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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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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나눔으로 ‘진짜 부’ 일군 장석보 집안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⑩]

전문가 칼럼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전라북도 김제군(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 위치한 ‘금구신명학교(金溝新明學校)’가 폐교당했다. 반일(反日)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학교를 설립한 장태수(張泰秀, 1841~1910)는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24일간의 단식 끝에 눈을 감는다. 그는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불충을 범한 것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었는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이 같은 죄를 지었으니 진즉에 죽었어야 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문의 큰 어른이자 종증조부 장태수의 순절을 본 장현식(張鉉軾, 1896~1950)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는 조선민족대동단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였고,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재정 50%를 책임졌다. 1000석 규모의 농장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각종 교육 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하였으며, 조선어학회의 편찬사업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 장석보 네 아들의 재산 증식 비결…‘선택과 집중’, ‘신뢰’ 장태수와 장현식, 김제의 부자 장석보(張石輔, 1783~1844)의 자손이다. 장태수는 장석보의 손자이고, 종손인 장현식은 5대손이다. 각각 순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경주 최 부잣집처럼 튼튼한 재정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장태수와 장현식이 교육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엔 장석보와 네 아들이 쌓은 부가 토대가 됐다. 인동 장씨 금구파인 장석보 일가는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낀 장기건이 김제 금구면에 낙향하면서 대대로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그러다 장석보 대에 이르러 번성하게 된다. 그는 넉넉한 인품과 부지런함으로 재산을 일궜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했다. 양반이건 봇짐장수건 차별하지 않아서 ‘노잣돈이 떨어지면 장씨 집에 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석보의 네 아들 장한방, 장한진, 장한규, 장한두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받았고 덕분에 장석보 가문은 두터운 인망을 쌓을 수 있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양반이자 큰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으로부터, 6·25한국전쟁 때 공산군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장석보 이래 축적해 온 신뢰 자본 덕분이었다. 그런데 장석보가 재산을 모으긴 했지만, 그가 죽고 아들 사형제가 상속받았을 때만 해도 큰 부자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토지가 많았다지만 네 명이 나눠 가지면서 개별로 본다면 중농(中農) 수준에 불과했다. 자, 그렇다면 이들 사형제는 어떻게 재산을 불린 것일까? 사형제는 매년 돌아가며 한 사람의 논밭을 경작하는 데 힘을 모았다. 올해 맏이네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면 내년은 둘째, 그다음은 셋째, 또 그다음은 넷째가 하는 식이다. 4년마다 로테이션을 돈 것이다. 무릇 한 사람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정이 있다. 한데 농사를 지으려면 자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어차피 품삯을 주고 노동력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대신 가족 구성원들의 힘을 모아 ‘선택과 집중’에 나선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인적·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여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해도, 나 혼자 내 논밭을 경작하는 것에 비해 수입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4에서 4를 생산하다가, 1에서 4를 생산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외부인에게 인건비를 지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부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혼자 농사를 지을 때보다 여력이 있으므로 품질 향상에도 신경 쓸 수 있다. 삶에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3년간 쉬는 휴경지는 풋거름 작물을 심는 등 지력을 보존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관리하기 쉬운 작물을 심어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다. 로테이션을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사형제의 재산은 점점 불어났다. 물론 이 같은 방식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형제의 농사에 최선을 다한 만큼, 다른 형제들도 내 농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누가 혼자서 욕심을 부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거라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하는 논밭에는 대충 임하면서 자기 논밭만 신경 쓰고, 따로 돈 벌 궁리만 한다면 이들 형제의 ‘선택과 집중’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을 고용했을 때보다도 훨씬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만다. 따라서 장석보의 아내이자 사형제의 어머니 홍씨 부인은 형제간의 이견을 조율해주며 서로 믿고 의지하도록 엄히 가르쳤고, 이후에도 그 역할을 종부들이 맡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 초과 이익은 어려운 집에…시대 앞선 ‘부의 재분배’ 그러나 이 같은 조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의 숫자가 적고 형제의 형편이 비슷할 때는 괜찮다. 손자 세대, 증손자 세대로 내려가면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가구 수도 많아진다. 살림살이도 집집이 차이가 벌어진다. 자연스레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서로를 무조건 믿는다는 것도 어려워진다. 이에 장석보 가문은 ‘의장(義庄)’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의장이란 문중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전답이다. 주로 문중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쌀 40석에서 시작한 의장이 점점 불어나 200석이 되고 급기야 1000석 규모에 도달하자, 장씨 가문은 이를 ‘부의 재분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매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문중 제사를 주관하는 유사(有司)로 선발하고, 의장에서 발생하는 초과 이익을 갖도록 한 것이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면 재단의 자산은 일정액으로 고정해두고, 자산을 통해 얻은 사업 소득 및 이자를 유사에게 몰아준 셈이다. 덕분에 장석보의 후손 30여 가구는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고 문중의 단합 또한 유지될 수 있었다. 요컨대 장석보 가문은 구성원의 힘을 결집함으로써 부를 일궜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로테이션을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쳤고, ‘의장’을 통해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일가를 화합했다. 장태수와 장현식의 교육 사업에 문중이 합심해 자금을 각출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결과이다. 한 대만 내려가도 기업이 찢어지고, 서로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가 오히려 재산이 줄어드는 오늘날의 부자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2021.11.20 18:00

5분 소요
[일국양제 홍콩의 불안한 미래] 중국의 사회 통제로 경제 활력 떨어지나

국제 이슈

‘도망자 조례’ 둘러싸고 홍콩 주민 반발 격화… 민주파 총력전에 중국 대응 주목 홍콩에서 6월 9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겉으로는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대한 홍콩 입법회(의회)의 12일 심의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이 1997년 중국에 회귀할 당시 중국이 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 약속을 지키지 않고 홍콩을 중국화한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우선 문제의 법안부터 따져보자. 이 법안은 홍콩이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경우에 따라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과 대만·마카오가 포함됐다. 홍콩에 거주하는 민주인사들이 중국의 요구에 따라 송환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홍콩인들이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6월 9일의 이 송환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홍콩에서 벌어져 주최 측 추산 103만명, 경찰 추산 24만 명이 참가해 온 거리를 가득 채우며 시위를 벌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돌아간 후 벌어진 시위로는 최대 규모다. 홍콩의 역대 시위 중에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150만 명이 몰려 벌였던 동조 시위 이후 가장 크다. ━ 2014년 민주화 요구한 50만 시위 이후 최대 규모 지난 6월 4일 홍콩에서 벌어졌던 6·4 천안문 민주항쟁 30주년 추모 촛불집회에 천안문 관련 집회 사상 최대 규모인 18만 명이 몰렸던 것과 비교하면 홍콩인의 이 법안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30년 전 중국 본토인 베이징에서 벌였던 천안문 사건에 대한 추모 열기보다 당장 중국이 홍콩 당국에 가하고 있는 정치적 압력, 중국에 송환될 수도 있다는 공포, 홍콩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침해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홍콩인을 더욱 자극한 셈이다.더욱 큰 문제는 홍콩인들이 중국의 일국양제 약속을 근본적으로 불신한다는 점이다. 일국양제는 중국이 사회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홍콩과 마카오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포르투갈과 영국으로부터 마카오와 홍콩을 돌려받을 때 중국이 현지 주민과 서방권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놓은 논리다.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개념이다. 중국은 대만에 대해서도 일국양제로 통일하자고 요구해왔다. 일국양제는 중국의 공식 통일방안인 셈이다.그런데 그런 일국양제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만이 이번 시위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홍콩인들은 시위에서 일국양제와 함께 ‘홍콩인은 홍콩인이 통치한다(香人治香)’ ‘고도자치(高度自治)’의 3대 원칙을 요구했다. 중국이 홍콩 회귀 당시 약속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단순한 법안 하나만 손본다고 홍콩 주민들이 누그러질 태세가 아닌 셈이다.홍콩에서 일국양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항의 시위와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4년 7월 행정장관 선거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주최 측은 51만 명, 경찰은 9만8600명이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홍콩 기본법에 따르면 정부수반인 행정장관은 선거위원회가 간접제한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중국 국무원 총리가 임명한다. 국민이 직접 뽑는 지도자가 아닌 것이다. 홍콩 주민은 주민 직접선거를 통한 선출을 요구하지만 중국 당국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럴 경우 홍콩이 준독립국이 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정식 명칭이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인 행정장관은 홍콩의 정부수반이다. 그렇게 높은 자리임에도 현재 주민의 직접 선거가 아닌 간접선거를 통해 뽑는다. 입법회 의원, 구의회 의원, 홍콩에서 선출해 베이징에 보낸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 대표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대표, 38개 직능별 선거위원회에서 선출한 사람 등 1200명으로 이뤄진 선거인단에서 선출한다.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차지하는 직능대표는 친중국계가 대부분이어서 대표 선거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선거인단은 처음 400명으로 시작해 1998년부터 800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2007년 중국 전인대는 2012년 행정장관 선거부터 간접선거 선거인단을 1200명으로 늘리고, 2017년부터는 직선제를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그런데 2014년 8월 31일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 직선제 전환과 관련해 1200명 안팎으로 이뤄진 ‘행정장관 후보 추천위원회’에서 50% 이상이 지지한 사람만 행정장관으로 입후보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추천위라는 장치를 통해 사실상 친중파 인사 2~3명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앞서 전인대는 “홍콩 행정장관은 반드시 애국 인사가 맡아야 한다”며 친중인사만 행정장관이 되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시민들은 반발했다. 간선제 시절에도 선거위원 8분의 1 이상의 추천을 받으면 후보로 등록할 수 있었는데 말만 직선제이지 후보 등록부터 제한해 주민의 의사가 더욱 반영되기 힘들게 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그해 9~12월 청년들을 중심으로 행정장관 선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와 도로를 점거하는 연좌 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시민 불복종운동과 수업거부운동으로 번졌다. 비오는 중에도 우산을 받쳐 들고 시위를 벌였다고 해서 ‘2014년 우산혁명’으로 부른다. 그 결과 홍콩 입법회는 2015년 6월 15일 선거제도 개편안을 8대 28로 거부해 선거제는 간선제로 남게 됐다. 중국은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인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후보 추천’이라는 지뢰를 숨긴 제도를 제안하면서 생색만 낸 셈이다. ━ 일국양제는 중국의 홍콩·대만 통인 방안 2017년 7월에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홍콩을 방문해 일국양제에서 ‘일국’을 강조해 일국양제에 대한 홍콩인의 회의를 더했다. 홍콩 입법기관인 입법회 선출 방식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지역구 35석, 직능대표 35석으로 모두 70석으로 구성된다. 지역구 의원은 홍콩 유권자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하지만 직능대표 30석은 기업을 비롯한 각종 직능단체 회원들이, 나머지 5석은 구의회에서 선출한다. 직능대표는 친중파가 장악하고 있으며 지역구도 현재 친중파 18석, 민주파 16석, 공석 1석의 분포다. 중국이 형식적으로 불가능한 홍콩 내정에 대한 간섭을 실질적으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사실 이 엄청난 정치 사태의 발단은 치정 살인 사건이다. 지난해 2월 17일 대만에서 홍콩인 학생 찬퉁카이(陳同佳·20)가 임신한 여자친구 판샤오잉(潘曉穎·사망 당시 20세)을 치정 문제로 살해하고 암매장한 후 홍콩으로 도주한 사건이다. 판샤오잉의 부친이 딸이 귀가하지 않는다고 신고하자 수사에 들어간 대만 경찰은 CCTV를 통해 찬퉁카이의 범행을 확인했다. 이에 대만 사법당국은 찬퉁카이를 인도 받아 살인죄로 처벌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홍콩은 대만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아 그를 보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 형법은 ‘장소적 적용범위’ 조항에서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홍콩 영역 안에서 죄를 범한 내국인과 외국인에게만 법을 적용한다는 이야기다. 실행이나 결과 중 어느 하나라도 영역 안에서 발생하면 형법을 적용하지만 판샤오잉 피살 사건은 여기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홍콩 당국이 그를 살인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대만 사법당국의 연락을 받은 홍콩 당국은 3월 13일 찬퉁카이를 체포해 살인과 암매장 장소를 자백 받았다. 그럼에도 홍콩 당국이 그에게 적용할 수 있었던 혐의는 고작 여자친구의 돈을 훔친 절도와 장물처리 혐의뿐이었다. 홍콩 당국이 수사 과정에서 찬퉁카이가 홍콩으로 도주한 후 판샤오잉의 현금카드로 돈을 인출해 사용한 것을 발견해 이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었다. 재판 막바지에 그에게 중범죄에 해당하는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판 결과 그에게는 29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을 뿐이다. 그러자 홍콩과 대만 모두에서 ‘살인 자백하고도 무죄인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대만 검찰은 찬퉁카이를 살인죄로 기소했으며 지난헤 12월 3일에는 그를 대상으로 최장 시효 37년6개월짜리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끝까지 기다려 그가 송환되면 대만에서 재판을 하고 단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이에 따라 홍콩 당국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올해 3월 2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마련하고 4월 3일 입법회 본회의에서 1차 심의를 했다. 공식명칭이 ‘2019년 도주범과 형사사무 상호법률협조(수정) 조례초안인이 법안은 줄여서 도법조례 수정초안으로 불리지만 미디어와 일반인들은 보는 시각에 따라 도주범조례·인도조례·중국송환조례 등으로 각각 부른다.‘중국송환조례’라는 축약어는 홍콩인들이 이 법안으로 인한 민주인사들의 중국 송환과 처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홍콩의 민주파와 시민들은 이 법안에 필사적으로 반대해왔다. 중국 정부가 이 법을 악용해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은 물론 홍콩의 반중국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잡아가면서 홍콩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것으로 우려한다. 사형제도가 유지되고, 영장이나 법원 판결 없이도 사람을 잡아가서 가두거나 가택연금을 하는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 홍콩인 학생 찬퉁카이 치정 살인 사건이 발단 더구나 이번 송환법안이 통과될 경우 홍콩의 민주화 지수도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국제 NGO 등의 조사를 바탕으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법의 지배’ 항목에서 중국은 126개 국가·지역 중 82위, 홍콩은 16위를 차지하고, ‘부패대책’ 부문에선 중국이 180개 국가·지역 중 87위, 홍콩이 14위다. ‘보도 자유 보장’ 분야에선 중국이 180개 국가·지역에서 177위, 홍콩이 73위, ‘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는가’ 항목에선 중국이 167개 국가·지역에서 130위, 홍콩이 73위다. 중국의 낮은 순위, 중국과 홍콩의 격차도 문제지만, 홍콩이 언론과 민주주의 부문에서 상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난 것도 문제다. 홍콩인들이 일국양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중국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유방임형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룬 홍콩이 정치적·사회적 비민주화와 불안정, 그리고 중국의 간섭으로 성장동력을 잃는 일이다. 사실 홍콩은 오랫동안 중화권의 경제수도이자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센터 역할을 맡아왔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홍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기준(PPP)으로 6만4216달러에 이른다. 부자 나라의 대명사인 미국(6만2606달러)이나 스위스(6만4216달러)와 비슷하다. 카타르(13만475달러), 마카오(11만6808달러), 룩셈부르크(10만6705달러), 싱가포르(10만345달러), 브루나이(7만9530달러), 아일랜드(7만8795달러), 노르웨이(7만3456달러), 아랍에미리트(6만9383달러), 쿠웨이트(6만7000달러) 다음이다. 홍콩은 마카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특별자치구로 주권국가가 아니라 공식순위에선 빠지지만, 비공식으로 따지면 세계 11위의 부자에 해당한다. 명목 금액으로 따져도 4만8517달러로 독일(4만8256달러), 프랑스(4만2878달러), 영국(4만2558달러), 일본(3만9306달러)보다 많다. 경쟁 대상인 싱가포르에 많이 추월당하고 일부 항목에선 밀렸어도 여전히 중국과 아시아의 경제 엔진이다.홍콩이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업하기 좋은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거의 없다. 홍콩 당국은 경제 문제에선 수동적이다. 일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민간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유방임형 경제체제는 홍콩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1912~2006)은 홍콩을 ‘자유방임형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실험장’이라고 칭찬했다. 자유주의적 사상을 전파하는 미국의 카토 연구소도 홍콩을 자유방임형 경제정책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는 자유방임형 경제체제는 낮은 세금 및 자유무역과 함께 홍콩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기본 요소다. 홍콩이 세계적인 국제금융센터로 성장한 원동력이기도 하다.자유방임형 경제정책은 정부가 규제, 과세, 기부금 등 민간 영역에 대한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재산권 보호에만 주력하는 경제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민간의 창의성과 활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는 의도다. 정부가 무책임하게 방임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유주의적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인 불개입주의라고도 한다. 물론 주식시장 같은 경제조직을 만들고 관리하는 정도는 개입한다. ━ 홍콩은 ‘자유방임형 자본주의 실험장’ 홍콩은 이런 정책을 바탕으로 경제자유도 지수에서 1995년부터 2018년까지 25년간 세계 1위 자리를 줄곧 유지해왔다. 미국 해리티지 재단과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발표하는 경제자유도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는 영업, 교역, 투자, 금융, 재산권, 노동, 부패영향, 정부 규모와 통화 관리 등 183개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 정한다. 특히 2018년 지수에서 홍콩은 100점 만점에 90.2점을 기록해 90점 이상을 기록한 전 세계 유일한 나라다. 싱가포르(88.8), 뉴질랜드(84.2), 스위스(81.7), 호주(80.9)가 뒤를 잇고 있다. 한국은 73.8로 29위, 일본은 72.3으로 30위를 각각 차지했다. 국제금융센터는 물론 세계적인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가 상당수 홍콩에 위치한 것도 이런 경제 자유의 힘일 것이다. 이는 홍콩이 기업하기 좋은 기회의 땅으로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다.홍콩으로선 경제에 타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시위 사태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할 것이다. 이에 따라 홍콩 정부는 인도 대상이 살인·밀수·탈세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국한될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선 사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홍콩인의 거부감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그럼에도 홍콩 정부 수반인 캐리람(林鄭月娥) 행정장관과 정부, 그리고 친중파 의원들은 홍콩 사법체계의 허점을 방치해선 안된다는 명분으로 이 법안을 계속 밀어붙여왔다. 시민들의 거센 항의 앞에 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더구나 중국은 미국과 나라의 명운을 걸고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민주주의와 인권과 관련한 가치관에 관한 문제제기를 계속 해온 대표적인 나라다. 홍콩 사태가 미중 대결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06.1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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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당선의 국제정치학적 의미는] 서방 진영 균열의 리트머스 시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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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냉전시대 서방 동맹체제의 중추…에르도안 장기 집권에 유럽 국가들은 우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4) 터키 대통령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이어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독재자로 자리를 잡았다. 에르도안은 6월 24일 치러진 터키 대통령 선거에서 53%를 득표해 또 다시 당선했다. 에르도안의 대항마로 꼽혔던 공화인민당(CHP)의 무하렘 인제 후보가 얻은 31%보다 20%포인트 이상 높은 득표율이다. 투표율이 87%로 역대 어느 선거에서보다도 높다.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한다.에르도안은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승리해 더욱 탄탄한 권력 기반을 굳혔다. 에르도안이 창당하고 속한 정의개발당(AKP)이 42%를 득표해 제 1당의 자리를 계속 지켰다. 거기에 정의개발당과 연대한 우파 민족주의행동당(MHP)도 11%를 얻었다. 보수 여권 측 전체 득표율이 53%를 넘어 과반수를 차지했다. 에르도안에 대항해온 야당 CHP는 23% 득표에 머물렀다. ━ 에르도안,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 지난해 확정된 터키 신헌법에 따르면 새롭게 선출되는 대통령은 임기 5년에 1회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다. 에르도안은 2028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다. 현재 수많은 지지파를 거느린 에르도안이 안정적으로 대통령 자리를 10년 간 유지하면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국의 BBC방송, 일간지 가디언 등과 미국의 CNN,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이번 선거를 계기로 에르도안이 ‘술탄’에 버금가는 정치적 독재 권력을 차지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술탄은 이슬람 세계에서 제정일치의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다. 견제세력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상징한다. 터키가 공화국이 되기 전에 존재했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군주가 술탄의 지위를 누렸다. 권력이 집중된 술탄제 아래에서 오스만 제국은 무능하든지, 성격이 좋지 않은 군주를 만나면 흔들렸다. 엄청난 세금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전쟁에서 줄줄이 패배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해체된 오스만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비록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이런 호칭이 등장했다는 것은 터키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르도안은 끈질긴 권력욕과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말과 행동으로 ‘술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왔다. 이제 에르도안은 앞으로 10년 간 이런 권한을 실제로 갖게 됐다.터키의 이번 선거는 터키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4월 16일 국민투표에서 통과된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 이후 처음 치러진 대선이자 총선이기 때문이다. 개헌 국민투표 이전부터 터키는 분열됐으며 뜨거운 정치적 격돌이 계속돼왔다. 개헌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부정선거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2017년 개헌은 터키가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위주의 체제로 향하는 본격적인 변곡점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전 헌법과 이번 헌법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1982년 국민투표로 개정됐던 이전 터키 헌법은 의원내각제가 근간이었다. 총선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정당에서 나온 총리가 내각의 수장이자 정부 수반을 맡았다. 간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주로 의전적인 역할만 했다.하지만 과거 11년 간 총리에 재임하며 터키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에르도안은 지난 2010년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고 2014년 대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심판이 선수로 나온 셈이다. 문제는 권력욕이 강한 에르도안이 이 정도 권력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밀어붙였지만 야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2016년 7월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직후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쿠데타 이후 자신에게 반대했던 군인·정치인·공직자·법조인·교육자·언론인 등을 대대적으로 박해하고 숙청했으며 수많은 사람을 투옥했다. 반대 미디어를 없애는 등 언론에 재갈까지 물렸다. 그러면서 개헌을 강력하게 밀어 붙였다. 지난해 4월 16일 개헌안의 국민투표 통과는 에르도안의 권력을 강화시키면서 동시에 터키 민주주의를 약화시켰다는 평가다.2017년 터키 신개헌의 골자는 정치 체제가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뀐 것이다. 문제는 신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권한이 통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보유하는 수준을 훨씬 넘는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 우선 대통령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국가비상사태 선포권을 폭넓게 보유하게 됐다. 이는 대통령을 헌법 위에 올린 것이나 다름없다. 터키판 ‘긴급조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터키가 ‘국민의 나라’에서 유일 권력자인 ‘대통령의 나라’가 됐다는 지적이 뒤따르는 이유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터키 민주주의를 질식 상태로 만들 수도 있다. ━ 대통령이 행정부·사법부·입법부 좌지우지 새 헌법은 기존 총리직은 폐지했으며 총리가 지명하던 장관을 모두 대통령이 임명한다. 부통령도 대통령이 지명한다. 내각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대통령이 예산도 좌우한다. 기존의 의회가 누리던 행정부 운영 권력이 대통령 소관으로 옮아갔다. 유럽 등에서 문제로 지적하는 것이 판사에 대한 임명권도 대통령이 갖는다는 점이다. 행정부는 물론 사법부까지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견제해야 할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까지 보유한다. 대통령이 행정부·사법부·입법부를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3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의원내각제이던 터키의 권력 구조가 대통령제로 바뀐 게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제’ 또는 ‘술탄제’로 바뀌었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터키의 권력이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간 게 아니라 ‘대통령의 이름을 가진 술탄’에게 갔다는 평가가 나온다.교묘한 것은 대선과 총선을 같은 날에 열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총선에서 대통령을 견제하는 세력이 원내 1당을 차지할 길은 더욱 멀어진다. 서로 견제하라고 대통령과 의원을 각기 다른 정당을 찍는 전략적인 투표를 터키 국민이 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터키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기로에서 에르도안을 선택한 셈이다. 에르도안이 ‘술탄’과 맞먹는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첫걸음이다.이번 에르도안의 당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만든 이른바 ‘서방 진영’이란 개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다. 서방 진영이란 개념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동맹국 세계를 구성하는 근간이었다. 서방 진영은 1989년 이후 한때 세계를 지배했다. 1989년 11월 9일은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만 무너진 날이 아니었다. 장벽의 동쪽에 있던 소련과 동유럽의 권위주의 체제도 함께 균열이 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는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옛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후 동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체제전환을 택했다. 민주화와 시장경제로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동서 양 진영으로 갈랐던 냉전 체제도 소멸됐다.서방의 승리였고 세계사적 전환이었다. 포장만 그럴싸했지 효율이 떨어지고 작동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념을 앞세우는 일은 웃음거리가 됐다. 여기에 더해 정치적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도 함께 붕괴됐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앞세우는 고전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한 특징이었던 일당독재, 장기집권, 개인숭배도 마찬가지로 종언을 고했다. 일부 예외적인 국가만 남았을 뿐이다.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전통적인 구호에서 볼 수 있듯 개인이 무시되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하는 권위주의 체제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그 대신 시장경제 체제와 함께 자유선거를 통해 내 손으로 정치 지도자들을 뽑는 민주주의, 집단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자유주의가 도도한 물결을 이뤘다.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가 만들어왔고, 냉전 당시 서구의 상징이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자유주의는 세계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아갔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시장경제로, 독재는 민주주의로, 권위주의는 자유주의로 각각 대체됐다. 유럽과 미국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동진을 계속해 과거 소련에서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인류가 발전시킨 최고의, 최후의 정치·경제·사회 발전 단계’ ‘이보다 더 완벽한 체제는 없다’며 칭송이 줄을 이었다. ━ 민주주의·자유주의의 위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이 서유럽을 ‘가치 동맹권’으로 묶어두기 위해 펼쳤던 ‘마샬 플랜’의 승리로도 받아들여졌다. 마샬 플랜은 종전 이후 계속 서유럽을 위협하며 연이어 세력권을 확장하던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조지 마샬은 서유럽이 스탈린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1948년 3월 132억 달러(현재 가치로 1350억 달러)에 해당하는 원조로 전후 재건과 경제적 부흥을 돕는 ‘마샬 플랜’을 가동했다. 이러한 경제적 지원을 받은 서구는 굶주림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성공적인 전후 복구로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위치를 회복했다. 분단된 채 미국과 서구의 체제에 편입됐던 서독은 이를 종잣돈 삼아 전후 복구는 물론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 세계적인 경제 모범국가가 됐다. 통일 독일이 유럽을 통합해 유럽연합(EU)을 결성하고 그 주도국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마샬 플랜에서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안보에서 서방 진영의 선택은 ‘집단 방어체제’였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를 창설했다. 나토 체제는 마샬 플랜과 함께 서방을 하나의 진영으로 묶어두는 핵심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안보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마샬 플랜과 나토로 상징되는 서방의 전략적 국제체제는 효력을 발휘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권은 경제적으로 밀렸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서방에 함부로 도전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통일 독일은 서독처럼 나토 회원국이 됐다. 그 후 1999년부터 과거 스탈린이 완충지대로 여겼던 중동 유럽은 물론 소련의 일부였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발트3국까지 나토 회원국이 됐다. 러시아는 한때 두툼했던 ‘중동유럽’이라는 입술을 잃고 찬바람에 이가 시린 처지가 됐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딱 적합한 상황이다.냉전 상황에서 소련과 국경을 맞댔던 터키는 서방 동맹체제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터키는 아직 EU 회원국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나토 회원국으로서 서방 연합군의 중추를 담당해 왔다. 1952년 앙숙인 이웃 그리스와 동시에 나토 회원국이 됐다. 1949년 북미의 미국과 캐나다, 유럽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포르투갈 등 12개국으로 창립한 나토가 그 후 가입국을 확대한 첫 대상이 터키였다.터키의 나토 가입은 1955년의 서독이나 1982년의 스페인보다 앞선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토 창설 논의에 참석할 수조차 없었다. 서방 점령지(서베를린 포함)는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들어서고 소련군 점령지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들어서면서 겨우 주권을 회복했다. ━ 터키, 서독·스페인보다 앞서 나토에 가입 하지만 서독 지역의 연합군 주둔은 1952년 체결된 본-파리 협정이 1955년 관계국 모두에서 비준되면서 비로소 끝났다. 비준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한 프랑스에서 이를 한 차례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봉합한 후에야 서독은 1952년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서독은 1990년 10월 동독과 통일을 이룬 뒤 동독지역까지 포함한 통일 독일로서 새롭게 나토 회원국이 됐다.터키는 유럽의 모든 나라보다 미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는 서방 동맹의 주축이었다. 에르도안의 당선은 이러한 터키에서 가치 균열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하나의 균열이 정체의 붕괴를 이끄는 일은 토목공학에선 흔한 일이다. 국제 관계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에르도안의 당선에 유럽 국가들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터키는 서방 진영이 균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인가.

2018.06.3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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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의 국제적 야망] 합법적 독재권 얻고 광폭 외교 횡보

산업 일반

4월 개헌 투표 승리 후 내부 장악하고 다각 외교 나서... 터키·에르도안의 국제적 위상 더욱 커질 듯 터키는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중동,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한다. 국토의 3%가 유럽의 발칸반도에, 97%가 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다. 터키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은 이런 성격을 잘 반영한다. 서쪽으로는 유럽 기독교권인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자리 잡고 있다. 터키가 2005년부터 가입 협상을 벌이고 있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다. 동북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카프카스 반도의 정교국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가 있다. 동쪽으로는 이슬람권 아제르바이잔의 영외 영토로 아르메니아에 둘러싸인 나히체반,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과 맞닿아 있다. 동남쪽으로는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싸우고 있는 이라크와 내전 중인 시리아와 맞닿아있다. 이라크는 이슬람 수니파가 주류이며 시리아는 인구 구성으로는 이슬람 시아파가 다수이지만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집권층은 시아파의 소수파인 알라위파다. ━ 에르도안 카리스마 강화 냉전 시기 터키는 서방세력의 최전선이었다. 미국은 터키를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끌어들이고 막대한 무기를 원조했다. 심지어 핵무기 폭격 훈련까지 함께했다. 터키는 소련 내부를 감청하는 정보기관의 최전방 기지이기도 했다. 국경을 맞댄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과거 소련의 공화국이었다가 독립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리아 내전은 물론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IS와 맞상대할 최전선 역할을 하는 나라가 터키다. 정보수집과 무기공급, 작전 등 모든 부분에서 미국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은 터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터키의 전략적 가치이자 국제정치적 위상이다.이런 터키의 스트롱맨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갈수록 카리스마를 강화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2003년 총리에 취임한 뒤 대통령으로 말을 갈아타면서 14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다. 그는 국내에선 지난해 7월 15일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마지막 대항 세력의 기세를 완전히 꺾었다. 그는 세속주의 국가인 터키에서 친이슬람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유언론을 억압하고 사법부, 교육계 등에서 반대파를 몰아내 왔다. 그러자 세속주의 세력의 마지막 보루인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에르도안에 밀린 것이다.터키공화국은 1923년 건국 이래 아타 튀르크(터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국부 케말 파샤가 제정한 헌법에 입각해 세속화, 서구화, 민주화를 추구해왔다. 건국 헌법은 세속주의를 국가의 근간으로 명시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정치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케말 파샤가 의도한 터키의 서구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케말 파샤는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뒤 문자를 아랍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바꾸었으며 군대, 정치, 행정, 교육 등 분야에서 서구화를 진행했다. 종교를 정치에서만 분리한 게 아니라 사회 분야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애썼다. 최근엔 오히려 그 반대로 흐르고 있긴 하지만 한때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고다니는 것조차 금지했을 정도다. 히잡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이슬람에 대한 사회의 복종을 의미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케말 파샤는 헌법에 ‘군은 헌법의 수호자’라는 구절도 넣었다. 터키의 정치에 종교가 개입하려고 하거나 개혁정신에서 벗어나 부패했다고 판단되면 군부가 자동으로 개입해 이를 저지하고 세속주의와 개혁주의 정치를 재건하도록 한 것이다.하지만 세속주의라는 대의명분은 정부를 종교에서 분리되도록 하긴 했지만 가난까지 구제하진 못했다. 정부가 해주지 못하는 따뜻한 복지와 배려를 받은 주민들은 에르도안의 친이슬람 정당인 정의개발당을 지지한다. 이슬람주의와 그 정신을 구현하는 이슬람정당은 에르도안의 정치적인 자산이다. 그는 국가구제당, 복지당, 미덕당 등 여러 이름으로 이슬람정당을 창당해 운영했는데 과거 군부 쿠데타 정권의 탄압이나 헌법재판소의 판결 등으로 줄줄이 해산됐다. 국가구제당은 이슬람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미이며, 복지당과 미덕당은 이슬람 정신으로 주민 복지를 구현하고 이슬람의 미덕을 장려하겠다는 뜻이다. 군부와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정신을 앞세워 정치활동을 벌이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와 세속주의 정치를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해 해산을 명령하거나 결정했다. 권력을 거머쥔 에르도안이 군부와 법조계의 숙청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다.에르도안은 군부 쿠데타를 막은 뒤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해 비상대권을 거머쥐고 전국에서 대숙청을 벌였다. 군인은 물론 법관, 공무원, 교사 등 6만 명을 현직에서 쫓아냈다. 일부는 사법처리 과정으로 넘겼다. 이런 정치적 숙청과 탄압은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법치,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을 내 걸고 있지만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이를 명백한 인권탄압의 비민주주의적인 조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 개헌으로 막강한 권한으로 장기집권 길 열어 그런 에르도안은 지난 4월16일 헌법을 고쳐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대통령 중심제를 구축했다. 이날 이뤄진 개헌 국민투표에서 에드도안의 개헌안은 2515만7025명이 지지해 51.41%의 찬성으로 통과됐지만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반대에 투표한 국민이 투표자의 48.59%인 2377만 7091표나 된다는 점도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나라를 딱 둘로 나눈 셈이다. 85.32%라는 높은 투표율은 국민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찬성파도 반대파도 격앙된 상태라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에르도안은 국부 케말 파샤가 만든 의원내각제를 허물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장기 통치가 가능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새롭게 확립했다. 독재권을 헌법으로 확보한 셈이다.에르도안이 이제 외교 활동을 강화하면서 해외에 카리스마를 과시하고 있다. 특히 에르도안이 지난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한 정상회담은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국무부는 개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에르도안 대통령이 4월 말 대규모 숙청 작업을 재개하자 비판 성명을 냈지만 트럼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앞서 에르도안이 자신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국민투표에서 승리하자 축하 메시지를 보내 유럽 등의 동맹국들로부터 맹 비판을 받았다.양국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에르도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트럼프는 “우리는 ISIS(IS의 다른 명칭), 쿠르드노동자당(PKK, 터키 내부 쿠르드족 무장단체) 같은 테러단체와의 싸움에서 터키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테러 세력에게 안전한 장소는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시리아 내전 개입과 관련한 터키의 지원에도 감사했다. 그는 ”시리아의 끔찍한 살육을 끝내기 위한 터키 지도부의 노력에 감사한다”며 “미국은 시리아 내부의 폭력사태 완화와 평화적 해법을 위한 여건 조성에 필요한 모든 노력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 아세안 가입 타진하며 영향력 확대 노려 이날 에르도안은 미국이 시리아의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반군의 무장을 지원하기로 한 결정에 반대한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미국은 이달 초 시리아의 IS 수도인 락까에서 IS와 대치 중인 쿠르드 민병대 인민수비대(YPG)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IS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에서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이들 쿠르드 반군 역시 PKK와 마찬가지로 테러단체라고 주장하며 “어떤 나라든 이들을 지원한다면 테러와 관련해 국제사회가 합의한 내용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트럼프 앞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 회원국인 터키는 미국과 동맹 관계다. 하지만 쿠르드족과 관련해서는 서로 양보를 하지 않고 있다. 터키의 에르도안 지지자는 투르크 민족주의자가 많아 쿠르드족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지원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 차례도 민족 국가를 만들지 못한 쿠르드족은 인구가 3300만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터키에 45%, 이란에 24%, 이라크에 18%, 6%는 시리아에 나뉘어져 살고 있다. 미국은 시리아 쿠르드족이 IS는 물론 아사드 정권과도 싸우고 있어 이들을 지원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시리아의 쿠르드족이 미국의 무기를 받으면 터키에도 위협이 되며 이들 무기가 자국 내 PKK에 공급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에르도안은 지난 14~15일 중국 베이징에서 130개국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일대일로(육상 및 해상 신실크로드) 국제 협력 정상포럼에도 28명의 정상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서 그를 만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에르도안이 아세안에 가입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의 순회의장국인 필리핀의 대통령에게 가입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뿐만 아니고 몽골도 가입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세안은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10개국이 가입하고 있는 지역국가 협의체다. 터키의 가입은 중국의 팽창에 불안해하는 동남아 국가들에 비빌 언덕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터키가 가입한다면 협의제의 성격 자체가 변할 수밖에 없다. 대폭 확대하기 전에는 이뤄지기가 쉬지 않다. 아세안은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 및 일본과는 별도로 협의와 정상회의를 하는 ‘아세안+1’ 회담을 정례적으로 열고 있다. 회원국이 돼 함께 하기에는 너무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에르도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에피소드다. ━ 인도엔 카슈미르 사태 중재 제안 에르도안은 지난 1일 인도를 방문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신흥국가의 두 정상 간 만남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다음날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슈미르 문제 해법으로 다자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이 문제를 터키가 나서서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카슈미르 문제는 힌두 국가 인도가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과 오랫동안 벌이고 있는 영유권 분쟁이다. 카슈미르는 이슬람교 주민이 과반수이지만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에서 분리 독립할 당시 힌두교 신자인 이 지역 군주의 의사에 따라 인도에 귀속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뒤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 지역 영유권을 놓고 두 차례 전쟁까지 벌이면서 앙숙이 됐다. 현재 사실상의 국경인 통제선(LoC)을 경계로 3분의 2는 인도가, 3분의 1은 파키스탄이 어정쩡하게 분리 점령하고 있다.카슈미르 문제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모디 총리의 정상회담에서도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다뤘지만 인도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는 카슈미르 문제는 인도가 파키스탄과 양자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며 터키가 중재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전했다. 게다가 카슈미르 전체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는 것이 인도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인도는 트럼프의 중재 제안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에르도안이 이를 제안한 것이다.에르도안의 이런 제안에 대해 일부 인도 언론은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을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최근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데스 키프로스 대통령이 키프로스의 분단 해결을 위해 인도가 도와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한 응분의 대응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터키 남쪽 동 지중해에 있는 섬나라 키프로스는 1974년 터키군의 침공으로 터키계 지역과 그리스계 지역으로 분단돼 있다. 결국 에르도안의 발언은 키프로스 문제를 건들이면 카슈미르 문제를 건드릴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경고로 보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슬람권에 대한 영향력 확대까지 노린 다목적 포석이라는 분석이다.터키 국내에서 정치적인 책략과 밀어붙이기로 권력을 정점에 오른 에르도안이 이젠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사실 터키는 이번 개헌으로 EU 가입이 더욱 어려워졌다. EU가 받아들이지 않는 사형제를 부활했기 때문이다. EU는 사형을 집행하면 가입 협상이 끝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반세기의 숙원인 EU 가입이 무산되면 에르도안은 국내 정치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의 활발한 해외 행보는 이런 반발을 사전에 잠재우기 위한 포석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경제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터키의 국제적 위상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에르도안의 위상도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다.

2017.05.2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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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고의 50대 부자 가문 리스트

산업 일반

포브스 아시아가 집계한 2016 ‘아시아 최고의 50대 부자 가문’에서 삼성가(家)가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자산 34조 4400억원). 범현대가는 12위, LG가는 30위, 효성가는 49위에 올랐다. 국가별로는 인도 출신 가문이 전체의 3분의 1이 넘었다.상위 5위권의 가문이 경영하는 사업을 보면 첨단기술, 가축업, 부동산, 석유 및 가스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른다. 상위 50대 부자 가문은 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이들 가문이 경영하는 기업집단은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 가문의 자산을 모두 더하면 5190억 달러에 이른다.50대 부자 가문 중 17개 가문, 그리고 올해 순위에 새로 진입한 4개 가문 중 3개가 인도 출신이다. 신규 진입한 4개 가문을 보면 각자 사업분야가 다르다. 부동산에서 의료보건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피라말 가문이 경영하는 피라말 엔터프라이즈는 금융서비스업체를 창업해 상장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에 힘입어 지난 12개월 동안 주가가 80% 이상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했다. 부동산으로 부를 일군 싱 가문이 소유한, 봄베이 주식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DLF는 가치가 높은 렌탈 사업체에 보유한 지분을 기관 투자자들에게 매각할 것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 덕분에 부동산 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거의 25% 가까이 상승했다. 마지막으로, 딘그라 가문은 인도 2위의 페인트 제조업체로 콜카타에 소재한 Berger Paints India가 지난 분기 순이익이 급증한 것으로 보도된 이후 지난 12개월 동안 주가가 60%가 넘는 고공행진을 보인 덕분에 순위에 처음으로 진입했다.본 순위에 진입하기 위해서, 해당 가문은 적어도 3대에 걸쳐 부를 형성해야 한다. 승계 계획은 중요하며, 특히 가문의 부를 처음으로 일군 창업자가 사망할 경우 그 중요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1년간 두 명의 창업자가 사망했다. 9월에는 홍콩 최대 재벌기업으로 손꼽히는 저우다푸의 창업자 정위통이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지난 2012년 정위통은 이미 장남인 헨리를 가족소유의 보석기업 주대복 및 기업집단 뉴월드의 회장 및 전무이사로 앉혔다. 11월에는 인도 최대의 모터사이클 제조사 히어로모터의 창업자 브리즈모한 랄 문잘이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잘은 수년 전 아들 파완과 수닐에게 기업 운영권을 넘겼고, 지난 6월 회장직에서 퇴임한 후 아들 파완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올해부터 수닐과 파완은 사업을 분할해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올해 순위에 진입하기 위한 기준순자산 액은 34억 달러로 작년에 비해 5억 달러 증가했다. 순위에서 탈락한 4개 가문 중 인도의 하미에드 가문이 있다. 하미에드 가문이 소유한 복제약 제조업체 시플라는 인도 정부의 약품가격 인하 정책으로 주가가 하락하는 등의 타격을 입었다.- KEREN BLANKFELD, GRACE CHUNG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1. 삼성 이 씨 가문 296억 달러 ▲ 대한민국나날이 사업영역을 확장해가는 삼성 이씨 가문 자산의 35%는 삼성전자에서 유래한다. 창업자의 아들인 이건희 회장은 2014년 심장발작 이후 계속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이건희 회장의 외동아들이자 삼성의 후계자로 예상되는 이재용은 삼성의 갤럭시 휴대폰 갤럭시 노트 7의 리콜과 단종 사태로 최대의 난관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주가는 20% 상승했다. 이재용의 사촌 이재현 CJ 회장은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은 지 2년이 지난 2016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 2. 체아라와논 가문 277억 달러 ▲ 태국세계 최대의 동물사료제조업체 및 가축공급사 차른 뽁판드 그룹을 경영하는 체아라와논 가문은 보유자산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서 자산이 늘어났다. 1921년 치아 엑 초르와 촌차른 체아라와논 형제가 중국에서 수입한 종자를 태국의 농부들에게 판매하는 가게를 연 것이 사업의 시초이다. 오늘날 치아 엑 초르의 아들 다닌이 그룹을 이끌고 있으며, 다닌은 3명의 형제 및 여타 친척들과 자산을 공동 소유하고 있다. 다닌의 아들 수파차이는 그룹 계열사이자 태국 3대 통신사업자 트루(True Telecom)를 경영하고 있다. 트루는 정부경매에서 4G 주파수를 사들이기 위해 30억 달러가 넘는 기록적인 입찰액을 제시했다. ━ 3. 암바니 가문 258억 달러 ▲ 인도석유·가스 재벌 무케시 암바니는 9월 4G 통신 서비스 지오를 개시하며 인도의 이동통신 시장에 가격전쟁을 촉발했다.(무케시의 릴라이언스가 소유한 네트워크18은 포브스 미디어와 사용권계약을 맺은 업체다.) 같은 9월 무케시의 동생 아닐은 릴라이언스 커뮤니케이션의 이동통신 사업부가 경쟁사 에어셀과 합병할 것이라 발표했고, 이 합병건은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두 형제의 아버지 디루바이 암바니는 향신료와 실 무역으로 사업을 시작해 릴라이언스를 인도 최대급 민간기업으로 키웠다. 2002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무케시와 아닐은 사이가 틀어졌고 제국은 분할되었다. 무케시의 쌍둥이 자녀는 이동통신사업부 릴라이언스 지오인포컴과 릴라이언스리테일에서 일하고 있다. 아닐의 아들은 릴라이언스캐피털에서 일하고 있다. ━ 4. 궈(Kwok) 가문 252억 달러 ▲ 홍콩아시아 부동산 시장에서 최고의 부를 쌓은 궈(Kwok) 가문은 홍콩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순훙카이부동산을 경영하고 있다. 2014년 토머스가 시 공무원을 매수한 죄로 실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토머스와 레이먼드 형제는 610억 달러 규모(순자산 기준)의 순훙카이부동산을 공동경영했다. 토머스는 7월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현재 항소를 진행 중이다. 레이먼드의 아들이 순훙카이부동산의 영업 및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있으며, 토머스의 아들이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형제의 아버지 궈더성은 1969년 펑징시, 리자오지와 함께 순훙카이를 창립했다. 이후 궈더성은 순훙카이부동산을 설립하고, 순훙카이부동산은 1972년 상장되었다. 궈더성의 아들로 다른 형제들에 의해 축출된 월터는 엠파이어그룹홀딩스라는 독자적인 부동산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 5. 리 가문 247억 달러 ▲ 홍콩리 가문의 수장 리자오지는 2015년 7번째 손자를 봤다.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지인과 직원들에게 200만 달러 상당의 선물을 나눠줄 계획을 세웠다. 리자오지의 막내아들로 리 가문의 거대부동산기업 핸더슨개발의 사업을 관장하는 마틴이 7번째 손주의 아버지다. 형 피터는 중국의 사업을 맡고 있으며 장녀 마거릿은 포트폴리오 리스 사업부를 관리하고 있다. 리의 장손녀 크리스틴은 핸더슨개발의 부사장(assistant general manager)으로 일하고 있다. 회장 리자오지는 1973년 핸더슨개발을 설립했다. ━ 6. 하르토노 가문 186억 달러 ▲ 인도네시아하르토노 가문 자산 대부분은 인도네시아 최대의 비국유은행(non-state-owned bank) 뱅크센트럴 아시아(BCA)에서 유래한다. 뱅크센트럴아시아의 주가는 거의 20% 가까이 상승했다. 하르토노 가문이 처음 부를 쌓기 시작한 것은 담배사업이 시초였다. 1951년 부디와 마이클 형제는 작고한 아버지가 1951년 설립한 인도네시아담배 크레텍 제조업체 자럼을 승계했다. 현재 부디의 아들 빅터가 경영하는 자럼은 담배세 상승과 정부의 담배제조 단속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하르토노 가문의 3세대 일원 중 6명이 기업운영에 일조하고 있다. 빅터의 남동생 마틴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다른 남동생 아르만드(Armand)는 BCA의 이사를 맡고 있다. 사촌 로베르토(Roberto)는 휴대폰 운영체제 피라(Fira)를 출시했다. ━ 7. 궈(Kwek) 가문 185억 달러 ▼ 싱가포르, 말레이시아금융에서 부동산에 이르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기업집단 홍룽그룹 경영에 관여하는 궈(Kwek/Quek) 가문의 일원은 15명이 넘는다. 궈 가문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것은 궈팡펑이 세 형제와 함께 홍룽을 창업한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궈팡펑의 장남 궈링밍은 싱가포르의 사업을 맡고 있다. 손자 셔먼은 4월 홍룽그룹의 부동산 사업부의 수석부사장(Deputy CEO)직에 임명되었다. 궈링밍의 사촌 궈링찬은 홍룽그룹의 말레이시아 법인을 운영한다. ━ 8. 정 가문 173억 달러 ▲ 홍콩정 가문의 수장 정위통은 지난 9월 타계했다. 2012년 정위통은 장남 헨리를 정 가문이 경영하는 보석업체 주대복 및 기업집단 뉴월드의 회장 겸 전무이사로 앉혔다. 헨리의 아들 아드리안이 뉴월드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고 있으며, 딸 소냐는 고급호텔체인 로즈우드를 맡았다. 헨리의 남동생 피터가 이끄는 뉴월드차이나랜드는 정위통이 중국본토에서 형성한 160억 달러 규모의 부동산자산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헨리의 처남 윌리엄 두는 2015년 뉴월드의 하청업체 FSE 엔지니어링의 주식상장에 일조했다. 정유통은 주대복의 원래 소유주였던 금세공업자 아래에서 일하던 중 그 딸과 결혼하고 이후 홍콩에 정착했다. ━ 9. 차이 가문(금융) 153억 달러 ▲ 대만1962년 완차이(Wan-Tsai)와 완린 형제가 캐세이 보험을 설립했다. 가족 간의 불화가 발생하면서 1979년 두 형제는 갈라섰다. 완린(2014년 사망)이 캐세이를 가져갔고, 완차이는 푸본을 설립했다. 완린의 아들 홍투는 대만 최대의 대출기관 캐세이파이낸셜홀딩을 이끌고 있다. 6월 기준으로 홍투의 아들들이 캐세이파이낸셜홀딩의 부사장 및 자회사인 캐세이유나이티드뱅크의 이사 및 부회장을 맡고 있다. 완차이의 아들 대니얼과 리처드는 2014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푸본의 경영을 맡고 있다. 리처드의 아들은 푸본스포츠앤엔터테인먼트를 이끌고 있다. ━ 10. 힌두자 가문 149억 달러 ▼ 인도, 영국트럭과 윤활유에서 은행, 케이블 TV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힌두자그룹은 사형제의 굳건한 공조체제하에 운영되고 있다. 힌두자그룹을 창업한 아버지 파르마난드 딥찬드 힌두자는 현재 파키스탄 영토인 인도의 신드주에서 장사를 하다 1919년 이란으로 이주했다. 힌두자그룹은 원래 이란에 본사를 두었으나, 4형제는 1979년 사업본거지를 런던으로 옮겼다. 현재 3세대 일원 중 7명이 그룹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 11. 프렘지 가문 146억 달러 ▼ 인도프렘지 가문의 전신 와이프로(Wipro)는 1945년 땅콩으로 식용유를 생산하는 사업으로 출발했다. 회장 아짐 프렘지는 1966년 아버지 모하메드 하샴 프렘지가 사망하면서 사업을 이어받았다. 아짐이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프렘지 가문의 부가 증대되었다. 오늘날 와이프로는 인도에서 3번째로 큰 첨단기술 아웃소싱 기업이다(매출 77억 달러). 10월 와이프로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소재한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아피리오를 5억 달러에 인수했다. 아들 리샤드는 와이프로의 전략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사회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12. 현대 정 씨 가문 145억 달러 ▲ 대한민국현대 정 씨 가문의 자산 상당 부분은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과 그 외동아들 정의선이 보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수입차와의 경쟁과 중국발 수요의 약화로 10분기 연속 저조한 수익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서 정 씨 가문의 자산이 증가했다. 정몽구 회장의 아버지 정주영은 1940년대 서울에 작은 자동차 정비소를 세워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현대 주요 계열사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및 KCC등이 있다. ━ 13. 미스트리 가문 140억 달러 ▼ 인도미스트리 가문의 자산 대부분은 매출기준 1030억 달러 규모인 타타그룹 지분으로 구성돼 있다. 타타그룹의 경영을 맡았던 4세대 후계자 사이러스는 10월 이사회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증조부 팔론지 미스트리는 건설업체를 설립해 뭄바이에 저수지를 짓고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했다. 조부 샤푸르지는 1930년대 타타그룹의 지주사 타타 선즈의 지분을 매입했다. 사이러스의 아버지 팔론지는 인도와 걸프만에서 높은 수익을 내는 계약을 수주했다. 팔론지는 2012년 아들 샤푸르지에게 샤푸르지팔론지그룹의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 14. 치라티왓 가문 138억 달러 ▲ 태국태국 최대의 쇼핑몰 개발업체 센트럴그룹을 이끌고 있는 소매업계의 치라티왓 가문은 4월 프랑스 카지노그룹으로부터 빅C 수퍼센터 베트남의 지분을 11억 달러에 매입했으나, 카지노그룹이 빅C 수퍼센터 태국 사업부에 보유한 지분을 인수하기 위한 입찰경쟁에서는 패배했다. 센트럴그룹은 토스 치라티왓이 이끌고 있다. 1927년 토스의 조부 띠앙 치라티왓은 방콕에서 처음 가게를 열었다. 1957년 띠앙의 아들 삼릿은 방콕 프라나콘에서 태국 최초의 백화점을 열었다. ━ 15. 궈(Kuok) 가문 134억 달러 ▲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지난 12월 로버트 궈(Kuok)는 2억6500만 달러에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지의 지분을 알리바바에 매각했다. 로버트 궈가 1949년 상품무역업체로 설립한 궈 그룹은 고급호텔체인 샹그릴라를 소유하고 있으며, 샹그릴라의 아시아 사업부는 로버트의 아들 중 한 명이 이끌고 있다. 또 다른 아들은 아시아 최대의 해상석유가스 탐사선 운영업체 PACC오프쇼어서비스홀딩스를 경영하고 있으며, 삼남은 케리로지스틱스의 디렉터이다. 궈 그룹은 로버트의 조카 궈콩펑이 공동창업한, 야자유를 생산하는 대기업 윌마르인터내셔널의 지분도 소유하고 있다. 궈 가문의 3세대는 그룹 계열사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 16. 미탈 가문 132억 달러 ▲ 인도락시미 미탈이 소유한 아르셀로미탈은 세계 최대의 철강업체다. 지난 5년을 통틀어 최고의 수익을 기록했다. 락시미의 아버지 모한 랄 미탈은 1950년대 가족사업으로 철강업을 시작했다. 모국에서 제약에 직면한 모한 랄은 1976년 아들 락시미를 인도네시아로 보냈으며, 락시미는 이곳에서 제철소를 세웠다. 결국 락시미는 다른 형제들과 결별하고 미탈스틸을 설립했고, 미탈스틸은 2006년 아르셀로와 합병했다. 락시미의 딸 바니샤는 철강 제조업체 아페람의 최고전략책임자이며 아들 아디티아는 아르셀로미탈의 최고재무책임자이다. ━ 17. 시 가문 128억 달러 ▲ 필리핀헨리 시(Sy)는 필리핀 전역에 걸쳐 소매업체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시 가문의 SM인베스트먼츠는 필리핀 최대의 소매업체로, 200개가 넘는 개별점포를 거느리고 있다. 2016년 2월 SM인베스트먼츠는 산하의 소매관련 사업체를 SM리테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합병할 것이라 발표했다. 시 가문은 마닐라의 작은 신발가게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이를 쇼핑몰 개발업체 SM프라임으로 키웠다. 헨리 시의 자녀는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으며, 손주 세대도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 18. 사지 가문 127억 달러 ▲ 일본일본의 위스키 수요가 증가한 덕분에 사지 가문의 산토리홀딩스의 매출이 늘었다. 1899년 산토리를 창업한 도리 신지로는 서양식 주류를 생산했다. 아들 사지 게이조는 1961년 사업을 이어받아 산토리의 사업을 다각화하고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창업자 도리 신지로의 손자 사지 노부타다가 현재 회장직을 맡고 있다. 도리 신지로의 손자로 사지 가문의 후계자가 될 도리 노부히로는 산토리식품의 임원(director)으로 활동하고 있다. ━ 19. 고드레지 가문 123억 달러 ▲ 인도고드레지 가문은 매출 기준 46억 달러 규모의 고드레지그룹(Godrej Group)을 이끌고 있다. 3세대 일원인 아디 고드레지가 맡고 있는 고드레지컨슈머프로덕츠는 잠비아, 세네갈, 케냐에서 개인용품 기업 3곳을 인수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입지를 강화했다. 고드레지그룹을 설립한 아르데시르 고드레지는 변호사였으나 1897년 변호사를 그만두고 자물쇠 생산을 시작했다. 아르데시르는 1918년 세계 최초로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비누를 출시했다. 동생 피로즈샤가 뭄바이에서 매입한 토지는 오늘날까지 고드레지 가문 최대의 자산이다. ━ 20. 바오 가문 113억 달러 ▲ 홍콩1991년 해운업계의 거물 바오위강(Y.K.Pao)이 사망하면서, 4명의 딸들이 사업체를 나눠가졌다. 각 사위들은 경영을 맡고있다. 가문 자산의 상당 부분을 딸 베시(Bessie)의 남편인 피터 우가 관장하고 있으며, 피터 우는 2015년까지 부동산 및 물류 기업집단 워프(Wharf)의 회장을 지냈다. 아들 더글라스는 지주회사 휠록앤코(Wheelock & Co.)를 맡고 있으며, 딸 애너와 결혼한 헬무트 조먼(Helmut Sohmen)은 2010년까지 해운사업체 BW그룹을 경영했다. 현재는 이들 부부의 아들 안드레아스가 경영을 맡고 있다. 딸 시시(Cissy)와 남편은 일본에 소재한 보험, 무역 및 산업용품 사업부 콘스앤코를 경영한다. 딸 도린과 남편은 가문의 사적 자금을 관리한다. ━ 21. 카두리 가문 99억 달러 ▲ 홍콩카두리(Kadoorie) 가문이 소유한 홍콩 & 상하이호텔(Hong Kong & Shanghai Hotel)은 올해 150주년을 맞았다. 카두리 가문이 소유한 페닌슐라 호텔은 2021년 런던에 신규호텔을 개장할 예정이다. 가문의 자산 대부분을 구성하는 CLP홀딩스는 홍콩 인구의 80%에 전기를 공급한다. 유대계 이라크인인 엘리 카두리 경은 1901년 CLP를 공동창업했다. 아들 로렌스와 호러스가 사업을 경영하다 로렌스의 아들 마이클에 경영권을 넘겼다. 처남 로널드 매컬리가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 22. 비를라 가문 96억 달러 ▲ 인도쿠마르 비를라(Kumar Birla)는 매출기준 410억 달러 규모의 상품 기업집단 아디티아비를라그룹(Aditya Birla Group)을 이끌고 있다. 8월 쿠마르는 아디티아비를라누보를 풍부한 현금을 보유한 기업 그라심인더스트리즈와 합병하고, 금융서비스 사업부를 개별기업으로 분할한다고 발표했다. 3월 비를라 가문이 소유한 울트라테크시멘트는 경쟁사인 제이피그룹의 시멘트 사업부를 24억 달러에 인수하는 작업을 매듭지었다. 쿠마르의 증조부 간샴 다스 비를라(Ghanshyam Das Birla)가 1919년 황마 공장(jute mill)을 세운 것이 사업의 시초다. ━ 23. 황 가문 87억 달러 ▲ 싱가포르10월 황(Ng) 가문의 부동산 사업부 시노랜드(Sino Land)는 3억2500만 달러에 1만9000평방미터에 달하는 토지의 인수권을 획득했다. 이러한 계약은 궈 가문(4위)의 월터가 이끌고 있는 엠파이어그룹과 합작법인의 일환으로 체결된 것이다. 시노그룹은 1970년 황팅팡(2010년 사망)이 설립했다. 장남 로버트가 시노그룹의 침사추이부동산 회장을 맡고 있다. 차남 필립은 싱가포르에 소재한 부동산 개발업체 파이스트오거나이제이션을 경영한다. ━ 24. 모리 가문 86억 달러 ▲ 일본1959년 모리빌딩을 설립한 부동산 거물 모리 다이키치로(1993년 사망)의 상속자들이 모리 가문의 일원이다. 아들 아키라와 미노루는 1999년 기업을 분할했다. 미노루가 2012년 사망할 때까지 모리빌딩을 경영했다. 부인 모리 요시코가 모리빌딩의 지분 일부를 보유하고 있고, 사위 모리 히루가 부사장을 맡고 있다. 아키라는 도쿄의 샹그릴라 및 메리어트를 포함한 호텔 21곳과 빌딩 101채를 운영하는 모리트러스트의 회장이다. 아키라의 딸 다테 미와코가 6월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 25. 위자자 가문 70억 달러 ▲ 인도네시아위자자(Widjaja) 가문은 인도네시아의 실리콘밸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스타트업 인큐베이터(Incubator·창업지원)의 허브를 만든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적이다. 위자자 가문은 최근 IT산업의 벤처자본 사업부를 설립했다. 위자자 가문의 수장인 으카 칩타 위자야(93)는 10대 시절 과자를 팔아 1962년 시나르마스(Sinar Mars)를 설립했다. 오늘날 시나르마스는 펄프 및 제지, 부동산, 금융서비스, 농업사업, 이동통신 및 광산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한다. ━ 26. 바자즈 가문 69억 달러 ▲ 인도바자즈그룹(Bajaj Group)은 이륜차에서 금융서비스, 설탕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다. 라훌 회장의 아들 산지브(Sanjiv)가 경영하는 금융사 업체 바자즈핀서브(Bajaj Finserv)의 주가가 75%의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한 것에 힘입어 가문의 자산이 증가했다. 라훌의 조부 잠날랄(Jamnalal) 바자즈는 마하트마 간디의 측근으로 바자즈그룹을 설립했다. 잠날랄의 장손 카말나얀(Kamalnayan)이 1942년 경영권을 승계하고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라훌은 1965년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사촌 니라즈, 셰카르, 마두르가 그룹 계열사를 운영한다. ━ 27. 라우 가문 65억 달러 ▲ 홍콩케네스 로(Kenneth Lo)와 라우카포(Law Kar Po) 형제는 서로 다른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아버지 라우팅퐁(Law Ting-pong)이 세운 직물사업 제국을 바탕으로 한다. 케네스는 빅토리아시크릿과 J.C. 페니 등의 브랜드의 제조업체 크리스탈그룹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아들 앤드루는 CEO다. 라우 카 포는 아태지역에서 11개 호텔을 경영하는 파크호텔그룹을 이끌고 있다. 아들 앨런이 CEO이며 딸 웬디도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2015년 사촌이 납치되었다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사건에 연루된 9명의 납치범은 22개월에서 15년의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 28. 로히아 가문 63억 달러 ▲ 인도네시아, 태국로히아 가문의 형제 두 명이 가문의 자산을 관리한다. 1975년 인도네시아에서 아버지와 함께 석유화학산업의 강자 인도라마(Indorama)를 공동 창업한 스리 프라카시(Sri Prakash)가 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아들 아밋(Amit)이 그룹 이사로 일선 기업운영을 담당한다. ━ 29. 추 가문 62억 달러 ▲ 싱가포르역사적인 굿우드파크호텔을 소유한 추(Khoo) 가문은 10월 13억4000만 달러에 이르는 계약을 통해 호텔의 소수지분을 전부 매입하겠노라 제안했다. 이는 창업자의 딸 메이비스가 회장을 맡고 있는 굿우드그룹오브호텔스의 지분을 통합하기 위한 행보였다. 추 가문의 자산 대부분은 2006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보유했던 지분을 40억 달러에 매각하면서 형성되었다. 작고한 창업자 추더바(Khoo Teck Puat)는 1986년 스탠다드차타드에 투자했고, 이후 굿우드파크를 비롯한 여타 호텔을 인수했다. ━ 30. LG 구 씨 가문 60억 달러 ▲ 대한민국거대 전자제품기업 LG 전자가 구 씨 가문 자산의 65%를 차지한다. 최대주주이자 회장인 구본무는 1994년 외동아들을 잃고 조카 구광모를 양자로 들였으며 구광모가 경영권을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구 씨 가문의 사업분야는 화학, 이동통신, 패션 및 기계를 아우른다. 1947년 구인회가 락희화학공업사를 공동창업하고 유명한 페이스크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제품 포장문제로 비판의 목소리가 일자 구인회는 화장품에서 가전제품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아들 구자학은 작고한 삼성 창업주의 딸인 이숙희와 결혼했다. ━ 31. 부르만 가문 58억 달러 ▲ 인도매출기준 13억 달러 규모의 소비자제품 거대기업 다부르(Dabur)에 바탕을 둔 자산을 부르만(Burman) 가문의 다섯 가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1884년 아유르베다 요법을 실천했던 S.K. 부르만은 콜레라 및 말라리아와 같은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만들었다. 아들 C.L. 부르만은 다부르 최초의 R&D 부서를 설립하고 생산을 확대했다. 1930-40년대 C.L.의 아들 둘이 경영을 맡게 되었다. 현재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아난드는 과거 제약사업부를 경영하며 부르만이 자체적으로 약초를 재배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사촌 아밋은 부르만의 과일즙 시장 진출을 이끌었다. 다부르는 인도정부와 함께 말라리아와 당뇨병을 위한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 32. 반구르 가문 57억5000만 달러 ▲ 인도베누 고팔(Benu Gopal)이 소유한 시리시멘트(Shree Cement)는 판매가 증가하고 석탄가격 하락으로 에너지비용이 하락하면서 주가가 35% 가까이 치솟았다. 아들 하리 모한(Hari Mohan)과 손자 프라샨트(Prashant)가 현재 경영을 맡고 있다. ━ 33. 살림 가문 57억 달러 ▲ 인도네시아살림(Salim) 가문이 소유한 살림그룹은 부채상환과 사업확장을 위해 2015년 12월 사모펀드업체를 통해 10억 달러의 자금을 모았다. 1월 2억2400만 달러에 뉴사우스웨일스의 석탄광산을 인수하고, 3월에는 한국의 커피숍체인 카페베네의 지분을 매입했다. 안토니 살림이 가문의 핵심투자사업을 관장하고 있다. 안토니는 퍼스트퍼시픽의 회장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생산하는 인도푸드를 이끌고 있다. 아들 액스턴은 이사회 임원이다. 안토니의 부친 린샤오량은 1938년 중국에서 인도네시아로 건너와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기 전 돈독한 관계를 다졌다. ━ 34. 차이 가문(식품) 56억 달러 ▼ 태국차이옌밍(Tasi Eng-Meng) 회장은 부친이 1962년 설립한 작은 무역회사 왕왕차이나를 차가운 우유 및 쌀과자로 유명한 중국 최대 스낵기업으로 키웠다. 2015년 매출은 10% 가까이 하락했다. 장남 샤오정(Shao-Chung)이 이사를, 차남 왕치아(Wang-Chia)가 최고운영책임자를 맡고 있다. 조카 정원셴(Cheng Wen-Hsien)은 이사(director)다. 차이 가문은 태국 일간지 차이나타임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금융서비스·호텔에 투자하고 있다. ━ 35. 궈(Kwee) 가문 54억 달러 ▲ 싱가포르궈(Kwee) 가문의 캐피톨싱가포르 재개발 프로젝트는 억만장자 궈콩펑(15위)의 지원을 등에 입은 사업파트너 퍼레니얼부동산이 주주간의 교착상태를 이유로 프로젝트 청산신청을 법원에 제기하면서 지난 4월 중단되었다. 폰티악랜드를 소유한 궈량겅, 궈량더, 궈량청, 궈량핑의 궈 가문 네 형제는 뉴욕에서 고급 빌딩를 개발 중이다. 아버지 헨리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직물 상인 겸 부동산 업자로 1958년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 36. 랄 가문 53억 달러 ▲ 인도랄(Lal) 가문이 과반수주주로 있는 아이허모터스(Eicher Motors)는 지난 회계연도 자사의 대표적 모델 로얄엔필드(Loyal Enfield) 모터사이클이 5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는 신기록을 세웠다. 3월 아이허모터스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어드벤처바이크 모델 히말라얀을 시장에 출시했다. 비크람(Vikram) 랄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승계한 아들 시다르타(Siddhartha)는 글로벌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지난해 런던으로 왔다. 비크람의 아버지 만 모한(Man Mohan) 랄은 1948년 트랙터회사 굿어스(Goodearth Co.)를 설립했고, 10년 후 독일업체 아이허와 합작하면서 사명을 아이허트랙터(Eicher Tractor)로 바꿨다. ━ 37. 소벨 가문 51억 달러 ▲ 필리핀필리핀 최고의 역사를 지닌 기업으로 손꼽히는 아얄라그룹은 현재 소벨(Zobel) 가문의 7세대가 경영하고 있다. 지분의 3분의 1 이상은 가문의 일곱 형제가 보유하고 있다. 마닐라의 작은 증류소로 출발한 아얄라그룹은 오늘날 아얄라랜드, 뱅크오브필리핀아일랜즈, 글로브텔레컴, 마닐라워터의 지주사로 성장했다. 장남 하이메 2세가 회장 겸 최고경영자이고 남동생 페르난도가 사장·최고 운영책임자를 맡고 있다. 소벨 가문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식음료 및 포장산업 상장기업인 산미구엘에도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하이메(Jaime) 2세의 사촌 이니고 소벨(Inigo Zobel)이 산미구엘의 이사회 임원이다. ━ 38. 진달 가문 50억 달러 ▲ 인도O.P. 진달그룹의 사업영역은 철강, 전력 및 시멘트 등을 아우른다. 사망한 창업자 옴 프라카시 진달의 부인 사비트리 진달(Savitri Jindal)이 회장을 맡고 있다. 옴 프라카시는 1952년 양동이를 만드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인도 히사르(Hisar)에 파이프 사업부 진달인디아를 설립하고 1969년에는 대규모 산업공장을 세웠다. 옴 프라카시의 사망 이후 네 명의 아들이 기업을 분할해 현재 각자 독자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아들 사잔(Sajjan)이 JSW스틸에 보유한 주식의 가격이 지난 1년 동안 80% 반등했다. 사잔의 아들 파르드(Parth)는 그룹의 시멘트 사업을 관장한다. ━ 39. 아보이티스 가문 49억5000만 달러 ▲ 필리핀아보이티스(Aboitiz) 가문은 필리핀 세부에 본사를 두고 전력, 은행, 식품, 부동산개발 및 바이오 연료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 아보이티스에쿼티벤처스(AEV)를 소유하고 있다. 2015년 AEV는 라파즈 필리핀 사업부의 지배지분을 인수했다. AEV를 창업한 파울리노 아보이티스는 1800년대 말 필리핀으로 이주해 마닐라삼 매매 및 일반 상거래로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대부분 4세대, 5세대인 가문의 일원 19명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 40. 파텔 가문 49억 달러 ▲ 인도8월 파텔(Patel) 가문이 소유한 자이두스그룹의 제약사업부 카딜라헬스케어를 상대로 스위스의 바이오테크 대기업 로슈가 인도에서 자사의 유명한 유방암치료제를 복제해 판매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카딜라헬스케어는 법규에 따라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약학을 전공한 판카지가 회장을 맡고 있고 아들 샤르빌이 수석 사장(deputy managing director)으로 일하고 있는 카딜라헬스케어의 뿌리는 판카지의 아버지세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학교수였던 라만바이 파텔은 인드라바단 모디와 함께 1952년 카딜라연구소를 설립하고 빈혈치료제를 만들었다. 1995년 파텔 가문의 2세대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이 둘은 기업을 분할했다. ━ 41. 위 가문 46억 달러 ▲ 싱가포르위(Wee) 가문이 소유한 유나이티드오버시스뱅크(UOB)는 시가총액 기준 싱가포르의 3대 은행으로 창업자 위칭창(Wee Kheng Chiang)의 아들 위주야오가 회장을 맡고 있다. 2015년 창립 80주년을 기념하고자 UOB는 싱가포르국립대학과 난양기술대학에 장학금으로 1500만 달러를 쾌척했다. 위주야오의 장남 위이종이 UOB의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으며 차남, 삼남인 위이차오와 위이린은 자회사를 이끌고 있다. ━ 42. 문잘 가문 43억 달러 ▲ 인도인도 최대의 모터사이클 제조사 히어로모토코퍼레이션(Hero MotoCorp.)의 창업자 브리즈모한 랄(Brijmohan Lall) 문잘이 2015년 11월 사망했다. 현재 아들 파완이 회장을 맡고 있는 히어로 모토는 6500만 대의 이륜차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아들 수닐은 다른 사업체와 신규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7월 managing director 직에서 사임했다. 조카들은 금융서비스, 신재생에너지, 전자 사업부를 경영한다. 브리즈모한은 1947년 다른 세 형제와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네 형제는 세계 최대의 자전거 제조사로 손꼽히는 히어로사이클을 설립했다. ━ 43. 싱 가문 42억6000만 달러 ★ 인도라흐벤드라 싱(Raghvendra Singh)은 1935년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5년 후 인도육군에 자원입대해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종전 후 싱은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이재민이 된 이들을 위해 주택을 지었고, 1946년 DLF를 세웠다. 사위 쿠샬팔(Kushal Pal) 싱이 1961년 군대에서 퇴역하고 DLF에 합류했으며, 현재 봄베이 주식거래소에 상장된 DLF의 회장을 맡고 있다. DLF는 2680만 평방피트에 이르는 리스상업용부동산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K.P.의 아들 라지브 싱이 DLF의 부회장이다. ━ 44. 림 가문 42억5000만 달러 ▲ 말레이시아림(Lim) 가문의 카지노 제국 겐팅그룹은 2세대 림 궈타이(Lim Kok Thay)가 지휘하고 있다. 5월 겐팅그룹은 40억 달러 규모의 리조트월드라스베가스의 건설을 시작했으며 2019년 개장할 예정이다. 사망한 림고통(Lim Goh Tong)은 1964년 말레이시아의 빽빽한 열대우림을 유명한 리조트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 겐팅그룹은 야자유, 전력 발전, 석유·가스, 부동산 개발, 크루즈 산업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거듭났다. 림궈타이의 아들 림공후이가 그룹의 최고정보책임자를 맡고 있다. ━ 45. 로 가문 42억 달러 ▲ 홍콩로(Lo) 가문의 부는 1963년 아내 로 토 리 콴(Lo To Lee Kwan)과 함께 그레이트이글을 창업한 부동산 거물 로잉셱(Lo Ying-Shek)을 시작으로 형성되었다. 로잉셱 사망 이후 오늘날 96세가 된 아내를 포함해 가문의 일원 8명이 이사회 임원으로 활동한다. 그레이트이글의 경영을 아들 카 슈이(Ka Shui)가 맡고 있으며, 다른 아들들은 각자의 길을 개척해 별개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빈센트는 상하이의 유명한 쇼핑 및 엔터테인먼트 지구 신천지를 개발한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슈이 온 랜드(Shui On Land)를 설립했으며, 또 다른 아들 역 수이(Yuk Sui)는 리갈호텔스의 모기업 센추리시티인터내셔널을 지휘하고 있다. ━ 46. 히라난다니 가문 38억 달러 ▲ 싱가포르라즈 쿠마르와 아소크 쿠마르 형제는 10대 시절 아버지 나라인다스 히라난다니(Naraindas Hiranandani)로부터 직물업체 로열실크스토어를 물려받았다. 형제는 이를 의류체인점으로 탈바꿈시키고 부동산개발로 사업을 확장했다. 2011년 부동산업체 로열브라더스를 분할했다. 라즈 쿠마르는 로열홀딩스를 경영하며 아들 키신 R.K.는 부동산업체 RB캐피털을 설립했다. 아소크의 로열그룹은 싱가포르, 호주,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에 소매유통, 사무실 및 호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딸 딤플 히라난다니 아스와니가 이사로 있다. ━ 47. 쿠 가문 37억 달러 ★ 태 국쿠첸푸(Koo Chen-Fu)는 조카 제프리 쿠 시니어(Jeffrey Kook Sr.)와 함께 물려받은 가족사업을 거대기업제국 쿠스 그룹(Koos Group)으로 키웠다. 2003년 쿠 가문은 사업을 분할했다. 제프리 가족은 차이나디벨롭먼트파이낸셜홀딩스와 CBTC파이낸셜홀딩스를 경영하며, 제프리는 2012년 사망하기 전까지 회장을 맡았다. 제프리의 아들 제프리 쿠 주니어(Jeffery Koo Jr.)는 금융사기에 연루된 이후 2006년 부회장직에서 사임했으며, 불법주가조작으로 감옥형을 선고받은 후 항소를 진행 중이다. 6월 제프리 주니어는 또 다른 부패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이 사건은 오해일 뿐이라 해명하고 있다. 남동생 안드레(Andre)는 차이리스 홀딩(Chailease Holding)의 이사회 임원이다. 쿠첸푸의 아들 레슬리 쿠는 타이완 시멘트(Taiwan Cement)를 경영한다. ━ 48. 딘그라 가문 36억 달러 ★ 인도커딥(Kuldip)과 구르바찬 싱 딩그라(Gurbachan Singh Dhingra) 형제는 콜카타에 소재한 버르거 페인트 인디아(Berger Paints India)의 주가가 지난 12개월 동안 65% 가까이 증가한 덕분에 올해 순위에 처음으로 데뷔했다. 형제가 75%의 지분을 소유한 인도 제2의 페인트제조업체 버르거 페인트 인디아는 최근 분기 순이익이 40%나 껑충 뛰었다. 자녀 중 두 명이 이사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경영권을 승계할 준비를 하고 있다. ━ 49. 효성 조 씨 가문 35억 달러 ▲ 대한민국효성그룹을 경영하는 조 씨 가문은 산업 자재에서 건설 및 첨단기술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조석래 회장은 1월 탈세 및 분식회계로 유죄 판결을 받고 3년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장남이자 그룹을 승계할 것으로 보이는 조현준은 횡령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 18개월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집행 유예기한은 2019년이다. 조석래와 조현준 모두 항소한 상태이다. 조석래의 남동생은 세계 7대 타이어제조업체 한국타이어를 이끌고 있다. 조 씨 가문의 부는 아버지 조홍제가 1950년대 타이어가게를 인수하면서 시작되었다. ━ 50. 피라말 가문 34억 달러 ★ 인도피라말 가문이 소유한 대표기업 피라말(Piramal) 엔터프라이즈의 주가는 지난 12개월 동안 80%의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피라말 가문은 의료보건에서 데이터 및 금융서비스에 이르는 다양한 사업을 운영한다. 1977년 22세의 나이로 가문의 수장 아제이 피라말(Ajay Piramal)은 조부 피라말 차트랍후즈(Piramal Chatrabhuj)가 1934년 시작한 직물사업에 뛰어들었다. 아제이의 아버지 고피크리쉬나 피라말(Gopikrishna Piramal)이 2년 후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5년 후에는 형이 암으로 사망하면서 아제이가 경영권을 쥐게 되었다.

2016.12.23 11:01

20분 소요
터키 쿠데타, 누가 왜?

산업 일반

6시간만에 끝났지만 정치·사회적 후유증은 오랜 기간 지속될 듯 지난 15일 비날리 이을드름 터키 총리는 군부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축출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침 TV에서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에서의 충돌로 300명 가까이 사망했다고 보도됐지만 상황이 “대체로 수습됐다”고 말했다.이 날 새벽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시도가 “반역행위”이며 관련자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 정부의 반응은 신속했다. 쿠데타 직후 6000여명의 군인이 체포되고 약 8000명의 경찰이 해고 또는 구속됐다. 사법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 공직자 수천 명이 정직 또는 체포됐다. 사형제도의 부활이 거론되고, 정부는 미국에 망명한 이슬람학자 페흘라흐 귈렌을 실패한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하며 송환을 요구했다. ━ 군부는 누구 지시를 받나? 쿠데타는 2003년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터키 정정이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하던 시점에 발생했다. 군부는 오래 전부터 터키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왔지만 근년 들어 세력이 약화됐다.법적으로 군부는 이을드름 총리와 피크리 으시크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군부 최고 지도자는 훌루시 아카르 군 총사령관이다. 그는 대표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임무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파견 근무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군 지도자다.아카르가 군 총사령관 직을 맡은 지 불과 1년 됐다. 그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긴밀한 사이인 듯했다. 시리아 접경 인근 쿠르드군과의 전투가 격화될 때 임명됐다. 지난 6월 에르도안의 한 만찬에선 그의 연설에 감동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도 전해진다. 그가 쿠데타에 어떻게 관련됐는지는 불확실하다.여전히 NATO에서 미국에 이어 제2위 규모의 병력을 자랑하는 터키 군부는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보유한다. 군부는 1960년대 이후 정권이 3번 교체되는 동안 계속 정치에 개입해 왔다. 그러나 2003년 에르도안이 총리에 취임한 뒤 군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2007년 군부는 진행 중인 선거에 개입하겠다고 온라인으로 엄포를 놓았다. E쿠데타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수사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수사관들은 5년 전 군인과 저명인사들이 꾸민 진짜 정부 전복 계획을 적발해 냈다고 발표했다.대통령이 추진하는 시리아에서의 군사작전 확대나 그의 보수주의 강화는 군부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터키에서 반정부 세력이 약화함에 따라 군 장교들은“에르도안에 제동을 걸고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건 자신들뿐이라고 본다고 이스탄불의 안보 분석가 메틴구르칸은 말했다. ━ 페흘라흐 귈렌은 누구인가?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기도 후 가진 첫 공식기자회견에서“터키는 이런 식의 반란에 놀라지 않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터키를 통치할 순 없다”고 말했다. 16일 이스탄불 공항 도착 직후에도 “그들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지시를 받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정부는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을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었다. 귈렌은 한때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2013년 서로 상대방의 부패를 비난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귈렌은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망명 중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귈렌이 국내 관료체제 내의 지지자들을 통해 ‘제2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며 이번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한다.추종자들에게 지위 높은 학자(hocaefendi)로 알려진 귈렌은 분명 터키 공직사회, 언론계 내에 추총 세력이 있다. 그가 이끄는 히즈멧(봉사) 또는 자마트 운동으로 알려진 사립학교 네트워크는 140여 개국에 뻗쳐 있다.그 자신 1999년 추종자들에게 “시스템의 동맥 안에서 모든 세력 중추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의 영향력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3년 그의 총리 선출에도 힘이 됐다. 그러나 정부는 2013년 이후 귈렌파들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최근 터키 최대 일간지 중 하나가 귈렌과 관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뒤 에르도안 대통령이 경영권 인수를 명령했다.터키는 미국에 귈렌의 송환을 거듭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응하지 않고 있다. ━ 귈렌이 쿠데타 배후인가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자들은 분명 귈렌이 배후라고 믿는다. 비날리이을드름 터키 총리는 지난 16일 미국에 있는 귈렌 편을 드는 나라는 모두 터키와“교전 상대국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포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귈렌의 히즈멧 운동 미국 단체 ‘가치공유연합(The Alliance for Shared Values)’은 쿠데타 기도 음모 혐의에 관해 “대단히 무책임한 발언”으로 일축했다. 귈렌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직접 보낸 이메일 답변에서 관련설을 부인했다.그는“지난 50년 동안 여러 번의 군사 쿠데타에 시달린 사람으로서 그런 시도에 관련됐다는 혐의는 특히 모욕적”이라고 썼다.분명 귈렌과 군부의 이해는 과거 크게 엇갈렸다. 군부가 정치에 마지막으로 군사적 개입을 시도한 것은 2007년이었다. 에르도안과 귈렌이 지지하는 후보가 승리할지 모른다고 우려해 대선에 개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군부는 대선 개입선언을 통해 터키 세속주의의 최후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했다. 한편으론 영향력 있는 이슬람학자인 귈렌을 항상 상당히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는 세속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터키 군부는 그가 청년층을 ‘세뇌’하고 정교일치를 추진하려 한다고 비난했다.그러나 집권당 진영이 귈렌파의 심장부로 지목한 터키 서부 일부 지역에서도 쿠데타 공모 혐의자들이 체포된 듯하다. 16일 아침 이른 시각 부르사에서 치안군(잔다르마) 사령관 유르다쿨 아쿠스 대령을 비롯해 군 장교 8명이 체포됐다.국영 아나돌루 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부르사에서 귈렌파 운동가 11명이 구금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5월 귈렌의 조카를 포함해 귈렌 지지세력으로 알려진 29명이 체포된 이즈미르 인근에서도 귈렌 운동이 활발했다.쿠데타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군 내부의 쿠데타 주동 세력을 자처하는 단체인 이른바 ‘평화위원회’ 지도자 중 귈렌과 관련됐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터키 관영 미디어는 무하렘 코세 대령을 쿠데타 지도자로 지목했다. 그는 지난 3월 관련 의혹으로 군복을 벗은 뒤 귈렌 운동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주장했다. 국영 아나돌루 통신에 따르면 쿠데타 계획은 주로 치안군 대원들 사이에서 계획됐다. 한편 DHA 통신사는 2013~2015년 터키 공군 사령관을 지낸 아킨 외즈튀르크가 쿠데타 주동자였다고 보도했다.쿠데타 시도의 배후를 밝히기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귈렌을 배후로 지목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전문가들 사이에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런던 왕립합동군사연구소의 마이클 스티븐슨 연구원은 정부의 주장에 결함이 있으며 반체제 세력 탄압에 이용될 수 있다고 본다.“터키 정부는 처음부터 내내 귈렌이 배후라고 말해 왔다. 그들은 누구든 원하는 대로 배후를 지목할 수 있다. 현재로선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배후 조종자가 누구든 이번 쿠데타 기도는 군부 내에 에르도안의 집권을 원치 않는 세력이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으며 이번 일의 배후일지 아닐지 불분명한 미국 내의 이슬람학자는 그 시작도 끝도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건 지난 2년 사이 터키가 맞닥뜨린 헌법상의 상당히 실질적인 문제 그리고 지난 12개월 동안의 치안 문제를 외면하는 셈이다.”지난 몇 년 사이 경찰과 교육계 내 상당수 귈렌파의 존재를 묵인해 놓고 이제 와서 정부가 귈렌파를 비난하는 건 역설적이다. 그리고 군부가 터키 내 세속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자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귈렌의 지시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부가 증거를 제시하겠지만 귈렌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은 터키 사태의 심각성을 무시하는 처사다.터키 정부는 3개월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앞으로 쿠데타 기도 원인에 대한 대처보다는 안보체제 내 이 그룹의 동조자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전개될 듯하다. 서방 동맹들은 터키 정부에 법적 절차를 따르도록 촉구해야 한다. 정부가 안보 위협을 구실로 다른 분야의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더 억압적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 터키의 앞날은? 많은 희생자와 피해가 발생했지만 앙카라와 이스탄불 그리고 서방 국가 정치인들은 대체로 쿠데타의 실패에 안도하는 분위기인 듯하다.에르도안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중동 ‘문제’의 일부이면서도 어쩌면 어떤 ‘해결책’에든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지는 대립적인 인물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서방 군대에 공군 기지를 내줘 IS를 폭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IS 전사들은 시리아 접경을 마음대로 넘나든다. 터키는 변함없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중요한 구성원이지만 남동쪽의 쿠르드족 도시를 수시로 폭격한다.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반체제 세력을 가차없이 짓밟는다. 난민 위기로 유럽과 협력할 때도 에르도안이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한다는 불만이 유럽 쪽에서 많이 터져 나왔다. 정치인들은 부인하지만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찬성자 중 일부는 최소한 조금이라도 터키의 EU 가입 전망에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터키는 공식적으로는 세속주의 국가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종종 이슬람주의를 끌어안으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쿠데타 가담자들이 내세운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터키 국민의 98%가 무슬림인데도 불구하고 군부가 종종 세속주의 가치의 수호자로 자처해 왔기 때문이다. 군부는 가장 최근인 1997년의 거사를 포함해 그동안 수 차례 쿠데타를 일으켰다.그러나 서방 입장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유럽과 아시아, 중동과 서방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인구 8000만 명의 터키를 통제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딱 한 가지 있다. 에르도안이 통제하지 않는 터키다. 터키가 남쪽 시리아처럼 전면적인 내전으로 빠져들면 중동 전역의 정정이 불안정해지고,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유럽 진입 장벽이 무너지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폭력사태의 불똥이 튀면서 이스라엘·이란·미국과 러시아가 휘말릴 수 있다.따라서 서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하지만 터키 상황은 여전히 위험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군부와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게 뻔하다. 군부뿐 아니라 터키 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유주의 세력의 적대감이 커질 것이다. 군부가 굴욕감을 느끼고 쿠데타 지도자들이 처형되면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인터넷·소셜미디어·휴대전화로 연결된 세상에선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쿠르드족은 계속 탄압 종식과 어쩌면 자치권까지 요구하고, 이슬람국가(IS)는 터키를 계속 비교적 손쉬운 표적으로 여길 것이다. 게다가 키프로스를 둘러싼 분쟁도 계속된다. 전망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실패한 쿠데타로 파손된 건물과 교량 공사가 벌써 시작됐지만 터키의 손상된 대외 이미지를 복구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대미언 샤코브 뉴스위크 기자, 마크 피곳 아이비타임즈 기자

2016.07.2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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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공화국의 대통령

산업 일반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는 백악관의 주인자리를 노리지 않는다. 그러나 스타벅스가 최근 기록하고 있는 놀라운 성과에 고무된 이 억만장자(포브스 부자순위 595위)는 커피 사업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위상을 이용해 미국의 담론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꾸려 한다.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의 호주머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 안에는 두 개의 열쇠가 눈에 띈다. 이 중 하나는 전세계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스타벅스 매장인, 1만5000평방피트(약 1400㎡) 규모의 로스터리(Roastery)의 문을 여는 열쇠다. 시애틀의 캐피톨 힐 주변에 자리한 이 로스터리는 경탄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고객들 앞으로 윙윙 소리를 내며 방금 로스팅한 커피를 실어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를 고급 카페의 콘셉트와 결합시킨 것이다. 나이키에 나이키타운이 있듯이, 하워드 슐츠는 찰리의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윌리웡카 스타일의 커피 천국을 만들어냈다. 또 다른 열쇠는 보다 심오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스타벅스가 처음 시작된 시애틀 강가 주변에 허름하고 작은 스타벅스 매장을 여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1971년에 멈춰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스타벅스 브랜드를 정의했던 빛 바랜 커피 용기와 카운터가 그대로 있다. 그때 이후 이 매장을 현대화하기 위한 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때로 저는 새벽 4시 15분에 홀로 이곳을 찾습니다.” 62세가 된 하워드 슐츠의 말이다. “무언가 중심을 잡아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찾게 되는 가장 좋은 장소이지요.”중심을 잡는다? 지난번 확인했을 때, 억만장자 최고 경영자인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의 중심을 다시 잡겠다는 의지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워드 슐츠이다. 언제나 힘없는 약자이고, 언제나 수익 추구를 개인사와 연결하는 것이다. 1980년대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직을 맡게 된 이후로, 하워드 슐츠는 로컬 커피점 브랜드였던 스타벅스를 전세계적인 탑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2015년 스타벅스의 매출은 190억 달러를 상회했는데, 이는 친구들끼리 만나고 학생들이 숙제를 하며 연인들이 로맨스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커피와 음식을 함께 제공하는 전략에 힘입은 바가 컸다.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인류의 렌즈를 통해 보는 성과”를 창출함으로써, 하워드 슐츠는 30억 달러에 가까운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두고 대화를 하면, 하워드 슐츠는 언제나 자신이 무명이었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고는 한다. “저는 여전히 살 길을 찾아 고군분투하던 브룩클린 출신의 꼬마입니다.” 하워드 슐츠의 말이다. “저는 아이비리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워드 슐츠가 상기시킨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하워드 슐츠는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억울해 하기보다 소중한 기억으로 생각한다. 하워드 슐츠는 미국, 그리고 사실 전세계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나시(Canarsie)의 암울한 환경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여타 경영진 멤버들로부터 시작해 첫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흑인 및 라틴 아메리카계의 젊은이들까지 모든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록 제가 피부색은 다를지라도, 저도 결국 이처럼 불우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하워드 슐츠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하워드 슐츠는 지난해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루머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워드 슐츠 자신은 이번 대선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슐츠 자신이 이미 커피사업을 기반으로 미국의 담론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연단을 무기로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타벅스가 재무적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면서 하워드 슐츠는 이러한 무기를 쓸 수 있는 가히 막강한 권위까지 손에 넣었다. 무엇보다 하워드 슐츠는 미국이라는 기업의 최고 조정자(conciliator)가 되고자 한다. 하워드 슐츠는 불만에 찬 정치계와 일상의 담론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이 “양심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에 지난해 영감의 원천을 찾아 참전군인 병원에서 인도 힌두교 암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믿음에 대해 말해줄 것을 청했다. ━ 미국이라는 기업의 최고 조정자를 노린다 이제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가 사람들이 선거에 대해 다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곳, 총기휴대 및 인종과 같은 어려운 이슈에 대해 서로 존중하며 토론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시민권과 인류를 고양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워드 슐츠가 시작한 성전은 지난 3월 뼈아픈 수모를 겪었다. 2014년 말, 하워드 슐츠는 미주리 주 퍼거슨 지역에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던 한 흑인 10대 청소년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백인 경찰관이 무죄로 방면된 이후 발생한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 스타벅스의 직원들 역시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리스타와 매장 매니저들은 이들이 목도한 추악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서로 포옹을 나누었고, 모든 이들은 미국이 과거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에 크나큰 감명을 받은 하워드 슐츠는 7천 여개의 스타벅스 매장에서 이러한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바리스타들에게 수백 만개에 달하는 고객들의 커피잔에 “레이스 투게더(Race Together)”라는 문구를 적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스타들과 달리 바쁜 아침 시간 커피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서로에게 타인일 뿐인 고객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일주일 후 스타벅스의 “레이스 투게더” 캠페인은 종료되었다.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애틀에서 탄생한 커피제국 스타벅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야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하워드 슐츠는 사형제도의 부당성, 만성적인 실업률, 참전군인 이슈 그리고 스타벅스 바리스타들의 대학교육에 대한 열망 등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인종 이슈를 문제로 삼은 캠페인이 실패로 끝난 이후 하워드 슐츠가 펼치고 있는 행보를 지켜보는 것은 마치 카니발에서 칼을 삼키는 곡예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지켜보는 이를 기대감으로 부풀게 하면서도 한 순간 끔찍한 실패로 끝날 수 있다는 두려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몇 주 전 나는 하워드 슐츠와 종이컵에 담긴 스타벅스 에이지드 수마트라를 홀짝홀짝 마시며 브루클린 음악원의 텅 빈 무대로 들어섰다. 하워드 슐츠는 무대에 오르기 전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몇 분 후 무대에 오르면 무엇이 미국 사회에서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스타벅스가 선함을 이끌어내는 힘이 될 수 있을지 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300명 직원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자리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원대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열망과 망설임이 함께 섞인 목소리로 슐츠가 이야기한다. “한 조각의 찰흙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아직 모습이 빚어지지 않은 찰흙이지요. 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무대로 올라선 하워드 슐츠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사망보험금, 총기 안전 그리고 2016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자신에 우려하는 사안들을 짚어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단지 주가를 올리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슐츠가 외쳤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우리가 가진 힘을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이후 90분 동안 매장 매니저 및 바리스타 34명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아이디어와 걱정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유권자가 그러하듯, 지역 학교에서 자신들이 한 봉사활동에 대해 이야기한 소수를 제외하면 이들은 정책 이론보다는 자신이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암울한 현실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게에 노숙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더 안전을 강구할 수 있을까요?...바리스타를 위한 교육을 더욱 많이 제공할 수 있을까요?...아동보육에 대한 옵션이 가능할까요?... ━ 대중을 다루는 타고난 정치인 자질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슐츠는 질문을 던진 몇몇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슐츠는 직원들을 안심시키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 비정규직 직원이 유급휴가 시간이 많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알고 싶어하자, 슐츠는 이렇게 선언했다. “자, 보세요. 스타벅스에서 16년째 일하셨지요. 당신은 마땅히 휴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휴가를 드리지요.” 강연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슐츠는 질문을 던진 바리스타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고, 누군가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군중을 다루는 슐츠의 모습을 보면, 왜 그가 타고난 정치인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때 하워드 슐츠를 사로잡았던 정치적 열망은 이제 사그라들었다. 평생 민주당을 지지해 온 하워드 슐츠는 더 이상 자신이 가장 우려하는 사안들에 대한 해답을 정부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슐츠는 2008년도 바락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후로 대통령에 대한 정치헌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워드 슐츠는 병든 미국을 고치겠다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 적어도 스타벅스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구소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스타벅스는 군부대 근처에 19개의 매장을 세워 퇴역군인과 현역군인의 배우자들이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고용했다. 또한, 대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피닉스, 시카고 및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도시에서 대규모 직업박람회를 열어 실직 상태의 젊은이들이 면접을 볼 수 있도록 초청하고 있다. 2014년부터는 바리스타를 비롯한 스타벅스 직원들이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온라인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스타벅스가 학비를 전액 부담하고 있다.대부분의 기업에서, 최고경영자가 사회적 대의를 추구하는 데 너무나 심취해 있다면 이는 주주들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 스타벅스에서 3%가 채 되지 않는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하워드 슐츠 역시 투자자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너럴 일렉트릭과 JP 모건체이스의 냉정한 기업문화에 수년간 몸담고 있다 2011년 스타벅스에 합류한 최고재무담당자 스콧 모(Scott Maw)는 스타벅스가 특수한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모의 의견에 따르면, 기관차나 대출상품이 아닌 라테를 판매하는 기업이라면, 3달러45센트짜리 그란데 사이즈의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즐거운 경험과 윤리적으로 건전한 실천방식”을 향한 티켓이 된다는 것이다. 하워드 슐츠의 성전은 스타벅스가 판매하는 제품의 일부로 녹아들어, 스타벅스를 지구상 최대 규모의 사회적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하워드 슐츠는 언제나 카페인을 판매하는 것보다 더 원대한 무언가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2009년 스타벅스에 관한 책인 『Everything but the Coffee』를 쓴 템플 대학의 역사학 교수 브라이언트 사이몬의 말이다. 슐츠가 주창하는 캠페인의 대부분이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신기루와도 같다고 주장하는 사이몬 교수는 주위를 계속 맴도는 잔소리꾼인 셈이다. 스타벅스가 소유한 자체 생수 브랜드인 에소스(Ethos)를 예로 들어보자. 고객들은 구매액의 5센트가 사람들이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쓰인다는 사실에 대해 열광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생수 한 병당 원가가 1달러80센트인데 반해, 스타벅스는 구매가격의 97%를 수익으로 가져간다.심지어 무상대학교육 프로그램조차 사이몬 교수에게는 불만스럽다. 이는 고객들로 하여금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들이 장래가 없는 직업의 덫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끔 하기 위한 홍보용 곡예와도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는 학위를 취득하는 바리스타들의 수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군요.” 사이몬 교수의 말이다. ━ 지구상 최대 규모의 사회적 기업으로 탈바꿈 하워드 슐츠 역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리조나 주립대학과 함께 시작한 무상대학교육 프로그램은 2년 전 시작되었고, 5000명의 직원들이 이미 등록했다. 오늘날까지 44명의 직원이 학위를 취득했다. 이 밖에 100명 이상의 직원들이 이번 봄에 졸업이 예정되어 있다. 예전에 받은 커뮤니티 칼리지의 학점을 아리조나 주립대학의 시스템으로 이전하고, 전공을 결정하고, 등록 및 학기말 리포트 등의 마감기한을 지키는 것 모두 바리스타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이 프로그램을 공개한 이후, 스타벅스와 아리조나 주립대학 모두 학생 로그인 코드를 건네주고 그저 좋은 결과를 있기를 바라기보다, 학사 과정 전체를 통틀어 온라인 수강생인 바리스타에게 도움을 주고자 발벗고 나서고 있다. 프로그램의 성과가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3~4년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실제로 스타벅스를 창업한 이들은 고든 보커, 제브 시글 그리고 제리 볼드윈으로 1971년 스타벅스를 시작했다. 슐츠가 스타벅스에 합류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워낙 슐츠가 스타벅스의 경영을 맡은 지가 오래되어 그 자신도 마치 자신이 창업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워드 슐츠는 매일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기상해 전날의 매출 보고서를 검토한다. 스타벅스의 브루마스터들이 매년 가을에 나오는 리저브 홀리데이 블렌드(Reserve Holiday Blend)에 에이지드 수마트라를 좀 더 넣도록 하는데, 이는 에이지드 수마트라가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이고 그 맛이 대단히 좋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속 깊이 진심으로 각각의 매장을 마치 자신의 가게처럼 생각하기에, 하워드 슐츠는 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걱정을 금할 수 없다. 최근 열린 직원 회의에서 직원들이 스포티파이와 체결한 새로운 음악 파트너십을 홍보하는 엽서 크기의 카드를 보여주었을 때, 하워드 슐츠는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이건 음악에 대한 파트너십입니다. 뭔가 활기찬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칙칙한 검정 대신 녹색으로 할 수 있을까요?”) ━ 지난 5년간 두 배가 넘는 매출 신장 하지만 만약 최고경영자가 모든 사안에 대해 승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의사결정의 속도는 달팽이 걸음만큼이나 느려질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하워드 슐츠는 최근 외부에서 검증된 다양한 분야의 리더들을 영입해 스타벅스의 경영진을 강화했다. 여기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의 최고운영책임자 케빈 존슨, 그리고 디즈니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전략가인 매트 라이언이 포함된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는? 바로 결코 멈출 줄 모르는 성장 가도를 달리는 스타벅스이다. 스타벅스의 주가는 2015년 48%나 상승했으며, 올해 시가총액은 860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커피를 지속적인 주력상품으로 하는 가운데 식품사업이 계속 확장하며 지난 5년간 두 배가 넘는 매출 신장을 기록하고 있다. (카푸치노와 고대 곡물 플랫브레드로 만든 치킨 아티초크 샌드위치를 곁들이는 것은 어떤가?) 스타벅스 모바일 결제 앱에 가입한 고객의 수가 1600만 명이 넘어서면서 고객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졌다. 잔돈을 거슬러 받느라 기다리는 고객들의 수가 줄어들고 시간당 매출이 증가하며 이에 따라 수익이 상승한다. 스타벅스의 이자와 법인세를 차감하기 전 이익은 19.7%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치폴레나 파네라와 같은 기업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적어도 2018년까지는 연간 1% 정도 스타벅스의 마진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는 월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은 앞으로가 더욱 흥미진진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아무런 문구도 넣지 않은 빨간색 종이컵을 내놓으면서 지난 11월 발생한 소동에서 볼 수 있듯이 심지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조차도 결국 사업에 도움이 된다. 스타벅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매출이 사상 최고의 기록을 경신하는 데 일조했다.때로는 성공적인 아이디어가 하워드 슐츠의 찬성보다는 반대를 이겨내고 나오는 경우가 있다. 2008년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가 녹은 치즈로 만든 아침용 샌드위치의 판매를 중단할 것을 화를 내며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구운 체더 치즈가 갓 내린 커피의 부드러운 아로마를 압도하는 향을 낸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녹은 치즈로 만든 메뉴는 재기에 성공했다. 대신 산미가 높은 큰 덩어리의 체더 대신 중간 정도의 산미를 지닌 보다 잘게 썬 체더 치즈를 화씨 1100도가 아닌 500도에서 구웠다. “하워드를 설득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스타벅스의 제품 개발을 총괄하는 루이지 보니니의 말이다.최근 들어 하워드 슐츠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도전하는 약자라는 자신의 마인드와 잘 들어맞는 동시에 스타벅스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최신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바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사업으로 스타벅스가 큰 야심을 펼치고 있는 수많은 내륙 도시들을 비롯하여 베이징과 상하이를 분기별로 방문하고 있다. 현재 이들 매장에서는 대부분 오후 시간에 차, 프라푸치노 그리고 월병을 판매한다. 하워드 슐츠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머지 않아 중국 역시 커피를 “아침에 마시는 습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현재 스타벅스는 중국에 2000개의 매장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는 5년 전과 비교해 4배 신장한 수치이다. 상하이(432)는 서울과 뉴욕을 제치고 스타벅스 매장이 가장 많은 도시로 등극했다. 하워드 슐츠는 파죽지세로 성장하는 중국의 중산층이 어찌됐건 스타벅스에 수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중국 사업이 확실히 미국보다 더욱 큰 규모가 될 것입니다.” 하워드 슐츠가 지난 1월 애널리스트들에게 한 말이다. 슐츠가 펼치는 또 다른 대규모 프로젝트는 침착한 자세로 고급 커피 시장을 방어하는 것이다. 하워드 슐츠는 소규모 양조장이나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초콜릿 제조사들이 스스로를 미각의 진정한 수호자로 포지셔닝하면서 버드와이저나 허쉬와 같은 대중시장 브랜드가 매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목도했다. 하워드 슐츠는 이처럼 그 누구도 스타벅스를 가로막지 못할 것이라 단언한다. 사실 오늘날 커피업계에서는 필즈(Philz), 블루보틀(Blue Bottle),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 그리고 스텀프타운(Stumptown)과 같은 야심찬 신진기업들이 최고급 원두와 서빙 스타일을 내세우며 각광 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 신생 브랜드는 예를 들어 12온스 들이 쓰리 아프리칸(에티오피아와 콩고산 원두의 블렌딩) 원두를 15달러75센트에 판매하면서 시장의 고급화를 꾀하고 있다. ━ 중국에 2000개 매장 열어 중산층 겨냥 하워드 슐츠는 걱정하지 않는다. 대신 스타벅스 리저브(Starbucks Reseve)라는 독특한 포장백에 담긴, 양은 적으면서도 값은 오히려 더 비싼 원두 제품을 들고 경쟁사에 대항하고 있다. 8.8온스 들이 100%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첼바 원두제품의 가격이 17달러50센트로, 이 제품은 “이국적인, 희귀한, 아름다운”과 같은 기교를 부린 마케팅 문구와 함께 보통 스타벅스 매장에 마련된 전용 진열장에 여타 고급 커피원두 제품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최고급 커피는 극도의 우아함을 자랑하는 시애틀의 로스터리에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다. 하워드 슐츠는 자신의 아이폰으로 낮이건 밤이 건 계속 작업 중인 로스터리의 사진을 찍어 이사회 임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있다. “하워드는 광신자에요.” 스타벅스의 이사인 홉슨의 말이다.스타벅스 이사의 정년은 75세이고, 슐츠에게는 정년까지 13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하워드 슐츠는 2000년과 2007년 사이에 한 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직만 맡으며 시애틀 슈퍼소닉스 농구팀을 소유한다던지 하는 것처럼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린 적이 있다. 그러나 스타벅스의 실적이 저조해지면서 하워드 슐츠는 이 사회의 쿠데타로 최고경영자직에 복귀했다. 그의 말로는 더욱 많이 경청하고 타인에 대해 더욱 많은 인내심을 보이며 이번에는 스스로의 페이스를 더욱 잘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소요되는 에너지, 정력 그리고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젊은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 인정한다. 그렇다 해도 좀 더 스타벅스에 남아있을 계획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하워드 슐츠의 일정을 자세히 검토하면, 하워드 슐츠가 자신이 선을 위한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얼마나 자주 자신을 타인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몰아넣는지 놀라게 된다. 수퍼소닉스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빈 베이커(Vin Baker)가 파산한 후 알코올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슐츠는 베이커가 스타벅스의 경영 프로그램을 통해 매장 관리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사형수 변호사인 브라이언 스티븐슨이 부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 쓴 책 『Just Mercy』를 출간하자,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 매장에서 이 책을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하워드 슐츠는 스티븐슨의 사무실을 방문해 하루는 아침 시간을 알라바마의 교도소에서 거의 30년의 시간을 보낸 후 자유가 된 앤소니 레이 힌튼과 보내기도 했다. “힌튼은 30년 동안 포크를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힌튼을 만난 경험은 내 삶을 바꾸었다.” 하워드 슐츠의 말이다.알라바마의 변호사 스티븐슨이 쓴 책은 몇 달 동안 스타벅스 매장에 진열되었으며 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처럼 강렬한 경험을 하고 난 이후, 사무실 구석에 앉아 거액의 돈을 지출하는 자선 활동을 벌이는 것은 “성취감을 주지 못한다”라고 하워드 슐츠가 말한다. 태풍 카트리나를 기억하는가? 이로부터 3년 후 스타벅스 직원들은 카트리나로 타격을 입은 뉴 올리언스 지역의 재건을 돕기 위해 단체로 봉사활동에 나섰고, 슐츠는 주택 재건축 프로젝트에 나가게 되었다. 현장에서 사다리와 페인트통을 본 슐츠는 아픈 허리를 감싸쥐고 페인트 칠을 도왔다. 하워드 슐츠를 자극하는 원동력은 사회 생활 초년생 당시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위기사태에 대해 갖고 있는 우울한 기억이다. 1980년대 중반 하워드 슐츠는 원두 공급업체를 검사하기 위해 과테말라로 처음 출장을 가게 되었다. 재배업자들은 회사가 지불하는 금액 중 아주 일부만이 자신들에게 돌아온다고 귓속말을 했다. 과테말라의 지급 시스템은 뇌물과 비공개 ‘커미션’으로 얼룩져 있었다. 슐츠는 이에 대해 그 어떤 조치를 취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신출내기이고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아무런 행동에도 나서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까지 슐츠에게 족쇄가 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 슐츠는 1억 달러의 자본을 바탕으로 자신과 아내 쉐리(Sheri)가 관장하는 슐츠가족재단을 통해 점점 더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슐츠는 향후 훨씬 더 많은 자산이 재단으로 투자될 것이라고 말했다. - GEORGE ANDERS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의도는 좋았던 실패 돈키호테처럼 비현실적인, 비실용적인, 시대를 앞선… 수식어를 나열하자면 끊임없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한결같이 동일하다. 억만장자들조차도 공상적인 박애주의를 바탕으로 내세운 대의가 계획한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실패로 끝난 하워드 슐츠의 ‘레이스 투게더’와 같은 프로그램을 벌이고도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억만장자들의 사례를 아래와 같이 살펴보자. 빌 게이츠 공립고등학교의 규모가 작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믿음은 빌 게이츠로 하여금 20억 달러의 재단자본금을 들여 미국 전역에 더 작은 학교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나서게 했다. 2009년 공개된 재단 명의의 서한에서, 빌 게이츠는 “우리가 투자한 학교의 대다수에서 학생들의 성취도가 개선되지 않았다”라고 인정했다. 마크 주커버그 2010년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주커버그는 오랜 동안 실패를 거듭해온 뉴저지주 뉴어크의 학교 시스템을 되살리고자 1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했다. 주커버그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교사들은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고, 컨설턴트들이 난무했으며 학생들은 자금이 바닥난 이후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피터 루이스 작고한 프로그레시브 인슈런스의 피터 루이스 회장은 마리화나 합법을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는 데 4천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피터 루이스 회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뉴질랜드에서 마리화나 소지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2012년 피터 루이스가 사망하기 전 콜로라도와 워싱턴 주에서만 마리화나가 합법화되었다. 조지 소로스 1980년대부터 헤지펀드계의 거인, 조지 소로스는 더욱 개방된 사회를 도모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동유럽 지역에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나의 원대한 계획은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 것 같다.” 조지 소로스는 1991년 내놓은 저서『민주주의의 보증(Underwriting Democracy)』을 통해 유감을 표명하며 실패를 인정했다.

2016.03.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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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인가 자기 잇속 차리기인가

산업 일반

중국은 이전엔 유엔을 무시했다. 1971년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진출한 후 30여 년 동안 대부분 유엔의 평화유지 임무를 승인하는 표결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중국은 그런 임무를 다른 나라의 주권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9월 28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국제 평화유지 임무를 재정비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제문제 개입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신호였다. 반대하기보다 아예 개조하겠다는 뜻이다.시진핑 주석은 앞으로 10년간 유엔 평화발전기금으로 10억 달러를 지원하고, 8000명 규모의 유엔평화유지 신속대응군을 조직하며, 아프리카연합(AU)이 자체 위기관리군을 조직할 수 있도록 5년 동안 1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평화유지군(PKO)으로 활동하는 중국 병력 3000명에 8000명을 추가함으로써 중국은 단번에 세계 최대의 평화유지군 파견국이 됐다(미국은 평화유지 기금을 가장 많이 지원하지만 PKO는 82명만 파견하고 있다).아울러 그는 세계의 평화유지와 인도주의적 개입에 중국이 더 큰 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크고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작고 약하며 가난한 나라를 위협하고 더는 괴롭혀선 안 된다. 고압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나라는 바위를 들어 자기 발에 떨어뜨리는 꼴이 될 것이다.”평화유지 임무 옹호자들은 중국의 제안을 환영했다.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에 관한 유엔 원칙인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R2P)’ 개념의 채택에 중대한 역할을 한 개러스 에번스 전 호주 외무장관은 “중국의 제안이 평화유지 임무가 구현하려는 다자간주의(multilateralism)에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말했다.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지금 중국이 국제적 다자간 합의를 강조하지만 최근 자국 이웃지역에선 공격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지적했다. 현재 중국은 남중국해의 전략적 군도를 두고 일본·필리핀·브루나이·베트남·대만과 치열한 분쟁을 벌이는 동시에 미국과는 재래식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특히 시진핑 주석이 유엔 연설에서 아프리카를 강조한 의도를 두고 즉각적인 우려가 제기됐다. 그는 “국제 지배구조에서 개도국, 특히 아프리카 국가의 더 큰 역할과 영향력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일부는 그 언급을 이타주의보다 자기 잇속 차리기로 해석했다. 아프리카는 유엔 평화유지 임무 16개 중 9개가 진행 중일 뿐 아니라 중국이 원자재 개발과 인프라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이 대규모로 투자한 곳에서 평화를 지킨다는 것은 중국 PKO가 아프리카인만이 아니라 자국의 투자를 보호하는 역할도 맡는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그러나 어느 정도의 이익 챙기기는 유엔 평화유지 임무에서 필수적일지 모른다. 유엔 평화유지의 역사를 보면 PKO가 해당 지역 분쟁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경우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 세계 최대 규모였던 콩고민주공화국의 평화유지 작전(MONUSCO)이 대표적이다. 2012년 11월 콩고 동부의 최대 도시 고마에서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MONUSCO 소속 병력 2만 명이 탱크·헬기·전투기·장갑차로 무장하고 연간 13억 달러의 예산을 쓰며 고작 AK 소총과 로켓추진 수류탄, 구식 탱크 몇 대와 대포 몇 문으로 무장한 반군 1000명과 대치했다.반군 탱크가 고마로 포 1발을 발사하자 MONUSCO 병력은 곧바로 꽁무니를 뺐다. 그들은 보호해야 할 주민을 버리고 기지로 퇴각하거나 아예 고마를 떠났다. M23으로 불리던 반군은 그 탱크 포 1발만으로 고마를 점령했다. 저녁이 되자 유엔 기지 앞에 군중이 모여들어 남아 있는 평화유지군에게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으니 그냥 떠나라.”2007∼2010년 MONUSCO 사령관을 지냈고 현재 코피 아난 재단 사무총장인 앨런 도스는 그 퇴각을 두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돌이켰다. 당시 현장에서 우루과이군 소속 유엔군 장교는 뉴스위크 특파원에게 그 이유는 간단하다고 말했다. “고향에 아내와 아들이 있다. 부하들도 가족이 있다. 나도 나가 싸우고 싶지만 안전이 우선이다. 우리 모두에게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그는 평화유지의 고매한 설계에 내재된 커다란 결함을 솔직히 표현했다.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현지 주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파견된 군인은 대개 의욕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콩고에 주둔한 우루과이 군인에겐 그 장교가 말한 ‘우리 모두’에 콩고인은 포함되지 않았다.올해 유엔은 남수단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학살을 막지 못했다. 잇따른 평화유지 실패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평화유지 임무의 전면적 재검토를 촉구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뉴욕에서 그와 관련한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유엔과 미국의 제안은 더 많은 인력과 자금의 동원을 촉구하는 반면 중국의 제안은 합법적인 국제 군사행동 전반의 개혁에 초점을 맞춘다.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은 2005년 이래 공식적으로 R2P를 원칙으로 삼는다. R2P 찬성 진영은 모든 정부와 국제기구가 지켜야 할 보편적 인권 기준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 국가가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를 막을 수 없거나 막을 의사가 없을 경우 국제사회가 그 나라의 주권을 무시하고 군사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이다.그러나 중국 정부를 포함한 반대 진영은 R2P가 지향하는 보편주의는 ‘신기루’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를 들어 미국의 각 주마다 사형제도에 관한 입장이 다른 것처럼 국가 간에서도 공통으로 인정되는 인권 기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견해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시진핑 주석은 유엔 연설에서 “어떤 문명도 다른 문명보다 우월하지 않다”며 “각 문명은 고유한 비전과 인적 기여를 표방한다”고 말했다. 또 중국은 R2P가 강대국의 생각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데 사용돼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R2P는 2011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군을 상대로 한 나토의 공격, 2008년과 지난해 조지아를 공격한 러시아의 군사행동 등 무력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됐다. 그런 맥락에서 만약 유엔 평화유지군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면 지금까지 대부분 그랬듯이 강대국이나 호전적인 이웃나라가 먼저 개입한 다음 뒤처리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논리다.중국은 그런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듯하다. 시진핑 주석은 유엔 연설에서 아프리카 국가처럼 가난하고 힘이 약한 나라가 강대국의 변덕에 제물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국의 목표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영구적인 AU 국제위기관리군 창설에 자금을 대겠다는 것이다.그 모델이 기존의 ‘아프리카연합 소말리아평화유지군(AMISOM)’이다. 유엔과는 아주 다른 형태의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며 성과도 더 낫다. 병력이 2만2000명으로 MONUSCO보다 많지만 비용은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연간 9500만 달러다.유엔의 권한을 위임 받아 작전을 수행하지만 훨씬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평화 유지뿐만 아니라 알카에다와 연계된 극단주의 단체 알샤바브 등 전쟁 행위를 일삼는 세력을 제거한다.예를 들어 AMISOM은 유엔과 미국이 20년 동안 실패한 소말리아에서 알샤바브 게릴라 수천 명을 사살하고 그들을 수도 모가디슈에서 쫓아냈다. 그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황폐화한 도시 모가디슈가 놀랍게 되살아나는 중이다. 부동산에 수억 달러가 투자되고 가축과 과일 수출이 급증하면서 소말리아 정부는 올해 6% 성장을 예상한다.그 비결이 뭘까? AMISOM이 피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사망한 AMISOM 병력이 1000∼3000명으로 추정된다. 코피 아난 재단의 도스 사무총장은 “그 정도 사상자라면 유엔에선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AMISOM에 참여한 우간다·에티오피아·케냐·지부티는 모두 알샤바브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대가를 치를 각오가 돼 있다.회의론자는 중국이 그런 공격적인 평화유지를 대규모로 지원할 경우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국의 소프트파워를 행사하게 된다고 걱정할 듯하다. 아울러 인도주의자는 평화유지군의 전통적인 중립성이 손상될 수 있다고 우려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아프리카 보호 책임을 아프리카인에게 되돌려 준다는 발상은 갈수록 유엔에 실망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아프리카인의 정서에 부응한다. 아무튼 아프리카의 새로운 평화유지 임무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ALEX PERRY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2015.10.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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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OR IN PARIS | 관용의 역설

산업 일반

파리의 테러 공격 후 프랑스는 범국가적으로 톨레랑스(관용, tolerance)과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일부 프랑스인은 그에 대한 반발로 바로 그런 가치가 손상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급진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들이 1월 7일 파리의 잡지사 샤를리 엡도 사무실, 이틀 뒤인 9일 유대인 슈퍼마켓을 공격한 뒤 프랑스인 수백만 명은 11일 프랑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반무슬림 담론이 프랑스 정치에 더 깊이 파고들면서 그런 연대감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박사 과정 학생인 아리안 르보(26)는 “일부는 인종차별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이번 사태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무슬림은 프랑스 인구의 약 8%를 차지한다. 그중 일부는 이슬람 사원에 갔다가 공격당한다.” 샤를리 엡도와 유대인 슈퍼마켓 테러 이후 반무슬림 폭력사태가 빈발하는 사태를 지적한 이야기다. 프랑스 무슬림협회에 따르면 지난주 무슬림에 대한 공격이 최소 50건이나 발생했다.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는 파리 테러 직후 이민 규제를 재차 촉구했다. 지난해 봄 프랑스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FN이 1위를 기록하면서 르펜의 지지도가 치솟았다. 현재 그녀의 지지도는 올랑드 대통령의 두 배다. 또 그녀는 테러 공격 직후 사형제도를 부활하라고 촉구했다. 대학생 아르투르 부아텐(22)은 “불행하게도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겁먹고 테러리스트와 무슬림을 혼동하면서 특정 유형의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정책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론 이민을 엄격히 규제하는 쪽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FN은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인 4분의 1의 지지를 받았지만 르펜은 지난 11일 세계와 프랑스 지도자들이 참석한 행진에는 초청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 행진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했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르펜의 반무슬림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 프랑스인도 테러 공격 후 프랑스가 공공 공간에서 종교를 다루는 방식(기본적으로 종교를 못 본 척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파리 교외에 사는 심리학자 마리 에덴은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이들이 특정 종교에 급진적으로 빠져들거나 프랑스 또는 해외에서 교화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 이건 교육의 문제다.”프랑스의 ‘공화국 가치’로 알려진 ‘자유(liberté), 평등(egalité), 박애(fraternité)’와 표현의 자유를 잘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문제도 제기됐다. ‘특정 부류의 사람은 프랑스에 와서는 안 된다’는 르펜의 메시지가 바로 그런 정서를 부추긴다.에덴은 “이민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가난한 구역이다. 공화국과 프랑스의 가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오는 것을 우리가 도와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하고 우리가 다가가려고 하면 거부한다.”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11일 행진에 참여한 한 가족은 거의 반 세기 전 이집트에서 파리로 이민했다. ‘이집트는 테러에 반대한다’는 표지판을 든 그들은 프랑스에선 괴롭힘당할 걱정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민자보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합류했다가 귀국한 프랑스인이 더 걱정이라는 시각도 있다. 화가인 토마스 부장케(24)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파리에서 테러를 일으킨 3명은 전부 프랑스인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그들은 문화가 풍요롭고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파리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성장했다. 그런데도 결국 테러리스트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중동의 전쟁터에서 성전을 벌이고 돌아오는 프랑스인을 무조건 추방하거나 탄압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그들이 왜 그곳에 가서 성전에 참여했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프랑스인 수백만 명이 개선문에서 나시옹 광장까지 파리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행진은 프랑스에선 전례 없는 일이었다. 파리에서 시위는 잦지만 하나의 목적 아래 뭉치거나 그토록 평화롭게 진행되는 시위는 거의 없다. 또 그렇게 대규모 시위도 없었다.레퓌블리크 광장의 카페에 앉아 있던 부장케와 그의 친구 아르투르 랑보(22)는 바로 그런 연대감을 자랑스러워하며 혹시나 그런 연대감이 사라질까 걱정했다. 그날 처음 “자유란 매일 매일 노력해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와인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자유를 위하여!”- 번역 이원기

2015.01.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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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scope BETTER WORLD - 좋은 세상 만드는 5가지 아이디어

산업 일반

음악으로 독해력 향상시킨다시인들은 그 동안 내내 알고 있던 사실이 이제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다. 언어와 학습 그리고 음악, 더 구체적으로 리듬 간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노스웨스턴대 청각신경학 연구소의 니나 크라우스 연구팀이 요즘 그 현상을 좀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은 음악강습이 여러 다양한 두뇌기능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의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그들의 최신 연구는 특히 리듬·음성인식·독해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십대 청소년 100명을 불러모아 그들의 머리 전체에 뇌파를 측정하는 전선을 부착했다. 그 다음 메트로놈의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두드리도록 했다. 그 실험에서 음악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박자를 더 잘 맞출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신경 반응이 더 우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역으로 독해력이 떨어지는 청소년은 일정하게 박자를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향을 보였다.크라우스는 음악교육을 통해 독해력 약한 청소년들이 집중력을 유지하고 의미를 더 쉽게 파악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때마침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스파티파이도 별도 보고서를 발표했다. 공부할 때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면(수학에는 클래식, 인문학에는 록음악) 집중력과 성적이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응원의 박수를 치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다. 속 빈 강정 된 브릭스골드먼삭스의 한 경제전문가가 창안한 이른바 브릭스라는 개념에 금융계(그리고 정계)의 이목이 집중된 지 12년이 흘렀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덩치 큰 신흥국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막대한 인구·영토·천연자원을 가진 이들 신흥국이 21세기의 글로벌 대국이 되리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브릭스 지도자들도 그 이론을 당연시하는 듯했다.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자신들끼리의 교역으로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 시장 의존까지 대신할 수 있는 양 행동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허황된 기대였음이 드러났다. 4개국 모두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중국은 한창때의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브라질은 미국보다 낮다. 러시아와 인도도 크게 뒤떨어졌다. 이들도 자신들의 과대선전을 더는 믿지 않는다고 파울로 소테로 우드로 윌슨 센터 브라질 연구소 대표가 말했다.브라질의 전통 기성체제는 “그 분류를 공통분모가 거의 없는 나라들의 대체로 별 볼 일 없는 포럼으로 간주한다”고 CNN 웹사이트에 썼다. 한편 열성팬들은 브릭스 개념을 국제적인 PR에 주로 사용한 듯하다. 폭력의 쇠퇴하버드대의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수 편의 베스트셀러 저서를 내고 TV 토크쇼 ‘콜베어 리포트’에 가끔씩 출연해 유명해졌다. 그 만능 스타가 우리에게 세상은 안전하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또는 적어도 테러·전쟁·범죄와 관련된 온갖 뉴스를 보고 우리가 갖는 느낌보다 더 안전하다고 말이다. 2011년의 저서 ‘인간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 왜 폭력이 감소하는가’에서 핑커는 인간이 서로를 학살하고 강간하고 고문하는 비율이 지난 수세기 사이 크게 감소했음을 보여줬다.20세기의 전쟁과 대학살보다 고대 부족전쟁의 사망률이 9배는 더 높았다고 핑커는 주장한다(물론 이는 어느 정도 비율의 문제다.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사망자 절대치가 급증했다). 아주 많은 사회가 폭력을 거부하고, 교전규칙을 정하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고문을 법으로 금하고, 사형제를 폐지한다.이제 핑커는 우리 안의 어떤 요인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중차대한 의문을 탐구한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레베카 뉴버거 골드스타인과 머리를 맞댔다. 핑커와 골드스타인은 지난 여름 산타페 연구소의 한 강연에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야만성이 감소한 건 우리의 마음과 양심이 진화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이성이 승리했기 때문일까? 정답은 ‘양쪽 모두’이다. 전력을 생산하는 미생물시궁창 물 속에서든 농지의 비료가 바다로 유입돼 산소를 빨아들이는 ‘산소 결핍 해역’이든 상관 없다. 가장 어둡고 축축하고 역겨운 오물 속에서도 특정한 박테리아는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성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전력까지 생산한다.이른바 이들 외기전성 미생물들은 가령 산화철 같은 산화물이 함유된 광물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산소를 얻어낸다. 어떻게 보면 녹을 호흡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전자를 발생시킨다. 많은 과학자가 이 과정을 유용한 발전 수단으로 바꾸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스탠퍼드 대학에서 몇몇 유망한 연구가 이뤄졌다. 엔지니어들이 전류 전도성을 가진 작은 탄소 필라멘트에 이들 미생물 군집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탁한 물병처럼 보이는 그 발명품을 미생물 전지로 부른다. 그 공정을 통해 하수구와 ‘산소결핍 해역’에 저장된 에너지의 30~50% 가까이를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공학자들이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에서 밝힌 내용이다. 의심할 바 없이 냄새 나는 일이지만 이 미생물들에겐 가능한 일이다. 다람쥐 눈으로 보는 세상다람쥐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사물이 훨씬 더 클 뿐 아니라 느리게 보인다. 학술지 ‘동물행동’에 실린 새 연구 결과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연구팀이 고속 섬광촬영 조명을 이용해 이른바 ‘임계점멸융합빈도’를 규명했다.고속으로 깜빡이는 조명과 계속되는 조명 간의 차이를 눈이 식별할 수 있는 한계 속도를 가리킨다. 그들은 다람쥐처럼 신진대사가 빠른 작은 동물들은 대단히 빠르고 세밀하게 시각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매의 그림자가 눈에 띄는 순간 자신을 움켜잡으려는 발톱을 피해가는 능력에 그들의 생사가 걸려 있다. 그 연구는 사람들간의 차이도 보여준다. 젊은이와 운동선수들은 고령자와 비활동적인 사람들보다 반응이 빠르다. 젊고 활동적인 레이스카 포뮬라원 레이서와 전투기 조종사들이 이미 그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보고서 공동작성자 앤드류 잭슨은 말한다. 그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컴퓨터, 약물 또는 일종의 임플란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잭슨이 BBC에 말했다. 그런 뒤에도 그들의 두뇌가 시각정보를 얼마나 빨리 소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2013.10.0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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