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탈레반 도하 합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평화동반자라고 쓴다
[미국·탈레반 도하 합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평화동반자라고 쓴다
협상 이면엔 정권 장악 동상이몽… 아프가니스탄 평화 구축 시작부터 삐걱 미국은 18년간 계속돼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최종적으로 종식하고 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무장정파인 탈레반은 2월 29일(현지시간) 페르시아 만(아라비아 만) 지역의 이슬람 군주국가인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만나 평화합의를 이뤘지만 이런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잘마이 칼릴자드 미국 아프가니스탄 특사와 탈레반 공동창설자인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이날 합의서에 서명했지만 미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잡음이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미국이 수립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평화 합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소외됐다며 퉁명스러운 반응이다.
그럼에도 평화 합의는 미국이 자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11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평화 합의까지 180개월을 끌었다. 이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베트남 전쟁(122개월)을 넘어서는 장기전이다. 미국은 이라크전(105개월), 제2차 세계대전(44개월), 6•25전쟁(37개월), 필리핀-미국 전쟁(37개월), 제1차 세계대전(미국 참전기간 19개월), 스페인-미국 전쟁(8개월), 걸프전쟁(7개월) 등을 치렀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직접적인 전비로만 약 7600억 달러(약 920조원)를 투입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역에서 탈레반의 게릴라전에 밀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2020 회계연도의 미국 국방예산이 5440억 달러의 기본 방위 예산과 1640억 달러 규모 해외 비상 운영 예산 등을 합해 7500억 달러(약 850조원)이므로, 미국은 지난 180개월 동안 한 해 국방예산 전액을 아프가니스탄에 쏟은 셈이다. 이번 합의로 2001년 시작돼 18년 이상 끌어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완전 종식할 수 있을까? 평화합의는 이뤘지만 미래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합의 주체부터 독특하다. 미국이 주권국가이자 유엔 회원국인 아프가니스탄을 빼고 이 나라의 반정부조직인 탈레반과 평화합의를 한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201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전에 탈레반 정권이 유지하던 ‘아프가니스탄 토후국(Emirate of Afghanistan)’이라는 이름의 주체와 평화 합의를 한 것으로 합의문을 작성했다. 그러다보니 합의문의 공식 제목부터 이색적이다. ‘미 합중국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탈레반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토후국과 미국 간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합의(Agreement for Bringing Peace to Afghanistan between the 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 which is not recognized by the United States as a state and is known as the Taliban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기묘한 제목이다. 미국이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그간의 불문율을 깼다는 비난을 피해가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도하 합의’로 불리는 이번 평화합의에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를 비롯한 극단주의 무장조직이 미국과 동맹국을 공격하는 활동 무대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이 얻어낸 명분이다. 미국은 탈레반이 합의를 준수하면 그 대가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군을 서명일로부터 14개월 안에 모두 철수하기로 했다. 이는 탈레반이 얻어낸 실질적인 이득이다. 외국 군대가 떠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공간은 일시 무주공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미 세력을 강화한 탈레반은 그 공간을 차지할 가장 유력한 후보다. 탈레반은 현 정부를 공격해 몰아내든지, 합의를 통해 정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가 나중에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미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한 탈레반의 힘과 세력을 미국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합의안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미군 철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큰 양보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주목할 점은 ‘아프가니스탄 내부 당사자 간의 협상에 따라 앞으로 어떤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미국과 탈레반은 긍정적인 관계를 추구하기로 다짐한다’라는 내용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점령돼 무력으로 적화통일된 것을 떠올리게 한다.
탈레반이 합의를 준수하는지는 미국이 평가하고 판단하기로 했다. 미국이 확보한 거의 유일한 안전판이지만, 형식적인 문구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이 합의 미준수를 명분으로 평화합의를 백지화하고 다시 전쟁을 치를 군사적·정치적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철수한 미군과 나토군이 설령 탈레반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도하 합의에 따르면 미군은 합의 이행의 첫 단계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 1만2000여 명을 합의일로부터 135일 안에 8600명으로 줄이게 된다. 미국은 앞으로 군사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위협하지도,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으며, 올해 8월 27일까지 탈레반 지도부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약속했다.
신뢰를 확인하는 절차로 3월 10일까지 국제동맹군과 아프간 정부군에 수감된 탈레반 대원 5000명과 탈레반에 포로로 잡힌 아프가니스탄 군인 1000명을 교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가니 대통령은 미국과 탈레반 포로 석방을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다며 석방을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무려 5000명에 이르는 탈레반 포로가 석방되면 정치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앞장설지도 의문이다. 게릴라전에 능한 이들이 탈레반에 재합류하면 평화체제에 참여하기보다 전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고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들을 포로라 잡았던 그동안의 힘든 전투를 무의로 돌린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이 탈레반에 요구해 관철한 가장 큰 내용은 알카에다와 거리를 두게 한 것이다. 탈레반은 알카에다를 비롯한 무장조직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병이나 훈련, 자금 조성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들의 이동을 돕거나 여행증명서와 같은 법적 서류 제공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못했다. 다만 무장조직이 아프가니스탄에 근거지를 두도록 방조하지 않는다는 조항 정도가 미국이 얻은 성과다.
이번 합의는 누가 봐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위해 오는 11월 치를 대선에 영향을 주는 내용이다. 백악관은 이날 낸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마침내 미국의 최장기 전쟁을 끝내고 우리 군대를 귀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시작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거치면서 이루지 못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을 본인이 이뤘다고 강조하는 발언이다. 시리아에 이은 또 하나의 미군 철수 자랑이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상이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의 정치적인 쇼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토는 이번 합의를 지지하고 파병 규모를 줄이겠다고 하면서도 만일 상황이 악화한다면 병력을 다시 증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합의와 철군을 서두르는 듯한 인상의 미국과 결이 다른 모습이다. 아무래도 과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폭정·반인권·극단주의·여성학대, 그리고 소수민족과 소수종파(시아파) 탄압을 등을 의식한 반응이다. 미국이 이런 것을 그대로 내버려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난다면 가치전쟁에서 실질적인 패배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유엔은 이날 성명에서 평화합의를 환영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이 주도하는 여성·소수민족·젊은층을 아우르는 평화적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주권국가이자 유엔 회원국인 아프가니스탄을 의식한 발언이다. 아울러 탈레반의 과거 만행을 떠올리게 하는 성명이기도 하다. 평화는 환영하지만 탈레반의 복귀에는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탈레반 공동창설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는 평화합의에 서명한 뒤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 국경을 맺단 중국, 그리고 러시아에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흡사 아프가니스탄을 이미 장악한 듯한 발언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계기는 2001년 9·11 테러다. 미국은 오사바 빈라덴이 이끄는 극단주의 무장단체 알카에다가 2011년 9·11테러를 벌인 직후인 그 해 10월 7일 영국과 연합군을 구성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하면서 길고 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들어갔다. 작전명 ‘항구적 자유(Operation Enduring Freedom, 2001~2014년)’와 ‘자유의 파수꾼(Operation Freedom’s Sentinel, 2015~2020년)‘으로도 불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됐다.
애초 전쟁의 목적은 9·11 테러의 배후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초기 공격은 알카에다의 훈련기지와 탈레반의 군사시설 공격에 집중됐다. 아프가니스탄 내의 또 다른 무장정파로 탈레반에 맞서고 있던 북부동맹도 미군과 힘을 합쳤다. 미군과 영국군은 공습과 지상 작전을 결합한 작전으로 탈레반 장악 지역을 공략했으며, 그 해 11월 13일 탈레반을 몰아내고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그 해 12월 5일에는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가 들어섰으며 연합군은 12월 7일 탈레반의 거점인 동남부 칸다하르를 점령하고 탈레반 세력을 몰아냈다. 12월 20일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주도의 다국적 부대로 아프가니스탄 내 치안과 안정을 담당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설립을 승인했다. 2002년 1월 2일 ISAF 선발 병력이 현지에 도착해 활동에 들어갔으며, ISAF의 지휘권은 2003년 8월 11일 나토에 넘어갔다. ISAF의 활동은 2014년 12월 28일 종료됐다.
하지만 후속으로 2015년 1월 1일부터 나토 주도로 아프가니스탄군에 대한 훈련·자문·지원 임무를 주로 하는 ‘확고한 지원 작전(Operation Resolute Support)’이 이어지고 있다. 최대 136개국에서 파병해 한때 5만5000명에 이르던 병력은 1만3000명 수준으로 줄었다. 미국은 계속 병력을 줄이며 다른 나토 회원국에 임무를 맡겨왔으며, 최종 철군을 향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왔다. 그 결과가 이번 도하 합의인 셈이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나, 미국에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 민주주의·인권 가치는 미군 철수라는 트럼프의 이익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21세기 들어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현재)과 이라크 전쟁(2003년~2011년 미군철수까지), 리비아 공습(2011년), 시리아 공습(2017년) 등의 전쟁을 벌여왔다. 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 전면적·부분적으로 개입해 군사적으로 ‘퍼펙트게임’을 거둔 게 사실이다.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정보력에서 미국에 대항할 세력이 지구상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련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의도했던 국제정치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철군도 그 중의 하나다. 미국은 강하지만, 주먹만으로는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해준 것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도하 합의다. 앞으로 미국과 국제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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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평화 합의는 미국이 자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11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평화 합의까지 180개월을 끌었다. 이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베트남 전쟁(122개월)을 넘어서는 장기전이다. 미국은 이라크전(105개월), 제2차 세계대전(44개월), 6•25전쟁(37개월), 필리핀-미국 전쟁(37개월), 제1차 세계대전(미국 참전기간 19개월), 스페인-미국 전쟁(8개월), 걸프전쟁(7개월) 등을 치렀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직접적인 전비로만 약 7600억 달러(약 920조원)를 투입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역에서 탈레반의 게릴라전에 밀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2020 회계연도의 미국 국방예산이 5440억 달러의 기본 방위 예산과 1640억 달러 규모 해외 비상 운영 예산 등을 합해 7500억 달러(약 850조원)이므로, 미국은 지난 180개월 동안 한 해 국방예산 전액을 아프가니스탄에 쏟은 셈이다.
자가당착에 빠진 미국의 탈레반 평화 합의
‘도하 합의’로 불리는 이번 평화합의에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를 비롯한 극단주의 무장조직이 미국과 동맹국을 공격하는 활동 무대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이 얻어낸 명분이다. 미국은 탈레반이 합의를 준수하면 그 대가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군을 서명일로부터 14개월 안에 모두 철수하기로 했다. 이는 탈레반이 얻어낸 실질적인 이득이다. 외국 군대가 떠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공간은 일시 무주공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미 세력을 강화한 탈레반은 그 공간을 차지할 가장 유력한 후보다. 탈레반은 현 정부를 공격해 몰아내든지, 합의를 통해 정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가 나중에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미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한 탈레반의 힘과 세력을 미국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합의안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미군 철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큰 양보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주목할 점은 ‘아프가니스탄 내부 당사자 간의 협상에 따라 앞으로 어떤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미국과 탈레반은 긍정적인 관계를 추구하기로 다짐한다’라는 내용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점령돼 무력으로 적화통일된 것을 떠올리게 한다.
탈레반이 합의를 준수하는지는 미국이 평가하고 판단하기로 했다. 미국이 확보한 거의 유일한 안전판이지만, 형식적인 문구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이 합의 미준수를 명분으로 평화합의를 백지화하고 다시 전쟁을 치를 군사적·정치적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철수한 미군과 나토군이 설령 탈레반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도하 합의에 따르면 미군은 합의 이행의 첫 단계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 1만2000여 명을 합의일로부터 135일 안에 8600명으로 줄이게 된다. 미국은 앞으로 군사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위협하지도,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으며, 올해 8월 27일까지 탈레반 지도부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약속했다.
신뢰를 확인하는 절차로 3월 10일까지 국제동맹군과 아프간 정부군에 수감된 탈레반 대원 5000명과 탈레반에 포로로 잡힌 아프가니스탄 군인 1000명을 교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가니 대통령은 미국과 탈레반 포로 석방을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다며 석방을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무려 5000명에 이르는 탈레반 포로가 석방되면 정치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앞장설지도 의문이다. 게릴라전에 능한 이들이 탈레반에 재합류하면 평화체제에 참여하기보다 전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고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들을 포로라 잡았던 그동안의 힘든 전투를 무의로 돌린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허술한 협상, 재선 명분 위한 정치쇼 비판
이번 합의는 누가 봐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위해 오는 11월 치를 대선에 영향을 주는 내용이다. 백악관은 이날 낸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마침내 미국의 최장기 전쟁을 끝내고 우리 군대를 귀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시작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거치면서 이루지 못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을 본인이 이뤘다고 강조하는 발언이다. 시리아에 이은 또 하나의 미군 철수 자랑이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상이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의 정치적인 쇼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토는 이번 합의를 지지하고 파병 규모를 줄이겠다고 하면서도 만일 상황이 악화한다면 병력을 다시 증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합의와 철군을 서두르는 듯한 인상의 미국과 결이 다른 모습이다. 아무래도 과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폭정·반인권·극단주의·여성학대, 그리고 소수민족과 소수종파(시아파) 탄압을 등을 의식한 반응이다. 미국이 이런 것을 그대로 내버려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난다면 가치전쟁에서 실질적인 패배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유엔은 이날 성명에서 평화합의를 환영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이 주도하는 여성·소수민족·젊은층을 아우르는 평화적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주권국가이자 유엔 회원국인 아프가니스탄을 의식한 발언이다. 아울러 탈레반의 과거 만행을 떠올리게 하는 성명이기도 하다. 평화는 환영하지만 탈레반의 복귀에는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탈레반 공동창설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는 평화합의에 서명한 뒤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 국경을 맺단 중국, 그리고 러시아에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흡사 아프가니스탄을 이미 장악한 듯한 발언이다.
군사적 억압은 승리, 정치적 해결은 미달
애초 전쟁의 목적은 9·11 테러의 배후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초기 공격은 알카에다의 훈련기지와 탈레반의 군사시설 공격에 집중됐다. 아프가니스탄 내의 또 다른 무장정파로 탈레반에 맞서고 있던 북부동맹도 미군과 힘을 합쳤다. 미군과 영국군은 공습과 지상 작전을 결합한 작전으로 탈레반 장악 지역을 공략했으며, 그 해 11월 13일 탈레반을 몰아내고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그 해 12월 5일에는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가 들어섰으며 연합군은 12월 7일 탈레반의 거점인 동남부 칸다하르를 점령하고 탈레반 세력을 몰아냈다. 12월 20일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주도의 다국적 부대로 아프가니스탄 내 치안과 안정을 담당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설립을 승인했다. 2002년 1월 2일 ISAF 선발 병력이 현지에 도착해 활동에 들어갔으며, ISAF의 지휘권은 2003년 8월 11일 나토에 넘어갔다. ISAF의 활동은 2014년 12월 28일 종료됐다.
하지만 후속으로 2015년 1월 1일부터 나토 주도로 아프가니스탄군에 대한 훈련·자문·지원 임무를 주로 하는 ‘확고한 지원 작전(Operation Resolute Support)’이 이어지고 있다. 최대 136개국에서 파병해 한때 5만5000명에 이르던 병력은 1만3000명 수준으로 줄었다. 미국은 계속 병력을 줄이며 다른 나토 회원국에 임무를 맡겨왔으며, 최종 철군을 향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왔다. 그 결과가 이번 도하 합의인 셈이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나, 미국에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 민주주의·인권 가치는 미군 철수라는 트럼프의 이익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21세기 들어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현재)과 이라크 전쟁(2003년~2011년 미군철수까지), 리비아 공습(2011년), 시리아 공습(2017년) 등의 전쟁을 벌여왔다. 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 전면적·부분적으로 개입해 군사적으로 ‘퍼펙트게임’을 거둔 게 사실이다.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정보력에서 미국에 대항할 세력이 지구상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련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의도했던 국제정치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철군도 그 중의 하나다. 미국은 강하지만, 주먹만으로는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해준 것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도하 합의다. 앞으로 미국과 국제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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