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자산은 시니어에게 있다”... 은행권, 수익 모델의 ‘대이동’
- [시니어 파이낸스]①
1000만 고령층, 가계 자산의 중심 부상…‘지키고 물려주기’ 관심
상속·치매 리스크 대비한 ‘신탁’, 단순 예금 넘어 라이프케어 경쟁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대한민국 금융 시장의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2024년 12월,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일본이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가는 데 12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단 7년 만에 이 고개를 넘었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속도다. 금융 서비스의 방향도 고령자들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 은행의 주 수익원이 경제활동이 활발한 3040 세대의 대출이었다면, 이제는 1000만명을 넘어선 고령층의 ‘자산 관리’가 은행의 생존을 결정지을 미래 먹거리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1600만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1955~1974년생)들이 자산 승계와 노후 설계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은행권의 자산관리(WM·Wealth Management) 전략도 완전히 새로 쓰이고 있다.
고령자 1000만 시대, 자산 평균 5억4000만원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25 KB골든라이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0세 이상 고령자 1000만 여명의 평균 자산 규모는 약 5억4000만원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 자산의 75.2%는 부동산에 편중된 것으로 확인됐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시장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자산 상속에 대한 관점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중산층 상속 예정자의 과반이 향후 자녀에게 물려줄 자산으로 ‘금융 자산’ 비중을 높이려는 추세다. 부동산은 관리가 어렵고 분할이 쉽지 않지만, 현금성 자산은 유연한 노후 생활과 공평한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금융연구소는 ‘중산층의 상속 경험과 계획’ 조사 보고서를 통해 이제 은행의 역할은 단순한 예금 수취를 넘어, 묶여 있는 부동산 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인 현금 흐름’으로 전환해 줄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택연금 연계 상품이나 월 배당형 신탁 상품이 각광받는 이유다.
이제 ‘상속’은 일반적인 자산관리 영역으로 들어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과거 상속세는 소수의 자산가만 걱정하는 영역이었지만,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이제는 중산층에게도 현실적인 문제가 됐다. ‘대한민국 금융소비자 보고서 2025’에 따르면 기혼자의 약 3분의 1은 자산 이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가족 간의 분쟁 없는 깔끔한 승계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상속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비중은 83%에 달했다.
문제는 상속에 대비해 충분히 준비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1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들은 ‘유언대용신탁’ 서비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살아있을 때는 본인의 자산을 관리하고, 사후에는 미리 정해둔 방식대로 자산을 배분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이 시장은 향후 은행 WM 수익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상속을 대비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대한 변수가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치매는 금융 자산을 동결시키고 삶의 질을 파괴하는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 꼽힌다. 2025년 기준, 고령 인구 중 약 9%인 97만 여명이 치매 환자로 추정된다. 경도인지장애까지 포함하면 고령층 3명 중 1명이 인지장애 위험군이다.
인지능력이 저하되면 본인의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이는 곧 자산관리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금융 사기에 노출되거나 필요한 병원비를 인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주요 은행들은 치매 단계별로 자산을 인출·관리해주는 ‘성년후견제도’와 연계된 신탁 상품을 강화하고 있다. WM의 목표는 단순히 수익률 1~2%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고령자가 인지 능력을 상실했을 때도 자산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본인을 위해 쓰이도록 하는 ‘안전망 구축’으로 진화했다.
점포 줄지만, 시니어‧자산가 대면 서비스는 늘어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은행 점포는 줄어들고 있지만, 자산가 계층인 시니어들은 여전히 ‘대면 상담’을 원한다. ‘2025 한국 부자 보고서’는 자산이 많을수록 은행원과의 대면 접촉을 통해 복합적인 자산관리 솔루션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은행들이 점포 숫자는 줄이고 있지만, 남은 점포를 시니어나 자산가를 위한 특화 공간으로 재설계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큰 글씨 서비스나 간편 인증 등 앱 UX 고도화를 비롯해 점포 내부에 문화 공간을 결합하거나 상속·세무 전문가가 상주하는 ‘라운지형 점포’도 증가세다. 이는 시니어를 단순한 ‘디지털 소외계층’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가장 정교한 상담이 필요한 ‘핵심 고객군’으로 대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시니어를 위한 관련 금융상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내 집에서 살며 매달 월급처럼 받을 수 있는 주택연금’이 있다. 부동산 비중이 높은 한국 시니어의 특성을 고려해, 집을 담보로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금리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상품이다.
하나은행의 ‘하나더넥스트 내집연금’은 고가 주택 보유자도 이용할 수 있는 민간형 주택연금이다. 인지능력이 저하되더라도 자산이 묶이거나 사기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고, 병원비 등 필수 자금을 안정적으로 집행하는 상품도 있다.
KB국민은행의 ‘KB골든라이프 치매안심신탁’은 치매 발병 시 자금 관리가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 전문가가 자산을 관리해 준다. 우리은행 ‘우리내리사랑 안심신탁’은 가입 문턱을 1,000만 원으로 낮춘 대중형 신탁이다. 생전에는 생활비 지급 설계를 통해 본인의 노후를 대비하고, 사후에는 미리 정한 대로 재산을 상속한다. 이 밖에 유언장을 대신해 금융기관과 계약을 맺고, 사후에 자녀나 손자녀에게 자산을 안전하게 전달하는 유언대용신탁도 있다. 신한은행 ‘유언대용신탁’은 금전뿐만 아니라 부동산, 보험금 청구권까지 신탁이 가능하다. 상속인 전원의 동의 없이도 사후 수익자에게 즉시 집행이 가능해 가족 간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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