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찾는 한국인의 발걸음이 뚜렷하게 늘고 있다. 팬데믹 기간 억눌렸던 이동이 회복된 2024년, 한국의 해외 출국자는 2868만명으로 코로나19 이전 수준에 근접했다. 그중에서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향하는 수요는 한층 강화되는 추세다. 스페인은 2024년 약 94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며 전년 대비 약 10% 증가했고, 아시아 시장 중에서도 한국의 증가 폭이 두드러졌다. 포르투갈 역시 한국발 수요가 숙박 기준 32.6%, 방문자 기준 34.3% 증가하며 시장 규모 대비 성장률이 특히 높은 국가로 기록됐다.스페인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중심의 여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면, 포르투갈은 상대적으로 생소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물가, 비교적 양호한 치안, 친절한 현지 문화 등을 기반으로 포르투갈은 빠르게 매력도를 높여가고 있다. 포르투갈 전역은 물론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마데이라 섬까지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이 넓게 분포해 있다는 점도 여행지 선택의 폭을 넓히는 요소다. 최근 리스본 직항 노선이 개설된 것 역시 이러한 관심 확대의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본 글은 포르투(Porto), 도우루(Douro), 비뇨 베르드(Vinho Verde)를 중심으로 포르투갈 북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와인 산업과 관광 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포르투의 재해석, 포트와인 저장고에서 체험지대로포르투 도심에 도착하면 먼저 마주하는 풍경은 강 건너편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다. 포트 와인의 이름은 포르투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제 숙성과 저장 시설은 기류와 습도 관리에 유리한 강 건너편에 자리해 왔다. 이는 역사적으로 효율적인 숙성과 선적을 위한 산업적 전략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적 포트 하우스들의 중심지로 유지되고 있다. 최근 가이아 일대는 단순 저장 시설을 넘어 ‘와인 산업의 기억·데이터·체험’을 결합하는 복합 지대로 확장되는 중이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2020년 문을 연 복합 문화 단지 ‘WOW’(World of Wine)다. 약 5만5000㎡ 규모의 이 공간에는 와인 박물관·전시관·테이스팅룸·교육 시설·상점·레스토랑·호텔까지 집약돼 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품종·기후·토양·양조·숙성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도록 설계된 일종의 ‘와인 아카데미 단지’에 가깝다.
포트와인의 유산을 기반으로 한 숙박 모델도 포르투의 매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최근 문을 연 ‘티볼리 코프케 포르투 가이아’(Tivoli Kopke Porto Gaia) 호텔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시설은 오래된 코프케(Kopke) 저장창고의 상부에 신축된 구조로,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와인 산업의 시간적 자산을 공간적으로 재조합한다. 와이너리 창립 연도인 1638년을 식당 이름에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은 브랜드 유산을 현대적 서비스 경험에 직접 연결하려는 명확한 전략이다. 지하 셀러에는 포트 와인의 숙성고가 그대로 보존돼 있어 방문객에게 ‘살아 있는 저장고’라는 인상을 준다. 포트 와인을 처음 접하는 여행자에게 이곳은 단일 호텔 체험을 넘어, 도시가 와인을 기반으로 산업·역사·관광을 어떻게 결합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교육적 통로가 된다. 유산을 경제적 자원으로 전환하는 포르투의 방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포르투가 유산을 체험 산업으로 확장하는 또 다른 방식은 미식과 와인을 통합한 축제를 통해서다. 대표적으로 매년 열리는 ‘ALIVE TASTE’가 있다. 이 행사는 포르투갈 주요 와이너리와 셰프들을 한 공간에 모아, 국가의 와인 생산 체계와 식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사례 모두 단순 관광자원이 아니라, 도시가 와인 산업의 역사와 현대적 소비 패턴을 어떻게 엮어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략적 인프라라는 사실이다. 숙박은 유산을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축제는 생산자·셰프·소비자를 연결하는 시장의 중간지대로 작동한다. 포르투가 최근 수년간 해외 방문객 증가와 함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진 배경에는 이러한 유산 기반 체험 산업이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자리한다.새롭게 도약하는 포르투갈 북부 와인도심을 벗어나 도우루 계곡으로 들어서면 브랜딩 이전의 ‘생산지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진다. 가파른 테라스형 포도밭이 이어지는 이곳은 여름 기온이 40도 이상까지 치솟고 겨울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극단적인 일교차를 보인다.
도우루는 수 세기 동안 포트 와인의 원료 산지로 기능해 왔으나, 최근에는 드라이 와인이 독자적인 장르로 성장하고 있다. ▲투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 ▲투리가 프랑카(Touriga Franca) ▲틴타 로리스(Tinta Roriz)가 주요 적포도 품종이며, ▲말바시아 피나(Malvasia Fina) ▲라비가투(Rabigato) ▲비오지뉴(Viosinho) ▲고베이오(Gouveio)는 화이트 와인의 기반을 이룬다.도우루에는 생산과 체험을 결합한 숙박형 와이너리도 늘고 있다. 퀸타 두 벤토젤루(Quinta do Ventozelo)는 대표적 사례로, 도우루의 극적인 경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해 지질·기후·경관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설계된 공간이다. 많은 와인 전문가들이 이곳을 ‘도우루를 가장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소’로 언급하는 이유다.포르투갈 화이트 와인의 핵심 산지인 비뇨 베르드(Vinho Verde)는 동일한 이름의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대서양 기후의 영향 아래 높은 산도와 경쾌한 스타일이 특징이다. 주요 품종은 ▲알바리뉴(Alvarinho) ▲로레이루(Loureiro) ▲아베쑤(Avesso)로, 각 품종은 지역의 미세한 기후 차이를 반영한다. 비뇨 베르드를 이야기할 때 ‘스타 양조가’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지역의 정체성을 국제 시장에 각인시킨 대표 인물은 소알레이루(Soalheiro)의 루이스 세르데이라(Luís Cerdeira)다. 그는 2024년 회사를 떠나 아들 마누엘과 새로운 프로젝트 ‘Vinevinu’를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동일 품종이라도 해안과의 거리, 고도, 경사 등 미세한 지형적 요소가 와인의 구조와 질감을 어떻게 달리 만드는지를 실험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다. 이는 비뇨 베르드가 ‘가벼운 화이트’라는 통념을 넘어, 테루아 해석에 따라 충분히 구조적이고 개성 있는 와인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포트 와인: 전통적 제조 방식에서 현대적 소비까지포르투갈의 상징과도 같은 포트 와인에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주정 강화 와인은 17세기 도우루에서 영국으로 와인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발효가 중단된 상태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증류주를 첨가하면서 탄생했다. 알코올 도수가 약 15%에 이르면 발효가 중단되기 때문에 포도에 남아 있던 자연 당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최종 알코올 도수는 19~22%까지 올라간다. 그 결과 단맛, 구조, 알코올이 균형을 이루는 독특한 스타일이 완성된다.숙성 방식에 따라 포트 와인은 크게 루비(Ruby)와 토니(Tawny)로 구분된다. 루비는 대형 탱크에서 비교적 짧게 숙성돼 신선한 과실 향이 중심을 이루고, 토니는 소형 오크 캐스크에서 장기 산화 숙성을 거쳐 견과류, 카라멜, 말린 과일의 풍미가 층위를 이룬다. 샴페인의 밀레짐처럼 가장 뛰어난 작황에만 생산되는 빈티지 포트(Vintage Port)는 단일 연도의 포도로 양조해 병 속에서 오랜 세월 숙성되며 ‘포트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반면 LBV(Late Bottled Vintage)는 단일 빈티지를 4~6년간 오크에서 숙성한 후 병입하는 방식으로, 빈티지 포트보다 접근성이 높아 시장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다양한 백포도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포트(White Port)가 칵테일 시장과 만나며 소비층을 새롭게 확장하고 있다.포르투에서 도우루, 비뇨 베르드로 이어지는 북부 와인 벨트는 이제 관광 자원이 아니라 하나의 산업 전략으로 작동하고 있다. 저장고는 체험 시설로 재편되고, 생산지는 숙박과 교육 기능을 흡수하며, 포트 와인은 전통 소비층을 넘어 시장을 넓히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신규 수요의 증가는 이러한 변화에 분명한 상업적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지역 생산자들 역시 이에 맞춰 제품군, 경험 프로그램, 관광 인프라를 재정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확장이 단순한 방문객 증가에 그치지 않고, 와인 산업 전반의 가치사슬인 생산, 브랜딩, 유통, 체험이 동시에 고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르투갈 북부는 이 구조적 전환의 전면에 서 있으며, 향후 수년간 아시아 수요를 포함한 외부 시장과의 연계가 지역 경제에 어떤 형태의 장기적 이익을 가져올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홍미연 씨엠비 와인앤스피리츠 C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