뒤처졌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네오콘이 누구누구라고 밝히는 일을 반유대주의적 비방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네오콘, 또는 그렇게 쉽사리 인식되는 사람들은 대개 유대인이다. 물론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 진 커크패트릭, 존 볼튼 등 예외도 많다.
정중한 자리에선 네오콘의 유대인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네오콘과 함께 ‘더러운’ ‘전쟁광’ ‘유대인놈’ 같은 욕설과 민족 비하적인 단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맥스 부트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버클리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다른 여러 네오콘과 달리 피해의식에 젖어 유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니다.
부트는 이렇게 말했다. “네오콘이라는 용어는 나 자신 또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리쿠드, 빌데르베르크 그룹(Bilderberg Society: 미국과 유럽의 정계, 재계, 왕실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다양한 국제·정치·경제 문제를 토의하고 정책을 짜는 모임), ‘삼변회’(Trilateral Commission: 프리메이슨이 조직한 비밀 단체), 영국 여왕 등과 연결된 부도덕한 트로츠키파 도당의 일원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이다.”
네오콘 사이에서도 뜻이 서로 다르며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강조했다. “은밀히 모여 피해 대책을 세우고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회사를 고용하는 네오콘 중앙 위원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네오콘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CFR 회장을 지낸 레슬리 겔브는 지난 35년 동안 네오콘이 실수를 인정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AEI의 데이비드 프럼과 코멘터리지의 조슈어 무라브치크 같은 사람들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실수 인정에 근접했다. 무라브치크는 “약간 잘못됐든 완전히 망쳤든 간에 우리는 이라크전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딕 체니처럼 네오콘이라는 명칭이 대수롭지 않게 따라붙는 일부 인사는 종교적으로, 지적으로, 이념적으로, 행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네오콘의 본류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네오콘의 시각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로 알려졌다(체니의 딸 엘리자베스는 빌 크리스톨과 함께 대테러전의 강경책을 촉구하는 단체 KeepAmericaSafe.com을 설립했다).
네오콘은 이라크 전쟁을 가장 앞장서서 부르짖은 세력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일한 동료들이 소수에 불과하며 그나마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이라크전을 밀어붙일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강조한다. 부시는 9·11 테러 공격이 일어난 뒤에야 진지하게 네오콘의 견해를 구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나마 자신들이 9·11 사태의 정확한 진상 규명과 명확한 대책을 가장 잘 제시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노먼 포도레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행정부에서 몸담지도 않았던 더그 페이스, 폴 울포위츠, 리처드 펄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딕 체니 부통령을 회유해 그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펄은 당시 국방부 산하 민간인 조직인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런 주장이 대중에 먹힌 데는 근본적인 반유대주의 정서가 한몫 했다. 대개는 ‘이 약삭빠른 유대인들이 우둔한 비유대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생각한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그렇게 인식한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해졌다는 주장은 이중으로 가당찮다.
사실 이스라엘은 처음엔 이라크전에 반대했다.”(그러나 스티븐 월트는 그보다는 사정이 더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이라크전으로 인해 진짜 골칫거리인 이란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판단했지만 부시가 다음 차례로 이란을 손보겠다고 약속하자 전쟁을 지지했다는 설명이다.)
이라크전이 진퇴양난에 빠지자 네오콘은 부시 행정부를 떠나 좌절의 상처를 달래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회고록을 썼다. 그러나 일부는 처음부터 중동에서 자신들이 지지한 전쟁이 타당했지만 전쟁 수행방식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폈다.
그중 한 명이 부트였다. 그는 일찌감치 2001년 11월 부시가 첨단 무기를 동원한 전쟁을 고집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이 또다시 ‘테러리스트 소굴’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라크에도 대대적인 파병이 필요하리라고 경고했다. 2006년 부시는 부트를 비롯한 네오콘(크라우트해머, 크리스톨 등)을 백악관에 초청해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려 했다.
그러나 부트 때문에 그 회동은 이라크전 실패를 성토하는 자리로 변했다. 부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했다. 부트 외에 프레드릭 케이건도 초기부터 이라크전을 비판했다. 케이건은 군사 분석가로 늘 아버지와 형의 그림자 속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특히 그는 이라크 병력 증파안을 고안해 전쟁 자체와 신보수주의의 불안한 입지를 역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 일로 케이건은 네오콘의 지적 능력, 끈질김, 방법론, 실효성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지가 발표한 ‘글로벌 사상가 100명(Top 100 Global Thinkers)’에서 케이건 가족은 집단으로 66위에 올랐다. 때로는 케이건 가족을 빼면 네오콘은 껍데기만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실제로는 케이건 네이콘은 4명뿐이다. 도널드(아버지), 로버트와 프레드릭(도널드의 두 아들), 킴벌리(프레드릭의 아내)다. 도널드 케이건은 예일대 역사학·고전 교수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권위자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전쟁 자체로 확대됐다. 그는 전쟁을 두고 “인간 본연의 상태(the default state of the human species)”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성격이 꼼꼼하고 육중한 체격을 가진 프레드릭은 어릴 때 판지를 잘라 전투를 재연하는 놀이를 하며 자랐고, 예일대에서 러시아와 소련의 군사 역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10년 동안 웨스트 포인트에서 전쟁학을 가르쳤다. 그는 같은 예일대를 나왔고 관심사가 기이할 정도로 흡사한 킴벌리 케슬러와 결혼했다.
킴벌리는 현재 워싱턴에 있는 소규모 싱크탱크 전쟁연구소 소장이다. 프레드릭 케이건은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추진하는 첨단기술 전쟁에 회의를 가졌다. 처음부터 이라크전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 그는 퇴역 대장 잭 킨의 도움으로 부시를 설득했다. 그 결과 이라크 병력 증파가 시작됐다.
프레드릭에게 가장 큰 감명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은 데이비드 페트라우스 대장(현재 중부군 사령관)이었다. 페트라우스는 프레드릭을 “머리가 비상한 사람” “지극히 부지런한 사람” “진정한 역사 학도”라고 부른다(페트라우스는 2010 어빙 크리스톨 상을 받았고 오는 5월 AEI에서 어빙 크리스톨 강연을 할 예정이다).
프레드릭과 킴벌리 케이건은 페트라우스의 주선으로 2007년 4월부터 이라크를 일곱 차례나 돌아봤다. 페트라우스는 전화 인터뷰에서 “그들에겐 자녀가 없다. 이 일이 그들의 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아프가니스탄을 두 번 다녀왔다. 두번째 방문은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대장을 자문하는 12명의 민간인 위원회 소속으로 이뤄졌다.
그 위원회의 검토 보고서는 매크리스털의 4만 명 증파 요청에 힘을 실어주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프레드릭 케이건은 종종 순전히 군사적인 해결책에 과도한 믿음을 보인다. 네오콘 중에는 군복무를 한 사람이 거의 없지만 무력 사용 주장으로 종종 비난을 산다. 미군 정보장교 출신으로 군사문제 전문 칼럼니스트인 랠프 피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살면서 모든 것을 너무도 쉽게 얻었다. 그래서 미군을 그들의 이상을 실천하는 도구로 간주하기가 너무도 쉬웠다.” (피터스는 자신이 네오콘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혹스러워하며 짜증을 낸다. “난 자격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난 군복무도 했고, 비싼 사립 고교에 다니지 않았으며, 아이비 리그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나에게 주어진 신탁 기금도 없었다.
난 몸도 날씬하다.”) 프레드릭 케이건도 할 말이 있다. 그는 군대의 능력을 무작정 믿지는 않으며 장성들에게 작전을 그만두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네오콘은 그 놀라운 인내력에도 불구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전에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 네오콘도 뿌리 깊은 본능적 방어심리를 갖는다.
또 그들은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외부자들을 경계한다. 내가 존 포도레츠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보통 때는 사근사근한 빌 크리스톨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키신저의 모든 면을 혐오하는 그이지만 나에게 바로 그 키신저식 전술을 구사했다.
출장 중이라서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무작정 쳐들어갔다. 네오콘의 근거지로 알려진 워싱턴 북서부 17번 스트리트 1150번지의 건물에는 AEI 다섯 층 아래 위클리 스탠더드가 있다. 출장(?)에서 벌써 돌아온 듯 그가 버젓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퇴짜 놓았다.
함께 한 약 3분 동안 그에게서 신보수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보수주의의 존재와 영향력을 구태여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해 9월 어빙 크리스톨의 영결식에서 아들 빌의 추도사를 들은 사람들은 정말 감동적인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자식에게서 듣고 싶은 바로 그런 추도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팬들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좋아하는 빌 크리스톨은 박식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만드는 너무도 잘난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들은 빌 크리스톨에게서 그렇게 ‘진지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크리스톨 부자(父子)를 잘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척 비슷하다고 말한다. 재치와 세련된 무관심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랍비 길 스타인로프는 추도사에서 어빙을 “영원한 외부자”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의 운명이 그렇듯이 모든 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완전히 해체해서 모든 문제를 투명하게 만든다는 의미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빌은 완벽한 내부자다. 훈수를 두고 인맥을 쌓고 제국을 건설하는 형이다. 친구들도 그를 이념가보다는 운영자라고 말한다. 어빙은 정치에 초연한 편이었다. 하지만 빌은 지극히 당파적이다. 그러면서도 오지랖이 넓어 콜린 파월, 게리 바우어, 앨런 키즈, 페일린 등 다양한 부류의 인물들을 지지했다.
친구라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한 네오콘은 “빌은 재미없는 올바른 입장보다는 흥미진진한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빌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페일린을 지지한 일(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게 그녀를 러닝메이트로 선정하도록 공개적으로 설득했다)을 초등학생이 처음 이성을 알면서 겪는 사랑의 열병에 비유했다.
위클리 스탠더드의 유람선이 알래스카주 주도 주노에 정박했을 때 빌의 열병이 시작됐다고 알려졌다(페일린은 당시 알래스카 주지사였다). 그러나 맥스 부트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그냥 엉뚱하게 튀어나온 기발한 생각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페일린이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가 되리라고 믿었겠나?
단지 ‘진흙에 묻혀 있는 보석 같은 새 얼굴이 있었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화당의 한 중진(크리스톨이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른다며 익명을 요구했다)은 “빌과는 절친한 사이지만 그는 언론의 각광을 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네오콘은 다듬어지지 않은 ‘왕자’나 ‘공주’를 지혜로운 사람들이 발굴해서 키워줘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그런 점이 네오콘의 신조 중 하나다(1950년대 시카고대에서 숱한 논란을 일으킨 정치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그 원조로 알려졌다). 빌 크리스톨은 이미 댄 퀘일을 부통령이 되도록 이끈 경험이 있다. 어빙 크리스톨은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한다는 생각을 경계했다. 하지만 아들 빌은 바로 그 일을 소명으로 삼았다. 비판자들은 빌의 판단 착오를 즐겨 지적한다.
예컨대 빌은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다. 친구인 존 스튜어트는 그에게 “자네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할까?”라고 말했다. 아버지 어빙도 아들에게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오랜 가족 친구에게 “불쌍한 녀석… 내 아들이 또 실수를 저질렀어”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어빙의 불안감은 나차스(nachas: 유대인들이 아들에게 갖는 자부심을 말한다) 아래 묻혀졌다.
그는 단지 아들의 이름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뉴욕타임스를 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빌 크리스톨의 실수나 잘못은 곧바로 잊혀졌다. 비판자들이 통곡할 노릇이다. 예컨대 빌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잠시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곧 그는 워싱턴포스트로 자리를 옮겨 승승장구했다.
네오콘은 빌이 뉴욕타임스에서 겪은 낭패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 한 명은 빌 크리스톨의 경우 보수파를 자처하는 데이비드 브룩스와 달리 뉴욕타임스의 진보적 논조를 수용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빌 크리스톨이 네오콘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목소리가 큰 인물이 됐다.
아버지가 갖지 못했던 영향력까지 확보했다. 이제 그는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지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그는 “지나치게 점잔 빼는… 어리석은… 어이없는… 사이비…” 운운하며 한참 비난한 뒤에야 “그러나…”라며 지지를 표했다. 비판자들은 네오콘의 교묘한 처신이라며 비난할지 모른다.
아프간전이 잘 풀리면 자신들이 공로를 챙기고, 일이 잘못되면 민주당의 우유부단과 실행 과실에 그 탓을 돌려도 면피가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셔널 인트레스트지의 제이컵 하일브런이 지적했듯이 네오콘의 이념이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에도 파고들었다는 조짐은 아닐까?
오바마 행정부의 한 관리는 네오콘이 행정부의 정책,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관련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코웃음을 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옳았음이 입증됐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지지하던 부시 행정부가 애초에 일을 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두 곳에서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속옷 자폭 테러 기도사건이 터지고, 이중첩자의 폭탄 테러로 CIA 요원들이 목숨을 잃고, 이란의 핵개발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중동과 세계 도처에서 문제가 더욱 다루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국민은 외교와 협상, 뉘앙스에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질지 모른다.
국내 문제에서 오바마에게 실망했듯이 말이다. 신보수주의는 건재하다. 단호한 결의와 확신으로 인해 그 매력은 더욱 빛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네오콘이라는 명칭은 좀 더 그럴싸하게 바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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