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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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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 수장 제거로 본 표적 암살 공작의 국제정치학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미국이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71)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드론에서 발사한 미사일로 제거하면서 표적 암살 공작이 국제적으로 새롭게 주목받는다. 적의 우두머리나 주요 인사를 드론을 이용해 대놓고 제거하는 표적 암살 공작이 국제정치의 주요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시각으로 7월 31일 오전 6시 18분(미국 동부 서머타임 기준 30일 오후 9시 48분)에 카불 중심부 셰르푸르 지역의 저택 발코니에 나와 있던 알자와히리를 드론(무인기)에서 발사한 미사일로 제거했다. 이집트 안과의사 출신인 알자와히리는 2001년 9‧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의 오른팔로 테러를 사실상 설계한 인물로 알려졌다. 빈 라덴이 2011년 5월 미군 특수부대 DEVBRU(해군 특수전 개발단)의 공격으로 숨진 뒤 그 뒤를 이어 알카에다의 수장을 맡아왔다. 미국은 빈 라덴의 두뇌 노릇을 한 최측근이자 후계자인 알자와히리를 드론으로 제거하면서 21년 만에 알카에다 최고 지도부에 대한 보복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집트 남성의 2020년 기대여명인 69.88세를 이미 지난 알자와히리를 9·11 21년 만인 이제야 뒤늦게 표적 암살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회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AP통신·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블룸버그통신·NBC 등 미국 매체와 타임오브이스라엘·독일의소리(DW)·프랑스24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 작전은 장기간의 공작으로 이뤄졌다. 알자와히리는 가족과 함께 파키스탄에 은신해 있었는데, 2021년 8월 30일 미군이 카불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가족이 먼저 카불로 옮겼다. 이들은 카불로 옮긴 뒤 탈레반 내 강경파 분파인 하카니 네트워크의 지도자인 시라주딘 하카니가 제공한 부촌의 저택에 머물러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한 주 전에 작전을 승인했으며, 2022년 초 알자와히리가 카불로 옮긴 뒤부터 정보당국이 그를 감시해왔다고 말했다. 미국이 알자와히리의 카불 이동을 2022년 초에야 인지했다는 이야기다. 의문은 최초 정보를 누가 제공했느냐로 향한다. 눈여겨볼 점은 이스라엘의 해외 정보‧공작 기관 모사드의 다비드 바르네아 국장이 지난해 12월 5일 미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포스트와 타임오브이스라엘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그해 6월 취임한 바르네아가 맡은 가장 큰 임무는 이란핵합의(JCPOA) 복귀를 추진했던 바이든 행정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알자와히리 가족의 카불 이주를 인지하고 감시를 시작했다는 올해 초가 바르네아가 워싱턴을 방문한 지 한 달쯤 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스라엘로선 미국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카불에서 수집한 초특급 정보를 미국과 공유함으로써 미국의 JCPOA 복귀 포기나 연기를 설득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의 '시차'는 정보 소스를 감추기 위한 연막작전일 수 있고, 미국이 이스라엘이 제공한 정보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일 수도 있다. 바이든이 취임 뒤 처음으로 7월 14~15일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당시 많은 양보와 립서비스를 제공한 점도 이런 추측의 근거로 볼 수 있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밀접하지만, 바이든은 이번 방문에서 자신의 공약에서 상당히 후퇴해 이스라엘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목할 점은 바이든이 15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이란이 핵무기를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가진 모든 국가적 역량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는 구절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바이든은 양국 정상회담에선 "외교가 최선의 방안임을 믿는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채널12와의 인터뷰에선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막기 위해 최후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 군사적 옵션의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 용인하는 미국의 의도 대선 공약으로 이스라엘이 반대해온 이란핵합의(JCPOA) 복귀를 외쳤던 바이든으로선 의외다. 이스라엘로선 대미 외교의 개가라고 부를 만하다. 바이든의 기존의 입장을 선회해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 가능성에도 고개를 끄덕여준 것은 미국 내 유대인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과 별도로 바이든이 이스라엘에 뭔가 신세를 진 게 있지 않으냐는 짐작을 낳게 한다. 아무튼, 미국 정보 당국은 알자와히리의 집을 6~7개월간 계속 추적한 결과 그가 가족과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집은 2021년 8월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면서 빈집으로 있다가 탈레반 정부의 국방부 소유로 넘어갔으며, 최종적으로 하카니가 소유하게 됐다. 탈레반은 2020년 2월 29일 카타르의 도하에서 탈레반 측과 만나 미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탈레반이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과 관계를 끊고 자신들의 지배지역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한다는 ‘도하 합의’에 서명했다. 하지만 탈레반 내에서도 극단적인 주장을 펴온 하카니는 이를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확인된 자와히리의 위치는 올해 4월 초 바이든의 국가안보 부보좌관인 조내선 파이너와 국토안보 보좌관인 엘리자베스 셔우드랜돌이 상부에 알렸으며, 그 직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바이든에게 이를 보고했다. 미 정보 당국은 알자와히리가 집의 발코니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미국 당국은 집의 모형을 만들어 공격과 함께 다른 거주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을 강구했다. 바이든은 이 모형을 7월 1일 직접 살펴봤다. 그는 미국 최고정보기관인 국가정보국(DNI)의 에이브릴 헤인즈 국장과 중앙정보국(CIA)의 윌리엄 번스 국장, 국가대테러센터(NCTC)의 크리스틴 아비자이드 등 정보‧공작 최고책임자들과 공격을 논의했다. 바이든은 7월 25일 최종 보고를 받고 작전을 승인했다. 공격에는 드론이 동원됐다. 알자와히리가 아침에 발코니에서 나와 선채로 밖을 내다보자 상공을 은밀하게 선회하던 드론이 AGM-114 헬파이어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알자와히리는 현장에서 즉사했지만 같은 집에 살던 가족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AGM-114의 변형인 AGM-114 R9X는 미사일에 폭발물 대신 동역학 탄두를 장착했다. 발사 뒤 날카로운 대형 칼날이 여러 개 튀어나와 강력한 힘으로 목표물을 난자한다. 인간 목표물을 대상으로 사용하면서 이른바 ‘부수적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특수 미사일로, ‘닌자 폭탄’ ‘나르는 긴수(미국의 유명 식칼 브랜드)’로 불려왔다. 미국 정보당국은 도·감청과 위성 사진 등으로 알자와히리의 사망이 확인된 뒤인 8월 1일에야 작전을 공개했다. 미국은 9‧11테러의 핵심 인물인 알자와히리를 제거함으로써 테러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것은 물론 지난해 8월 카불 철수에서 보여준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운 모습에 대한 만회 효과도 어느 정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바이든이 11월 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가안보 부문에서 어느 정도 점수를 얻었을 수 있다. 미국은 2020년 1월 4일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쿠드스군 사령관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의 국제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암살했지만, 이라크는 미군과 정보기관이 주둔해 관련 정보 수집과 작전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적진이나 다름없는 아프가니스탄이 카불에서 공작과 작전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차별화한다. 물론 드론은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대테러 목표물 공격을 위해 출격 기지로 사용해온 이웃 파키스탄 서남부의 비행장에서 이륙했을 가능성이 크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가까운 나라지만 과거 미국과 사이가 좋을 당시 확보하거나 제3국에서 조달한 미국산 F-16 전투기가 127대 이상이 있어 이를 계속 운용하려면 미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대표적인 친중 국가임에도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선 드론 이착륙장을 제공하는 등 협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드론 조종은 미 본토의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조정실에서 위성 통신을 이용해 했을 것이다. 조종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무인-원격 공격 시스템이다. 보복 악순환 부르는 표적 암살과 전쟁 기술 눈여겨볼 점은 2020년 솔레이마니 공격 당시 이란은 보복을 외치며 이라크의 미군기지에 미사일 발사했지만 결국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마무리됐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없었던 이란은 이라크에서 벌어진 자국 주요 인사의 암살에 더는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 미국 CIA의 대테러센터(CTC)는 2001년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예멘 등에서 무인기를 이용한 표적 암살 작전을 수행해왔다. 미국은 CTC 등 다양한 기관의 대테러 조직을 연결해 국가 대테러센터(NCTC)를 구성했다. 하지만 CTC는 조직의 수장도 ‘로저’라는 암호명으로만 알려졌을 뿐 누구인지 비밀에 부치는 등 철저히 비밀리에 은밀한 작전을 수행해왔다. 이스라엘은 군과 해외 정보‧공작 기관인 모사드를 앞세워 무인기를 통한 표적 암살 작전을 수행해왔다. 2004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정치‧군사 조직인 하마스의 창시자 아메드 야신을 가자지구에서 표적 암살했다. 이스라엘군은 무인기로 위치를 확인한 뒤 F-16 전투기를 인근에 보내 굉음으로 주의를 분산한 뒤 아파치 공격용 헬기를 출동시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해 야신을 암살했다. 2007년 이후에는 무인기로 가자지구의 로켓 발사대를 수색‧파괴하는 작전도 벌여왔다. 하지만 2021년 5월 6~21일 예루살렘 일부 지역 팔레스타인 주민의 강제 이주와 알아크사 사원에서의 충돌 이후 하마스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가한 로켓 공격을 막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로켓의 상당수를 아이언돔으로 불리는 방공 시스템으로 요격했지만, 완전히 봉쇄하진 못했다. 결국 하마스의 로켓 공격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보복 폭격 속에서 256명의 팔레스타인인과 13명의 이스라엘인이 목숨을 잃었다. 표적 암살이 대를 이어가는 적개심을 부추긴 셈이다. 모사드는 최근 들어 이란의 핵 과학자를 상대로 암살 공작을 벌여왔다. 핵 개발을 추구하는 이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핵심 인력을 제거해 개발 속도를 줄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역시 국가 수준에서 벌이는 표적 암살 공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오토바이 폭탄, 원격 조종 기관총 등 다양한 무기가 동원됐다. 드론을 활용한 표적 암살 공작은 은밀성·기동성·신속성을 확보한 데다 지휘부나 두뇌에 해당하는 뱀무리 제거로 인한 심리적‧정치적 효과가 크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물론 러시아‧중국 등 다양한 나라가 은밀하게 활용해왔다. 드론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더하고 여기에 무선통신기술, 원격제어기술 등 기술적 진보가 더해지면서 이는 더욱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적에게 우두머리를 잃는 상실감과 함께 언제, 어디에서 당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을 줄 수 있어 상대를 효과적으로 움츠러들게 할 수 있다. 게다가 탄두에 폭발물 대신 칼날을 장착해 부수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AGM-114 R9X의 활용으로 언론과 인권단체의 비난을 잠재울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이 작전의 활용을 부추길 수 있다. 표적 암살은 어둠의 전쟁에서 효과가 큰 작전으로 평가된다. 다만 정확한 정보와 정밀한 작전계획의 확보가 난제다. 아무나 벌일 수 있는 작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상대가 실력이 있는 경우라면 보복의 악순환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그런 우려에도 이젠 표적 암살이 국경을 넘어 글로벌 단위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시대가 됐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주권국가를 대놓고 침략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은 또 하나의 안보 충격이다. 뱀 머리가 아무리 제거돼도 지구촌은 편할 날이 없어 보인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8.06 18:00

7분 소요
[국제] 알카에다 수장 알자와히리, 美 드론 공습으로 사망

차이나 포커스

(워싱턴=신화통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알카에다의 수장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지난달 30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드론 공습에 의해 사망했다고 1일(현지시간) 밝혔다.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연설을 통해 이같이 전하며 미국 정보원이 수년간의 수색 끝에 올해 초 알자와히리의 카불 은신처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알자와히리 제거 작전 과정 중 가족이나 민간인 피해는 없었다고 덧붙였다.바이든 대통령은 알카에다의 고위 인물로서 알자와히리가 2001년 9·11 테러를 계획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며 2000년 미군 구축함 콜호 폭파 테러와 1998년 케냐 및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등 사건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고 강조했다.백악관의 한 고위 관료는 바이든 대통령 연설 시작 전 브리핑을 통해 알자와히리가 지난달 30일 오후 9시48분(미국 동부시간) 숨어 지내는 가옥 발코니에서 미 드론이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알자와히리는 1951년 이집트 태생으로 2011년 5월 알카에다의 우두머리였던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서 미군에 의해 사망하자 같은 해 6월 알카에다의 지도자로 임명됐다.

2022.08.02 16:26

1분 소요
테러 위협은 공항 안에 있다

항공

이집트항공 여객기의 추락사고 전부터 공항 직원들이 관련된 테러 의혹이 제기돼 지난해 10월 31일 오전 5시 50분, 메트로젯 9268편은 샤름 엘셰이크 국제공항으로부터 이륙 허가를 받았다. 그 공항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홍해 관광명소의 중심지다. 그 러시아 항공기의 조종간을 잡은 사람은 1만2000시간 이상의 비행기록을 가진 조종사 발레리 네모프였다. 그는 부조종사 세르게이 트루카초프와 함께 18년 된 에어버스 321-200의 엔진을 풀가동시켰다. 217명의 승객 대다수는 이집트의 태양 아래서 여가를 즐긴 여성과 어린이였다. 나머지 승객은 샤름 엘셰이크 공항에서 마지막 날 밤의 환락을 즐긴 듯했다. 훗날 검시 보고서에선 그들 중 20명에서 음주 기운이 남아 있었으며 3명에게선 향정신성 약품 성분이 나타났다.창측 31A 좌석에 앉은 마리아 이블레바(15)와 그녀 앞 좌석 30A의 나탈리아 바샤코바(77)는 약 4시간 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좌석 약 275㎝ 아래 화물칸 내 2개의 가방 사이에 폭탄이 한 개 숨겨져 있었다. 러시아 수사당국은 시리아에 기반을 둔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이집트 지부에 충성하는 수하물 담당자가 화물적재 작업 중 설치한 폭탄이라고 믿는다.오전 6시 12분 56초, 시나이 사막 북부 9.4㎞ 상공을 비행하던 기내에서 약 900g의 고성능 폭발물이 터졌다.여객기가 산산조각 나면서 사막으로 추락해 224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전원 사망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전쟁터 이외 지역에서 IS가 일으킨 테러 중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사건이었다. 이집트 영토에서 그리고 러시아 항공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메트로젯 테러는 이집트의 치안뿐 아니라 모든 공항의 주요 취약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승객이 아니라 공항 직원에서 비롯되는 위험이다. 수사팀의 주장대로 과격파 무장단체들이 그들에 동조하는 지상 근무원을 이용해 메트로젯 9268 항공편에 폭탄을 몰래 반입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집트나 샤름 엘셰이크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일 수도 있다.“제한구역 근무자들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는 것이 항공업계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항공기 납치와 폭파의 역사(Violence in the Skies: A History of Aircraft Hijacking and Bombing)’의 저자인 필립 바움은 말한다. “최근의 테러 공격은 모두 기존의 탑승자 심사절차를 완전히 우회했다.”지난 5월 19일 프랑스 파리를 떠나 카이로로 향하던 이집트항공 여객기가 지중해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은 공항보안에서 이 같은 취약점에 관한 우려를 한층 고조시켰다. 수사팀은 관제사와 비행기 사이의 연락이 두절되기 전 3분 사이 객실 앞부분에서 연기가 감지됐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재난(화재가 가장 유력하다)으로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사 완성 시점까지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이집트 정부가 잠수함을 파견해 사고기의 비행 데이터가 기록된 블랙박스를 수색하는 한편 당국자들은 기술적 결함을 포함해 모든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락 직후 이집트 당국자들은 테러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치안 분석가들은 사고기가 같은 날 에리트레아의 아스마라에서 튀니지의 튀니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로를 거쳐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집트항공 MS804편이 지중해 상공에서 폭탄 폭발로 추락했다면 폭발물이 파리보다는 아스마라, 튀니스 또는 카이로에서 기내에 반입됐을 가능성이 크다. 항공안전 전문가들은 내부자의 위협이 빈곤·급진주의·분쟁 지역의 공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2007년 4명의 남성이 뉴욕 JFK 공항의 연료 탱크와 송유관 폭파 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용의자 한 명은 JFK의 화물담당 직원 출신이었다. 잉글랜드 뉴캐슬에선 브리티시 항공 직원 라지브 카림이 항공기 폭파 음모 혐의로 체포된 뒤 2011년 30년 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엔 무슬림 개종자이자 항공전자공학 기술자 테리 리 로웬(58)이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함정수사에 걸려 들었다. 캔자스 주 위치타 공항에서 차량폭탄 테러를 시도한 뒤였다. 2014년에는 애틀랜타의 하츠필드-잭슨 국제공항의 수하물 취급 담당자 유진 하비가 검거됐다. 애틀랜타-뉴욕 간 비행편에 총기 최소 125정 이상을 실어 공범의 총기 밀반입을 도운 혐의였다. 이 같은 사건은 모두 세계 최첨단으로 꼽히는 보안 기술과 절차를 따르는 공항에서 발생했다.9·11 테러 당시 납치범들은 칼을 소지한 채 공항 보안을 통과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메트로젯 항공편의 폭파범(들)은 새로운 형태의 위협을 세상에 제기했다. 자폭 테러범 또는 탑승자만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테러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안전 컨설턴트로 일하는 베테랑 민항기 조종사인 마이크 비비안은 이렇게 말한다. “안전은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느냐에 좌우된다. 공항 직원이 그런 아킬레스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온갖 관련 검색과 심사를 통과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급진 과격파로 변해간다. 식품 공급자, 연료 보급자, 화물 하역자, 청소부, 유지보수·운전 담당자, 경찰, 세관원 등 공항 내부 출입이 허용되는 모든 관계자가 해당된다.”메트로젯 폭파 사건의 여파로 전 세계의 공항들은 직원의 보안 심사를 강화했다. 파리의 오를리와 샤를 드골 공항에선 보안 쇄신작업이 펼쳐졌다. 약 70명의 직원이 1급 보안지역 출입 자격을 상실했다. 그중 상당수가 극단주의 단체와의 연관성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내부자 위협에 대한 전면적인 보안 조치 실시는 말처럼 쉽지 않다. 런던 히드로 공항의 근무자는 7만6000명이다. 일일이 심사하기에는 노력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브리티시 항공은 영국에서만 매일 10만 개의 기내식, 수만 개의 음료 캔을 기내에 반입한다. IS는 메트로젯 비행편을 추락시킨 폭탄을 청량음료 캔에 숨겨 놓았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캔을 일일이 검사할 수는 없다.항공기 테러범들이 약점을 새로 찾아낼 때마다 당국은 큰 비용을 들여 철저하게 틀어막아야 한다. 하지만 공항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직원이 작정하고 약점을 파고들 때는 막기도 힘들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비행기에 밀반입된 음료 캔 폭탄 한 개는 파괴적인 위력을 지닌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불운한 승객만 희생되는 게 아니다. 메트로젯 폭파가 보여줬듯이 그것은 우방들을 이간질시키고, 관광업 기반 경제를 초토화시키고, 강대국이 특급 킬러들을 풀어놓게 하고, 전 세계의 항공사와 공항들이 짜증날 만큼 엄격한 보안절차를 더 강화하게 만들고, 항공기 여행 계획을 가진 사람들을 겁먹게 할 수 있다.지난 수개월 동안의 사건들은 고통스런 의문을 던진다. 테러범들과의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문명사회가 패함에 따라 기내 폭탄 설치의 신시대에 접어든 걸까?메트로젯 9268편의 마지막 비행 개시 20분 뒤 비행기는 약 9.2㎞ 고도에 도달했다. 자동조종 기능에 따라 날개들이 모두 수평을 유지하며 순항 고도로 비행하고, 조종사들은 평소 이륙 완료 후 그랬듯이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을 테고, 100% 이코노미석 비행기의 많은 승객은 잠을 청하고 있었을 것이다.러시아의 비상사태부(MChS, Emergency Situations Ministry)가 실시한 잔해 분석에 따르면 폭발로 인해 비행기의 알루미늄 합금 표면에 지름 15㎝의 큰 구멍 한 개와 여러 개의 작은 구멍들이 뚫렸다. 비행기 동체의 형태를 유지시키는 스트링거 일부도 날아갔다. TNT 같은 현대적인 고성능 폭발물은 보통 폭발할 때 1000배나 팽창한다. 그로 인해 객실 내에 압력이 급증하면서 30번과 31번 좌석 근처에서 동체 바닥으로부터 천장까지 돌아가며 수직으로 쪼개졌다.항공 업계가 이용하는 온라인 정보원 Flightracker.com에서 9268편의 비행 추적 관련 기초 데이터를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오전 6시 12분 56초~6시 13분 02초의 6초 사이 비행기의 고도가 두 번씩이나 약 1.2㎞ 가까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필시 그처럼 급상승과 급하강을 반복하면서 비행기의 꼬리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에 따라 비행기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 곤두박질치면서 수하물과 잔해가 하늘로 흩어진 듯하다. 한 어린이의 시신은 주요 추락지점에서 8㎞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폭파 26초 뒤인 오전 6시 13분 22초에 비행기 고도는 8.5㎞로 낮아졌고 대지속도(ground speed, 지표면을 향하는 속도)는 400노트에서 62노트로 떨어졌다. 비행기가 거의 수직 강하했다는 의미다. 그 시점에서 사고기는 비행 데이터 전송을 중단했다. 그러나 MChS의 잔해 현장 조사를 이용해 작성된 애니메이션 그래픽에 따르면 추락 중 어느 시점엔가 오른쪽 엔진이 날개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비행기가 왼쪽 방향으로 회전했다. 그리고 몇 초 뒤 왼쪽 엔진도 떨어져 나갔다. 비행기의 주요 부분은 땅에 추락해 산산조각 났다. 3시간 뒤 IS의 윌라얏 시나이라는 이집트 지하드 단체가 배후를 자처하는 트윗을 띄웠다. “IS 전사들이 220여 명의 러시아 십자군 전사들을 태우고 시나이 지방 상공을 지나던 러시아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신의 가호를 받아 모두 처치했다.”윌라얏 시나이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당국은 처음엔 테러와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이집트의 중앙항공사고 당국 책임자 아이만 알무카담은 추락 몇 시간 뒤 기자 브리핑에서 조종사가 연락을 취했었다고 밝혔다. 기술적인 결함으로 인해 시나이 북부 엘 아리시 국제공항에 비상착륙을 시도하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시작으로 비행기의 추락 원인이 테러가 아니라는 공식적인 부인이 잇따랐다. 이 같은 패턴은 이집트 당국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줬다.이는 테러범들로선 또 다른 승리였다. 그들의 적 중 하나를 나약할 뿐 아니라 멍청하게 만든 것이다. 곧 세 번째 승리도 거머쥘 참이었다. 우방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일이었다.러시아와 이집트 관계는 역사적으로 애증이 교차했지만 메트로젯 사고 당시엔 가까웠다. 이집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민선 대통령인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무함마드 무르시가 축출된 뒤 러시아는 장성 출신인 압델 파타 엘 시시 신임 대통령에게 호의적이었다.현지의 이집트 군은 실종된 비행기 수색팀을 사막으로 파견했다(시나이는 5년간 지속된 이슬람주의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이집트에서 가장 병력이 많이 배치된 지역으로 꼽힌다). 정오 무렵 이집트 매체는 시체와 잔해가 발견됐다는 1차 보도를 전했다. 동시에 러시아의 MChS는 추락 전문가와 장비를 갖춘 안토노프 특별 수송기 3대를 샤름 엘셰이크로 서둘러 파견했다.그 무렵 러시아는 추모 분위기였다. 사고기의 도착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공항에선 희생자 가족들이 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수입업체 관리자 알렉산드르 보이텐코도 있었다. 그의 여동생 이리나(37)와 조카딸 알리사(14)가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는 “조카딸의 첫 비행기 여행이었다”며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됐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들과 다른 많은 러시아인들은 해명(그리고 처벌)을 원했다. 오후가 되자 러시아 수사팀이 조사에 착수했다.시나이 사막의 중심부는 모래가 아니다. 바위들이 널리 깔린 단단한 황무지였다. 10월에도 낮 기온이 30℃를 넘었다. 며칠 뒤 추락 현장을 찾은 러시아의 한 TV 기자는 “평평한 황색 바위가 수㎞까지 뻗어 있는 비디오 게임 속 풍경”이었다고 전했다. “MChS 수색팀은 전문적이었다. 대오를 지어 걸어가면서 수㎞에 걸친 지역을 훑으며 증거를 찾았다.”피해자 가족의 대표 변호사 이고르 트루노프에 따르면 이집트 경찰은 전문성이 떨어졌다. “이륙 전 희생자 중 다수가 사진에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고가의 휴대전화뿐 아니라 가방 속에 귀중품을 갖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추락 후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집트 경찰의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러시아 기자들이 인터뷰한 MChS팀 대원들에 따르면 먼저 현장에 도착한 이집트 수사팀의 비행기 동체 파손 부위에 대한 증거 채취가 부적절했고 그 증거도 훼손됐다. 정확히 어떤 폭발물이 사용됐는지 규명하기가 어려웠다.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비행기가 격추됐을 수 있다는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기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그런 짐작은 쑥 들어갔다. MChS 요원들은 TV 기자들에게 검은색 플라스틱과 빨간색 나일론 소재의 가방 2개를 보여줬다. 모두 그을린 자국 그리고 불에 녹은 게 분명했다. 11월 1일 정오 무렵에 러시아와 이집트 수사팀은 163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하루 뒤 시신들과 신원불명의 시신 부위들이 담긴 관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보이텐코는 모친과 함께 2시간 동안 숨진 누이동생과 조카의 신체 세부 특징을 묘사하는 양식을 작성했다고 돌이켰다. 일부 가족은 DNA 검사가 끝나기 전에 시신의 매장을 주장했지만 12월 11일 검사 결과가 나온 뒤 3구의 시신이 엉뚱한 가족에게 넘겨진 사실이 밝혀져 다시 발굴해 재매장해야 했다.러시아인이 슬픔과 분노로 신음하는 동안 이집트 정부는 메트로젯 여객기가 테러공격을 받은 건 아니라고 계속 주장했다. 참사 후 4개월 가까이 지난 2월 24일, 엘시시 대통령이 마침내 사고기가 테러 공격으로 추락했다고 시인했다.그 무렵, 폭파범들이 승리로 여길 만한 움직임들이 이어졌다. 11월 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발 이집트행 항공편을 모두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유령의 도시가 된 샤름 엘셰이크는 이집트의 관광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며칠 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폭탄이 사고 원인이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크렘린 정부는 이어 전 세계적으로 범인들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는 폭파범 검거의 결정적인 단서에 현상금 5000만 달러를 내걸었다. 그런 조치가 범인의 생포나 처형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이슬람주의 전사들은 자신들의 도발에 대응해 군사적 또는 그에 준하는 작전을 전개할 때 승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포상금이 미국 정부가 오사마 빈 라덴에 내걸었던 금액의 2배에 가깝다는 사실에도 긍지를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푸틴 대통령은 11월 17일 TV로 중계된 러시아의 안전보장회의에서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든 끝까지 추적하겠다”며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 응징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은 또한 살인자들을 보호하다가 발각되면 어떤 나라든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크렘린 정부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우리는 유엔헌장 제51조 자위권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며 “이 같은 대통령령에 시간적 또는 지리적 한계는 없다”고 덧붙였다.그 결과에 푸틴 개인의 위신을 걸었으니 FSB가 전례 없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옛 소련 대외 첩보 분야에서 일한 KGB 소장 출신 장성은 “범인을 반드시 찾는다”며 “우리는 이집트·시리아·이라크 등 지역 전반에 걸쳐 친구와 동료가 많다”고 밝혔다. FSB는 러시아의 적들을 추적해 암살해 왔다. 체첸공화국의 한 분리주의 지도자는 2004년 카타르에서 러시아가 재가한 차량폭탄으로 살해됐다고 알려졌다. 또 다른 사람은 지난해 11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크렘린 킬러의 총알에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됐다. 2006년 KGB에 등을 돌린 알렉산더 리트비넨코의 폴로늄 독살에 FSB가 관여했다는 설은 널리 알려졌다. 업무상 익명을 요구한 그 전직 장성은 “장담컨대 우리 동료 중에는 이 지역에 뛰어난 전문가들이 많다”며 “우리의 영향력은 아주 멀리까지 뻗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서방 첩보당국자들은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냈다고 본다. 아부 오사마 알마스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카이로 알아즈하르대학 출신의 전 의류 수입업자다. 42~43세쯤인 그는 2011년 시나이 반도에 기반을 둔 소규모 지하드 단체의 고위 지도자였다. 직역하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성소의 지지자들’이라는 안사르 바이트 알마크디스(ABM)라는 단체였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자 그의 후임인 무르시는 이집트 교도소에 수감됐던 전사 수백 명을 풀어줬다. 그중 다수가 ABM의 지하드에 가담했다. 초창기 ABM은 대부분 이스라엘 목표물을 겨냥해 국경 너머로 로켓포를 발사하고 가스 수송관을 폭파했다. 2013년 무르시가 이집트 군부에 쫓겨나자 알마스리는 작은 단체들을 규합해 이집트 군부의 표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2012~2015년, 시나이의 ABM을 비롯한 단체들은 군사 기지와 마을에 대한 400건 이상의 공격을 실시했다). 알마스리의 포부는 커져만 갔다. 2014년 11월 10일 인터넷에 올려진 설교 동영상에서 ABM은 IS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고 한 대변인이 발표했다.충성서약 후 ABM은 시나이 지방을 뜻하는 윌라얏 시나이로 개명했다. 런던의 싱크탱크 아시아-태평양 재단의 국제안보 담당 사잔 고헬 팀장은 “윌라얏 시나이와 이라크 IS의 관계가 밀접하다”고 말했다. 알카에다는 이집트인인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공동 창설한 만큼 이집트와 인연이 깊지만 알마스리는 IS와 손잡았다고 고헬 팀장은 설명했다. “알카에다는 항상 비밀스런 반면 IS는 공개적으로 영토를 장악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폭력 성향도 두 단체의 공통 분모다. “IS 브랜드 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특히 무슬림과 배교자들에 대한 극도의 잔인성에 이끌린다. 알카에다는 의도적으로 무슬림을 겨냥하지는 않지만 IS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죽인다.”분석가들은 샤름 엘셰이크 공항에서 비행기에 폭탄을 설치하는 아이디어가 윌라얏 시나이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정확한 목표물과 집행명령은 시리아 라카에 있는 IS 지휘본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앨리슨 맥나머스는 “메트로젯 폭파는 IS가 배후라고 주장하지만 이집트적인 특성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맥나머스 소장은 미국 워싱턴 소재 단체 타흐리르 중동정책연구소 소장이다. 샤름 엘셰이크 공항의 보안 절차에 정통한 공작원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계획은 북부나 남부 시나이쯤에서 수립됐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전략적·기술적 노하우는 IS에서 입수했을지 모르지만 전반적인 계획과 집행은 현지에서 이뤄졌을 것이다.”고헬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 두 조직이 접촉할 뿐 아니라 자원을 공유하고 암호화된 데이터를 통해 기술 정보를 교환한다. IS와 제휴 단체 간에 차별성이 있지만 다크웹(dark Web, 일반 검색엔진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심층 웹)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테러 활동과 관련해 상세하게 논의한다고 알려졌다.” 윌라얏 시나이는 그저 IS의 2부 팀인 것은 아니다. 탄탄한 조직을 갖춘 세련된 단체다. 맥나너스 소장은 “시나이 전사들은 이라크·시리아·리비아로 건너가 전략·전술·기술 지식 개발 훈련을 받는다”고 말한다. “윌라얏 시나이는 IS보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지식이나 경험은 뒤떨어지지는 않는다. 이집트와 시나이의 지하디스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기로 손꼽힌다.”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샤름 엘셰이크에 대한 내부자 공격 준비가 목표물이 선정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폭탄을 설치한 남자가 테러가 발생하기 얼마 전 공항 일자리에 지원했으며 “구체적으로 수하물 하역 담당으로 일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FSB와 관련된 타블로이드 매체 ‘라이프 뉴스’가 지난 2월 인용 보도한 러시아 보안 분야 정보원의 주장이다(FSB는 그 기사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했다).지난해 9월 30일 러시아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정부를 지원하는 돌발적인 공습 작전을 개시했을 때 윌라얏 시나이의 공작원(공작원들)이 이미 배치됐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IS의 온라인 잡지 다비크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공습 개시 이후 공격 표적이 ‘서방’ 비행기에서 러시아로 바뀌었다. 시리아 IS의 지도자이자 공식 대변인인 아부 무함마드 알아드나니는 10월 13일 공개한 오디오 메시지에서 각지의 청년들에게 “러시아인·미국인과의 성전에 붙을 댕기라”고 촉구했다. 메트로젯 테러가 사실이든 아니든 윌리얏 시나이는 그 부름에 답할 준비가 돼 있었다.다비크는 또한 메트로젯을 추락시킨 장치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찌그러진 슈웹스 음료 캔에 폭발물, 황색선이 달린 5㎝의 뇌관, 절연 테이프로 덮인 엄지 손가락 크기의 전자 타이머가 담긴 초보적인 사제 폭탄이었다. 일부 보안 전문가들은 매우 작은 장치가 그렇게 파괴적인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지 의구심을 나타낸다. 과거 최대 455g 장치의 폭발을 견뎌낸 항공기가 여러 대 있었다. 1986년 4월 TWA 840편이 그리스 상공을 비행하던 중 객실에서 폭탄이 터져 동체에 큰 구멍이 뚫렸다. 승객 4명이 비행기 밖으로 빨려나가 목숨을 잃었지만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했다. 바로 지난 2월에도 소말리아에서 지부티로 향하던 다알로 항공기에 자폭테러범이 노트북 컴퓨터에 숨겨 반입한 작은 폭발물이 터져 동체 측면에 1.8mx0.9m의 구멍이 뚫렸다. 지하드 단체 알샤밥과 관련됐다고 여겨지는 테러 용의자만 희생되고 비행기는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비상 착륙했다.보안 컨설턴트 비비안은 그 장치의 폭발력보다 어디 설치됐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메트로젯 항공편에선 폭탄이 압력 격벽 가까이 설치돼 치명적이었다. 분명 누군가 에어사이드(항공기 운항 관련 기술업무 지역)의 작업과정, 폭발물 설치에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현지의 노하우와 인력, 그리고 IS 본부의 기술력과 행동개시 명령의 조합. 이는 이집트와 시나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중동·아프리카 등지에서 IS 제휴 단체들의 영향력과 숫자가 확대되면서 그런 패턴의 테러가 어디서나 재현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비행기 추락 사고로 25세의 딸 에브게니야를 잃은 알렉산더 솔로구보프 같은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과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그는 지난 11월 러시아 TV에서 “나는 테러범들을 쏴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들의 목숨을 살려두고 224일 동안 고문해야 한다. 그들은 매일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들에게 알라를 위한 죽음은 명예로운 일이다. 그들이 원하는 죽음을 줘선 안 된다.”윌라얏 시나이와 IS에 폭탄테러 공격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맥나머스 소장은 “IS는 이라크와 시리아 내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공습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동시에 윌라얏 시나이는 이집트 정부도 공격해 관광업 기반 경제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윌라얏 시나이는 또한 전 세계의 이목을 끌면서 해외의 동료 조직으로부터 존경과 지원을 받았다.”무엇보다도 이집트의 신뢰도(그리고 안정)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10월의 공격뿐 아니라 지난 4월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공항을 통해 밀반입된 가짜 자폭 조끼를 이용한 비행기 납치도 있었다. 그 7개월 사이 이집트 당국은 진실을 알리기보다 자신들의 실패를 은폐하는 데 더 급급한 듯했다. 그들은 또한 메트로젯 용의자를 재판대에 세우는 데도 지지부진했다. 다만 지난 1월 로이터 통신이 인용한 익명의 정보원에 따르면 2014년 중순 시리아의 IS에 합류한 사촌을 둔 이집트항공 기술자 1명, 폭탄을 설치한 혐의가 있는 수하물 취급 담당자 1명, 2명의 경찰관이 구금됐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내무부에 따르면 현재 그 사건과 관련해 구금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이집트는 전에도 이처럼 사건 조사에 미적거린 전력이 있었다. 1999년 로스앤젤레스발 이집트항공 999편이 뉴욕을 경유해 카이로로 향하던 중 대서양에 추락했다. 이집트 항공 역사에는 정말 마가 낀 듯 역시 10월 31일 발생한 일이었다. 이집트 민간항공부는 기계적 결함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기와 조종석 음성 기록은 부조종사 가밀 알바투티가 비행기와 동반 자살을 각오한 듯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급강하시켰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조종석 녹음기에 포착된 마지막 2분 43초 동안의 대화 중 ‘타와킬탈라 알라’란 말을 11회나 반복했다. ‘나를 신에 맡긴다’는 의미다.이처럼 진실을 은폐하는 문화 때문에 이집트는 테러범들의 농간에 놀아날 수 있다. 그것은 IS가 원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이번 이집트항공편의 추락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 5월 21일 공개된 음성 메시지에서 IS의 한 대변인이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촉구했지만 이집트 항공편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의 전력을 볼 때 이번에도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편리한 방향으로 포장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그것은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고 두려움을 더욱 확산시킬 뿐이다. IS는 메트로젯 폭파로 끔찍한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이젠 그런 위협에 맞서 이 같은 약점을 신속히 보완하는 일은 그 적수의 몫이다.- 오웬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2016.05.2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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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악의 근원일까

산업 일반

요즘의 테러리스트들은 대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그 테러 단체의 2인자 아이만 알자와히리, 그리고 지난달의 ‘속옷 자폭테러’ 용의자 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라브가 그렇다. 하지만 그들 외에도 타고난 ‘은수저’를 녹슬게 한 악명 높은 이들이 많다.오사마 빈 라덴보유 자산이 약 70억 달러인 아랍권의 10대 부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워싱턴 포스트 전 편집장 스티브 콜이 펴낸 ‘빈 라덴 가문(The Bin Ladens)’에 따르면 그는 생득권을 포기하고 가문의 동업자인 사우디 왕가의 ‘가짜 무슬림’에 반기를 들었고, 그 다음엔 “빈 라덴 가문이 상당한 자산을 소유한”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라브아프리카 부유층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호사스럽게 성장했고, 런던에 유학 가서는 아버지 소유의 400만 달러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가족들이 그의 과격한 종교적 견해를 탐탁지 않게 여기자 예멘으로 건너가 ‘진정한 이슬람’에 빠졌다. 지난 성탄절 미국행 노스웨스트 항공의 여객기를 폭파하려 한 혐의를 받는다.네이선 레오폴드, 리처드 로브레오폴드는 집안이 해운 사업으로 쌓은 재산으로 호화 저택에 살았고, 로브의 아버지는 미국 대기업 시어스의 부사장으로 1000만 달러를 모았다. 하지만 자녀에게 관심 없는 부모와 냉담한 유모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10대 시절 열네 살짜리 아이의 머리에 정을 박아 살해했다. “살인의 짜릿함을 맛보려고 그랬다”고 그들은 말했다.메넨데스 형제인기 가수 엘튼 존과 프린스가 살았던 400만 달러짜리 저택에서 에릭과 라일 메넨데스 형제는 1989년 8월 20일 부모에게 엽총을 15번이나 발사했다. 그들은 쿠바 출신의 사업가인 아버지의 성학대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400만 달러의 유산과 살인 후 방탕한 생활(포르셰와 호화 식당 두 곳을 구입했다)을 했다는 사실에 배심은 그들의 살인 동기가 순전히 탐욕이었다고 확신했다.캐티 보딘보딘의 아버지는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베트남전 개입에 관한 국방부 기밀 문서를 유출한 인물을 고객으로 둔 저명한 변호사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고, 어머니가 자살을 기도했으며, 어린 보딘은 반항했다. 그녀는 특권을 버리려고 좌익 급진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에 가입했다. 1984년 두 경찰관이 사망한 강도 사건에서 살인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아르헨티나의 좌익 사교 명사 집안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호화 휴양시설을 즐기고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컸다(여동생 셀리아의 증언). 그러나 의사 자격을 딴 뒤 호화생활과 이별했다. 그는 1956년 집에 보낸 편지에서 “민중의 투쟁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집안과 조국을 저버리고 게릴라로 변신해 1959년 쿠바 혁명의 초대 사형 집행관으로 활약했다.디펜드라네팔의 왕세자로 호화 궁전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처녀와 결혼하고자 했을 때 부모가 반대하자 그만 이성을 잃은 듯하다. 2001년 6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 소총으로 어머니, 아버지, 형제, 그리고 왕족 6명을 사살한 뒤 총부리를 자신한테 돌려 자살했다.

2010.01.12 10:52

2분 소요
무슬림 Z맨의 힘

산업 일반

▶무슬림 아이들에게 이슬람 영웅이 등장하는 액션만화 ‘99’가 최고 인기다. 인류학자 스캇 애트런은 알카에다와 그 아류들의 존속 기반인 이슬람의 10대들을 연구한다. 나중에 2004년 마드리드 기차 폭파나 2005년 영국 지하철 폭파, 2006년 미국행 비행기의 공중 폭파 기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아이들 말이다. 애트런은 그들이 누구를 우상으로 삼고 어떻게 조직화되는지, 무엇이 그들을 결속시키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신빙성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2001년 이후 등장한 ‘새로운 부류’의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 경전 코란이 아니라 애트런이 ‘멋진 지하드’라고 부르는 것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에게 우상(가장 유명한 건 오사마 빈 라덴)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우상을 심어줌으로써 그 아이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정할 수 있다면, 테러의 유행을 막고 지하드(이슬람주의자들의 성전)도 함께 종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뉴욕 소재 존 제이 형사사법대학 테러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인 애트런은 이런 것이 바로 공공외교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발상의 전환이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더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난해 워싱턴에서 백악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 연구 결과를 보고했을 때 딕 체니 부통령 사무실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은 어울리지 않는 준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들은 자기가 내린 결정이 자기 책임이고, 우리한테 폭력으로 대항하면 우리가 폭격을 가한다는 걸 모르나요?” 애트런은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폭격을 한다고요? 마드리드에다? 그리고 런던에다?” 그래서 올해 1월 워싱턴에 다시 가서 국가안보국과 국토안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땐 만화책을 준비해 갔다. 그는 부시 행정부의 전쟁 도발론자들과 홍보전문가들이 고안한 어떤 것도 액션 어드벤처 만화 시리즈 ‘99’에서 볼 수 있는 긍정적 메시지를 전달하긴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만화는 쿠웨이트의 심리학자이자 사업가인 나이프 알-무타와의 작품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동료 플로렌스 빌레노트가 작년 초에 이 책에 대한 글을 썼을 때부터 이 만화책을 읽었다. 나는 분석적인 동시에 원초적인 이유도 이 만화책에 끌렸다. 나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만화책에 파묻혀 살았다. 고딕풍의 배트맨 모험에 흠뻑 빠져들고, 스파이더맨의 혈기왕성한 오만함에서 쾌감을 느끼고, X맨에 나오는 여자들의 성적매력에 도취해 자랐다. ‘99’에는 그들 모두를 합쳐놓은 뭔가가 있다. 덩치 큰 전사들과 거친 법 집행자가 공존한다. 다만 이들이 이슬람의 수퍼 영웅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미국 터프스대학에서 임상심리, 영문학, 역사를 한꺼번에 전공한 알무타와(37)는 ‘상징’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그는 구미의 주류만화들은 기독교 이야기와 그림에 크게 의존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반영하는 수퍼 영웅들을 만들어서 안 될 것 없다고 알무타와는 생각했다. 그는 중동지역에 미국 만화책들을 배급하는 회사 데시킬을 운영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이슬람적 액션 만화책을 시장의 다른 어떤 작품 못지않게 잘 포장해줄 최고의 작가, 펜화 화가, 채색화가들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잘 안다. 이 만화책 시리즈의 가장 핵심적인 기발함은 몽골인이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했을 때 주요한 공격 목표가 장대한 도서관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몽골인들은 지구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그 제국의 희망과 가능성을 뿌리째 뽑아서 그 미래 자체를 말살시키려 했다”고 만화책은 해설한다. “그러려면 칼과 몽둥이, 완력과 피 그 이상이 필요하다. 제국의 힘이 나오는 진정한 기반, 다시 말해 그들의 지식을 허물어야 한다.” 아바스조 칼리프 왕국의 마지막 격변기에 학자들은 연금술을 이용해 도서관에 들어있던 광대한 지식을 99가지 마법보석, 일명 ‘누어 스톤(빛의 돌)’ 속에 집어넣는다. 이 돌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그 돌들을 찾아 각각에 맞는 사람들과 일치시키면 각자는 알라의 아흔아홉 가지 이름 중 하나와 비슷한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된다. 엄청난 힘을 가진 헐크 같은 존재인 자바, 빛을 통솔하는 누라, 고통의 지배자 다르, 감시자 라키프 등. 지금까지 약 열두어 명이 소개됐는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무미타다. 자그맣고 세상 물정에 밝은 이 소녀의 이름은 ‘파괴자’라는 뜻이다. (알라 신의 99가지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을 보면 창조의 무사위르, 환상의 무타카비르, 지혜의 하킴 등 몇몇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퍼 영웅에 해당한다. 그러나 은혜의 라흐만이나 자비의 라힘 등은 만화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종교적이다. 일부는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한다. 나는 라티프라는 이름의 수퍼 영웅이 어서 나오길 기다린다. 그 뜻은 불가사의.) 이 만화책의 기본 줄기는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빛의 돌’과 그 돌의 소지자들을 한데 모으려는 람지 박사와 세계 정복의 야욕을 가진 무갈 사이의 싸움이다. ‘X맨’ 같은 갈등구조다. 사실 이런 만화책들은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해 이용됐던 것과 똑같은 주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슬람 문명이 한때는 학문과 과학의 강건한 왕국이었다는 메시지는, 이슬람 기사들의 용감했던 과거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성전운동 선동자들이 애용하는 주제다. 알카에다의 대표적 이념가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독창적 논문의 제목은 바로 ‘예언자의 깃발 아래에 선 기사들’이다. 하지만 ‘99’의 이야기는 8~14세 아이들이 훨씬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더 영향력이 클 수 있다. 스캇 애트런이 지적한 대로 이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내에서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고픈 꿈을 꾼다. 그들은 빈 라덴과 알자와히리, 아랍 위성방송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아이들 자신의 경험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힘센 나라인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가장 영웅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99’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현재 만화책은 수만 부 배급됐지만 빈 라덴의 폭력적 메시지는 이미 수십억 명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애트런은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 아이들이 ‘멋진 지하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만화책이 총탄과 폭탄보다 훨씬 더 유용할지 모른다.” 이러한 만화책들은 어쩌면 미국 정부에 “지식이 힘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지나친 기대일까?

2008.05.20 11:02

4분 소요
바람과 함께 사라진  빈 라덴

산업 일반

미군이 6년간 샅샅이 뒤졌지만 오리무중… 첩보위성·정찰기에 특수부대까지 동원하고 거액 현상금 걸었지만 찾아내지 못해 미군은 목표물에 가까이 갔다. 2004~5년의 초겨울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 일행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선을 따라 산악지대의 은신처에 숨었다. 몇 ㎞ 아래쪽에서 경계를 서던 보초가 미군 순찰대를 발견했다. 빈 라덴의 은신처로 곧장 다가오는 듯했다. 보초가 무전기로 경고하자 알카에다의 우두머리를 지키던 40명 남짓한 경호원은 ‘셰이크’(추종자들은 빈 라덴을 그렇게 부른다)를 피신시킬 준비에 바빠졌다. 알카에다의 고급 간부인 이집트인 셰이크 사이드가 나중에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경호원들이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하마터면 빈 라덴을 죽이고 자살하자는 암호를 사용할 뻔했다. 사이드에 따르면 빈 라덴은 절대로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셰이크는 생포될 확률이 99%일 경우 부하들에게 모두 죽음을 택하고 자신도 순교시키라는 말을 해뒀다”고 사이드는 오마르 파루키에게 말했다. 탈레반의 알카에다 연락장교인 파루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뉴스위크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 암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알카에다 보초가 지켜보는 동안 미군 순찰대는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빈 라덴의 부하들은 미군이 우연히 그들의 은신처 근처를 지나갔다는 결론을 내렸다(미국의 한 전직 정보장교는 이 사건이 정식 보고된 사실을 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6년 동안 그런 식이었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미국 정보 관리들은 빈 라덴 수색작전이 좋은, 또는 “쓸 만한” 정보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게임으로 진행돼 왔다고 동의하며 아쉬워했다. 빈 라덴이 2001년 12월 토라보라에서 빠져나간 뒤로 그의 소재에 관한 미국의 정보는 50대 50 이상의 정확성을 보인 적이 없다. “2002년 초 이래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을 알려주는 중대한 단서는 없었다”고 CIA의 동남아 전문가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브루스 라이델이 말했다. “현재 우리는 외계의 어둠 속에서 총질을 하는 셈이다. 무엇이든 맞힐 확률은 제로다.”어째서 그런가? 그 많은 첩보위성, 정찰기, 특공대, 수백만 달러의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대국이 왜 중세시대의 마음가짐으로 살며 중병을 앓을 가능성까지 있는 중년의 광신도 하나를 찾지 못한단 말인가? 때때로 간과되는 그 간단한 해답은 어느 전쟁에서든 적의 동태에 관한 실시간의 좋은 정보는 입수하기가 어렵고, 사람을 추적하는 일은 늘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 도망자가 동정심을 품은 주민들이 있는 오지로 사라질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FBI가 애틀랜타 올림픽공원 폭발사고의 범인 에릭 루돌프를 노스캐롤라이나의 산속에서 찾아내기까지 무려 5년이 걸린 사실을 상기하라). 말 나온 김에, 미국 정부는 그 일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수색작전에 동원될 자원이 줄었고, 관료들의 쓸데없는 걱정(텃세 부리기와 모험 기피)은 장애만 됐다. 미국이 파키스탄으로 밀고 들어가면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을 심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의 몰락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무샤라프는 현재 적들을 달랬다가 진압작전으로 골리는 등 오락가락한다. 미국의 정보요원과 군인들은 오사마 빈 라덴과,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는 그의 오른팔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가리켜 HVT(고가치 목표물) 1호, 2호로 부른다. 그동안 진행된 이 두 사람의 수색과정을 되짚어보면 다 잡았다 놓친 기회, 해도 욕 먹고 안 해도 욕 먹는 작전의 선택, 터무니없는 실수가 많아 실망감을 느끼고 때로는 한숨이 나온다. 뉴스위크는 미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군·정보 관계자의 증언과 오마르 파루키 같은 소수의 알카에다 동조자들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다. 빈 라덴의 체포는 “여전히 최우선 현안”이라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 담당 보좌관 프랜시스 프래고스 타운젠드가 말했다. 타운젠드가 지적하듯이 알카에다 지도부가 9·11 이전 아프가니스탄에 가졌던 스타일의 은닉처가 없다는 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알카에다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서 재정비를 해왔고, 더 많은 9·11 테러를 일으킬 각오가 돼 있으며, 어쩌면 그 실행이 임박했는지도 모른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알카에다가 서구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강력한 징후가 있다. 거의 확신한다”고 퇴역 해군 중장 존 레드가 말했다. 그는 현재 소위 테러와의 세계 전쟁에서 미국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국가테러대항센터(NCTC)의 책임자로 일한다. CIA 대테러센터의 부책임자로서 2001~2년 빈 라덴의 초기 수색작전을 지휘했으며 국무부 대테러 조정관으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행크 크럼튼은 “좋지 않다. 테러는 곧 일어난다”고 말했다. 9·11 전의 빈 라덴 수색작전은 마지못해 대충 하는 식이었다. 정치적 암살이라는 지저분한 일에 미국이 말려들거나 미군 병사가 죽는 일을 꺼렸기 때문이다. 9·11이 일어나자 곧 부시 대통령은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빈 라덴을 잡겠다고 공언했고, 당시 CIA의 대테러 담당 책임자 코퍼 블랙은 부하들에게 빈 라덴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오라고 지시했다(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의 CIA 요원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상자와 드라이아이스를 요청했다). CIA 요원들은 옛날식 배짱으로 현금 수백만 달러를 들고 헬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부족민들을 만나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내쫓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CIA가 민첩하게 움직이자 국방부가 불편해졌다. 밥 우드워드 기자의 저서 ‘전쟁 중인 부시(Bush at War)’에 따르면, 장군들이 파병에 앞서 날씨 문제로 고민하고 복잡한 지원과 구출 문제로 법석을 떨며 선뜻 결정을 못 내리자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화를 냈다. 럼즈펠드의 성화 덕분에 일은 잘 풀렸다. 10월 중순께는 CIA 요원들과 육·해·공 특수부대의 공조가 전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첨단 공중지원을 활용하고, 한 시점에선 럼즈펠드가 희희낙락하며 “21세기 최초의 기병대 돌격’이라고 부른 작전을 실시해 성전 전사 수천 명을 죽이고 잡거나 쫓아버렸다. 탈레반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빈 라덴은 구석으로 몰린 듯했다. 실제로 12월 15일 노획한 성전 전사의 무전기를 엿듣던 CIA 요원들은 빈 라덴이 토라보라 근처의 동굴 속에 갇힌 부하들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빈 라덴 추적작전은 바로 그날부터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북부동맹과 협조하는 CIA 비밀팀(암호명은 조브레이커) 책임자인 게리 번첸의 회상에 따르면, 미군은 육군 레인저 특공대 800명을 보내 빈 라덴의 도주로를 차단해 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중부사령부가 파견한 특수작전 사령관 델 데일리 소장은 번첸에게 “일은 잘하지만” 지상군을 투입하면 아프간 동맹들의 심기를 건드릴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번첸이 2005년 출간한 책 ‘조브레이커(Jawbreaker)’에 따르면, 그는 “동맹의 심기를 건드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고 소리질렀다. “내 관심은 오로지 알카에다를 제거하고 빈 라덴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가는 일이다”(현재 국무부 테러대항 부서 책임자로 일하는 데일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 일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면서 번첸의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는 말만 했다). 번첸은 CIA 시절 상관이었던 크럼튼을 찾아갔다. 크럼튼은 고위층을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썼노라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선 중부사령부 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프랭크스는 병력을 동원하려면 “몇 주”가 걸린다고 대답했다. 거칠고 눈 내린 지형은 너무 험악하며, 빈 라덴을 잡을 가능성이 낮아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실망한 크럼튼은 백악관에 가서 작은 회의용 테이블에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선 지도를 펼쳤다. 부시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반대쪽에서 알카에다를 몰아내는 일이 가능할지 알고 싶어 했다. “안 됩니다, 각하.” 크럼튼이 대답했다(딕 체니 부통령은 한마디도 안 했다고 크럼튼은 돌이켰다). 그 회의에서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논평을 거부한 프랭크스는 회고록에서 산속에 병력을 투입했다가는 소련군의 실수를 재현하게 된다는 결론을 럼즈펠드와 함께 내렸다고 적었다. 1980년대 소련군은 산속에 갇힌 채 무자헤딘의 게릴라 공격에 궤멸됐다(그때 CIA가 제공한 스팅어 미사일이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CIA는 빈 라덴을 체포하려고 부족민들에게 기댔는데 이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됐다. 뉴스위크는 그 작전에 관여했던 세 족장 중 두 명인 하지 자히르와 하지 자만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CIA가 제3의 족장 하즈라트 알리에게 너무 의존했다고 주장했다. 또 알리는 빈 라덴이 도망치게 해주는 대가로 알카에다에게서 거금 600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알리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크럼튼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구체적 증거는 없다고 인정하면서 뇌물 덕분에 알카에다가 도주에 성공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일부 부족민은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양쪽에서 돈을 받는 양다리 작전을 쓴 듯하다. 빈 라덴은 피난처를 찾기보다 원래의 은신처로 귀환하던 도중 파키스탄 북서부 변경을 따라 험준한 산봉우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평소 사냥과 말 타고 산을 오르내리기를 즐겼고, 토라보라 근처에 전망 좋은 엉성한 수영장까지 지어놓았다. 빈 라덴은 돈 많은 사우디인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땅바닥 가까이서 사는 방법을 익혔고, 추종자들에게도 상하수도나 에어컨 같은 현대적 편의시설 없이 생존하는 법을 익히도록 했다. 현상금이 2500만 달러나 됐어도 현지의 파슈툰족은 돈을 받고 빈 라덴을 팔아먹는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파슈툰왈리라는 명예로운 오랜 전통의 일환으로 손님을 보호하는 엄격한 관습이 있어 알카에다가 덕을 보았다. 파키스탄 중앙정부도 그 사회제도를 깨뜨릴 힘은 없다. 연방정부가 다스리는 그 부족민 지역은 사실상 몇 세기 전부터 통치가 불가능했다. 인도 식민지의 영국 정부도 실패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진정으로 다스릴 생각을 한 적이 없으며 행정을 연방정부가 임명한 부족민 관리들에게 맡기고, 치안은 충성도가 의심스러운 현지 경찰의 손에 맡겼다.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강점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난 1980년대에 부족민 행정기구는 빈 라덴 같은 성전 전사들의 징검다리가 됐다. 사우디 자금으로 청소년을 급진파로 키우는 원리주의 종교학교 마드라스가 수백 개씩 세워지고 파키스탄 정보부는 소련이 후원하는 아프간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성전 전사들과 손잡았다. 가서는 안 되는 지역까지 들어가 빈 라덴을 잡으려는 미국의 노력은 처음부터 절뚝거렸다. 이곳은 지형상 현지 지식과 소규모 부대가 필요하지만 미군 장교들은 오래전부터 그 임무에 적합한 특수부대의 투입을 경계해왔다. 정규군의 눈으로 보기에 그처럼 “뱀 잡아 먹는 군인”들은 말썽을 일으키고 규정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으며 군기가 빠졌다. 군부는 특수부대를 파견해 산속의 동굴이나 흙벽 집을 쑤시고 다니게 하는 대신 기동력과 화력의 과시가 가능한 좀 더 거창한 전쟁을 치르고 싶어 했다. 국방부의 민간인 지도부와 그들의 환심을 사기에 바쁜 군 고위층에게는 이라크가 훨씬 더 좋은 표적이었다.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이슬람주의자들과 세계인들에게 미국이 가진 힘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이 럼즈펠드의 국방정책위원회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국방장관과 매우 친했다. 2001년 11월 깅그리치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분위기인데 동굴 폭격은 그 중요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육군 레인저 부대를 토라보라 산속에 투입하자는 제안을 거부했을 때 프랭크스 장군은 이미 다음 전쟁의 기획 초기단계에 돌입했다. 2002년 초가 되자 빈 라덴의 수색에 도움이 됐을 법한, 공장에서 새로 만드는 프레더터 정찰기들은 이라크용으로 돌려졌다. 미군의 최정예 부대인 델타 특공대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이라크 침공 준비로 임무가 바뀌었다. 아랍어를 잘하는 병사들이 포함된 제5특수부대는 이라크 파병 준비차 귀국하고 대신 제7특수부대로 바뀌었다. 대부분 중남미 복무 경험이 있는 스페인어를 하는 병사들이었다. 부족민과의 접촉창구를 가진 현지 지식이 풍부한 CIA 요원들은 다른 요원으로 교대됐다.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지적이었던 CIA 지부장을 대신해 새로 온 사람은 회의를 제 시간(그의 시계는 항상 7분이 빨랐다)에 시작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성격이었으나 아프가니스탄 관련 서적은 한 권밖에 읽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신변 보호 차원에서 익명을 요구한 어느 CIA 요원은 씁쓸한 어조로 새 지부장을 소설 ‘케인호의 반란’에 나오는 퀴그 선장에 비유했다(폴 지밀리아노 CIA 대변인은 “지부장들은 적소에 쓰일 적절한 기능을 갖춘 지도자를 뽑도록 고안된 엄격한 다단계 선발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뱀 잡아먹는 특공대원들의 실망은 애덤 라이스의 회상에 잘 드러난다. 라이스 상사는 2002년 칸다하르 인근의 한 안가(安家)를 중심으로 활동한 특수부대 A팀을 지휘했다. 안가 근처에서 노란 하와이 셔츠를 입고 다니는 그는 머리를 짧게 깎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턱수염을 길러 신병훈련소 사열 때 눈에 두드러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친이 국제개발처 요원으로 일했다) 칸다하르에서 살았고, 특수부대에서 일한 경력이 20년이 넘는다. 2002년 7월 어느 CIA 요원이 라이스에게 물라 오마르(탈레반의 애꾸눈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을 정찰기로 추적한 결과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샤히코트 계곡에서 발견됐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탈레반 우두머리와 부하들을 헬기로 공격하면 효과가 있겠지만 미군의 신속한 이동이 전제돼야 했다. 라이스는 시간 맞춰 승인 받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팀원들이 안가 반경 5㎞ 이내에서 이동할 때마다 ‘5하 원칙’이라는 서류를 제출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하는지 보고해야 했다. 본부의 승낙이 떨어지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총을 쏠 일이라도 생기면 거부되기 일쑤였다. 5㎞를 벗어나려면 ‘CONOP(작전 개념)’이 필요한데, 이것은 절차가 훨씬 복잡하고 현장의 이중 승인이 있어야 했다. 최종적으로는 카불 인근의 바그람 공군기지에 있는 특수작전합동사령부의 결재가 필요하다. 총격전을 벌이려면 3성 장군이 승인해야 한다. “그 과정이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고 라이스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종종 부하들이 화장실 변기로 사용하려고 반을 잘라낸 200ℓ짜리 드럼통에 앉아 보고서를 타이핑했다. “이질에 걸려 ×을 싸대는 몸으로도 54도 폭염 속에서 타이핑을 했다. 그런데 칸다하르나 바그람의 수뇌부는 편안하게 앉아 철자가 틀렸느니, 보고서의 줄이 비뚤어졌느니 어쩌니 잔소리를 해댔다.” 어쨌든 라이스는 그 요청을 했다. 아무 대답 없이 날짜가 흘렀다. 기회는 사라졌다. 실제로 물라 오마르였든 아니든 목표물은 다른 데로 이동했다. 라이스는 직업군인들의 복지부동이 문제라고 말했다. 진급하려면 복무기록이 깨끗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수, 불운, “소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9·11 이후 그런 소극적 태도가 바뀌었다가 이내 옛날로 되돌아갔다. 첨단 통신이 결정을 빠르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계적인 위성통신 덕분에 기지나 워싱턴에 있는 사령관들이 사소한 결정조차 뒤집는 경우가 있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 임하는 미국인 동맹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2002년 영국의 한 고위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미국이 나를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국은 늘 친구를 버린다.” 신분 공개를 거부한 이 관리에 따르면 무샤라프는 그 예로 1970년대의 베트남 철수, 1980년대의 레바논 철수, 1990년대의 소말리아 철수를 들었다. 그래도 그는 이내 미군이 파키스탄 영내에서 꽤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배려했다. 프레더터의 공격시 사전 승인을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했고, 미군이 승인 없이 파키스탄 영내로 5㎞ 이상 들어와 추적을 계속하도록 허용했다(한 미군 장교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전사들이 국경선 너머 안전한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걸음을 멈추는 장면을 프레더터의 비디오로 본 적이 있다고 돌이켰다. 그때 미군 특수부대 헬기 한 대가 떠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이 형식적인 비난성명을 발표하겠지만 고가치 목표물을 공격한 행위를 이해한다고 미군 측에 말했다. 파키스탄 지도자와 직접 면담한 미국 관리에 따르면 그는 단 하나, 빈 라덴을 생포해 파키스탄 법정에 세우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양국의 협조는 제법 눈에 두드러진 성과로 이어졌다. CIA와 FBI는 파키스탄 경찰과의 협력 덕분에 2003년 3월 1일 아프간 국경 근처의 도시인 퀘타의 한 민가에서 알카에다의 작전 책임자이자 9·11 사태의 기획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잡는 데 성공했다. 알카에다의 통신 전문가인 모하메드 나임 누르 칸은 2004년 카라치에서 체포됐다(그러나 지난주 파키스탄 정부가 정식 기소도 하지 않은 채 석방해 미국 관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뒤를 이어 작전 책임자가 된 아부 파라즈 알립비는 2005년 5월 체포됐다. 전사들과 접촉하려고 산에서 내려온 알카에다 간부들은 노출 위험을 무릅썼다. 특히 별 생각 없이 추적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사용한 자들이 그랬다. 그러나 산악지대는 사실상 여전히 침투가 불가능한 상태다. 알카에다가 2003년 두 차례나 무샤라프를 암살하려고 기도하자 파키스탄 대통령은 전사들을 잡으러 소굴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장군들은 빈 라덴을 “망치”(아프가니스탄 밖에서 활동하는 미군)와 “모루”(파키스탄 군대) 사이에 가뒀다고 큰소리쳤다. 파키스탄군 전차와 무장헬기들이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주기적으로 승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지상전투 상황은 나쁘게 돌아갔다. 파키스탄군은 펀자브 평원에서 인도군을 상대로 싸우는 훈련을 받았다. 게릴라전 준비는 한 적이 없으며,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좀 더 폭넓게는 부족민 지역의 치안 책임을 맡은 준군사조직체인 국경경찰의 충성이 의심스러웠다.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 양쪽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서구 군 장교는 국경경찰이 종종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미군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경경찰의 한 병사는 심지어 2006년 5월 파키스탄에서 미군 병사를 총으로 쏴 죽이기까지 했다. 무샤라프가 파키스탄 정보부에 남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동조자들을 숙정했다고 주장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서구 관리들은 그 옛 요원들의 일부가 지금은 비공식적으로 자신이 옛날에 관리했던 사람을 돕는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라크전은 미국의 블랙홀로 판명되면서 미군 병사와 군수품을 빨아들이고 워싱턴 군 수뇌부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CIA는 2005년 부시 대통령에게 비밀 슬라이드쇼로 빈 라덴 수색작전 현황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파견된 CIA 요원이 그 정도 인원밖에 안 되느냐며 깜짝 놀랐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전직 정보관리에 따르면, 대통령은 “그게 다야?” 하고 물었다. CIA는 이미 “인원 증강”에 착수해 현장요원의 수를 배로 늘렸다. 그러나 상당수가 경험 없는 풋내기들이며 “쓸 만한” 정보를 캐내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CIA 본부 직원들은 열심히 사방을 경계했다. CIA가 쓸 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 짜증이 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특수부대를 비밀작전에 투입해 인적 정보를 수집하는 작전을 추진했다. 역시 신원공개를 꺼려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의 고위관리에 따르면, 국방부는 2005년 부시 대통령이 승인한 “처형령”에 따라 전 세계의 알카에다 목표물 350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지도자급, 모집책, 자금책, 심부름꾼이 모두 포함됐다. CIA는 당연히 그 같은 텃밭 침입에 저항했다. 의회 의원과 대사들은 군대의 비밀작전에 관해 아무 정보도 없다고 불평했다. 국방부 관리들은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성과를 거둔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국경을 따라 알카에다 지도부를 잡으러 가는 일에 관한 한 미군은 여전히 정보가 형편없고 위험을 기피한다. 그 두 가지 만성 실패가 겹치면서 토라보라 피신 이래 알카에다의 일부 지도자를 죽이거나 체포하기에 어쩌면 가장 좋은 최선의 기회가 날아갔다. 2005년 후반 CIA와 국방부의 특수작전합동사령부는 빈 라덴의 오른팔인 자와히리나 혹은 또 다른 빈 라덴의 고위급 간부가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을 따라 파키스탄의 한 작은 구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한다는 “80% 정도 자신할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 소위 고가치 목표물에 관해 “여태까지 본 최고의 정보 그림이었다”고 작전에 관여했던 한 전직 정보 관리가 말했다. CIA와 특수작전사령부는 제리 브룩하이머가 영화로 만들 만한 공중 특공대 기습을 계획했다. 야음을 틈타 해군 실스 (특수부대)요원 30명 정도를 C130 수송기에 실어 목표물에서 50~60여㎞쯤 떨어진 파키스탄 국경선의 아프간 쪽 공중 지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실스 요원들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뒤 패러세일(모터가 달린 행글라이더)을 이용해 밤하늘을 날아 산을 넘고 회의장소에 가까운 비밀지점에 내린다. 그 뒤 공격을 개시해 자와히리나 혹은 누가 됐든 현장에 있는 고가치 목표물을 생포하되 피치 못할 경우에만 사살한다. 그 뒤 실스 요원들은 포로들을 이끌고 대기 지점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선 CH53 헬기 두 대가 대기하다가 일행을 실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CIA 국장 포터 고스와 특수작전합동사령부 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당시 소장이 그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럼즈펠드와 그의 정보 보좌관인 스티브 캠본 차관을 포함한 민간인 지도부가 계획을 검토하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임무가 실패할 경우 무샤라프에게 돌아갈 역풍이나 미군의 위험을 무릅써도 좋을 만큼 정확한 정보인가?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전직 정보 관리들에 따르면, 국방부 관리들은 CIA측에 “정보 신뢰도를 100%로 높일 수는 없는가”라고 물어 말문이 막힌 그들의 눈이 휘둥그래지게 만들었다. 럼즈펠드와 가까운 전직 국방부 관리에 따르면, 국방부의 기획단계에서 흔히 말하는 금언이 실감나는 분위기였다. 정보가 불확실할수록 군대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위층은 실스 요원들을 철수시키기에 헬기 두 대만으로 충분한지 물었다. 한 대가 격추되거나 기계고장을 일으키면 어쩌나? 1980년의 이란 인질 구출 실패작전이 떠올랐다. 또는 ‘블랙호크 다운’으로 알려진 1993년의 소말리아 사태에서 레인저 부대원들이 갇힌 동료들을 구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모가디슈 시내를 질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합동사령부는 그 작전의 구출 부분을 보완할 생각으로 육군 레인저팀을 보내 경호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논의가 계속되면서 레인저팀의 규모는 애초 특공대 규모의 다섯 배인 150명으로 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럼즈펠드는 자꾸 이 작전이 파키스탄 침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샤라프와 상의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통지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믿기 어려운 파키스탄 정보부가 계획을 알카에다에 누설하지 않을까? 럼즈펠드와 가까운 앞서의 그 관리는 장관이 잠재적 위협과 성공했을 경우 성과의 무게를 재는 동안 점점 더 신중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결정적이었다. C130기들이 국경선 상공을 선회하고 실스 요원들이 낙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럼즈펠드는 수뇌들과 여전히 협의를 끝내지 못했다. 고스 CIA 국장이 국방부에 찾아와 작전을 개시하자고 간청했다. 럼즈펠드는 막판에 작전을 취소했다. “이 작전이 쉽고 확실성이 있다면 밀어붙였을 것”이라고 럼즈펠드의 그 전직 보좌관은 말했다. “확실성이 없었다.” 미국의 엄청난 기술우위에도 불구하고 이 수색작전에서 확실성이란 고통스러울 정도로 확보하기가 어렵다. 냉전시대에 소련을 상대로 설계된 미국의 첩보위성은 휴대전화나 손에 든 무전기를 감청할 정도로 민감한 안테나가 없다. 그래서 ‘오렌지 기동타격대’로 알려진 특수작전팀이 부족민 지역에 침입해 곳곳의 정상에 도청장비를 설치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알카에다 요원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소득을 몇 건 올렸다. 그러나 전사들도 사태에 적응했고, 추적자들이 필요한 쓸 만한 정보를 감추려고 암호를 쓴다. 정보요원과 특수작전 장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도는 말은 이제 악당들은 모조리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똘똘한 놈들은 살아남았으며 전보다 더 똑똑해졌다. 프레더터가 올린 성과도 있다. 알립비의 후계자인 또 다른 알카에다 작전 책임자 아부 함자 라비아를 2005년 죽인 일도 포함된다(미국이 개입한 사실을 감추려고 파키스탄 정부는 라비아가 폭발물 실험을 하다가 잘못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날조했다). 그러나 전사들은 그 정찰기를 피하는 법을 터득했다. 장난감 비행기처럼 시끄러운 프레더터의 비행음이 파키스탄의 시골 산속에서는 이라크의 도시보다 쉽게 들리기 때문이다. 미군이 쏜 폭발물이 빗나가면 심각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2006년 1월 프레더터가 파키스탄 다마돌라의 한 민가를 향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 자와히리가 회의 중이라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첩보는 또다시 엉터리로 밝혀졌다. 그곳에 자와히리는 없었다. 10여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생존자들은 분노했다. 2006년이 되자 무샤라프는 지쳤다. 아프가니스탄에 집중됐던 미국의 초점이 흩어졌다. 인명이나 대중 감정의 면에서 치르는 전쟁의 대가가 컸다. 성전 전사들이 도시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대통령은 손해를 차단하기로 결심했다. 2006년 9월 그의 지방 주지사가 부족 전사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알카에다는 서슴없이 존재를 과시했다. 전사들은 와지리스탄에서 “범죄인들”을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대담한 행진을 벌였다. 미국의 위성사진에는 곧 파키스탄 국경을 건너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외국인 전사들의 일렬종대 행군이 포착됐다. 일부는 신발이 눈에 젖지 않도록 비닐백으로 감싼 모습이었다. “폭탄 기술자”로 알려졌으며 이라크에서 단련된 베테랑인 한 알제리인은 전사들에게 급조폭발물 제조법을 가르쳤다. 현지 전사들은 암살과 협박을 동원해 통치했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경험 있는 서구 군 장교는 전사들이 현지 경찰에게 수박을 팔았다는 이유로 한 영세 상인과 온 가족을 죽였다고 말했다. “오사마를 배신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해 보라”고 그는 말했다. 2006년 말과 2007년 초 딕 체니 부통령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비롯해 걱정이 된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파키스탄에 가서 무샤라프 대통령을 만나 전선의 군사작전을 재개하라고 설득했다. “평화조약이 파키스탄을 실망시키고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백악관의 대테러 담당 책임자 타운젠드가 말했다. 파키스탄 대통령은 전사들을 진압하든 안 하든 다 같이 인기 없고 불안한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시지푸스는 또다시 바위를 밀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샤라프는 이미 8만 명이 파병된 국경 지역에 2만 명을 증파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군대가 진심으로 알카에다와 싸우려는 생각은 없다고 본다”고 정통한 파키스탄 군부 소식통이 뉴스위크에 전했다. “마음으로 임하지 않는 듯하다.” 일방적 행동을 주문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거친 언사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파키스탄의 퇴역 장성 탈라트 마수드가 말했다. 그는 명망 있는 온건파다. “민간인이나 군부나 모두 굴욕적으로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주미 파키스탄 대사인 마무드 알리 두라니는 파키스탄이 알카에다 공격에 미국보다 더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훨씬 더 큰 위협을 받는다”). 미군 특수작전부대는 이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들을 추적하는 경험을 꽤 쌓았다. 바그람에 있는 합동사령부 본부에는 첨단 감청장비와 추적장비가 가득해 마치 “영화 ‘스타워즈’를 연상케 한다”고 그곳을 보고 온 한 국방부 관리가 말했다.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있는 해군 대학원의 특수작전 전문가 존 아킬라는 최근 몇 달 새 미군의 살상비율이 100 대 1(미군 사망자 한 명당 게릴라 사망자 100명)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은 공습 유도로 민간인도 많이 죽이며 그것이 더 많은 전사를 양성한다. 역시 해군 대학원에서 일하는 토머스 존슨에 따르면, 군이 계속 사망자 집계와 살상비율에 집착하는 짓은 쓸데없으며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죽이면 번식효과를 낳는다. 남은 남자 친척들이 싸움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먼저 알카에다 지도부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는 현지 부족민들의 마음을 사야지 그러지 않는 한 그들을 찾기 어렵다. 아프간 전문가인 존슨은 지난 2월 파키스탄 국경 인근의 살레르노 전진기지에서 사령관들에게 파슈툰왈리의 부족 관습을 설명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중 기지를 떠나는 사람은 약 5%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군이 정보전쟁에서 고전하는 이유를 그 무엇보다 잘 설명해주는 통계라고 그는 믿는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대다수 미군 병사가 “정지” “출발” “손 들어” 따위의 간단한 현지어도 할 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미군은 문화적 실수를 연발한다. 가택을 수색할 때 동원하는 군견 부대가 일례다(무슬림 문화에서 개는 불결한 존재다). 한편 탈레반은 시골 주민들의 신뢰와 신임을 얻으려고 애쓰거나 혹은 위협한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가 ‘미군은 시계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이 있다. 우리가 일주일 뒤나 1년 뒤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확실히 돌아온다’고 이야기한다”고 존슨이 말했다. 미군이 “병력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사실상 그러려면 장갑차나 막사 뒤에 머물러야 한다는 소리다. 칸다하르 인근의 안가에 처박힌 A팀의 라이스 상사는 바그람 기지의 고위층에서 메모를 받았을 때 짜증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병사들에게 총격전을 벌이지 말고 CONOPS에 “사망”이나 “파괴” 따위의 단어를 절대 쓰지 말라는 지시였다. 라이스의 병사들 사이에서 그 메모는 “축 늘어진 고추 메모”로 불린다(국방부는 라이스의 회고에 특별한 언급을 거절했다). 미군은 늘 딜레마에 갇힌다. 냉전시대 초기에 CIA를 운영한 옛 세대는 전투에서 숨은 적을 상대로 생존 싸움을 벌일 때는 학창시절 배운 공정한 놀이의 규칙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자가 치사하게 나오면 우리도 그래야지, 그러지 않으면 자유가 무너진다는 논리였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그 논리는 결국 실패한 멍청한 여러 암살 음모와, 워터게이트 사건 때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CIA에 수모를 안기고 사기를 떨어뜨린 갖가지 흉계를 낳았다. 9·11 이후 부시 정부 관리들, 특히 체니 부통령은 알카에다와의 전면전을 다짐했다. 그러나 비밀 교도소에서 벌어진 고문 혐의의 여파로 특히 헌법의 권리를 남용한 데 분노한 행정부 변호사들 사이에서 강력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알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럼즈펠드의 정보담당 차관 스티브 캠본은 미군 특수부대의 행위를 놓고 국방부 선임 변호사 윌리엄 헤인스와 격한 설전을 벌였다. 일부 정부 변호사와 의원들의 생각에 그 특수부대는 너무 작기는커녕 너무 많은 방종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 수뇌부의 실망은 이해할 만하다. 빈 라덴 수색작전에는 일종의 다급한 속성이 있다. 일부 전문가는 그가 항상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한곳에 처박혀 전자장비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 감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004년의 위기일발 이후 “셰이크”는 경호원 수를 줄이고 오로지 충직한 아랍인만 쓴다고 오마르 파루키가 말했다. 아프간-파키스탄 국경 양쪽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서구 군 간부는 빈 라덴이 같은 “특징”을 지닌 소규모 경호원 집단을 국경선을 따라 배치했을지 모른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소규모 인원이 현지 주민들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비밀리에 늘 이동한다는 특징이다. 역(逆)정보 작전으로는 아주 그만이라고 그 간부는 말했다. 인근 주민들은 빈 라덴이 근처에 있음이 틀림없다고 수군대기 시작한다. “빈 라덴이 틀림없다는 말이 나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작전을 개시한다. 그들은 우리를 떼어내고 잘못된 단서를 따라 자산을 낭비하게 만든다. 돈도 안 들고 하기도 쉽다.” 정보원들이 빈 라덴의 행방에 관한 힌트라도 모을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현상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2001년 11월 초 네브래스카 대학의 지리학자 존 슈로더는 정보 관리들 앞에서 그해 10월 공개된 비디오에서 빈 라덴의 뒤에 나온 바위의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보요원들에게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스핀가르 산맥의 서쪽에 있는 듯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고 당시 CIA 빈 라덴 담당부서 책임자의 특별보좌관이었던 마이클 슈어가 말했다. “우리는 지질학자들을 불렀다. 독일인들에게 조류학자도 부르게 했다. 비디오에서 어떤 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기에 그 새가 동남아의 특정 지역에 사는 새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CIA는 의사들도 불러 당시 빈 라덴이 앓는다는 소문이 난 신장 질환의 징후를 찾았다. 분석가들이 “수척한 테이프”라 이름 붙인 2001년 12월 27일 비디오에는 핼쑥한 얼굴의 빈 라덴이 나온다. 왼쪽 팔을 못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의 건강 문제를 찍어내지 못했다”고 슈어는 말했다. CIA 분석가들은 빈 라덴을 “엘비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지만 실은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004년 말 이후로 비디오를 발표하지 않았고, 녹음 테이프로 육성을 들려준 지도 1년이 넘었다. 질병으로 몸을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신장병 소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빈 라덴이 신장암 말기에 쓰는 약을 찾았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타운젠드가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모든 정보를 본다. “그가 죽었는데도 우리가 그와 관련된 어떤 정보나 첩보를 입수하지 못하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살았다면 가능한 한 많은 미국인을 죽이려 들 것이 틀림없다. “셰이크의 바람은 서구의 궁전들에 또 한 방을 먹이는 일”이라고 알카에다의 이집트인 지도자 셰이크 사이드가 말했다. 2003년 빈 라덴은 심지어 사우디의 급진파 성직자에게서 “미국인 1000만 명 정도”는 핵무기나 생물 무기로 죽여도 좋다는 종교적 재가를 받았다고 슈어는 지적했다. 미국은 여전히 그의 원수다. 뉴스위크는 6년 동안 빈 라덴의 개인 경호원으로 일한 나세르 알바리를 인터뷰했다. 현재 예멘에서 매우 허술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는 그는 여전히 “셰이크”를 존경했다. 알바리에 따르면 빈 라덴은 성전주의 시인이 쓴 긴 시의 일부분인 다음과 같은 엉터리 구절을 혼자 읊조리고는 했다. 나는 미국의 적이라네 생명이 다하고 종말이 오는 날까지. 그것이 파괴의 뿌리이고 가지라네, 그것이 나뭇가지에 걸린 악이라네.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미국 이야기뿐”이라고 알바리는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펩시조차 마시지 않는다.” 빈 라덴의 2인자인 자와히리도 미국을 향한 악감정이 그 못지않다. 여러 정황에 따르면 9·11 사태가 일어나기 전 빈 라덴에게 테러의 야망을 “가까운 적”(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집트의 부패 정권)에서 “먼 적”(미국)으로 돌리게 만든 사람이 바로 교육 수준이 높은 그 이집트 의사다. 서구세계에는 빈 라덴보다 자와히리가 더 위협적일지도 모른다. 빈 라덴은 네트워크에서 사라지면서 더 이상 작전을 지휘할 입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의 체포는 실제 소득보다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한편 자와히리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30개 이상의 메시지를 발표했다”고 성전 전사들의 웹사이트를 감시하는 사이트 연구소의 창립자이자 소장인 리타 카츠가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군이 붉은 사원을 무력 진압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자와히리의 반응이 인터넷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그는 뉴스를 접하고 쟁점에 신속 대응할 목적으로 도시나 그 인근에 살지 않나 생각한다”고 카츠가 말했다. “2005년에는 배경으로 바람에 날리는 싸구려 옷감이 보이는 비디오들이 나왔다. 요즘에는 편집 과정에서 인공 배경을 만드는 등 좀 더 좋은 장비를 사용하는 듯하다.” 조지타운 대학의 테러 연구 전문가 브루스 호프먼은 “알카에다의 의식은 7세기 수준일지 몰라도 통신 안목은 21세기 수준”이라고 말했다. “알카에다는 세계적 브랜드가 됐으며 그런 인지도를 달성하는 데는 비디오가 원동력이었다.” 이제 포괄적인 의문은 알카에다가 또다시 미국에 9·11식의, 또는 그보다 더 심한 “엄청난”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있느냐의 여부다. 알카에다 지도부가 산속으로 쫓겨간 2001년에는 많은 간부 요원이 살해되거나 체포돼 성전운동이 현지 지망생들에 의해 유지됐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영국 등지에서 폭탄을 터뜨려 지하철과 디스코텍을 폭파했다. 그러나 기술수준이 낮았고, 지난 6월 런던에서 두 대의 자동차폭탄을 터뜨리는 데 실패한 뒤 글래스고 공항에서 자살폭탄을 터뜨리려다가 실패한 두 얼간이처럼 멍청한 사람도 일부 있었다(한 명은 결국 화상으로 숨졌다. 그러나 그들의 자동차에 불이 붙었지만 폭발하지는 않았을 때 다친 민간인은 한 명도 없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2001년 “알카에다 핵심 요원은 3000명 정도였다”고 해군 대학원의 아킬라가 말했다. “약 1000명을 죽이거나 생포했다. 약 1000명 이상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약 1000명이 와리지스탄에 남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큰 테러 대학은 사라졌다. 이들은 그 뒤로 인터넷에 의존한다. 실무 강의를 받지 못했고 훈련소의 결속력도 없다. 그것이 기술 저하를 초래했다. 테러 기술이 정말 형편없이 떨어졌다.” 앞으로의 위험은 이라크전이 장기화할수록 신세대 전사들이 숙달돼 간다는 점이라고 아킬라는 말했다. “그들은 재교육을 받는다. 알카에다 1세대는 아프간 훈련소에서 배출했다. 2세대는 이슬람주의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다. 차세대는 이라크라는 도가니를 겪은 사람이 된다. 결국 그들의 기술 수준이 1세대를 능가할 성싶다.” 미군이 알카에다 훈련소를 점령했을 때 화생방 무기를 논의하는 과학 자료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심란해진다(자와히리가 화생 무기에 각별한 관심이 있다고 한다). 진정한 대량살상무기는 획득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사들이 핵무기나 또는 몇 사람 이상을 죽일 능력이 되는 세균무기를 만들거나, 훔치거나, 혹은 구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래식 폭발물과 병원 폐기물에서 발견되는 방사능 물질을 섞어 만드는 일명 ‘더러운 폭탄’(저급 핵무기)은 제조가 그처럼 어렵지 않다. 크럼튼은 자와히리가 2003년 뉴욕 지하철에서 청산가리 폭탄을 터뜨리려던 계획을 취소한 일이 있다고 돌이켰다. “그 이유는 모른다”고 크럼튼은 말했다. 알카에다가 그 테러를 저지르려고 뽑았으나 미국에 보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팀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취소했을까? 그들은 어디 있을까?” 유럽과 미국의 정보 관리들은 알카에다가 중대한 방식으로 서구에 타격을 가할 준비를 한다는 조짐들 때문에 불안한 여름을 보냈다. 국가테러대항센터의 레드 제독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세한 내용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로 판단하건대 테러 감시인들이 뭔가 보고 들은 게 있어 경계 수위를 높인 사실은 분명했다. 공격 대상이 유럽인가? 미국인가? 이 질문에 레드는 “그들은 서쪽으로 오고 싶어 한다. 가능한 한 서쪽 끝까지”라고만 말했다. 정보기관들은 테러리스트들의 이동에 관한 구체적 정보가 없다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라고는 매우 전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두어 개의 실마리다. 이것저것 그 단편들이 보일 뿐이다. 그 이상은 말하기 곤란하다.” 한편 빈 라덴 수색작전은 계속된다. 최근에는 한 바퀴 빙 돌아 도로 원점으로 왔다. 토라보라 지역으로 말이다. 올여름 점점 구별하기가 힘들어지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전사 약 500명이 그 지역에 침투했다. 8월 초 급조폭발물에 의해 미군 특수부대 병사 세 명이 희생된 뒤 미군은 공중공격의 지원을 받으며 빈 라덴의 옛 근거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지난주 뉴스위크 기자는 안내원을 대동하고 전투현장을 방문하러 산에 올라갔다. 산을 오르던 도중 미군 험비와 아프간 정규군의 포드 레인저 픽업들로 이뤄진 작은 행렬을 추월했다. 산길에는 2001년 폭격으로 사망한 이름 없는 아랍인 무덤 수십 개 외에 폭발물 파편, 녹슨 총알, 부서진 장비 쪼가리 등이 보였다. 일부는 꽤 오래돼 보였다. 사방에 전단지가 날아다녔다. 미군이 테러범들을 숨겨주는 사람을 찾아내겠다고 현지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이다. 전단지에는 하얀 눈동자를 번뜩이는 사악하게 생긴 복면인들의 조잡한 그림이 있었다. 한 눈에는 빨간 원 안에 오사마라는 글자가 적히고 대각선 사선을 그어 놓았다. 뉴스위크 기자와 안내원은 일련의 불에 탄 소련제 전차들을 지나쳤다. 의기양양한 아랍어 낙서가 적혀 있었다.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반대투쟁을 벌이던 시절의 유물이다. 우리는 마침내 말라와 계곡으로 알려진 골짜기 바로 위에 있는 빈 라덴의 옛 동굴 단지에 도착했다. 널찍한 암붕 위에는 빈 라덴의 옛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은 물이 말랐지만 풍경은 여전히 장관이었다. 셰이크와 그 일행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그저 소문이었다. With RON MOREAU and SAMI YOUSAFZAI on the Afghanistan-Pakistan border; ZAHID HUSSAIN in Islamabad; ROD NORDLAND in Tora Bora; MARK HOSENBALL, MICHAEL HIRSH, MICHAEL ISIKOFF, JOHN BARRY, DAN EPHRON and EVE CONANT in Washington; CHRISTOPHER DICKEY in Paris, and ROYA WOLVERSON in New York,

2007.09.04 15:59

25분 소요
테러의 새 얼굴 ‘죽음 의 의사들’

산업 일반

영국서 발생한 차량 폭탄 테러에 다수의 의료인 연루돼 의사인 빌랄 압둘라는 무엇 때문에 불타는 체로키 지프를 몰고 번잡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공항 청사로 돌진했을까? 압둘라를 포섭하려 했던 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에 몸 담았던 시라즈 마헤르는 영국 언론에 아래와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영국의 유서 깊은 대학 도시 케임브리지에서 압둘라는 한 남자와 같은 아파트에서 세들어 살았다. 그 남자는 즐겨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연주와 노래 솜씨가 엉망이었다. 마헤르는 압둘라가 나중에 이렇게 ‘자랑’했다고 회상했다. 압둘라는 만일 그 룸메이트가 계속 기타 치고 노래할 경우 “당신의 기타를 박살내겠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압둘라는 자신의 경고가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한 비디오테이프를 DVD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비디오에서는 이라크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악명 높은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지난해 여름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다)가 한 인질의 참수 장면을 보여줬다. 압둘라는 룸메이트에게 다시 경고했다.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린다면, 저 장면을 보라. 저게 우리 동지들의 활동이다.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이다.” 지난주 테러와의 전쟁에 종사하는 모든 정보 당국자가 알고 싶어 하는 점이 있었다. 압둘라가 런던에서 차량 폭탄을 폭발시키고 다시 스코틀랜드에서 자폭 테러로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은 이라크 알카에다의 활동상에서 영감을 얻은 자발적인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의 계획에 따라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 대답은 적어도 공식적으론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대(對)테러 당국자들이 뉴스위크에 밝힌 바에 따르면, 압둘라(혹은 그와 공모한 용의자들)와 이라크 알카에다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그 연관성이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실제론 알카에다와 무관한지, 아니면 보다 광범한 음모의 일부인지는 당국자들도 정확히 모른다. 압둘라의 어리숙한 행동은 이번 테러가 아마추어의 행위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차량 폭탄 테러가 실패한 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려 했던 또 다른 용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압둘라와 그 다른 용의자는 살아남았고, 그들이 런던에서 시도했던 차량 폭탄 테러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정보 당국자들은 이번에 무산된 테러 음모가 혹시 한밤중의 화재 경종은 아니었는지 곱씹어보고 있다. 지난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테러분자 척결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들이 미국까지 들어올지 모른다”고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부시의 많은 비판자도 2003년 3월 미군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압둘라가 어떻게 과격파로 변했는지 알게 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이 현실로 변한 사태를 목격했다. 이라크 전쟁은 결국 테러분자 양산이라는 결과만을 초래했으며, 시간이 흐르면 그 테러분자들이 서방세계 공격에 나서게 되리라는 두려움이었다. 이번 사건 초기의 언론 보도는 그런 두려움을 심화시켰다. 영국과 호주에서 경찰이 용의자 8명을 체포했는데, 그중 7명은 의사이고 1명은 의료 전문가라는 보도였다. 어떻게 인명을 구하겠다고 서약한 의사들이 그런 살인 행각에 열정적으로 나섰다는 말인가? 물론 압둘라가 대량학살을 계획한 최초의 의사는 아니다. ‘파파 닥 두발리에’라는 별명이 붙은 아이티의 도살자도 의사였다.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도 의사다. 사실, 가장 위험한 과격분자는 직업도 희망도 없이 분노만 가득한 청년들이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사람은 엘리트들,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론 엘리트 계층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불만이나 복수심을 행동으로 표출하며, 치명적인 무기를 입수할 만한 수단과 노하우를 지녔다.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동굴들에서 수거한 증거에 따르면, 자와히리는 화학·생물학 무기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의사들은 대다수 일반인보다 쉽게 화학전이나 세균전의 재료를 입수할 가능성이 있다. 일부 의사는 또 방사능 물질에도 쉽게 접근한다. 이번 폭탄 테러 음모는 알카에다가 영국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심어놓은 사악한 ‘의사들의 테러조직’이 저지른 사건으로 판명될 가능성도 있다. 또 수사당국에 검거된 의사들이 이번 자폭 테러 음모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용의자들의 친구이거나 동료일 가능성도 있다. 그들 중 적어도 세 명은 혈연관계로 추정된다. 카필과 사빌 아메드 형제, 그리고 호주에서 억류된 의사 모하메드 하니프가 바로 그들이다. 카필 아메드는 이번 사건에서 체로키 지프에 동승했다는 또 다른 용의자인 듯하다. 그는 지프가 글래스고 공항 청사로 충돌하기 직전 차에서 뛰어내린 뒤, 종류가 밝혀지지 않은 가연성 액체를 자신의 머리 위에 쏟아붓고는 불을 붙였다. 수사관들에 따르면 그는 중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아직 신문을 받지 않았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아메드는 처음엔 언론에서 의사로 보도됐지만 사실은 기술자다. 그는 이번 사건에 사용된 폭탄을 스코틀랜드의 한 차고에서 만들었다는 의심을 받는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그다지 영리한 테러범 같지는 않다. 인터넷에서는 차량 폭탄 제조 방법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런던 중심가에서 발견된 두 대의 메르세데스 벤츠 안에는 프로판 가스통들과 못이 들어 있었다. 폭발 장치치고는 매우 조잡했고 효과도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 전문가에 따르면,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하려면 오랜 시간 뜨거운 열에 노출돼야 하며, 폭발한다 해도 차량을 산산조각내 금속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도록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지는 못하다. 아메드와 압둘라가 솜씨 없는 테러범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들의 얘기는 여전히 불길하다. 이라크의 명문가 자제인 압둘라(27)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에 유학해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바그다드로 돌아간 뒤 그들 가족은 수니파로서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고 알려졌다. 조용하고 학구적인 압둘라는 신앙심이 깊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학생이었던 한 친구는 당시 급우들이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자 압둘라가 화를 냈던 일을 기억한다. 압둘라는 “그 말은 기독교인들이나 쓰는 말이지, 우리 같은 무슬림이 사용해서는 안 돼”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친구는 압둘라가 2000년 요르단 여행 도중 급진적으로 변했다며 “그가 귀국했을 때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영국에 거주하는 압둘라의 한 친적은 그가 케임브리지에 살 때 강한 종교적 열정을 보였다고 워싱턴 포스트지에 말했다. 그곳의 한 이슬람사원에서 설교 담당 성직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압둘라가 대신 설교를 맡을 정도였다. 압둘라는 한동안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의학을 공부했다. 저명한 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의술을 공부하기 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 친척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압둘라는 의사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이라크에서 의사고시에 합격한 일은 아버지가 유명한 의대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이라크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그 친척은 고뇌하던 젊은 압둘라로선 이슬람 율법학자가 되기를 더 원했을지 모른다면서 “한번은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축출했을 때 압둘라는 바그다드에 있었다. 저명한 수니파 가문이었던 압둘라 가족으로선 재앙을 만난 셈이다. 종파 간 폭력 사태가 확산됐다. 바그다드 대학 총장이자 부설 의대 학장이었던 모하메드 라위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바트당 당원이었던 라위는 후세인의 주치의였다고 알려졌다. 라위가 피살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자리는 시아파 인사가 차지했다. 압둘라의 고등학교 친구에 따르면 압둘라는 그 사건에 격분했다. 당시 압둘라는 급우들에게 “수니파 학장이 살해됐다. 그렇다면 시아파 학장도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군의 이라크 점령에도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압둘라는 2004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케임브리지의 한 케밥 식당 건물 위층에 살면서 주인집 아이들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종교·화학·생물학을 가르쳐줬다. 그러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이라크 소식을 빠짐없이 점검했다.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했던 앞서의 친척은 무엇이 혹은 누가 압둘라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카에다에 관해서는 “압둘라는 그들이 이라크에서 벌이는 활동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어느 시점에선가 압둘라는 카필 아메드와 친구가 됐다. 함께 룸메이트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인도 출신의 독실한 무슬림인 아메드는 뱅갈로르에 살 때 집 근처 이슬람사원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가 사원 신도들에게 좀 더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한 일이 발단이었다. 압둘라와 아메드가 실패한 자폭 테러 임무에 나서기 전 아메드는 마지막 유서를 남겼다고 일부 수사관은 전했다. 사건 발생 뒤 경찰에 체포된 8명(압둘라와 아메드 모두의 친구 내지 아는 사이들이다)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모하메드 아샤다. 아샤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고속도로를 차로 달려가다가 아내 마르와와 함께 체포됐다.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샤는 요르단 암만의 주빌리 스쿨(누르 왕비가 설립한 영재 학교)을 전국 3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의대 재학 시절의 학점은 4.0 만점이었다. 2005년 아샤는 영국으로 건너가 신경과학자로 근무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지난주 아샤의 가족은 그가 테러 음모가였을 가능성을 부인했다. 아버지 자밀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의 신앙심은 보통 사람 수준이었다. 내 아들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아이는 공부할 시간밖에 없는 애다. 내 아들을 잘 안다. 이런 일에 끼어들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아샤의 가족들은 2006년 그가 아내와 함께 요르단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보여준 약간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심하는 듯했다. 당시 아샤는 과격세력인 이슬람주의자들처럼 긴 턱수염을 뽐내고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신체적 변화가 무슬림형제단 단원인 한 정신적 스승을 흠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을 뿐이라고 설명하려 애썼다. 아샤가 미국에서 의사 활동을 하려고 예비 조사를 했다는 사실은 중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테러 미수 사건으로 지난주 체포돼 신문을 받는 또 다른 의사와 아샤는 외국인 의사들에게 개업 면허를 부여하는 한 미국 단체와 접촉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 FBI 관리에 따르면, 그 용의자들이 미국을 여행했거나, 혹은 미국 내에 어떤 의미 있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주 뉴스위크가 접촉한 미국의 대테러 당국자 대다수는 미국 본토를 겨냥한 테러 공격이 임박했다고 경고하는 적색 경보를 발령할 생각이 없었다. 반면 유럽의 정보 당국은 좀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지난 4월 런던 선데이 타임스는 섬뜩한 내용의 문건을 공개했다. 합동 테러분석 센터에서 만든 영국 정보부의 비밀 문서였다. 그 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금 이라크의 알카에다는 영국과 여타 서방 국가들을 겨냥한 “대규모” 테러 공격을 준비 중이다. 신문은 한 알카에다 조직원의 말을 인용해 그 테러 공격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맞먹는 수준의 작전이며, 또 “교황의 지위도 흔들리게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달 한 비디오 내용이 공개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졸업식” 장면을 촬영했다는 그 비디오에서 한 탈레반 사령관은 복면을 한 자살 특공대원들을 독일·영국·캐나다·미국으로 출정시켰다. 대다수 정보 당국자는 그 비디오테이프가 비현실적인 선전술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일부 관계자는 그 테이프 안에 사실적인 측면이 포함됐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독일 정보 당국자들은 특히 초조해 한다. 지난달 두 명의 독일인이 파키스탄 당국에 체포됐다. 그들은 이란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던 듯했다. 독일의 일부 수사관은 그 두 명의 용의자가 서방을 겨냥한 테러 공격 훈련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고 믿는다. 독일 내무부의 고위 관리인 아우구스트 한닝은 기자회견에서 현 상황이 2001년(9·11 테러가 발생한 해) 여름을 상기시킨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근거가 불확실한 테러 위협이 수면으로 떠올랐는데, 알다시피 그것이 현실이 됐다.” With STRYKER MCGUIRE, GINANNE BROWNELL, EMILY FLYNN VENCAT in London, WILLIAM UNDERHILL in Glasgow, SILVIA SPRING in Newcastle-under-Lyme, BABAK DEHGHANPISHEH in Baghdad, SUDIP MAZUMDAR in New Delhi, CHRISTOPHER DICKEY in Paris, JASON OVERDORF in Bangalore, ROD NORDLAND and RANYA KADRI in Amman and additional reporting from our Iraqi staff

2007.07.18 11:02

8분 소요
Periscope

산업 일반

The Next Zarqawi? 알자르카위 후계자는 누구?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의 죽음이 이라크 저항세력의 조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하다. 민감한 사안이라며 익명을 요구한 미국 대테러 관리 두 명은 이라크에 알자르카위의 알카에다말고도 최소한 7개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에 소속돼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회는 종교적 동기로 저항에 나선 분파들의 활동을 조율하고 관리한다. 위의 관리들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하기로는 슈라 위원회에 속하지 않는 이라크 내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단체만 최소 4개나 된다. 더구나 이들 단체를 한데 뭉친 조직은 더 큰 저항조직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이들 대규모 조직을 감독하는 주체는 후세인 정권 충성파나 정보기관과 연계된 바트당 지하조직이다. 이라크 저항세력의 웹사이트를 조사하는 민간연구자 에반 콜먼에 따르면 알자르카위 사망 수주 전 이들 단체 중 몇몇은 작전 중에 지도자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도자가 죽었다고 해도 그 단체의 공격 행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미군이 지목한 알자르카위 후계자의 신원에도 의문을 표한다. 바그다드의 한 기자회견에서 빌 콜드웰 미군 대변인은 알자르카위 후계자로 아부 아윱 알마스리라는 이집트인이 결정됐으며, 그의 본명은 유세프 알다르디리로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가했고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친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콜드웰은 알마스리가 아부 함자 알무하예와도 동일인이라고 주장했다. 알무하예는 알자르카위의 조직인 ‘유일신과 성전’이 후임을 발표한 공식 성명에 등장한 이름이다. 하지만 위의 두 관리는 확실치 않다고 뉴스위크에 전했다. 콜먼도 이집트인이 알자르카위의 뒤를 이었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스티븐 해들리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백악관 브리핑에서 알자르카위의 후계자가 “현재로선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MARK HOSENBALL More Bumps in the Rough Road to Europe 터키의 EU 가입 여전히 갈 길 멀다 지난 40년 동안 정성을 기울인 끝에 터키는 드디어 지난주 유럽연합(EU)과 공식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회담에 참석한 압둘라 귈 터키 외무장관은 기뻐하기는커녕 음울한 표정만 지었다. 너무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한 동료가 “좀 웃어요!”라는 메모를 전달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스령 키프로스는 자국 선박들에 터키가 항구를 개방한 뒤 EU 가입 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해왔다. 지난주 EU는 그런 요구를 철회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터키 사람들은 분노했다. “터키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이번 회담에 깊숙이 개입한 EU의 한 고위 외교관이 말했다. “터키인들은 협상할 때마다 똑같은 과정을 겪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키프로스가 다음 회담에서 노리는 점도 바로 그것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의 한 측근은 뉴스위크 기자에게 터키 정부는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대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주 총리 자신은 협상 결렬 가능성도 감수하겠다는 뜻을 비췄다. “회담이 결렬되면 모두가 끝이다.” 에르도안 총리의 말에 EU는 당황했다. 냉정한 대응일지는 모르지만 전혀 낙관적이진 않다. OWEN MATTHEWS and SAMI KOHEN Roaring Tigers 내전 재발 조짐 보이는 스리랑카 2002년부터 지속된 스리랑카 정부와 반군 사이의 정전이 지속되리라는 생각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주 충격적인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싱할라족 여성과 어린이를 태우고 보건소를 향하던 버스가 지뢰를 밟아 60명 이상이 사망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의 소행이라고 비난하며 LTTE 거점에 대대적인 공습으로 맞섰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소소한 충돌이 이어진 후 갑작스럽게 심각한 폭력사태로 번졌다.“본격적인 교전상황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콜롬보 소재 독립연구소인 정책대안센터의 파이카이소시 사라바나무투는 말했다.일부 분석가는 LTTE가 (폭발 사고의 책임을 부인한다) 싱할라인들이 지배하는 스리랑카 군대를 자극해 광범위한 종족 간 혹은 군사상 분쟁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전문가들은 LTTE가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해 약화된 지지기반을 재구축하려들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LTTE는 더 많은 종족 분쟁을 일으킬 심사인 듯하다. 옳건 그르건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스리랑카 선데이 타임스의 국방담당 기자 이크발 아타스가 말했다. “그들은 정부의 무력 시위를 부추겨 자신들이 방어자 역할을 함으로써 타밀족을 보호해 줄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들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실제로 버스 폭발 사고 다음날 LTTE는 북서부 해안에 정박한 해군을 상대로 해상 공격을 감행했다. 소규모 전투였지만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마힌다 라자팍스 스리랑카 대통령은 지금까지는 정전 협정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지만 LTTE에 보다 강하게 대응하라는 민간과 군부 강경파들의 압력이 만만치 않다. 이런 압력뿐 아니라 그와 같은 폭력사태가 계속되면 대통령으로서도 맞대응 외에는 별 방도가 없을 듯하다. RON MOREAU More of the Same 이탈리아 신구 총리의 도토리 키재기 이탈리아인들은 일단 새 정부를 믿어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새 내각 역시 자당 이기주의에 빠져 법을 주무르고 관료정치의 실수를 되풀이하자 전임자 베를루스코니식 정치의 재탕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로마노 프로디 신임 총리가 베를루스코니처럼 총리의 사면이나 축재를 위해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의 최대 정적이자 이탈리아 정치 역사상 가장 맹렬한 야당의 지도자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정치판과 경제계에서 축출하려고 가능한 모든 조처를 강구 중이다. 프로디는 베를루스코니 시절 제정됐던 각종 법률을 고쳐 쓸 심사다. 화이트칼라 범죄의 공소시효를 줄여 베를루스코니가 사기나 세금 포탈 혐의에서 벗어나도록 해 준 교묘한 규정들을 재정리하려는 의도다. 프로디는 또 공익과 사익 상충 금지 법안의 제정도 추진한다. 그 법이 통과되면 베를루스코니는 피닌베스트의 소유주나 정치인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피닌베스트는 베를루스코니 가족이 소유한 회사로 그의 정치자금원이기도 하다. 베를루스코니라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다. 말은 많고 기반은 허약한 프로디의 좌파 연정을 쪼개기 위해 혈안이다. 야당은 벌써 신임정부 불신임안을 세 번이나 제출했다. 출범한 지 한 달 사이다. 모두 거부되긴 했지만 거부세력이 절대다수도 아니었다. 연정에 참여한 소수정당 지도자를 향해 구애의 손길도 뻗친다. 나오기만 하면 큰 선물을 주겠다는 식이다. 지난주 프로디 총리는 첫 해외 공식 출장길에 올랐다. EU 정상회담차 오스트리아를 찾은 그는 “이탈리아 정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국민은 도토리 키재기로 볼 뿐이다. BARBIE NADEAU Learning From Monkeys 면역체계 강화만이 명약 아니다 에이즈바이러스(HIV)도 다른 바이러스나 매한가지다. 바이러스의 목적은 세포를 죽이는 게 아니라 복제와 번식이다. 그래서 숙주세포가 필요하다. 숙주세포가 죽으면 자신도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한다. 따라서 바이러스를 위해서건 우리 인간을 위해서건 이상적인 바이러스는 숙주세포를 병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바이러스는 숙주세포를 죽이지 않고 오직 기생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런 이상적인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아프리카 녹색원숭이, 거무스름한 망가베이 원숭이 등 여타의 유인원에서 발견되는 HIV 관련 바이러스들이다. 이들 원숭이의 “면역체계는 바이러스를 허용한다”고 바이러스학자 프랭크 커치호프는 말했다. 커치호프와 동료 연구자가 셀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그 이유는 문제의 바이러스가 원숭이의 면역반응을 억제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원숭이 바이러스에서 인간의 질병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HIV는 그런 특성을 잃는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열을 올리면서 면역력을 소진한다. 원숭이보다 인간에 훨씬 가까운 침팬지의 바이러스는 면역체계를 억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침팬지는 왜 병들지 않을까?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침팬지의 면역체계는 바이러스 반응률이 매우 낮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뤄 볼 때 이제 과학자들은 “HIV 치료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커치호프는 말했다. 먼저 면역체계의 반응률을 높이지 말고 낮춰야 한다는 의미다. MARY CARMICHAEL

2006.06.27 11:52

5분 소요
사그라지지 않는 종파 간 유혈 투쟁

산업 일반

자르카위는 사라졌지만 그 잔혹한 테러의 영향력은 여전해 대통령 이하 모든 미국 관리가 표정 관리에 바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잘마이 칼릴자드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의 사망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누가 그의 뒤를 잇든 세계의 지하드(이슬람 성전) 전사들이 단시일 내 자르카위 같은 인물을 다시 만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르카위는 수법이 유별나게 잔인한 괴물이었다. 그래서 희생자들은 물론 같은 수니파 동료들조차 그를 두려워했다. 테러리스트 중 테러리스트인 그는 언제나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었다. 수니파 인사들은 잔혹성과 능력을 겸비한 그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거나 손을 잡아야 했다. 자르카위의 비위를 건드리면 본인은 물론 가족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끔찍한 모습으로. 지난 두 달 동안만 해도 자르카위 집단은 라마디 일대의 수니파 족장 11명의 암살을 주도했다. 모두 신생 이라크 정부와 대화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됐다고 이스라엘 역사가 아마트지아 바람은 말했다. 따라서 미국 대사가 이라크의 수니파 저항세력과 동조자들에게 보내는 암묵적 메시지는 이것이다. 이제는 밝은 곳으로 나와도 되고, 시아파 동포들을 호의적으로 대해도 된다. “딩동. 이제 마녀는 죽었다”고 미국 정부의 한 관리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익명을 요구했다. 칼릴자드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전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정부와 신생 이라크 정부는 저항세력의 일부 지도자와 직접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화해 여건이 조성됐다”고 칼릴자드는 말했다. 그 여건 가운데 하나는 여섯 달 동안의 흥정 끝에 안보 관련 요직에 새 장관들을 임명한 일이다. 자와드 알볼라니 신임 내무장관과 압둘 카데르 모하메드 자심 국방장관(전자는 시아파이고 후자는 수니파다)은 “민병대와 관련이 없고, 모든 징후로 보아 종파 성향이 없다”고 칼릴자드는 말했다. 수니파 저항세력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자면, 이 두 장관은 사담 후세인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는 장점도 있다. “두 장관 모두 이라크의 모든 사회와 선이 닿는다”고 대사는 말했다. “그러나 두고 보자. 이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자르카위 이후 이제 화해 정치가 가능해졌을까? 일부 긍정적 조짐이 있다. 자르카위가 숨지고 불과 며칠 뒤 저항운동을 지지해 오던 일부 수니파 인사가 그를 비난하면서 협상 테이블에 돌아올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지난 3년 동안 좋은 계기라고 생각했다가 실망하는 일을 워낙 많이 겪어 아직 큰소리치기 힘들다고 인정했다. 후세인 체포, 총선, 주권 이양 등이 그런 경우였다. 그 해답은 자르카위의 유산이 지닌 시공간적 영향력에 달렸다. 이름 없는 떠돌이 성전 운동가로 시작할 때부터 자르카위는 자신의 잔혹한 명성을 동경하는 이슬람주의 청년들로 이뤄진 독자적 국제운동을 주도했다. 상당수가 이제 이라크에서 그의 투쟁을 이어받으려 한다. 안사르 알수나라는 이름의 저항단체는 지난 토요일 시아파 암살단을 잡았다고 주장하며 세 사람을 참수하는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인터넷에 올렸다. 마치 자르카위의 투쟁은 계속된다고 시위하는 듯했다. 심지어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오른팔인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볼 때도 자르카위의 잔인한 전술(그런 참수 비디오와 시아파 아녀자의 대학살)은 때때로 도를 넘었다. 비록 알카에다에 충성을 다짐했다고는 하지만 자르카위의 행동은 늘 빈 라덴과 뚜렷이 달랐고, 요르단이나 모로코에서의 테러를 통해 국제적 성전을 치르는 독자 노선을 걸었다. 테러 전문가들은 자르카위가 유럽에서 ‘백인’ 전사를 모집하는 일에도 관여했다고 말했다. 이라크에서 자금을 조성하고 싸우는 일은 물론 서구 목표물들에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일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여권상의 문제가 없고 백인사회에서 표가 안 나기 때문이다. 자르카위는 인터넷에서 벌이는 사이버 성전 기술에서도 상관들을 앞질렀다.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보금자리를 꾸릴 형편이 못된다. 따라서 인터넷은 테러리스트들의 새로운 ‘기지’로 떠올랐다. 그곳에선 새 세포와 음모가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자르카위의 수법이 널리 연구된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웹에 올린 내용물 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자르카위가 미국인 하청업자 니컬러스 버그의 목을 직접 베는 끔찍한 비디오다. 자르카위의 사이버 메시지를 열심히 전파하는 전도사 가운데 런던에서 활동하다가 지난해 가을 체포된 이르하비 007이라는 해커가 있었다(이르하비는 아랍어로 테러리스트를 뜻한다). 웹사이트에서 벌인 증오의 선동 행위로 자르카위의 영향력은 캐나다까지 미쳤다. 캐나다 당국은 2주 전 한 조직을 검거했는데 그것이 갓 태동한 테러 세포가 아닐까 우려했다. 캐나다 의회에서 인질을 잡는다는 토론토 테러 음모에 관여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르하비 007이었다. 신원이 유니스 트술리로 밝혀진 그는 수상쩍은 워싱턴 DC의 컴퓨터 사진들을 갖고 있었다. 사이버 세계에서 자르카위의 전설은 때론 빈 라덴에 필적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잔혹성의 새 기준을 세웠으며, 새로운 선전 모델을 창출했다”고 무슬림 급진주의를 연구하는 보스턴대의 후사인 하카니는 말했다. “활동 내역을 그처럼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사람은 없었다.” 이슬람 교리를 근거로 인간의 사진 이미지를 모두 금지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저항세력조차 요즘에는 비디오 부서를 차렸다고 하카니는 말했다. “거실에 할아버지 사진을 걸어놓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패던 작자들이다.” 탈레반 대원 사이에서는 이미 자르카위를 성인으로 떠받드는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는 무슬림 세계의 수퍼 스타”라고 탈레반의 한 고위 간부는 말했다. 자비훌라라는 가명의 그는 자르카위가 탈레반과 함께 싸우던 시절 알고 지냈다. “그의 죽음은 알카에다와 모든 무자헤딘의 입장에서 세계적인 비극이다. 대신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말세 분위기의 종파분쟁을 일으킨다는 자르카위의 원대한 이라크 구상이 이제는 자체 생명력을 얻어 더 이상 그가 없이도 계속될까. 이 질문은 그가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 생기는 가장 큰 궁금증이다. 자르카위가 시아파를 대상으로 잔혹 행위를 저지른 덕분에 이제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에는 증오와 불신이 뿌리내렸다. 이것이야말로 전력부족 사태나 고치지 못한 하수도와 전염병 문제보다 이라크의 일상이 안고 있는 더 최악의 현실이다. 그 때문에 미군이 철수하면 곧바로 전면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자르카위의 시아파 사원과 경찰서 공격이 무시무시한 시아파 암살단이 탄생한 주원인이라고 미국의 정보 관리들은 생각한다. 그에 따라 수니파 주민들 사이에선 저항세력 지원 열기가 더욱 강해졌다. “종파주의는 자르카위의 유산”이라고 아랍연맹의 이라크 종신특사 목타르 라마니는 말했다. “이라크 국민의 최대 공통점은 서로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모두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서워한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전이 일어나기 전 자르카위를 이라크와 알카에다 사이의 연결고리로 강조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자르카위가 후세인과 어떤 접촉선이 있는지 전혀 분명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뒤 이 테러 지도자는 자신이 떠들어대던 바로 그 존재, 다시 말해 이라크에서 알카에다를 대변하는 인물이 됐다. 그는 이라크를 미군 병사들이 주둔하기에 훨씬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들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테러 전쟁의 ‘중심 전선’으로 부르도록 만드는 데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다는 얘기다. “옛 단체들은 처음에 입으로만 이슬람주의를 부르짖었으나 자르카위는 진정으로 이슬람화하면서 저항운동의 국제화를 주도했다”고 미군의 한 정보장교는 혹시나 이름을 밝혔다가 입을지도 모르는 피해를 꺼려 익명을 전제로 말했다. 칼릴자드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르카위가 반미 저항운동을 좀 더 큰 운동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인정했다. 대사는 또 자르카위가 최근에는 자신의 세력을, 정작 자기 때문에 생겨난 시아파 암살단에 맞서는 ‘수니파 민병대’의 이미지로 바꿔 새삼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칼릴자드는 말했다. “지난 8~10개월을 뒤돌아보면 종파분쟁이 최대는 아니더라도 주요한 분쟁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 저항세력은 시아파 민병대로부터 수니파를 보호한다고 자처한다.” 지금도 이라크와 세계 각국에는 자르카위와 그가 3년 동안 저지른 잔학행위를 규탄하지 못하는 수니파가 많다. 지난주 이라크국민당 소속의 온건한 수니파 정치인 미탈 알알루시가 용기를 냈다. 자르카위 사망 직후 그를 규탄하지 않은 정부 내 수니파 인사들을 비난했다. 언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일단 카메라를 벗어나면 그를 순교자로 부르는 수니파 정치인들이 있다고 알알루시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정치인들은 자르카위를 아랍의 친구로, 시아파 민병대와 연계된 잔혹한 암살단의 공격에서 수니파를 지켜주고 복수할 능력을 지닌 유일한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그의 죽음은 손실이며, 곧 시아파 마흐디군과 바드르 여단의 득세를 의미한다고 알알루시는 말했다. “그들은 안타까워했다”고 알알루시는 국제지대(옛 녹색지대) 내의 안가에서 담배를 뻐금거리며 말했다. “눈에 다 쓰여 있다.” 이라크의 수니파 주민 사이에선 이제 협조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차츰 무르익는 듯하다. 무슬림학자협회의 에삼 알라위는 지난주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자르카위를 비난했다. 영향력이 큰 이 단체는 과거엔 질문을 회피하거나 자르카위가 미국인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했었다. 이 협회는 이라크 저항세력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으며, 정부와의 협상 개시 여부를 논의하면서 공개적으로 자르카위의 협박을 받았다. 이제 알라위는 “우리가 자르카위나 알카에다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한다. 자르카위와 그가 저지른 행위는 사실상 이라크 저항운동의 모습을 왜곡했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자르카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었으며, 그 점을 분명히 한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수니파 국회의원인 셰이크 할라프 알일라이얀도 용감하게 나서서 “자르카위는 정부와의 대화에 반대했지만 대화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선지자께서도 이교도들과 타협했다”고 말했다. 이제 더 큰 문제는 빈 라덴이 안전 확보에 전전긍긍하는 동안 자르카위의 집단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영향력을 확대했느냐는 점이다. 미·영 관리들은 지난해 가을 영국과 보스니아에서 시작된(그리고 토론토 세포의 분쇄로 절정에 이른) 일련의 검거 사태는 아직 남아 있는 빈 라덴의 중앙지휘체제보다 자르카위의 영향력과 더 관련 있는 듯하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일부 미국 관리는 전 세계에 방송되는 죽은 자르카위의 영상을 보면서 무슬림 청년들이 성전의 영광을 재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어쩌면 이제 자르카위주의라 이름 붙은 이념이 생명력을 얻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잡범 출신의 자르카위가 “사상의 세계에 진정한 유산을” 남겼는지 모른다고 미 해군 대학원의 존 아킬라는 말했다. “한 가지 사상은 이라크의 저항운동과 내전을 융합하는 일이었다. 또 다른 사상은 성전의 인터넷화 추진이었다.” 그래서 진짜 전선과 사이버 전선이 공존하는 이 전쟁은 계속된다. MARK HOSENBALL in Toronto, SARAH CHILDRESS and SALIH MEHDI in Baghdad, RON MOREAU and SAMI YOUSAFZAI in Kabul and EMILY VENCAT in London 최한림 parasol1@joongang.co.kr 알카에다의 변모하는 위협 아프가니스탄-태동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 숨은 오사마 빈 라덴은 이제 이 투쟁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역할을 대신 맡았으나 위험하기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창립자 사우디에서 건설업자의 상속자로 태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전운동에 매진했다. 1988년 소련군이 철수하자 알카에다를 조직했다. 92년 왕년의 동맹이었던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사상가 망명생활을 하던 이집트인 급진주의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98년 알카에다에 합류했다. 테러리스트 경험이 있는 그가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빈 라덴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면서 세계는 해로운 새 사상의 출현을 접하게 된다. 죽음의 자리 알카에다의 3인자 자리에 앉아 오래간 사람은 없었다. 과거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 중에는 체포된 9·11 테러 기획자 칼리드 샤이크 모하메드(오른쪽)가 있다. 요즘은 압둘 하디 알이라키가 유력한 후보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떠들지 않는다. 이라크-변질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라크 조직의 책임자가 되면서 알카에다는 전에 없이 잔혹해졌다. 자르카위는 성전이라는 미명 아래 이라크 전역에 증오심을 심고 사람을 학살하면서 빈 라덴의 권위를 훼손하기에 바빴다. 빈 라덴의 ‘왕자’ 알카에다 지도자가 결코 1순위로 원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자르카위는 잔인한 성격 덕분에 자연적으로 이라크에서 서구와의 전쟁을 주도할 인물로 떠올랐다. 경쟁자들 당장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르카위의 뒤를 이을 인물로는 2인자인 아부 압델-라흐만 알이라키, 저항 세력의 간판 격인 압둘라 라시드 알바그다디, 이집트 태생의 성전 전사 아부 아유브 알마스리(오른쪽)가 있다. 부하들 자르카위가 죽기 전에도 160명 이상의 간부급이 체포되거나 살해됐다는 보도가 있다. 상당수가 지난주 죽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투쟁을 계속한다. “지도자들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생명을 뜻한다”고 자르카위의 2인자는 경고했다. “우리의 끈기를 늘릴 뿐이다.” 지구촌으로 번지는 테러 신세대 성전 운동가들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테러 세포를 자가 증식한다. 자급자족하는 이 테러 세포들은 알카에다의 사상만 본받을 뿐이다. 마드리드 2004년 3월 11일 러시아워의 통근열차에서 배낭폭탄이 터져 191명이 숨졌다. 스페인 당국은 2년간의 조사 끝에 이 테러가 알카에다를 흉내냈지만 직접적 연관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런던 지난해 7월 7일 네 명의 자폭범이 지하철과 버스 승객 56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공식 보고서는 범인들이 알카에다와 관련된 증거가 분명치 않으며, 인터넷 정보를 보고 싸구려 화공품을 이용해 폭탄을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토론토 캐나다 의회를 기습해 총리를 참수한다는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는 국내 테러 음모 혐의와 관련, 성인 10여 명과 청소년 5명이 체포돼 기소를 기다린다. 변호인단 가운데 한 사람은 근거 없는 혐의라고 주장했다.

2006.06.2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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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으로 돌아온 빈 라덴, 그 속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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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dator and Prey 위협적인 동시에 낭랑한 귀에 익은 그 목소리가 돌아왔다. 일부 미국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그의 사망 가능성을 거론한 지도 1년이 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느닷없이 나타나 합리적인 말투로 죽음의 위협을 포장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지대 어느 곳으로 추정되는 오지에 숨은 이 9·11 사태 지휘자의 말투는 추종자들보다 적들을 상대하는 듯했다. 테이프는 몇 주 전 녹음돼 평소대로 알자지라 방송국에 몰래 전달됐다. 색다른 내용도 담겨 있었으니 다름 아닌 평화 제스처. 미국의 전쟁 염증(특히 이라크)을 냉소적으로 이용하려는 듯 이 테러 지도자는 미국 국민의 전쟁 지지율이 떨어졌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강조했다. “양측이 안전과 안정을 누릴 수 있도록” 미국 국민에게 “공평한 조건으로 장기적 휴전”을 체결하자고 최초로 제의했다. 과거에 “먼 곳의 적”을 궤멸시키겠다는 다짐으로 명성을 구축했던 빈 라덴이 이제는 간극 좁히기에 나선 듯했다. 미국은 그저 아랍 땅에서 물러나기만 하면 된다. 테이프가 공개되자 그 진의를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적들의 참회를 믿지 않는 편인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은 메시지가 “술수”라고 비난했다. 부시 정부의 다른 관리들은 빈 라덴 본인의 나약함이나 어쩌면 전쟁 염증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이 테이프는 CIA와 국방부가 파키스탄의 소수민족 거주지에 미사일 공격을 강화한 시점에서 나왔다. 많은 전문가는 빈 라덴과 그의 오른팔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그곳에 숨었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만 해도 CIA의 유도를 받은 무인정찰기 프레데터가 알자와히리를 죽일 목적으로 다마돌라 마을의 여러 민가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현재까지 18명이 숨졌는데 알자와히리는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 미국 관리들은 사망자 중에 알카에다의 일부 고위 요원들이 있다고 여전히 자신한다. 파키스탄 당국은 이번 미사일 공격으로 알카에다 요원 네댓 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이슬라마바드의 한 고위관리는 익명을 전제로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했다. “현재 신원확인 중이다.” 이번 공격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사람들 중에는 폭발물과 독극물 전문가인 이집트인 미드하트 무르시 알사이드 우마르가 있다. 2000년 미함 콜호의 선원 17명을 죽인 자살폭탄 테러범들을 훈련시킨 장본인이라고 한다. 아부 카바브라는 별명도 있다. “만일 그가 죽었다면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는 큰 타격”이라고 알카에다와 관련있는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자 샤리프 모하메드는 말했다. “그는 알카에다 서구 조직의 책임자였다.”(세균전과 화학전을 연구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아부 오바이다 알미스리다. 아프가니스탄 동부 쿠나르 지방의 알카에다 책임자인데 미군과 아프간군은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미국의 대테러 담당자들은 숨진 테러리스트들의 신원을 끝내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간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프레데터 공격으로 몇몇 아녀자가 죽었다. 소수민족 거주지에서는 주로 ‘무테히다 마즐리스 아말’로 알려진 파키스탄 이슬람 동맹이 이끄는 시위가 일어났다. 급진세력은 이번 사태를 이용해 미국과 가까운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의 지지세력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무샤라프는 확실히 미묘한 상황에 처했다. 주말에 그곳을 방문한 윌리엄 번스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미국은 파키스탄 국경선 안에서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밀 차원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현직 대테러 담당 관리들에 따르면 프레데터에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라는 명령은 백악관에서 CIA로 전달됐다. 정찰 담당자들이 공격 시 민간인이 희생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면 발사 전 상급자와 협의하게 돼 있다. 이름 공개를 꺼린 한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다마돌라의 경우에는 CIA 관계자들이 직접 공격을 결정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포함해 행정부 고위직들에게 사전 통보했으며,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공격을 취소시킬 시간은 충분했다. 윤리적 문제와 홍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빈 라덴과 알자와히리 수색작전에 관여한 미 관리들은 프레데터 공격은 대가보다 이점이 훨씬 크다고 확신했다. 두 전직 관리의 말에 따르면 그 지역에는 미사일을 장착한 프레데터기 몇 개 편대가 주둔 중이다. 그중 일부는 레이저로 유도하는 중력탄을 장착했다. 정보에 정통한 한 파키스탄 관리는 이번 프레데터 공격은 2005년 5월 이래 파키스탄 국경 내에서 벌어진 네 번째 공격이라고 말했다(종전의 보도보다 두 건이 많다). 미군과 CIA는 1월 초부터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첫 모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만m 상공에서 160㎞ 이상의 거리를 감시하며 저공 비행하는 프레데터기에 정밀폭격을 지시할 수 있다. 알자와히리가 숨었다고 알려진 소수민족 거주지는 중앙통제에 거세게 항의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인도 식민시대의 영국군과 이웃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던 소련군은 익히 그 맛을 봤다. 그러나 이 과거의 열강들은 하늘에서 땅을 샅샅이 훑으며 리모컨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기술 같은 것이 없었다. 민가 세 채를 파괴하고 몇몇 가족을 몰살한 다마돌라 공격의 큰 의미는 주민들이 생활규범을 재고할 필요가 생겼다는 점이다. 동족이나 손님을 무조건 환대하는 파슈툰왈리 규범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대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미국 관리들은 말했다.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다. 테러리스트들을 보호하면 가족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국방부의 한 고위관리는 말하면서 기밀이라는 이유로 이번 공격에 대한 정보 제공을 거절했다. 알자와히리의 부인은 그 지역 출신인 “모만드” 파슈툰으로 알려졌지만(알자와히리는 그 덕을 많이 보았다), CIA는 최근 파키스탄 정보기관의 도움 덕분에 그 지역에서 밀탐꾼들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일부 미국 관리들에 따르면 파키스탄 정보기관은 대규모 “연락” 팀의 입국을 허용하고 상당 수준의 기술지원을 수락했다). CIA의 전 파키스탄 지부장 프랭크 앤더슨은 알카에다 1급 용의자들의 머리에 수백만 달러가 걸린 상황에서는 파슈툰왈리도 별 수 없다고 말했다. “의리를 중시하는 고결한 촌사람이란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짓궂게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내부 갈등을 심하게 겪어온 미국 관리들도 이제는 마침내 전열을 정비해 테러와의 세계 전쟁을 수행하게 됐다고 자신감을 표명했다. 1년 전만 해도 언론에서는 국방부와 CIA의 권력 투쟁을 운운했지만 이제 두 기관은 현장에서 손을 잘 맞춘다고 미국의 대테러 당국자들은 말했다. CIA는 미군이 활동을 벌일 수 없는 파키스탄에서 사실상 주도권을 쥐었다(CIA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비밀활동을 수행 중이기에 “오리발”을 내밀 가능성이 있다). 글로벌호크와 프레데터 시스템은 워낙 정교해 고선명 사진이 위성을 통해 CIA 본부(버지니아주 랭리) 6층에 있는 “글로벌대응센터”라는 대형 지휘실로 생중계된다. 그곳에서 담당자들이 대형 화면으로 위성사진을 실시간으로 보는 동안 헤드폰을 낀 다른 관리들은 현장 요원들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한편 국경선 너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 특수작전팀들이 밤낮으로 활약하며 파키스탄에서 넘어오는 탈레반 반군들과 싸운다. “규모는 작아도 제법 치열한 전쟁”이라고 미군의 한 소식통은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빈 라덴이 평화를 호소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일부 미국 관리들은 말했다. 다른 테러 분석가들은 빈 라덴의 경쟁자이자 때로는 협력자이기도 한 이라크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잔인한 전술로 많은 무슬림의 인심을 잃은 시점에서, 빈 라덴의 연설 요지는 “내가 여전히 1인자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빈 라덴은 평화협상가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추종자들의 눈에 합리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비치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난주 시점에서 빈 라덴의 최대 과제는 미국인들이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4년이나 겪었으며 이제는 관심의 초점이 이라크로 이동한 미국인들 눈에 빈 라덴의 최근 메시지는 위협도 위협이지만 허세로 보였다(국토안보부 공무원들은 협박의 수준에 변화가 없다고 맥없이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전에는 코란을 인용하던 이 테러 지도자가 이번에는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학대사건을 다룬 미국의 보도를 언급하고, 심지어 미국의 좌파 작가 윌리엄 블럼의 말을 인용했다. 미국 대통령이 테러리스트들을 떨어내 버리려면 “미국이 세계 각국에 개입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빈 라덴의 언급 덕분에 제국주의를 맹비난한 블럼의 역작 ‘불량국가’(Rogue Nation)는 아마존에서 20만 개 이상의 계단을 뛰어 17위로 올라섰다(“오프라가 됐건 오사마가 됐건 ‘오’로만 시작하면 된다”고 블럼은 뉴스위크에 농담했다). 알자지라 방송의 워싱턴 앵커맨 하페즈 알미라지는 블럼과 이스라엘 작가 나탄 샤란스키에게 자기 쇼에 함께 출연해 “부시와 빈 라덴이 총애하는 두 작가를 한자리에 모실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어떤 점에서는 빈 라덴이 순박하게도 조지 부시의 손에서 놀아나는 듯하다. 이라크 조기 철수론자들의 입을 막는 데는 9·11 사태 총지휘자의 지원보다 강력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비용이 2조 달러를 상회할 수 있다는 새로운 분석이 나오고, 미국 경제가 기록적인 예산적자의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미국 국민은 끝없는 전쟁을 떠올리며 공감할지 모른다. “국력과 현대식 무기에 현혹되지 말라”고 빈 라덴은 말했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비를 겁내지 않는 법이다.” 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빈 라덴은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상대로 이긴 전쟁을 들먹이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들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결과 이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들도 거기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교훈을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With JOHN BARRY in Washington and ZAHID HUSSAIN in Islamabad 최한림 parasol1@joongang.co.kr

2006.02.0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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