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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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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렉스 좀비들

산업 일반

영화를 상영관이 아닌 홈비디오 시장으로 바로 내놓는 디렉트-투-비디오(direct-to-video) 사업모델은 퇴물 연예인들이나 하는 것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아담 샌들러를 위시한 배우 및 코미디언들을 위주로 스트리밍을 통해 자신의 영화나 영상을 열혈팬들에게 바로 제공하는 사업모델이 부흥하는 추세이다.2006년도 영화 에서, 주인공 아담 샌들러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만능 리모콘을 찾아낸다. 이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오늘날, 리모콘은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아담 샌들러에게 충격적일만큼 거액의 수입을 창출해주고 있다. 지난 12개월 동안, 아담 샌들러의 추정수입액은 5050만 달러(35위)로, 이는 아담 샌들러를 보고 싶어하는 핵심 시청자층이 예술영화관을 찾는 영화팬들이라기보다는 집에서 비디오를 시청하는,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 집에서 코미디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는 점을 간파한 넷플릭스와 체결한 계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는 과거 홈비디오 채널 전용으로 영화를 제작해 판매하던 방식에서 좀 더 업데이트된 사업모델로, 좀 더 광범위하고 충성도가 낮은 팬들에게 어필하기보다 충성도가 굉장히 높은 팬층을 거느린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넷플릭스는 아담 샌들러에게 영화 한 편당 대략 6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있다. 작년 매출 88억 달러를 기록한 넷플릭스(한편 시청자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유출하고 있지 않다)는 지난 4월 발표를 통해 2015년 12월 이래 넷플릭스 회원들이 아담 샌들러의 영화를 시청한 시간이 5억 시간을 상회한다고 말했으며, 이는 회원 1명당 아담 샌들러의 영화를 본 시간이 평균 5시간이라는 말이다. ━ 아담 샌들러에게 영화 한 편당 6000만 달러 지불 순위에 오른 코미디언 중 최고의 수입액을 기록한 주인공은 제리 사인펠트(18위·6900만 달러)로, 이는 주로 훌루와 넷플릭스 덕분이다. 훌루는 제리 사인펠트의 이름을 딴 시트콤 시리즈에 대한 스트리밍 판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신디케이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있고, 내부 소식통의 말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경우 제리 사인펠트가 출연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쇼 1편 당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HBO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11년의 공백 끝에 ‘파워 셀레브리티 100’ 순위에 복귀한 데이브 샤펠(43위·4700만 달러)은 세 편의 특집방송을 찍으면서 시간당 2000만 달러의 수입을 챙겼다. 크리스 록(30위·5700만 달러)는 스탠드업 코미디 특집방송 2편으로 편당 2000만 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8년 마지막으로 출연한 HBO의 ‘킬 더 메신저(Kill the Messenger)’에서 벌어들인 수액의 4배에 이른다. 이마케터의 수석비디오애널리스트 폴 버나는 코미디 특집 방송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케이블 방송의 유료회원을 끌어들이는 동인이었다면, 이는 스트리밍 방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스트리밍 방송은 DVD와 홈엔터테인먼트 시장이 붕괴하면서 생긴 공백을 채우고 있다. 원래 DVD와 홈엔터테인먼트 시장은 영화관 수입의 두 배 가까운 매출을 올렸으나, 시장이 무너지면서 현재는 사라져버린 블록버스터는 말할 것도 없고 파라마운트와 같은 영화사의 수입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아담 샌들러처럼 열혈팬이 존재하는 배우들에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추었다. 사실 아담 샌들러의 미국 국내 박스오피스 성적은 실망스러운 기록이 계속되었다. (2012년)는 7000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되었으나 미국 시장에서 369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두는 데 그쳤고, 는 4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소요되었으나, 내수 시장에서 겨우 4630만 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 하지만 홈비디오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아담 샌들러는 거의 상영관에 필적하는 규모의 꽤 큰 시청자 층을 거느리고 있다. 는 DVD와 블루레이 판매액 185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전작과 달리 아담 샌들러가 빠지고 제작된 가 영화관에서는 와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DVD 및 블루레이 판매액에서는 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금액을 기록한 것과 대조된다. “만약 DVD 판매과 대여가 건재하다면, 아담 샌들러 공화국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겁니다. 설사 이들 시청자가 아담 샌들러의 영화를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건전하지는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해도 말이지.” 콤스코어에서 수석미디어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폴 더가라베디언의 말이다. 넷플릭스를 살펴보자. 2014년 아담 샌들러는 2억500만 달러 규모로 추정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에 따르면 아담 샌들러는 넷플릭스 전용 영화 4편을 찍을 것이며 그 내용은 최대한 우스꽝스러워야 한다. “스트리밍을 시작해 보자구요!” 당시 기자회견에서 기자들과 거의 말하는 법이 없고 위 계약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절한 아담 샌들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화비평가들의 의견에 아랑곳하지않는 아담 샌들러의 시청자들은 팬심을 보여주었다. 계약에 따라 최초로 제작된 영화 (2015년)는 평론가들로부터 “차마 보기 힘든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영화평론웹사이트인 로튼 로마토에서 평론점수 0을 기록했으나, 넷플릭스에 따르면 방영 첫 달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 브래드 피트도 고수익의 스트리밍 시장에 진입 근래 들어서는 평론가들이 사랑하는 브래드 피트와 같은 배우마저도 고수익의 스트리밍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브래드 피트는 넷플릭스가 최근 내놓은 풍자전투영화 에 출연하면서 2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스트리밍 시장의 수혜를 입고 있는 헐리우드의 스타배우들이 있다. 한 예로 넷플릭스는 영화 를 제작하는 데 9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는데, 정보에 따르면 이 중 출연 배우인 윌 스미스가 챙기는 수입료는 3000만 달러 가량이 될 것이라 한다. 포브스의 ‘파워 셀레브리티 100’ 순위에 오른 코미디언들 역시 스트리밍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크리스 록이 거액의 출연료를 받은 이후, 루이스 C. K.(34위, 5200만 달러)와 에이미 슈머(69위·3750만 달러)도 자신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판권료로 수천만 달러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한편 넷플릭스는 비슷한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네 편의 영화를 추가로 제작하면서 아담 샌들러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올해 넷플릭스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계획하고 있는 투자액인 60억 달러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이 금액의 대부분은 이미 제작된 콘텐트의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데 투자될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은 넷플릭스가 이같은 규모의 지출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넷플릭스의 주가는 지난 12개월 동안 무려 65%나 치솟았으며 시가총액은 블록버스터가 전성기에 기록한 금액의 13배를 상회하는 711억 달러에 이른다. 아담 샌들러와 동료 코미디언들은 홈비디오 시장 덕분에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METHODOLOGY파워 셀레브리티 100 순위는 2016년 6월1일에서 2017년 6월1일의 기간 동안 ‘카메라 앞에 서는’ 전세계 엔터테이너들이 벌어들이는 세전수익(대행사, 변호사 및 매니저 수수료 공제 전)을 기준으로 산정되었다. 수치는 산업계 전문가 및 상당수 스타들과 직접 진행한 인터뷰 그리고 IMDB, 닐슨 및 폴스타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했다. ━ POWER CELEBRITY 100 1 디디 | 가수 미국 1억3000만 달러 2 비욘세 | 가수 미국 1억500만 달러 3 J.K.롤링 | 작가 영국 9500만 달러 4 드레이크 | 가수 캐나다 9400만 달러 5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축구선수 포르투갈 9300만 달러 6 더 위켄드 | 가수 캐나다 9200만 달러 7 하워드 스턴 | 라디오 진행자 미국 9000만 달러 8 콜드플레이 | 가수 영국 8800만 달러 9 제임스 패터슨 | 작가 미국 8700만 달러 10 르브론 제임스 | 농구선수 미국 8600만 달러 11 러시 림보 라디오 진행자 미국 8400만 달러 11 건즈앤로지스 | 가수 미국 8400만 달러 13 저스틴 비버 | 가수 캐나다 8350만 달러 14 리오넬 메시 | 축구선수 아르헨티나 8000만 달러 15 닥터 필 맥그로 | 유명 심리학자 미국 7900만 달러 16 엘렌 드제너러스 | 방송인 미국 7700만 달러 17 브루스 스프링스틴 | 가수 미국 7500만 달러 18 아델 | 가수 영국 6900만 달러 18 제리 사인펠트 | 코미디언 미국 6900만 달러 20 마크 월벅 | 배우 미국 6800만 달러 21 메탈리카 | 가수 미국 6650만 달러 22 드웨인 존슨 | 배우 미국 6500만 달러 23 로저 페더러 | 테니스선수 스위스 6400만 달러 24 데이비드 카퍼필드 | 마술사 미국 6150만 달러 25 케빈 듀란트 | 농구선수 미국 6060만 달러 26 가스 브룩스 | 가수 미국 6000만 달러 26 엘튼 존 | 가수 영국 6000만 달러 26 고든 램지 | 요리사 영국 6000만 달러 29 라이언 시크레스트 | 라디오 진행자 미국 5800만 달러 30 크리스 록 | 코미디언 미국 5700만 달러 31 빈 디젤 | 배우 미국 5450만 달러 32 폴 매카트니 | 가수 영국 5400만 달러 32 레드 핫 칠리 페퍼스 | 가수 미국 5400만 달러 34 루이스 C.K. | 코미 미국 5200만 달러 35 지미 버핏 | 가수 미국 5050만 달러 35 아담 샌들러 | 배우 미국 5050만 달러 37 앤드류 럭 | 미식축구선수 미국 5000만 달러 37 로리 맥길로이 | 골프선수 영국 5000만 달러 39 성룡 | 배우 중국 4900만 달러 40 캘빈 해리스 | 가수 영국 4850만 달러 41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 배우 미국 4800만 달러 42 스테판 커리 | 농구선수 미국 4730만 달러 43 데이브 샤펠 | 코미디언 미국 4700만 달러 43 주디 셰인들린 | 판사 미국 4700만 달러 45 제임스 하든 | 농구선수 미국 4660만 달러 46 루이스 해밀턴 | 카레이서 영국 4600만 달러 47 킴 카다시안 | 모델 미국 4550만 달러 48 드류 브리스 | 미식축구선수 미국 4530만 달러 49 테일러 스위프트 | 가수 미국 4400만 달러 50 시몬 코웰 | 방송인 영국 4350만 달러 50 필 미켈슨 | 골프선수 미국 4350만 달러 52 톰 크루즈 | 배우 미국 4300만 달러 53 케니 체스니 | 가수 미국 4250만 달러 53 스티브 하비 | 방송인 미국 4250만 달러 55 루크 브라이언 | 가수 미국 4200만 달러 55 셀린 디옹 | 가수 캐나다 4200만 달러 55 제이 지 | 가수 미국 4200만 달러 58 소피아 버가라 | 배우 콜롬비아 4150만 달러 59 카일리 제너 | 모델 미국 4100만 달러 60 브루노 마스 | 가수 미국 3900만 달러 60 티에스토 | 가수 네덜란드 3900만 달러 62 러셀 웨스트브룩 | 농구선수 미국 3860만 달러 63 세바스찬 베텔 | 카레이서 독일 3850만 달러 64 데미안 릴라드 | 농구선수 미국 3840만 달러 65 더 체인스모커스 | 가수 미국 3800만 달러 65 샤룩 칸 | 배우 인도 3800만 달러 65 제니퍼 로페즈 | 가수 미국 3800만 달러 68 노박 조코비치 | 테니스선수 세르비아 3760만 달러 69 에이미 슈머 | 코미디언 미국 3750만 달러 70 타이거 우즈 | 골프선수 미국 3710만 달러 71 살만 칸 | 배우 인도 3700만 달러 71 네이마르 | 축구선수 브라질 3700만 달러 71 빌 오라일리 | 방송인 미국 3700만 달러 71 돌리 파튼 | 가수 미국 3700만 달러 71 에드 시런 | 가수 영국 3700만 달러 76 드웨인 웨이드 | 농구선수 미국 3620만 달러 77 페르난도 알론소 | 카레이서 스페인 3600만 달러 77 숀 해니티 | 방송인 미국 3600만 달러 77 리하나 | 가수 바바도스 3600만 달러 80 본 조비 | 가수 미국 3550만 달러 80 악쉐이 쿠마르 | 배우 인도 3550만 달러 82 빌리 조엘 | 가수 미국 3500만 달러 83 닥터 드레 | 가수 미국 3450만 달러 83 플로리다 조지아 라인 | 가수 미국 3450만 달러 83 토비 키스 | 가수 미국 3450만 달러 83 조던 스피스 | 골프선수 미국 3450만 달러 87 데릭 로즈 | 농구선수 미국 3430만 달러 88 우사인 볼트 | 육상선수 자메이카 3420만 달러 89 가레스 베일 | 축구선수 영국 3400만 달러 89 코너 맥그리거 | 이종격투기선수 아일랜드 3400만 달러 89 브리트니 스피어스 | 가수 미국 3400만 달러 92 니시코리 케이 | 테니스선수 일본 3390만 달러 93 플레처 콕스 | 미식축구선수 미국 3340만 달러 94 클레이튼 커쇼 | 야구선수 미국 3330만 달러 95 찬스 더 래퍼 | 가수 미국 3300만 달러 95 케이티 페리 | 가수 미국 3300만 달러 97 카멜로 앤서니 | 농구선수 미국 3260만 달러 98 제이슨 알딘 | 가수 미국 3250만 달러 98 케빈 하트 | 코미디언 미국 3250만 달러 100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 축구선수 스웨덴 3200만 달러 - NATALIE ROBEHMED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017.07.25 12:08

8분 소요
더 늦기 전에 스릴 만끽하자

산업 일반

하와이 오아후의 파도타기부터 에베레스트의 베이스캠프까지 스포츠 버킷 리스트 8선어느 스포츠팬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우리가 숨쉬는 횟수가 아니라 숨을 죽일 정도로 멋진 장소와 순간으로 평가된다.” 사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확실히 스포츠팬인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역사적인 경기를 관람하거나 유서 깊은 경기장을 방문하는 스릴이 인생의 의미에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안다.우리 같은 스포츠팬은 스릴을 즐긴다. 또 우린 추억를 수집한다. 아니 추억을 비축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스포츠 행사나 경기장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가는 동안 그 체크는 우리의 소중한 기념품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스포츠 버킷 리스트는 ‘더 늦기 전에 서두르라’며 조바심을 부추긴다.지난 몇 년에 걸쳐 미국 스포츠의 슈퍼스타였던 데릭 지터(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와 코비 브라이언트(프로농구 LA 레이커스)가 은퇴했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던’ 세기의 복서 무함마드 알리와 아이스하키의 전설 고디 하우가 이 세상과 작별했다.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스포츠팬들에겐 ‘인내심 갖고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는 옛 속담이 반드시 최선의 조언은 아닌 것 같다. 스포츠 버킷 리스트에 적힌 것을 하루 빨리 전부 다 해봐야 한다는 조바심은 우리의 나이만이 아니라 팀이나 경기장, 또는 선수 경력이 언제든 해체되고 재건축되며 끝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된다.좋아하는 선수와 경기장을 전부 구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직접 찾아가는 것이지만 세계를 순식간에 둘러보는 이 같은 가상 여행도 사진과 간단한 설명으로 구미가 당기며 우리를 유혹한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겠지만 우리 시계는 끊임없이 째깍째깍 돌아가니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을 듯 싶다. 다음은 롭 플레더와 스티브 호프먼이 저술한 책 ‘스포츠 버킷리스트: 모든 스포츠팬이 늦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101군데 명소(The Sports Bucket List: 101 Sights Every Sports Fan Should See Before the Clock Runs Out by Rob Fleder and Steve Hoffman, 하퍼콜린스 펴냄)’에서 발췌했다. ━ ○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 오라클 아레나(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형편없는 농구 구단을 최고의 쇼단으로 만드는 방법이 뭘까? 어떻게 하면 홈에서든 원정 경기에서든 가는 곳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우는 팀으로 만들 수 있을까? 별로 어렵지 않다. 현재의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구단주가 2010년에 그랬듯이 4억5000만 달러를 주고 그 팀을 인수하라. 그 다음 3점 슛이 미국 프로농구(NBA)에서 아주 보기 드문 무기였다는 확신을 갖고 그런 무기를 가진 선수로 진용을 짜라.스티븐 커리, 클레이 톰슨, 드레이먼드 그린을 영입해 그들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 장거리 화력의 취약점을 최소화하라. 거기다 몇 가지만 보완하면 멋진 팀이 만들어진다. 그 결과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는 2015년 우승팀이 됐고 지난해엔 시즌 기록 73승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다. 이번 시즌엔 세계 톱5에 드는 케빈 듀란트까지 팀에 합류했다. 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 ○ 에디 | 와이메아 베이(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에디는 가장 오래된 대형 파도타기 대회지만 최고의 권위를 가진 위험한 대회다. 하와이의 서퍼 전설 에디 아이카우의 이름을 땄다. 그는 와이메아 해변의 첫 공식 인명구조대원으로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까지 파도를 타고 나가 구조활동을 폈다. 그를 기리는 이 대회는 파고가 약 6m 이상으로 높아져야 열린다는 점에서 다른 프로 대회와 차별된다. 세계 최고의 서퍼들이 참가하는 이 대회에선 대개 파도가 ‘승자’다. 거대한 파도가 서퍼들을 하나씩 차례로 넘어뜨린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적시에 파도의 입술을 잡아채 구비치는 파도의 터널 속에서도 계속 질주하다가 하얀 물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그가 당당하게 헤엄쳐 나온다. 바로 우승자다. ━ ○ 럭비 월드컵 | 요코하마(일본, 2019 결승전 개최지) 스크럼과 몰(공을 가진 선수 주위에 한 명 이상의 양 팀 선수가 선 채 몸을 밀착시킨 상태)을 구분 못해도 럭비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둔탁하게 몸을 부딪히는 이 거친 게임은 프로 미식축구를 좋아한다면 규칙을 몰라도 열렬한 팬이 될 수 있다. 그 게임의 꽃이 20개국 대표팀이 참가해 4년마다 겨루는 럭비 월드컵이다.럭비는 원래 남반구가 강하다. 지금까지 개최된 8회의 월드컵 대회 중 7회에서 그곳 국가들이 우승했다(호주 3회, 뉴질랜드 2회, 남아공 2회). 운이 좋다면 하카 춤 공연도 볼 수 있다. 원래는 마오리족 전사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추는 춤으로 럭비(아니 모든 스포츠라고 해도 무방하다)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 ‘올블랙스’로 불리는 뉴질랜드 대표팀이 전통적으로 경기 전에 치르는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상대팀 앞에서 허리는 곧게 펴고, 살짝 굽힌 무릎을 손바닥으로 때린다. 눈은 크게 부릅뜨고 혀를 쏙 내밀며 소리를 지른다. 상대팀을 제압하는 시늉이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도 진짜 가볼 만한 구경거리다. ━ ○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 네팔(28°0’26” N, 86°51’34” E) 실제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지 않고서 그 산에 오르는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그렇다고 공원 산책 정도로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물론 네팔의 사가르마타 국립공원을 통과하지만 말이다. 먼저 비행기로 네팔 수도 카트만두로 가야 한다. 그 다음 소형 비행기를 타고 산악지대를 통과해 루클라에 간 다음 거기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약 2주에 걸쳐 셰르파의 안내를 받아 극한의 고도로 오른다. 고도에 적응하기 위해 자주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 베이스캠프에서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등반을 시작한다. 그처럼 오르기 힘든 곳에 왜 가냐고? 산이 그곳에 있고 우리는 여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 ○ 프랑스 오픈 | 스타드 롤랑 가로(파리) 테니스 그랜드 슬램의 두 번째 대회로 파리 시내 롤랑 가로의 붉은 코트에서 열린다. 세계 최고의 클레이 코트 토너먼트다. 잔디 코트나 합성수지 하드 코트는 강한 서브가 무기인 선수에게 유리하지만 흙으로 만들어진 롤랑 가로의 클레이 코트에선 공이 코트 표면에 닿으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뛰어다녀야 하는 거리가 많아져 체력이 강한 선수가 유리하며 랠리(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오고가는 동작)가 좀 더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기가 우아할 뿐 아니라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피트 샘프라스는 대포알 서브로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14개나 거머쥐었지만 프랑스 오픈에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반면 클레이 코트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라파엘 나달은 베이스라인에 서서 넘어오는 거의 모든 샷을 받아넘기며 프랑스 오픈에서 9차례나 우승했다. 모든 게임에서 힘이 넘치는 세레나 윌리엄스는 그랜드 슬램 싱글 타이틀을 16개나 차지했지만 프랑스 오픈 우승에서 딴 것은 3개 뿐이다. 롤랑 가로에선 스타일이 파워를 능가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프랑스다운가!게다가 롤랑 가로는 지하철로 쉽게 갈 수 있으며 음식도 맛이나 가격에서 기대보다 낫다는 매력도 있다.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초여름의 파리’가 약속하는 낭만만해도 충분히 가볼 만하지 않을까? ━ ○ 그린 몬스터 | 보스턴(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오래됐고(1912년 건설) 가장 작은(3만7673석) 구장이다. 하지만 그 구장의 왼쪽 외야 펜스는 높이가 11.3m로 어느 구장보다 높은 것으로 악명 높아 ‘그린 몬스터’로 불린다. 펜웨이 파크에선 2002년부터 8회 말 공격을 앞두고 팬들이 ‘스위트 캐롤라인’을 다같이 따라 부르는 것이 전통으로 굳어져 유명해졌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구장의 상징은 ‘그린 몬스터’다.펜웨이 파크의 왼쪽 외야 펜스는 이 구장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있었다. 왼쪽에서 중앙까지 길이 약 70m에 이르는 이 담장은 원래는 랜스다운 스트리트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공짜 손님’을 막기 위해서 그처럼 높이 세워졌다.처음엔 나무 담장이었지만 1934년 콘크리트와 주석 담장으로 다시 지었다. 그때 ‘더피의 절벽(Duffy’s Cliff, 보스턴 레드삭스의 좌익수였던 더피 루이스가 이 지점에서의 수비를 기가 막히게 해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으로 3m 정도의 경사진 부분)’이 제거됐고, 손으로 작동하는 유명한 구식 스코어보드가 설치됐다(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1947년 펜웨이 파크 외야 펜스에서 광고물이 모두 제거되고 녹색 페인트로 칠해지면서 ‘그린 몬스터’란 애칭이 붙었다.처음부터 ‘그린 몬스터’는 선수들에게 유리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했다. 공간이 넓은 구장에선 쉽게 잡을 수 있는 플라이볼이 이곳에선 높은 담장에 맞고 튀어나가 2루타가 되거나 때론 펜스를 살짝 넘어가 어이없는 홈런이 되기도 한다(1978년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의 9번 타자 버키 덴트는 어설픈 스윙으로 공을 쳐 평범한 플라이아웃처럼 보였지만 그 공이 운좋게 ‘그린 몬스터’를 간신히 넘겨 홈런이 되면서 양키스가 역전승을 거뒀다). 한편 다른 구장에선 홈런이 될 수 있는 강한 타구도 이곳에선 ‘그린 몬스터’에 가로막혀 2루타나 1루타에 머물기도 한다. 이처럼 말 그대로 ‘보스턴에선 모든 플라이볼이 모험’이다. ━ ○ 켄터키 더비 | 루이빌(미국 켄터키 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처칠다운스 경마장의 2㎞ 트랙에서 세 살짜리 명마의 운명은 또래들과 영원히 달라진다. 그 경기에서 우승하면 두둑한 상금으로 다양하고 활동적인 ‘애정 생활’을 포함해 모든 것을 일류로 대접받을 뿐 아니라 경마 연보에서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차지한다. 이처럼 말에게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날 수 있는 대회이기 때문에 켄터키 더비는 오랫동안 ‘스포츠에서 가장 짜릿한 2분’으로 불렸다.그렇다면 더비 데이에 20명의 기수와 판돈 몇 억 달러 외에 정확히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역사다. 모든 경주가 그렇듯이 그 역사는 혈통에 크게 의존한다. 1872년 메리웨더 루이스 클라크(유명한 탐험가 윌리엄 클라크의 손자)는 영국의 엠섬 더비와 프랑스의 파리 롱샹 경마를 구경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 그와 비슷한 미국 경마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처칠이라고 불리는 두 삼촌을 졸라 땅을 얻어내 트랙을 만들었고 루이빌 자키 클럽을 결성해 팬들을 모집했다. 2년 후인 1875년 5월 17일, 드디어 경마장이 개장했다. 이 첫 켄터키 더비에서 명마 15필이 경주했고, 팬 1만여 명이 환호성을 올렸다. 우승마는 애러스 타이디즈였다.그 후 그곳에서 매년 경마가 열리면서 켄터키 더비는 설립자 클라크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으로 발전했다. 2015년 더비 데이엔 무려 17만513명이 처칠다운스에 몰렸다. 그들은 민트 줄렙 칵테일을 연거푸 들이키며 ‘그리운 켄터키 옛 집’을 목청껏 불렀다. 일부는 그 노래를 부르며 눈물도 흘렸다. 노예에 관한 노래라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다가 경마 출발문이 활짝 열리고 세계 최고의 세 살짜리 명마들이 ‘누가 영원히 기억될지’를 두고 2분 동안 사력을 다해 달리는 것을 지켜보며 모두가 열광했다. ━ ○ 샤이엔 프런티어 데이 | 미국 와이오밍 주 샤이엔 매년 7월 말 열리는 이 미국 서부 축제의 특징은 커다란 카우보이 모자와 거대한 황소다. 열흘 동안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는 프로 로데오 경기가 그 핵심이다.이 축제는 1897년 옛날식 소떼 몰기로 시작됐다. 일종의 카우보이 일자리 박람회였다. 당시 샤이엔은 급성장하던 소떼 사업의 중심지였다. 카우보이들이 시내로 나와 야생마를 길들이고 황소를 로프로 잡는 장기를 뽐냈다. 곧 그 행사가 로데오 대회를 중심으로 하는 프런티어 데이로 발전했다.요즘은 축제 동안 미국 공군 선더버드의 에어쇼도 펼쳐진다. 무료 아침 식사로 제공되는 팬케이크를 맛본 후 그랜드 퍼레이드, 말 농장, 카우보이와 지붕 있는 마차를 구경할 수 있다. 축제 열흘 동안 매일 로데오 경기가 벌어진다. 야생마 타기, 황소 싸움, 황소 타기, 로프로 황소 잡기 등이 흥을 돋운다.대형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컨트리-웨스턴 뮤지션들의 콘서트도 볼만하다. 그러나 달리는 말에서 카우보이가 뛰어내려 맨손으로 황소를 넘어뜨려 잡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는 없는 듯하다.- 롭 플레더

2017.06.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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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sports - 왕이 될 뻔했던 사나이

산업 일반

젊고 잘 생기고 능변인 에이로드, 프로 야구의 미래였지만 약물복용으로 몰락 야구가 지금은 다소 궁지에 몰렸지만 그래도 분명 미국의 국민 스포츠다. 요즘이 야구의 햇빛 찬란한 날들일 성싶다. 시즌 개막일에는 미국의 모든 스타디움이 만원을 이룬다. 그 열풍이 웅장함과 화려함을 뽐내며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시즌 개막과 함께 봄과 부활, 어린 시절에 관한 온갖 상투적 표현들이 난무한다.현 시점에서 대다수 야구 팬은 자신이 사랑하고 응원하는 팀이 시즌 중 좋은 성적을 거둬 가을에도 야구 경기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구장 밖에서는 야구의 위대한 선구자 잭 루스벨트 로빈슨을 그린 전기영화 ‘42’가 개봉됐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흑인 선수다. 한 남자가 홀로 세상의 진로를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시절, 미국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향수 어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분출한다.그러나 뉴욕에선 알렉스 로드리게스(에이로드)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이애미뉴타임스, ESPN,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탁월한 취재 덕분에 빛을 잃은 스타다. 대화 중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종종 질색을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올 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아직 한 경기도 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그것은 에이로드가 다시 한번 뉴욕 타블로이드 신문의 뒷면을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그 뉴욕 양키스 3루수는 선수경력에서 두 번째로 경기력향상 약물(PED, performance-enhancing drugs)을 복용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잠시 부진에 빠져 방황하는 동안 근육을 강화하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했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은 폐쇄된 ‘노화방지’ 센터와 관련된 기록을 없애는 데 자신의 상당한 자원을 쏟아부었다고 전해진다.여러 보도에 따르면 그 ‘노화방지’ 센터는 여러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경쟁우위를 얻도록 돕는 데 관여했다. 에이로드는 이를 부인한다. 그러나 야구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능력에 에이로드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그보다 더 어둡다.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어둠의 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원해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하려 했을지 모르는 남자의 몰락 말이다.그는 한때 흠잡을 데 없는 야구의 미래였다. 온 미국이 그의 매력에 빠져 그를 미래의 유력한 제왕으로 여겼다. 고향 시애틀 구장에서 빛을 발한 뒤 전국구 스타로 도약한 젊고 오점 없는 스타였다. 미남에 말 잘하고 절로 찬사가 우러나오게 하는 기량을 갖춘 아름다운 선수였다.뉴욕 양키스는 프로 야구에서 가장 전설적인 팀이다. 하지만 양키스로 이적한 뒤 에이로드의 이미지는 거칠고 혼란스러워졌다. 할리우드 스타급 외모에 실제로 할리우드의 미녀 배우들과 데이트를 하는 건 여전하다. 맞다. 그는 영화배우 케이트 허드슨을 품에 안고, 수퍼볼 경기장에서 카메론 디아즈와 함께 팝콘을 먹고, 플로리다주 코랄 게이블스에서 세계 최상급 갑부나 선수들과 의젓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남자가 됐다.그리고 과도한 근육질 남성들로 얼룩진 시대를 정화할 것으로 기대됐던 선수였다. 우리는 그들의 철면피한 부정행위를 눈감아줄 의사가 있었다. 그들이 계속 뛰어나고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공을 던지고 야구장 담장 너머로 공을 날려보내는 한 말이다.에이로드는 여전히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열광하던 팬들이 사라지고 대신 궁궐 같은 자택을 나설 때마다 무자비한 비웃음이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그 일로 그가 갖게 됐다고 알려진 불안감을 애써 감추려는 듯하다). 과거 조 디마지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추앙받는 인물이 됐다. 하지만 에이로드는 그런 인물이 될 수 없다.그의 몰락은 많은 팬들이 차라리 잊고 싶어하는 시절의 완결판이다. 2005년 그 미국 국민 스포츠의 순수성을 조사하기 위해 소집된 청문회가 그 출발점이었다. 새미 소사와 마크 맥과이어 등 존경받는 선수들이 의회에 불려나가 바보처럼 행동했다. 추락한 남자들이 조금이나마 남은 명성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소사는 영어를 모르는 척했다. 맥과이어는 묵비권을 행사했다.스테로이드 복용을 보는 시각은 세대에 따라 다를지 모른다. 저명한 야구 전문기자로저 앤젤이 그 사실을 일깨워줬다. 2년 전 그의 뉴요커 잡지 사무실에 함께 앉았을 때였다. 그는 2005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문예창작 강사를 맡았을 때의 일을 돌이켰다. 저연령과 고연령 학생 90명가량이 그의 강연을 들으러 왔다. 앤젤은 청중의 다양한 반응을 기억했다.“스테로이드 문제를 주제로 다룰 때 말했다. ‘여론조사를 하겠어요. 가령 여러분이 치과의사나 회계사 또는 건축가인데 갑자기 어떤 약물을 권유받았다고 칩시다. 불법이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며 어쩌면 여러분을 더 뛰어난 나아가 사상 최고의 회계사와 건축가로 만들어줄지 모릅니다. 복용하겠다는 사람은 손 들어보세요?’ 그러자 고연령 학생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 ‘절대 복용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저연령 학생들은 모두 ‘절대로 안 한다!’고 답했다.”앤젤은 그 논란과 관련해 또 다른 점을 지적했다. 당시 의회와 언론에서 거론되던 문제였다. “스테로이드 논란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망각한 듯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야구를 하는 목적은 승자, 승리팀을 가리는 것이라는 점”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것이 야구를 하는 이유다. 우승팀을 가리기 위해서다. 기록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팬들을 위한 하나의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기록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메인 이벤트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잘 하려는 욕구가 PED의 복용을 부추긴다.조지 미첼 상원의원이 스테로이드와 PED 복용에 관한 통렬한 400쪽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뒤로 대다수 선수들이 후폭풍을 우려해 그런 방법을 기피하는 경향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메이저리그(MLB) 당국자들은 여전히 그런 우위를 추구하는 선수들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듯하다. 밀워키의 라이언 브라운은 2011시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시즌이 끝난 뒤 MLB 관계자들은 그를 상대로 약물검사를 실시했다. 그의 자격 박탈이 목적이었지만 실패했다.MLB가 문제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 애쓰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스포츠작가 셀레나 로버츠가 2009년 에이로드의 전기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많은 삶(The Many Lives of Alex Rodriguez)’에서 먼저 의혹을 제기했다. 그 자신도 스테로이드 복용을 인정했다. 그 뒤로 MLB는 그를 외면하기는커녕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듯하다. 그를 야구에서 퇴출시킬 만한 증거를 찾아낼 작정이다. 그로써 그가 야구계의 마지막 약물복용자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의 은퇴로 야구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부끄러운 악몽에서 마침내 깨어날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 되리라고.이 스포츠에서 그 말고 누가 그만한 지위, 그만한 인정을 얻었던가? 물론 에이로드의 팀 동료 데릭 지터도 있다. 부상에 시달리며 화려한 경력의 황혼기로 접어드는 유격수 말이다. 그도 몇 차례 염문을 뿌렸으며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다. 하지만 가끔씩 로봇 같은 인상을 준다. 양 어깨에 야구를 들쳐 매고 달려나갈 만한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듯하다. 야구가 미국의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많은 팬을 자랑하는 스포츠로서 위상을 되찾으려면 그런 스타가 필요한데 말이다.그리고 에이로드의 기록은 어떤 방법으로 달성했든, 여전히 야구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손꼽힌다. 부상을 당하고, 부정행위 주장이 추가로 터져 나와도 에이로드는 사상 최다 홈런기록을 돌파할 가능성이 큰 선수다. 현재 기록 보유자인 배리 본즈조차 깨끗하지 않다. 여러 모로 볼 때 그도 스테로이드에 의존해 기록을 갱신했다. 마약복용 혐의로 오점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좌익수로 기억에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에이로드와 마찬가지로 그도 유혹을 이기지 못한 듯하다.아직도 야구에 애정을 지닌 팬들에게 이 최근의 논란은 한창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LA 다저스로부터 뉴욕 양키스에 이르는 팀들이 노장 선수들의 지갑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볼티모어 같은 지역의 팀들은 프로 야구에서 발군의 경기력을 보여준다. 워싱턴 DC의 내셔널스 팀도 주목할 만하다. 몬트리올에서 연고지를 옮긴 뒤로 다른 팀들의 보약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도 리그 최고의 팀으로서 미국 수도에 커다란 자부심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작은 팀과 평범한 스타들의 이야기는 초대형 스타와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광고계약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열광시키지 못한다. 스포츠 세계의 스타들은 우리 머리 위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데이비드 베컴(축구)과 코비 브라이언트(농구)가 전지전능한 그리스 신들처럼 광고판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세상이다. 그들의 결점은 외면되고 잊혀지거나 용서된다.에이로드는 이 같은 세상의 그 전당에서 바로 그와 같은 위치를 추구했다. 그리고 37세의 나이에 조용히 물러나지 않고 완강히 버티는 선택을 했다. 모든 걸 원상복구하고 아직도 뉴욕뿐 아니라 세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가 가장 존경받는 스포츠에서 그는 한번 더 기회를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의 알려진 부정행위가 밝혀지기전에 많은 사람이 느꼈던 ‘에이로드 열풍’을 되살릴 기회 말이다. 당시엔 뉴욕사람 대다수가 그가 가장 필요할 때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리라고 믿었다.그러나 그는 뉴욕의 슈퍼맨이 아니라 렉스 루터(‘

2013.04.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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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fect  100  꼭 가봐야 할 10개 도시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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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뉴스위크는 세계 10개 도시의 잘 알려진 관광 명소를 소개했다. 그에 이어 이번에도 세계적 수준의 10개 도시를 새로 선정해 각각의 10개 명소를 소개한다.시카고선정: RAHM EMANUEL윌리스 타워(Willis Tower)북미 지역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원래 시어스 타워로 알려졌지만 2009년 윌리스 타워로 이름을 바꿨다. 시카고를 방문하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103층의 스카이데크로 올라가 건물 외벽 밖으로 1.3m 돌출해 있는 유리 발코니 레지에 들어서면 412m 상공에서 시카고의 멋진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233 South Wacker Drive; theskydeck.com조프리 발레단(Joffrey Ballet)1956년 창설된 조프리 발레단은 세계 일류 공연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시카고 지역의 발레·무용 교육에 헌신하면서 예술적인 탁월함을 추구한다. 각 시즌마다 ‘호두까기 인형’ 같은 클래식부터 획기적인 현대 무용까지 다양한 공연을 선사한다.10 East Randolph Street;joffrey.org건축 관광 크루즈(Architectural Boat Tour)아주 색다른 관점에서 시카고의 유명한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며 역사를 배워 보자. 유람선을 타고 시카고 강을 따라 루프(‘루프’궤도를 도는 고가열차에서 유래된 시카고 도심의 명칭)를 돌면서 1시간 동안 박식한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40개 이상의 시카고 주요 건축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600 East Grand Avenue,Navy Pier; chicagotours.us미티에라(Mi Tierra)시카고 남서부의 리틀 빌리지로 가 보자. 미시간 애브뉴에 이어 시카고 제2의 ‘유혹의 1마일’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곳의 미티에라 레스토랑에서는 정통 멕시코 요리와 흥겨운 음악쇼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메뉴인 해산물 구이요리 파리자다를 다양한 육류를 곁들여 즐겨 보자.2528 South Kedzie Avenue;mitierra restaurant.com매주 둘째 금요일의 갤러리 나이트예술적 활력이 넘치는 구역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매달 시카고 미술가들의 다양성과창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갤러리와 작업실을 둘러보며 작품들을 감상하자. 매번 작가와 작품이 바뀐다. 미술가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 보자.이곳을 찾는 것 자체가 이 활기찬 구역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이다.1821 South Halsted Street;chicagoartsdistrict.org코트 극장(Court Theatre)고전 연극을 새롭게 해석해 무대에 올리는 극장으로 시카고 남부 하이드파크 중심에 위치한다. 시카고대와 손잡고 탁월한 공연을 제공함으로써 이 도시의 예술 문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고전작품의 혁신적인 해석이 늘 감동을 안겨준다.5535 South Ellis Avenue;courttheatre.org사우스 쇼어 문화센터(South Shore Cultural Center)컨트리 클럽을 개조한 이곳은 이제 가족들이 즐겨찾는 문화 명소가 됐다. 예술부터 건강, 체력단련까지 모든 연령층을 위한 다양한 강좌가 마련돼 있다. 자연보호 구역과 나비 정원으로도 유명하며 청소년 하계 6주 프로그램도 운영한다.7059 S. South Shore Drive;chicagoparkdistrict.com/parks/south-shore-cultural-center브론즈빌 어린이 박물관(Bronzeville Children’s Museum)미국 최초이며 유일한 흑인 어린이박물관이다. 쌍방향 학습법으로 3~9세 어린이에게 교육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설립 목표다. 건강한 식습관과 지구를 살리는 친환경생활 요령을 배워 보자.9301 South Stony Island Avenue;bronzevillechildrensmuseum.com세컨드 시티 극장(The Second City)이제 시카고 북부로 가서 코미디를 구경하며 저녁 식사를 하거나 심야 칵테일을 즐겨 보자. 세컨드 시티는 5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며 티나 페이, 존 벨루시, 스티븐 콜베르 등기라성 같은 코미디언을 배출했다. 배꼽 잡게 만드는 즉흥 코미디로 지금도 시카고 시민들과 방문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1616 North Wells Street; secondcity.com그린 시티 마켓(Green City Market)더 건강한 시카고를 목표로 하는 이 단체는 소규모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한주에 두 차례 시내로 나가 자신들이 재배한 과일, 채소 등을 판매하도록 주선한다. 아침 식사거리를 찾거나 건강 식품을 원한다면 노스 사이드에 있는 이 시장을 방문하라.여름장: 1790 North Clark Street;겨울장: 2430 North Cannon Drive;greencitymarket.org멕시코 시티선정: ENGELBERT L. VALPEOZ VIDALES카라반세라이의 메종 프랑세즈 (Maison Française de Thé Caravanseraï)콜로니아 로마 구역의 20세기 초 아르누보식 카라반세라이 호텔에는 멕시코 시티에서 가장 유명한 찻집 중 하나가 있다. 62쪽짜리 메뉴는 모든 차, 그리고 유기농 음식 등 특선 요리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 구역은 문화 체험에도 안성맞춤이다. 아르데코, 아르누보, 네오클라식 건축물과 상점 수십 개,그리고 카사 람 문화센터도 있다.Orizaba 101, Colonia Roma;caravanserai.com.mx비야 코요아칸(Villa Coyoacán)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한 후 정착한 이곳은 멕시코 시티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구역 중 하나다. 식민지풍 건물, 교회, 박물관, 시장, 식당, 술집,가게가 수업이 많은 이곳은 긴 시간 산책을 하며 맛있는 커피 한 잔을 하기에 이상적이다. 주말 방문을 권한다.Jardín Centenario, Coyoacán, D.F.;coyoacan.df.gob.mx오페라 바(Bar la Opera)멕시코 시티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식당 겸술집이다(1876년부터). 대통령, 정치인, 예술가, 작가, 배우, 혁명 운동가 사파타의 민병대, 농민, 그리고 혁명의 전설 판초 비야(이곳에서 총을 발사해 지붕에 구멍이 났다고 알려졌다)가 애용했다. 멕시코 정통 요리로 유명하며 와인과 증류주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Cinco de Mayo 10, Colonia AlamedaCentral; barlaopera.com소칼로(El Zócalo)멕시코 시티의 헌법 광장으로 규모가 세계에서 두 번째다. 이곳은 스페인에 정복당하기 전에 멕시카(아즈텍) 제국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다. 아즈텍 사원인 템플로 마요르의 폐허 위에 스페인인들이 건설한 이 광장은 성당과 국립궁전 등 초기 식민지 건축을 자랑한다. 주변에 박물관 20여 곳, 도서관, 식당, 술집, 카페, 가게가 즐비하며 원래의 사원 유적지도 남아 있다.Plaza de la Constitución, Colonia Centro;guiadelcentrohistorico.com국립인류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이 박물관은 1841년 처음 세워졌지만 현재의 3만5675㎡ 대규모 전시장은 1964년 첫선을 보였다. 마야, 아즈텍, 올멕, 테오티우아칸, 톨텍, 사포텍, 믹스텍 등 스페인 정복이 전 메소아메리칸 문명의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한 박물관이다. 대표적인 유물이 아즈텍 달력이다.Paseo de la Reforma and Calzada Gandhi,Colonia Chapultepec Polanco;mna.inah.gob.mx미술 궁전 (The Palace of the Fine Arts)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명소다. 외부는 이탈리아 카라라 대리석을 사용한 신고전주의와 아르누보 양식이며 내부는 대리석, 마로티 유리, 철을 사용한 아르데코 양식이다. 1904년부터 34년까지 간헐적으로 건설된 이 궁전은 디에고 리베라, 루피노 타마요,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벽화로 유명하다. 거의 매일 음악, 전통 무용, 연극이 공연된다.Avenida Hidalgo 1, Colonia Centro;bellasartes.gob.mx로스 기라솔레스(Los Girasoles)현대 멕시코의 최고 요리예술가들이 만든 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아울러 이곳은 멕시코 문화를 보고, 맛보고, 듣는 경험도 제공한다. 라파엘 코로넬,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 가브리엘 마코텔라,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의 회화 작품들로 장식돼 있다.Tacuba 8–10, Colonia Centro;restaurantelosgirasoles.com소치밀코(Xochimilco)이 구역의 운하들은 ‘치남파스(chinampas,물 위의 채소밭이라는 뜻)’로 불리는 소규모 인공 경작지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재배되는 유기농 작물은 주변의 고급 식당에 제공된다. 트라히네라(노를 젓는 작은 배)를 타고 전통 음식과 마리아치 음악, 경관을 즐기자.Centro de Xochimilco; www.xochimilco.df.gob.mx/turismo카페 데 타쿠바(El Café de Tacuba)17세기에 지어진 저택에서 1912년 문을 연이 식당은 멕시코 시티 방문객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대통령, 정치인들이 애용했으며 가장 유명한 고객으로 작곡가 아구스틴 라라와 포르피리오 디아즈 대통령이 꼽힌다. 최고의 멕시코 음식과 음악을 즐길수 있다.República de Guatemala 28, ColoniaCentro; cafedetacuba.com.mx산 앙헬(San Angel)의 토요일장멕시코 시티의 남쪽에 위치한 멕시코 공예품과 미술품 시장이다. 매주 토요일에는 전통 아침식사를 골라서 맛볼 수 있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극장, 박물관, 도서관을구경해 보자. 제대로 쇼핑하고 싶은 관광객을 위한 현대식 플라자 그란드 백화점도 있다.부에노스 아이레스선정: CECILIA MARTÍNEZ RUPPEL테아트로 콜론(Teatro Colón)의 센트로 엑스페리멘탈(Centro Experimental)새단장한 테아트로 콜론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필수 관광명소가 됐다. 음향의 질과 인상적인 건축으로 세계 최고의 공연장에 꼽힌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엔리코 카루소, 마리아 칼라스 등이 이곳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그곳의 센트로 엑스페리멘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건물 지하실에서1990년대부터 문을 연 실험 공연장으로 이런 클래식한 극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혁신적인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예를 들어 올해엔 전위 작곡가 존 케이지 헌정 공연과 현지 극작가 페르난도 루비오의 연극이 선보인다. teatrocolon.org.ar/en메르카도 사베 라 티에라(Mercado Sabe la Tierra)부에노스 아이레스 북부 구역을 찾으면 도심의 혼잡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메르카도 사베 라 티에라 시장이 최고다. 경전철 트렌 데 라 코스타를 타고 산페르난도 역에서 내리면 된다(중간 역인 산이시드로와 티그레에도 볼거리가 많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자연 그대로 재배된 식료품을 팔며 다양한 워크숍과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다. 요가를 배우고, 타악기 워크숍에 참여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sabelatierra.com말바(MALBA)프리다 칼로, 안토니오 베르니, 디에고 리베라, 술 솔라르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구경하자. 부에노스 아이레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은 2001년 문을 연 이래 라틴 아메리카 미술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미술관이 됐다. 영구 소장품과 함께 특정 기간에만 전시되는 세계 각지의 뛰어난 작품을 감상하며 오후 한나절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미술관의 영화관도 유명하다. 유명한 고전영화와 새로운 독립영화를 상영한다.Avenida Figueroa Alcorta 3415; malba.org.ar/web/home_eng.php팔라시오 바롤로(Palacio Barolo)아베니다 데 마요에 위치한 이 눈길 끄는 건물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각종 상징물과 자료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22층은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세 섹션으로 구성된다.꼭대기에는 단테의 ‘최고천’을 상징하는 회전 등대가 있다(특별한 경우에만 불을 밝힌다). 건축가 마리오 팔란티가 1919~23년 지은 이 건물은 신낭만주의와 신고딕 양식이 혼합돼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다. 인근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전용 테이블을 갖고 있었다는 유명한 카페 토르토니(Avenida de Mayo 825)가 있다.Avenida de Mayo 1370; www.xochimilco.df.gob.mx/turismo차카리타(Chacarita)차카리타 공동묘지의 오솔길을 걸어가다 보면 전설적인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의 조각상을 만난다. 그의 손에는 늘 불 붙여진 담배가 끼워져 있다(팬들이 그를 기리는방식이다). 묘지이기 때문에 분위기는 쓸쓸하지만 볼거리도 많다. 탱고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오스발도 푸글리에제,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화가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 등 저명 인사들의 인상적인 영묘와 괴물 석상들이 인상적이다. 묘지에서 나와 기차역 건너편의 임페리오에서 전통 음식을 들며 기분을 전환하자.프로아 재단(Fundación PROA)보카 구역은 전통적인 거리 박물관 카미니토와 보카 주니어 축구팀 경기장 라 봄보네라로 유명해 관광객과 현지인 모두가 자주찾는다. 이 구역에 새로 들어선 명소가 현대 미술센터인 프로아 재단이다. 전시회와 문화 강연이 열리며 서점과 카페가 방문객들을 유혹한다.Avenida Pedro de Mendoza 1929; proa.org산 이시드로 경마장(Hipódromo de San Isidro)치밀한 경주 일정으로 경마 애호가들의 천국이다. 경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잔디 트랙 주변을 휩쓰는 열정과 흥분된 분위기는 이례적인 오락거리가 될 만하다. 이 경마장 웹사이트에서 베팅 안내와 스페인어 경마 관련 용어 해설 자료를 내려 받을 수 있다.Avenida Márquez 504, San Isidro;hipodromosanisidro.com코리엔테스 거리(Avenida Corrientes)이 전통적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따라 산책해 보자. 이 거리에는 상징적인 61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주요 극장들이 늘어서 있다. 구에린, 반체로, 또는 라스쿠아르테타스에 들러 맛있는 피자도 먹어보자. 이곳의 피자 전문점은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테이블에 앉아도 되고 바에 서서 생맥주 한 잔을 곁들여 피자를 먹을 수도 있다.라스 비올레타스 식당(Las Violetas)알마그로 구역의 이 그림 같은 식당은 125년전통을 자랑한다. 초기의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이곳에 테이블을 잡으려고 사람들이 늘 줄을 선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간은 티타임이다. 트로타 레기사모, 둘체 데 레체 케이크, 머랭, 아몬드 크림 등 별미가 제공된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전통 케이크 파네토네를 포함해 이곳의 각종 케이크는 포장이 가능하다.Avenida Rivadavia 3899, at the cornerwith Medrano; lasvioletas.com아틀레티코 페르난데스 피에로(Atlético Fernández Fierro)오르케스타 티피카 페르난데스 피에로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탱고 밴드로 현대적인 스타일이 특징이다. 아틀레티코 페르난 데스 피에로 클럽(CAFF)은 이 밴드가 독자적인 쇼를 제공하고 현지 음악인들에게 공연할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곳에서 일류 음악과 와인, 엠파나다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전형적인 야간 나들이를 즐겨 보자.Sánchez de Bustamante 764;caff.com.ar코펜하겐선정: LOUISE ROUG BOKKENHE USER라그카게후세트(Lagkagehuset)덴마크 사람들은 빵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 빵집에서 빵을 사려면 토요일 아침이면 줄을 서야 하지만 맛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는다. 역사적인 크리스타인스하븐의 운하 곁에 있는 이곳은 덴마크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루그브뢰드(검고 향긋한 호밀빵)를 판매한다.Torvegade 45; lagkagehuset.dk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라그카게후세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41년 전에 만들어진 공동체 구역이다. 의회에서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도시 속의 해방구로 마리화나 거래가 성행한다. 히피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이상향 지지자들은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다. 식당, 음악 공연장, 유명한 자전거 가게 등이 있다.Bådsmandsstræde 43; christiania.org칼스버그(Carlsberg)덴마크 사람들이 언제나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세계 최고의 맥주” 칼스버그 때문인 듯하다. 그런 시건방진 표현을 논외로 치더라도 이 양조장은 국왕의 인정을 받았으며 많은 미술 작품을 코펜하겐 시에 기증했다. ‘인어 공주’ 동상도 그중 하나다.Gamle Carlsberg Vej 11; visitcarlsberg.dk다비드 박물관(The David Collection)투자은행 란드만드스방켄(1920년대의 리먼브러더스라고 할 수 있다)의 총재를 변호하면서 명성과 부를 얻은 변호사가 설립했다.세계에서 손꼽히는 이슬람 미술품을 소장한다. 8~19세기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고전 이슬람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들이다.Kronprinsessegade 30; davidmus.dk/en덴마크 공영방송사(DR)덴마크 공영방송은 최근 큰 성공을 거뒀다. 처음엔 범죄 드라마 ‘살인(Forbrydelsen)’이 히트했고, 이번에는 정치 드라마 ‘보르겐(Borgen)’이 국제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음악을 좋아한다면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DR의 논란 많은 콘서트홀이 제격이다.Emil Holms Kanal 20; dr.dk/koncerthuset/english덴 소르테 디아만트(Den Sorte Diamant)코펜하겐의 왕립 도서관 신관은 운하 변에 세워진 반짝이는 검은색 건물로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린다. 6세기부터 현대까지 각종 서적의 보물로 가득한 곳이다. 유명한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 소장품이 대표적이다. 1648년 국왕 프레데릭 3세가 설립한 이 도서관은 현재 종이책 만이 아니라 전자책도 소장한다.Søren Kierkegaards Plads 1; kb.dk/en에펠 바(Eiffel Bar)이 멋진 술집은 코펜하겐에서 얼마 남지 않은 ‘갈색 바’ 중 하나다. 손님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술집이라는 뜻이다(벽이 니코틴 잔여물이 배어 갈색이다). 영업 시간이 길고 술값이 저렴하다. “에펠 바에선 누구나 즐길수 있다”가 이곳의 모토다.Wildersgade 58; eiffelbar.dk슬로트스캘데렌 호스 기테 키크(Slotskælderen hos Gitte Kik)1910년 의회 근처에 문을 연 이 식당은 청어요리, 장어와 달걀 샌드위치, ‘수의사의 야참’(거위간 파테, 아스픽, 염장 쇠고기를 끼운 검은 빵)을 제공한다. 사회주의 복지제도를 도입하기 전 1935년 선거에서 ‘스타우닝이 아니면 혼란이 온다’는 슬로건으로 총리에 선출된 토르발 스타우닝도 이 식당의 단골이었다. Fortunstræde 4루이지애나(Louisiana)덴마크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미술관이다. 뛰어난 현대미술 소장품 때문이다. 라우션버그, 리히텐슈타인, 자코메티, 이브 클랭의 주요 작품이 포함돼 있다. 설립자 크누드옌센은 이 아름다운 미술관을 자신의 ‘사우나 원칙’에 따라 나눴다. 잘 알려진 화가의 작품은 ‘뜨거운’ 방에, 새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화가의 작품은 ‘차가운’ 방에 전시된다.Gl. Strandvej 13; louisiana.dk룬데타른(Rundetårn)1642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지은 원형탑이다. 34m가 넘는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소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엘리베이터도 층계도 없으며 독특한 나선형 복도만 있다. 러시아 황제 표토르1세가 1716년 이 복도를 통해 말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랐다고 한다.Købmagergade 52A; rundetaarn.dk/en로마선정:BARBIE LATZA NADEAU야간의 콜로세움(Colosseum)절반은 무너진 고대 로마 콜로세움만큼 ‘로마’를 적절히 상징하는 단일 기념물은 없다.낮에는 뜨거운 석회암 위에서 공간을 서로 차지하려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그러나 이제 방문객들은 이탈리아 문화부가 마련한 특별 야간 관람에 참가해 이 장대한 유적을 달빛 아래서 감상할 수 있다.Piazza del Colosseo; archeoroma.beniculturali.it/en/archaeological-site/colosseum빗속의 판테온(Pantheon)로마는 연중 내내 비가 잘 오지 않지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판테온으로 달려가 이 고대 사원 천장의 뚫린 둥근창을 통해 떨어지는 비를 감상하자. 불빛이 빗방울에 적절히 비춰지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로마 시대 사원 중 가장 잘 보존된 이곳은 반드시 가볼 만하다. 거대한 입구 아래 잠시 서서 지난 2000년 동안 이 문턱을 넘은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Piazza della Rotonda; sbap-roma.beniculturali.it/index.php?it/116/pantheon산 클레멘테(San Clemente)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로마는 그 오랜 역사의 지층 위에 존재한다. 이처럼 로마의 복잡한 과거를 산클레멘테 성당보다 더 잘 보여주는 곳은 없다. 오래된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로마 과거의 세 단계를 통과한다. 맨 위는 12세기에 지어진 구조로 모자이크 장식이 많다. 그 아래는 프레스코 벽화가 아직 남아 있는 4세기성당의 유적지다. 맨 아래는 기독교 이전 미트라스교 사원의 유적으로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묘사된 조각상이 아직 남아 있다.Via Labicana 95; basilicasanclemente.com바티칸 미술관(Vatican Museum)과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바티칸 미술관과 시스티나 성당의 복도에서 인파에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미술사의 영광을 진정으로 감상하고 싶다면 다른 비용을 아껴 특별 폐장 후 투어에 참가하라. 비용은 300달러 정도로 비싸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미술관 중 하나를 거의 혼자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다.www.vatican.va일요일의 아피아 고대도로(Appia Antica)평일에는 교통량이 많아 어렵지만 차량 통행이 금지되는 일요일이나 휴일에는 아피아 고대도로를 이용하기가 좋다. 자전거를 빌려 타든지 걸어서 가장 중요한 고대도로중 하나를 답사해 보자.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문에서 시작해 자갈 깔린 길을 따라 고대묘지와 유적지를 둘러 보자. 가이드가 안내하는 지하묘지도 가 볼만하다.Via Appia Antica; parcoappiaantica.it/en/default.asp비가톨릭 신자를 위한 묘지아벤티노 언덕 아래 위치한 이곳에서 묘석을 읽은 것이 로마 방문의 즐거움 중 하나다.그처럼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묻힌 곳도 드물다. 시인 키츠와 셸리를 비롯해 마지막 나날을 로마에서 보낸 수많은 외교관과 이탈리아의 비가톨릭 신자들이 이곳에 안장됐다. 정교한 묘비에 새겨진 긴 묘비명은 이 영원의 도시에서 생을 마감한 여행가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셸리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이곳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아름다운 곳에 묻힌다고 생각하면 어찌 죽음을 사랑하지 않으리.” cemeteryrome.it성모 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천사와 순교자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미켈란젤로가 사망하기 1년 전 설계했으며,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18세기에 거대한 수직형 해시계가 대리석 바닥에 세워졌다. 부활절을 예측하고 그레고리력의 정확성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이곳을 방문하면 자오선을 표시하려고 벽 높은 곳에 낸 작은 구멍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Piazza della Repubblica 9;www.santamariadegliangeliroma.it몬티 리오네(Monti Rione)로마의 고대 유적지 한 가운데 위치한 동네가 관광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몬티 리오네는 예외다. 콜로세움에서 언덕을 올라가면 있는 이곳은 황혼부터 새벽까지 밤새도록 로마 토박이들로 북적거린다. 자갈 깔린 도로를 따라 진기한 공예품 가게와 멋진 카페가 늘어서서 외부와 격리된 분위기를 지켜 나간다. 고풍스러운 음식을 맛보며 수제 보석이나 독특한 맞춤의상을 구입할 수 있다. Via dei Serpenti산테우스타치오 일 카페(Sant’Eustachio Il Caffé)판테온과 나보나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카페에서 로마 최고의 커피를 맛볼 수있다. 실내 장식은 1930년대 이래 변하지 않았다. 고급 커피가 추가되긴 했지만 메뉴 중 최고는 카푸치노나 에스프레소다. 야외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그만이다.Piazza di Sant’Eustachio 82;santeustachioilcaffe.it펠리세 아 테스타쵸(Felice a Testaccio)놀랍게도 로마에서 형편없는 음식을 만나기가 쉽다. 특히 관광객을 상대하는 도심이그렇다. 그러니 시간이 난다면 로마 토박이들이 즐겨 찾는 테스타쵸로 가 보자. 트라스테베레에서 티베르 강 건너편에 있는 이 구역의 여러 맛집 중 펠리세 아 테스타쵸가 돋보인다. 모든 음식이 훌륭하지만 특히 카쵸에 페페(파스타 위에 페코리노 치즈와 신선한 페퍼를 얹은 요리) 때문에 로마 시민들이 이곳을 찾는다. 며칠 전에 예약해야 테이블을 얻을 수 있다.Via Mastro Giorgio 29; feliceatestaccio.it이스탄불선정: OWEN MATTHEWS루스템 파샤(Rustem Pasha)아야 소피아는 이보다 1000년이 더 오래 됐고, 술레이마니예는 훨씬 웅장하다. 그러나 건축학적 완벽성으로 볼 때 루스템 파샤가 이스탄불에서 가장 훌륭한 사원이다. 이집트 바자르의 분주한 시장 거리를 따라 잠시 가다 보면 단순한 아치형 입구가 나온다. 그위로 올라가면 16세기에 이즈니크 타일로 지어진 루스템 파샤가 있다.Hasircilar Caddesi, Fatih바실리카 시스테른(The Basilica Cistern)비잔틴 시대에 지하저수지로 지어진 바실리카 시스테른은 대리석과 화강함 기둥 수백 개로 지탱되는 거대한 지하 홀이다. 그 기둥들 사이에 서면 마치 기이한 숲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바닥에 물이 차 있기 때문에 수면에 기둥과 특이한 조각상이 비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 올드 시티에서 이보다 더 분위기 있는 곳을 찾기 힘들다.Yerebatan Caddesi 13, Sultanahmet;yerebatan.com올드 시티의 석양이스탄불은 경관이 뛰어난 도시다. 그러나 역사적인 건물 누페라의 옥상 테라스에서 올드 시티(구시가지)의 웅장한 모스크 너머로 지는 해를 보는 것이 최고다. 누페라의 바에서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역사적인 골든혼 만이 바로 내려다 보인다. 이곳은 저녁이면 이스탄불의 부르주아 보헤미언들로 가득하다.Mesrutiyet Caddesi 67, Beyoglu; nupera.com.tr순수 박물관(The Museum of Innocence)이 박물관은 개념의 기발함만이 아니라 전시물 자체로서도 방문할 가치가 있다. 터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은 1970년대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사랑과 집착에 관한 소설 ‘순수 박물관’을 쓰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주변에 있었던 물건들을 수집했다. 담배 꽁초부터 장난감, 가족 사진등 터키 부르주아들의 삶을 장식한 정교한 소도구들이 순수의 박물관에 전시된다.Cukurcuma Caddesi, Dalgic Cikmazi 2,Beyoglu; masumiyetmuzesi.org보스포루스 해변의 칵테일보스포루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이슨과아르고호 선원들이 황금의 양 털을 찾으려고 세상의 끝으로 항해하면서 이곳을 통과한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수로 중 하나였다. 요즘은 초대형 유조선, 화물선, 페리, 스피드보트가 이 해협을 수놓는다. 새로 문을 연 포시즌 포스포루스 호텔의 바 테라스는 편안하게 쉬면서 해협을 바라볼 수있는 가장 안락한 전망소다.Ciragan Caddesi 28, Besiktas;fourseasons.com/bosphorus그랜드 호텔 데 론드레스(Grand Hotel de Londres)부유크 론드라 호텔로도 불리는 이 고풍스러운 호텔에는 트로츠키가 한 때 머물렀고, 헤밍웨이가 젊은 종군기자 시절 이곳 바에서 술을 마셨다. 그 부근에 있던 페라 팰리스호텔의 역사적인 바가 재개발로 아쉽게도 철거되면서 이제 이 호텔의 바가 1920년대 콘스탄티노플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됐다.Mesrutiyet Caddesi 53, Beyoglu; londrahotel.net왕자의 섬(The Princes’ Islands)이스탄불 남쪽의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에 있는 9개의 열도다. 왕족이나 귀족의 유배지로 사용되다가 19세기 레반트의 부르주아들이 이곳에 대형 목조 여름별장을 지었다. 가장 큰 섬인 부유카다는 여름철이면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그럴 때는 고산 지대에 위치한 그리스 수도원 아야 요르기를 찾아가 멋진 경관을 즐기며 맛있는 점심을 먹는 게 최고다.아라스타 바자르(The Arasta Bazaar)그랜드 바자르가 세계 최초의 쇼핑몰일지 모른다. 그러나 550년 역사를 가진 이곳은 시끄러운 호객행위와 조잡한 상품, 그리고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그에 비하면 블루 모스크의 그늘 속에 위치한 아라스타 바자르는 더 우아하며 덜 붐빈다. 진품 이즈니크 도자기, 양탄자로 만든 가방과 신발, 황금칠을 한 유리제품이 유명하다.Arasta Carsisi 107, Fatih; arastabazaar.com코라 교회(The Chora Church)14세기에 지어진 이 교회에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비잔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한 후 터키의 무슬림들이 우상 형상 위에 회칠을해서 모스크로 만들었기 때문에 모자이크와 그림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제 영광스러운 과거로 복원된 이 그림들은 중세의 삶을 잘 보여준다. 카리예 박물관으로 불린다.Kariye Camii Sokak, Edirnekapi;choramuseum.com치야(Ciya)이스탄불은 미식의 수도로 유명하다. 특히 치야는 전통 아나톨리아 식당으로, 이 한 곳에서 터키만이 아니라 발칸, 중동,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의 훌륭한 요리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치야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낭만적인 페리 여행도 덤으로 즐길 수 있다.Guneslibahce sokak 48, Kadikoy; ciya.com.tr케이프타운선정: JUSTIN FOX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거대한 사암 덩어리로 이뤄진 테이블 마운틴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상징으로 필수관광코스다. 맑고 바람 없는 날을 택해 가장 쉬운 길인 플르테클루프 고르게를 따라 정상에 오르자. 정상의 케이블카 타는 곳에 있는 식당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멋진 경관을 즐기자. 다리가 아프다면 내려갈 때는 케이블카를 타자.마운트 넬슨 호텔(Mount Nelson Hotel)‘핑크 레이디’라는 별명을 가진 이 유서 깊은 호텔은 1세기 이상 왕족, 정치인, 영화 스타들을 끌어 들였다. 정원이 아름다운 이곳은 우아함과 식민지풍의 매력을 풍긴다. 방값이 너무 비싸다면 그곳에서 오후에 차라도 한 잔 마셔 보자.76 Orange Street; mountnelson.co.za하버 하우스(Harbour House)와 폴라나(Polana)칼크 베이는 케이프타운의 가장 아름다운 항구다. 그곳 방파제의 한 건물에는 훌륭한 식당과 술집이 자리잡고 있다. 위층에는 단순하고 우아한 하버 하우스 레스토랑이 있다. 항구에 들어온 배에서 바로 가져온 생선으로 요리를 해준다. 아래층에는 폴라나가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예쁜 술집이다.파도가 창에 부닥친다.harbourhouse.co.za올드 비스킷 밀(Old Biscuit Mill)낙후된 우드스톡 구역이 화랑과 현대식 레스토랑으로 재단장했다. 그 중심이 올드 비스킷 밀이다. 그곳에서 토요일 네이버굿 시장이 선다. 음식과 미술품, 공예품을 노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유기농 와인부터 고급 치즈까지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다.373–375 Albert Road, Woodstock;theoldbiscuitmill.co.za클리프턴 해수욕장(Clifton Beach)케이프타운은 세계적 수준의 해수욕장으로축복 받은 곳이다. 특히 화강암 바위와 맑은 비취색 물을 자랑하는 클리프턴이 가장 유명하다. 계단으로 이어진 4개의 작은 해변으로 구성돼 있다. 여름엔 인파가 붐빈다. 태양이 눈앞에서 대서양으로 풍덩 빠지는 저녁시간에 가는 게 가장 좋다.로벤 섬(Robben Island)테이블 베이 한가운데 있는 이 악명 높은 섬으로 페리를 타고 가보자.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래즈처럼 이 섬도 수십 년 동안 교도소로 사용됐다. 넬슨 만델라도 한때 이곳에 수감됐다. 서쪽 해변에는 펭귄 서식지가 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한 대포 포좌가 있다. robben-island.org.za커스텐보시 식물원(Kirstenbosch Gardens)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식물원 중 하나로 테이블 마운틴의 동쪽 비탈진 곳에 넓게 자리잡고 있다. 전시 식물이 7000종 이상으로 남아공의 다양한 식물군 대부분이 포함됐다. 여름철 일요일 저녁에는 야외 음악회가 열린다.sanbi.org/gardens/kirstenbosch콘스탄샤 와인가(Constantia Wine Route)웨스턴 케이프에는 스텔렌보시와 프란슈회크 도시 외곽에 더 유명한 와인가가 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의 콘스탄샤 와인가도 무시해선 안 된다. 여러 와인 농장이 개방돼 있으며 훌륭한 와인이 생산된다. 그 도로변에서 가장 큰 건물인 그루트 콘스탄샤는 네덜란드 총독의 관저였고 지금은 와인 저장소,식당, 박물관으로 사용된다.constantiavalley.comV&A 워터프런트(Waterfront)관광객들이 많이 찾지만 지금도 실제 항구로 긴요하게 사용된다. 멋진 빅토리아 시대의 건물이 많다(V&A는 빅토리아와 앨버트를 의미한다). 몇몇 훌륭한 식당과 가게가 있으며, 케이프타운의 유람 여행은 대부분이곳에서 시작된다. 알바 또는 바스큘 바에앉아 지나가는 배를 구경하자.waterfront.co.za케이프 포인트(Cape Point)아프리카의 서남단인 이곳은 높은 절벽과 거센 파도로 유명하다.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의 남쪽 끝에 위치하며 야생동물과 토착 식물들로 가득하다. 수영복을 챙겨가 이곳의 아름다운 비치 중 하나에서 차가운 물에 뛰어들어 보자(도시락을 훔쳐 가려는 개코 원숭이를 조심하라).capepoint.co.za베이징선정: MELINDA LIU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지구상에서 보존된 왕궁 중 가장 규모가 큰 이곳은 500년 동안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됐다. 황제 24명이 살았던 이곳은 이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제비꼬리형 지붕, 붉은 기둥, 보물로 가득한 소형 박물관이 상징이다. 가이드에게 황제와 궁녀와 내시가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지 않으면 9000개에 이르는 건물의 이름만 듣느라 시간이 다 흘러간다.Tiananmen Square; dpm.org.cnDuck de Chine(全鴨李)카오야(북경오리 요리) 전문점이다. 육즙이 많고 부드러우며 매혹적이다. 이 식당의 북경오리 요리가 베이징에서 최고다. 신 자두를 넣은 호박 등 다른 요리도 수준급이다.북경오리 식당은 주변이 너무 시끄럽지만 이곳에서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대화할 수있다. 빠삭빠삭한 오리 껍질을 씹을 때는 물론 대화가 안 되지만…At 1949-The Hidden City, GongtiBeilu; www.elite-concepts.com/promotions/1949/duckdechine.htm후통 투어원나라 시대(元朝,1271–1368)에 베이징에는 후통(胡同)으로 알려진 매력적인 골목길이 생겼다. 인력거를 타고 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달리며 고대 가옥, 종루, 목가적인 허우하이(后海) 호수,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무대가 된 거대한 정원을 둘러보자. 안타깝게도 전통 후통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구경하려면 서두는 게 좋다.hutongculture.com798 예술구과거 동독이 건설한 군사용 전자부품 공장이던 이곳이 화랑, 아파트, 부티크, 카페, 술집이 가득한 활기찬 동네로 바뀌었다. 최신 전시회를 구경하거나 촬영 중인 패션 모델들이나 미술품 상인들, 또는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거닐어도 좋다. 넓기 때문에 가이드를 고용하거나 적어도 자세한 지도는 지참하자.2 and 4 Jiuxianqiao Lu, Dashanzi district판자위엔(潘家園) 골동품 시장주말에 서는 노천 벼룩시장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 골동품, 고산지대 부족이 짠 무지개색 직단, 은으로 만든 티베트 부적상자, 마오쩌둥 어록집 및 문화혁명 당시의 소품 등 매우 다양한 상품이 거래된다. 일찍 가서 신중하게 고르고 심하게 흥정하라.East Third Ring Road, southwest ofPanjiayuan Bridge템플 레스토랑 베이징(TRB)구불구불한 후통 안에 있는 이 식당은 1683년에 세워진 티베트 불교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1949년 베이징 최초의 흑백 TV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개조됐다가 다시 현대식 식당으로 거듭났다.23 Songzhusi, Shatan Beijie;temple-restaurant.com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프랑스 건축가 폴 앙드뢰가 설계한 티타늄-유리로 된 반구형 건물로 ‘오리알’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에 세워진 여러 대형 건축물 중 하나다. 외부도 놀랍지만 내부도 열대 견목을 많이 사용해 부드러운 분위기를 낸다. 일부 공연은 세계적 수준이다.2 West Changan Avenue; chncpa.org/ens인산타린(銀山塔林)베이징 중심부에서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이 조용한 계곡 숲은 900년 전 세워진 다층석탑 7개로 유명하다.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따라 해발 730m인 인산에 오르거나 명조의 경극 무대와 사원이 있는 시골 마을을 방문하자.Changping district구이지에( )일명 ‘귀신의 거리’. 붉은 등을 걸어놓는 유명한 먹자골목이다. 볼거리도 많고 해물, 신장 케밥, 양다리 구이 등 먹을 거리도 풍성하다. 화자이위엔(花家怡園) 식당은 접시 돌리기, 변검 등으로 구성된 디너쇼도 제공한다.Dongzhimenwai Street,Chaoyang district황화청(黃花城) 장성대다수 관광객은 거의 완전히 다시 만든 만리장성을 찾는다. 그러나 안목 있는 사람들은 비바람에 닳은 고대의 웅장함을 상기시키는 장성을 찾는다. 황화청은 쓸쓸한 망루와 함께 멋진 경관을 자랑하며 이곳에 가면 저수지 양쪽 면에 붙어 있는 만리장성의 일부를 비교적 쉽게 걸을 수 있다.방콕선정: LENNOX SAMUELS왕궁/ 차오프라야 강차오프라야 동쪽 강둑에 세워진 태국 왕궁은 넓이가 21만3600㎡이며 1782년 이래 태국 국왕들이 살아왔고, 에메랄드 부처 사원이 있다. 보트를 타고 왕궁을 방문하면 가는길 그 자체가 좋은 관광이다.Maha Ratchawang, Phra Nakhon;Tha Tien or Tha Chang pier;grandpalacethailand.com왓 아룬방콕의 빼어난 사원(왓) 중 하나인 왓 아룬(‘새벽의 사원’이라는 뜻)은 차오프라야 강서쪽 둑에 있다. 왓 아룬은 크메르 스타일의 탑으로 여러 색깔의 도자기 조각으로 장식돼 있고, 사면에 방문객이 오를 수 있는 가파른 층계가 만들어져 있다.34 Arun Amarin Road, Bangkokyaidistrict; Tha Tien pier, then ferry acrossthe river; watarun.net차투착 주말 시장파리의 클리낭쿠르, 런던의 포도벨로 로드에 해당하는 방콕의 벼룩시장이다. 태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15,000개 이상의 노점이 있다.타이 실크부터 침구류, 청바지, CD, DVD, 수제 신발, 보석류, 도자기, 가죽제품, 책, 음식 등 모든 상품이 거래된다. 흥정이 필수다.Kamphaeng Phet 3 Road; BTS Skytrainstation: Mo Chit; MRT station: KamphaengPhet; chatuchak.org카오산 로드배낭여행자의 천국이지만 부유한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호스텔, 저렴한 호텔,저렴한 식당, 거리 음식, 선술집, 바가 즐비하다. 젊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아 축제분위기를 띠며 세계 어디든 비자를 얻어줄수 있다고 홍보하는 여행사들로 유명하다.Banglamphu area of Phra Nakhondistrict; Phra Arthit pier왓 포방콕의 많은 사원 중에서도 특히 가볼 만한 곳이다. 가장 큰 볼거리는 높이 15m, 길이 43m인 거대한 와불상이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신도들이 동전을 넣을 수 있도록 108개의 청동 사발이 복도에 늘어서 있다.248 Thai Wang Road, Phra Borom MahaRatchawang, Phra Nakhon; Tha Tien pier;watpho.com/en/homeMBK 센터방콕의 라차프라송 구역은 가이소른 플라자에서 센트랄 월드를 거쳐 시암 파라곤, 시암 디스커버리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고급 상가로 구성돼 있다. MBK 센터도 매우 길지만 그와는 다르다. 저렴한 명품 짝퉁 상품으로 넘쳐난다. 5000달러짜리 프라다 가방의 복제품을 200달러면 구입할 수 있다.Corner of Rama I Road and Phaya Thairoads, Pathumwan district; BTS Skytrainstation: National Stadium; mbk-center.co.th/en/home룸피니 무에타이 경기장태국의 전통 무술인 무에타이에 관심이 있거나 호기심이 있다면 이곳을 방문하라. 젊은 이들이 무에타이로 대련하는 시끄러운 곳이다. 최고의 선수는 무술 기술이 뛰어난 사람일 뿐 아니라 초콜릿 복근과 조각 같은 몸매를 가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간주된다.Rama IV Road, Pathumwan; MRT station:Lumphini; muaythailumpini.com/index1.html만다린 오리엔탈 호텔135년 전에 개장한 이 호텔은 지금도 최고의 서비스로 유명하다. 이 호텔의 우아함이나 호화로움과는 별도로 차오프라야 강변에서 칵테일이나 차를 한 잔 하기에 이만큼 좋은 곳도 없다.48 Oriental Avenue; mandarinoriental.com/bangkok차이나타운야오와랏으로 불리는 이 구역은 혼란스럽지만 태국 화교들의 매력과 향취를 자랑한다. 팔찌, 체인 등 금붙이 제품을 구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여기서는 물건을 살 때 아직도 흥정이 필요하다. 노점 음식도 일품이다. 금불상이 있는 왓 트라이미트도 여기에 있다. 특히 이곳의 춘절이 환상적이다.Yaowarat Road/Sam Pheng Lane;Ratchawang Pier; bangkokforvisitors.com/chinatown국립 박물관18세기 궁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 박물관은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이며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각종 예술품과 유물을 소장한다. 인근에 있는 사남루앙도 가볼 만하다.왕족의 화장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4 Na Phrathat Road, Phra Borom MahaRatchawang, Phra Nakhon district;Maharaj Pier; bangkoksite.com/nationalmuseum/index.htm시드니선정: CAMERON STEWART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반짝이는 하얀 돛처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관광객과 현지인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면서 매력적인 항구 너머로 부풀어 오른다.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건물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바나 레스토랑에 들러 호주산 백포도주를 마시며 항구 다리와 배들을 구경하기에 그만이다. 오페라 하우스 내부 투어도 가능하고 시간이 맞으면 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Bennelong Point; sydneyoperahouse.com하버 워크(Harbor Walk)이 매력적인 산책로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해 왕립 식물원을 거쳐간다. 식물원에는 유명한 매콰리 부인의 의자가 있다(의자라기보다 벤치에 가깝다). 식민지시대 총독인 라클런 매콰리의 부인이 시드니 만의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더 내려가면 울루물루와 핑거 워프가 내려다 보이는 보이 찰턴풀에 이른다. 바닷물 풀에서 수영한 뒤 위층의 카페에 올라가 바다와 해군 함정들을 바라보며 점심을 즐겨 보라.여름철 야외 영화왕립 식물원 안 매콰리 부인의 의자 부근에 세인트 조지 야외 영화관이 있다. 여름철이면 오페라 하우스, 하버 브리지, 스카이라인의 야경과 함께 최신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지난 4월에는 호주 오페라단이 이곳에서 라트라비아타를 공연했다. 내년에는 카르멘을 공연할 계획이다.stgeorgeopenair.com.au맨리 페리(Manly Ferry)서큘러 키에서 맨리를 오가는 페리는 시드니의 명물 중 하나다. 30분이면 항만을 건너가 반대편에서 시드니의 멋진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중간에 타롱가 동물원에 들러도 좋다. 맨리에 도착하면 택시를 타고 고급 식당 필루 앳 프레시워터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면 그만이다.manlyaustralia.com.au/information/gettinghere.asp; piluatfreshwater.com.au하버 브리지 오르기시드니 하버 브리지에 올라 시드니의 360도 경관을 감상하자. 항구만이 아니라 멀리 블루 마운틴까지 눈에 들어온다.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 다리 교각을 오른다. 안전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다. 오르면서 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다리에 감탄하고 멋진 경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australia.gov.au/about-australia/australian-story/sydney-harbour-bridge조나스 레스토랑(Jonah’s Restaurant)시드니의 북부 해변에 위치한 훼일 비치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있는 식당이다. 유명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시드니 중심가에서 자동차로 50분 거리에 있다. 그러나 로즈베이에서 수상 비행기를 타면 시드니 최고의 해변들 위를 통과해 15분 만에 도착한다.69 Bynya Road, Whale Beach; jonahs.com.au/restaurant시드니 현대미술관(Sydney’s Museum of Contemporary Art)최근 수백만 달러를 들여 재단장한 이 미술관은 서큘러 키의 페리 터미널에 있다. 미술 작품을 충분히 감상하고 나면 전면의 파티오에 나가 점심을 먹거나 오페라 하우스가 내려다 보이는 위층의 조각품 테라스를 찾아라.140 George Street, The Rocks; mca.com.au/visit시드니 극단(Sydney Theatre Company)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을 못 봤다면 아카데미상을 받은 배우 케이트 블랜칫의 시드니 극단 공연을 추천할 만하다. 월시 베이의 분위기 있는 옛 부두에 극장이 있다. 극장 끝에 있는 바는 항구를 내려다 보며 칵테일을 마시거나 식사하기에 이상적이다.22 Hickson Road, Walsh Bay;sydneytheatre.org.au시드니 수족관(Sydney Aquarium)시드니에 가서 상어를 보지 못하면 뭔가 빠진 듯하다고 느끼는가? 바로 곁에서 헤엄치는 무시무시한 상어의 입을 보고 싶다면 유명한 상어 터널을 통과해 보자. 상어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다면 상어와 함께 헤엄칠 수도 있다. 훈련된 상어라 다칠 염려는 없다.좀 더 생생한 상어와의 만남을 원한다면 서핑을 하라.1-5 Wheat Road, Darling Harbour;sydneyaquarium.com.au록스(The Rocks)록스 구역의 자갈길을 걸으며 옛 식민시대 건물들 사이를 누비면 1788년 백인이 처음 정착할 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소란스러운 선술집에 들어가 항구를 내다 보자. 록스 고스트 투어나 록스 디스커버리 박물관을 통해 살인, 교수형, 채찍질 등 호주 형벌 역사의 어두운 면도 알아보자.ghosttours.com.au; therocks.com/sydney-things_to_do-the_rocks_discovery_museum.htm

2012.08.14 15:36

26분 소요
혁명적 기술, 초절정의 美 스틸 시계가 거듭난다

산업 일반

바젤 시계 페어, 정확하게 말해서 바젤월드는 세계의 양대 시계 박람회 중 둘째로 열린다. 1월에 호반도시 제네바에서 먼저 열리는 제네바 페어가 더 고급스러운 반면 바젤 박람회는 규모가 더 크다.지난 20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바젤 페어에 참석했다. 그리고 매년 중앙 홀에 들어설 때 느껴지는 전율은 내게 시계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항상 시계산업의 혁신과 파격에 경탄해왔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금융위기의 상흔은 여전히 또렷이 남아 있지만(경영자가 경질되고 일자리가 사라졌다) 많은 중견 업체가 그 불행 속에서 기회를 만들어냈다.일례로 잘 알려진 무브먼트(시계의 모터를 구성하는 주요 부품) 제조사 BNB가 파산하자 언제나 자신만만한 위블로 사장 장-클로드 비버는 그 중 30명을 고용해 단번에 사내에 맞춤 고급시계 사업부를 구성했다.비버는 이번 박람회에서 미닛 리피터(시와 분을 소리로 알려주는 기능)를 포함해 그런 노력의 결실을 자랑스럽게 선보였다. 박람회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미래를 낙관하는 듯했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전문기술을 새로운 검약 분위기에 어울리게 미세 조정했다. “올해엔 많은 시계 브랜드가 바젤에 도착할 때 박람회가 어떻게 진행될지 불안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바젤 박람회 참가 경력이 32회에 달하는 라 로제 영국 브라이틀링사 상무가 말했다.“그러나 대부분 떠날 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앞날을 낙관했다.” 브라이틀링의 전시관을 빛낸 제품은 수퍼오션 II였다. 튼튼하고 세련되고 젊어 보이는 다이빙 타이프의 시계다(라 로제는 이 시계를 ‘덜 비싼’ 브라이틀링이라고 조심스럽게 불렀다). 가격은 2300유로 선.제니스의 신임 CEO 장-프레데릭 뒤푸르는 브랜드 전체에 일관된 특색을 부여하려 심혈을 기울였다. 올해 컬렉션의 특징은 바로크풍의 호화로운 시계로 고전적인 시계제조 스타일을 보여준다. 새로 나온 캡틴 계열의 제품이 대표적이다. 두어 해 전만 해도 이런 시계가 거의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지금은 수요가 많다.정교하게 설계됐으며 깨끗하고 단순하다. 바늘을 움직이는 고급 무브먼트를 자체 제작한다. 판매가격도 적당하다. 실제로 전시관을 돌아다니는 동안 가격(그보다 ‘가치’) 문제가 공공연히 논의됐다. 브레게는 어느 모로 보나 전혀 싼 티가 나지 않는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10Hz의 고주파 무브먼트로 기술적 혁명의 완성도를 과시한다(반면 대다수 수동시계는 2.5~4Hz 사이에서 움직이며 5Hz이면 빠른 편에 속한다).브레게가 개발한 이 혁신적인 무브먼트는 스포츠형의 타이프 XXII에 내장되며 기본가격이 결코 싸지는 않지만 1만3000유로 적당한 수준이다. 한편 브레게의 자매 브랜드 블랑팡 시계의 진정한 가치는 무브먼트 안에 있다고 CEO 마크 하이에크는 설명했다. 그는 그 핵심가치를 훼손하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시장 변화에 대응했다.“화이트 골드 소재를 사용할 곳에 대신 스틸을 썼다.” 하이에크의 컬렉션은 고전적인 특성이 강하다. 예를 들어 3종의 호주머니 시계는 케이스의 투명한 뒷면을 통해 무브먼트에 새겨진 디자인이 보인다. 호주머니 시계는 쇼파드에서도 간판제품 중의 하나였다. 이 시계는 20세기 초의 디자인에 기초했으며 손목시계로 사용해도 된다.쇼파드 산하 고급시계 브랜드 L.U.C(루이스-율리스 쇼파드)는 이를 포함한 특수시계 4종 세트를 내놓았다. 이 세트는 쇼파드가 창사 15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다. 역시 창사 150주년을 기념하는 태그 호이어도 복고 분위기를 감지했다. 신비감을 주는 디자인 중의 하나인 1970년대 실버스톤을 다시 선보였다.빈지티풍의 스포츠 시계 애호가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시계도 몇 가지 준비했다. 롤렉스의 하위 브랜드인 튜더의 헤리티지 크로노그라프가 대표적이다. 헤리티지 크로노는 40년 전의 디자인을 되살린 세련된 스틸 소재 시계다. 금속 줄과 고급스러운 나일론 줄이 딸려나온다. 용두 둘레의 도톨도톨한 금속표면이나 스톱워치 단추 등의 작고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정성을 들였다. 튜더의 모 브랜드인 롤렉스가 선보인 클래식 익스플로러의 신 모델은 현대적인 취향에 맞게 개조해 이 박람회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집약했다.케이스의 지름을 약간 더 넓히고 특허 기술인 이지링크 시스템을 도입해 날씨가 더울 때 시계줄을 느슨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파텍 필립도 스틸 소재를 사용했다.하지만 불황을 의식한 선택은 아니었다. 매력적으로 개조한 연간 캘린더 시계 가격을 합리적으로 책정하자는 말은 있었다. 만년 캘린더 시계 값의 절반에 가까운 2만8000유로 이하로 정해졌다.그러나 파텍 필립의 진짜 걸작은 몇 분의 1초까지 재는 크로노그라프 시계(스톱워치 기능을 갖춘 시계)였다. 스틸 케이스에 담겼지만 가격은 33만5000유로(5억500여만원)를 넘는다.이렇게 비싼 까닭은 무브먼트가 대단히 복잡한 탓에 1년에 20~30개밖에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싼 가격에도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파텍의 복합기능 시계(high-complication watch, 크로노그라프 등 여러 기능을 추가) 중 스틸 소재는 이 제품뿐이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귀금속 소재의 시계들보다 더 인기가 높았다.예전에는 파텍이 스틸 시계를 금시계 값에 판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스틸 시계를 집 한 채 값에 판매한다는 사실에 거물 수집가들은 오히려 즐거워하는 듯하다. 진귀한 파텍 시계 가격이 한 세대에 걸쳐 꾸준히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수집가들은 아마 이 시계(파텍은 “가장 격조 높은 형태의 스틸”이라고 묘사했다)를 부동산보다 더 나은 투자로 기대하는 모양이다.

2010.05.11 14:02

4분 소요
왜 무엇이 방아쇠를  당기게 했나

산업 일반

버지니아 공대의 조용한 아침을 피비린내 나는 악몽으로 바꾼 세상을 향한 분노와 박탈감 만일 당신이 독일어 수업을 듣는 20세의 생물학도라면 총을 맞는 데 적응하기까진 분명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 데릭 오델은 처음엔 검은색 옷을 착용한 가녀린 몸매의 청년이 권총을 들고 나타나자 필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러곤 청년의 발포로 탄피가 권총 밖으로 튕겨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델은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눈도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는 공허함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면 그의 인생과 삶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조승희에게도 삶과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꿈 속을 제외하면 누구와도 그것을 나누려 하지 않을 각오인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학 사상 가장 흉폭한 최후의 살인극을 펼쳤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그리고 어쩌면 대학에 들어가기 오래전부터 집에서 그는 황량하고 조그만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살았다. 그에게 다가가 도우려는 교사와 급우들의 노력을 거부했으며 나머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젤리라는 이름의 수퍼모델 여자친구를 상상으로 지어냈고, 환상 속에서 그녀의 연인(스팽키)을 자처했다. 스스로를 “물음표”로 부르기도 했다. 불을 켠 채 잠을 잤으며 자면서도 신음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표현력이 뛰어났다. 기숙사 방 벽에는 누군가를 동경하듯 휘갈겨 쓴 ‘샤인’이란 제목의 노래 가사가 적혀 있다(“내게 말해 주고, 암시해 주소서/내가 어디를 봐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내가 무엇을 찾을지 알려주소서/오 하늘이시여, 당신의 빛이 내려쪼이게 해주소서.”) 4월 16일 오전 7시 조금 지나 학생 2명을 살해하고 9시30분 직후 30명을 더 살해하는 사이 조는 우체국으로 달려가 뉴욕에 있는 NBC방송으로 소포를 부쳤다(그가 우편번호를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 소포에는 자신과 “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다른 사람들을 강간하고, 윤간하고, 모욕하고, 괴롭한 “기독교 범죄자들”에게 복수하는 일종의 천사로 자신을 묘사한 천박한 선언문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 고통의 원인을 부유층에게서 찾는 듯했다.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지. 이 녀석들아, 너희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이 속물들아, 너희는 금목걸이로도 부족했지? 그리고 신탁기금으로도, 보드카로도, 코냑으로도 부족했지?” 그러나 그의 분노는 대체로 일관성이 결여됐다. 그는 아마도 불특정 다수에게 복수를 하는 ‘이스마엘의 도끼’를 자처했을지 모른다. 그는 “반 테러리스트”를 자처하는 테러리스트인 동시에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에서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디오 게임 중독자 “에릭과 딜런”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는 끔찍할 정도로 미국적인 학교·직장 총기사건의 새로운 기준을 수립하려 한 듯하다(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캠퍼스 총기 난사사건의 기록 보유자는 1966년 오스틴의 텍사스대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 엽총으로 16명을 살해하고 31명에게 부상을 입힌 찰스 휘트먼이었다). 어쩌면 누군가 어디선가 조에게 악의 씨앗을 심어 준 듯하다. 만일 악마 자신이 아니라면 어떤 낯선 사람이나 친척이 말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손상을 입었다면 그 상처는 한국 출신의 소년이 학업적 성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고립감과 수모감 탓에 깊게 악화됐다. 조는 정체성 혼란에 휩싸였다. 부모처럼 한국인도 아니고, 친구들처럼 미국인도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자식의 정서적 문제로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교회에서도 그는 청년부(특히 부유층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았다. “조는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지닌 영리한 학생이었다”고 버지니아주 센트레빌 한국장로교회의 한 목사는 말했다. 조의 어린 시절 목사였던 그는 언론의 추가 인터뷰를 피하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는 조가 성경을 믿었는지에 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선언문에서 조는 기독교 신자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자신을 십자가에서 순교한 예수에 비유했다. 외로운 소년 시절에서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조의 성장 과정은 사악한 전조로 가득하다. 만일 누군가 조의 문제를 미리 파악했더라면 피했을지 모를 현대적 비극이다. 조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서울에서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았다. 조의 외삼촌(한국 언론에선 단지 ‘김씨’로 표현)은 조카가 특히 누나 선경씨에 비해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수만 명의 한국인처럼 조의 가족도 1992년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이민갔다(조씨 가족은 버지니아주 교외의 40만 달러짜리 연립주택에 살았다). 그러나 이민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녀 교육이었다. 이민 당시 조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한국의 이민자들은 선발기준이 매우 까다로운 미국 일류대학 입학을 매우 중시한다. 그중에서도 아이비 리그를 선호한다. 선경씨는 프린스턴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조씨의 아버지는 자식의 학비를 대려 세탁소에 취직해 하루 12시간 일했다. 점심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먹었다. 그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 자랑스럽다고 말할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말이 없었다(외삼촌 김씨는 한국 기자에게 자신의 누이가 프린스턴대에 진학한 딸에 관해선 많이 이야기했지만 버지니아 공대에 간 아들에 관해선 별로 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버지니아 공대에 다니는 조의 급우들은 그를 끼워주려 애썼다. 기숙사 친구들은 그를 사교클럽 파티에 데려갔고, 조는 술마시기 시합을 즐겼다. 보드카와 쿨-에이드를 비우고, 비어퐁 게임(컵에 맥주를 붓고 상대편 컵에 탁구공을 던져 들어가면 다 마셔야 하는 게임)을 했다. 조는 즐거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탁구공을 맥주컵에 던지는 데는 능숙했다. “그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마지막 한모금까지 다 마셨다”고 기숙사 동료 앤디 코치는 말했다. 조는 미국의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 ‘페이스북(facebook.com)’에 ‘멋진 아이들(The Cool Kids)’이나 ‘멋지게(Be Cool)’ 같은 제목으로 자신의 그룹들을 소개했다(물론 스스로 그렇다고 느끼진 않았을 테지만). 그의 기숙사 방은 그 자신처럼 냉랭했다. 그 흔한 포스터도, 사진 한 장도 없는 휑한 콘크리트 블록뿐이었다. 2005년 가을 조는 영어 선생들과 급우 중 일부를 섬뜩하게 했다. 죽음에 관해 쓰고, 학생 중 일부의 사진을 몰래 찍어 깜짝 놀라게 했다(휴대전화 카메라를 책상 밑에 숨기고 여학생들을 촬영했다). 조는 수업 시간에 거의 말이 없었다. 일부 학생이 그로 인해 수업을 회피하자 시를 가르치는 니키 지오반니 교수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조에게 시의 사악한 내용을 바꾸든가, 아니면 수업을 포기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조는 “당신은 내게 강요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고 지오반니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밝혔다. 조는 창작 과목의 공동 책임자인 루신달 로이 교수에겐 특히 골칫거리였다. 지난주 언론과 가진 일련의 인터뷰에서 로이 교수는 조를 돕거나 도움을 주려는 노력에 관해 침울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조가 “거만하고 매우 해로운 존재”임을 알았지만 그를 지도하려 노력했으며 그에게 상담을 받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조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했다. 깜짝 놀란 로이 교수는 그런 사실을 학생처, 쿠크 상담센터, 시퍼트 건강센터, 버지니아 공대 구내경찰, 그리고 문리과 대학에 통보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소식통은 로이 교수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으며 대신 “자신이 조를 보살피겠다”고 제의했다고 밝혔다). 로이 교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대학들은 학생이 도움을 구하도록 장려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려고(만 18세 이후엔 음주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성인이다) 학생의 개인 정보나 건강 정보를 부모에게까지도 잘 알려주지 않는다. 직접적 폭력의 위협이 없으면 대학당국은 학생에게 전문적 도움을 받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조는 누구에게도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 2명의 여학생을 스토킹했다. 평소 같으면 목석 같은 조가 한 여성과 인터넷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 그녀를 찾아갔다. 존 에디라는 이름의 룸메이트와의 흔치 않은(동시에 뭔가를 시사하는) 대화에서 조는 자신이 그녀를 만난 이유는 “그녀의 눈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멋있는지 알아보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에디는 CNN과의 회견에서 “조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헤픈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는 그녀의 방에서 자신을 ‘물음표’로 소개했다. “그 여학생은 그 말에 기겁을 했다”고 에디는 말했다. 그 여학생은 교내 경찰에 연락했다. 2005년 11월 27일 조는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여학생은 처벌을 원치 않았다. 이 사건은 그 후 교내 규율관리부로 이관됐지만 그 부서에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전혀 제재받지 않은 조는 이제 다른 여성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녀도 교내 경찰에 연락했다. 그러나 또다시 아무 혐의도 씌워지지 않았다. 경찰 조서를 읽은 한 경찰 소식통은 그 두 사건은 사소한 사건이기 때문에 “스토킹”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 사건 이후 조는 기숙사 친구 앤디 코치에게 “자살하는 편이 좋겠다”고 털어놓을 만큼 충격받은 듯하다. 코치는 경찰에 연락했다. 조는 이번에는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로 이송됐다. 판사는 조에게 버지니아주 래드퍼드에 있는 성 올반스 행동건강센터에 잠시 지내도록 명령했다. “정신 질병의 결과로 자신이나 타인에게 즉각적인 위험이 된다”(비자발적 일시 감금의 경우 즐겨 쓰는 상투적 표현)는 판단에서다. 이튿날 한 정신과의사는 조의 “정신이 메말라 있으며 정서가 우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는 자신은 자살 의도가 없다고 주장했으며 정신과의사도 “그의 통찰력과 판단력은 정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조는 당일로 풀려났다. 그 센터의 에릭 언하트 대변인은 “우리는 수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으며 당국과 충분히 협조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논평할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조가 법원이 명령한 치료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상담과 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 해엔 스토킹 사건이 재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생각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2006년 가을 조는 에드 팔코 교수가 가르치는 희곡 수업에 ‘리처드 맥비프’라는 제목의 작품을 제출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3세 소년 존은 계부 리처드가 자신의 무릎에 손을 갖다대자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 “나는 딕이란 이름의 나이 들고, 머리가 벗겨지고, 과체중이고, 소아 성도착적인 계부에게 희롱당할 수 없다!”며 “당장 내게서 그 손을 집어치워, 이 멍청아!”라고 존은 소리친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존은 혼잣말로 이렇게 뇌까린다. “딕을 죽여야 해, 딕을 죽여야 해. 딕은 죽어야 해. 딕을 죽이자.” 존은 아침식사 대용 시리얼 바를 그의 목구멍에 가득 밀어넣어 딕을 죽이려 하지만 실제론 딕이 “치명적인 일격”으로 존을 살해한다. 조의 또 다른 희곡(‘미스터 브라운스톤’)에선 교사가 학생들을 괴롭히고 강탈한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팔코 교수는 조의 작품이 “매우 사춘기적이며 멍청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수업 시간에도 팔코 교수와 학생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려 했다”고 팔코는 말했다. 흥미롭게도 팔코 교수는 조가 다른 학생의 희곡에 관해 쓴 비평은 명료하고 깊은 사고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팔코 교수는 학생들이 조의 희곡을 논의할 때면 조가 인정을 받는다는 희미한 증거를 찾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일”일 뿐이었다. 팔코 교수는 조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로이 교수를 비롯해 글쓰기를 지도한 또 다른 교수인 리자 노리스와도 상의했다(조는 노리스 교수의 수업도 들었다). 노리스 교수는 팔코 교수에게 자신이 매리 앤 루이스 부학생처장에게 조에 관해 이미 알렸다고 말했다. 노리스 교수는 뉴스위크에 보낸 e-메일에서 루이스 부학생처장이 자신을 도우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조의 정신건강 문제에 관한 어떤 언급도, 경찰 조서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루이스 부학생처장은 이에 관한 언급을 거부했다). 대학당국은 지난주 머뭇거리며 조가 경찰과 정신건강센터에 불려간 사실이 학생부 기록에서 사라진 과정을 설명하려 진땀을 뺐다. 경찰 보고서는 대학 내 상담센터로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학교 행정당국자들은 “사태를 조사 중”이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팀 케인 버지니아 주지사는 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버지니아주에선 총기 구입이 쉽다. 신원확인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는 기간도 없고, 배경검사도 최소 수준에 그친다. 3월 13일 조는 로아노키 총포상에 가 신용카드로 9mm 구경의 글록19 권총 한 자루와 탄알 50발이 든 탄창을 571달러에 구입했다. 가벼운 반자동 권총인 글록은 경찰과 갱들이 모두 애호하는 총으로 초당 5발까지 발사 가능하다. 탄두 부분이 화산 분화구처럼 팬 형태인 ‘할로 포인트(hollow-point)’형 특수 총탄(장기 파손 가능)을 33발까지 장전 가능한 탄창은 2초 내에 갈아낄 수 있다. 조가 왜 에밀리 힐셔를 첫 번째 희생자로 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들은 적도 없고, 그녀의 방은 다른 기숙사 건물에 있었다. 방의 위치도 엘리베이터 뒤쪽에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그러나 힐셔는 밝고 푸른 눈을 가진 예쁜 여학생이었고, 조는 그녀가 남자 친구인 칼 손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4월 16일 오전 7시5분쯤 손힐이 그녀를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기숙사 건물로 데려다 줬을 때 말이다. 그 후 조는 힐셔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방에서 사살한 뒤 옆방에 살던 기숙사 사감 라이언 클라크가 끼어들자 그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조는 피묻은 발자국만 일부 남긴 채 사라졌다. 한편 힐셔의 여자친구 헤더 휴(18)는 오전 8시쯤 남자 친구 방에서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기숙사 건물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 형사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녀는 힐셔의 남자 친구 손힐이 총을 가졌으며 그가 최근 자신과 힐셔를 사격연습장에 데려갔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이런 사실을 결정적 단서로 여긴 듯하다. 휴는 뉴스위크에 “경찰은 그 사건이 치정관계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고 손힐이 힐셔를 죽이려 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휴는 힐셔와 손힐이 “서로를 끔찍하게 좋아했으며 손힐은 폭력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손힐을 제1 용의자로 “확신”한 듯하다고 전했다. 경찰은 곧 손힐을 신문했으며 그의 집에서 살인용 무기를 수색했다. 이런 일은 그 후 엄청난 판단착오임이 드러난다(살인의 경우 제1 용의자는 대개 남자 친구나 배우자다. 경찰은 당시 제공된 정보에 바탕해 최선을 다했다고 밝혔다). 버지니아 공대 찰스 스테거 총장은 전에도 학내 비상사태를 경험했다. 지난해 가을 초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기결수가 버지니아 시골 지역에서 갈수록 커지는 이 대학 캠퍼스 부근으로 탈출해 병원 경비원 한 명과 부보안관 한 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스테거 총장은 일부 학생에게 교실 건물에서 대피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엔 대학 내 고위 관리들과 대응책을 논의하며 스테거는 전에 내린 그 같은 결정을 재고했다고 말했다. 대피령으로 인해 학생들이 살인자의 총기 조준경에 그대로 노출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그대로 있게 함으로써 공황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스테거 총장과 부하 직원들이 9시45분쯤 버레스홀의 대학 이사실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순간 경찰 보고서가 도착했다. 총기 난사가 또 한 차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스테거 총장은 총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그 소리가 인근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순간 노리스홀 쪽으로 달려가는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스테거는 경비원들에게 총장실로 가는 문을 걸어 잠그라고 지시했다. “총장실이 목표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고 그는 말했다. 생물학도로 초급 독일어 수업을 듣던 데릭 오델도 ‘탕탕’ 하는 소리가 인근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려니 생각했다. 수업을 듣던 학생 중 누군가 그 소리가 총성일지 모른다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다른 학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총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이유에서다. 바로 그때 검은 가죽 재킷에 짙은 청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방에 들어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수업을 가르치던 크리스토퍼 제임스 비숍 교수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곤 207호실 앞줄 부근에 있던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책상이 놓인 열을 따라 계속 발포하며 학생들을 살해했다. 오델은 책상 밑으로 엎드린 뒤 교실 뒤쪽을 향해 기기 시작했다. 오른팔 상부에 총알 구멍이 나면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난사자가 “불과 2초 만에” 총을 재장전하는 소리와 함께 철저하고 의도적으로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남자는 떠났다. 오델은 고개를 들고 몇 안 되는 생존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고 그는 회상했다. 살인자가 되돌아오지 않도록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옆방 211호에선 조슬린 쿠투르-노왁이 중급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중 총소리를 들었다. “저게 내가 생각하는 소리가 아니어야 하는데”라고 그녀는 소리쳤다. 그녀의 수업을 듣던 콜린 고더드(21)는 나중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우린 그녀에게 별 문제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리스홀에선 많은 공사가 진행돼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학기 내내 소음을 불평했다.” 여전히 걱정이 된 쿠투르-노왁은 문을 열고 복도를 힐끗 바라본 뒤 즉시 문을 닫았다. “그토록 놀란 표정을 본 적이 없다”고 고더드는 말했다. 그녀는 “911에 전화해”라고 말했다. 고더드는 휴대전화기를 움켜쥐고 911 교환원에게 알렸으나 교환원은 그의 말을 알아듣는 데 애로를 겪었다. 바로 그때 살인자의 모습이 힐끗 보였다. “그는 단지 책상 열을 따라 발포하며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발포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총을 쏠 뿐이었다.” 고더드는 살인자가 911 교환원의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워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 여학생 한 명이 그 휴대전화기를 집어들고 경찰에 신속한 출동을 간청했다. 그러자 조는 그 여학생에게 고개를 돌려 등에 발포했다. 고더드는 소리내면 그의 주목을 끌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간 살인자가 고더드의 다리에 총을 쏘았다. 고더드는 죽은 체했다. “그에 맞서 영웅이 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고더드는 당시를 돌이켰다. 다시 207호실. 오델은 책상 위로 쏜살같이 달려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만일 그 문으로 그가 다시 들어오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당시를 돌이켰다. 그와 3명의 다른 생존자는 번갈아가며 발과 손으로 교실 문을 떠받쳤다. 그러면서도 몸은 최대한 문에서 떨어져야 했다. 우스운 행동이었지만 다른 방법은 별로 없었다. 연단은 바닥에 고정돼 있었고, 의자와 책상은 너무 가벼워 방책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2층 창문은 뛰어도 못 이를 정도로 너무 높았다(다른 교실에선 학생들이 더러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 누군가의 목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소리와 힘겹게 숨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살인자는 2분 내로 되돌아왔다. 그는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들겼고, 틈새를 1인치가량 벌렸다. 문 손잡이 주위에 약 5발을 쏜 뒤 그는 포기했다. 목표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곤 다시 ‘쾅’ 소리가 나며 211호실 문이 열렸다. 살인자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다시 그 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쏘기 시작했다”고 고더드는 말했다. 이 통로, 저 통로 휩쓸며 결국 고더드에게까지 왔다. 여전히 죽은 체하던 고더드는 갑자기 총탄 한 발이 자신의 어깨에, 다른 한 발은 엉덩이에 박힌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조용히 누워있던 고더드는 몇 발의 총성을 더 들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한 발의 총성이 들렸고, 그 후 조용해졌다. 경찰이 도착해 생존자들에게 손을 위로 들라고 소리쳤다. 노리스홀로 들어가는 주요 문은 조가 이미 쇠사슬로 묶었기 때문에 경찰로선 산탄총을 쏘아 문을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조는 산탄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을지 모른다. 조는 많게는 200발을 쏘았다. 조가 카메라를 향해 증오에 찬 분노를 표출하는 화면을 TV로 보던 조의 소년 시절 목사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반응이었다. “이건 승희가 아니야”라고 그는 스스로 말했다. 우선 그는 조가 문장을 완전히 끝맺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1분 정도 지난 뒤에야 말하기 시작했고, 기도는 항상 짧았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는 어린 시절 놀림당하던 조를 걱정했다. 그러나 조는 결코 반항적이지 않았다. “나는 승희가 자폐증이 약간 있어 어머니에게 병원에 데려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이젠 그녀에게 강력하게 병원에 데려가도록 촉구하지 않은 점을 후회한다”고 그는 말했다(의료 전문가들은 자폐증과 폭력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조의 누나인 선경씨는 지난주 “우리는 절망감과 무력감, 상실감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나와 함께 자라고 내가 사랑한 아이다. 내가 동생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친구들은 조가 11세 때 수학과 농구를 잘 하고, 조용하긴 했지만 정상적 범주의 아동이었을 때를 기억했다. 다시 말해 아직 미래가 있는 아이로 말이다. 팔에 총탄을 맞은 데릭 오델은 4월 20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열린 미 암협회의 한 모금행사에서 뛰지는 못해도 걸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그는 월요일이면 다시 수업 참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학교 별명을 들먹이며 그는 “한번 ‘호키’는 영원한 호키 ”라고 말했다(호키는 버지니아 공대의 상징인 상상의 칠면조). 그러나 그는 TV 화면에 나타나는 조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다. 한 살인자의 공허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With reporting from ARIAN CAMPO-FLORES, PAT WINGERT, DAREN BRISCOE, CATHERINE SKIPP, LYNN WADDELL and JINKEOL PARK (The Korea Daily) in Blacksburg; and EVE CONANT, HOLLY BAILEY and MARK HOSENBALL in Washington, D.C.

2007.05.02 16:06

14분 소요
디자인으로 도시 모습 바꾼다

산업 일반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음식점 냅킨에 그린 스케치로 한 박물관의 증축 프로젝트를 따냈다. 하지만 콜로라도주 덴버 미술관 신관의 경우에는 비행기 탑승권이 냅킨을 대신했다. 리베스킨트는 덴버시 상공을 날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창 밖으로 보이던 로키 산맥의 험준한 절벽을 모방했다.” 리베스킨트는 자신의 혁신적이고 추상적인 디자인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능력에서만큼은 ‘위대한 소통자’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그는 이런 능력으로 세계의 관심이 쏠린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붕괴 현장의 재건 프로젝트를 따냈다. 이 계획은 뉴욕 부동산업계와 정계의 비난을 샀지만 그동안 덴버에서는 그의 새 박물관 건물이 조용히 세워졌다. 10월 7일 문을 연 이 박물관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리베스킨트가 미국에 건축한 최초의 건물이다. 이 건물 지붕의 모서리는 뾰족하다. 이 모서리들이 멀리 있는 로키 산맥의 봉우리들을 모방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리베스킨트의 디자인은 언제나 뾰족한 각을 특징으로 했다. 중요한 얘기는 이 건물이 기막히게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마치 톱날처럼 들쭉날쭉한 형태들이 땅에서 솟구쳐 나와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한데 엉겨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다. 번쩍이는 은색 티타늄 표면은 이 미술관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티타늄은 우주시대의 첨단 소재답게 매우 견고하면서도 외견상으로는 반짝반짝 물결치는 두꺼운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프레데릭 C 해밀턴 빌딩이라고 이름 붙은 이 9050만 달러짜리 새 건물은 덴버 미술관 신관이다. 작고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지오 폰티가 1971년 지은 구관은 총안(銃眼) 같은 구멍들이 나 있고 타일을 붙인 괴상한 요새의 형상이다. 그러나 신관과 구관 사이에는 수수한 인도교가 놓여 있어 사실상 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이나 다름 없다. 신관은 주변에 충격적일 만큼 참신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게다가 외부의 기묘하게 생긴 모서리들이나 경사진 벽들에도 불구하고 내부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다. 천장에서 빛줄기가 퍼지는 4층짜리 중앙 홀부터, 공간이 넉넉한 전시실들, 배의 갑판을 연상시키는 조각 테라스까지. “처음부터 네모 반듯한 공간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이 미술관의 관장 루이스 샤프는 말했다. 그는 전시실 인테리어를 직접 디자인했다. 불규칙한 형태의 공간 안에 전시된 현대 미술품과 비(非)서구 미술품들은 제자리를 찾은 듯 편안해 보인다. 개막 전시회에서는 깜짝 이벤트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빌려온 고미술품들과 태피스트리를 전시한다. “덴버는 대담하고 참신한 도시”라고 리베스킨트는 말했다. 미술관 건너편 쪽에 그가 디자인한 콘도 단지가 곧 문을 연다. ‘리베스킨트 라이트’(‘코카콜라 라이트’에 빗댄 말)라고 부를 만한 담백한 스타일이다. 또 부근에 추상표현주의 화가 클리퍼드 스틸을 기념하는 작은 미술관이 들어선다(건축가는 이번 가을 정해진다). 덴버 현대 미술관은 런던의 인기 건축가 데이비드 애드자예에게 신축 프로젝트를 맡겼다.“도시가 지난 20년 동안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덴버 미술관 이사회의 일원이기도 한 존 히켄루퍼 덴버 시장은 말했다.“사실 미국 전역에서 디자인 수준이 높아졌다.”맞는 말이다. 요즘 미국에는 덴버처럼 새로운 디자인을 갈구하는 도시들이 많다. 지난 8월 문을 연 오하이오주 톨레도 미술관의 글래스 파빌리온(유리 전시관)은 도쿄의 전위적인 건축설계사무소 SANAA가 미국에서 완성한 첫 프로젝트다. 구조도 탁월하지만 우아한 곡선의 유리 층들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 오스트리아 빈의 전위적인 건축회사 쿠프 히멜블라우가 미국에서 처음 맡은 오하이오주 애크런 미술관은 내년 봄 준공된다. 그리고 뉴욕의 아방가르드 건축 디자인 회사 딜러 스코피도 + 렌프로가 보스턴 해변에 세운 첫 작품 보스턴 현대미술 연구소도 곧 문을 연다. 이 21세기의 디자인들은 음식점 냅킨에서 나왔든, 첨단 컴퓨터에서 나왔든 미국 도시들의 얼굴을 바꿔간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하늘에 붕 뜬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디자인들이다.

2006.10.18 11:28

3분 소요
TV가 만든 스포츠 영웅

산업 일반

베이비붐 세대 체육기자가 뒤돌아 본 지난 50년간 미국 스포츠의 명승부“우리는 왜 그토록 스포츠에 빠져 드나” 아버지가 그날 오후 내게 하신 말씀은 사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과 야구 간의 영원한 삼각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말이었지 싶다. 그러나 방과 후 집으로 달려왔던 기억은 선명하다. 머지않아 랜치하우스들이 들어섰던 공터를 지나고 주방에서 찬 음료수를 들고 나를 기다리시던 엄마를 지나, 완벽한 훅 슬라이딩 자세로 14인치 RCA 흑백 텔레비전 앞으로 안전하게 미끄러져 갔다. 아버지는 이미 자리를 잡고 계셨다. 마침 월드시리즈 7차전의 후반부가 진행되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꼴도 보기 싫은 뉴욕 양키스의 패배를 기원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양키스의 포수 요기 베라가 양키 스타디움의 좌익 공간으로 직선타구를 날렸다. 주자는 두 명이 나가 있고, 브루클린 다저스가 6회 현재 2대 0으로 이기는 상황인지라 나는, 사실 나뿐 아니라 보스턴 토박이라면 누구나, 양키스의 역전 가능성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저스의 외야수 샌디 아모로스가 공을 쫓아가더니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가며 파울 폴 가까이에서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런 다음 내야수에게 바로 던져 타자는 1루에서 병살로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첫(그리고 마지막) 우승을 축하했다. 그때가 1955년이다. 여덟 살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텔레비전으로 스포츠를 구경한 첫 번째 기억이다. 나를 비롯한 베이비붐 세대가 텔레비전으로 스포츠를 구경해온 지도 어느새 반세기가 흘렀다. 아버지는 베이브 루스, 갈색 폭격기(조 루이스), 달리는 유령(레드 그레인지) 등 전설적 영웅들이 활약한 스포츠의 황금기를 사셨다. 그러나 아버지 세대의 대다수 팬에게 그 장관(壯觀)은 라디오나 신문의 스포츠난에서 펼쳐졌다. 베이비부머들은 영웅들의 경기 모습을 중계방송으로, 나중에는 해외경기까지 중계방송으로 직접 구경한 최초 세대다. 스포츠가 할리우드를 제치고 미국의 연예산업으로 떠오른 일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옛날 옛적에 메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라는 잘 어울리는 사람끼리 동화 같은 결혼을 했다. 이제 운동선수는 창공에 빛나는 최고의 별이 되었다. 성도 필요 없이 이름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다. 마이클, 미아, 랜스, 데릭, 타이거, 알리. 미국인의 생활에서 스포츠의 비중은 날로 커졌다. 우리 시대의 가장 복잡한 이슈들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프리즘, 아니 바로 유일한 프리즘인 셈이다. 인종차별(1968년 올림픽의 블랙파워 제스처, 프로미식축구에 흑인 쿼터백과 코치가 없는 현상, 힙합 복장을 금지한 프로농구의 복장 규정)이나 성차별(수정교육법 9권, 빌리 진 킹 대 보비 릭스의 성 대결, 1999년 여자 월드컵) 등. 요즘 신문에 불법 마약이나 노조 파업 기사가 나오면 운동선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포츠에 채널을 맞추면서 비극을 목격한다. 나는 1962년 위대한 웰터급 복서 에밀 그리피스가 링 안에서 베니 (키드) 파레트를 때려 죽이는 모습(KO된 지 열흘 후 사망)을 지켜보며 눈을 의심했다. 1975년에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암말 러피안이 벨몬트 경마장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슬퍼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선 테러범들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학살하는 모습에 경악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스포츠가 공동의 위안제 역할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9·11 테러의 고통이 한창일 때 미국인들이 구장과 운동장에 몰려가 애도하고 “성조기가 여전히 휘날리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준 일은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 세대의 한 예언자는 “매체가 메시지”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내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스포츠보다 더 좋은 예가 없다. 텔레비전은 스포츠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내가 처음 텔레비전을 보던 시절 방송에선 주로 야구와 권투 같은 기본 종목만 나왔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엔 프로미식축구(NFL)가 국기(國技)나 마찬가지였다. 10여 년의 간격으로 중계된 두 경기가 통상 촉매 구실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조니 유니타스의 소속팀 볼티모어 콜츠가 연장전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물리친 1958년 결승전과 “브로드웨이” 조 네이머스가 볼티모어 콜츠를 상대로 뉴욕 제츠의 승리를 장담한 뒤 실제로 승리를 일궈낸 3회 수퍼보울(1969년)이다. 나이 든 베이비부머들은 정서상 여전히 야구를 가장 좋아하지만, 프로미식축구(군대 냄새를 풍기는 용어와 작전, 테크노 분위기, 필드에서 어슬렁대는 그 많은 거구의 젊은이)는 미국의 국력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스포츠가 됐다. 복잡한 규칙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깔끔하게 직선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작은 화면에 쏙 들어간다(얼마나 걸릴지 경기 시간을 대중하기 어려운 야구와 달리 텔레비전 방송 일정을 잡기에도 아주 좋다). ‘먼데이 나이트 풋볼’은 말하자면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가 등장하기 전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인 셈이다. 수퍼보울은 링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이 세 곳에서 동시에 벌이는 서커스에서 힌트를 얻어 지상…, 에, 그러니까 미국에서 지상 최대의 쇼가 됐다. 옛날 같으면 텔레비전으로 스포츠 경기를 구경한 다음 루실 볼이나 레드 스켈턴(광대)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재닛 잭슨과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맹활약한(하프타임 공연 때 팀버레이크가 잭슨의 젖가슴을 노출시킨 일) 수퍼보울에선 어느 팀이 이겼더라? 1980년대가 되면서 텔레비전 덕분에 또 하나의 프로 스포츠가 상상도 못한 대인기를 누리게 됐다. 프로농구(NBA)는 결승전 경기조차 황금시간대에서 밀려나 심야 이중녹음 방송으로 전락했던 처지였다. 그러나 리그는 변신에 나섰다. 텔레비전 방송은 농구의 스피드, 멋진 점프 동작, 도시적 세련미(말하자면 ‘마이애미 바이스’의 도래를 알리는 선배격)를 포착하고, 아울러 매직·래리·마이클이라는 위대한 3인방을 널리 알렸다. 이로써 프로농구는 최고의 인기 종목으로 떠올랐고, NBA는 순식간에 상업 제국으로 커갔다. 설령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광고를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NBA처럼 세계를 상대로 적극 홍보에 나선 리그는 없었다. 그러나 선지자적 안목을 갖춘 데이비드 스턴 NBA 총재조차 그러한 국제적 수출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야오밍(중국), 토니 파커(프랑스), 마누 지노빌리(아르헨티나), 더크 노비츠키(독일) 같은 선수들의 수입으로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NBA가 새 출발을 즐길 무렵 ESPN이라는 작은 케이블 사업이 등장해 스포츠의 지형을 또다시 바꿨다. 텔레비전은 전에도 간간이 비인기 종목에 슬쩍 관심을 보이곤 했다. ABC의 ‘와이드 월드 오브 스포츠’라는 프로가 특출나게 잘했다. 하루 24시간을 모두 스포츠 프로로 채워야 하는 상황에서 ESPN은 호주식 축구, 여자 소프트볼, 포켓볼 등 오만가지 경기로 시간을 때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ESPN은 유별난 종목에서 벗어나 주류와 최신 흐름을 수용했다. 비치 발리볼이나 스케이트보딩 같은 신생 종목이 ESPN의 후원 아래 프로 리그로 컸다. 그처럼 X게임(X-Games)은 대세로 자리 잡았고, 그에 따라 올림픽이라는 초대형 TV 행사는 옛날(심지어는 고대) 학교 같은 인상을 풍겼다. ESPN 혁명이 모든 방영 종목에 유리한 결과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스포츠센터’의 게임 하이라이트가 인기를 끌면서 정작 배보다 배꼽이 커져버렸다. 슬램덩크, 홈런, 엔드존 세리머니 등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훌륭한 선수들의 기본 기량이 녹슬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스포츠는 여전히 가장 흥미진진한 현장 쇼다. 그 어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아마추어 연예인 선발대회보다 더 짜릿하고 예측을 불허한다. 올림픽은 그 진실을 누누이 입증해 보이다가 급기야는 “지나칠 정도로 선수들의 신상을 캐는 바람에” 장난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과잉 노출로 흥미를 잃게 되기 전만 해도 우리는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를 딛거나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시상대에 오른 남녀의 놀라운 무용담에 감동했다. 그런 이야기의 숭고함을 사랑했고, 물론 아주 재미나게 비열한 측면은 더욱 사랑했다. 토냐와 낸시처럼 우리를 사로잡은 이야기가 있었던가(우리에겐 스캔들을 밝히는 치사한 본능이 있어서 그 장대한 올림픽 드라마에서 착한 여자 케리간 대신 악녀 하딩에게 스타의 지위를 부여했다)? 두 선수가 마침내 릴레함메르 겨울 올림픽에서 맞대결을 벌이자 시청률은 역대 최고로 치솟았다. 방송은 피겨 스케이팅 열기에 편승해 그 경기를 주말 방송의 주 메뉴로 삼았다. 시청자들은 트리플 루츠, 트리플 액셀 등의 고난도 묘기를 수없이 보고 또 봤다. 같은 경기를 계속 돌려도 차이점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봤다. 이윽고 방송 과다로 시청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야구 방망이에 슬개골을 얻어맞는 일 같은 엽기적인 사건은 또다시 보기 어렵다는 점을 시청자들이 깨달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대신 액션 드라마 ‘소프라노스’로 눈을 돌렸다. 스포츠의 위대한 무용담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누가 지어내겠는가? ‘빙판의 기적’(1980년 겨울 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미국팀이 소련팀을 이긴 일), 더그 플루티가 연출한 막판의 48야드 결승 패스 터치(1984년, 미식축구), 프랭코 해리스의 ‘완벽한 공 받기’(1972년, 미식축구), 조 몬태나에서 드와이트 클라크로 이어진 ‘터치다운 패스’(1982년, 미식축구), 밥 비먼의 놀라운 도약(1968년, 멀리뛰기), “파울 폴을 맞춘” 칼튼 피스크의 홈런(1975년), 홈런을 친 뒤 절뚝거리며 베이스를 다 돈 커크 깁슨(1988년), 마스터스 대회 연장전에서 40여m 샌드웨지 칩샷을 성공시킨 래리 마이즈(1987년, 골프), 메리 루 레턴의 완벽한 뜀틀 경기(1984년, 올림픽 체조), 캘리포니아 대학팀이 스탠퍼드대 고적대 속을 뚫고 간 터치다운(미식축구), 눈발을 뚫고 날아가는 아담 비나티에리의 롱킥(2002년, 미식축구), 벨몬트 스테이크스에서 펄펄 난 세크리테리아트(경마), 듀크대가 켄터키대를 극적으로 물리친 크리스천 레이트너의 롱슛(1999년, 농구), “하블리첵이 공을 가로챘습니다!”(1965년, 농구), 공을 가로채 종료 버저 소리와 함께 슛을 성공시킨 마이클 조던의 신기, 결승골을 성공시킨 후 웃통을 벗고 스포츠 브라를 내보인 브랜디 체스테인(1999년, 축구), 올림픽 성화에 점화하는 무하마드 알리(1996년),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뒤 오열한 타이거 우즈(2006년). 내가 좋아하는 몽타주가 있다. 데이브 로버츠의 도루, 빌 뮐러가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때려낸 싱글홈런, “빅파피”(데이비드 오티스)가 두 번이나 연장전에서 수훈을 세워 이긴 일, 커트 실링의 “피 묻은 양말”, 보스턴 레드삭스가 양키스를 물리치고 그 여력으로 마침내 86년 만에 우승하게 만든 조니 데이먼의 만루홈런 등의 합성사진이다. 그런 순간들과 기타 순간들이 집단적으로 우리 생활의 비디오트랙이 됐다. 너무 자주 재방송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원래 장면을 생방송으로 봤던지, 또는 모두 DVD로 봤던지 기억이 아리송하다. 그러나 난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베이비부머 스포츠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극성이다! 난 그것들을 몽땅 봤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그럴 테지. 당신은 스포츠 기자이고 그게 일이니까.” 그러나 난 20년 이상 뉴스를 취재하면서 진지한 기자들이 “장난감 부서”라고 콧방귀 뀌는 체육부에서 일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로즈보울(가장 권위 있는 대학미식축구 대회)을 보고 싶은 순간에 오렌지보울(로즈보울 다음가는 대회)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을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뉴스를 취재하다 보니 오렌지보울이고 로즈보울이고 모두 구경하기가 만만찮은 장소에 자주 다녔다. 그러나 중요한 게임은 결정적 순간은 무슨 수단을 쓰든 꼭 보겠다는 나의 노력은 비장했다. 텔레비전 덕분에 대학농구대회가 열리는 3월이 전국민이 도박하는 달로 바뀌기 전부터 나는 대학체육의 열성팬이었다. 한번은 중서부 지역의 대홍수를 취재하러 갔다. 결승전은 빼놓지 않고 봤던 그동안의 전통이 깨질 판이었다. 매리언(일리노이)에서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보조 발전기로 업무를 보던 경찰서를 발견했다. 배를 저어 안으로 들어가서 역시 자기네 배를 탄 경찰관들과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아 앨 머과이어가 소속한 마케트 대학 워리어스 팀이 우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니카라과로 산디니스타 혁명을 취재하러 갔으니 결승전을 계속 봤던 전통은 틀림없이 깨질 판이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용케 공항까지 가서 파나마시티로 가는 비행기를 얻어 탄 다음 미군 방송으로 결승전 경기를 봤다. 그런 고생보다는 사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벌인 다른 노력들이 더 위험했는지도 모른다. 우아한 결혼식에서 별로 우아하지 않게 몰래 빠져나가 호텔 바에서 죽친 적이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온갖 모임에 지각했다(아니면 일찍 자리를 떴다). 그 이유는 경기가 예상 외로 길어졌기(또는 파티가 그리 되든가) 때문이다. 잠깐 점수나 보고 온다고 빠져나와 만찬을 주최한 사람들의 속을 상하게 한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마라톤을 보러 간 줄 알 정도였으니까. 이런 일들이 전적으로 내 잘못은 아니다. 어디를 가든 휴대용 텔레비전이 있어야 구색이 갖춰진다고 믿는 집안에서 자랐으니 말이다. 그런 매너에 익숙지 않은 사람 중에는 나의 태도에 불쾌감을 넘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집사람과 함께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려고 뉴욕을 탈출했던 적이 있다. 맘에 드는 프랑스 요리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뒤 일과를 마무리하고 옛날 스타일 여관의 멋진 방으로 일찍 들어갔다. 가리개가 달린 침대까지 완비했지만 텔레비전이 없어서 완벽하지 못했다. NBA 결승전의 중요한 장면을 놓칠지 모른다는 초조감에서 아내에게 물었다. “휴게실에 가서 경기 마지막을 보고 와도 되겠어?” 난 몇 시간 뒤… 돌아왔다. 그 뒷일을 간단히 말하면, 우리 부부는 “경기 마지막을 보는 행위”의 정의를 탈무드식으로 자세하게 내리는 데 나머지 주말을 다 보냈다(게임이 그때 막 시작됐을 가능성은 아예 배제해야 하나?). 결혼생활의 “끝장”이라는 의미도 아울러 논의됐다. 이게 다 광기라면 그건 우리 세대의 광기다. 베이비부머는 줄기차게, 때론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이 취미생활을 추구해왔다. 스포츠라는 드라마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베이비부머들에겐 60년대 내내 공감대를 형성한 또 다른 표현이 있다. “전 세계가 지켜본다”는 말이다. 우리가 옳았다. 다만, 월드컵 이야기였다. 4년마다 열리는 그 성대한 잔치의 중간에 우리는 우리의 작은 세계에 모인다. 설명을 들어보시라. 1976년 시카고에서 살던 때 시외 출장을 마치고 막 사무실에 돌아왔다. 동료들은 모두 화이트삭스의 경기를 보러 가면서 내 표도 사뒀다. 그러나 난 고향 팀 셀틱스와 피닉스 선스 사이에 벌어지는 NBA 결승전 5차전을 놓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한 동료가 타협책을 내놓았다. 구장에 갖고 가라며 준, 원시적이고 디자인이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휴대용 텔레비전이었다. 마무리 투수 구스 고시지가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타자를 처리했을 무렵 농구 경기는 막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텔레비전을 무릎에 올려놓고 보았다. 그러나 주위에 수십 명이 몰려와 구경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보도록 치켜들어야 했다. 농구가 연장전에 들어갈 때 마침내 경비원 한 사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쪽 관중석에만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 소리지르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을 구단주에게 보고했다. 전설적인 빌 비크가 꽥꽥거리는 목소리가 경비원의 무전기에서 들렸다. “거기 실컷 있도록 내버려둬.” 난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NBA 역사상 가장 멋졌다고 말하는 경기(세 번의 연장전 끝에 셀틱스가 128대 126으로 선스를 물리쳤다)를 코미스키 파크에서 끝까지 보는 데 성공했다. 자정 직전에 마침내 경기가 끝나자 거기 모인 친구들과 낯선 사람들 사이엔 유대감이 형성돼 있었다. 지금도 펜웨이 파크나 질레트 스타디움에서 고향팀을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 그런 유대감을 발견한다.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 중계를 보면서도 그 유대감을 발견한다. 사실 난 혼자가 아니다.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어디서든 본다. 내 동생 빌리, 사촌 잭, 친구들인 앙과 론 , 그리고 테리, 게다가 보게 된 경위야 어찌 됐든 우리 딸 새러 등등. 중요한 경기가 끝나면 내 전화가 울리면서 그중 한 사람이 묻는다. “그거 봤어?” 물론 봤지.

2006.09.12 15:15

10분 소요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다

산업 일반

Freud in Our Midst 늘 그렇듯이 우리는 지금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우리는 파멸을 당하면서도 자신들끼리도 파괴하는 비이성적인 인간들에게 둘러싸였다. 우리의 운명은 반성할 줄 모르는 지도자들 수중에 있다. 베스트셀러 자서전에서 기술한 내용과는 달리 별다른 고생 없이 자란 사기꾼 작가들은 우리의 문화를 납치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울먹이며 반성하는 체하는 자서전 저자에게서 환멸을 느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낯익은 모습이 눈에 띈다. 냉소적이고 엄숙한 표정의 그 인물은 근심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삶의 고통이 완화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의료 기계 속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알약을 복용한다. 또는 TV 쇼에 출연해 과거를 고백하면서 마지막 TV 광고가 나오기 전에 고통이 치유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걸린 질병의 정체조차 모른다. 그렇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얘기다. 나치에 쫓겨 사랑하는 빈(오스트리아)을 떠난 뒤 1939년 런던에서 사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우리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프로이트 말이다. 그는 정신의 새로운 광대한 영역인 무의식을 탐구한 이론가였다. 무의식은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의 지하감옥이다. 그 기억들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고 절규하면서 가끔 꿈·말 실수·정신질환 등을 통해 의식세계로 탈출해 나온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이 인종 배경이나 가정 환경이 아닌,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형성된다고 통찰한 철학가였다. 또 정신분석이라는 독특한 치료법을 창안한 정신치료 전문가였다. 정신분석은 혁명적인 개념을 발전시켰다. 분석이 가능한 질병은, 인류의 시초부터 시작된 ‘말하기’(talk) 방법만으로도 치유된다는 개념이다. 기도·제물·퇴마의식 혹은 약물·수술·섭식의 변화가 아니라, 동정적인 전문가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반성하는 말하기 작업만으로. 그런 개념은 의학 기술적 치료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심정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산더미처럼 처방되는 프로작(우울증 치료제)도 그 개념을 매장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1주일에 4일씩 정신분석 전문가의 소파에 누워 치료받기를 원하는 환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각종 말하기 요법(융·아들러식의 분석법, 인지 행동 요법, 정신역학 요법 등)의 엄청난 확산은 프로이트식 개념의 영속적인 힘을 증명한다. 프로이트는 한 세기 동안 인류 문화를 사로잡아온 보통 사람들의 성 담론을 만들어냈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우디 앨런은 엉터리이고, 토니 소프라노는 단순한 깡패에 불과하다. 또 오이디푸스는 존재해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없었다. 그리고 만찬 참석자들은 조지 부시의 장남(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토록 사담 후세인을 파멸시키려고 기를 쓰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하리라(이것은 프로이트가 죽은 지 한 세기나 지난 나폴레옹을 분석하면서 개발한 사교형 대화법의 일종이다. 프로이트의 결론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맏형 조제프와의 경쟁의식이 삶의 큰 원동력이었다. 이는 나폴레옹이 조세핀이라는 이름의 여성에 심취한 점, 그리고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의 발자취를 따라 이집트를 침공한 이유도 설명해준다). 오늘날 미국에서 프로이트는 과학자보다는 문필가로서 더 중시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정신 분석을 훈련시키는 40여 개 연구소 밖에서는 그렇다. 사실 지난해만 해도 뉴스위크는 오늘날까지 계속 지적인 영향을 미치는 다윈과 달리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이미 한물 간 철학자로 뭉뚱그려 다뤘다. 따라서 속죄하는 뜻에서, 그리고 5월 6일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에 맞춰 예정된 각종 강연·세미나·출판의 쓰나미에 앞서 고지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뉴스위크는 이렇게 화두를 던진다. 프로이트는 죽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그를 아직 살아있게 만드는가?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남아있다는 자체가 놀랍다. 그의 이름을 검색엔진에 쳐넣으면 비난의 글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비난은 그가 19세기에 자신의 저술을 처음 출간한 때부터 시작됐다. 단순히 그의 이론이 틀렸다는 이유(추종자들도 그가 많은 점에서 틀렸을지 모른다고 시인한다) 때문에 그토록 많은 비판이 제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추종자들은 프로이트식 설명을 갖다 붙인다. 베일러 의대의 정신의학자 글렌 O 개버드는 이렇게 말했다. “무의식은 매우 위협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힘들에 이끌려 움직인다고 암시한다. 이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자아도취)에 심각한 타격이다.” 프로이트에 맞선 저항은 일찍이 그의 핵심 개념 중 하나에 아연실색한 중산층이 이끌었다. 어린이들이 성적(性的) 환상 속에 살아간다는 개념이다. 뉴스위크 설문조사에서 미국의 성인들은 그 이론을 76 대 13으로 거부했다. 서양 문화만 프로이트의 이론에 분개하지 않았다. 지난 2월 뉴요커지 데이비드 렘닉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나예프 라주브는 이스라엘을 파멸시켜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덕을 파괴한 장본인 프로이트는 유대인이었다.” 여권운동가들도 프로이트를 거부했다. 그들은 남근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반박해왔다. 여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생각(요컨대 여성은 불완전한 남성이라는 생각)들이 틀렸다는 지적은 이제 보편적으로 수긍된다. 그에게 동조적인 전기작가 피터 게이는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만일 프로이트가 하버드대 총장이라면 사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평판이 최저로 떨어진 시점은 1990년대 초인 듯하다. 당시 TV 토크쇼에는 많은 여성이 출연해 자신들의 무의식에서 끌어낸 어린 시절의 가정 내 성폭행 체험을 늘어놓곤 했다. 프로이트로선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프로이트는 본인도 인정했듯이 일평생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내세우곤 했다. 피고가 된 부모와 형제들 편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탓했다. 그가 초기 저술에서 그릇된 관념(실제로 일어난 성폭행에 관한 억압된 기억이 성인 신경증의 보편적 원인이라는 주장)을 전파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겼다는 비판이었다. 원고 측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집단적 압력에 비겁하게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회복된 기억은 실제로는 어린 시절의 성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프로이트의 최종 결론을 겨냥한 비난이었다. 당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을 프로이트 계열의 정신분석의에게 보내는 일은 유대인을 나치에 보내는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비꼬았다. 프로이트의 평판은 이제 겨우 회복되기 시작했다. 억압된 기억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 때문에 미 의회 도서관의 프로이트 관련 자료들(상당 부분은 수십 년 뒤에나 공개될 예정이었다)이 학자들에게 공개됐다. 덕분에 프로이트 비판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할 많은 자료를 확보해 간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정통 ‘치료법’이 실은 희망적 기대 내지 의도적인 조작의 산물에 불과하며, 그의 이론은 순환논리의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해왔다. 엄격한 실험과 두뇌촬영술로 프로이트 심리학의 타당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아직 초보 단계다. 정신과의사이자 ‘프로작에 귀 기울이기’(Listening to Prozac)의 저자인 피터 D 크레이머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 이론에 타당성이 없는 듯하다.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일종의 배신 행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근 선망, 유아 성욕 등 모든 가설이 잘못됐다.” 현재 크레이머가 집필 중인 프로이트 전기는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프로이트가 어느 정도까지 이런 폭로를 견뎌낼까? 시카고대의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조너선 리어는 프로이트의 평판을 지켜내는 ‘핵심 개념’을 인정한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하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적극적으로 억압된 본능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만큼 의식에서는 인지되지 않는다(그런 욕망과 본능에 부모와 성관계를 갖고 싶은 욕구가 포함된다고 굳이 믿을 필요는 없다). 우리의 자의식이 그런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갈등들이 온갖 상징으로 위장된 채 의식 표면으로 떠오를 때 이를 확인하고 풀어주는 작업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그 밖의 개념들은 논란의 여지를 허용한다. 정통 프로이트 학파의 추종자들도 그의 이론체계가 모든 세부사항에서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더 큰 그림을 얘기한다. 미시간대 심리학자 제임스 핸셀은 “프로이트 이론은 많은 점에서 틀렸지만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인간사를 관찰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미 정신분석협회 회장으로 내정된 K 린 모리츠 세인트루이스대 의대 교수는 “프로이트는 예컨대 인간의 행동과 사랑의 깊은 의미와 동기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이다. 비록 그런 도움이 과학자보다는 시인에게 적합한 역할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인생에서 바로 그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3400명(1998년의 3200명에서 조금 늘었다)으로 구성된 모리츠 박사의 정신분석협회 회원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미 정신분석진흥협회의 회원 1500명에게 도움이 된다. 이와 비교해 미 정신의학협회의 회원 수는 3만3500명이나 된다. 이들 정신과 의사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도록 훈련받은 의사다. 대개 그들은 자신들에게 보내진 환자들을 약물요법 위주로 치료하거나, 병원·클리닉에서 중환자를 다룬다. 한편 의학 학위 없는 심리요법 전문가들을 대표하는 미 심리학회는 회원은 무려 15만 명이나 된다. 뉴스위크 설문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약 20%는 어떤 형태든 치료나 상담을 받았던 경험이 있으며, 4%는 현재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답했다. 특정 질환의 경우 약물요법이 두뇌 시냅스(신경세포 연접부)에 직접 작용한다면 정신분석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료 효과는 환자마다 다르며, 일부 환자에게는 약물 치료와 말하기 요법을 병행할 때 최선의 효과를 보인다. 모리츠는 사춘기의 ‘경계성 성격 장애’ 같은 질환에는 정신분석이 최상의 치료법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 자신도 한동안 약물요법을 옹호했었다. 다만 그가 권장한 약물이 코카인이었다는 점이 유감이다. 이는 아직도 많은 미국인에게 프로이트 하면 떠오르는 생각 중 하나다. 정신분석의 쇠퇴는 의료보험회사들이 매달 2000달러가 넘는 끝없는 치료비 부담을 꺼린 탓이 크다. 1950년대만 해도 정신분석은 사회적 지위와 세련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요즘엔 성형수술이 이런 역할을 한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 충실한 삶을 영위할 만큼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분석은 아직도 귀중한 ‘사치품’이다. 개버드 교수는 “간단한 치료나 약품으론 효과를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며 “이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이해해주길 원하며 단순한 증상 치료를 뛰어넘어 자신의 진실을 찾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모리츠 교수의 환자 한 명의 예를 보자. 40대 기혼 여성인 그녀를 우리는 ‘도린’이란 가명으로 부르겠다. 프로이트의 가장 유명한 환자 중 하나인 ‘도라’라는 가명의 여성을 기리는 의미에서다. 도린은 프로이트가 빈에서 보낸 초기 시절 상담한 많은 환자의 전형적인 유형에 속한다. 교육받은 중상층 여성으로 너무도 조용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 요즘 환자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증상은 모호했고, 특별한 이상도 없었다. 노이로제(신경증)는 더 이상 히스테리성 시각 상실이나 마비를 수반하지 않기도 한다. “괜찮은 삶을 사는 쪽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그녀는 직장에선 늘 주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일이 벅차도 기꺼이 맡았다. 그러나 가족들에겐 자신의 쾌활함과 유머감각을 억누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매주 4시간씩 4년간 치료받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치료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러나 정신분석 치료는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값진 결과를 안겨줬다. “정신분석은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되돌아보게 하며 자신의 태도·믿음·행동의 근본 뿌리를 이해하도록 해준다. 나는 훨씬 더 행복해졌다. 이는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직시하기 힘든 자신의 여러 부분들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모리츠 박사는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주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물론 프로이트가 이용하는 기법의 골자다. 그는 내적 발견을 해나가는 과정에 심취한 학자였다. 이 점은 프로이트가 1901년 출간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에도 잘 나타나 있다. 프로이트는 로마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쓴 시에 나오는 라틴어 단어 ‘aliquis’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 젊은 남성과의 만남을 그 책에 써넣었다. 그런 순간을 프로이트가 놓칠 리 없다. 하필이면 그 낱말만 기억을 못 하는 이유가 모호하다는 점이 더욱 흥미를 끌었다. 만일 환자 자신이 그런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안다면 프로이트는 그런 사람을 붙들고 정신분석을 시도하진 않았으리라.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무기인 자유연상법(free association)을 활용해 환자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자유연상법은 어떤 말이 주어지면 그 말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연상해 나가도록 하는 정신분석의 한 기법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aliquis’란 단어에서 ‘liquid’(액체)와 ‘blood’(피) 등을 떠올렸다. 프로이트는 여러 분석 단계를 거친 뒤 결국 그 젊은 남성은 자신과 내연 관계의 여성이 생리를 걸렀다는 사실을 우려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위 가공할 정신분석의 세계라 할 만하다. 그러나 프리랜서 역사학자 피터 스웨일즈는 이견을 제시했다. 그런 남성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 낱말을 기억하지 못한 사람도 실은 프로이트 자신이었으며, 프로이트가 걱정한 여성도 다름 아닌 자신의 처제인 민나 베르네이스였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만일 스웨일즈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도 프로이트의 천재성에 등을 돌려야 할까? 리어 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겐 전혀 관계없다. 프로이트의 입장이 됐다면 누구도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바꾸는 일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런 문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만일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처제와 놀아났다 해도 빛의 속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로 프로이트다! 그는 자기 이론의 많은 부분을 바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서 끌어낸 사람이다. 프로이트는 후기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플라톤이자 세속판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끝없이 우리를 매료시킨다. 심지어 캘리포니아대(버클리)의 프레데릭 크루즈 명예교수(영문학)처럼 그를 비난한 덕택에 유명해진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루즈 교수는 프로이트에의 관심이 그칠 줄 모르는 이유를 신랄하게 설명했다. “인문학자들은 서로 연결된 상징과 손쉬운 인과관계로 가득한 프로이트의 세계에 들어가면 자신의 논문이나 책에 쓸 만한 소재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똑똑하고 튀어 보이게 해줄 그런 소재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굳이 나쁘기까지 할까? 누구든 ‘해석’을 ‘상징 해석’으로 부름으로써 자신을 똑똑하게 보이게 해줄 구실이 간혹 필요하지 않을까? 정신과 의사 크레이머는 T S 엘리엇의 몽상적 상징주의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리너’에 나오는 ‘감정전이’(transference)에서 프로이트의 흔적을 찾는다. ‘감정전이’란 환자가 부모 중 한 명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정신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치료사에게 느끼는 현상을 가리킨다. 크레이머는 “우리는 누군가를 ‘수동-공격형’이라고 부를 때 프로이트를 들먹인다”며 “100년 전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진 않는다.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로 유명한 캘리포니아대(샌디에이고)의 패트리셔 처치랜드 교수는 “셰익스피어는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어휘를 전혀 쓰지 않고도 인간 본성의 온갖 측면을 다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쨌든 정신분석의 언어는 신경정신과학 용어로 대체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엔도르핀’이란 전문용어는 이제 일반 명사로 바뀌었다. 또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전두적’(frontal)이라고 부른다. ‘frontal’은 충동 억제를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frontal lobe)에서 따온 표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상징을 통한 해석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는 맞지 않다. 즉각적인 욕구 충족을 요구하는 본능적 에너지를 일컫는 이드(id)가 지배하는 정치·스포츠·경제 세계에서 프로이트는 경제적 효용의 정 반대편에 서 있다. 치료 효과도 5년 뒤에나 나타날 뿐 아니라 남에겐 전혀 상품 가치가 없는 자신에 관한 지식만 깊어질 뿐이다.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 개전 결정을 재고하려고 정신분석을 받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뉴욕대 메디컬 스쿨의 케리 J 설코위츠 교수(정신과)는 그 말은 정신분석을 모독하는 말이라며 뉴욕 타임스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부시의 말 속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이 내포됐다고도 비꼬았다. 기업의 CEO와 이사회의 고문으로도 활동 중인 설코위츠 교수는 이런 태도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매일 CEO들의 머릿속에 약간의 자기성찰을 불어넣으려 노력한다. “경제계에선 ‘실행’과 ‘행동’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나로선 실행과 자기성찰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음을 그들에게 설득하려 애쓴다”고 그는 말했다.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에 관한 프로이트의 통찰은 기업에도 적용 가능하다. 회사에선 고위 중역들조차 더러 ‘감정전이’를 사무실로 끌고 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때 부모에게서 받기를 갈망한 인정을 상사에게서 받으려 애쓰는 경우다. 집단역학과 형제자매간의 경쟁에 관한 프로이트의 저술은 사려깊은 CEO에게 큰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설코위츠는 덧붙였다. 그러나 책의 저자를 구체적으로 밝히면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프로이트란 이름을 좀처럼 들먹이지 않는다”고 교수는 말했다. 방 구석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는 프로이트가 초조해졌는지 입에 문 시가 끝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듯하다. 미국인들이여! 돈만 아는 인간들아, 당신들 때문에 나는 문명 자체의 미래를 걱정했지. 기회가 있을 때 말해줬어야 했는데. 위대한 유럽 문명에 뿌리를 둔 프로이트는 1909년 잠시 방문한 미국에 관해 쓴 글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가 쓴 우울한 내용의 저서 ‘문명과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 등장하는 몇몇 퉁명스러운 문장을 보면 그의 태도는 분명하다. 프로이트 자신이 이미 노년에 접어든 1930년 출간된 그 책은 사회적 계약에 관한 심리학적 성찰을 담았다. 예컨대 문명 사회가 제공하는 안전과 편안함을 얻는 대신 인류는 공격과 성적 지배의 타고난 본능을 포기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 거래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거래였다. 그런 본능은 강력하며 이를 억누르면 무의식적 갈등이 유발된다. 리어 교수는 이 무의식적 갈등을 프로이트 사상의 “핵심 개념”이라고 표현했다. 무의식적 갈등은 우리가 이름을 붙이지도, 결코 치료하지도 못하는 질병의 근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갈등은 인간의 존재 조건(human condition)에 내재됐기 때문이다. 리어는 프로이트의 인기가 1990년대 초 크게 떨어진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는 바로 너도나도 최면술 등을 이용해 기억을 되찾는 일이 기승을 부렸고, 냉전 종식 이후 낙관론이 고조되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서 ‘역사의 종언’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다. 후쿠야마는 소련 해체로 전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할 길이 열린다고 예언했다(그러나 그런 생각은 2001년 어느 쾌청한 날 아침 산산조각났다). 리어 교수는 “우리는 늘 이런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역사의 종언은 영속적인 인간 갈등의 역학이 끝났다는 신나는 희망의 표시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고 강변할 듯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 또 한 명의 환자를 결코 치료하지 못한다 해도 귀담아 들을 만한 말이다. With ANNE UNDERWOOD 장병걸·강태욱 cbg58@joongang.co.kr

2006.03.3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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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개봉되는 기대작 미리 보기

산업 일반

Fall '05: The Short Version 비행계획(Flightplan) 머리 쓰는 스릴러의 여왕 조디 포스터가 3년의 공백 끝에 비행 도중 딸을 잃어버리는 엄마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머리 위 짐칸을 조사해 보라. 9월 개봉.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 사극(史劇) 전문 배우로 옛 영어를 구사하던 올랜도 블룸이 최신 미국 영화를 소화해 낼까? 잘나가던 자리에서 해고된 직후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러 켄터키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캐머런 크로 감독의 영화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 보자. 커스텐 던스트가 함께 출연. 10월 개봉. 헤드(Jarhead) 도대체 1차 걸프전이 무엇이기에 다루는 영화마다 한결같이 암울한 코믹풍으로 묘사하는가? ‘스리 킹스’에 이어 이번에는 해병대 출신 앤서니 소퍼드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나왔다. 감독은 샘 멘데스(‘아메리칸 뷰티’). 제이크 길렌할과 아카데미상 수상배우 제이미 폭스 등 출연. 11월 개봉. 시리아나(Syriana) ‘트래픽’의 제작진은 미국의 마약 문제를 해결한 뒤 시의적절한 사안으로 관심을 돌린다. 바로 석유와 테러. 방대한 출연진 중에는 CIA 베테랑 요원이자 테러범 사냥꾼인 로버트 베어 역의 조지 클루니와 그의 친구 맷 데이먼이 있다. 11월 개봉. 해리 포터와 불의 잔(Harry Potter and the Goblet of Fire) 사랑에 빠진 사춘기 마법사들. 11월 개봉. 나니아 연대기 1: 사자, 마술사,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디즈니가 C S 루이스의 팬터지 시리즈로 공상게임에 뛰어든다. 유명 배우는 등장하지 않지만 ‘나니아’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 12월 개봉. 게이샤의 추억 (Memoirs of a Geisha) 감독은 미국인, 배우는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영화 무대는 일본, 원작은 뉴욕 출신의 백인 남자가 쓴 책. 족보가 복잡한 잡종견이다. 롭 마셜(‘시카고’)이 감독한 이 영화의 주연은 ‘와호장룡’의 장쯔이(章子怡)와 양쯔충(楊紫瓊)이 맡았다. 12월 개봉. 뮌헨(Munich) ‘우주전쟁’ 개봉 후 6개월 만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돌아온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한 팔레스타인 테러범 수색작전을 다룬 드라마다. 12월 개봉. 프로듀서(The Producers) 네이선 레인과 매슈 브로데릭 외에 몇몇 스타(우마 서먼, 윌 페렐)가 나온다. 무대 뮤지컬과 이 영화의 최대 차이점? 바로 표 값. 영화는 100달러 싸며, 아는 사람 없이도 표를 구할 수 있다. 12월 개봉. 모두가 왕의 부하들 (All the King’s Men) 고전 소설이자 고전 영화. 새로 만든 이 영화는 어느 정도의 평을 받을까? 숀 펜, 주드 로, 케이트 윈슬릿, 제임스 갠돌피니, 앤서니 홉킨스, 마크 루팔로, 패트리셔 클락슨. 이하 생략. 12월. 킹콩(King Kong) 작은 털북숭이 호비트에서 이제는 덩치 큰 털북숭이 고릴라로. 본인 역시 털보인 피터 잭슨 감독이 돌아왔다. 12월. (개봉 시기는 미국 기준)

2005.09.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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