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닥터자르트가 완성한 ‘투자 판’ 에이피알이 뒤집다
- [글로벌 자본의 K뷰티 투자 변곡점]①
브랜드 통매입보다 지분 투자
피델리티가 바꾼 K뷰티 공식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K-뷰티의 투자 방식이 다시 쓰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글로벌 대기업이 성장성이 우수한 K-뷰티 브랜드를 사들이며 투자를 해왔다. 그런데 최근 글로벌 자본의 움직임은 달라지고 있다. 브랜드를 통째로 인수하기보다 지분 투자를 통해 해당 회사의 성장 잠재력에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의 에이피알 투자가 대표적이다. 업계는 K-뷰티가 ‘엑시트’(투자금 회수)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독립 성장’ 중심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달라진 투자 공식
2010년대 후반은 K-뷰티 인수합병(M&A)의 전성기였다. 중국을 중심으로 K-뷰티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글로벌 화장품 기업들은 브랜드를 직접 키우기보다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한국 화장품 회사를 사들이는 전략을 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닥터자르트다. 더마코스메틱 브랜드 닥터자르트 운영사 해브앤비는 2019년 에스티로더에 약 11억달러(당시 약 1조3000억원)를 받고 엑시트했다. 국내 화장품업계 ‘1조원 엑시트’라는 상징성을 남긴 거래였다. 이어 로레알이 3CE를, 유니레버가 카버코리아(AHC 운영사)를 품에 넣으며 K-뷰티 브랜드 인수 열풍이 불었다.
당시만 해도 이 전략은 양쪽 모두가 ‘윈-윈’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글로벌 기업은 브랜드 인수를 통해 ▲검증된 브랜드 ▲고객 기반 ▲연구개발 역량을 한꺼번에 확보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반면 K-뷰티 브랜드 창업주는 해외 유통망과 자본을 발판으로 초기 목적이었던 엑시트에 성공하며 부를 축적했다. 글로벌 기업이 성장한 K-뷰티 브랜드를 품고, 창업자는 투자 성과를 실현하는 구조가 하나의 성공 공식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닥터자르트 이후 3CE와 AHC까지 대형 거래가 잇따르면서 ‘브랜드를 키워 글로벌 기업에 매각한다’는 공식이 K-뷰티 업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이 공식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한 브랜드를 통째로 인수하던 글로벌 자본이 최근 지분 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실제로 에스티로더가 지난해부터 닥터자르트 매각을 추진해 구설에 올랐다. 한때 K-뷰티 M&A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던 브랜드가 7년여 만에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면서 글로벌 자본이 K-뷰티 투자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에이피알이 뒤집은 판
에이피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는 지난 5월부터 6월 초까지 에이피알 주식 187만4860주를 매입해 지분 5.01%를 확보했다. 투자 규모는 약 7500억원으로 추산된다. 피델리티는 공시를 통해 “경영 참여 목적이 아닌 단순 투자”라고 밝혔다.
업계는 이번 투자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피델리티의 5.01% 지분은 글로벌 자본의 투자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과거 같으면 글로벌 화장품 기업의 인수 대상으로 거론됐을 성장 기업에 이번에는 세계적인 장기 투자 기관이 주요 주주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회사 인수보다 성장 가능성에 먼저 투자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해석이다.
피델리티는 에이피알의 성장 구조에 베팅을 했다. 메디큐브를 앞세운 스킨케어를 넘어 ▲홈 뷰티 디바이스 ▲의료기기 ▲폴리뉴클레오티드(PN) 원료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다. 실적도 탄탄하다. 에이피알은 2026년 1분기 매출 5934억원, 영업이익 1523억원으로 분기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해외 매출 비중은 89%에 달한다. 미국·일본·유럽에서 모두 성장세를 이어가며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김병훈 에이피알 대표는 6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서 열린 ‘비즈니스 오브 뷰티 글로벌 포럼 2026’(BoB 글로벌 포럼 2026) 연단에서 “뷰티테크 역량을 바탕으로 글로벌 뷰티 시장에서 롱제비티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겠다”고 밝히며 투자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김 대표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뷰티 카테고리 내 이슈를 선점하는 능력은 업계도 놀랄 정도로 상당히 탁월하다”고 귀띔했다.
지분 투자가 추세될 듯
비단 에이피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영국 장기투자 기관 M&G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달바글로벌 지분 5.08%를 확보한 뒤 7.23%까지 보유 비중을 늘렸다. 달바글로벌의 외국인 지분율은 지난해말 기준 16.9%에서 최근 38%대로 높아졌다.
구다이글로벌 역시 프리IPO 투자 유치 과정에서 약 4조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국내외 투자업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브랜드를 통째로 인수하기보다 성장 기업의 주주로 먼저 참여하는 방식이 새로운 투자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패션·뷰티 전문 매체 ‘비즈니스 오브 패션’은 소수 지분 투자가 대규모 인수보다 투자 부담을 낮추면서도 성장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브랜드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 성장 과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실제 유니레버벤처스와 코티(Coty), LVMH 등 글로벌 기업들도 초기 성장 브랜드를 대상으로 소수 지분 투자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 IB업계 관계자는 “뷰티업계에 M&A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 경쟁력과 시장 환경에 따라 인수합병은 여전히 유효한 성장 전략”이라면서도 “피델리티처럼 글로벌 자본이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기보다 성장에 투자하는 사례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K-뷰티의 성공은 얼마에 회사를 팔았는지가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얼마나 오래, 얼마나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인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브랜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창업자가 경영을 이어가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자본이 성장률에 투자하는 방식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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