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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니즘, 일시적 유행인가? 새로운 문화인가? [허태윤 브랜드 스토리]

화장품·패션 등 산업으로 확장한 비거니즘
단순 채식주의가 아닌 생태적 철학으로 자리매김

 
지난 10월 서울 광화문사거리에서 펼쳐진 비건 채식 촉구 퍼포먼스 모습. [사진 연합뉴스]
 
‘랄프’라는 이름의 화장품 실험용 토끼가 주인공인 영상이 SNS를 통해 총 1억5000만건 이상의 조회 수와 7억4000만개의 틱톡 태그를 기록하며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심지어 멕시코에서는 ‘랄프’ 영상이 나온 지 5개월만인 지난 9월에 130만 명의 청원이 이어진 끝에 동물실험을 금지하는 보건법개정이 상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 ‘랄프 구하기(Save Ralph)’는 화장품 실험에 이용되는 토끼가 주인공인 스톱모션(물체를 조금씩 움직이면서 연속 동작을 연출하는 기법) 방식으로 제작된 단편영화다. 국제 동물보호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HSI)’이 할리우드 감독, 배우와 함께 화장품 동물실험 반대를 위해 만든 불과 3분 54초짜리 이 숏폼 영화는 지난 4월 7일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비건’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에게 동물실험 반대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했다. ‘화장품 동물실험 금지’에 대해 전 세계에서 5백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청원에 서명하는 행동을 보여준 것이 그 증거다.  
 
영화 '랄프 구하기'에 나오는 랄프 모습. [사진 화면캡처]
 
화장품과 각종 욕실용품 독성 실험에 이용되는 토끼 ‘랄프’는 영화 속에서 이미 실험으로 인해 한쪽 눈이 멀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영상 속 토끼는 “저는 실험실의 토끼죠. 저희 아버지도 그랬고 어머니와 제 형제자매들 모두 실험용이죠. 다들 일하다가 죽고, 저도 그럴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쪽 눈이 멀고, 한쪽 귀는 들리지 않고 척추는 심하게 화상을 입었지만, 인간이 아름다움의 환상을 가질 수 있게 했다”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음성이 나온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어떤 동물도 (인간의)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죽거나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채식주의를 넘어 동물복지, 친환경 라이프 스타일로 확장

SNS에서만 공개된 이 영상에 수많은 사람이 공감을 표하는 현상에는 비거니즘(Veganism)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트렌드가 있다. 1944년 영국의 도널드 왓슨(Donald Watson)에 의해 제안된 비건(Vegan)은 원래 달걀과 우유도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주의를 뜻하지만, 최근의 확장된 의미는 먹는 방식 그 이상의 생태적 라이프 스타일이나 생태적 철학을 의미한다.  
 
채식은 기본이고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을 사용하고, 동물성 재료나 환경공해를 일으키는 재료를 이용한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등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사려 깊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포괄한다. 확장된 비건의 가치는 채식과 동물복지, 친환경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비거니즘이 마케팅과 브랜딩의 새로운 화두가 된 것은 코로나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 19의 등장은 많은 부분에서 인류에게 생태적 재앙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실제 광고회사 대홍기획이 발표한 ‘데이터로 읽는 비거니즘의 맥락’ 보고서를 보면, 비거니즘에 대한 소셜 언급량은 2019년 말 이후 급증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건강과 안전, 행복에 대한 근본적 욕구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환경과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는 MZ세대를 중심으로 자기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환경과 동물복지의 윤리적 차원에서 비건에 동참하는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비거니즘은 이제 더는 소수의 하위문화가 아닌,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주류 문화가 되고 있다.  
 

식품, 화장품, 패션 등 전 산업으로 퍼지는 비건 열풍

국내 편의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비거니즘 식품들. [중앙포토]
 
비건에 대한 구애는 우선 식품 분야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콩과 버섯, 호박 등의 채소에서 추출한 단백질을 효모, 섬유질 등과 함께 배양해서 고기의 식감과 풍미를 그대로 재현한 대체육 시장이 비거니즘의 확산에 힘입어 많이 증가 하고 있다. 미국의 시장 조사 전문기관인 얼라이드마켓리서치는 2019년 45억 달러(약 5조3300억원)였던 대체육 시장이 매년 7% 이상씩 성장하며 2027년까지는 두 배 이상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 ‘비욘드미트(Beyond Meat)’라는 회사는 2013년부터 식물성 재료로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현존하는 대체육 회사 중 가장 육고기와 유사한 대체육 가공기술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이 시장의 ‘테슬라’로 인정받고 있다. 또 세계적인 햄버거 체인인 맥도널드가 미국 주요 도시에서 식물성 고기로 만든 버거를 출시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비건 상품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최대의 편의점인 GS25는 3종이었던 비건 상품을 올해 안으로 30종으로 늘릴 계획임을 밝힌 바 있다. 경쟁사인 CU 역시도 최근 관련 상품의 매출이 15배 이상 증가하면서 관련 제품 수를 3배 이상 늘린 바 있다.  
 
비건은 식품뿐 아니라 패션, 화장품 분야는 물론, 관광, 테크 등 거의 모든 산업영역에서 분명한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잘 알려진 명품 브랜드 구찌(Gucci)는 자체 연구 개발을 통해 목재 펄프와 비스코스 등 식물성 원료 기반의 비건 레더 ‘데메트라’를 개발, 신제품 스니커스에 접목해 출시했다. 가죽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 그냥 보면 가죽과 다를 바가 없고 기능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보니 가죽이 아님에도 가격은 가죽 제품과 별 차이가 없다. 모피 사용제품의 명가였던 구찌는 래더프리(leather-free)를 선언하면서 생태적 비건의 가치를 브랜드 이념에 더해 MZ세대의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동물 가죽이나 털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비건타이거의 의류들. [사진 비건타이거]
 
에르메스도 버섯 균사체를 이용해 진짜 가죽과 비슷한 촉감과 내구성을 가진 비건래더를 자사의 핸드백에 적용해 비거니즘에 동참했다. 우리나라에는 아예 비건을 브랜드 전면에 내건 패션 브랜드가 주목을 받고 있다. ‘비건 타이거’ 가 그 주인공이다. 이 브랜드는 소재는 물론이고 심지어 패션 부자재인 단추와 실까지도 비건 소재로 제작하고 동물을 모티브로 한 강렬한 프린트로 패션계의 비건 돌풍을 주도하고 있다. 생명을 착취해 생산한 모든 소재를 사용하지 않음을 브랜드 이념으로 출발한 이 브랜드는 수년째 비건 페스티벌을 기획해 국내의 비건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일을 해왔으며 판매수익의 10%를 동물관광산업 반대 운동 비용으로 기부하기도 한다.  
 
비거니즘의 이념이 활발하게 퍼지고 있는 곳이 화장품 산업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러쉬’나 ‘더 바디샵’ 같은 브랜드들이 친환경, 동물복지를 브랜드 이념으로 마케팅을 펼쳐온 이 시장은 비교적 비거니즘의 수용성이 높은 분야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6년 세계 최초로 ‘기후변화 기반’ 화장품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 ‘톤28’이라는 브랜드가 눈에 띈다. 소비자와 상담 후 계절과 날씨. 피부의 특성 등 빅데이터를 분석해 매월 계약 고객에게 최적화된 맞춤 화장품을 구독 방식으로 제공하는 이 회사는 유엔의 ‘SDGs(지속 가능 개발목표) 협회가 선정한 글로벌 지속 가능 3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브랜드는 용기와 포장을 최소화하는 고체 화장품의 개척자로 ‘제로 웨이스트’ 와 ‘제로 플라스틱’을 실천하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바디바’ ‘샴푸바’ ‘고체 치약’ 등 고체 형태의 화장품은 천연 성분의 함량이 높고 무방부제로 자연분해가 쉬워 사람과 환경에 유익한 것으로 알려졌다. ‘톤28’은 환경에 해가 없는 종이 용기 개발에도 성공해 타 화장품 용기 대비 플라스틱 비율을 98%까지 줄여 환경공단의 인증을 받기도 했을 뿐 아니라, 용기 비용 90%, 성분비용 10%가 화장품 마케팅의 기본인 시대에 성분비용 90%, 용기 비용 10%라는 원칙을 지키며 바른 ‘바를 거리’ 문화를 만들어 가는 대표적 비건 화장품으로 비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브랜드는 국내에 판매되는 30개 이상의 비건 화장품 브랜드를 대상으로 빅데이터를 이용한 평판 조사에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달바’ ‘러쉬’를 제치고 지속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비거니즘, 단순한 유행이 아닌 문화의 조짐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팝아트의 현대적 사실주의에 저항하며 절제된 미학과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 사조에서 출발했다. 이후 음악, 패션, 건축, 문학, 심지어 IT산업의 UI, UX 등 여러 분야에서 간결성, 단순성, 질서 같은 개념으로 확장되고, 검소함, 비움, 무소유 같은 삶의 태도와 연결되면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이른바 ‘의미의 포용성’을 갖추었다. 또한 수많은 정보와 부가적인 기능이 본질을 흔드는 제품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자 피로를 느끼는 소비자들의 ‘본질에 집중하고자 하는 ‘욕구’가 미니멀리즘에 연결이 되면서 미니멀리즘은 대안적 삶의 방식이자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욕구의 연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비거니즘 또한 ‘의미의 포용성’과 ‘욕구의 연결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 하나의 문화가 된 미니멀리즘과 유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유와 달걀조차 입에 대지 않는 극단적 채식주의를 의미하는 초기의 의미를 넘어, 다른 존재를 돕는 동물복지의 개념과 눈앞에 다가온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으로부터 자신과 사회를 지키고자 하는 친환경의 태도를 포용하는 개념으로 진화한 것이 그것이다. 또 채식이 채워주는 건강에 대한 욕구와 동물을 포함한 다른 존재를 도와주면서 얻는 행복의 욕구, 그리고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로부터 사회를 지켜 내고자 하는 친환경의 노력은 안전이라는 욕구와 연결됨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서면 비거니즘은 결코 잠시 나타나는 일시적 유행이 아닌 문화로서의 조짐이 뚜렷하다. 또 브랜드가 ‘비거니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태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대학교수다. 제일기획과 공기업, 플랫폼과 스타트업에서 광고와 마케팅을 경험했다. 인도와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글로벌마케팅에 관심을 가졌고, AR과 플랫폼 기업에 관여하면서 최근엔 플랫폼 기업의 브랜딩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외대에서 광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신대 IT콘텐츠학과 교수다. 

허태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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