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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의 소년 전사들

알카에다의 소년 전사들

▎파키스탄 보안군은 남와지리스탄을 근거지로 하는 무장세력을 소탕하려고 오랫동안 힘든 작전을 폈다.

▎파키스탄 보안군은 남와지리스탄을 근거지로 하는 무장세력을 소탕하려고 오랫동안 힘든 작전을 폈다.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파키스탄의 부족자치구 북(北)와자리스탄 산악지대의 다타 켈 마을 부근. 지난 3월 16일 그곳의 한 주택단지를 미군의 무인항공기 프레데터가 공격했다. 그 사건은 당시엔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은거하는 알카에다 전사들을 표적으로 한 일상적인 공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통신사가 사건을 보도했지만 중요한 세부 사항에선 거의 내용이 달랐다.

하피즈 하니프는 그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알카에다에 합류한 그는 동료들과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그 지역을 통과하던 중 높은 담에 둘러싸인 주택단지 바깥 쪽에 차를 세웠다. 며칠 전 그곳에 맡겨둔 보급품을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정문을 두드렸다. 그런 다음 예의 바르게 뒤돌아섰다. 파슈툰 부족 지역에선 여성이 문을 따줄지 모르기 때문에 정면을 보며 기다리는 행동은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하니프가 차를 세워둔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차 한 대가 폭발했다. 곧 나머지 한 대도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미군 헬파이어 미사일의 강한 폭발력에 하니프도 나뒹굴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차가 있던 곳에 뒤엉킨 금속덩이가 연기만 내뿜었다. 시리아와 이집트 출신의 고위 간부를 포함해 아랍계 알카에다 대원 7명이 즉사했다. 하니프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전사 한 명을 발견하곤 도우려 했다. “머리와 가슴에 중상을 입었다”고 하니프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내 무릎 위에서 숨을 거뒀다.”

하니프(그 자신이 불러달라고 요청한 가명이다)는 지금 파키스탄 카라치 인근의 부모 집에 머무는 중이다. 부모는 그를 집에 붙들어 놓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이제 갓 열여섯 살인 하니프를 성전전사가 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하니프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수학을 잘하고 우르두어(파키스탄 공식 언어)와 파슈토어(아프가니스탄 공식 언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아랍어도 유창하다. 하지만 지난 18개월의 대부분을 파키스탄 부족 지역과 국경 건너 아프가니스탄 쪽에서 알카에다와 훈련하고 작전에 참여했다. 우리는 그가 전해준 이야기를 힘이 닿는 데까지 확인했다. 뉴스위크의 믿을 만한 취재원이자 탈레반의 고위 간부인 그의 삼촌도 그가 한 말의 신빙성을 뒷받침해줬다. 2009년 2월 하니프가 종적을 감춘 뒤 하니프의 삼촌과 아버지는 아이를 찾으려고 와지리스탄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두 달 동안 찾아 헤맨 뒤인 두 번째 방문에서 아버지는 드디어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하니프는 아랍 친구들과 함께 있겠다고 고집했다. 몇 달 뒤 어머니의 절박한 애원에 못 이겨 그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내 미군 전투 임무의 종식을 발표했다. 그러나 9·11 사태 후 9년이 지난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군 약 10만 명이 주둔한다. 그들의 표면상 임무는 알카에다의 와해다. 하지만 대다수 미국인은 그들의 적이 누군지 어렴풋한 개념밖에 없다. 오사마 빈 라덴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2010년 3월 공개된 녹음테이프가 그의 건재를 말해주는 가장 최근의 증거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 라덴의 테러조직은 약 100명 이내의 전사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알카에다를 상대로 한 진정한 전쟁은 파키스탄 부족 지역에서 무인공격기 프레데터에 의해 수행된다. 그 세부 사항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드러날 뿐이다.

지금까지는 요사이 알카에다가 어떤 모습인지 내부의 시각으로 묘사한 상세한 이야기가 흘러나온 적이 없다. 이제 하니프의 육성 증언이 바로 그런 시각을 제공한다. 어떤 면에선 그의 이야기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림일지 모른다. 무인공격기의 추적을 받으며 도주 중이고, 수적으로 크게 줄어든 성전전사들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불길하게도 알카에다는 급진 사상에 심취한 무슬림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하니프는 삼촌이 간부로 활동하는 아프간 탈레반보다 빈 라덴의 알카에다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성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알카에다가 지금도 정예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하니프는 동료 여럿이 숨지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중동과 다른 지역에서 끊임없이 수혈되는 신규대원들로 빈 자리가 채워진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소수의 알카에다 전사가 미국에 대항하는 다른 단체를 더욱 강하고 치명적으로 만들어주는 전력 승수(force multiplier) 역할을 수행한다. 하니프 자신도 CIA의 최대 참사 중 하나를 불러온 알카에다 작전에서 작지만 일익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지난해 12월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CIA 기지를 공격한 자폭 테러로 요원 7명이 숨진 사건을 말한다).

한낱 소년에 불과한 하니프에겐 이 모든 일이 대모험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랄까 그는 성전운동의 잔혹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무참히 살해한다든가, 여성의 얼굴에 황산을 퍼붓는다든가, 장악 지역에서 공포 통치를 일삼는 등의 만행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니프가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단순 명료해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알카에다가 제기하는 도전은 여전히 지독하게도 복잡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성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프간 탈레반(사진)보다 정예로 인정받는다.

▎성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프간 탈레반(사진)보다 정예로 인정받는다.

하니프는 기억이 가능한 어린 시기부터 성전운동을 꿈꿨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그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곧 탈레반 전사들과 관리, 지지자들이 카라치 부근의 부모 집을 빈번하게 찾았다. 하니프는 소련에 항거하는 성스러운 전쟁 이야기,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가 부패한 아프간 군벌을 타도한 이야기, 탈레반이 집권하던 시절의 이야기, 미군의 폭탄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이야기, 오마르가 부르짖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IEA)를 복원하려는 반미 저항운동의 이야기에 푹 빠져 성장했다. “샤히드(순교자)가 내 삶의 목표였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이슬람 여성을 모욕하고,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교도들을 공격하고 싶다. 성전운동에 참여하고 순교자가 되는 일 외에는 내 삶에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다른 일은 없다.”

지난해 초 어느 날 하니프는 카라치의 한 카페에서 회색 수염을 한 부족인을 만났다. 그 남자는 부족 자치지역에서 파키스탄 보안군에 저항하는 파키스탄 탈레반의 전쟁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막 열다섯 살이 된 하니프는 한마디 한마디를 마음 깊이 새겨들었다. “그 남자가 다음날 나를 다시 만나러 왔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에게 성전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는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파키스탄 탈레반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 아래서 일하는 신규대원 모집원이었다. 메수드(1년 전 프레데터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하니프 같은 어린 자살폭탄테러 대원을 모집하고 활용하기로 악명 높았다. 그의 대원 한 명이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를 암살했다고 알려졌다.

하니프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성전운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살폭탄 대원이 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며칠 후 그 남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 이제 떠나지.” 다음날 아침 하니프는 조용히 옷가지를 꾸린 뒤 평상시처럼 집을 나섰다. 하지만 학교로 가지 않고 그 남자를 만났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바누 마을로 갔다. 성전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북 와지리스탄의 관문이다. 그곳에선 파키스탄군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전을 우려해 기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너무도 기뻤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내가 바라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곳에 어서 가고 싶어 안달했다.”

하지만 메수드가 직접 머무는 캠프에는 가지 못했다. 마지막 목적지를 남겨두고 그들은 아프간 국경에 인접한 다타 켈 부근의 알카에다 기지를 방문했다. 카라치부터 하니프와 함께 여행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젊은이 두 명의 목적지였다. 순간적인 충동이 일면서 하니프도 그곳에 남겠다고 결심했다. “그곳의 아랍 무자헤딘 대원들이 아주 멋져 보였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는 유창한 아랍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탈레반 고위 관리인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 기지 책임자로 리비아 출신 알카에다 고위 훈련작전 전문가인 셰이크 압둘라 사이드가 그를 내려다보고는 “원한다면 남아도 좋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신이 났었다”고 말했다. “난 아랍어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니프를 메수드에게 데려가려던 그 모집 담당자는 그를 그곳에 남겨두고 떠났다.

하니프는 남(南)와지리스탄의 ‘키소라’로 불리는 곳에서 3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받았다. “처음엔 재미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주 힘들었다.” 훈련을 담당하는 대원은 전부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신규대원의 구성을 보면 알카에다의 호소력이 미치는 범위가 매우 넓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규대원 약 30명의 출신국이 매우 다양했다. 체첸, 타지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터키, 알제리계 프랑스인 2명, 독일인 3명(그중 한 명은 유럽계, 나머지 두 명은 아랍계나 터키계) 등. 하니프가 가장 어리고 유일한 아프간인이었다. 대다수는 10대 후반이나 20대였다. 몇몇은 30대였고, 한 명은 만 50세였다. 아랍어나 파슈토어를 아는 터키인, 우즈베키스탄인, 체첸인 몇 명이 동료들에게 통역을 해줬다.

▎미국 공수부대 대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붙잡은 알카에다 용의자의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연행하고 있다(2002년).

▎미국 공수부대 대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붙잡은 알카에다 용의자의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연행하고 있다(2002년).

훈련은 새벽 전에 시작됐다. 산악지대 구보와 체조를 많이 했다. 하니프는 카라치 집에서 뉴스위크 기자에게 랩톱으로 자신과 신규대원들이 위장복을 입고 AK-47 소총을 메고 행진하거나 구보하는 동영상을 보여줬다. 하루 다섯 번 사원에서 의무적인 기도를 하고 그 틈새 시간엔 모터바이크, 자동차, 픽업, 트럭 운전법을 배웠고 수동 변속기 조작법을 익혔다. 대검이나 소총으로 일대일 싸움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기술도 배웠다. 아랍인 전문가들이 폭탄 취급법을 가르치면서 급조폭발물(IED)을 제조하고 자살폭탄 조끼를 만드는 방법을 훈련했다. “나도 네 시간 안에 폭발물 5~6kg과 볼베어링을 채워 넣은 자살폭탄 조끼를 만들 수 있다”고 하니프가 자랑했다. “내 개인용으로 직접 하나를 만들었다.” 그 조끼가 아직도 기지에서 자신을 기다린다고 그는 말했다.

하니프는 그 조끼의 제작법만에 아니라 용법도 안다. “총기를 수입하고 사격하는 법을 배웠듯이 그 조끼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도 배웠다.” 그는 표적에 다가갈 때 불안해 보이지 않는 기술도 습득했다. 초조한 나머지 성급하게 버튼을 누르지 않도록 뇌관은 주로 자살폭탄 조끼의 지퍼 달린 주머니 속에 넣어둔다고 그가 말했다. 훈련 담당자들은 표적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야 하며 멀리서 표적을 보고는 뇌관을 작동시켜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랍인 훈련 담당자들은 신규대원을 면밀히 평가했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지시를 정확히 따르고, 지도를 읽을 줄 알고, 침착하며, 표적에서 떨어진 곳에선 자폭하지 않을 만한 똑똑한 아이를 선호했다.”

나중에 다른 기지에서 하니프는 청소년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폭훈련을 받는 모습을 봤다. 한번은 열두어 살 먹은 남자아이들이 그런 훈련을 받고 있었다. 바이툴라 메수드가 그곳에 시찰왔다가 어린 아이를 보고는 훈련 책임자 카리 후사인에게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2009년 8월 프레데터 공격으로 메수드가 사망한 뒤 하니프는 다시 그 기지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명령이 묵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많은 어린 아이가 자폭훈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니프는 자신의 훈련을 돌이키면서는 행복에 겨워 했다. “그들은 내게 좋은 식사와 좋은 무기, 폭파장치를 지급했다”고 그가 말했다. “막강한 성전운동 대원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이 지원됐다.” 내부 발전기가 있어서 훈련병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랩톱으로 성전주의 비디오를 보며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런 느긋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니프가 훈련을 마칠 때쯤 파키스탄 보안군이 남와지리스탄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부토 같은 파키스탄 주요 인물을 메수드가 공격하자 파키스탄 정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훈련 담당자들과 훈련병들은 소그룹으로 나눠 재주껏 탈출해 북와지리스탄의 셰이크 사이드 지휘 아래 재편성됐다.

하니프는 사이드의 허락으로 집을 떠난 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계속 울었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차일피일 3개월을 미루다가 어머니를 위로하려면 집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아랍인 간부들은 원한다면 가도 좋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한 아랍인 지도자가 “일단 성전운동에 참여하면 그 포로가 된다는 이야기는 미국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 “아랍인들은 ‘이곳을 떠나는 건 자유지만 마음을 바꿔 머물러 보지 그래?’라고 말했다. 그 열성적인 무자헤딘은 가정과 가족 이야기를 하면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오로지 성전에만 전념한다.” 하니프는 그들 중 다수가 남겨두고 온 근사한 집과 멋진 미제 자동차의 사진을 갖고 다니며 그런 희생을 하고 성전운동에 참여한다는 증거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아랍인 친구들이 그리웠다.” 카라치에서 3주를 지낸 뒤 그는 한밤중에 집을 빠져나와 북와지리스탄의 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파키스탄 보안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그러면서 미군 프레데터가 더 큰 위험으로 떠올랐다. 무인공격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마치 곤충의 날개짓 소리처럼 의식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프가 말했다. “미사일이 떨어지기 전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하니프는 프레데터 공격으로 알카에다가 입은 피해가 특히 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부 술레이만으로 알려진 알카에다의 한 사령관이 프레데터 공격으로 숨진 뒤 다른 전사들과 함께 몇 시간 동안 건물 잔해를 수색한 일을 돌이켰다. 마침내 그의 잘려나간 머리를 찾았다. 한번은 프레데터 공격 후 숨진 한 알카에다 전사와 아내, 자녀들을 찾으려고 무너진 집더미를 여덟 아홉 시간 동안이나 파헤쳤다. “마침내 신체의 일부를 찾아냈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온전한 시신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니프의 추정에 따르면 지난해 프레데터 공격으로 알카에다 대원 약 80명이 숨졌으며 그중 다수는 고위 간부였다. 파키스탄 정보 소식통이 제시한 수치와 비슷하다. 그는 뉴스위크에 지난 2년 동안 무인항공기 공격으로 알카에다 대원 약 120명이 제거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 후로 알카에다 전사들은 북 와자리스탄 주도 미란 샤의 시장에 갈 때는 더욱 조심한다. 하니프도 약 1년 전 그곳에서 파키스탄 보안군에 잡혀 정보요원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아프간 탈레반이 멋져서 흉내를 낼 뿐이라고 둘러댄 뒤 풀려났다고 말했다.

그처럼 피해가 크지만 알카에다는 손실된 인원의 일부는 언제든 보충할 능력을 갖췄다. 신규대원이 끊임없이 도착한다. 대부분은 터키의 알카에다 안가에서 출발해 3개월의 고된 육지 여행 끝에 와지리스탄에 도착한다. 중앙아시아 전사들은 훨씬 짧은 경로를 이용한다. 터키와 중동에서 도착하는 신규대원들은 현금을 많이 소지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가방에 지폐로 2만 달러 이상을 채워오는 경우도 있다. 신규대원의 심사는 매우 까다롭다. 출신 배경을 면밀히 조사하고 부족 지역에 보내기 전, 또는 기지에 도착한 뒤로도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관찰한다. “첩자의 침투를 가장 두려워 한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1년 전 알카에다 간부들은 자신들의 차에 CIA 첩자가 탐지장치를 부착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유도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부족 지역에서 알카에다의 전력은 아랍인 약 130명에다 약간의 체첸인, 우즈베키스탄인, 그리고 소수의 터키인 정도라고 하니프가 말했다. 그중 약 절반이 지난봄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증파에 맞서려고 파키스탄을 떠났다. 그들은 대여섯 명씩 짝을 지어 떠나 여러 지역에서 아프간 탈레반 사령관들과 접선했다. 그들의 임무는 실제 전투가 아니라 주로 IED, 자살폭탄 조끼, 폭탄의 제조와 현지 탈레반 대원에게 폭탄제조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다. 하니프는 아랍인 약 65명이 부족 지역에 남아 조직의 일상 업무를 담당한다고 추정했다[지난 6월 말 리언 패네타 CIA 국장은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 활동하는 알카에다 대원이 약 50명에서 100명 사이라고 추정했고, 국가대테러센터(NCTC)의 마이클 라이터 국장은 파키스탄 부족 지역에서 활동하는 알카에다 대원이 “300명 이상”이라고 말했다].

하니프는 알카에다의 종합전략은 전혀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빈 라덴과 2인자 아이만 알-자와히리 같은 최고위 지도자가 직접 지휘하는 알카에다 대원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알카에다와 함께 한 18개월 동안 그 두 사람의 소재에 관해 어떤 단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모두 그들의 이름으로 열정적으로 성전에 임했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만난 저명한 성전 전사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인기 스타에게 반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는 파키스탄 탈레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와 그의 후계자 하키물라 메수드, 알카에다의 3인자로 알려진 아부 야히아 알-리비, ‘미국인 탈레반’ 애덤 가단(일명 아잠 알-암리키)도 포함됐다. 그러나 지난 6개월 동안 점점 심해지는 프레데터 위협의 결과로 고위급 알카에다 간부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전부 숨어 지낸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이전엔 아잠 알-암리키를 종종 봤는데 그도 보이지 않았다.”

하니프는 특히 요르단 출신의 이중첩자 후맘 할릴 아부-물랄 알-발라위를 대면한 사실을 자랑했다. 지난해 12월 코스트 부근의 비밀기지에서 CIA 요원 7명을 살해한 자폭테러범이다. 하니프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발라위의 자폭조끼를 직접 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늘 농담을 즐겼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우리는 그에게 ‘아부 라일라’(라일라는 발라위의 두 딸 중 첫째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니프에 따르면 발라위는 아랍어, 영어, 터키어를 잘했으며 셰이크 사이드가 그를 특별히 아껴 특별 손님으로 대접했다. 지난해 말 어느 날 하니프와 대원 서너 명이 발라위를 미란 샤까지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곳에서 그를 내려줬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파슈툰 부족 사람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그를 데려갔다.” 다음날 셰이크 사이드가 하니프에게 발라위가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 거기서 미군 헬기가 그를 CIA 기지로 데려갔다고 알려줬다(그러나 미국 관리에 따르면 발라위는 헬기가 아닌 승용차로 CIA 기지에 도착했다).

하니프는 랩톱에서 발라위의 자폭조끼 제조 장면이라며 동영상을 보여줬다. “발라위는 현장에서 지켜봤다”고 그가 말했다. 그 동영상에서 한 대원은 얇은 천 튜브 13개를 폭발물로 정성껏 채웠다. 그 튜브들은 나란히 하나로 엮어졌고 전선이 달려 있었다. 그 다음 그 대원은 작은 볼베어링 수백 개를 접착제가 칠해진 천 위에 고르게 펼친 뒤 구식 재봉틀로 박고 가죽끈과 버클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복잡한 전자회로를 추가하고 가는 전선으로 손목시계처럼 생긴 작동장치에 연결된 뇌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하니프는 그보다는 다른 일을 회상하면서 가장 기뻐했다. 아랍인들과 터키인들 사이의 흥미진진한 배구 경기, 사정이 허락할 때 산에 올라가 토끼, 새 등을 잡아 야외에서 구워 먹던 기억 등. 또 하니프는 미란 샤 시장에 가기를 좋아했다. 진흙벽돌로 지은 수많은 작은 가게와 주택들로 이뤄졌으며 대부분 무장단체가 통제하는 곳이다. 하니프는 해가 질 무렵 공중전화 사무소에 자주 갔다. 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우호적인 상인들이 그들을 들여보낸 뒤 문을 걸어닫고는 마음대로 사용하게 해주었다. 행인들은 그 가게가 밤이 돼 문을 닫은 줄 알았지만 하니프와 친구들은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전화를 하고 인터넷을 사용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니프는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식품, 보급품, 탄약, 심지어 친구 선물 등에 종종 1000달러 이상씩 썼다. “대원들을 위해 맛있는 식품을 구입하는 일이 즐거웠다.” 돈이 모자란 적은 없었다. 낡은 차량을 신형 도요타 픽업과 랜드 크루저로 교환할 정도로 현금이 많았다. 한번은 아프간 탈레반이 노획한 신형 포드 레인저 여러 대를 파키스탄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하니프의 부대는 지난 4월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됐다. 어느 날 새벽이 되기 전 그들은 위조한 아프간 신분증을 지니고 무기를 짊어진 채 파크티카주로 건너갔다. 그가 소속한 작은 조직(아랍인 IED 전문가가 몇 명 포함됐다)은 카불 주변 주에서 아프간 탈레반 사령관들과 함께 행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싸운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보다 더 위태로웠다. 그의 부대는 거의 매일 총격전을 했다. “파키스탄에서보다 군사 행동이 훨씬 많았다.”

가즈니주에서 하니프는 2006년 사살된 이라크 알카에다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의 사촌을 만났다. “그에게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는 우리 부대를 떠날 때 내게 두 쪽짜리 편지를 건넸다. 가족을 보러 집에 가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마음이 바뀐다고 그는 경고했다.” 그래도 하니프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7월 사령관에게서 허락을 얻어 집으로 갔다.

집에 머문 지 이제 거의 두 달이 됐다. 아랍인 친구들이 경고했듯이 그는 계속 사악함과 미몽, 사치, 유혹에 시달린다. “인터넷과 거리엔 마음을 썩게 만드는 끔찍한 것이 많아 늘 조심해야 한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집에 와서 열흘 정도 머물렀을 때 탈레반 삼촌이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하라고 타일렀다. 아버지도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면 더 나은 순교자가 될 거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하니프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부모님의 소원대로 결혼하면 내가 좋아하는 삶은 끝장”이라고 그가 말했다.

하니프는 하루 몇 시간씩 침실에서 컴퓨터로 탈레반, 알카에다, 이라크 성전주의 웹사이트를 검색하며 호전적인 대화방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웹에서 여성과는 절대 접촉하지 않는다. 이슬람 사이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런 일을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 하니프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군을 매복 공격하는 성전을 담은 DVD를 본다. 교환하는 대화방 메시지에는 종종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이 가득하다. “미란 샤의 시장이 그립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산과 동료 무자헤딘들이 보고 싶다. 이곳에선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모든 알카에다 자폭대원이 하듯이 하니프도 유언장을 만들었다. 그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고, 남자 친족 전원이 수신 대상이다. “내가 하늘나라에서 수많은 처녀를 데리고 사랑하는 형제들인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전운동에 참여하고 순교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 유언장의 작성 일자는 2009년 12월 21일이다. 그가 16세가 되던 날이다.

번역·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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