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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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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WEEK] '시간이 바로 적이다'…제1차 세계대전 그린 영화 '1917'

유통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OTT 홍수 속에서 한 번쯤 볼만한 콘텐트를 소개한다. ━ 전쟁의 한복판에서…골든 글로브 수상작 '1917' 왓챠 공개 영화 '1917'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을 뚫고 전쟁터 한복판을 달리는 두 영국 병사의 하루를 그린다. 감독은 탁월한 영상미와 함께 혁신적인 '원 컨티뉴어스 쇼트' 촬영 기법을 통해 영화를 하나의 장면처럼 연출했다.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수상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끌어낸 영화 '1917'은 왓챠에서 볼 수 있다. ━ 리암 니슨이 돌아왔다, 영화 '블랙라이트' 할리우드 최고의 액션 배우 리암 니슨이 영화 블랙라이트로 돌아왔다. 영화 블랙라이트는 지난 3월 9일 국내 정식 개봉했다. 영화에서 리암 니슨은 언더커버 요원을 관리하는 FBI 비공식 요원 트래비스를 연기한다. 리암 니슨은 요원이 사망하며 밝혀지는 조직의 충격적인 비밀과 마주하며 추악한 악행을 멈추고 모든 걸 끝내기 위한 마지막 미션을 시작한다. 맨몸 액션과 총격전, 추격전에 권력의 명과 암을 조명하는 시나리오가 더해진 영화 '블랙라이트'는 시즌을 비롯한 다양한 OTT에서 감상할 수 있다. ━ 엑소 단독 예능 '사다리 타고 세계여행 - 남해 편' 웨이브가 엑소 시우민, 수호, 디오, 카이, 세훈이 출연하는 '사다리 타고 세계여행 - 남해 편'을 오리지널 예능으로 독점 공개한다. '사다리 타고 세계여행 - 남해 편'은 청정 자연을 품은 남해로 떠난 멤버들이 예측 불허 사다리 타기 게임과 함께 복불복 여행을 떠난 모습을 담은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이다. 최근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리더 수호와 엑소 멤버 4명의 반가운 얼굴을 담은 이 예능은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선모은 기자 seon.moeun@joongang.co.kr

2022.04.20 11:00

2분 소요
중앙아시아에서도 미-중-러 붙었다

산업 일반

누가 주도권 잡느냐에 따라 글로벌 자본주의 성격 달라져 미-중 무역전쟁 위협이 고조되면서 서로 얼마나 많은 관세를 때릴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나 양국이 전략적인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중앙아시아에서도 또 하나의 중요한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중앙아시아는 가치 높은 천연자원의 접근과 통제, 유리한 무역조건과 효율적인 통상 루트 등 대국들에 다양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한다. 미국·중국·러시아 모두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애쓰면서 국제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길을 모색한다. 중앙아시아 지역과 관련해선 이슬람 급진주의 같은 위험과 안보 이해를 더 쉽게 떠오를지 모르지만 경제 측면의 전략적인 전선 역할은 간과되는 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새로 전개하는 지역적 경제통합 이니셔티브의 한복판에 중앙아시아가 자리 잡고 있다. 양국의 경제통합은 미국의 오랜 경제 비전과 충돌한다.러시아의 유라시안경제연합(EEU)은 2015년 결성됐다.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아르메니아로 구성되며 유럽연합(EU)을 모델로 했다. 재화·자본·노동·서비스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공동으로 경제·산업정책을 수립한다.둘째,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BRI)는 2013년 발표됐으며 육상·해상 실크로드 같은 고대 통상로를 따라 아시아를 유럽·아프리카와 연결하는 통상·인프라 네트워크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그 뒤로 많은 중앙·남아시아 국가가 중국과 에너지·운송 인프라에 투자하는 협력협정에 서명했다.러시아의 EEU와 중국의 BRI는 자유시장 경제 사고방식에 기초한 지배적인 워싱턴 컨센서스 모델과 대조를 이룬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처럼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국제 금융기관이 촉진한 모델이다.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이 경제적 처방의 표준이었다.중앙아시아 경제의 미래를 그리는 이 3가지 방식은 대국들이 저마다 국내의 특정한 경제적 모순과 위기에 대처하려는 시도다. 미국은 1970년대 초반 자신들의 전후 경제모델이 붕괴되기 시작한 이후 다른 나라의 시장을 자신들의 무역·투자·금융에 개방하려 애써 왔다. 러시아의 전략은 1991년 이후 실시된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개혁(또는 ‘충격 요법’)으로 인한 경제·정치적인 충격의 대책으로 진화했다. 한편 중국은 방대한 양의 잉여자본을 다른 나라의 인프라와 생산적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상당부분 국내 고수익 투자기회의 감소에 따른 대책이었다. 각 경제전략은 제각기 다른 결과를 추구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천연자원과 자본 등 가치 있는 자산의 소유와 통제를 통해 부를 창출하고자 한다. 러시아는 관세동맹 창설을 통해 다른 통상 파트너들에 비해 경쟁 우위를 차지하면서 비틀거리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를 희망한다. 중국은 배송 시간을 단축하면서 신흥시장에 접근하고자 한다. 각 대국이 거둔 경제적 성공 수준은 저마다 다르다. 한편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은 지역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방식으로 약화돼 왔다.예컨대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외국과 지배계급의 자산 획득, 약탈적 대출관행, 가계 부채를 둘러싸고 사회적 불만이 비등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은 EEU 가입 후 경제난을 겪으면서 러시아와 관계가 경색됐다. 타지키스탄에선 중국의 자금지원을 받는 일부 프로젝트가 정치인 부정축재를 둘러싼 논란에 휘말렸다.갖가지 비경제적 요인 또한 작용한다. 러시아의 EEU 회원국들은 민족적·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문화·언어·상징적으로 강한 연대감을 갖고 있다. 한편 중국은 BRI를 실크로드의 고대 통상루트 네트워크에 비유함으로써 중국·중앙아시아 간의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재구성했다.그러나 3가지 이유에서 러시아·중국보다 미국의 성공 가능성이 더 크다. 첫째 미국은 경제·재정적으로 상당한 자원을 보유해 협력 사업이 중앙아시아 지배계급에 혜택을 준다. 최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재계 지도자들을 만나 미국 투자와 기술 이전 확대를 호소했다.둘째 미국은 또한 라이벌들의 계획에 방해공작을 펼칠 만한 정치·군사력을 보유한다. 예컨대 러시아 위성국가들의 궤도에서 우크라이나를 빼내는 데 미국과 EU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가 빠지면 EEU는 상당히 약화된다. 아울러 남중국해를 통과하는 중국의 통상루트에도 미국 해군이 위협을 제기한다.셋째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금융기관 등 더 광범위한 경제 지배체제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모순과 위기를 관리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인 덕분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없이 도를 넘는 군사·소비 지출을 지탱할 수 있었다.중앙아시아에서 승리하는 대국이 미래 글로벌 자본주의의 성격 그리고 세계가 직면하게 될 경제·정치적 위기의 기틀을 형성할 것이다. 예컨대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타격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줬으며 그 충격파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그 뒤로 러시아와 중국이 구축한 두 가지 대안적 경제 체제가 역사의 재현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앙아시아는 뜻하지 않게 라이벌 대국들이 그 지역과 세계에 자기 브랜드의 자본주의 도장을 찍으려 애쓰는 경제 전쟁터의 한복판에 놓이게 됐다.- 발리하르 상게라, 엘미라 사티발디에바※

2018.07.30 16:05

4분 소요
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5) 알프레드 크루프

전문가 칼럼

독일의 기업인 크루프는 철강 생산과 무기 제조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모은 돈의 상당수를 직원 복지를 위해 재투자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직원 복지의 기반이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독일 기업인 알프레드 크루프(1812~1887)는 기술 개발을 통한 혁신,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기업 활동, 기대를 뛰어넘는 복지제도라는 세 가지 업적으로 세계 부자들의 역사에서 커다란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크루프는 철강 생산과 무기 제조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가 제조한 대포는 프로이센군의 유럽 대륙 최강의 군대로 군림하는 데 한몫했다. 크루프가 키운 크루프사(Krupp A.G.)는 그의 사후인 20세기 초 독일 철강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며 유럽 최대의 기업으로 군림했다.크루프는 1861년부터 당시 전세계 어떤 기업도 생각하지 못한 사내 복지 제도를 만들었다. 크루프는 근로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고 근처를 공원과 학교, 그리고 놀이터와 휴양시설로 채웠다. 깔끔하고 효율적인 시설 때문에 크루프사 직원 거주지는 주변과 확연히 구별됐으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크루프사 본사가 위치한 에센에는 2만200명에 이르는 직원이 근무했다. 에센은 거대한 크루프 타운으로 변모했다. 국가 속의 국가와도 같았다. 크루프의 복지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직원이 병에 걸리면 치료비를 지원했다. 직원이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사망해도 그 가족들이 이전과 똑같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와 무료 목욕탕을 제공했다. 사고·생명·질병 보험도 회사에서 들어줬다. 기술과 업무 훈련 교육도 무료로 제공됐다. 이런 혜택을 받은 직원들은 크루프사와 크루프 가족을 국가와 호헨촐레른 왕가를 대하듯이 대했다. 복지 혜택을 주고 직원들의 충성심을 얻은 것이다.크루프사의 근로자에 대한 이 같은 온정주의에서 영감을 얻는 비스마르크 총리는 국가 차원의 사회복지제도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확장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혁명이 아닌 기업과 국가의 제도로서 근로자의 세상을 만들어 준 셈이다.알프레드 크루프는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창업한 자그마한 주물소를 물려받았다. 산업혁명의 불을 당긴 영국에 이어 후발 산업국가로 등장한 독일에서 19세기 철강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철로 부를 일궜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독일 최대의 철강 업체로 키웠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산한 품질 좋은 철을 활용해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개발해 제조하기 시작했다. 철에 만족하지 않고 품질 좋은 철을 활용해 고부가 상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크루프사는 당시 독일 최대의 철강업체이자 무기회사를 겸하게 됐다. 프로이센 주도로 1871년 통일을 이룬 독일은 융성하는 산업국가이자 막강한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산업국가 독일에 ‘산업의 밀’이라고 할 수 있는 강철을 공급하고, 군가국가 독일에 총포를 비롯한 철제 무기를 공급한 대표적인 기업이 크루프사다. 크루프의 사업 성공은 독일 제국의 부흥과 궤를 함께한 셈이다. ━ 비스마르크에 영향을 준 사내 복지제도 알프레드 크루프는 1812년 독일의 산업도시 에센에서 태어났다. 독일 산업화의 현장인 루르 공업지대의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다. 그는 발명가인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았다. 프리드리히는 라인강변에 수차를 동력으로 쓰는 작업장을 설치할 정도로 뛰어난 발명 기술을 선보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혁신의 엔지니어, 열정의 기업인이었다. 당시는 철강이 지금의 정보기술(IT)인 인공지능(AI) 같은 혁신적인 첨단 벤처산업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철강업의 핵심기술인 주강 제조법을 시험했다. 당시 이 기술은 산업혁명 선발국가인 영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오랫동안 이 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182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실의 속에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당시 14세였던 크루프가 학교를 그만두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염원이던 주철 제조법 연구도 함께 이어받았다. 그는 주물소를 운영하며 낮에는 직공들과 쇠를 만들고 밤에는 아버지가 하다만 기술개발을 위한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영국에까지 찾아가 제조비법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영국의 과학기술과 산업에 반해 자신의 독일식 이름인 알프리트(Alfried)를 영국식인 알프레드(Alfred)로 바꾸기까지 했다. 처음 몇 년간은 직공들 임금을 주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버텼다.기회는 15년 뒤에야 찾아왔다. 1841년 알프레드는 동생 헤르만의 도움으로 드디어 주강 생산 기술을 확보했다. 주강으로 숟가락을 제조하는 기계까지 만들어 특허를 얻었다. 1847년 이를 바탕으로 주강을 활용한 대포를 처음으로 제조했다. 그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박람회에 쇠를 녹여 한 번에 만든 무게 2000kg짜리 선강 주괴를 제조해 선보였다.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는 4만5000kg짜리 선강 주괴를 내놨다. 쇳물을 녹여 만든 이 거대한 선강 주괴는 유럽과 북미 전역의 엔지니어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불렀다. 이 두 차례의 전시회를 계기로 에센 출신의 크루프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국제적인 브랜드가 됐다. ━ 발명가의 피를 이어받은 혁신의 엔지니어 1851년 이 회사는 또 다른 혁신적인 발명에 성공한다. 바로 용접하지 않고 통째로 주물로 만든 기차 바퀴를 개발해 미국 시장에 판매한 것이다. 이 성공에 힘입어 회사는 경영 면에서 엄청난 성공을 얻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재정적인 안정을 확보한 알프레드는 공장을 확장하는 한편 발사 속도와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개선된 대포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하지만, 구습에 젖은 당시 상당수 프로이센 장교들은 이 대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주강 대포를 납품하지 못하게 된 알프레드는 이를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빌 헬름 4세에게 선물로 바쳤다.왕은 이를 장식용으로 사용했지만 국왕의 동생인 빌헬름은 이 발명품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뇌졸중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대신 섭정을 맡은 빌헬름은 크루프의 후장식 주강 대포를 312문 사들였다. 이를 계기로 크루프는 프로이센 왕국과 뒤를 이은 독일 제국의 핵심 방위산업 업체로 올라섰다.그 다음 단계는 국제 시장 장악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크루프 대포의 품질에 반해 사들이고 싶어 했지만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어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크루프의 신형 주철 후장식 대포와 구식 황동 전장식 대포의 대결장이 됐다. 그 결과는 프랑스에 충격을 안겨줬다. 이 전쟁에서 보여준 크루프 대포의 성공은 국제적인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크루프사는 영국의 암스트롱사와 프랑스의 슈나이더-크뢰소사를 누르고 전세계에 우수한 독일제 대포를 팔았다. 러시아, 칠레, 멀리 사이암까지 크루프사의 고객이 됐다. 크루프사는 최초의 다국적 무기업체가 됐다. 크루프는 여기서 벌어들인 돈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광산, 네덜란드의 조선소 등을 사들이며 유럽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크루프는 독일 북서부 네덜란드 국경 근처의 메펜이라는 소읍 인근에 세계 최대 규모의 포 사격장을 갖춰놓고 이곳에서 전 세계에서 몰려 든 무기 구매자들 앞에서 1878년과 1879년에 걸쳐 시범 포격을 했다. 그는 46개 국가를 고객으로 유치했다. 크루프는 188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7만50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유럽 최대의 철강·군수업체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평생에 걸쳐 2만4576문의 대포를 생산했다. 이 중 1만666문는 프로이센 또는 독일 제국에 납품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1만3910문은 외국에 수출했다. 크루프사는 글로벌화가 시작된 19세기 말 아무리 무기 업체라도 다국적 기업이리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글로벌 시대 부자의 재산은 글로벌 활동에서 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 혁신 소총만 믿고 방심한 프랑스군 크루프의 혁신적인 대포에 대패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전 프로이센군의 전력은 프랑스군에 뒤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군이 보유했던 첨단 샤스포(Chassepot) 소총의 위력 때문이었다. 1868년 프랑스 총포 발명가인 앙투안 샤스포가 공병대와 함께 개발한 이 소총은 훈련에 따라 1분에 8~15발을 쏠 수 있는 첨단 소총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자국의 기술자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가 1836년 발명한 드라이제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드라이제 소총은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후장식 소총이었다. 후장식은 탄환을 총신 뒤쪽에서 장전하는 방식이다. 드라이제 소총은 화약과 뇌관, 탄알이 하나로 결합된 현대식 탄환을 사용한 최초의 소총이기도 했다. 이전의 전장식 소총은 이른바 화승총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어왔던 조총이 바로 화승총이다. 화승총은 통산 1분에 1~2발 발사가 고작이었으며 고도로 숙련된 병사라도 3발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실탄 재장전은 꿇어앉은 상태에서만 가능했으며 엎드려서 몸을 숨긴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소총수들은 전쟁 때 꼼짝없이 적의 사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을 한꺼번에 건너뛰는 후장식 소총인 드라이제의 도입으로 프로이센군은 막강한 전력을 확보했다.하지만 프랑스는 1868년 개발한 신형 샤스포 소총으로 이러한 프로이센군을 압도했다. 샤스포는 보다 가볍고 기계적으로 정밀해 1분에 8~15 발을 쏠 수 있었다. 유효 사거리도 915m에 이르렀다. 드라이제 소총이 365~550m인 것과 비교하면 거의 배에 이르렀다. 게다가 탄환이 가벼워서 병사 한 명이 100발 이상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드라이제 소총탄은 70발 정도 지참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전술적인 우위를 짐작할 수 있다.이러한 살인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군은 안심하고 독일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방심한 프랑스군의 머리 위로 프로이센군의 무지막지만 크루프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떨어졌다. 혁신에 취하면 새로운 혁신을 하기 힘들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다. 이는 군은 물론 기업에도 적용된다. ━ 혁신기술의 기업이 독일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다 크루프의 전성시대는 1870~71년 벌어졌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였다. 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프로이센군은 1870년 9월 1일 프랑스 동부에서 벌어진 스당 전투에서 12만 병력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결정적인 전투였다. 프랑스군은 3000명이 전사하고 10만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까지 항복해 포로로 잡히는 수치를 당했다.당당한 군복 정장에 군용 장화와 철모 차림의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의자에 앉아있는 프랑스 황제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림이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빌헬름 캄프하우젠이라는 독일 화가가 1878년 그린 이 작품은 비스마르크의 느긋한 표정과 나폴레옹 3세의 초조한 표정이 대조적이다. 계속 진군한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한 뒤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통일과 ‘독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가 제국 총리에 각각 올랐다. 프랑스는 이 전투의 패배로 9월 4일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폴레옹 2세의 제2제정이 무너졌다. 전쟁은 프랑스엔 치욕으로, 프로이센에는 영광으로 기록됐다.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크루프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프로이센군의 승리는 곧 자신이 개발해 생산한 철로 제조해 공급한 주강 대포의 승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프랑스군은 황동으로 만든 전장식(화약과 포탄을 포신 앞 부분에서 장전하는 방식) 대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시대와 별 차이가 없는 구식 대포였다.첨단 기술이 탄생시킨 ‘크루프 대포’크루프가 만든 대포는 신형이었다. 재료부터 강력한 주강이었다. 포탄을 포신의 뒷부분에서 장전하는 후장식이었다. 발사용 화약이 포탄 내부에 들어있는 일체형 포탄을 사용했다. 고품질의 단단한 주철 포신이 어마어마한 압력을 이겨낼 수 있었기에 강력한 화력의 포탄의 사용이 가능했다. 게다가 포열 안쪽에 정밀한 강선(발사된 포탄이 회전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포신 안에 파는 나선형 홈)도 장착할 수 있었다. 대포 포열 안쪽의 강선은 포탄에 회전 관성을 준다. 이는 포탄에 안정된 탄도를 갖게 한다. 따라서 정밀한 강선은 포 사격의 정확도를 높여준다. 크루프 대포는 프랑스군의 대포에 비해 포격 속도는 2배, 정확성은 3배에 이르렀다. 강선 설치에는 과학기술, 그리고 산업 능력이 필요하다. 우선 튼튼하고 품질 좋은 철을 충분히 생산해야 하고 길고 가느다란 구명에 균일한 크기로 얇고 가는 홈을 파는 숙련공도 필요하다. 이를 크루프가 제공한 것이다.프로이센 군은 크루프 대포를 활용해 적을 압도적으로 누를 수 있는 선진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그전까지 포병은 대형 고정 포대에 대포를 설치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포병은 대개 최고 지휘관들과 함께 맨 후방에 집중 배치됐다. ‘혁신의 군대’ 프로이센군은 이 고정관념을 깼다. 말이 끄는 이동식 포대에 대포를 설치해 기동성을 높였다. 포병을 작은 규모의 여러 부대로 나눠 분산 포격을 가했다. 포병 위치도 최전방으로 바꿨다. 이렇게 기동성, 유연성, 즉시성을 갖춘 프로이센 포병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독일 통일이라는 대사건은 크루프 신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크루프가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계기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사건이 역사에 남을 만한 부자를 만든다. 기회는 이를 포착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교훈을 크루프는 남겼다.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6.07.27 16:19

8분 소요
박보미의 ‘도시미술 산책’ ⑤ 이용백 ‘알비노 고래(Albino Whale)’ - 도심을 유영하는 거대한 흰 고래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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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을지로 도심 한복판에 느닷없이 고래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냥 고래가 아니라 16m나 되는 커다란 흰 고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흰 고래의 뼈라고 해야겠네요. 이 고래는 어쩌다가 앙상히 뼈를 드러낸 채 도심 네거리 구석에서 음산히 꿈틀대는 걸까요. 옆에 붙은 작품 설명을 찾아봅니다. 작가는 2011년 비엔날레 한국관에 초대돼 세계적으로 주목 받았던 이용백씨입니다. 작품 소개에는 단지 이렇게만 적혀 있습니다. ‘알비노 고래: 작가는 흰색 고래(큰 일, 재물, 부자, 사업체)를 모티브로 모두의 바람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설마. 평소 작품에 사회현상에 대한 다양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담는 이용백 작가의 성향을 고려하면 상당히 미심쩍은 설명입니다. ━ 궁극의 소원을 상징하는 알비노 고래 비록 어디에도 작가의 명확한 해명은 없지만, 전 제 마음대로 작품의 소재인 ‘하얀 고래’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 볼까 합니다. 먼저 흰 고래 하면 제일 먼저 헨리 멜빌의 유명한 소설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이허브라는 한 외다리 선장이 흰고래에 대한 복수심에 병적으로 집착하다 결국 장대한 죽음을 맞기까지의 여정을 생생하게 그린 장편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는 경이로운 존재가 두 축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모비 딕’이라는 흰 고래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인간 이전부터 살아왔고, 스스로 바다를 선택해 진화해온 고래라는 포유류. 그중에서도 지능이 높고 인간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흰 고래는 섬뜩한 유령처럼 대양을 떠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의 살을 뜯기고 앙상히 남은 뼈다귀만 남은 채 살아남은 선장 에이허브가 한 축입니다. 그는 지옥과 같은 복수심에 불타 모비 딕을 잡기 위해 망망대해를 헤맵니다. 작품 제목에 언급 된 ‘알비노(albino)’는 ‘백색증(albinism)’이라는 뜻입니다. 피부·모발·눈 등에 색소가 생기지 않는 백화현상을 뜻합니다. 일종의 선천성 돌연변이 유전병이죠. 여기서는 몸에 색소가 결핍돼 흰 빛을 띠는 고래를 알비노 고래라고 칭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에 두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네요. 백호나 백마, 백사가 길한 의미를 가지듯 흰 고래도 그 희귀함과 불가사의함 때문에 신성시되기도 하고, 행운과 운명적 필연만이 만날 수 있는 궁극의 소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제 흰 고래가 희소성, 성공을 뜻하는 것이란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왜 하필 고래의 유골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작품 설명에 쓰여진 대로 그저 이 도시의 수많은 사업체의 성공을 빌기 위한 조각일까요. 아니면 인간에게 무참히 살점을 뜯긴 고래의 뼈를 전시해 그들의 욕망의 결과를 표현한 것일까요. 뼈만 남은 고래는 우악스럽고 탐욕스러운 포경의 현장을 환영처럼 남기고 유백색의 섬뜩한 뼈로 박제된 채 의문을 자아냅니다. 작가의 표현과 표제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묘한 해석의 여지가 생긴 것처럼, 세상의 성공이나 실패도 그저 흑백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요. 소설 모비 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허브 선장처럼 끝내 패배할지언정 결단코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는 전설의 CEO처럼 리더십과 독단성, 카리스마와 투지, 용기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격이나 목표의 시비(是非)를 떠나 외경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설사 그것이 광인의 도착된 병증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것을 위해 죽음마저 무섭지 않다는 듯 돌진하는 힘에서 우리는 때때로 전율과 두려움, 위대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포경선 피쿼드호에는 에이허브 선장과 같은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향유고래의 살과 기름을 원하는 선원들이었습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힘이 들고 비루하기까지 한, 매일의 일상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먹고, 자고, 가족을 부양하고,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속에 살아갑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비 딕을 잡고자 하는 열망을 차마 놓지 못해 하늘을 향해 뼈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며 침몰하는 에이허브 선장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나는 그저 돈이 되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승선한 보통의 뱃사람인가 하고요. 죽음의 깃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도면밀하고 맹렬한 에이허브를 욕하는 동시에 선망하면서 말입니다. ━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고찰 멜빌의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속물성과 드높은 이상, 이 두 가지 면이 양립하는 인간 숙명에 대한 고찰입니다. 알비노 고래도 우리에게 자신의 뼈가 어떤 의미인지 정답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작가는 한 가지 단서를 더 남겨두었습니다. 고래의 몸체를 분수로 표현했다는 점이지요. 고래의 유골은 일정 시기, 특정 시간이 되면 물을 뿜어내며 부활합니다. 마치 거대한 장막 같은 바다에서 흔적도 찾을 수 없다가, 문득 신기루처럼 물살을 내뿜으며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모비 딕처럼 말이죠. 그때 죽음을 연상케 했던 뼈는 물줄기 속에 숨어 희미해지고, 단단한 피부 표면에 물방울들이 부딪쳐 부서지는 것처럼 만져질 듯 생생하면서도 빛나는 실체가 됩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고래의 살과 질량. 우리가 꿈꾸고 바라며 손에 쥐기만 하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목표. 어쩌면 작가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추구하는 그 무엇이 결국 이와 같은 게 아닌지 묻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에 넣고 씹어 소화되는 일용할 식량으로써의 물고기가 아닌, 꼭 그 고래여야만 한다는 집착과 그 실체를 기어이 잡아 취했을 때의 현실이 그것입니다. 집착과 현실 사이를 우리는 곧잘 무시하고 달려가지만, 그리하여 선원들은, 아니 이곳을 지나는 도시인들은 그 신성(神性)에 도달한 것일까요. 아직 이른 새벽, 시린 바람이 고래의 뼈 사이사이를 훑으며 지나갑니다. 높은 을지로 빌딩들은 새벽에 출근한, 혹은 밤을 새운 자들이 밝힌 전등불로 초롱초롱합니다. 외투 속에 목을 옹송그린 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빨라집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르지만 다들 각자의 전쟁터를 향해 바삐 걸어갑니다. 서늘하게 빛나는 고래의 시선 아래,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는 승진을 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복수를 하기 위해 각자의 피쿼드호에 승선하는 평범한 아침이 또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서울 중구 청계천로 100 시그니쳐타워 앞 사거리서울 수표동 청계천가를 따라 걷다 보면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에 시그니쳐타워가 자리 잡고 있다. 동관과 서관으로 구성된 시그니쳐타워는 화장품 제조업체 아모레퍼시픽그룹과 레미콘 제조업체 동양 등의 본사가 소재한 곳이다. 이용백 작가의 알비노 고래는 청계천가 시그니쳐타워 앞 사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싱가포르 통상산업부 산하JTC코퍼레이션이 부동산 자산을 운용하기 위해 설립한 싱가포르 자산운용사 아센다스(Ascendas)가 시그니쳐타워를 소유하고 있다. 아센다스는 2010년 이용백 작가에게 시그니쳐타워 앞 작품 설치를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이용백 작가는 애초 본인의 대표작 중 하나였던 피에타(Pieta)를 패러디한 작품을 설치하고자 했다. 피에타는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설치 작품. 하지만 아센다스는 피에타 패러디 작품의 내용이 다소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이용백 작가는 알비노 고래로 설치 작품을 바꿨다. ‘모두의 바람을 기원한다’는 다소 모호한 알비노 고래 하단 작품 설명도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알비노 고래는 2011년 시그니쳐타워에 설치가 완료됐다. 이용백 작가- 1966년생. 1990년 홍익대 서양화과, 199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 회화과·조각과를 졸업했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초대받았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마이클 제이콥스 뉴욕현대미술관(MoMA)·휘트니미술관 컬렉터가 꽃무늬 군복을 소재로 한 영상작품 ‘엔젤 솔저(Angel Soldier)’를 구매해 화제가 됐다. 비디오·조각·설치·회화 등 매체나 장르에 구애 받지 않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박보미-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

2014.11.30 22:58

5분 소요
CNN을 지향하는 킬러 사이트

산업 일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 조직 중 하나에 사무실이 없다. 수습사원도 없고, 직원들은 일한 대가로 기본 생활비도 받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설립자는 기자 출신이 아니며 어느 모로 봐도 뉴스 사이트를 운영할 만한 입장이 아니다.하지만 이들의 작품인 라이브리크닷컴(LiveLeak.com)은 지난 8년 사이 세계에서 가장 멀리까지 영향력이 미치는 미디어 업체이자 인터넷에서 가장 방문자가 많은 500대 사이트 중 하나로 성장했다. 광고가 없으며 미디어 중심지 뉴욕에든 첨단기술 허브 실리콘밸리에든 모두 관심이 없다.그래도 라이브리크는 한 달에 2300만 명 안팎의 방문자수를 자랑한다. 그중 대다수가 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다.라이브리크는 무엇이든 다(그중 태반에 ‘성인용 콘텐트’라는 딱지가 붙었다) 보여주는 사이트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슬람국가’의 처형 동영상 게시에는 최근 선을 그었다. ISIS로 더 많이 알려진 단체다. 요즘엔 라이브리크의 편집자들이 “노골적인 폭력 미화”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삭제한다. 출발은 무시무시했지만 그동안 많이 진화한 셈이다.불과 12년 전에는 사이트가 오그리시닷컴(Ogrish.com)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초기 화면에 접속하면 적나라한 콘텐트와 ‘성기제거(Genital Mutilation)’ 같은 분류 항목이 뜨곤 했다. 오그리시가 처음 출범했을 때는 여러 개의 ‘쇼크 사이트(예를 들면 Rotten, Stileproject 등)’ 중 하나였다.절단된 사체, 자동차 사고, 화상 피해자, 유전적 기형을 비롯한 기괴한 이미지를 올리던 사이트들이다. 사이트는 종종 폭력성을 띤 포르노 후원광고를 게재하며 열성 팬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오그리시는 섬뜩한 동영상 자료를 게시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사악한 크니블(Evil Knevil)’로 알려진 오그리시의 웹마스터는 출처 불명의 동영상 콘텐트를 사이트 방문자들에게 새로 보여줄 수 있었다. 대역폭이 커진 네트워크 통신망 덕을 봤다. 세계 각지의 기숙사 방에서 경악과 탄식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오그리시는 현실세계의 공포를 찾아 다니는 방문자들에게 전율을 안겨주려는 취지의 엽기적인 콘텐트를 게재했다. 아울러 전쟁과 테러리즘의 섬뜩한 이미지들을 올리며 이름을 날렸다. ‘살을 파먹는 벌레의 공격을 받는 남자 성기’ 같은 제목이 올려지는가 하면,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나 멕시코 마약조직이 집행한 처형 동영상이 올려지기도 했다. 동영상에는 선정적이고 엉성하게 쓰여진 사진설명을 붙여 호기심을 부채질했다.‘웰 시코(Well Sicko)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첫 동영상이다. 이라크에서 몰래 입수한 공개처형 장면이다. 희생자 바로 앞에서 총격을 가해 끝장을 내는 사담 후세인 붕어빵의 냉혹한 모습이 경이롭다.’ ~사악한 크니블세월이 흐르면서 생생한 전쟁터 영상을 입수할 수 있었던 군인들 사이에서 오그리시의 팬이 많아졌다. 사이트의 기고자와 이용자가 증가하면서 서서히 무작위적인 쇼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반면 전쟁의 공포에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그런 관심과 함께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동영상 유출자와 책상머리 종군기자들의 커뮤니티가 새로 형성됐다.2006년 사이트 운영자들은 오그리시의 브랜드를 바꿀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그중 한 명인 공동설립자 헤이든 휴이트의 근거지가 잉글랜드 맨체스터다. 괴팍하고 사적인 블로그를 운영한다. 라이브리크에서 자신이 하는 일과 언론 실태를 다룬다.대다수 언론은 웹 포럼의 회의론자들이 말하는 ‘깨어나라, 무지몽매한 군중들아(Wake Up, Sheeple)!’ 모드로 움직인다고 믿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태도를 견지해 왔다. 화를 잘 내는 교사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15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했다.제1차 걸프전 때 언론을 향한 환멸이 깊어졌다. 그 시기의 미디어엔 투명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그는 규정한다. 바로 그때 인터넷을 만나면서 그의 세상이 바뀌었다.“1990년대 후반 처음 PC를 들여놓고 33.3k 모뎀으로 온라인에 접속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경험 중 하나였다”고 그가 말했다. “그 많은 정보와 사람들이 모두 내 손 안에 있었다. 지금도 원시적인 옛날 모델이 인터넷에 연결되는 소리를 들으면 향수에 젖는다.”원래는 포럼을 이용하려고 오그리시에 가입했다. 휴이트에 따르면 오그리시의 파워 유저 중 다수는 유혈 폭력 콘텐트 수준을 뛰어넘어 지정학적 관심사를 다루는 콘텐트의 공유에 더 관심을 가졌다.휴이트는 2003년 가입했을 때 오그리시 멤버 중 한 명이 그에게 한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유혈 사이트의 CNN이 되고자 한다.” 지금은 이 같은 표현을 웃어넘기지만 당시엔 그들의 아이디어에 흥미를 느꼈다. ‘뉴스’로 불릴 만한 유의미한 시사적 사건들로 초점을 옮기는 한편 어둡고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사이트의 끊임 없는 호기심을 살리는 방식이다.“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감이 잡혔다”고 그가 말했다.라이브리크의 공적인 얼굴은 휴이트뿐이다. 그는 제3차 개편 작업에 여념이 없다. 최대한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이용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커뮤니티 관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커뮤니티는 관리하는 게 아니다.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협력한다.”휴이트는 “드라마에 대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사이트의 많은 논쟁에 개입해 진화하는 작업을 수반하는 포괄적인 표현이다. 혐오 발언, 위협 또는 일반적인 분열로 빠져드는 대화를 진정시킨다. 그러나 토론에 최소한의 교양이라도 남아 있는 한 휴이트는 유익한 논쟁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제시된 의견이 아무리 극단적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인터넷은) 포르노가 아니라 논쟁을 위해 발명됐다”고 그가 말했다.라이브리크에선 40여 만 명의 회원들 간에 많은 논쟁이 벌어진다.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라이브리커’를 자처하는 하나의 대규모 집단을 뛰어넘는 단계로 올라섰다. 대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민족 또는 이해집단으로 이뤄진 다수의 작은 생태계가 존재한다. “때로는 그저 몇몇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려 끼어들었다가 마구 ‘비난을 퍼붓는’ 폭언의 한복판에 말려들기도 한다. 미국 국가안보국, 모사드(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러시아, 그리고 IS 모두와 동시에 연루됐다는 비난”이라고 그가 말했다.커뮤니티가 종종 아수라장을 이루면서도 사이트는 성장했다. 유튜브에선 받아주지 않는 도발적인 콘텐트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사담 후세인을 처형 하는 동영상 콘텐트는 사이트의 최대 히트작이었다.라이브리크가 잠시 동안 세계 200대 웹사이트로 도약하기도 했다. “그런 일에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번은 그것이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비디오였다. 다른 기능은 모두 중단됐다”고 휴이트가 말했다.라이브리크는 2008년 네덜란드 단편영화 ‘피트나(Fitna)’를 올리면서 악명을 떨쳤다. 코란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운영자들이 가해 위협을 받은 뒤 삭제됐다. 하지만 곧바로 영화를 다시 올렸다.극히 최근에는 휴이트가 ‘IS 홍보 비디오’라고 부르는 온갖 끔찍한 참수 동영상의 게시를 거부해 파문을 일으켰다. 가족에 대한 배려 또는 다른 어떤 희한한 발상에서 삭제된 건 아니었다. 현 시점에선 대화에 새로운 관점을 전혀 보태지 않고 구태의연하다는 이유였다.애당초 파문을 일으켰던 비디오는 여전히 올려져 있다. 미국인 기자 제임스 폴리의 참수 동영상이다. “우리의 원칙에서 벗어나기 않았기 때문에 보여줘야 했다. 때때로 자신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휴이트가 말했다.사람들이 전쟁의 섬뜩한 현실을 목도할 수 있을 때 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휴이트는 믿는다. 라이브리크에는 악의 없는 고양이 동영상도 많이 실린다. 사이트에 올려지는 자료가 모두 부패를 폭로하지는 않는다고 휴이트는 인정한다.그러나 올려진 수천 개 동영상의 종합적 효과를 강조한다(거부감을 주는 콘텐트는 이용자가 신고할 수 있다. 신고를 받은 편집자가 삭제할지 결정한다). 이는 제도의 투명성을 나타낸다고 그는 말한다.“최근에 시리아 내전이 크게 확대됐을 때가 기억난다. 완전히 착한 사람들이며 아사드의 군대는 악의적이고, 못된 짓을 하는 끔찍한 사람들이라고 서방 미디어가 우리에게 줄기차게 세뇌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날아든 미디어 메시지 내용은 달랐다. 사실상 양쪽 모두 서로에게 정말로 악랄하고 더럽고 끔찍한 사람들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전쟁 범죄는 우리가 후원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다. 사람들이 그런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휴이트 팀은 도덕적으로 중립성을 지키려 최선을 다한다. 이는 종종 그냥 뒤로 물러나 이용자들 스스로 의견을 제시하도록 한다는 의미도 된다. 라이브리크 이용자들은 나름의 편견을 갖고 있다. 누군가 선동적인 동영상을 올리면 사이트의 누구나 논평이나 대응 동영상을 만들어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줄리안 어샌지(위키리크스 설립자)나 에드워드 스노든(국가안보국 기밀 폭로자) 같은 사람들의 뒤를 이어 폭로계의 스타로 떠오르고자 하는 욕구는 휴이트에겐 전혀 없다. “그것은 사람 중심이 아니다. 한 사람의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고 그가 말했다.“이용자들이 콘텐트를 올리기 때문에 언론 플레이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나머지 일을 처리할 뿐이다. 우리가 편집을 하지 않는 한 모두 순수하다. 우리가 앞에 나서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줄리안 어샌지가 산 증인이다.”2010년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 공개될 때까지는 위키리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휴이트는 말한다. 2007년 미국의 아파치 헬리콥터 2대가 바그다드에서 10여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는 동영상이다. 어샌지는 그 제목을 선택한 이유를 “ 정치적 영향 극대화”로 표현했다.“거기에 붙일 만한 최선의 제목은 ‘부수적 과실치사(Collateral Manslaughter)’라고 생각한다”고 휴이트가 말했다. “그만큼 여론을 정말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는 그것을 사용할 때 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프레임이 설정된 순간에 이미 게임은 끝났다. 사람들에게 선입관을 불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사이트의 규모가 커지면서 휴이트나 라이브리크의 다른 운영자에 관한 소식을 듣기가 앞으로 더 어려워질 듯하다. 그들이 시민 저널리즘 세계의 주축으로 기반을 다지더라도 말이다. “많은 사람 앞에 설 때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외치면 그것을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버스에서 바퀴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게 된다.”

2014.10.12 22:34

7분 소요
DIPLOMACY - 풍랑 속의 한일 관계

산업 일반

일본과 중국은 반드시 충돌한다. 한국의 선택은? 먼저, 두가지 예를 통해 안보와 관련된 한국의 위상과 현실인식의 정도를 알아보자.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Collective Self-Defense)을 행사할 경우 세계 각지의 활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16일 알려진 호주 외무장관 줄리 비숍의 발언이다. 도쿄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졌다. 미국에 이어 호주 정부도 일본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집단적 자위권이란 말은 최신 시사용어처럼 와닿는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일본도 함께 행동에 나선다’ 로 압축될 수 있다. 평화헌법에 묶여 열도 주변을 지키는 자위 수준에 그치던 과거의 일본군이 아니다. 동맹관계인 미국을 돕기위해 세계 구석구석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겠다는 것이 집단적 자위권의 핵심이다.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미국은 현재 전세계에 전선을 가진 나라이다. 멀리는 중동, 아프리카, 남미, 유럽부터 가까이는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전선을 갖고 있다. 미국을 도와 글로벌 차원의 작전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일본의 생각이다.구체적으로 어떤 범주에서, 어떤 작전을 펼칠지는 앞으로 미일 협상을 통해 구체화될 것이다. 전반적인 상황을 볼 때, 미국은 일본의 역할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다.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집단적 자위권을 발휘해 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한국에서는 우향우의 화신 아베 신조 총리가 군사대국에 앞장 선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틀린 것은 아니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은 섬하나를 탈환하기위해 수천명의 희생자를 감수해야만 했다.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 가장 염려하고 조심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일본 재무장은 미국의 지지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스스로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시작된 미국의 요청에 맞추는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집단적 자위권을 미국이 공식 지지한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한국 신문·방송의 반응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왜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는가?’라는 식의 반응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상황을 안다면, 집단적 자위권의 배경에 미국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이다. 굳이 놀란다면, 새삼스럽게 미국이 집단적 자위권 문제를 언급했다는 점이 이상스러울 뿐이다.다이아몬드 구상필자의 예측이지만, 가까운 시일내에 또 하나의 아시아의 대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할 것이다. 한국 언론이 또 놀랄지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상황이다. 주인공은 인도다.인도는 아시아 제국 가운데에서도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다. 일본이 세운 괴뢰국 만주를 가장 먼저 승인했고, 태평양 전쟁 후 전승국 논리에 의한 전범처리에 반대한 나라가 인도이다.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시 ‘동방의 등불’의 저자인 타고르는 친일 인도인의 대명사이다. 백인에 맞선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극찬한 시인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은 일본 연예인이나 한물간 우익 인사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트위터를 통해 식민지를 찬미하는 글을 남긴 일본 만화가에 관한 기사가 신문 지면을 도배하는 판국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도 쉽게 넘어간다. 인도가 왜? 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최근의 국제 정세를 보면 이미 그 답은 나와 있다. 한국 언론의 관심 밖에 있는 ‘다이아몬드(Diamond) 구상’이 정답이다.원래 ‘민주주의에 기초한 다이아몬드 전략(Democratic Security Diamond)’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아베가 2007년부터 부르짖은 새로운 군사전략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 하와이, 일본, 호주, 인도 네 나라를 엮는 군사 방어망이다(위 그림 참조). 미국의 동맹국이자, 다이아몬드 권내에 들어가는 한국은 협력대상국에 포함되지 않는다.다이아몬드 구상의 작전범위를 보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해상국가로 발돋음하려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4개 국간의 준 군사협력 구도다. ‘민주주에 기초한’이란 형용사가 다이아몬드 구상 앞에 붙는다는 것만 봐도, 공산 1당 독재국 중국을 겨냥한 집단방어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달리 일본·인도·미국·호주는 민주주의 가치관에 기초한 이념의 동맹국이란 점이 강조되고 있다. 사실 집단적 자위권의 출발점은 다이아몬드 구상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젠가 전 세계로 나가겠지만, 집단적 자위권이 시행될 최초의 무대는 다이아몬드 권내가 될 것이다. 일본의 센카쿠(尖閣중국명:댜오위다오) 열도를 비롯해, 중국이 아시아 제국과 해상영토 분쟁을 빚고 있는 지역이다.미국에 이어 호주, 이후 인도가 집단적 자위권의 지지자로 나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다. 사실 다이아몬드 구상을 둘러싼 일본의 외교력은 지난 10월 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통해서도 충분히 발휘됐다. 박대통령의 정상외교에 가려져 한국 언론 대부분이 무관심하게 봤던, 일본·호주·미국 3국간에 이뤄진 공동성명이다.“남중국에서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그 어떤 위압적인 행동에도 반대한다.” 남중국 해상에서 패권을 노리고 있는 중국에 대한 노골적인 경고인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 불참으로 인해 APEC에서 미국 위상의 하락이 염려된다는 분석기사가 적지 않다.미국이 없는 틈을 중국이 발빠르게 치고 나간다는 식의 글도 많다. 필자는 다르게 본다.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가능성은 있지만, 중국이 빈자리를 치고 들어간다는 것은 두고 볼 사항이다. 미국, 나아가 인도와 호주를 등에 업은 일본이 그같은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F-35와 한국의 정세관안보를 대하는 한국의 현실인식과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두번째 예로 F-35 전투기를 빼놓을 수 없다. 록히드 마틴이 만든 전천후 수직이착륙 전투기로, 기본형인 F-35A의 가격은 무려 1억 5000만달러에 달한다. F-35 비행기 전면광고는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스 같은 미국 유력지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다. 보기에도 날렵하게 보이는, 최첨단 비행기가 지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전투기 전면광고는 일반시민과는 무관하다. 국방예산삭감에 들어간 미국 정부에 어필하기위한 광고라 볼 수 있다.한국인 입장에서 워싱턴포스트의 F-35 전면광고를 보면, 한가지 의아스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비행기 사진 바로 밑에 실린, 글로벌 파트너(Global Partners)에 관한 부분이다. F-35 전투기를 함께 만들거나, 구입할 나라들을 글로벌 파트너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성조기와 함께 영국·호주·이탈리아·캐나다·노르웨이·터키·덴마크·스웨덴·일본·이스라엘 등 11개 나라 국기가 그려져 있다.미국과 동맹관계에 있거나 군사적으로 가까운 나라만이 글로벌 파트너로 선정됐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이다. 글로벌 파트너 속에 없다. 필자는 군사 전문가가 아니다. 한 대에 무려 1500억원에 달하는 F-35가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가진 전투기인지도 잘 모른다. 단지, F-35 전면광고 속의 글로벌 파트너에 미국 동맹국 중 하나인 한국이 없다는 점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진다.규모는 물론 질적으로 볼 때도, 스웨덴·네델란드·덴마크는 한미 군사동맹에 비할 바가 못된다. 두 세대 전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운 것은 물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굳건한 동맹으로 자리잡고 있다. 군사기술적으로 볼 때 한국은 터키·호주·싱가포르보다도 한 수 위에 있다. 미국이 총력을 기울여 생산하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동맹국 한국의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미국이 F-35 전투기 개발과 생산에 들어가기 전 전 세계 우방국들에게 참여나 구입의사를 타진한 것은 당연하다. 함께 전투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좋은 조건으로 ‘특혜’를 준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한국은 그런 ‘give and take’의 영역 밖 존재로 남게 된다. 그 결과 글로벌 파트너 리스트에서 배제돼 있다. 인구 530만 명에 불과한 싱가포르와 군사기술 대국 이스라엘도 참가하는 판국인데 한국은 논외다.필자는 한국의 F-35 전투기 구입여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1대 값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한국 라면의 총수출액과 맞먹는 상황이지만,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을 지 여부는 관련 전문가가 따지면 된다. 문제는 ‘왜 비행기가 개발된 초기단계부터 참가하지 못했던가?’라는 점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반미 정서가 주된 답이라 생각된다.F-35가 개발에 들어간 시기는 노무현 정권의 집권 시기와 맞물린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도 참가의사를 타진했으리라 생각되지만, 한국의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이미 고인이 된 대통령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반미를 하든, 친미를 하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면서 주장을 펴는 것이 현명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감정적 차원에서 대응할 경우, 그 피해는 이후 반드시 나타난다.한국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이 백지화되면서 F-35 전투기 구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전망이라고 한다. 진작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불이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핵심은 결국 돈과 기술이다. 반미든 반일이든, 국민들의 선택이라면 그대로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카드를 전부 내리거나, 문을 꼭꼭 닫을 필요는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처리하는 것이 현명하다.최근 한국은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참가를 적극화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동안 가입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이 한국이다. 중국을 겨냥한, 일본과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연합체이기 때문이다. TPP는 자유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협력체다. 국영기업의 지원을 받는 중국은 가입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가입할 경우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TPP의 조건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자유경제를 지향하는 한국이 TPP 가입에 반대한 것은, 중국을 의식한 방침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을 적으로 만드는 경제협력체에 들어갈 경우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의 이익보다 중국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 뒤늦게 TPP에 들어간다는 것은 협상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 끼어들려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F-35와 같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21세기 지정학의 무대가 된 동북아21세기 동북아는 20세기를 풍미했던 구시대 이데올로기의 대결장처럼 느껴진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헤로도투스의 저서 ‘역사’에서부터 논의된 지정학이다. 기원전 499년부터 50년간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지리적 환경이 민족과 국가 번영의 주된 요소로 떠오른다. 지리와 정치를 연결하는 지정학은 제국주의 시대 이래 20세기 냉전이 끝날 때까지 전 세계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다.그러나 21세기 들어 글로벌시대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IT혁명이 일어나면서 국제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다시 부활한 것은 21세기 동아시아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일본·한국·중국, 그리고 남중국해를 잇는 해상 루트이다. 아베가 주장하는 다이아몬드 구상권을 중심으로 한 해상권이 지정학의 새로운 연구 테마로 자리잡게 된다.한국은 지정학의 영향을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일제의 식민지, 냉전과 함께 시작된 한국전쟁은 지정학적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역사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은 지정학이 몰고올지도 모를 엄청난 광풍에 무심하다. 2013년 가을, 주변국을 아우르는 한국의 중심 화두는 역사 문제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역사는 과거사를 의미한다. 박 대통령이 주도하는 과거사 청산문제로 인해 ‘역사=일제의 만행’으로 해석된다.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당했던 어제의 고통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다. 역사를 일제의 만행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입장은 타당하고 정의롭다. 일본 역시 ‘역사=과거의 잘못’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전쟁터에서 패잔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둔 세대, 즉 단카이(団塊)가 반성론의 핵심에 선 사람들이다. 친한·친중의 채널을 유지해온, 전후 일본의 양심이다.잘 알려져 있듯이 단카이 세대는 최근 정년퇴직과 함께 일본내에서의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 해도 자리에서 물러나는 즉시 힘이 빠진다. 아베의 우향우 행진은 ‘역사=과거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던 세력들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세대교체의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역사’를 ‘과거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을 찾아내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박 대통령의 과거사 청산문제는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 나타난 외교 카드이다. 일본 전체가 무심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자격으로, 한국 신문에 기고하거나 방송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세히 보기 바란다. 대부분 단카이들이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격려하는 것은 너무도 고맙지만, 사실 일본에서의 발언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한국에 어필하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역사=과거의 잘못’이라는 식의 생각을 펼 곳이 사라진 상태다. 과거를 대하는 한일 간의 시각차2013년 일본인들이 말하는 역사는 ‘태평양 전쟁 패전의 원인’이란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 무모하게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군인 230만·일반시민 80만에 달하는 일본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가’에 관한 문제가아니다. 간단히 말해 ‘왜 졌는가?’라는 점에 모아진다.미국을 적으로 하면서 어제의 치욕을 갚자는 것이 아니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태평양전쟁의 교훈을 얻어내자는 것이다. 과거사를 통한 반성, 나아가 군국주의의 자랑도 아니다. 과거사를 통한 생존전략 확보가 최대의 현안이다. 사실 현재 아베가 벌이고 있는 모든 외교·군사 정책의 초점은 ‘왜 졌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볼수 있다.집단적 자위권을 시작으로, 일본 내각 기관의 정보를 통합운영하는 미국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창설, 미일동맹을 축으로 하면서 확대되는 다자간 군사협력 체제, 사이버 안보와 우주전쟁에 대비한 테크놀로지 향상, 해병대 창설 같은 것들은 ‘왜 졌는가?’에 대한 해결 방안에 해당된다. 종군위안부 문제나 전시 노동자 보상에 관한 문제는 관심 밖이다.‘왜 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일본인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일치하는 답이 하나 있다. 해상보급 루트에 관한 문제다. 전쟁에 들어가기 직전 일본 육군과 해군은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1941년 기준으로 석유가 1대 72, 철강이 1대 18, 국민소득이 1대 13으로 절대 열세였다. 종합적인 차원에서 조사한 결과 일본과 미국의 국력차는 무려 721배에 달했다.정신이 나가지 않은 한 721배나 큰 나라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육군과 해군이 개전에 들어간 것은 동남아시아 자원 때문이다.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격에 들어간 것은 1941년 12월 7일 아침이다. 육군은 곧이어 동남아시아로 진격했다.믿어지지 않겠지만 불과 6개월 만에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던 미국·네델란드·영국·호주를 밀어냈다. 한꺼번에 영국인 2만 명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포로들에게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전쟁에 질 경우 자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포로에 관한 유명한 영화 중 하나가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1957년작)’다.개전 후 일본은 승리할 것처럼 보였다. 721배나 큰 대국을 상대로 싸웠지만, 동남아시아로부터 전쟁 물자를 실어나르면서 별 문제가 없을 듯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1943년 들어 급변했다. 보급선 차단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당시, 미국은 대서양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다.독일 잠수함 U보트가 유럽으로 향하던 미국 수송선과 함대를 공격하면서 해상전선이 동부에 집결된다. 일본은 그틈에 동남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한 것이다. 전쟁 후 1년이 지나면서 미국은 독일 U보트 공략에 나섰다. 대형 호위함을 통한 수송과, 공군기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대서양의 제해권을 미국이 장악하면서 주력 함대가 태평양으로 옮겨갔다.미국이 가장 먼저 주목한 부분은 해상수송선이다. 싱가포르·사이공·마닐라·대만·도쿄로 이어지는 5000㎞의 해상 보급 루트에 군사력을 총동원했다. 수송선 공격에 나선 것은 잠수함이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개발했다는 S-J 레이더를 통해 원거리에서 수송선을 포착한 뒤, 어뢰를 날리는 식이었다. 개전 당시 일본은 600만t에 달하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 군용으로 300만t, 물자수송용으로 300만t씩 이분화했다.일본은 매년 10%, 즉 60만t 정도가 적의 공격으로 침몰할 것으로 전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당한 피해 규모에 기초한 통계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달랐다. 1941년 96만t, 1942년 169만t, 1943년 392만t의 선박이 물에 가라앉았다. 신형 잠수함이 개발되면서 일본의 해상 보급 루트는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남아 있던 일본의 선박보유 규모는 30만t에 불과하다. 95%가 미국의 공격에 의해 사라졌다. 몰살이라 보면 된다.잘 알려진대로 일본 육군대신 아나미 코레치카 장군은 패전 당일까지 1억 결사항전을 부르짖은 인물이다. 옥이 부서질 때 나는 아름다운 빛과 소리처럼 모두 함께 죽자는, 이른바 옥쇄(玉碎)를 마지막까지 주장했다. 해상 보급 루트가 막히면서 해외 전선에서는 불리하지만, 일본 내에서 싸울 경우 승산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내에는 학도병 무장군인을 비롯해 150만의 병력이 존재했다. 1억 명 모두가, 상륙하는 미군 한 명씩만 살해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난 장군의 생각이었다.정상이라 볼 수 없는, 거의 반 정도 미친 판단이지만, 당시 육군 지도부 중 상당수가 1억 옥쇄를 믿었다. 항복 소식이 알려지자 육군의 일부는 쿠데타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 해군은 전함 격침과 보급선 차단을 통해 패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시골 출신이 주축인 육군은 해군과 달리 돌아가는 현실에 둔감했다. 천황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명하자 아나미 장군은 곧바로 집에 돌아가 자살한다. 8월 15일 아침 7시 10분이었다.태평양전쟁 당시 한반도에서는 기아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해상 보급 루트가 차단돼 식량을 옮기지 못하면서 빚어진 비극이다. 일본 군인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해상 보급 루트가 차단될 경우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몸으로 체험한 셈이다.‘왜 졌는가?’에 대한 답으로 해상 보급 루트 확보에 대한 중요성이 상식처럼 정착된 것이다. 2012년 9월 11일, 일본 정부는 센카쿠 열도 내 3개 섬을 20억 5000만 엔에 구입했다. 원래 도쿄도 이시하라 신타로 전 지사가 구입하겠다고 말했지만, 정부가 대신 구입했다. 이후 일본과 중국은 길고 긴 영토분쟁에 들어갔다.일반적으로 센카쿠 문제는 섬 주변의 자원개발을 둘러싼 분쟁으로 받아들여진다. 베트남·필리핀에서의 해상분쟁처럼, 중국이 남중국해의 자원개발을 독점하려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은 다르다. 중국이 조직적으로 벌이는 해상 보급 루트 차단이란 차원으로 해석한다. 멀리 중동의 석유를 비롯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자원과 식량 수송을 차단하려는 차원에서의 도발로 받아들인다.일본인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일본의 급작스런 우향우 바람은 일본 내 우익의 발현이라기보다, 중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 센카쿠의 위치를 보면 일본으로 향하는 해상 보급 루트와 일치한다. 중국이 차지할 경우 주변에 대한 무력시위와 함께 일본의 생명선이 위협받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일본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생명선센카쿠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도 강경하다. 센카쿠는 지도상으로 볼 때 대만에 가깝다. 대만 본토는 논외로 치더라도, 부속도서를 중국령이라 주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일본을 연합군최고사령부(GHQ) 점령으로부터 해방시킨 샌프란시스코 조약체결 당시 센카쿠는 일본의 영토로 확정됐다. 중국 공산당은 자국이 참석하지 않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한다. 전승국 자격으로 대만이 참석해 추인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국제법에 따르면 중국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국제법이 아닌 중국식 세계관으로 해결하려 한다. 경제성장이 한계에 이르러 중국 내 모순이 표면화되면서 반일 민족주의는 좋은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 역시 센카쿠 문제에서 조금의 양보도 할 수 없다.결론적으로 보면, 중국과 일본은 가까운 시일내에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들어서 있다. 정부 차원의 계산된 충돌이라기보다 우발적으로 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 센카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직 지방과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다. 충칭시 서기 보 시라이 사건에서 보듯 중국 남서부에 대한 통치력이 매끄럽지 못하다.중국 군부는 마오쩌둥 이래 계속된 단위(單位) 차원의 전술전략에 익숙해 있다. 항공모함을 사들이고 최신예 짝퉁 비행기를 만들고 있지만,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중앙통제식 군사전략엔 익숙하지 못하다. 중앙 정부의 명령이 아니라, 세상물정 모르는 지방의 군인들이 주축이 된, 단발적이고 자극적인 형태의 분쟁이 센카쿠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만약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어떤 상황이 닥칠까? 집단적 자위권은 미군을 도우려는 일본군의 충정에 그치지 않는다. 거꾸로 해석하면 일본이 도와줄테니, 미국도 일본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센카쿠로 이어진 해상 보급 루트는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도 공유하는 해상 라인이다.센카쿠 무력충돌이 장기화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한국이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보급 루트 차단이 발생할 경우 어떤 대응책이 고려될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센카쿠가 영원히 중국 손에 넘어간다고 할 때, 머지 않아 직면하게 될 한중 국경분쟁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센카쿠 문제는 중국에 맞선, 일본·미국 나아가 호주·인도 4국간 대응구도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의 박 대통령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 과거사 반성과 해결책을 전제로 한일 회담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란 거창한 명분으로 중국에 함께 대응하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물론 한국이 중국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연계할 필요는 없다. 또 과거사 문제로 일본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공동 전선을 펼 필요도 없다.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만나고 함께 공유할 부분을 나누면 된다. 한 쪽을 취하면서 다른 한 쪽을 버리는 식의,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전략은 안 하는 것만 못하다. 10월 10일 아세안(ASEAN) 플러스+3에서 박 대통령은 리커창 중국 총리를 만났다.한국 언론은 대화를 원하는 아베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한 채 한중 간의 우정과 결의를 다진 환담이라고 보도했다. 자세히 보니 20분 만났다고 한다. 통역 빼고 10분간 만난 자리에서 무슨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 리커창을 만난 20분을 자랑하기보다, 그 시간에 아베가 아세안 다른 나라 정상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살펴보는 것도 현명할 듯 하다. 동맹을 통한 외교의 힘동맹 관계에 기초한 외교정책은 근현대 국제정치의 기본이다. 일본은 그런 기본을 충실히 지켜온 모범생이다. 1902년 체결된 이래, 1923년까지 이어진 3차에 걸친 영일동맹, 1905년 미국의 전쟁담당 장관 태프트(Taft)와 맺은 가쓰라-태프트 조약, 1941년 3월 1일 맺어진, 미국을 적으로 한 독일·이탈리아간의 3국동맹,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국에 원자폭탄을 2발이나 투하한 미국과의 동맹.자국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고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끊임없이 외국과의 관계 증진에 나선 것이 일본 외교사의 어제와 오늘이다. 2020년 올림픽 개최지가 도쿄로 결정된 뒤에는, 경쟁국이었던 스페인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와 만나, 스포츠 분야에서의 협조관계를 논의했다.미국과 호주가 집단적 자위권 지지에 나선 데 이어, 10월 16일에는 영국의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이 도쿄에 들러 일본의 입장에 손을 들어줬다. “국제 안전보장 분야에서 일본이 보다 활발히 역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현재 일본이 보여주는 발빠른 변신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당시보다 한층 위력적이고 폭넓다.지정학이 다시 무대에 오르고 일본이 미군의 2중대로 나가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한국의 미래를 안전하게 만들어 줄 유효한 카드는 무엇일까? 과거사 문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의 ‘도게자(土下座, 상대방에게 사죄하기 위해 큰절하듯이 무릎을 꿇고 자세를 숙이는 행위)’를 받는 것이 지금 한국이 안심할 수 있는 길일까? 유일한 길은 동맹관계다.한국이 쌓아온 미국과의 60년간의 군사동맹만이 현재의 어두운 무대를 밝혀 줄 등불이다. 바쁠수록, 정신이 없을수록, 변수가 복잡하게 움직일수록 기본과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9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정치학회에서 한 중국인 학자는 “한미동맹이 미중 관계 개선에 기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필자의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뤄졌다.거꾸로 말하자면, 미중 관계 개선에 기여하지 못하는 한미동맹은 의미가 없고 중국으로부터 불만만 살 것이란 의미이다. 중국인의 주장은 마치 200년 전 중화사상에 젖은 청나라 사신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중국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될 경우, 조선은 아무 것도 하지말라!”한미동맹은 중국을 고려한 동맹이 아니다. 일본을 고려한 동맹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공동이익을 위한 군사협력체제다. 그러나 미일동맹이 굳어지면 한미동맹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론적으로 한미일 3국간의 동맹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곧 닥칠 현실이다. 과거사 문제에 주목한다면, 한미일 3국 동맹 안에서 논의하는 것이 한층 효과적일 것이다.세계의 대의명분을 독점하는 주자학적 세계관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정신적으로도 편할 듯 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한국은 이미 근대화 초기에 쓰라린 체험을 한 나라다. 당시의 고질병이 재발하고 있다. 세계를 보자. 동북아 3국 중 하나가 아니다. 눈을 들어 세계를 무대로 한 한국을 키워보자. 시간이 없다.- 필자 유민호는 에너지 원자력 컨설팅 전문가로 워싱턴 퍼시픽21, Inc 소장이다.

2013.10.21 15:55

16분 소요
U.S. POLITICS - 전쟁을 싫어한 참전용사

산업 일반

오바마는 왜 무력사용을 싫어하는 척 헤이글을 국방장관에 지명했나미국 의회 은어로는 그들을 ‘의회대표단(codels, congressional delegation)’이라고 부른다. 의회를 대표해 전쟁지역과 외국 수도를 방문해 국가안보 분야의 경력을 쌓고 개인적인 외교를 시도하는 의원들이다. 국민은 의원이 골프를 치거나 풀장에서 칵테일을 홀짝이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힐때 종종 그들 소식을 듣는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즐기는 외유로 비쳐진다(their trip exposed as a taxpayer-funded boondoggle). 하지만 때때로 중요한 기능도 한다. 정치인들이 복잡한 외교정책 현안의 뉘앙스를 파악하거나 워싱턴의 당파적인 분위기에서 잠시 벗어나는 기회를 준다.2008년 7월의 일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상원의원들인 버락 오바마, 척 헤이글, 잭 리드가 함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방문했다. 동료애 소재 영화 촬영지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들로선 유대를 돈독하게 다지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정책토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전 측근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부벌레 모임(wonkfests)’이었다. 판이하게 다른 배경에서 비롯된 경험담을 공유하고, 비좁은 군용기 안에서 서로를 곯리며 시간을 보냈다. 오바마는 헤이글이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전쟁지역에 간다고 놀렸다.오바마는 이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헤이글과 연대감을 형성했었다. 이번에는 현장에서 그를 지켜볼 기회였다. 같이 출장을 다녀온 사람들에 따르면 그 미래 대통령은 헤이글이 출장 내내 만난 남녀 장병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헤이글은 훈장을 받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었다(a decorated Vietnam vet). 진정성을 갖고 자연스럽게 군인들과 어울렸다. “군인들은 그가 사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리드가 돌이켰다. “그는 지성적인 차원이 아니라 깊은 정서적 바탕 위에서 그들과 소통했다.”오바마는 헤이글에게서 또 다른 특성도 알아차렸다고 리드를 비롯한 다른 몇몇이 말했다. 사병들과는 마음이 잘 통했지만 그들의 지휘관에게는 까다롭게 구는 편이었다. 바그다드에서 상원의원들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의 브리핑을 받았다. 당시 이라크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었다. 브리핑의 대가인 퍼트레이어스는 공들여 만든 차트와 슬라이드로 최선을 다했다. 모두 이라크 주둔 미군 ‘증강’의 효과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폭력은 감소하고 안정은 확대됐다. 하지만 급속한 병력축소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장군은 경고했다. 그는 통계와 도표를 쏟아내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장군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보는 상원의원들의 시선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고 한 전 측근은 돌이켰다. 그리고 퍼트레이어스가 장황하게 말을 이어가자 그들은 참을성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내 헤이글이 장군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일방적인 강론을 들으려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경제가 추락하고 미국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영구적인 점령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the era of perpetual occupations was drawing to a close). 당시 오바마는 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자로 간주됐으며 모든 여론조사에서도 곧 퍼트레이어스의 상관인 군 통수권자가 될 참이었다. “시의적절한 개입이었다”고 리드가 사무적으로 말했다.시계추를 4년 반 앞으로 돌리면 오바마가 헤이글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하기로 결정하면서 워싱턴에 이념논쟁이 한바탕 벌어지는 중이다. 보수파 단체들은 헤이글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지 그리고 이란에 강경 대응할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지지자들은 헤이글의 세계관이 정부 안팎의 매파 견제에 필요한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provide a needed counterweight to hawks) 응수한다. 헤이글은 국방예산 삭감을 지지하며 대체로 무력사용에 회의적이다.이 논란은 분명 지명과 관련됐다. 하지만 헤이글이 선택된 요인이었을 법한 다른 일부 요인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바마와 헤이글의 세계관은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런 기준에 부합되는 다른 후보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국방장관으로서 헤이글 같은 무형의 개인적 특성을 가진 내정자는 흔치 않다. 가령 2008년 중동방문에서 보여준 특성 말이다. 자신의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는 능력, 그리고 군 최고위층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투지다. 오바마는 분명 국방부 앞에 놓인 문제들을 감안할 때 자신의 국방장관에게는 앞으로 이 같은 자질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국방부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긴축시대의 예산 합리화에 이르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오바마와 헤이글이 수년간에 걸쳐 지속된 그런 직업적인 유대를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2005년 버락 오바마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는 단순히 새로 떠오르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빈사상태에 있던 정치계급에 새생명을 불어넣은 문화적 경이였다(was a cultural phenomenon who breathed new life into a political class that seemed moribund). 척 헤이글의 눈에는 그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통찰력만큼은 분명 인정할 만했다. 헤이글의 전 측근에 따르면 오바마가 처음 선택한 위원회가 외교위였으며 그가 정말로 외교를 중시하는 듯하다는 데 헤이글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헤이글도 1996년 초선의원 때 외교위원회에 합류했다. 당시 외교위는 제시 헬름즈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아래서 다소 비주류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오바마는 학구파였으며 핵비확산 같은 복잡한 문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첫해에 그는 리처드 루거 공화당 상원의원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핵·생물·화학 무기의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춘 방문이었다. 때마침 헤이글도 당시 별도 ‘의회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참이었다. 윌리엄 J 번스 미국 대사 초청만찬에 참석한 세 상원의원은 야심한 시각까지 정책토론을 벌였다(stayed up deep into the night discussing policy).헤이글과 루거 모두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잘 아는 외교정책 현실주의자들이다. 두 사람은 상원에서 오바마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멘토가 됐다. 보좌관들에 따르면 헤이글은 종종 고약한 성격을 드러낸다. 하지만 헤이글과 오바마 사이에는 그런 그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보여주지 않는 편안함이 있었다.역설적으로 그 이유는 세대차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헤이글은 의회 선량 중 극소수 베트남 참전군인 중 한명이었다. 그의 동료 대부분이 용케 베트남전을 기피했다는 사실이 그들과의 관계에 일정 수준 긴장을 유발했다. 특히 미군을 전투에 참여시키는 문제가 화제에 오를 때 그런 긴장이 심해졌다. “척과 나는 불안정한 시대에 성장했으며 우리 동시대 사람 중 다수가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을 기피했다”고 리드 상원의원이 말했다. 육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그는 1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했지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찰이 빚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존 매케인은 일종의 멘토였으며 그가 2000년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때도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두 참전용사는 훗날 이라크 전쟁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다. 그 뒤 그들의 경험이 미친 영향을 두고 매서운 비난을 주고받았다. 매케인은 북베트남의 수용소 감방에 고립돼 있었다(고문을 받기도 했다).그래서 그가 전쟁의 전반적인 피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헤이글은 주장했다. 매케인은 헤이글이 사실상 자신의 베트남전 경험의 포로라고 맞받아쳤다. 그래서 국제문제와 무력사용에 관한 판단이 왜곡됐다는 주장이다. 오바마와 관계에는 이런 문제들이 “걸리적거리지 않는다”고 리드는 말한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느냐는 문제 자체가 거론되지 않았다.”그러나 베트남전이 헤이글을 오바마와 가까워지게 하는 요인이었다면 반대로 오바마가 헤이글에게로 이끌리는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가 워싱턴에 도착할 무렵 의회는 이라크 전쟁 문제에서 강경 일변도로 흐르고 있었다(was a freefire zone over the Iraq War). 마지못해 무력사용에 찬성표를 던졌던 헤이글은 이라크전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다. 오바마도 전쟁에 반대했지만 헤이글과는 달리 군대경험이 없었다. 전쟁과 평화 문제에 관해 논할만한 개인적인 바탕이 없었다. 오바마 입장에선 이라크 문제에서 헤이글과 마음이 맞았던 경험이 의심할 바 없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이글은 아직도 가슴에 유탄이 박혀 있으며 여전히 마치 현역인 양 장병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2008년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방문에 오바마와 헤이글이 한 조를 이룬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벤 로즈 국가안보담당부보좌관이 말했다(로즈는 당시 오바마의 선거운동 참모였다). “당시 누구를 오바마의 출장 파트너로 고를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대통령 자신이 헤이글을 원했다.”찰스 티머시 헤이글은 네브라스카주 서부의 벽촌에서 성장했다. 너무 궁벽진 곳이라 그중 한 마을은 자칭 ‘황무지 한복판(The Middle of Nowhere)’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으며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에서 싸웠다. 그와 형제들은 중서부의 전통보수주의 교육을 받았다. 겸손함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몸에 익혔다. 퇴역군인회를 비롯한 기타 참전용사 지원단체가 지역사회의 중심을 이뤘다. “1969년 당시 누군가 앞으로 40년쯤 뒤에 한 진보적인 민주당 대통령이 골수 보수파인 척 헤이글을 행여 ‘들개 포획자’에라도 임명하리라고 내게 예언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했을 듯하다.” 척의 동생인 톰 헤이글이 지난주 뉴스위크에 말했다.헤이글은 1967년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베트남에 파견됐다. 그 직후 동생 톰도 입대했다. 공교롭게도 척과 같은 부대에 배치됐다. 형제는 1967년과 68년 몇몇 가장 치열한 전투를 겪었다. 보병이었던 그들은 캄보디아 국경 근처 “최전선에 배치돼(walked point)” 적군의 수색·섬멸 임무를 맡아 수시로 적과 교전했다(doing search-and-destroy missions and engaging the enemy on a regular basis). 1968년 3월 형제가 순찰 중 종대 앞쪽의 앞 병사가 부비트랩을 건드렸다. 폭탄이 터지면서 유탄이 사방으로 날았다. 척의 온몸이 피범벅이 됐다. 동생이 그의 가슴을 천으로 감싸 출혈을 막아 목숨을 구했다.한달 뒤 이번에는 척이 동생을 죽음에서 구했다. 함께 장갑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한 마을을 막 관통한 직후 지뢰가 터졌다. 척은 폭발의 불꽃에 얼굴 화상을 입고 고막이 터졌다. 톰은 의식을 잃었다. 척은 자신의 몸으로 동생을 감싸며 불타는 잔해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그를 끌어냈다.탄환이 빗발치는 순간들이 가장 극적이었다(The bang-bang moments were the most dramatic). 하지만 헤이글의 전기작가에 따르면 야간 경비를 설 때의 기억이 그의 머리 속에 가장 깊숙이 각인됐다. 눈깜짝할 새 총격전이 벌어지며 너무 많은 아드레날린이 분출해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다. 반면 칠흑같이 어두운 정글 속에서 적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활동은 서서히 그리고 털끝이 곤두서는 긴장감으로 전개됐다. 다른 병사들이 잠을 자고 헤이글이 불침번을 설 때였다. 대규모 베트콩이 정글 속을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들이 베트남말로 속삭이는 말까지 들릴 정도였다.형제는 많은 훈장과 상반된 전쟁관을 갖고 베트남에서 귀환했다. 톰은 정부에 분노하며 자신이 사람들에게 준 고통 때문에 괴로워했다(wracked with guilt over the suffering he’d caused). 결국 그는 정치적 좌파로 돌아섰다. 그리고 지난주 뉴스위크와 인터뷰할 때 공화당에 대한 비판을 억누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명했다 해도 오로지 오바마가 지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시빗거리를 찾아내는 공화당 의원 무리가 있다.” 하지만 척은 베트남전에 대해 그렇게 후회하지 않았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전쟁에는 숭고한 명분이 있었다고 여러 해 동안 주장했다.척이 이 같은 입장을 재고하기 시작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톰에 따르면 형의 “전환점”은 1999년에 찾아왔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테이프가 새로 공개됐다. 그는 승산 없는 싸움에 병력을 계속 파견한(was continuing to send troops to fight in a lost cause) 이유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인했다.하지만 부시 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밀어 붙인 뒤에야 헤이글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제 베트남전이 거짓과 기만의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고 믿는다. 그 전쟁은 이라크에 대한 헤이글의 준거기준이 됐다(became Hagel’s frame of reference for Iraq). 전투의 진정한 공포를 모르면서 필요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전쟁에(wars of choice and not necessity) 미국인을 보내려는 정치인들을 향한 분노가 갈수록 커졌다. “미국을 전쟁으로 서둘러 밀어 넣으려 하며 아주 잠깐 동안의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다수가 전쟁에 관해 눈곱만큼도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002년 그가 뉴스위크에 한 말이다. “그들은 지적인 관점에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글이나 참호 속에 앉아서 전우의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나는 어느 정도 그런 과거의 유령을 대변하려 노력한다.”그 무렵 아직 무명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도 헤이글과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오바마는 모든 전쟁을 배격하지 않았지만 멍청한 전쟁에는 반대한다고 2002년 10월의 한 연설에서 말했다. “내가 반대하는 건 냉소적인 시도다. 이 정부의 (취미 삼아 하는) 주말전사들이 생명의 희생과 그에 따르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념적 어젠다를 우리에게 강요하려 든다(by weekend warriors in this administration to shove their own ideological agendas down our throats).”오바마가 상원에 입성할 즈음 헤이글은 열정적으로 과거를 파헤치고 있었다. 베트남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모두 읽으며 이라크와의 유사성에 갈수록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2007년 정부 정책에 관해 절제되지 않은 발언을 쏟아냈다. 에스콰이어 기자에게 조지 W 부시의 탄핵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헤이글의 공격에 공화당 내 또 다른 직설화법의 대가가 냉소적인 카운터펀치를 던졌다. “같은 공화당원을 헐뜯지 말라는 로널드 레이건의 11번째 계명(11th Commandment)을 굳게 믿는다.” 당시 딕 체니 부동령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하지만 척 헤이글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그 계명을 지키기가 대단히 힘들다.” 헤이글은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었다. 하지만 당내에 많은 적을 만든 데다 무소속으로 입후보할 생각은 없었던 그는 결국 레이스에 참가하지 않았다. 2008년 상원에서도 물러났다.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헤이글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취임하기 전부터 민감한 국가안보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헤이글은 데이비드 보렌 전 상원의원과 함께 랭글리에 있는 CIA 본부를 찾아갔다. 정보원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비밀작전에 관한 일련의 브리핑을 받았다. 여러 참석자에 따르면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보 당국자들이 강화된 심문기법 같은 논란 많은 프로그램들을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헤이글과 보렌은 절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고문은 미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는 주장이었다.CIA나 장군들과 맞서는 헤이글의 투지는 분명 오바마에게 유용할 듯하다. 하지만 그는 오바마도 서슴지 않고 비판했다. 대통령 정보자문위원회(Intelligence Advisory Board) 현역 위원인 그는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오바마의 제한적인 대(對) 리비아 개입정책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whether Obama’s limited intervention in Libya was in the national interest)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그것이 결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이견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더 없이 환영할 일”이라고 로즈가 말했다. “헤이글이 자기 생각을 말할 때는 정말로 신념을 이야기하며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이 좋아하는 특성이다.”오바마는 지난주 초 헤이글의 지명을 공식 발표할 때 이 같은 특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발표를 마칠 무렵, 한 측근에 따르면 오바마가 준비된 발표문을 덮고 즉석 발언을 할 때가 더 의미심장했다. 대통령은 헤이글을 국방부 장관으로 앉히려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를 가리켰다. 내정자는 “전쟁터에 있었으며,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곳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이해”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그는 말했다. “그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가치다(That’s something invaluable).”

2013.01.1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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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아직도 고대 신화 속에서 산다

산업 일반

“그리스는 험난한 코스, 새로운 오디세이(장기간의 모험여행)에 들어섰습니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전 총리가 언젠가 나라의 경제난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타카(오디세우스의 고향)로 가는 길을 압니다. 그리고 해도도 있습니다.” 파판드레우가 신화 속의 오디세우스를 인용했다고 나무랄 건 없다. 그리스는 원래부터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역사를 편리하게 이용해 왔다.We are on a difficult course, on a new Odyssey for Greece,” former prime minister George Papandreou once observed of his country’s economic malady. “But we know the road to Ithaca and we have charted the waters.” The man could be forgiven for falling back on the iconic Odysseus—Greece has always looked on the classical age as a usable past.그러나 고전 ‘오디세이’는 그리스의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길잡이가 되지 못한다. 오디세이는 모험과 복수 그리고 고향에의 향수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 여행에서 이익은 거의 비중이 없다. 딱 한번 오디세우스가 표류하다 도착한 파에아키아에서 그에게 운동능력을 과시해 보라고 놀릴 때 언급된다. “아, 알았다.” 한 주민이 이죽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게임을 잘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아(never took you for someone skilled in games). 전혀. 빠른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의 선장이지(some skipper of profiteers). 머리 속으로는 확보한 물건을 셈하며 눈에 불을 켜고 싣고 돌아갈 물건을 찾다가 황금을 쓸어 담을 뿐이야.” 오디세우스는 그 미끼를 덥석 문다. 어쨌든 명예와 영광은 중요한 문제다. 그는 파에아키아인들의 게임에 도전한다.고대 그리스인들은 상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플라톤(Plato)은 국가론(The Republic)에서 그것을 경시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상업은 도시(polis)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외국인 거주자(metics)에게 맡겨두는 편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그리스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열렬히 주장하는 이런 고대 그리스의 전통(classical tradition)에선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한다. 그리스인들이 그런 서사시와 고대 그리스 영웅들을 자랑할 때 독일 은행가들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역설적으로 더 도움이 되는(그리고 최근의) 과거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했을 때 그리스인들이 장사꾼과 해상무역상으로 보여준 사업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영웅담은 아니다. 금융과 상업은 전설의 소재가 아니다. 오스만 제국(The Ottoman Empire)은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40개에 가까운 국가와 공동체가 그 허술한 제국을 구성했다. 관료체제와 군대는 투르크인의 영역이었지만(the preserve of the Turks)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틈새를 찾아 상인과 중개상으로 번창했다.술탄(황제)의 영지에는 어디에나 그들이 있었다. 그리스 반도, 아나톨리아, 그리고 오스만 병사들이 정복한 곳은 어디든 찾아갔다. 그리스어는 레반트 지방(Levant, 지중해 동쪽 연안국 키프러스, 이집트,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터키 등)의 공용어(lingua franca)였으며 장소에 따라서는 오스만 투르크어와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변덕의 진수인 바다를 차지했다(So they always had the sea, the very essence of caprice)”고 제이슨 굿윈이 오스만 세계를 아름답게 재구성한 ‘지평선의 지배자들(Lords of the Horizons)’에서 그리스인들을 가리켜 말했다.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해안을 지배했다. 아나톨리아 해안지대(Anatolian seaboard)의 스미르나(오늘날의 터키 이즈미르)는 그리스 상인들의 탁월함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자리잡았다. 1600년대 이 도시는 황금기를 맞았다. 상인들만의 힘으로 일궈낸 업적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오스만족 관료들과 술탄의 각료들보다 생각이 앞서나갔다. 그들의 세계는 진정으로 세계주의적(cosmopolitan)이었다. 도시의 은행가, 변호사, 상인, 의사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리스 상인들은 알렉산드리아까지 장악했으며 이집트의 시골 벽지까지 파고들어 물건을 팔았다. 그들은 수완이 뛰어났으며 레반트 시장을 개척하던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은 그리스인들을 기민하고 명석한 경쟁자로 여겼다.하지만 투르크 세력과의 이같은 타협은 민족주의의 매력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this accommodation with Turkish power could not withstand the appeals of nationalism). 그리스인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를 원했다. 그들은 오스만 지배체제에서 현실적으로 대처했지만 갈수록 비현실적으로 바뀌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와 오래 유리됐던 그들이 19세기 들어 그 시절을 찬양하게 됐다.이들을 우러러보는 외국인들도 자신들은 특별하다는 그들의 인식, 여타 민족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부채질했다. 정교회(Orthodoxy)와 헬레니즘(Hellenism)이 제멋대로 꽃을 피워 이 새로운 그리스의 형성을 두고 대국들이 세력다툼을 벌였다. 그리스인들은 외국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 저의를 의심하곤 했다. 그런 양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그들의 땅에 음모론이 횡행했다(Conspiracies stalked their homeland).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를 시샘하는 나라들이 과거 그들의 영토였던 땅을 강탈하려 한다고 믿었다. ‘대그리스’의 역사적인 소명의식(The calling of “Greater Greece”)은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오스만의 멸망으로 되찾은 조그만 왕국에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그리스 정치세계에 안정은 없다. 그들의 꿈은 항상 극단을 달린다(the dreams always deadly). 자신들이 달성 가능한 수준보다 훨씬 더 크다. 정교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회는 이런 거창한 구상을 부채질했다. 포퓰리즘과 공산주의가 남은 자리를 채우며 이런 불행한 역사적 순환고리를 완성했다(closed the circle of this unhappy history). 서부 라틴어권(Latin West)은 그들이 항상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었다. 이런 분열의 뿌리는 깊었다. 비잔티움과 로마 후손들 간의 갈등까지 거슬러 올라갔다.역사가 리처드 클로그의 ‘간추린 그리스 역사(A Concise History of Greece)’에서 1980년 한 외무장관이 그리스의 EC(유럽공동체) 가입은 “유럽 전체가 30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그리스 유산에 졌던 문화·정치적 부채에 상응하는 적절한 상환(a fitting repayment by the Europe of today of the cultural and political debt that we all owe to a Greek heritage almost three thousand years old)”으로 간주되리라고 평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권리의식과 특별함(sense of entitlement and specialness)을 받아들여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2010년까지 그리스를 짓눌렀던 부채위기는 이런 책임회피(sense of abdication)에서 비롯됐다. 그리스의 저변 깊은 곳에 사회주의 전통이 흘렀다. 유럽연합과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가입은 유럽에 그리스라는 짐만 떠안길 뿐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시장의 규율이 통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저축으로 그리스의 방종(indulgencies)을 떠받치게 되더라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유럽 이사회에서 그리스인들은 그들 정치의 호전성을 최대한 활용했다(made the most of the truculence of their politics).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현대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내고, 능력 이상으로 흥청망청하는 경제의 구조적 조정을 받아들이는 책임을 거부하는 그리스 국민들의 배짱 말이다.2010년 심판의 날(Reckoning)이 왔다. 그리스의 대금 결제일이 다가왔지만 금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연합과 협약을 맺고 320억 유로의 예산을 삭감하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확보했다. 그러나 비대해진 공공부문은 필요한 삭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the bloated public sector wanted nothing to do with the needed cutbacks). 5월 4~5일 48시간 동안 벌어진 파업은 비극으로 끝났다. 은행 직원 3명이 살해되고 은행이 불탔다. 파판드레우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싸움을 벌였다. 그는 외국 채권단의 요구와 국민의 생활방식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이 총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총리였다는 사실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아랍의 정치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왕조주의다). 그리스의 권력자들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의 한복판(no man’s land)에 있었다.시장은 그리스인들이 제안했던 긴축조치(austerity measures)에서 거의 위안을 얻지 못했다. 6월 중순 그리스의 신용도는 세계 최저로 떨어졌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푸어스(S&P)가 그리스의 신용등급(credit rating)을 B에서 CCC로 세 단계나 강등시켰다. 파판드레우는 안간힘을 다해 싸웠다. 인기 없는 재산세(property tax)의 의회통과를 약속받고 고액 연금의 20% 삭감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개혁조치를 이행하지 못했으며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재무장관에게 뭇매를 맞았다. 베니젤로스는 상당한 독자적 지지기반을 가진 정치 전략가다.파판드레우는 2011년 11월 9일 물러났다(bowed out). 이번에는 실무형정치(technocracy)에 차례가 돌아왔다. 어쩌면 정치가 실패한 일을 해낼지도 모른다. 2002~2010년 유럽중앙은행(ECB) 부총재를 지낸 루카스 파파데모스가 자리를 물려받았다.11월 18일 ‘그리스 태스크 포스(Task Force for Greece)’라는 유럽위원회가 상세하고 논리적인 보고서를 발표하며 그리스 경제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무미건조한 행정용어(antiseptic bureaucratese)로 쓰였지만 경종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개혁과제의 규모가 엄청나다”고 그 보고서는 밝혔다. 그리스는 “전례 없는 재정·경제 조정(unprecedented fiscal and economic adjustment)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경기위축이 예상보다 심하고 고통스럽다. 실업 특히 청년실업이 꾸준히 증가한다. 소기업들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liquidity constraints)에 직면했다.” 위원회가 밝힌 그리스인들의 습관에 새로운 비밀은 없었다. 탈세가 만연하고(걷히지 않은 세금 규모가 600억 유로에 달했다) 저축을 스위스 은행으로 빼돌리는 행위가 국가적인 전통이었으며 관료체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정부의 공공계약을 따내는 데 230일이 소요된다. EU 평균의 배가 넘는 기간이다. 유럽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진 부채를 상환하며, 그리스의 자긍심 값도 지불하고 있었다.“그리스는 서방문명에 속하지 않지만 서방문명의 중요한 원천이었던 고대 그리스 문명의 본산이었다(the home of classical civilization which was an important source of Western civilization)”고 고(故) 새뮤얼 P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에서 평했다. “그리스는 예외적으로 서방 조직에서 정교회 비주류였다.” 그리스인들의 자화상(self-image)은 서방세계의 가장자리, 이슬람이 시작되는 곳에서 경비를 서는 파수꾼 이미지다. 그러나 헌팅턴이 그렇게 뾰족한 연필로 그린 문명간의 경계선은 그리스를 러시아나 발칸 국가들과 한 부류인 정교회 세계로 분류했다.헌팅턴은 1990년대의 조류를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세계화로 문화적 차이가 사라졌다는 기대 섞인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스는 자신들이 서방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헌팅턴의 주장을 입증할 듯하다.그리스의 정치와 문화에는 사나운 반미주의가 깔려 있다. 그리스 악마학(demology)에서 미국은 사탄이며 미국 자본주의는 위협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반미주의의 구실은 무한했다. 미국이 보스니아인들과 코소보인들을 구하러 나서 세계에 죄를 지었다든가, 미국은 터키와 이슬람의 공범이며 그들의 힘은 “진정한 믿음(True Faith)”에 대한 위협이었다는 식이다.거기에는 일관성이 없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2003년 그리스인들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분노한 척했다(feigned offense). 그해 세계적으로 실시된 퓨 설문조사에서 미국은 이란이나 북한보다 더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됐다. 유럽인들의 태도를 조사하는 리서치 컨소시엄 TNS 오피니언&소셜이 2005년 실시한 또 다른 조사에서 그리스의 반미주의는 가혹할 정도였다. 85%가 세계 평화정착에서 미국의 역할에 부정적이었으며 76%가 세계 빈곤퇴치 노력(the fight against world poverty)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그리스의 정치문화는 아직 현대화되지 않았으며 파멸적인 감정을 벗어 던져야 한다. 위에 인용한 2005년 조사에서 그리스인 10명 중 7명은 문화적 차이가 너무 커서 터키가 EU에 가입하지(allow Turkey’s accession) 못한다고 믿었다. 그리스인들은 터키의 이질성을 확신한 나머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리스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준 반현대적, 반자본주의 여론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장벽이다(a mighty barrier all its own).영국 시인 바이런과 그리스 애호가(philhellenes)들이 그들의 자부심을 키워준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 나라는 정치·경제적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갖고 살았다(it is exempt from the demands of political and economic discipline). 구제금융을 얼마나 제공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런 특권의식(sense of entitlement)으로 인해 모든 호의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이 실패한 일을 이제 실무전문가들이 넘겨받았지만 냉혹한 경제현실 앞에서 표출된 분노는 그리스가 터무니 없는 꿈과 기대를 버렸다는 위안을 주지 못한다. 유럽국가들도 나름대로 고통을 받지만 그리스가 빠진 수렁은 다른 나라보다 더 깊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이 확 깨는 메시지(a final sobering note)가 그리스인들을 심란하게 만들 듯하다. 한때 무역과 상업을 경멸하며 그런 문제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들에게 떠넘기고 군인과 관료로만 일했던 터키인들이 지금은 경제부흥에 한창 열을 올린다(in the throes of an economic renaissance). 근대 터키는 상거래를 하는 소수민족들을 말살하거나 추방했다. 이즈미르는 내륙의 삭막한 앙카라에도 뒤처졌다. 터키인들은 보호무역주의에 의존해 수입품을 대체하고 통제경제를 실시해 경제 문제보다 정치를 우선했다. 그런 정책의 결과는 뻔했다. 생활이 갈수록 궁핍해지자 터키 국민은 조국을 떠나 독일의 노동시장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다가 경제혁명으로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시장의 빗장이 열리고 민영화가 마법을 발휘했다(privatization worked its magic). 칙칙한 아나톨리아의 고지에 번영이 찾아왔다. 따라서 문화는 중요하지만 뜯어고칠 수 있다. 쇠퇴는 선택이지만 정해진 운명은 아니다(not a fated destiny).

2011.12.15 16:08

9분 소요
유럽을 외면하지 마라

산업 일반

1946년 9월 유럽의 대다수 지역이 폐허로 변해 연기가 피어 올랐다. 수백만 명이 쓰라린 고난과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무시무시한 폭력과 잔인함의 무대 위로 커튼이 내려왔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을 뿐이다.In September 1946, much of Europe had been reduced to smoking rubble. Bitter hardship and gnawing hunger were the lot of millions. The curtain had come down on one monstrous theater of violence and cruelty only to have it rise on others.수많은 사람이 난민 수용소(displaced- persons camps)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으며 그밖에도 수백만 명이 조상 대대로 살던 땅과 집을 떠나 떠돌이 피란민 생활을 했다. 대규모 소련군이 해방을 가져다 줬지만 강간이 만연하고 새로운 스탈린주의 독재의 악령이 포식자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지치고 허약해진 민주주의를 덮칠 순간을 노렸다(waiting to pounce on the wasted, fragile democracies).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윈스턴 처칠이 취리히 대학에서 연설했다. 영국총리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예언자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assuming the mantle of the prophet). 오늘날 많이 기억되지는 않지만 예지력 충만한 연설에서 처칠은 비탄에 빠진 대륙을 논했다. “오늘 나는 유럽의 비극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는 가장 깊고 위엄 있는 쩌렁쩌렁한 바리톤의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산산조각난 유럽대륙이 나아갈 길은 “유럽 가족의 재구성(to re-create the European family)”뿐이라고 처칠은 말했다. 이질적이고 싸움을 그치지 않는 대륙 구성원들의 대통합을 가리키는 말이다.물론 이런 비전을 제시한 사람은 처칠뿐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이 재탄생하는 데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루시어스 클레이와 조지 마샬 장군도 포함시켰을지 모른다)의 지원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했다. 유럽 국가들은 주권의 일부를 내놓고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 이후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굳어진 이해득실의 제로섬 게임을 버리는 대신 경제통합(economic convergence)을 이루게 된다. 1943년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 이미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더 통합된 유럽의 스케치가 그려져 발표됐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모네와 로베르 슈만 외무장관 등 그 구상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석탄과 철강연합 체제(framework for a coal and steel union) 마련에 착수했다. 그 체제는 라인강을 투쟁의 물줄기보다는 대륙 전체를 흐르는 공영(common prosperity)의 상징으로 만듦으로써 그 원대한 유럽통합의 첫걸음을 떼게 된다.재해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rising out of the ash pit of disaster) 이런 영웅적인 첫걸음을 지금 떠올리는 이유가 있다. 유럽통합 프로젝트가 와해될지 모르는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그리고 아시아의 일부 지역)은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이 해체되면서 유럽통합 프로젝트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고소해 하는(schadenfreude) 태도가 역력하다. 신용평가 기관들(credit-rating agencies)은 재정위기를 물고 늘어지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국가 신용등급을 강등(sovereign-debt downgrade)시키며 한 나라씩 쓰러뜨린다. 지중해의 재정파탄국가들(basket cases)을 뒤로 하고 새로운 먹이감(freshly fallen game)을 찾아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이동한다. 비우량주택담보대출사태(subprime calamity)를 방조하고 향후 10년간 미국의 부채감축 규모를 1조 달러나 틀리게 계산한 신용평가사들이다. 그들이 재정난에 몰린 국가들에게 채무상환 능력이 있는지 판정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잠시라도 뒤로 물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양심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하지만 요즘은 먀샬플랜과 정반대의 사악한 풍조가 지배한다. 지탱하지 못할 적자에 대한 최대한의 독선적 태도(sanctimoniousness)로 적자를 줄일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조치들을 강요한다. 수요를 고사시키는 엄격한 공공부문 긴축정책(draconian public-sector austerity)으로 경제의 성장회복을 차단하고 국채금리를 자기들 편한 대로 터무니 없이 끌어올려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정치적인 분노를 부채질한다. 그렇다고 유럽 경제위기의 실제 규모를 축소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분명 미스터 포터(Mr. Potter, 영화 ‘멋진 인생’에서 몰인정한 악당 캐릭터)의 냄새가 난다. 현명한 모범시민이 어쩔 수 없이 방탕한 게으름뱅이를 구제해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the prudent layaways forced to the rescue of the prodigal layabouts). 불만이 커지면서 전후 유럽(그리고 미국) 번영의 토대를 이뤘던 상호의존의 전제에서 후퇴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다윈의 진화론(Darwinian evolution)을 믿지 못하겠다고 공언하는 보수파 중 많은 사람이 분명 자연도태가 이뤄져 약한 종자가 스스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서방 문화의 요람인 그리스인들에게 ‘뒈져버려, 빨리(drop dead, and do it soon)’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인상이다.그 결과는 볼썽사나울 듯하다. 1930년대 대공황과 비슷하게 무역이 붕괴하면서 온갖 부작용(its natural concomitant)이 따르게 된다. 실패한 협력 프로젝트의 반작용으로 반이민과 대학생들의 투쟁적인 신민족주의의 물결에 편승해 사납고 권위주의적인 민족주의가 부상하게 된다. 그런 일은 미국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의 ‘화합(coming together)’ 정치가 상쟁(mutual demonization)의 정치를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스러운 재정위기의 한복판에서 잠시 떨어져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우)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통합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지금은 엘리트의 동화 같은 백일몽이라는 조롱을 많이 받지만) 그리고 그 비전 중 무엇이 싸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지 말이다(might be worth fighting to preserve).관세 없고 국경 없는 유럽연합 창설 조약이 1957년 로마에서 체결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단일 법률체계(single legal code)와 통합정부로 이뤄진 범유럽 제국의 야망은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의 로마 제국 시대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몰락하고 수도를 보스포루스로 옮긴 뒤 기독교도 로마 황제들은 범유럽적인 로마 카톨릭교(Romanism)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았다.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무슬림 군대의 서유럽 진출을 남프랑스 투르에서 저지하면서 로마 기독교 제국(a Roman-Christian imperium)의 옹호자가 됐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그 제국 아래 유럽의 다양한 국가와 민족이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신도그룹(Congregation of the Faithful)”으로 뭉쳤다. 그 제국은 궁극적으로 로마 교황의 명령에 따랐다.그 통합은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으로 완전히 와해됐다. 그러나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 이전부터 프랑스 같은 왕국들은 독자적으로 실용적인 노선을 택했다. 심지어 터키인들과 전술적인 동맹까지 맺었다.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의 평화의 호소(Complaint of Peace, 1521) 같은 보편적인 범유럽 평화구상(ecumenical vision of Pan-European peace)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런 구상은 유럽국가들간의 유혈투쟁이 그치지 않을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전망에서 탄생했다. 처음에는 소수 인문주의 지식인의 이상주의에 불과했지만 새로운 활자매체가 등장해 국경과 언어를 넘어 말을 전파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그런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환상을 갖지 않았다. 전쟁과 상호파멸적인 경쟁에서 얻는 이익에 길들여진 국가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기독교 평화의 이름으로 범유럽 연합(a Pan-European confederation)을 구성해 국경을 허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의 규모가 더 커지고 가공할 살상력을 갖게 됐을 때도 그들은 궁극적으로 무장해제된 유럽(a defanged Europe)의 구상을 버리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자칭 “계몽(enlightened)” 군주라고 뻐기며 볼테르 같은 철학자를 애완 지식인(intellectual pets)처럼 곁에 거느렸다.1795년 임마누엘 칸트가 ‘영구평화론(Proposals for a Perpetual Peace)’을 발표했다. 칸트는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이 총알받이(cannon fodder)가 되기를 싫어하는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고 잠시나마 상상했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영구평화론에서 칸트는 국민의 궁핍을 초래하는 근원은 세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국가들의 치열한 야망이지 그들이 공언하는 국민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에 주목해 지금 그의 글을 읽노라면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세상의 이치를 정말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비정한 돈과 권력의 브로커들(hard-bitten brokers of money and power)보다 철학자가 때로는 현실을 더 정확히 파악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유럽 전쟁에서 사상자가 더 늘어나고 민간인 피해(the collateral damage to civilians)가 심각해졌을 때도 이상적인 유럽 평화주의자들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849년 소설가이자 프랑스 공화 민주주의(French republican democracy) 옹호자 빅토르 위고는 한 평화회의에서 처칠의 할아버지 같은 어조로 말했다.“전쟁이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날 … 무역에 빗장을 여는 시장, 아이디어에 열리는 마음이 유일한 전쟁터가 되는 날이 온다. 유럽 대륙의 모든 나라가 개성과 정체성을 잃지 않고 뛰어난 한 단위 안에 밀접하게 통합돼 하나의 유럽 동포애를 이루는 날이 온다(will be merged closely within a superior unit and you will form one European brotherhood).”군주국들은 체질적으로 상습적인 전쟁을 단념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럽연방공화국이 그 ‘단위(unit)’가 되리라고 위고는 공언했다. 20여 년 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이 일어나 프랑스 제2제정이 무너지고 독일 제2제국(the second German Reich)이 태어났다. 그 전쟁이 터지기 직전 로잔의 한 연설에서도 위고는 적극적이었다. “하나의 공화국, 유럽합중국을 만들자(Let us be the same Republic, let us be the United States of Europe).”이같은 희망과 꿈은 제1차대전 중 독가스가 살포된 참호 속에서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 수백만 명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훗날 유럽연합을 싹 틔울 씨앗은 1920년대 처음 심어졌다. 그 씨앗의 파종자는 1946년 처칠이 찬양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다. 오스트리아의 리하르트 쿠덴호프 칼레르기 백작의 특이한 이름은 그가 파괴된 ‘유럽 중부(Middle Europe)’의 다국적 심장부 출신임을 말해준다. 칼레르기 백작은 빈에 있는 자신의 본거지에서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그리고 소설가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같은 지식인뿐 아니라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등 프랑스와 독일 정치 지도자까지 유럽연합 구상으로 끌어들였다. 두 정치가는 미래를 위해 과거의 군비를 늘려가는 적대정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made a profession of renouncing for the future their ancient).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거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의 저자인 노먼 에인절 영국 노동당 의원도 또 다른 잊혀진 공로자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유럽 중심부의 불가피한 경제통합으로 언젠가는 전쟁이 불필요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인절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1933년 히틀러가 총통에 오르면서 그와 함께 그의 희망도 물거품이 됐다.그렇다고 범유럽주의 선구자들의 열망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으로 치부되지는 않았다. 처칠의 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쮜리히 연설에서도 옳았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국제연합의 전신)의 원칙들은 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포기한 데 잘못이 있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그 뒤로 더 큰 유럽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고생스럽고 생색 안 나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행정과 전문기술 관료들이 지은 사상누각(a house of bureaucratic and technocratic cards)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사실 국가들이 특색을 잃지 않고 융합할 수 있다는 위고의 이상은 언어와 사회관습의 차이에 깊게 뿌리내린 현대판 부족적 본능(the tribal instinct)과 경쟁해야 했다. 유럽주의가 성숙해졌지만 동시에 낭만주의 운동(the Romantic movement)이 이런 차이점을 애국심의 토대로 끌어올렸다. 인종, 핏줄, 토양, 배타성의 지표들이 군벌 독재체제(warrior dictatorships)로 다시 태어나 전통 공동체의 맹목적 숭배물이 됐다. 그리고 파시즘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런 지표들은 혐오하는 외국인이나 밀려 들어오는 이민자 탓으로 자신들의 불행을 돌리려는 사람들에게 거의 신비로운 마법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한다. 너무 힘들 때는 관세의 높은 장벽과 이민을 막는 담장이 둘러쳐진 부족 진지로 물러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구미 양쪽 모두 경제와 정치 목표의 이같은 원자화(atomization of economic and political purpose)는 막아야 한다. 그래야 분노를 표출하는 국민과 전투적인 태도가 일상화된 깊고 어두운 시기로 또 다시 빠져들지 않는다.좋든 싫든 우리 모두 바다와 대륙을 너머 하나로 얽힌 공동 운명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어느 때보다 그런 특성이 강해졌다. 우리 모두 훼손돼 가는 지구를 살려야 하는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우리는 중국인 채권자든, 미국인 채무자든, 그리스 파산자든, 독일인 은행가든 한 가족처럼 연결돼 어려움을 겪는다. 등을 돌리는 건 해결방안이 아니다. 언젠가 역사의 장난(the mischief of history)에 칼을 찔릴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약자를 물 속에 가라앉게 버려두면 나머지 모두 헤엄쳐 나가기가 힘들어진다.영국 시인 존 던의 말을 새겨듣는 편이 좋다. “사람은 누구도 외떨어진 섬이 아니다. 그 자체로 전체가 아니다. 사람은 모두 대륙의 일부분이다. 만일 그 흙이 파도에 씻겨나가면 유럽대륙은 줄어든다. 마치 반도가 파도에 깎여나가듯이. 누군가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우리 몸을 깎아나간다. 우리 몸도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죽어 종이 울리는지 묻지 마라. 바로 너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2011.12.07 15:07

9분 소요
SUICIDE  어느 수퍼모델의 죽음

산업 일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러시아 모델 루슬라나는 왜 정상에 우뚝 섰던 약관의 나이에 자살을 택했을까? 한 영화제작자가 지난 3년 동안 그 단서와 답을 찾아 다녔다“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가 사람을 쳤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한 여자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목격자 증언)2008년 6월 28일 오후 두 시 반. 맨해튼 월스트리트의 모퉁이 워터 스트리트.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무더운 뉴욕의 한여름 토요일. 은행원들은 떠나고 거리는 텅 비었다. 도로 한복판에 소녀의 시체만 덩그러니 누웠다. 경찰 조사 결과 사망자는 러시아 수퍼모델 루슬라나 코르슈노바. “사인은 추락사. 자신이 사는 9층짜리 아파트 옆 건설현장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추정된다. 몸싸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혈액이나 소변에서 알코올이나 약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메모는 남기지 않았다. 연령 20세. 건물로부터 8.5m 떨어진 곳에 추락했다.”8.5m라고? 그건 추락이 아니다. 거의 비상에 가까운 도약이다. 그 수퍼모델이 건물 난간에 서서 허공으로 가만히 한 발을 내딛지 않았다. 도움닫기를 해서 날아 올랐다.모델이라고 모두 똑같지는 않다. 대개는 호리호리하고 중성적인 판박이 인형 같다. 패션쇼 콜렉션을 걸치고 무대를 활보하기에 안성맞춤인 옷걸이다. 그러나 루슬라나처럼 특이한 부류도 있다. 이들은 몸매 비율이 완벽하지 않고 패션쇼 무대 걸음걸이도 어딘가 아쉽다. 하지만 한 제품의 특성을 상징하는 얼굴로 나선다. 루슬라나는 니나 리치가 선보인 “마법적이고 매혹적인 향수”의 얼굴로 이름을 날렸다. 동화 같은 분위기의 그 광고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찰랑거리는 곱슬머리와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눈의 루슬라나가 핑크색 무도회 드레스 차림으로 왕궁의 방에 들어선다. 십대 소녀처럼 흥분하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녀 앞에 마법의 나무가 있고 나무 꼭대기에 반짝이는 핑크색 사과가 달려 있다. 나무에 기어올라 사과를 향해 손을 뻗는다….루슬라나는 전부 가진 듯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까? 그 답을 찾으러 3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 화려하지만 외로운 세계 일류 모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의 자료조사차 뉴욕·런던·밀라노·키에프 그리고 모스크바를 누볐다. 도중에 루슬라나의 친구들 사이에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자살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옛 악의 제국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종착점에 도착했다.워터 스트리트는 금융지구의 끝자락, 업무 단지와 이스트 강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저녁이 오면 정적에 휩싸인다. 검은 정장 차림의 은행원들이 귀가의 발길을 재촉할 뿐이다. 루슬라나의 아파트는 이 거리에 보기 드문 주거용 건물이다. 가족은 거의 없고 세계화의 전쟁터에서 싸우는 지친 보병뿐이다. 중앙아시아의 양털 상인, 말레이시아 출신 박사과정 학생, 품삯을 받는 모델들이 아파트를 후배에게 물려준다. 루슬라나가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세낸 아파트에 몇 가지 개인 소지품이 있었다. 이집트인 짐꾼은 그녀가 항상 여행을 다녔으며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기억한다.루슬라나의 여행은 이곳에서 끝났다. 출발점은 어디였을까?타티아나는 모델 스카우트다. 한 해에 수천 명의 후보를 만난다. 그 중 세 명가량이 정상에 오른다. 그녀의 주 활동무대는 옛 소련이다. 세계 일류 모델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 출신이다. 많은 여성이 모델이라는 직업을 풍요로운 삶으로 가는 티켓으로 여긴다. 2005년 타티아나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린 미인대회에 참석한 뒤 귀가하는 길이었다. 눈에 띄는 재목이 없었다. 공친 여행이었다. 기내잡지를 집어 들어 책장을 넘기다가 아마존을 다룬 기사에서 눈길이 멈췄다. 한 소녀의 사진. 놀라웠다. 사진 자체는 메시지가 불확실했다. 부족 의상을 걸친 반라의 떠돌이 소녀. 하지만 플래스틱 나무의 정글에서 조숙한 소녀 롤리타와 늑대소년 모글리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의 모델은 탄성을 자아냈다. 사물을 응시하는 그녀의 푸른 눈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호수 같았다. 대단히 강렬하고 깊어서 타티아나, 비행기, 구름이 모두 그 안에 사로잡힌 듯했다. 이 소녀의 눈동자 속에 모든 사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타이가 숲지대, 바이칼 호수, 눈 덮인 황무지 등 자신의 시베리아 혈통을 과시하며 세상을 응시하는 늑대 같았다.타티아나는 알마티에 있는 모델 에이전시는 안 들른 곳이 없었다. 어떻게 이 아이를 못 봤을까? 알고 보니 루슬라나는 모델이 아니라 잡지 편집자 친구의 친구였다. 재미 삼아 사진을 촬영했다. 17세의 루슬라나는 알마티의 명문 학교를 다녔으며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유럽 유학을 꿈꿨다. 런던의 모델 에이전시가 그녀를 캐스팅에 초청했다. 화장품 회사 관리자인 그녀의 엄마는 딸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루슬라나는 고집을 부렸다. “런던! 마침내 런던에 가게 됐다고요!”루슬라나의 첫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그녀의 런던 여행을 담은 동영상을 찾았다. 런던에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후드티 차림의 십대, 아니 어린아이가 타워 브리지의 사진을 찍으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거나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치열교정장치를 감추려 애썼다. 그녀가 후드 티를 벗자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릎까지 닿는 묵직한 황금빛 머리다발이었다. 모델 업계에선 그녀에게 러시안 라푼젤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런던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루슬라나는 제 손으로 머리를 감은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가 감겨줬다. 이젠 파리와 밀라노의 비좁은 모델 숙소에 묵으면서 캐스팅 심사를 받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삶은 몸매 치수(32-23-33), 그리고 상대방의 다리·엉덩이·가슴을 곁눈질하는 십대 소녀들로 북적대는 방이 전부였다. 모두 심사위원의 눈에 들려고 필사적이었다. 네 몸은 틀렸다, 너는 틀렸다는 심사평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루슬라나는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친구들은 기억했다. 그녀는 탈락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여기며 집을 그리워했다. 그녀 주변에 코카인, 샴페인, 환락이 회오리쳤다. 많은 여성이 휩쓸려 들어갔다. 루슬라나는 달랐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시를 써서 위안을 삼았다. 그 시를 친구 네트워킹 사이트에 올렸다.“가시에 찔려 신음하는 대신/ 그 속에서 자라는 장미를 보며 기뻐한다.”그때 니나 리치 광고가 들어왔다.마법의 나무. 핑크빛 사과. 스타덤.그 광고로 루슬라나는 모델 지망생의 신분을 벗어났다. 뉴욕 상류층의 파티에 참석하고, 소아성애 전과가 있는 금융가 제프리 엡스타인의 사유지 섬을 방문하고, 러시아 대부호들이 광고 속의 미녀를 만나고 싶어하는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 도시의 최고 멋쟁이 갑부 중 하나와 꿈 같은, 그리고 너무나도 순진한 사랑에 빠졌다.모스크바에서 루슬라나의 친구이자 동료인 루바를 찾았다. 그때를 전후해 모스크바에서 루슬라나와 가깝게 지낸 친구다. 루바의 아파트에는 수백 점의 귀여운 완구가 가득했다. 잡지에서 보는 모델의 이미지와 딴판이었다. 작고 겁 많고 불면 날아갈 듯 연약했다. 카메라가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자신을 이끌어줄 손길을 찾으면서도 불신으로 가득한 그들의 상처받은 눈길이 포착된다. 루바는 루슬라나의 연인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는 매력이 넘쳤다. 여자들이 그의 발 앞에 무너졌다. 내 친구 중 다수가 그와 사귀었다. 그들 모두 빠질 데 없이 완벽했다.” 루바처럼 더 경험 많은 친구들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루슬라나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진짜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결혼, 자녀, 안정된 가정을 원했다. “그게 루슬라나의 문제였다. 어린애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믿었다.”그 갑부에게 버림을 받은 뒤 루슬라나는 계속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답변을 기대했다. 자신의 네트워킹 사이트에 짝사랑의 심정을 담은 시를 올렸다.“당신은 다시 떠났나요/ 내게 남은 건/ 핑크빛 꿈의 성과 무너져 내린 성벽들… 마치 누군가 내 심장을 도려내 마구 짓밟은 듯한 기분.”친구들에 따르면 그 갑부의 개인비서가 루슬라나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그를 괴롭히지 말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애인에게 갑자기 버림받았듯이 그녀의 모델 경력도 돌연 장벽에 부닥쳤다. “그녀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루바가 말했다. “갑자기 수천 명의 여성 중 하나, 수백만 명 중의 하나가 됐다. 아니, 존재 가치가 없어졌다.”그게 다였을까? 그저 자신의 감정에 희생된 소녀였던가? 또는 비정한 업계에서 단물만 빨리고 버려졌을까? 이는 많은 모델이 맞닥뜨리는 시나리오다. 엘레나 오부코바는 밀라노에서 2년간 활동한 뒤 자살을 기도했다. 지금은 심리학자로 변신해 모스크바에서 모델을 전문으로 하는 상담센터 설립을 추진 중이다. “모델은 허상뿐인 세상에서 산다. 항상 쇼를 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남자들이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사진 속의 여자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은 진실하다. 어느 시점에 가선 무엇이 자신의 진짜 모습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나인가 내가 보여주는 이미지인가. 그리고 기이하게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는 길은 자살밖에 없다고 느끼게 된다.”그러나 루슬라나의 친구와 가족은 모두 그녀가 사랑과 직업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모델활동은 언제나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는 그 갑부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다른 남성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지인들은 미심쩍은 점이 있다고 의심한다. 사건을 너무 빨리 덮어버렸다는 주장이다. 그녀가 어떻게 8.5m나 뛰었을까? 틈만 나면 글을 썼는데 왜 아무런 메모도 남기지 않았을까? 돈을 둘러싼 갈등을 암시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자신이 원치 않은 뭔가를 강요 받았을까?루슬라나의 사체 표본이 비커에 담겨 뉴욕 검시국 지하 저장실에 보관됐다. 유족이 혈액과 조직의 표본을 주문했다. 독극물 분석과 조직 검사에서 새로운 단서가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에서다.루슬라나의 사후 1년이 흘렀다. 전화가 걸려왔다. 또 다른 모델이 자살했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였다. 루슬라나의 친구였다.모스크바에서 지낼 때 루슬라나와 가까웠던 루바는 두 사람 다 잘 알았다. 그녀는 모스크바 패션 위크 때 무대 뒤편에서 연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패션업계의 화려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척했다. 그리고 촬영을 허용해 달라고 주최측을 설득했다. 대화는 어려웠다. 그녀가 무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틈틈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카메라 플래시와 패셔니스타의 뜨거운 시선 속으로 걸어 나가기 전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처음에는 루슬라나, 이번에는 아나스타샤. 내 친구 중 누가 다음 차례가 될지 모르겠어요.”아나스타샤의 엄마 올가와 키에프의 한 카페에 마주 앉았다. 가녀린 몸매의 발레리나 출신 여성이었다. 몸을 떨었다. 슬픔이 그녀의 몸속을 바람처럼 휘젓고 다니는 듯했다.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았다. 그녀에게는 주문조차 고문인 듯했다. 방금 딸을 잃었는데 크림을 더 넣을지 말지가 중요할까?“늦게 귀가했어요. 딸이 집에 없더군요. 메모가 눈에 띄었어요. ‘모두 용서해 주세요. 화장해주세요.’ 경찰서로 달려갔죠. 경찰관이 태평스럽게 말하더군요. ‘당신이 아파트 건물에서 뛰어내린 여자애 엄마요?’ 말문이 막혔죠. 내게 운동화가 든 봉투를 보여주더군요. 딸아이 거였어요. 아니길 바랐지만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아나스타샤 드로즈도바는 어린 시절 지방을 돌며 발레를 하는 엄마와 함께 원룸 아파트에서 살았다. 올가는 딸이 자신을 따라 발레리나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고전 발레의 정확하고 빠른 동작을 따라하기에는 팔다리가 너무 길었다. 그녀가 무용강습을 받는 홈비디오가 있었다. 화질이 떨어지는 그 동영상에서 아나스타샤는 항상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며 자신의 몸에 절망했다. 그러나 모델로선 완벽한 몸매였다. ‘엘리트 모델 룩’이 유럽에서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14위를 차지했다. 옛 소련 전체에서 3위였다. 그녀는 전 세계의 무대를 누비며 엄마에게 근사한 아파트를 장만해줬다. 아나스타샤는 귀청이 떨어질 듯 큰 소리로 웃었다(식당 손님들이 놀라 돌아보곤 했다). 어느 파티에서나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했다. 그러나 죽기 한 달 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델로 활동하던 모스크바에서 키에프로 돌아온 뒤 방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섭씨 40도의 무더위 속에서도 오리털 이불을 덮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올가로선 납득이 가지 않았다.“단서를 찾으려고 아이 방을 뒤졌죠. ‘세계의 장미’라는 곳에서 보낸 서류가 있더군요. 이상한 말들이 적혀 있었어요. ‘아나스타샤, 겨울의 끝이 네 자장가다. 이제 네 길을 가라.’ 그게 무슨 뜻이죠? ‘세계의 장미’가 뭔가요? 루슬라나와 함께 거기를 다닌 건 알아요.”‘세계의 장미(이하 장미)’가 하는 일은 자칭 ‘인성개발 훈련’이다. “우리의 세미나는 목표를 실현하고 물질적 부를 달성하는 방법을 교육한다”고 그 웹사이트는 설명했다. 밝게 웃는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사진이 사이트를 장식했다. 모스크바의 한 친구가 아나스타샤와 루슬라나에게 이곳을 추천했다. 두 모델은 사랑에 ㅇ실패하고 일도 여의치 않자 자신감을 잃었다. 그들은 3일 과정에 1000달러에 가까운 돈을 내고 참가했다. 이 교육이 그들의 운명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장미’는 모스크바 북부 전러시아전시센터(VDNH)의 고딕풍 궁전에서 교육을 실시한다. VDNH는 스탈린이 국가의 위업을 기념하려 설립했다. 지금은 싸구려 기념품에서 귀한 꽃까지 온갖 물건을 판매하는 잡상인들에게 임대됐다. 집 잃은 개들이 먹이를 찾아 거대한 집단농장의 여성 조각상들 사이를 무리 지어 몰려다닌다. 교육이 실시되는 대형 건물은 옛 소련 시절 공산청년동맹 콤소몰이 집회를 갖고 지도자 찬가를 불렀던 곳이다. 교육과정을 담은 몰래 카메라와 녹음을 입수했다. 교육장에 들어서면 어둠과 고함소리뿐이다. 모두 혼을 빼놓아 비판적 사고기능을 정지시키려는 의도다. 이어 ‘라이프 트레이너’가 등장한다. 그의 말이 너무 빨라 누구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머리 높이에 설치된 스피커가 고통을 안겨주기 시작한다.“앞으로 며칠 동안 불편함, 공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유익한 과정입니다.”실내의 인원은 40명 안팎. 트레이너는 수강자들에게 자신이 겪은 최악의 경험을 털어놓으라고 독려한다. 강간당한 이야기, 부모의 학대. 이 동영상을 통해 루슬라나가 이 과정에서 가장 열성적이었음을 알게 됐다. 아버지의 죽음, 실패한 연애담을 털어놓으며 펑펑 울고 정신 나간 듯이 웃었다. 3일간의 외침, 억눌렸던 기억의 회상, 명상에 이은 춤, 눈물 뒤에 몰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일찍이 품었던 온갖 강렬한 감정을 3일 동안 쏟아내며 인생이 바뀌었다.두 모델은 추가 교육을 신청했다. 모두 처음보다 약간 더 비싸고 더 집중적인 과정이었다. 친구들에 따르면 루슬라나와 아나스타샤는 마침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 남들에게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니라 내적인 혼란을 치유하는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때 그들이 가장 잔인한 환상에 빠져들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장미’는 그들의 교육방식이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라이프스프링이라는 훈련법에 기초했다고 웹사이트에서 밝혔다. 하지만 미국의 옛 추종자들이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며 라이프스프링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소송의 영향으로 그 단체의 미국 지부가 1980년 문을 닫았다. 러시아에선 라이프스프링이 옛 소련 해체 이후의 정신적 공백을 메우며 인기를 끈다. 기존의 종교적 도덕규범을 따라야 하는 불편함 없이 ‘인생이 바뀌고’ ‘새로 태어나는’ 체험을 제공한다. 러시아의 주요 TV 방송에는 라이프스프링의 방식을 본뜬 프로그램도 있다.‘장미’를 몇 개월 다닌 뒤 루슬라나와 아나스타샤의 행동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소란을 피우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모델 캐스팅에 불참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히는 일이 잦아졌다. 루슬라나는 공격적으로 변했다. 난생 처음 상소리를 하고 욕설을 해댔다. 둘 다 체중이 빠졌다. ‘장미’에서 조교로 일하는 볼로디야는 이 단체의 철저한 신봉자다. 그녀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루슬라나가 보인 반응은 이른바 ‘퇴행’이었다. 약간 묘한 감정이 생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거리를 배회하곤 한다. 어쩌면 한밤중에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살했을 리는 없다. 그녀에게 있을 법한 문제는 모두 치료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도우려 애썼다. 정말 노력했다. 하지만 탈바꿈을 거부했다. 모델 일, 어쩌면 약물 탓이지 우리 잘못은 아니다.”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뉴저지에서 사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컬트 교육 포럼의 릭 로스 원장을 찾아갔다. “이런 단체는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피해자 탓’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마약과 같다. 절정의 체험을 제공하면 추종자들은 항상 더 많은 걸 바라고 다시 찾아온다. 사람들이 떠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훈련이 그들의 삶이 됐다. 공허감만 남는다. 민감한 사람은 그 체험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옛 소련 진영의 젊은 여성들이 특히 취약하다.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높은 세계 7대 국가 중 6개국이 옛 소련 공화국이다. 러시아가 6위, 카자흐스탄이 2위다. 부모가 자녀에게 전수할 전통이나 가치관이 없는 문명의 공백에 자살 바이러스가 파고든다고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은 주장한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버팀목이 돼줄 깊이 있는 철학이 없다. 루슬라나와 아나스타샤의 부모는 옛 소련에서 성장했지만 그들의 자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아나스타샤는 1년 가까이 ‘장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마지막 교육과정을 마친 몇 달 뒤 그녀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루슬라나는 3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 뒤 뉴욕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찾았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생의 좌표를 잃었다. 다시 내 자신을 찾게 될까?” 삶을 마감하기 2~3개월 전이었다.2008년 6월 27일 사망 하루 전 루슬라나는 맨해튼 중부의 한 건물 옥상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유별난 날씨였다. 처음에는 비가 내리더니 이어 카메라를 태울 듯이 태양이 불타올랐다. 사진가의 이름은 에릭 헤크. 그는 루슬라나의 마지막 날 촬영한 선명하지 않은 8mm 동영상을 보여줬다. 이 동영상 속의 루슬라나는 그녀의 예전 작품과 완전히 달랐다. 동화 속의 공주가 아니라 성숙한 여인이었다. 처음으로 진짜 인간다운 체취가 느껴졌다. “그녀는 항상 다른 역할, 명랑한 십대 역할을 요구받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것을 뛰어넘는,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봤다”고 헤크가 말했다. “그녀가 보지 않을 때, 포즈를 취할 틈을 주지 않고 촬영했다. 그때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 그녀는 자유로웠다.”다음날 그녀는 생을 마감했다. 스물한 번째 생일 사흘 전이었다. 루슬라나의 친구와 친척들은 지금도 타살이라고 믿는다. 각종 병리검사 결과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보고서에 추측의 여지는 남아 있다.그녀의 사후 2년여가 흘렀지만 루슬라나를 내세운 니나 리치 광고는 아직도 러시아에서 건재했다. 그녀의 얼굴이 “매혹의 약속”과 함께 모스크바에 내걸렸다. 그 향수는 십대들에게 인기만점이다. 성인의 매혹적인 머스크향과 소녀의 사과 토피 사탕, 바닐라 향이 섞인 냄새다.

2011.05.2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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