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사이클이 예상보다 빠르게 시작되었다.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를 통해 한국 조선업의 기술력이 재조명되고, 대규모 수주 소식이 이어지면서 업계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조선업이 ‘초격차 우위’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디지털 전환 속도의 차이다. 한국은 여전히 2D 도면과 숙련 인력의 경험에 기대는 경우가 많으며, 노동력 부족과 인재 확보의 한계는 지속가능성을 요구하는 현 시대에 치명적 리스크로 작용한다. 반면 중국, 유럽 등 주요 조선소들은 이미 빠른 디지털 전환을 통해 친환경적이면서도 효율적인 건조 능력을 확보했다.한국 조선업의 또 다른 기회 MASGA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MASGA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은 LNG 운반선·초대형 컨테이너선·친환경 연료 기반 선박 등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확보해왔다. 특히 ▲정밀 용접 기술 ▲대형 선체 블록 제작 능력 ▲복잡한 엔지니어링 역량은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강점이다.MASGA는 단순한 협력 프로젝트를 넘어, 한국 조선소의 대규모 미국 현지 투자와 기술 이전을 가시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이 아시아와 유럽 중심의 시장을 넘어 미국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미국 조선업이 재도약하는 과정에서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발판이다. 만약 한국 조선소들이 친환경 선박·스마트십 기술을 결합해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다면, 단순 수주 이상의 전략적 동맹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그러나 이 기회를 장기적 성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가 필수적이다. 기존의 가격 경쟁력이나 전통적 기술력만으로는 글로벌 친환경 규제와 빠른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국제해사기구(IMO) 의 탄소배출 규제 ▲유럽연합의 환경 기준 ▲미국 해양산업의 국산화 정책은 모두 조선업이 단순히 ‘잘 만드는 산업’을 넘어 ‘지속가능성과 디지털화를 동시에 구현해야 하는 산업’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조선소의 디지털 전환 사례 가속세계 조선업계는 빠른 속도로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단순한 생산성 향상을 넘어, 지속가능성·비용 효율·글로벌 협업이라는 새로운 경쟁 요소가 핵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네 가지 조선소 사례는 다음과 같다.중국 국영 조선기업 CSSC의 자회사인 황푸원총은 군용·상업용 선박을 주력으로 하는 대형 조선소다. 그러나 세계 경기 둔화와 조선업 침체로 신규 수주가 줄고 건조 비용은 오르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첸 첸(Zhongqian Chen) 최고경영자(CEO)는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을 목표로 다쏘시스템의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을 도입했다.황푸원총은 설계–제조–관리 프로세스를 단일 플랫폼에서 통합했다. 그 결과 ▲설계 검토 과정에서 고객 요구사항을 즉시 반영 ▲CNC 가공 데이터를 자동 생성 ▲몰입형 경험 기반 검증 등 구체적인 성과를 거뒀다. 특히 조립 프로세스를 시뮬레이션하며 휴먼 에러를 크게 줄였고, 전사적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는 스마트 제조 기반으로 확대 적용하며 품질과 효율성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본사를 둔 NAOS는 Ro-Ro 선박, 페리, 슈퍼요트 설계에 특화된 기업이다. 이들은 설계와 제조 간 실시간 협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서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2016년 버추얼트윈 시스템을 도입했다. ‘Designed for Sea’ 솔루션은 개념 설계부터 구조·시스템 설계까지 마스터 3D 모델 기반 협업을 지원하여, 설계 오류와 간섭을 조기에 식별했다. 또한 ‘Optimized Production for Sea’는 블록 조립 계획과 3D 작업 지침서를 자동 생성해, 세계 각지에 흩어진 팀들이 마치 하나의 공간에서 협업하는 것처럼 작업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해 설계 변경 시 자동 문서화가 가능해져 재작업과 오류가 크게 줄었고, 전체 설계 시간은 최대 40% 단축할 수 있었다. 1927년 설립된 네덜란드 다멘 조선 그룹은 전 세계에 35개의 조선소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다멘은 2017년 전사적 디지털 전환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솔루션을 활용해 제품·프로세스·서비스 전반을 통합 관리했다. 모델 기반 시스템 엔지니어링(MBSE)를 통해 설계 오류를 줄였고, 다중 물리 시뮬레이션으로 복잡한 시스템의 일관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운항 데이터 기반 성능 모니터링과 에너지 관리까지 실시간으로 수행하며, 조선업계가 직면한 ‘지속가능성’ 과제를 선도적으로 해결하고 있다.독일 파펜부르크에 위치한 마이어 베르프트는 크루즈선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조선소다. 이들은 숙련 인력의 경험을 데이터화·디지털화하여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일찍이 추진했다. 마이어 베르프트는 3D익스피리언스를 통해 전사적 데이터 구조화를 실현했다. 전통적으로 장인의 노하우에 의존했던 생산 현장에 버추얼 트윈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설계와 생산의 동기화 ▲부서 간 실시간 협업 ▲품질·비용 최적화라는 성과를 달성했다. 특히 초대형 크루즈선의 복잡한 시스템을 디지털 기반으로 관리하면서 프로젝트 지연과 비용 초과 리스크를 획기적으로 줄였다.현재는 AI 기반 학습 체계를 접목하여 설계와 운영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고,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확장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는 한국 조선소들이 지향하는 스마트 야드 전환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이처럼 주요 글로벌 조선소들은 이미 디지털 전환을 통해 ▲생산성과 효율 ▲지속가능성 ▲글로벌 협업 ▲데이터화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숙련 인력 중심의 전통적 방식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아, ‘초격차 경쟁력’ 확보를 위해 디지털화 속도 가속이 시급하다.
디지털 전환의 공통 분모, 버추얼 트윈 기술 이들 조선소의 디지털 전환 전략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버추얼 트윈 기술이다.버추얼 트윈은 실제 선박과 동일한 디지털 복제 모델을 만들어, 설계–생산–운영–유지보수 전 과정을 하나의 통합 데이터 환경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단순한 3D 설계나 가시화를 넘어 ▲엔지니어링 데이터 ▲생산 계획 ▲운영 조건 ▲센서 데이터를 모두 연결한 실시간 ‘살아있는’ 가상 환경을 구현하는 것이다.설계 단계에서는 선체 구조·배관·전장 시스템 등 복잡한 요소를 가상으로 구성하고, 설계 변경을 제작 전에 즉시 검증한다. 생산 단계에서는 작업 순서·공정 배치·자재 투입을 시뮬레이션해 효율을 극대화하고 오류를 사전에 방지한다.운영 단계에서는 센서와 사물인터넷(IoT) 데이터를 가상 모델과 비교 분석하여 성능을 최적화하고, 연료 절감과 안전성을 강화하게 된다. 유지보수 단계에서는 고장 가능성을 미리 예측해 필요한 부품과 절차를 준비·정비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은 조선·해양 산업에서 설계와 생산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글로벌 친환경·안전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더불어 설계와 생산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 이뤄지더라도 동일한 데이터와 표준으로 협업할 수 있으며, 연료 효율 개선·배출가스 저감·부품 재활용 설계 등 기업의 지속가능성에도 직접 기여한다.디지털 전환의 격차와 리스크는 비례반면 한국 조선업은 여전히 숙련 노동력과 2D 기반 설계에 의존하는 전통적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여러 리스크를 내포한다. 우선 고령화와 청년층의 기피 현상으로 인해 인력 수급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인력 부족은 단순히 생산 차질을 넘어, 장기적인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문제다. 또한 2D 도면 중심의 설계 방식은 오류와 재작업의 가능성을 높여 생산성 저하를 불러오며, 이는 글로벌 수준에서 요구되는 속도와 정밀도를 충족하기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요구가 강화되는 시대에 데이터 기반의 관리 체계가 부재하다는 점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글로벌 경쟁사들은 이미 ▲인공지능(AI) ▲버추얼 트윈 ▲모델 기반 시스템 엔지니어링(MBSE) 등의 첨단 기술을 생산 전 과정에 적용하며 효율성과 친환경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한국이 진정한 의미의 ‘초격차’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사람의 경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축적된 노하우를 데이터로 전환하고, 이를 기계가 학습할 수 있는 체계로 발전시켜야만 한다.
초격차 우위, 실행력이 답이다MASGA는 분명 한국 조선업에 전략적 기회다. 그러나 이 기회를 실질적 성과로 연결할 수 있을지는 얼마나 신속하고 철저하게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ESG 요구에 부합하는 디지털 조선소로 변모해야만 진정한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중국과 유럽의 주요 조선소들 역시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들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디지털 혁신에 집중해왔고, 특히 중국은 설계와 생산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기술력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한국 조선소들 또한 초격차 경쟁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숙련 인력의 경험을 데이터화하고, 이를 기계가 학습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하는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앞으로 한국 조선업이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경험과 기술력을 데이터로 전환하고, 버추얼 트윈을 기반으로 설계와 생산을 통합하고 AI와 MBSE 같은 첨단 기술을 현장에 적극 적용해야 한다. 기술은 기회의 문을 열어주지만, 경쟁력을 완성하는 것은 실행력이다. 한국 조선업이 MASGA를 계기로 세계 시장에서 다시 한번 초격차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디지털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필자는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에서 설계관리 업무를 시작으로 영국 소재 기술연구소 워딩테크니컬센터(WTC)에서 설계표준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CIES·한국후지쯔 등을 거쳐 2005년 다쏘시스템에 합류했다. LG전자 GPDM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Industry Services 부서장을 역임하며 현대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CSE(Customer Solution Experience) 본부장을 거쳐 2023년 2월 다쏘시스템코리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자동차·조선·항공 등 국내 주요 산업의 디지털 전환과 매출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