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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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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T 아바타 ‘미몽(MIMON)’ 탄생…오는 30일 ‘민팅’ 예고

IT 일반

대체불가토큰(NFT) 아바타 ‘미몽(MIMON)’이 오는 30일 첫선을 보인다. 이 NFT 아바타를 기획, 제작한 디스풀랩스는 “‘아름다운 꿈(美夢)’을 주제로 탄생한 미몽을 오는 30일 민팅(minting·블록체인 기술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토큰을 창조하는 것)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15일 밝혔다. 디스풀랩스는 민팅을 통해 미몽을 총 1만개 생성할 예정이다. 미몽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서로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제너레이티브 아트다. 단 한 개도 겹치는 외형이 존재하지 않아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미몽은 암호화폐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디지털 토큰 형태로 제작된다. 해당 블록체인에 창작자와 소유자에 대한 정보가 영구적으로 기록되는 게 특징이다. 소유자는 해당 캐릭터를 SNS에 프로필 사진처럼 쓸 수 있다. 메타버스를 비롯한 가상공간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아바타로도 활용할 수 있다. 미몽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 주장한 철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PFP(profile picture·프로필 사진) 아바타다. 다채로운 디자인은 인간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 디스풀랩스 관계자는 “꿈과 희망의 매개체인 미몽을 통해 세상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디스풀랩스는 미몽 출시를 기념해 트위터와 디스코드에서 커뮤니티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두 차례의 에어드롭(무료 배포)과 화이트 리스팅(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에 참여할 수 있다. 2차 에어드롭 당첨자는 오는 20일 공개한다. 김성겸 디스풀랩스 대표는 “미몽을 중심으로 NFT 아티스트나 기업과 협업해 NFT 문화 확장을 주도할 예정”이라며 “현재 진행 중인 에어드롭 이벤트뿐만 아니라 향후 미몽이 선보일 신선한 행보에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선모은 기자 seon.moeun@joongang.co.kr

2021.12.15 16:58

2분 소요
알카에다의 소년 전사들

산업 일반

▎파키스탄 보안군은 남와지리스탄을 근거지로 하는 무장세력을 소탕하려고 오랫동안 힘든 작전을 폈다.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파키스탄의 부족자치구 북(北)와자리스탄 산악지대의 다타 켈 마을 부근. 지난 3월 16일 그곳의 한 주택단지를 미군의 무인항공기 프레데터가 공격했다. 그 사건은 당시엔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은거하는 알카에다 전사들을 표적으로 한 일상적인 공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통신사가 사건을 보도했지만 중요한 세부 사항에선 거의 내용이 달랐다.하피즈 하니프는 그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알카에다에 합류한 그는 동료들과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그 지역을 통과하던 중 높은 담에 둘러싸인 주택단지 바깥 쪽에 차를 세웠다. 며칠 전 그곳에 맡겨둔 보급품을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정문을 두드렸다. 그런 다음 예의 바르게 뒤돌아섰다. 파슈툰 부족 지역에선 여성이 문을 따줄지 모르기 때문에 정면을 보며 기다리는 행동은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하니프가 차를 세워둔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차 한 대가 폭발했다. 곧 나머지 한 대도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미군 헬파이어 미사일의 강한 폭발력에 하니프도 나뒹굴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차가 있던 곳에 뒤엉킨 금속덩이가 연기만 내뿜었다. 시리아와 이집트 출신의 고위 간부를 포함해 아랍계 알카에다 대원 7명이 즉사했다. 하니프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전사 한 명을 발견하곤 도우려 했다. “머리와 가슴에 중상을 입었다”고 하니프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내 무릎 위에서 숨을 거뒀다.”하니프(그 자신이 불러달라고 요청한 가명이다)는 지금 파키스탄 카라치 인근의 부모 집에 머무는 중이다. 부모는 그를 집에 붙들어 놓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이제 갓 열여섯 살인 하니프를 성전전사가 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하니프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수학을 잘하고 우르두어(파키스탄 공식 언어)와 파슈토어(아프가니스탄 공식 언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아랍어도 유창하다. 하지만 지난 18개월의 대부분을 파키스탄 부족 지역과 국경 건너 아프가니스탄 쪽에서 알카에다와 훈련하고 작전에 참여했다. 우리는 그가 전해준 이야기를 힘이 닿는 데까지 확인했다. 뉴스위크의 믿을 만한 취재원이자 탈레반의 고위 간부인 그의 삼촌도 그가 한 말의 신빙성을 뒷받침해줬다. 2009년 2월 하니프가 종적을 감춘 뒤 하니프의 삼촌과 아버지는 아이를 찾으려고 와지리스탄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두 달 동안 찾아 헤맨 뒤인 두 번째 방문에서 아버지는 드디어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하니프는 아랍 친구들과 함께 있겠다고 고집했다. 몇 달 뒤 어머니의 절박한 애원에 못 이겨 그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갔다.지난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내 미군 전투 임무의 종식을 발표했다. 그러나 9·11 사태 후 9년이 지난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군 약 10만 명이 주둔한다. 그들의 표면상 임무는 알카에다의 와해다. 하지만 대다수 미국인은 그들의 적이 누군지 어렴풋한 개념밖에 없다. 오사마 빈 라덴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2010년 3월 공개된 녹음테이프가 그의 건재를 말해주는 가장 최근의 증거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 라덴의 테러조직은 약 100명 이내의 전사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알카에다를 상대로 한 진정한 전쟁은 파키스탄 부족 지역에서 무인공격기 프레데터에 의해 수행된다. 그 세부 사항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드러날 뿐이다.지금까지는 요사이 알카에다가 어떤 모습인지 내부의 시각으로 묘사한 상세한 이야기가 흘러나온 적이 없다. 이제 하니프의 육성 증언이 바로 그런 시각을 제공한다. 어떤 면에선 그의 이야기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림일지 모른다. 무인공격기의 추적을 받으며 도주 중이고, 수적으로 크게 줄어든 성전전사들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불길하게도 알카에다는 급진 사상에 심취한 무슬림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하니프는 삼촌이 간부로 활동하는 아프간 탈레반보다 빈 라덴의 알카에다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성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알카에다가 지금도 정예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하니프는 동료 여럿이 숨지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중동과 다른 지역에서 끊임없이 수혈되는 신규대원들로 빈 자리가 채워진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소수의 알카에다 전사가 미국에 대항하는 다른 단체를 더욱 강하고 치명적으로 만들어주는 전력 승수(force multiplier) 역할을 수행한다. 하니프 자신도 CIA의 최대 참사 중 하나를 불러온 알카에다 작전에서 작지만 일익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지난해 12월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CIA 기지를 공격한 자폭 테러로 요원 7명이 숨진 사건을 말한다).한낱 소년에 불과한 하니프에겐 이 모든 일이 대모험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랄까 그는 성전운동의 잔혹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무참히 살해한다든가, 여성의 얼굴에 황산을 퍼붓는다든가, 장악 지역에서 공포 통치를 일삼는 등의 만행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니프가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단순 명료해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알카에다가 제기하는 도전은 여전히 지독하게도 복잡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성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프간 탈레반(사진)보다 정예로 인정받는다. 하니프는 기억이 가능한 어린 시기부터 성전운동을 꿈꿨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그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곧 탈레반 전사들과 관리, 지지자들이 카라치 부근의 부모 집을 빈번하게 찾았다. 하니프는 소련에 항거하는 성스러운 전쟁 이야기,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가 부패한 아프간 군벌을 타도한 이야기, 탈레반이 집권하던 시절의 이야기, 미군의 폭탄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이야기, 오마르가 부르짖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IEA)를 복원하려는 반미 저항운동의 이야기에 푹 빠져 성장했다. “샤히드(순교자)가 내 삶의 목표였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이슬람 여성을 모욕하고,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교도들을 공격하고 싶다. 성전운동에 참여하고 순교자가 되는 일 외에는 내 삶에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다른 일은 없다.”지난해 초 어느 날 하니프는 카라치의 한 카페에서 회색 수염을 한 부족인을 만났다. 그 남자는 부족 자치지역에서 파키스탄 보안군에 저항하는 파키스탄 탈레반의 전쟁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막 열다섯 살이 된 하니프는 한마디 한마디를 마음 깊이 새겨들었다. “그 남자가 다음날 나를 다시 만나러 왔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에게 성전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는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파키스탄 탈레반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 아래서 일하는 신규대원 모집원이었다. 메수드(1년 전 프레데터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하니프 같은 어린 자살폭탄테러 대원을 모집하고 활용하기로 악명 높았다. 그의 대원 한 명이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를 암살했다고 알려졌다.하니프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성전운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살폭탄 대원이 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며칠 후 그 남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 이제 떠나지.” 다음날 아침 하니프는 조용히 옷가지를 꾸린 뒤 평상시처럼 집을 나섰다. 하지만 학교로 가지 않고 그 남자를 만났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바누 마을로 갔다. 성전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북 와지리스탄의 관문이다. 그곳에선 파키스탄군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전을 우려해 기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너무도 기뻤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내가 바라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곳에 어서 가고 싶어 안달했다.”하지만 메수드가 직접 머무는 캠프에는 가지 못했다. 마지막 목적지를 남겨두고 그들은 아프간 국경에 인접한 다타 켈 부근의 알카에다 기지를 방문했다. 카라치부터 하니프와 함께 여행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젊은이 두 명의 목적지였다. 순간적인 충동이 일면서 하니프도 그곳에 남겠다고 결심했다. “그곳의 아랍 무자헤딘 대원들이 아주 멋져 보였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는 유창한 아랍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탈레반 고위 관리인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 기지 책임자로 리비아 출신 알카에다 고위 훈련작전 전문가인 셰이크 압둘라 사이드가 그를 내려다보고는 “원한다면 남아도 좋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신이 났었다”고 말했다. “난 아랍어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니프를 메수드에게 데려가려던 그 모집 담당자는 그를 그곳에 남겨두고 떠났다.하니프는 남(南)와지리스탄의 ‘키소라’로 불리는 곳에서 3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받았다. “처음엔 재미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주 힘들었다.” 훈련을 담당하는 대원은 전부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신규대원의 구성을 보면 알카에다의 호소력이 미치는 범위가 매우 넓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규대원 약 30명의 출신국이 매우 다양했다. 체첸, 타지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터키, 알제리계 프랑스인 2명, 독일인 3명(그중 한 명은 유럽계, 나머지 두 명은 아랍계나 터키계) 등. 하니프가 가장 어리고 유일한 아프간인이었다. 대다수는 10대 후반이나 20대였다. 몇몇은 30대였고, 한 명은 만 50세였다. 아랍어나 파슈토어를 아는 터키인, 우즈베키스탄인, 체첸인 몇 명이 동료들에게 통역을 해줬다. ▎미국 공수부대 대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붙잡은 알카에다 용의자의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연행하고 있다(2002년). 훈련은 새벽 전에 시작됐다. 산악지대 구보와 체조를 많이 했다. 하니프는 카라치 집에서 뉴스위크 기자에게 랩톱으로 자신과 신규대원들이 위장복을 입고 AK-47 소총을 메고 행진하거나 구보하는 동영상을 보여줬다. 하루 다섯 번 사원에서 의무적인 기도를 하고 그 틈새 시간엔 모터바이크, 자동차, 픽업, 트럭 운전법을 배웠고 수동 변속기 조작법을 익혔다. 대검이나 소총으로 일대일 싸움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기술도 배웠다. 아랍인 전문가들이 폭탄 취급법을 가르치면서 급조폭발물(IED)을 제조하고 자살폭탄 조끼를 만드는 방법을 훈련했다. “나도 네 시간 안에 폭발물 5~6kg과 볼베어링을 채워 넣은 자살폭탄 조끼를 만들 수 있다”고 하니프가 자랑했다. “내 개인용으로 직접 하나를 만들었다.” 그 조끼가 아직도 기지에서 자신을 기다린다고 그는 말했다.하니프는 그 조끼의 제작법만에 아니라 용법도 안다. “총기를 수입하고 사격하는 법을 배웠듯이 그 조끼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도 배웠다.” 그는 표적에 다가갈 때 불안해 보이지 않는 기술도 습득했다. 초조한 나머지 성급하게 버튼을 누르지 않도록 뇌관은 주로 자살폭탄 조끼의 지퍼 달린 주머니 속에 넣어둔다고 그가 말했다. 훈련 담당자들은 표적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야 하며 멀리서 표적을 보고는 뇌관을 작동시켜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랍인 훈련 담당자들은 신규대원을 면밀히 평가했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지시를 정확히 따르고, 지도를 읽을 줄 알고, 침착하며, 표적에서 떨어진 곳에선 자폭하지 않을 만한 똑똑한 아이를 선호했다.”나중에 다른 기지에서 하니프는 청소년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폭훈련을 받는 모습을 봤다. 한번은 열두어 살 먹은 남자아이들이 그런 훈련을 받고 있었다. 바이툴라 메수드가 그곳에 시찰왔다가 어린 아이를 보고는 훈련 책임자 카리 후사인에게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2009년 8월 프레데터 공격으로 메수드가 사망한 뒤 하니프는 다시 그 기지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명령이 묵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많은 어린 아이가 자폭훈련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하니프는 자신의 훈련을 돌이키면서는 행복에 겨워 했다. “그들은 내게 좋은 식사와 좋은 무기, 폭파장치를 지급했다”고 그가 말했다. “막강한 성전운동 대원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이 지원됐다.” 내부 발전기가 있어서 훈련병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랩톱으로 성전주의 비디오를 보며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런 느긋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니프가 훈련을 마칠 때쯤 파키스탄 보안군이 남와지리스탄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부토 같은 파키스탄 주요 인물을 메수드가 공격하자 파키스탄 정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훈련 담당자들과 훈련병들은 소그룹으로 나눠 재주껏 탈출해 북와지리스탄의 셰이크 사이드 지휘 아래 재편성됐다.하니프는 사이드의 허락으로 집을 떠난 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계속 울었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차일피일 3개월을 미루다가 어머니를 위로하려면 집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아랍인 간부들은 원한다면 가도 좋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한 아랍인 지도자가 “일단 성전운동에 참여하면 그 포로가 된다는 이야기는 미국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 “아랍인들은 ‘이곳을 떠나는 건 자유지만 마음을 바꿔 머물러 보지 그래?’라고 말했다. 그 열성적인 무자헤딘은 가정과 가족 이야기를 하면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오로지 성전에만 전념한다.” 하니프는 그들 중 다수가 남겨두고 온 근사한 집과 멋진 미제 자동차의 사진을 갖고 다니며 그런 희생을 하고 성전운동에 참여한다는 증거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하니프는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아랍인 친구들이 그리웠다.” 카라치에서 3주를 지낸 뒤 그는 한밤중에 집을 빠져나와 북와지리스탄의 기지로 돌아갔다.그러나 그곳에서도 파키스탄 보안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그러면서 미군 프레데터가 더 큰 위험으로 떠올랐다. 무인공격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마치 곤충의 날개짓 소리처럼 의식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프가 말했다. “미사일이 떨어지기 전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하니프는 프레데터 공격으로 알카에다가 입은 피해가 특히 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부 술레이만으로 알려진 알카에다의 한 사령관이 프레데터 공격으로 숨진 뒤 다른 전사들과 함께 몇 시간 동안 건물 잔해를 수색한 일을 돌이켰다. 마침내 그의 잘려나간 머리를 찾았다. 한번은 프레데터 공격 후 숨진 한 알카에다 전사와 아내, 자녀들을 찾으려고 무너진 집더미를 여덟 아홉 시간 동안이나 파헤쳤다. “마침내 신체의 일부를 찾아냈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온전한 시신은 찾을 길이 없었다.”하니프의 추정에 따르면 지난해 프레데터 공격으로 알카에다 대원 약 80명이 숨졌으며 그중 다수는 고위 간부였다. 파키스탄 정보 소식통이 제시한 수치와 비슷하다. 그는 뉴스위크에 지난 2년 동안 무인항공기 공격으로 알카에다 대원 약 120명이 제거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 후로 알카에다 전사들은 북 와자리스탄 주도 미란 샤의 시장에 갈 때는 더욱 조심한다. 하니프도 약 1년 전 그곳에서 파키스탄 보안군에 잡혀 정보요원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아프간 탈레반이 멋져서 흉내를 낼 뿐이라고 둘러댄 뒤 풀려났다고 말했다.그처럼 피해가 크지만 알카에다는 손실된 인원의 일부는 언제든 보충할 능력을 갖췄다. 신규대원이 끊임없이 도착한다. 대부분은 터키의 알카에다 안가에서 출발해 3개월의 고된 육지 여행 끝에 와지리스탄에 도착한다. 중앙아시아 전사들은 훨씬 짧은 경로를 이용한다. 터키와 중동에서 도착하는 신규대원들은 현금을 많이 소지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가방에 지폐로 2만 달러 이상을 채워오는 경우도 있다. 신규대원의 심사는 매우 까다롭다. 출신 배경을 면밀히 조사하고 부족 지역에 보내기 전, 또는 기지에 도착한 뒤로도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관찰한다. “첩자의 침투를 가장 두려워 한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1년 전 알카에다 간부들은 자신들의 차에 CIA 첩자가 탐지장치를 부착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유도한다고 확신하게 됐다.부족 지역에서 알카에다의 전력은 아랍인 약 130명에다 약간의 체첸인, 우즈베키스탄인, 그리고 소수의 터키인 정도라고 하니프가 말했다. 그중 약 절반이 지난봄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증파에 맞서려고 파키스탄을 떠났다. 그들은 대여섯 명씩 짝을 지어 떠나 여러 지역에서 아프간 탈레반 사령관들과 접선했다. 그들의 임무는 실제 전투가 아니라 주로 IED, 자살폭탄 조끼, 폭탄의 제조와 현지 탈레반 대원에게 폭탄제조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다. 하니프는 아랍인 약 65명이 부족 지역에 남아 조직의 일상 업무를 담당한다고 추정했다.하니프는 알카에다의 종합전략은 전혀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빈 라덴과 2인자 아이만 알-자와히리 같은 최고위 지도자가 직접 지휘하는 알카에다 대원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알카에다와 함께 한 18개월 동안 그 두 사람의 소재에 관해 어떤 단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모두 그들의 이름으로 열정적으로 성전에 임했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만난 저명한 성전 전사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인기 스타에게 반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는 파키스탄 탈레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와 그의 후계자 하키물라 메수드, 알카에다의 3인자로 알려진 아부 야히아 알-리비, ‘미국인 탈레반’ 애덤 가단(일명 아잠 알-암리키)도 포함됐다. 그러나 지난 6개월 동안 점점 심해지는 프레데터 위협의 결과로 고위급 알카에다 간부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전부 숨어 지낸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이전엔 아잠 알-암리키를 종종 봤는데 그도 보이지 않았다.”하니프는 특히 요르단 출신의 이중첩자 후맘 할릴 아부-물랄 알-발라위를 대면한 사실을 자랑했다. 지난해 12월 코스트 부근의 비밀기지에서 CIA 요원 7명을 살해한 자폭테러범이다. 하니프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발라위의 자폭조끼를 직접 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늘 농담을 즐겼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우리는 그에게 ‘아부 라일라’(라일라는 발라위의 두 딸 중 첫째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니프에 따르면 발라위는 아랍어, 영어, 터키어를 잘했으며 셰이크 사이드가 그를 특별히 아껴 특별 손님으로 대접했다. 지난해 말 어느 날 하니프와 대원 서너 명이 발라위를 미란 샤까지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곳에서 그를 내려줬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파슈툰 부족 사람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그를 데려갔다.” 다음날 셰이크 사이드가 하니프에게 발라위가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 거기서 미군 헬기가 그를 CIA 기지로 데려갔다고 알려줬다(그러나 미국 관리에 따르면 발라위는 헬기가 아닌 승용차로 CIA 기지에 도착했다).하니프는 랩톱에서 발라위의 자폭조끼 제조 장면이라며 동영상을 보여줬다. “발라위는 현장에서 지켜봤다”고 그가 말했다. 그 동영상에서 한 대원은 얇은 천 튜브 13개를 폭발물로 정성껏 채웠다. 그 튜브들은 나란히 하나로 엮어졌고 전선이 달려 있었다. 그 다음 그 대원은 작은 볼베어링 수백 개를 접착제가 칠해진 천 위에 고르게 펼친 뒤 구식 재봉틀로 박고 가죽끈과 버클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복잡한 전자회로를 추가하고 가는 전선으로 손목시계처럼 생긴 작동장치에 연결된 뇌관을 설치했다.그러나 하니프는 그보다는 다른 일을 회상하면서 가장 기뻐했다. 아랍인들과 터키인들 사이의 흥미진진한 배구 경기, 사정이 허락할 때 산에 올라가 토끼, 새 등을 잡아 야외에서 구워 먹던 기억 등. 또 하니프는 미란 샤 시장에 가기를 좋아했다. 진흙벽돌로 지은 수많은 작은 가게와 주택들로 이뤄졌으며 대부분 무장단체가 통제하는 곳이다. 하니프는 해가 질 무렵 공중전화 사무소에 자주 갔다. 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우호적인 상인들이 그들을 들여보낸 뒤 문을 걸어닫고는 마음대로 사용하게 해주었다. 행인들은 그 가게가 밤이 돼 문을 닫은 줄 알았지만 하니프와 친구들은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전화를 하고 인터넷을 사용했다.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니프는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식품, 보급품, 탄약, 심지어 친구 선물 등에 종종 1000달러 이상씩 썼다. “대원들을 위해 맛있는 식품을 구입하는 일이 즐거웠다.” 돈이 모자란 적은 없었다. 낡은 차량을 신형 도요타 픽업과 랜드 크루저로 교환할 정도로 현금이 많았다. 한번은 아프간 탈레반이 노획한 신형 포드 레인저 여러 대를 파키스탄으로 가져가기도 했다.하니프의 부대는 지난 4월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됐다. 어느 날 새벽이 되기 전 그들은 위조한 아프간 신분증을 지니고 무기를 짊어진 채 파크티카주로 건너갔다. 그가 소속한 작은 조직(아랍인 IED 전문가가 몇 명 포함됐다)은 카불 주변 주에서 아프간 탈레반 사령관들과 함께 행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싸운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보다 더 위태로웠다. 그의 부대는 거의 매일 총격전을 했다. “파키스탄에서보다 군사 행동이 훨씬 많았다.”가즈니주에서 하니프는 2006년 사살된 이라크 알카에다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의 사촌을 만났다. “그에게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하니프가 돌이켰다. “그는 우리 부대를 떠날 때 내게 두 쪽짜리 편지를 건넸다. 가족을 보러 집에 가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마음이 바뀐다고 그는 경고했다.” 그래도 하니프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7월 사령관에게서 허락을 얻어 집으로 갔다.집에 머문 지 이제 거의 두 달이 됐다. 아랍인 친구들이 경고했듯이 그는 계속 사악함과 미몽, 사치, 유혹에 시달린다. “인터넷과 거리엔 마음을 썩게 만드는 끔찍한 것이 많아 늘 조심해야 한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집에 와서 열흘 정도 머물렀을 때 탈레반 삼촌이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하라고 타일렀다. 아버지도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면 더 나은 순교자가 될 거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하니프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부모님의 소원대로 결혼하면 내가 좋아하는 삶은 끝장”이라고 그가 말했다.하니프는 하루 몇 시간씩 침실에서 컴퓨터로 탈레반, 알카에다, 이라크 성전주의 웹사이트를 검색하며 호전적인 대화방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웹에서 여성과는 절대 접촉하지 않는다. 이슬람 사이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런 일을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 하니프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군을 매복 공격하는 성전을 담은 DVD를 본다. 교환하는 대화방 메시지에는 종종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이 가득하다. “미란 샤의 시장이 그립다”고 하니프가 말했다. “산과 동료 무자헤딘들이 보고 싶다. 이곳에선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모든 알카에다 자폭대원이 하듯이 하니프도 유언장을 만들었다. 그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고, 남자 친족 전원이 수신 대상이다. “내가 하늘나라에서 수많은 처녀를 데리고 사랑하는 형제들인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전운동에 참여하고 순교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 유언장의 작성 일자는 2009년 12월 21일이다. 그가 16세가 되던 날이다.번역·이원기

2010.09.07 13:58

14분 소요
네오콘의 부활

산업 일반

▎브렛 스티븐스 지난해 9월 미국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운동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이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용히 치러졌다(아니, 어쩌면 바로 그 명성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이 참석하리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체니도 다른 공화당 지도자들도 보이지 않았다.크리스톨이 공화당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인상마저 풍겼다. 그는 자신이 한 때 ‘아둔한 정당’이라고 불렀던 공화당에 지적인 정통성과 힘을 실어준 실력자였다.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에선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2012년 대권을 노리는 공화당 인사들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세라 페일린도 참석하지 않았다(크리스톨의 아들 빌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페일린을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밀었다). 참석자는 약 200명이었다. 사실 적은 수는 아니다. 그러나 웅장한 아다스 이스라엘 유대교 회당이었기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맨 뒤의 진홍색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아다스 회당은 1951년 어빙 크리스톨과 같은 세대인 미국의 유대인들이 마침내 미국에 상륙해서 한동안 눌러앉을 계획이라고 선언한 시기에 세워졌다. 아다스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가장 막강한 보수 유대교 회당이다. 역대 미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들이 전부 그 회당에 다녔다.그러나 크리스톨의 장례식에선 저명인사들의 추도사가 이어지지도 않았다. 랍비와 크리스톨의 아들 빌만이 단상에 섰다. 그들의 추도사마저 짤막했다. 영결식은 약 40분 만에 종료됐다. 그러나 크리스톨이 창시하고 이끌어온 신보수주의(한때 그는 그 이념을 지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이라고 불렀다)의 저력은 언제나 그 머릿수가 아니라 열정에서 나왔다.크리스톨의 관은 연단 아래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 사이에 눈에 잘 띄지 않게 놓여 있었다. 만약 그가 관에서 일어나 누가 참석했는지 살펴봤다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듯하다. 좌석을 메운 사람들은 전부 그의 자손들이었다. 생물학적 자손 만이 아니라 지적인 자손들이었다.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빌 크리스톨이 편집인으로 있는 정치 잡지 위클리 스탠더드처럼 네오콘(neocon: neoconservative의 줄임말로 신보수주의 운동을 지지하거나 주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이 직접 운영하는 조직, 또는 워싱턴 포스트·월 스트리트 저널처럼 네오콘과 관련이 있는 쟁쟁한 언론사에서 일하거나, 미국 기업 연구소(AEI)를 비롯해 네오콘이 포진해 있는 정책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모처럼 공식 석상에 나온 폴 울포위츠 전 국방 부장관, 폴 브레머 전 이라크 최고행정관 등 이라크 전쟁에 직접 관련된 얼굴들도 비쳤다(아무튼 이라크전은 네오콘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닌가?) 워싱턴 포스트의 열정적인 네오콘 칼럼니스트 찰스 크라우트해머와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보였다.그 두 사람은 수년 동안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AEI가 주최한 2004년 ‘어빙 크리스털 강연회’에서 크라우트해머가 제시한 이라크전 낙관론에 후쿠야마가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톨의 죽음이 그들을 잠시나마 한자리로 불러들였다(하지만 나란히 앉지는 않았다).후쿠야마는 네오콘으로서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네오콘과 결별했다가 뉘우치고 다시 돌아왔다. 저명한 언론인 조지 F 윌처럼 신보수주의 운동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공화당 골수파도 크리스톨의 장례식에 공손하게 정좌했다(윌은 이라크전이 엄청난 실수라고 주장했다). 아들 빌 크리스톨의 추도사는 평소와 달리 정치색이 없고 심지어 상냥하기까지 했다. ▎I 루이스 ‘스쿠터’ 리비 하지만 신보수주의 운동의 줄기찬 확산에 만족을 표했다.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구름떼처럼 많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 중엔 어빙 크리스톨처럼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다가 특정한 계기로 인해 우익으로 선회한 사람도 있다.그러나 그의 아들 빌 크리스톨처럼 선대로부터 그 신념을 물려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사가이자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케이건, 네오콘 기관지로 불리는 코멘터리지의 편집인 존 포도레츠 같은 전통적인 보수파에겐 ‘네오(neo: 새롭다는 뜻)’란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이들 각자는 신보수주의 운동 창시자들의 2세다. 사실 미국 정치에서 이들처럼 세습적인 파벌은 없다. 이스라엘의 우익 리쿠드당의 사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정의와 비유가 정확하진 않지만 네오콘과 리쿠드는 공통점이 많다. 종교와 정치, 세계관을 종종 공유하며,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그런 피해의식 때문에 그들은 모든 일에 의심이 많고, 호전적이며, 세상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또 수십 년 동안 정치적 황야에 유배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정상적인 세대 간 갈등을 거부하고 위풍당당한 부친들을 신봉하는 ‘왕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날 아침의 장례식에서 빌 크리스톨이 어빙의 업적을 찬양하려고 일어섰을 때 그는 사실상 왕위를 물려받은 셈이었다.크리스톨이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나흘 뒤인 영결식 날 구글에서 ‘neoconservative’와 ‘death’를 검색해 봤다. 오랫동안 소문으로 무성했으며, 일각에선 고대하고 기뻐하던 신보수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부고’가 무수히 떴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신보수주의는 이제 한물갔다는 이야기였다.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네오콘의 사상은 이라크의 모래 속에 파묻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부고가 오보인 경우도 종종 있다. 사실 현재로선 네오콘이 부활한 듯하다. 우선 AEI의 프레드릭 케이건(로버트 케이건의 동생)이 이라크 미군 증파를 고안하고 밀어붙여 이라크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일조했다.더욱 최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네오콘의 편으로 돌아선 듯하다(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는다). 처음에 오바마의 외교 정책은 뉘앙스, 다변화, 상호의존을 중시했고 스타일 면에서는 저자세, 자기비판, 회유, 평등한 입장에서의 합의를 근간으로 했다. 그런 접근법은 네오콘의 이념과 상반됐다.그러나 이젠 달라졌다고 네오콘들은 말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첫째 증거는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 3만 명을 추가 파병한다는 사실이다. 주요 네오콘이 바라는 수준에 거의 육박하는 규모다. 둘째 증거는 오바마의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이었다. 무력 사용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란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반체제 인사에게 힘을 실어줬으며, 선과 악의 대결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네오콘들은 오바마 연설의 요지가 놀라울 정도로 자신들의 성미에 맞다며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성탄절에 나이지리아의 한 청년이 속옷 하의에 폭탄을 숨기고 디트로이트 상공에서 미국 여객선을 폭파하려 했다. 그러자 네오콘은 ‘거 보라’며 자신들의 강경한 대테러 전략이 더욱 옳다고 생각했다.성탄절 자폭테러 기도에 대한 오바마의 초기 반응을 두고 빌 크리스톨을 비롯한 주요 네오콘이 너무 미온적이라고 평했다. 그러자 오바마가 더욱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크리스톨은 이제야 오바마가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선언했다. 아버지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어빙 크리스톨은 오래 전에 ‘네오콘’을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진보주의자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페이스 “오바마를 칭찬하든 비난하든 간에 네오콘은 승승장구하는 추세”라고 제이컵 하일브런이 말했다. 그는 보수 잡지 내셔널 인트레스트의 수석 편집자이며 ‘네오콘의 부상(They Knew They Were Right: The Rise of the Neocons, 2008)’이라는 책을 썼다. “네오콘은 오바마가 아프간 병력 증파를 수용하도록 설득했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무르다’는 비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도록 만들었다.어느 쪽이든 오바마는 네오콘의 구미에 맞춘 셈이 됐다.” 이제 오바마가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의 민주당 패배로 더욱 허약해졌기 때문에 그 추세가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네오콘의 그런 고집과 끈기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역사가들이 지적하듯 네오콘이 표방하는 신념의 뿌리는 미국의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영국에서 이주한 청교도 집단의 지도자 존 윈스롭에서 시작해 에이브러햄 링컨, 우드로 윌슨, 존 F 케네디로 이어졌다. 선과 악의 투쟁으로 요약되는 마니키안(Manichaean) 세계관, 선교사 같은 열정, 거의 맹목적인 애국주의,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can do’정신, 뉘앙스를 참지 못하는 성격 등을 가리킨다.물론 지금은 그들의 고유한 색이 바랬다. 이제는 자신들을 ‘네오콘’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른다(실제로 대표적인 네오콘인 울포위츠와 리처드 펄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네오콘’이라는 명칭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아직은 무대에서 사라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네오콘의 종언을 섣불리 선언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신보수주의 운동의 이력을 되돌아봤다. 1930년대 말 뉴욕 시립대의 구내식당 한 구석에서 신보수주의 운동이 탄생한 이야기, 파시즘이 자유 세계를 위협하면서 그들이 뉴딜 민주당원이 된 과정, 1960년대 들어 복지와 인종 문제에서 린든 B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에 실망하면서 우익으로 이동한 과정 등.그런 이념에 계속 불을 지펴 레이거니즘까지 이르게 한 사람이 바로 어빙 크리스톨이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코멘터리지의 편집인 노먼 포도레츠라는 다른 네오콘 거목의 주도로 이 운동은 주로 외교 문제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소련과의 데이탕트(긴장완화)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아랍 독재자들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조지 F 윌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 국내적으로 폄하했던 호전적인 개입주의를 국제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이 마지막 노선 변경에서 네오콘은 ‘미국의 독보성(American exceptionalism)’을 내세웠다. 미국은 도덕적 차원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이며, 따라서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사실 전통 보수주의보다는 진보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들은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를 부도덕하고 냉소적이라고 경멸하면서, UN 같은 국제기구를 부패하거나 겁이 많다며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세계 전체에서 문제를 예견하는 동시에 (필요하면 군사력을 사용해서) 선제 조치를 취하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촉구했다.레이건 시절 국무부 부차관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수석 보좌관을 지냈으며 현재 케임브리지대 선임 연구원인 스테펀 핼퍼는 네오콘의 그런 정책을 두고 “험비(군용 지프) 뒷문으로 민주주의를 배급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네오콘의 수그러들지 않는 영향력을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는 공화당 내부에서 그들이 일으키는 좌절과 분노일지 모른다.네오콘이 표적으로 삼은 인사 중 다수(키신저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등)는 네오콘이라는 용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네오콘 일각에선 키신저도 자신들의 그룹에 들려고 애썼다고 놀린다). 공화당의 자유의지론자 중 한 명은 네오콘을 “기식자”라고 부른다. 그는 네오콘의 모험주의 외교 정책을 혐오하며(특히 비용 문제 때문이다), 지난 대선과 상·하원 선거의 공화당 패배를 그들 탓으로 돌린다. ▎데이비드 프럼 네오콘은 독자적으로는 표심을 잡을 역량이 없기 때문에 예컨대 조지 W 부시 같은 거목에 빌붙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오콘은 익명의 가면 뒤에 숨은 집단이라고 그는 격분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계속 재발하는 전염병”에 비유하며 그들의 지구력과 실효성에 탄복하기도 한다.“정말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자신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힘이 얼마나 센지,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리고는 사람들이 그들에 관해 글을 쓰도록 만든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책이 큰 혼돈을 야기했다는 인식이 퍼지면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존재마저 부정한다. 그런 나쁜 결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자신들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며 아주 야비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은 모두 반유대주의로 몰아붙인다.”극우 논객 패트릭 뷰캐넌은 “진정한 보수주의 운동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네오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앙심을 잘 품고 협력적이지 않다. …한번 틀어지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뷰캐넌의 설명에 따르면 네오콘은 1980년대에 우익의 세계에 교묘히 스며들어 자금력으로 공화당의 지적인 기반을 탈취했다.그런 다음 자신들의 정교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좌익의 어떤 조직보다 자금이 풍부하고 호전적이며 획일적이다. 신보수주의 운동의 진원지는 미국 기업 연구소(AEI)이지만 허드슨 연구소(부시 행정부에서 상처를 입은 네오콘 더글라스 페이스와 I 루이스 ‘스쿠터’ 리비의 피난처다)와 민주주의 수호재단(FDD: 클리퍼드 메이가 운영한다) 같은 다른 조직들로 뻗어나갔다.신망 높고 전통 깊은 미 외교협회(CFR)의 경우 네오콘은 그 단체의 외교와 협상, 온건 노선, 고매함이라는 가치를 끔찍이 싫어한다. 그런데도 CFR은 네오콘 두 명을 받아들였다. 군사 역사학자 맥스 부트,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관리로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관련해 의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가 댄 퀘일 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빌 크리스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사면 받은 엘리엇 에이브럼스다.네오콘의 비판자 중 한 명인 스티븐 월트(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면피 재주가 뛰어나다. 공직자로서 일을 완전히 망쳤거나 기고문에서 주장한 내용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에 대한 진정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곧바로 AEI나 위클리 스탠더드지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자기 주장을 펴고 토크쇼에 등장한다.”하지만 월트도 네오콘의 지구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아무리 신용을 잃어도 계속 총공세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키진 않지만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버트 케이건, 랜디 슈네만, 게리 슈미트 같은 네오콘은 지난 대선 당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월 스트리트 저널의 브렛 스티븐스, AEI의 프레드릭 케이건과 대니얼 플레트카, 외교정책구상(FPI: 이 역시 빌 크리스톨이 만든 조직이다)의 제이미 플라이와 댄 세너 같은 2세 또는 3세 네오콘 논평가도 현재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이루는 폭스 뉴스 시청자들은 엄밀히 말해 네오콘은 아니지만 호전적인 대외 정책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네오콘과 세계관이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한다.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낸 빈 웨버는 “신보수주의는 여전히 공화당의 외교 정책 입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키신저, 스코크로프트, 콜린 파월, 제임스 베이커 같은 ‘현실주의파’는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 CFR의 리처스 하스 같은 극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현실주의파는 마치 금욕주의자들처럼 자손 번식이 불가능하거나 그럴 마음조차 없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곧 출간될 신보수주의에 관한 책을 쓴 저스틴 베이스는 이렇게 말했다.“젊은 사상가들에게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현실주의적 계산보다는 네오콘의 이상적이고 애국적인 이념이 구미에 더 맞는다. 젊은 현실주의자가 되는 게 뭐가 재미 있겠는가?” 한편 뷰캐넌이 이끄는 공화당의 극우 보수주의는 이미 시들었다. 고립주의적이고 구식이기 때문이다. 위클리 스탠더드의 객원 기자이기도 한 맥스 부트는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체니 “극우파 대다수는 괴짜 자유의지론자들이다. 정신 나간 신(新)남부연합주의자들이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인 동시에 외국인 혐오주의자들이다. 네오콘은 인간 짐승으로 불리며, 아기들을 산채로 먹지 않게 하려면 그들을 우리에 가둘 수밖에 없다는 욕을 먹는다. 하지만 보수주의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네오콘은 실제로 상당히 중도 노선에 속한다. 뉴트 깅그리치파, 러시 림보파, 숀 해니티파 등 공화당 전체를 아우른다. 공화당원들은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심적으로 지지한다.“네오콘이 실제로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통계를 내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을 엉큼하고 음모를 좋아하는 집단으로 보는 비판자들은 경박스럽게도 그들의 수를 64명, 17명, 아니면 6명이라고 주장한다. 때로는 네오콘은 그보다 수가 더 적고 더욱 배타적인 듯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코멘터리지가 주최한 알래스카 크루즈 행사에 등장한 연사 8명 중 절반이 포도레츠 가문이었다(가장인 노먼 포도레츠. 아내 미지 덱터, 아들 존, 사위 엘리엇 에이브럼스).코멘터리지에서 존 포도레츠는 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자 비판자들은 아니나 다를까 족벌주의와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 배려 정책으로 네오콘이 혐오해야 마땅하다)의 냄새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확히 누가 네오콘에 들 자격이 있는지 따지는 일은 매우 성가신 문제다. 특히 사람들은 네오콘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갖는다.또 그렇게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며 시대에 뒤처졌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네오콘이 누구누구라고 밝히는 일을 반유대주의적 비방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네오콘, 또는 그렇게 쉽사리 인식되는 사람들은 대개 유대인이다. 물론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 진 커크패트릭, 존 볼튼 등 예외도 많다.정중한 자리에선 네오콘의 유대인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네오콘과 함께 ‘더러운’ ‘전쟁광’ ‘유대인놈’ 같은 욕설과 민족 비하적인 단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맥스 부트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버클리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다른 여러 네오콘과 달리 피해의식에 젖어 유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니다.부트는 이렇게 말했다. “네오콘이라는 용어는 나 자신 또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리쿠드, 빌데르베르크 그룹(Bilderberg Society: 미국과 유럽의 정계, 재계, 왕실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다양한 국제·정치·경제 문제를 토의하고 정책을 짜는 모임), ‘삼변회’(Trilateral Commission: 프리메이슨이 조직한 비밀 단체), 영국 여왕 등과 연결된 부도덕한 트로츠키파 도당의 일원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이다.”네오콘 사이에서도 뜻이 서로 다르며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강조했다. “은밀히 모여 피해 대책을 세우고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회사를 고용하는 네오콘 중앙 위원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네오콘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CFR 회장을 지낸 레슬리 겔브는 지난 35년 동안 네오콘이 실수를 인정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AEI의 데이비드 프럼과 코멘터리지의 조슈어 무라브치크 같은 사람들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실수 인정에 근접했다. 무라브치크는 “약간 잘못됐든 완전히 망쳤든 간에 우리는 이라크전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딕 체니처럼 네오콘이라는 명칭이 대수롭지 않게 따라붙는 일부 인사는 종교적으로, 지적으로, 이념적으로, 행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네오콘의 본류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네오콘의 시각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로 알려졌다(체니의 딸 엘리자베스는 빌 크리스톨과 함께 대테러전의 강경책을 촉구하는 단체 KeepAmericaSafe.com을 설립했다).네오콘은 이라크 전쟁을 가장 앞장서서 부르짖은 세력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일한 동료들이 소수에 불과하며 그나마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이라크전을 밀어붙일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강조한다. 부시는 9·11 테러 공격이 일어난 뒤에야 진지하게 네오콘의 견해를 구했다고 그들은 말한다.그나마 자신들이 9·11 사태의 정확한 진상 규명과 명확한 대책을 가장 잘 제시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노먼 포도레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행정부에서 몸담지도 않았던 더그 페이스, 폴 울포위츠, 리처드 펄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딕 체니 부통령을 회유해 그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펄은 당시 국방부 산하 민간인 조직인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장이었다).그런 주장이 대중에 먹힌 데는 근본적인 반유대주의 정서가 한몫 했다. 대개는 ‘이 약삭빠른 유대인들이 우둔한 비유대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생각한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그렇게 인식한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해졌다는 주장은 이중으로 가당찮다.사실 이스라엘은 처음엔 이라크전에 반대했다.”(그러나 스티븐 월트는 그보다는 사정이 더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이라크전으로 인해 진짜 골칫거리인 이란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판단했지만 부시가 다음 차례로 이란을 손보겠다고 약속하자 전쟁을 지지했다는 설명이다.)이라크전이 진퇴양난에 빠지자 네오콘은 부시 행정부를 떠나 좌절의 상처를 달래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회고록을 썼다. 그러나 일부는 처음부터 중동에서 자신들이 지지한 전쟁이 타당했지만 전쟁 수행방식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폈다.그중 한 명이 부트였다. 그는 일찌감치 2001년 11월 부시가 첨단 무기를 동원한 전쟁을 고집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이 또다시 ‘테러리스트 소굴’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라크에도 대대적인 파병이 필요하리라고 경고했다. 2006년 부시는 부트를 비롯한 네오콘(크라우트해머, 크리스톨 등)을 백악관에 초청해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려 했다.그러나 부트 때문에 그 회동은 이라크전 실패를 성토하는 자리로 변했다. 부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했다. 부트 외에 프레드릭 케이건도 초기부터 이라크전을 비판했다. 케이건은 군사 분석가로 늘 아버지와 형의 그림자 속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특히 그는 이라크 병력 증파안을 고안해 전쟁 자체와 신보수주의의 불안한 입지를 역전시키는 데 일조했다.그 일로 케이건은 네오콘의 지적 능력, 끈질김, 방법론, 실효성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지가 발표한 ‘글로벌 사상가 100명(Top 100 Global Thinkers)’에서 케이건 가족은 집단으로 66위에 올랐다. 때로는 케이건 가족을 빼면 네오콘은 껍데기만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하지만 실제로는 케이건 네이콘은 4명뿐이다. 도널드(아버지), 로버트와 프레드릭(도널드의 두 아들), 킴벌리(프레드릭의 아내)다. 도널드 케이건은 예일대 역사학·고전 교수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권위자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전쟁 자체로 확대됐다. 그는 전쟁을 두고 “인간 본연의 상태(the default state of the human species)”라고 말한 적이 있다.성격이 꼼꼼하고 육중한 체격을 가진 프레드릭은 어릴 때 판지를 잘라 전투를 재연하는 놀이를 하며 자랐고, 예일대에서 러시아와 소련의 군사 역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10년 동안 웨스트 포인트에서 전쟁학을 가르쳤다. 그는 같은 예일대를 나왔고 관심사가 기이할 정도로 흡사한 킴벌리 케슬러와 결혼했다.킴벌리는 현재 워싱턴에 있는 소규모 싱크탱크 전쟁연구소 소장이다. 프레드릭 케이건은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추진하는 첨단기술 전쟁에 회의를 가졌다. 처음부터 이라크전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 그는 퇴역 대장 잭 킨의 도움으로 부시를 설득했다. 그 결과 이라크 병력 증파가 시작됐다.프레드릭에게 가장 큰 감명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은 데이비드 페트라우스 대장(현재 중부군 사령관)이었다. 페트라우스는 프레드릭을 “머리가 비상한 사람” “지극히 부지런한 사람” “진정한 역사 학도”라고 부른다(페트라우스는 2010 어빙 크리스톨 상을 받았고 오는 5월 AEI에서 어빙 크리스톨 강연을 할 예정이다).프레드릭과 킴벌리 케이건은 페트라우스의 주선으로 2007년 4월부터 이라크를 일곱 차례나 돌아봤다. 페트라우스는 전화 인터뷰에서 “그들에겐 자녀가 없다. 이 일이 그들의 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아프가니스탄을 두 번 다녀왔다. 두번째 방문은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대장을 자문하는 12명의 민간인 위원회 소속으로 이뤄졌다.그 위원회의 검토 보고서는 매크리스털의 4만 명 증파 요청에 힘을 실어주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프레드릭 케이건은 종종 순전히 군사적인 해결책에 과도한 믿음을 보인다. 네오콘 중에는 군복무를 한 사람이 거의 없지만 무력 사용 주장으로 종종 비난을 산다. 미군 정보장교 출신으로 군사문제 전문 칼럼니스트인 랠프 피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살면서 모든 것을 너무도 쉽게 얻었다. 그래서 미군을 그들의 이상을 실천하는 도구로 간주하기가 너무도 쉬웠다.” (피터스는 자신이 네오콘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혹스러워하며 짜증을 낸다. “난 자격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난 군복무도 했고, 비싼 사립 고교에 다니지 않았으며, 아이비 리그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나에게 주어진 신탁 기금도 없었다.난 몸도 날씬하다.”) 프레드릭 케이건도 할 말이 있다. 그는 군대의 능력을 무작정 믿지는 않으며 장성들에게 작전을 그만두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네오콘은 그 놀라운 인내력에도 불구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전에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 네오콘도 뿌리 깊은 본능적 방어심리를 갖는다.또 그들은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외부자들을 경계한다. 내가 존 포도레츠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보통 때는 사근사근한 빌 크리스톨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키신저의 모든 면을 혐오하는 그이지만 나에게 바로 그 키신저식 전술을 구사했다.출장 중이라서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무작정 쳐들어갔다. 네오콘의 근거지로 알려진 워싱턴 북서부 17번 스트리트 1150번지의 건물에는 AEI 다섯 층 아래 위클리 스탠더드가 있다. 출장(?)에서 벌써 돌아온 듯 그가 버젓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퇴짜 놓았다.함께 한 약 3분 동안 그에게서 신보수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보수주의의 존재와 영향력을 구태여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해 9월 어빙 크리스톨의 영결식에서 아들 빌의 추도사를 들은 사람들은 정말 감동적인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했다.누구든 자식에게서 듣고 싶은 바로 그런 추도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팬들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좋아하는 빌 크리스톨은 박식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만드는 너무도 잘난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들은 빌 크리스톨에게서 그렇게 ‘진지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크리스톨 부자(父子)를 잘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척 비슷하다고 말한다. 재치와 세련된 무관심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랍비 길 스타인로프는 추도사에서 어빙을 “영원한 외부자”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의 운명이 그렇듯이 모든 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완전히 해체해서 모든 문제를 투명하게 만든다는 의미였다.그와 대조적으로 빌은 완벽한 내부자다. 훈수를 두고 인맥을 쌓고 제국을 건설하는 형이다. 친구들도 그를 이념가보다는 운영자라고 말한다. 어빙은 정치에 초연한 편이었다. 하지만 빌은 지극히 당파적이다. 그러면서도 오지랖이 넓어 콜린 파월, 게리 바우어, 앨런 키즈, 페일린 등 다양한 부류의 인물들을 지지했다.친구라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한 네오콘은 “빌은 재미없는 올바른 입장보다는 흥미진진한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빌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페일린을 지지한 일(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게 그녀를 러닝메이트로 선정하도록 공개적으로 설득했다)을 초등학생이 처음 이성을 알면서 겪는 사랑의 열병에 비유했다.위클리 스탠더드의 유람선이 알래스카주 주도 주노에 정박했을 때 빌의 열병이 시작됐다고 알려졌다(페일린은 당시 알래스카 주지사였다). 그러나 맥스 부트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그냥 엉뚱하게 튀어나온 기발한 생각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페일린이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가 되리라고 믿었겠나?단지 ‘진흙에 묻혀 있는 보석 같은 새 얼굴이 있었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화당의 한 중진(크리스톨이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른다며 익명을 요구했다)은 “빌과는 절친한 사이지만 그는 언론의 각광을 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네오콘은 다듬어지지 않은 ‘왕자’나 ‘공주’를 지혜로운 사람들이 발굴해서 키워줘야 한다고 믿는다.사실 그런 점이 네오콘의 신조 중 하나다(1950년대 시카고대에서 숱한 논란을 일으킨 정치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그 원조로 알려졌다). 빌 크리스톨은 이미 댄 퀘일을 부통령이 되도록 이끈 경험이 있다. 어빙 크리스톨은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한다는 생각을 경계했다. 하지만 아들 빌은 바로 그 일을 소명으로 삼았다. 비판자들은 빌의 판단 착오를 즐겨 지적한다.예컨대 빌은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다. 친구인 존 스튜어트는 그에게 “자네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할까?”라고 말했다. 아버지 어빙도 아들에게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오랜 가족 친구에게 “불쌍한 녀석… 내 아들이 또 실수를 저질렀어”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어빙의 불안감은 나차스(nachas: 유대인들이 아들에게 갖는 자부심을 말한다) 아래 묻혀졌다.그는 단지 아들의 이름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뉴욕타임스를 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빌 크리스톨의 실수나 잘못은 곧바로 잊혀졌다. 비판자들이 통곡할 노릇이다. 예컨대 빌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잠시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곧 그는 워싱턴포스트로 자리를 옮겨 승승장구했다.네오콘은 빌이 뉴욕타임스에서 겪은 낭패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 한 명은 빌 크리스톨의 경우 보수파를 자처하는 데이비드 브룩스와 달리 뉴욕타임스의 진보적 논조를 수용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빌 크리스톨이 네오콘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목소리가 큰 인물이 됐다.아버지가 갖지 못했던 영향력까지 확보했다. 이제 그는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지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그는 “지나치게 점잔 빼는… 어리석은… 어이없는… 사이비…” 운운하며 한참 비난한 뒤에야 “그러나…”라며 지지를 표했다. 비판자들은 네오콘의 교묘한 처신이라며 비난할지 모른다.아프간전이 잘 풀리면 자신들이 공로를 챙기고, 일이 잘못되면 민주당의 우유부단과 실행 과실에 그 탓을 돌려도 면피가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셔널 인트레스트지의 제이컵 하일브런이 지적했듯이 네오콘의 이념이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에도 파고들었다는 조짐은 아닐까?오바마 행정부의 한 관리는 네오콘이 행정부의 정책,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관련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코웃음을 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옳았음이 입증됐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지지하던 부시 행정부가 애초에 일을 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그러나 두 곳에서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속옷 자폭 테러 기도사건이 터지고, 이중첩자의 폭탄 테러로 CIA 요원들이 목숨을 잃고, 이란의 핵개발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중동과 세계 도처에서 문제가 더욱 다루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국민은 외교와 협상, 뉘앙스에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질지 모른다.국내 문제에서 오바마에게 실망했듯이 말이다. 신보수주의는 건재하다. 단호한 결의와 확신으로 인해 그 매력은 더욱 빛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네오콘이라는 명칭은 좀 더 그럴싸하게 바뀔지 모른다.

2010.02.02 14:04

18분 소요
2009 막걸리 찬가

산업 일반

연일 막걸리 찬가가 퍼진다. 일본 열도가 막걸리에 흠뻑 취했다고 호들갑이다. 언뜻 보면 와인을 뛰어넘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막걸리 열풍의 허와 실을 제대로 진단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막걸리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넘어야 할 과제를 냉정하게 짚었다. 아울러 막걸리의 강점을 명사들의 입을 빌려 재해석했다. 막걸리 열풍이 강타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 막걸리 브라보!!‘2009 공학교육연구 국제학술회의’(8월 26일 개최)를 한 달여 앞둔 7월 중순. 전통주 제조업체 국순당 측은 학술회의 관계자를 찾아가 이렇게 제안했다. “막걸리를 건배주로 하면 어떻겠는가?” 공학 석사들이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이 국제회의를 통해 막거리를 세계에 알릴 요량이었던 것.국순당은 반신반의했다. 사내에서도 회의론이 일었다. 제아무리 막걸리 열풍이 불고 있다 해도 막걸리를 선뜻 건배주로 선정하겠는가? 그간 와인에 밀려 국내 대회에서조차 건배주로 인정받지 못했던 막걸리 아니던가? 막걸리 건배주를 제안한 지 일주일 후, 학술회의 관계자로부터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OK.” 숨어 있던 막걸리의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 국순당은 환호했다. “막걸리 브라보!”# 막걸리, 와인 사냥8월 말, 막걸리 판매량이 와인을 제쳤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편의점 GS25의 자료를 보면 올 1월 1일부터 8월 24일까지 전국 3700여 개 점포에서 와인보다 막걸리가 많이 팔렸다. 주목되는 것은 신장률. 이 기간 막걸리 매출은 전년 동기비 69% 성장한 반면 와인은 0.3% 신장하는 데 그쳤다.와인의 높은 벽, 안방에선 넘지 못할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막걸리 행진곡이 귀청을 울린다. 우리 토종술의 애달프고 한이 서린 곡조가 아니다. 경쾌한 리듬으로 소비자를 춤추게 한다. 이젠 골프장·카지노·고급 호텔에서도 막걸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경쾌한 리듬의 막걸리 행진곡 이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퓨전 막걸리 집은 연일 문전성시다. 형형색색의 퓨전 막걸리가 여심을 사로잡은 덕이다. 이만하면 막걸리의 화려한 부활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막걸리의 최근 실적은 실제로 상승세를 탄다. 막걸리는 지난해 17만5398kL가 생산됐는데, 2003년(14만kL)보다 25% 증가한 수치다. 그만큼 잘 팔렸다는 얘기다. 막걸리 업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서울장수막걸리는 올 상반기 전년 동기비 38% 늘어난 6175만2828병을 출고했다. 이 기간 출고액은 429억원에 이른다. 전통 막걸리 이화주·미몽 등을 생산하는 국순당도 마찬가지. 올 상반기 매출은 이미 지난해 기록을 뛰어넘었다. 이에 따라 이 회사는 5%에 불과하던 막걸리 비중을 10%까지 늘릴 방침. 이동막걸리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동주조 역시 지난해 74억원의 매출을 올려 전년비 15% 성장했다. 국내뿐 아니다. 해외매출도 증가추세다. 관세청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막걸리 수출량과 금액은 지난해 동기비 각각 16%, 13% 늘었다. 특히 일본에서 강세다. 지난해 일본에 수출된 막걸리량(4891t)이 일본이 자랑하는 사케의 수입량(1866t)을 넘어섰을 정도. 국순당의 사례도 대표적이다. 국순당은 올 상반기 일본에 15만6000병을 팔았는데, 이는 지난해 일본 수출량(15만200병)을 넘어선 기록이다. 국순당 고봉환 팀장은 “이런 추세라면 100% 성장이 확실해 보인다”고 했다. 혹독한 불황기, 막걸리가 뜨는 이유는 뭘까? 흥미롭게도 답은 질문에 있다. 막걸리 판매를 부추기는 것은 다름 아닌 불황이다. 막걸리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A편의점에서 파는 B막걸리(750mL)는 병당 1300원에 불과하다. 350mL들이 C소주(1450원), 355mL들이 D캔맥주(1700원)보다 (같은 용량으로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 싸다. 경기침체로 지갑이 얇아진 서민들이 막걸리를 찾는 이유다. 웰빙 바람도 한몫 톡톡히 한다. 막걸리는 자연발효식품. 생막걸리의 경우, 일일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 10여 종이 함유돼 있다. 발효주인 덕분에 효모와 유산균도 많다. 신라대 배송자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항암효과도 있다. 게다가 맛까지 일품이다. 톡 쏘는 막걸리 특유의 맛은 세계 어떤 술도 흉내 내기 어렵다. 발효과정에서 탄산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막걸리(750mL)에 함유돼 있는 탄산량은 2.5VOL. 1.5L들이 콜라에 들어있는 탄산량의 25% 수준이다. 광화문에 위치한 식당에서 직장인들이 막걸리로 건배를 하고 있다. 와인 장점 모두 가진 막걸리다양성은 막걸리의 또 다른 강점 중 하나다. 생막걸리는 기본 메뉴. 최근엔 인삼·잣 막걸리에 이어 각종 과일 막걸리도 인기 만점이다. 막걸리의 가능성은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맛, 종류, 영양이 빠지지 않는 술이다. 서울대 김난도(소비자학) 교수는 “와인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막걸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막걸리 열풍을 차분하게 짚어봐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장점만큼이나 한계가 많은 술이 바로 막걸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막걸리 열풍의 허와 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일부 전문가가 벌써부터 우려의 시각을 내비치는 이유다. 열풍의 뒤끝엔 항시 거품이 도사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난도 교수도 “막걸리의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극복해야 할 한계도 많다”며 “막걸리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가 무책임할 때가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막걸리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일침이다. 그럼 막걸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뭘까? 품질 및 등급관리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막걸리를 와인처럼 관리하자는 말이다. 통일된 브랜드도 필요하다. 막걸리 예찬론자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는 “중소기업이 세계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선 미래가치가 훌륭한 상품이 있어야 한다”며 “막걸리를 일정한 브랜드로 묶을 수 있다면 한류의 효자상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기한이 짧다는 단점도 해소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막걸리다.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효모를 죽인 살균 막걸리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하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효모를 죽인 탓에 생막걸리의 최대 장점인 청량감이 떨어진다. 살균 막걸리는 와인·청주보다 식이섬유가 많을 뿐 건강적 효용은 많지 않다(그림 참조). 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박사는 “한계가 많은 살균 막걸리보단 생막걸리로 도전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관련기사 38~39면). 우후죽순처럼 난립해 있는 막걸리 제조업체도 정비해야 한다. 2008년 현재 막걸리 제조업체는 780곳에 이른다. 면허를 받은 주류제조업체(1467곳) 가운데 50% 이상이 막걸리를 제조한다. 특히 1991년 막걸리 주류세를 10%에서 5%로 낮춘 이후엔 저가 막걸리를 생산하는 업체가 더욱 많아졌다는 지적이다. 주목할 점은 이들 대부분이 푼돈 벌기에 혈안이 돼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1970년대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카바이드(탄화칼슘)를 넣어 저질 막걸리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영세기업들이다. 요즘도 다를 바 없다. 막걸리 수출업체 E기업 관계자의 한탄이다. “일본에서 막걸리 열풍이 불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영세기업들이 (일본시장에) 저가 막걸리를 공급하겠다고 나선 탓에 시장이 혼탁해졌다. 이러다간 수십 년 쌓아온 신뢰마저 무너질 판국이다.” 막걸리 제조업체를 꼼꼼하게 관리해야 하는 까닭이다. 권위있는 생산자 단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열풍 꺼지면 거품만 남아 과제는 더 있다. 막걸리가 값싸다는 인식을 하루빨리 털어야 한다. 사케나 와인처럼 고급화 전략이 상책이다. 그래야 제품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신규 시장 또한 개척할 수 있다. 김난도 교수는 “새롭게 시장을 개척하는 상품은 대부분 하향 전파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고급 소비자를 뚫어야 시장 전체를 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도 “일본에서 막걸리를 칵테일로 즐겨 마시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고급술로 인식된다면 섞어 마시기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박 소장은 “이번 막걸리의 일본 열풍이 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막걸리의 고급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관련기사 36~37면). 오랜 침묵을 깨고 막걸리가 부활의 날개를 폈다. 막걸리 열풍은 제법 강하고 세다. 현해탄까지 건널 기세다. 그러나 이 열풍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단점을 해소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열풍은 금세 거품으로 바뀐다. 그러면 경제적으로 오히려 손해다. 지금이야말로 막걸리의 장단점을 면밀하게 분석할 때다. 다양한 컨셉트도 구체화해야 한다. 성공의 신은 디테일이지 않은가? 이를 게을리 한다면? 흥겨운 리듬의 막걸리 블루스가 돌연 곡(哭)소리로 바뀔지 모른다.

2009.08.31 11:40

6분 소요
[The Technologist] 블로거들이여! 미몽에서 깨라

산업 일반

지난 2년 동안 블로그를 사업으로 키울 생각만 하고 살아왔다. 쉴 새 없이 내 사이트 ‘스티브 잡스의 비밀일기’에 하루 10~20개씩 글을 올렸다. 택시 안에서도 블랙베리를 이용해 올리고, 한밤중에도 아이디어가 떠올라 잠에서 깨면 곧바로 글을 올렸다. 이 무지개의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황금 단지가 묻혀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이 계속 그 환상에 끼어들었다. 첫 번째 깨달음은 2007년 8월 얻었다. 당시 뉴욕타임스가 그때까지 비밀로 했던 나의 정체를 드러내는 기사를 실었다. 그날 하룻동안 50만 명 이상이 내 사이트를 방문했다(내 블로그 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난 구글의 ‘애드센스 프로그램’ 덕분에 100달러 남짓한 돈을 벌었다. 150만 명이 사이트를 방문했던 8월 내내 무려(?) 1039.81달러를 벌었다. 내친 김에 좀 더 돈벌이가 되는 광고계약을 했다. 그러나 본업을 그만둬도 좋을 만큼 충분한 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결국 블로그를 폐쇄했다. 금전적 이유라기보다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였다. 난 정력이 소진된 느낌이 들었다. 몸무게도 처음 블로그를 열었을 때보다 9㎏쯤 불어났다. 블로그로 할 수 있는 멋진 일이 많겠지만 큰돈을 버는 일은 어렵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다. 다른 블로거들도 초기에 느끼던 행복감이 피로감으로 바뀌면서 나와 똑같은 하향곡선을 긋는 듯하다. ‘테크크런치’ 블로그 제국으로 매월 600만 명의 독자를 유치하던 마이클 애링턴이 3년의 논스톱 행진 끝에 한 달간 휴식에 돌입했다. 본인 말로는 지치기도 했거니와 블로그 세계의 황당함(그는 스토킹을 당하고 협박도 받았으며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이었다. 1년 전부터 회사 매각을 염두에 뒀다가 자신이 부르는 값(1억 달러라는 소문이 있다)을 내겠다는 원매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쉬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잘나가는 블로그 네트워크 고커 미디어는 최근 3년 동안 고전해온 IT 블로그 ‘밸리왜그’의 작가 중 한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해고했다. 1월엔 우파 정치 블로거들의 집단인 파자마스 미디어가 자체 광고 네트워크를 폐쇄했다. CEO 로저 사이먼은 그것이 “3년 동안 돈만 잡아먹었다”고 말했다.2005년 하반기에 ABC 뉴스 웹사이트에 글을 기고하는 어느 칼럼니스트는 2010년이면 블로그 세계가 “새로운 대기업과 미디어 스타 집단”을 만들어내고 “남보다 한발 앞서 이들 기업에 동참하거나 투자하는 사람은 수십억 달러를 벌 것”이라고 예측했다(블로그 세계의 일부 요소를 비판한 내 기사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가 한 말의 앞부분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그런데 웬 수십억 달러?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블로그 광고에 쓰인 돈은 통틀어 봐야 고작 4억11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인터넷 광고에 밀려든 237억 달러에 비하면 말 그대로 새 발의 피다. 그런가 하면 이 돈 역시 미국에서 모든 형태의 광고에 지출된 돈 2768억 달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012년이면 블로그 광고비가 7억4600만 달러에 이르고 온라인 총 광고비는 32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이마케터가 내다봤다. 지난해엔 블로그 광고보다 e-메일 광고에 더 많은 돈이 쓰였다. 그렇다고 e-메일이 거금을 벌어들일 차세대 미디어 사업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었던가? 블로그 검색엔진인 테크노크라티는 광고를 게재하는 블로거들이 연평균 5060달러를 번다고 추산했다. 아직은 이들이 페라리를 살 만큼은 안 된다. 광고주들이 블로그를 기피하는 이유는 우선 너무나 예측이 불가능한 데다 대규모 집단이라 할 만큼 많은 독자를 끌어 모으는 블로그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블로그가 있더라도 경쟁이 워낙 치열해 광고비가 가련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사회 미디어를 수익 창출을 위한 모델로 삼는 데 대한 기대치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이마케터의 분석가 폴 버나가 말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정이 더욱 꼬이지만 진짜 문제는 “짭짤한 수익을 창출하는 명확한 사업모델이 없다는 점”이라고 버나가 말했다.물론 그중엔 작은 금광이라고 할 만한 블로그도 있다. 고커 미디어가 운영하는 전자용품 전문 블로그 ‘기즈모도’는 지난 1월 9800만 건의 페이지 조회라는 기록을 세웠고 “수익성이 매우 좋다”고 고커의 CEO 닉 덴튼이 말했다. 한 부부가 팀으로 운영하는 개인 일기 블로그 ‘두스’는 연 50만~100만 달러를 번다고 그들의 광고접수 업무를 대행하는 페더레이티드 미디어가 밝혔다. 애링턴은 테크크런치가 2007년 300만 달러를 벌었고 2008년엔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는 1년 전보다는 값이 덜 나가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를 내다 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 성공사례를 보고 블로그 세계로 계속 돈이 몰린다. 허핑턴 포스트는 몇 달 전 2500만 달러를 확보했다. 편집장 티나 브라운이 이끄는 데일리 비스트는 배리 딜러가 소유한 IAC/인터액티브코퍼레이션에서 자금을 지원해 지난해 10월 출범했다. 그러나 허핑턴 포스트와 데일리 비스트는 진정한 블로그가 아니다. 그 회사들은 미디어 기업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그중 일부 블로거의 글을 게재할 뿐이다. 일부 특급 블로거는 자기 작품을 ‘수입원’으로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욕을 많이 먹는 ‘주류 미디어’로 복귀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치 논평가 앤드루 설리번이 그런 경우인데 그의 블로그 ‘데일리 디시’는 지금 월간지 애틀랜틱먼슬리의 웹사이트에 실리고 있다. 짐작하건대 설리번은 번듯하게 살지 않을까? 그나저나 잠옷 바람으로 블로그를 써서 수백만 달러를 번다는 사나이의 꿈은 어찌 됐을까? 또는 그 잠옷 바람의 사나이에게 투자해 수십억 달러를 거머쥐겠다는 투자자들의 꿈은? 바로 그런 꿈을 꿨던 내 말을 경청해 보시라. “그 꿈이 실현되면 좋겠지만 현재로선 또 하나의 하이테크 동화로만 보일 뿐이다.”

2009.02.17 16:17

4분 소요
다시 ‘절약이 미덕’인 시대로!

산업 일반

요즘 미국에선 국내총생산(GDP)이 줄고 경제 낙관론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미국인들은 과소비의 미몽에서 깨어나 차입과 낭비 대신 저축과 투자를 시작하라는 얘기를 듣는다. 사람들은 워런 버핏의 충고를 더 경청하고 도널드 트럼프의 말은 덜 듣는다. 물론 호시절이 되돌아오면 절약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잦아든다.1994년 기업 구조조정 한파가 불어 닥쳤을 때 나는 미국인들이 구두쇠로 변해 가는 경향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지출을 극도로 줄이던 풍조는 닷컴 붐이 일면서 다시 사라졌다. 2001년 9·11 테러와 겹친 경기침체 땐 사람들이 절약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TV에 나와 국민에게 여행을 다니라고 촉구하기도 했다.뉴욕 시민들은 침체된 도심 상권의 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게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역사학자 바브러 대포 화이트헤드는 최근 발표한 논문 ‘새로운 절약 운동을 위해(For a New Thrift)’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몇 년간 미국 지도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으로 지속적인 과소비를 국민에게 권장하기로 작심한 듯하다.”화이트헤드는 중산층과 저소득층 미국인의 저축을 어렵게 만드는 정부와 기업의 반(反)절약 캠페인 사례를 예시한다. 예컨대 신용카드 사용 권유, 도처에 생겨난 카지노, 주정부의 복권사업, 초단기 고리대금업자 등이 “압도적으로 많이 늘어났다.” 대형 은행들은 마구잡이로 대출해 주면서도 학생들의 절약정신을 고취하는 저축통장은 발급하지 않으려 한다.저축을 가로막는 거시경제적 장애물들은 더 견고한 듯하다. 1999년 이래 평범한 가정의 실질 소득은 높아지지 않은 반면 건강보험, 에너지, 식품, 주택 등 기초 상품의 가격은 치솟았다. 뉴욕 소재 두뇌집단인 데모스의 정책 담당 책임자 태머러 드라우트는 “각종 설문조사에 따르면 신용카드 부채가 증가한 이유의 상당 부분은 일자리 상실, 주택 수리비, 건강보험 등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드라우트는 ‘허리끈 졸라매기(Strapped: Why America’s 20- and 30-Somethings Can’t Get Ahead)’의 저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호황에는 자산 가치도 부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따르면 일반 가계와 비영리단체의 순자산은 2002년 말 39조2000억 달러에서 2007년 3분기 58조7000억 달러로 급증했다.반면 개인 저축은 극히 저조해 2003년 1749억 달러에서 2007년 574억 달러로 급감했다. 그러나 장부상 이득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바로 그것 때문에 망할 수도 있다. FRB에 따르면 2007년 9월~2008년 6월 미국인들의 순자산 가치는 2조7000억 달러 줄었다. 그 후엔 훨씬 더 줄었을 것이다.분명히 우리는 더 많이 저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말했듯이 수요가 약한 시절엔 절약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경제활동에서 소비활동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70%나 된다. 여행, 주택 재단장, 외식 등으로 돈을 쓰면 우리의 친구와 이웃들의 일자리가 보전된다.국민에게 세금을 환급해 주는 경기부양책에서 가장 크게 우려되는 부분은 미국인들이 환급 받은 300달러를 곧바로 지출하지 않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저축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민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은 절약을 삼가야 할 이유도 있다. 수입 상품에 대한 미국인들의 왕성한 소비 욕구 덕분에 중국에선 매년 수천만 명의 농민이 최저 생활 수준에서 벗어나 공장 일자리를 찾는다.국가적 위기가 저축 심리를 자극한 때가 있었다. 화이트헤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축률이 25%로 치솟았다고 소개한다. 정부가 “시민사회의 지도자들과 협력해 전쟁 수행을 위한 저축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면서 전시공채 (戰時公債) 형태로 구체적인 저축 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늘날엔 절약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삶을 즐길 줄 모르는 수전노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미국가치연구소(IAV) 소장이자 ‘절약 백과사전(Thrift: A Cyclopedia)’의 저자인 데이비드 블랭큰혼은 “절약의 목적은 무조건 지출을 줄이는 게 아니라 인생을 즐기는 데 있다”고 말한다.‘절약 백과사전’은 절약의 미덕을 강조한 수많은 명언을 집대성한 매력적인 책이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절약정신을 되찾을 이유가 있을까? 있을 것이다. 자기 집의 가치 상승과 황금 노년을 보장하는 401(k) 은퇴연금을 믿고 소비를 주도해 왔던 베이비붐 세대는 저축을 늘려야 한다.그러나 씀씀이 큰 태도 역시 미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다.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은 엄청난 재산을 모은 뒤 보란 듯이 써 버린다. 힘들게 번 돈으로 주식을 매입해 참을성 있게 재산을 모은 워런 버핏 같은 사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빌린 돈으로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화려한 빌딩을 지으며 참을성 없게 재산을 모은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2008.10.28 16:31

3분 소요
A Tool of Revolution

산업 일반

The Technologist A Tool of Revolution On April 6 in El Mahalla, Egypt, thousands of people showed up for a demonstration in solidarity with striking textile workers to protest skyrocketing food prices. It gave many participants a nostalgic whiff of the bread riots of 1977, but what enabled that unexpected return to the past was a phenomenon of the future: a Facebook group for the event numbering more than 75,000 members. The precedent emboldened activists to start another Facebook group to stage a second protest to coincide with Hosni Mubarak's 80th birthday on May 4. With tens of thousands flocking to the Facebook page, activists were anticipating another day of triumphal 1.havoc. On May 4, however, the streets of Cairo were quiet. What happened? Facebook was supposed to be a revolutionary tool of organizers, a powerful new way of tapping a global support network of dissidents and uniting them in opposition to harsh governments. In Egypt, however, the 2.agitators are a 3.disillusioned bunch. The failure of their "click-here activism," says a Cairo human-rights expert who spoke anonymously because of the sensitivity of the issue, has shown "the limitations of social-networking sites as a tool for organizing real-world protests." This kind of disappointment is common to new technologies, which often seem to change the world and at the same time leave it much like it was before. As the Egyptian activists learned, a social network, just by virtue of being online, can't always hold together a "real world" movement. Facebook creates opportunities - it gives people the chance to write their own golden ticket - but it is not to be confused with the tickets themselves. So what exactly is Facebook good for, and what are its limitations? When what you want is 4.exponential growth for your cause, nothing beats Facebook: the network is designed for a good idea to spread faster and farther than a single person can ever 5.fathom. Think of a Facebook group as a growing body of water. For that water to accumulate pressure, it needs more infrastructure - the better constructed the 6.conduit, the more directed and powerful the flow. While 19-year-old Alex Bookbinder's group supporting Burma's persecuted monks swelled to more than 300,000 members, the organizers sought additional channels for their cause. Partnering with formal advocacy groups Amnesty International and the Burma Campaign UK, they successfully coordinated marches worldwide last fall, sending thousands onto the streets in London, Paris, Melbourne, Seoul, Taipei, Vienna and Washington, D.C. Mark Farmaner, who directs the Burma Campaign UK, affirmed that the Facebook activists transformed the global effort: "They're able to do things that we can't." At its core, Facebook is built on information exchange, or, as founder and CEO Mark Zuckerberg will tell you, "relationships." When it comes to solidifying already existing relationships, it can be invaluable. This was exactly what a Canadian group of small investors needed. "Canaccord and Other ABCP Clients," popularly known as "grannies on Facebook," lost their retirement savings when their brokers blew their investments on asset-backed commercial paper. Their Facebook group helped them share grievances and make an informed argument. In April, "300 raging grannies" crashed a financial-restructuring meeting in Vancouver, reported Brian Hunter, the group's creator, where their opponents "got their heads handed to them." Canaccord and other investment brokers pledged to reimburse the grannies in full. The strategic brilliance of Facebook lies in the fact that it is a combination of the cyberworld and the real world. When Facebook revolutions work, it's not because activists manage to bridge the social network and the real world. Facebook is not a cyberworld; it is the real world expanded on the Web. "Facebook is there to help people share information the same way they do in the real world," says Zuckerberg. "On Facebook, these real connections become more efficient and people get more value out of all their relationships." Although the groups themselves are composed of real people, the connection happens in cyberspace - with lightning speed and no regard to physical boundaries. If the basic unit of the Internet is the byte, or character, then Facebook's unit is the individual - creative, dynamic, proactive. This unit itself is something of eminent value, upon which Facebook can trade 7.ad infinitum with every connection made, every 8.blip of activity broadcast across the network. Facebook may be the messenger, but it's the users who write the message. In fact, they can write entire applications and run them on a platform that is, by design, connected to millions of people, of like and unlike minds. Clearly the Egyptian authorities recognized the organizational power of Facebook, which is why 27-year-old Ahmed Maher Ibrahim, an organizer of the Facebook group for the failed strike, was taken to a police station for 12 hours and beaten up. At one point, officers demanded that Ibrahim hand over the password to the Facebook group. How much the authorities understood about Facebook, and ultimately whether they'll be able to stem its use as a tool of activists, are hard to say. When Facebook delivers a message that brings Egyptians out into the streets, we may find out. 시위도 인터넷이 주도한다 지난 4월 6일 이집트 엘 마할라에는 수천 명이 섬유 노동자 파업 대열에 합류해 식품 가격 급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많은 참가자는 1977년 빵값 인상 사태(빵값 상승에 불만을 품은 이집트 국민이 폭동을 일으켜 최소 79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다친 사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뜻하지 않은 역사의 반복은 최첨단 기술 덕분에 가능했다. 이 집회 주도자들이 온라인 SNS(인맥구축서비스) 웹사이트 페이스북에 만든 그룹에 무려 7만5000명이 가입한 것이다. 뜻밖의 성공에 고무된 운동가들은 호스니 무바라크 이라크 대통령의 80번째 생일인 5월 4일에 두 번째 시위를 계획하는 그룹을 다시 만들었다. 수만 명이 가입하자 운동가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을 시끄럽게 할 1.소동이 일어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5월 4일 당일이 되자 카이로의 거리는 조용했다. 어쩐 일인가? 페이스북이야말로 반체제 운동가들이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부의 독선에 대항할 수 있는 혁명적인 수단이 아니었나? 하지만 적어도 이집트에서는 2.시위 세력의 3.착각으로 밝혀졌다. 익명을 요구한 카이로의 한 인권 전문가는 이번 온라인 운동의 실패가 “SNS 사이트가 실제 시위 규합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첨단 기술에 대한 이런 실망감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세상을 뒤바꿀 듯한 기대감을 주다가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실망이다. 이집트 운동가들의 경험처럼 온라인의 SNS가 항상 ‘현실 세계’의 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페이스북은 기회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대박’을 터뜨릴 만한 기회를 준다. 하지만 ‘대박’ 그 자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페이스북의 강점과 한계는 무엇일까? 사실 사회운동 지지세력의 4.기하급수적인 증가를 원할 때 페이스북만한 게 없다. 우리가 5.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멀리 정보를 퍼뜨린다. 페이스북 그룹은 점점 불어나는 물로 생각하면 된다. 물이 차올라 압력이 축적되려면 기본적인 뼈대가 잘 세워져 있어야 한다. 6.수도관이 잘 지어져 있으면 물이 한 방향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19세의 알렉스 북바인더가 미얀마의 박해 받는 승려를 돕기 위해 만든 그룹은 순식간에 30만 명의 회원을 불러모았지만 운동가들은 그와는 별도의 채널을 통해 운동을 추진했다. 정식 NGO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버마 캠페인 UK와 손을 잡고 지난겨울 전 세계적인 가두 시위를 성공리에 마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런던, 파리, 멜버른, 서울, 타이베이, 빈, 워싱턴 DC의 거리를 메웠다. 버마 캠페인 UK의 마크 팔마너 사무총장은 페이스북 운동가들이 세계적인 시민 운동을 변화시켰다고 단언했다. “우리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은 해낸다.” 페이스북은 정보 교환을 기반으로 한다. 아니, 창업자이자 CEO인 마크 주커버그에 따르면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기존 인간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있어 페이스북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캐나다의 한 개미투자자 그룹도 페이스북의 덕을 크게 봤다. “페이스북의 할머니들”로 널리 알려진 ‘캐나코드와 기타 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 고객’ 그룹 회원들은 은퇴자금을 모두 잃었다. 투자를 위탁한 금융기관들이 자산담보부 기업어음에 투자해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페이스북 그룹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끼리 서로 억울한 심정을 나누고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 됐다. 지난 4월 “300명의 격노한 할머니들”이 밴쿠버에서 열린 한 금융업계 회의장에 쳐들어가 투자기관 관계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고 그룹 개설자 브라이언 헌터가 말했다. 캐나코드를 비롯한 투자기관들은 그 노인들에게 투자 손실액을 전액 배상하겠다고 약속했다. 페이스북의 전략적 장점은 사이버 세계와 현실세계의 결합이라는 점이다. 페이스북 혁명의 성공 비결은 운동가들이 SNS 사이트와 현실세계를 잘 연결시켜서가 아니다. 페이스북은 사이버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가 웹으로 확장된 것이다.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의 목적은 온라인에서도 실생활에서 하듯 정보를 주고받도록 돕는 일”이라고 했다. “페이스북을 쓰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더욱 효율적이고 인간관계에서 더 많은 가치를 얻게 된다.” 그룹 자체는 실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만남은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난다. 물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번개 같은 속도로 말이다. 인터넷의 기본 단위가 바이트나 글자라면 페이스북의 단위는 창의적이고 역동적이며 적극적인 개인들이다. 이 단위 자체가 엄청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페이스북은 사람 사이의 연결과 네트워크상의 활동 8.기록 등 사람을 단위로 7.무한한 양의 정보를 교환한다. 페이스북이 전달자가 되지만 전달되는 메시지는 사람이 작성한다. 실제로 페이스북의 회원들은 온갖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해 다양한 부류의 수백만 명이 연결된 하나의 플랫폼에서 가동할 수 있다. 이집트 당국도 페이스북의 조직력을 알아챈 게 틀림없다. 이집트 경찰은 이번에 실패한 시위 그룹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아메드 마에르 이브라힘(27)을 체포해 12시간 동안 경찰서에 감금하고 구타했다. 이브라힘에게 페이스북 그룹의 패스워드를 대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페이스북을 얼마만큼 이해하는지, 또 페이스북을 이용한 시위 모의를 막을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페이스북을 매개체로 이집트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날 그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 NOTES 1.havoc: (자연력·폭동 따위에 의한) 대파괴, 소동, 황폐. Ex. The floods created havoc throughout the area(홍수로 그 지역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2.agitator: 선동자, 운동자, 유세자. Ex. It is unjust to label him as a mere agitator(그를 단순한 선동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3.disillusion: …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다, 환멸을 느끼게 하다. 4.exponential: 속도를 더하는, 기하급수적인. 5.fathom: 깊이를 재다, 탐색하다. 6.conduit: 수도관, 도랑, 수로. 7.ad infinitum: 무한히, 무궁하게, 영원히. Ex. I don’t want to go on working here ad infinitum(나는 여기서 영원토록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 8.blip: 삑 하는 소리, 기록, 메모.

2008.07.29 13:31

9분 소요
마호메트 웃는 얼굴로 부활할까

산업 일반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한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코란이 ‘지하드(성전)’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되는(그 과정에서 자살도 허용되는) 살인면허를 준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는 자신의 테러운동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란엔 그런 말이 없다. 이슬람 신앙의 위대한 학자나 설교자들도 그런 식의 해석을 내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빈 라덴은 코란과 선지자 마호메트의 말씀에 담긴 계시를 왜곡하는 일에 착수했다. ‘하디스’로 알려진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대체로 무슬림 세계의 실제 종교 관행을 좌우한다. 사우디 출신의 이 백만장자 빈 라덴은 선전포고 성격의 격문을 쓰고 이슬람 경전 여기저기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인용한 ‘파트와(율령)’를 내린 뒤 의심스러운 학자들을 동원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했다. 그런 주장은 신학과는 무관한 정치 선전이었지만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유용했다. 그가 선동한 성전의 말세적 개념과 9·11을 통해 보여준 그 실상은 서방 세계든 이슬람 세계든 신앙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지배적 비전이 됐다. 이제 상황이 바뀌고 있다. 빈 라덴이 자문을 구했던 일부 학자를 포함해 주요 무슬림 사상가가 그의 성전 비전을 거부한다. 한때 그에게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헤이든 CIA 국장은 “근본적으로는 알카에다의 미래 비전을 진심으로 반긴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동시에 빈 라덴과 무관하고 그 이전의 전통주의자들과도 무관한 새로운 이슬람 비전이 모습을 갖춰간다. 무슬림 세계 내부에서 그동안 불변의 신앙교리로 보였던 것을 재검토하고, 엄밀한 진리로 간주됐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부 이슬람 학파에 의해 수백 년 전 닫혀졌던 해석의 문을 활짝 열려는 움직임이 탄력을 받는다. 가장 방대한 연구는 터키 앙카라를 무대로 활동하는 학자 집단에 의해 주도된다. 이들은 올해 안으로 하디스 신판을 출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선지자의 말씀으로 알려진 어록 17만 개를 모두 수집했다. 이것들은 일상생활의 지침으로서, 또 코란의 일부 난해한 내용의 열쇠로서 마호메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일화의 상당수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왔다. 그 이야기를 전했거나 혹은 훨씬 나중에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마저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때때로 “이슬람의 보편적 가치관을 자기 시대와 장소의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관과 혼동했다”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앙카라 대학의 신학교수 메흐멧 고르메즈가 말했다. “하디스 어록조차… 어떤 맥락이 있다. 우리는 모든 어록에 고향을 되찾아주려고 한다.” 4년 전 터키 종교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하디스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한 메흐멧 아이딘은 선지자 마호메트가 살았던 7세기의 생활이 지금과 사뭇 달랐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하디스 중엔 여성이 혼자서 여행을 해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것과 기타 다른 말씀을 핑계 삼아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신앙 명령이 아니라 특정 시대와 장소의 안전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고르메즈가 말했다. 실은 마호메트가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을 추억하며 여성이 예멘에서 메카까지 혼자 다녔던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부분도 있다. 첫 3세기 동안 “이슬람은 그리스, 이란, 인도 문화와 뒤섞였고 그런 뜻밖의 만남을 통해 학자들은 이슬람을 새로운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다”고 고르메즈가 말했다. “당시엔 이슬람을 재해석하는데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진보 성향의 무슬림 사상가들이 과거에도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그들은 국외자들이거나 때로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한편 이번 터키의 프로젝트는 이슬람주의 뿌리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성공하고 민주적으로 뽑힌 정당인 집권 AK당(정의개발당)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다. 참여 교수들은 자신의 작업이 이슬람 개혁을 상징하지는 않는다고 곧바로 부인했다. 그들 중에는 종교개혁가도 없고, 신봉하는 논제도 없다. 자신들의 행위는 거룩한 경전을 “민주주의, 인권, 여권, 보편적 가치 같은 현대적 관념에 맞게 다시 생각하거나 다시 이해하는 것”이라고 고르메즈가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그 근원의 신뢰도로 보건대 그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지녔다. 지난날 급진주의를 용인한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많은 국가가 자국의 안보는 중용사상을 키우는 데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우디 국왕 압둘라는 나라의 녹봉을 받는 약 1만 명에 달하는 급진파 성직자의 지나친 원칙들을 억제하려고 한다. 정부가 기본 교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국왕의 한 측근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단지 자신들의 생각과 충고를 국민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를 두고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고 해 두자.” 한 여인이 사우디의 종교 기준에 비해 약간 과한 옷차림을 했다면 그렇다고 말해 주는 정도로 족하다. 굳이 매춘부라고 욕하거나 벌을 주겠다거나 혹은 그 이상의 위협을 가할 필요가 없다. 불과 유황의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자는 취지다. 사우디 청년들은 그 천벌이 두려워 이라크 등지의 성전에 나섰다.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이 이 새로운 메시지를 기다리는 듯하다. 늘어나는 중산층은 이제 공적·사적 품행의 지침으로서 경건한 농민생활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종교의 원칙은 내내 같지만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바뀌었다”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말했다. 그의 정부는 터키의 EU 가입을 목표로 뛰고 있다. “시골이 도시화되면서 재산이 늘고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신정국가인 이란에서도 뮬라 모센 카디바르(49)는 모든 국정 운영의 결정권을 성직자가 쥐는 ‘벨라야트-에-파키’라는 이란 체제는 크게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슬람의 중앙집권적 해석이며 비민주적이다. 지상에 사는 보통 인간들에 대해선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경찰이 그의 연설을 자주 취소시킨다. “인기가 좋아 교통정체와 소란을 야기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당국자들이 말했다. 그 와중에 빈 라덴의 변화를 위한 명령들은 죽음과 파괴만을 불렀다. 변절자로 생각되거나 혹은 단순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다른 무슬림들에게 자신의 분노와 폭탄을 겨냥했다. 그 결과 고립을 자초했다. 이라크에서 알카에다 세력은 궁지에 몰렸고 폭력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전락했다. 파키스탄의 여론조사에서는 자살폭탄테러 지지율이 5년 전의 30% 이상에서 요즘은 9% 미만으로 떨어졌다. 빈 라덴이 오래전부터 존경해 온 사우디 학자 셰이크 살만 알우다는 지난해 공개서한에서 이렇게 따졌다. “오사마 형제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알카에다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노약자와 여성이 살해되고 집을 잃었는가?” 빈 라덴판 성전을 향한 가장 거센 공격은 성전주의자들 내부에서 진심으로 존경 받는 극소수 종교 사상가 중 한 명인 사이드 이맘 알샤리프의 입에서도 나왔다. 현재 이집트에 수감된 그는 알카에다의 2인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대학 동창이다. 이집트 교도소가 지난해 출간을 허용한 책에서 알샤리프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알카에다의 행동에 의해 어떻게 오염됐는지 적었다. “성전이란 이름으로 아녀자를 포함해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수백 명씩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알라의 눈에, 그의 율법과 백성의 눈에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알샤리프가 말했다. 빈 라덴에게 또다시 문제 하나가 생겼으니 바로 이슬람이다. With SAMI KOHEN in Istanbul and MAZIAR BAHARI in Tehran.

2008.06.10 11:01

5분 소요
[World Market View] 먼 미래 놓고 벌인 장밋빛 머니 게임

산업 일반

차이나 버블’이 붕괴하고 있다. 최근 6개월 새 상하이 증권시장 주가가 대략 40%나 급락했다. 지난해 10월 사상 최고치인 6092.12포인트에서 지난 주말 3580.15포인트로 미끄러진 것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던 주가가 지난해 4월 수준으로 돌아갔다. 상하이 증시 주변에선 3000선도 위험하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올림픽을 눈앞에 둔 중국 정부가 주가 급락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란 투자자들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락장 초기에 나왔던 ‘일시적 조정’이란 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중국 실물경제의 고도성장’ ‘차세대 세계경제 수퍼 파워’ 등 장밋빛 담론들이 무너져 내리는 주가 앞에서 아주 먼 미래의 공허한 얘기처럼 들린다. 대신 증시를 압박하는 악재들이 끊이지 않아 시장 불확실성이 높아진다. 그동안 비(非)유통주로 분류되던 정부 보유 주식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와 수급이 불안정하다. 대형 기업들은 앞 다퉈 기업공개(IPO)에 나서고, 기업들의 실적은 평균 예상치(18.8%)에 못 미쳐 이른바 ‘어닝 쇼크(Earning Shock)’까지 더해져 주가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시장 전체에 대한 비관 심리가 급격히 퍼져나간다. 헤지펀드의 귀재인 조지 소로스는 이를 “버블 조울증”이라고 말했다. “버블시기엔 장밋빛 미래만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다. 오르는 주가가 낙관론을 부추겨 오름세를 더욱 가파르게 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주가가 급락하면 떨어지는 주가 자체가 비관적인 전망을 더욱 강화해 하락세를 부추긴다”고 그는 설명했다. 중국 증시의 조울증은 선진시장보다 더 심한 편이다. 기관투자가 비중이 선진시장보다 낮은 탓으로 풀이된다. 전체 주식의 20~30%만을 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이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는 개인투자자 수중에 있다. 더욱이 개인투자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1년 새 처음 증시에 들어온 신출내기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2005년 6월 이후 ‘차세대 경제대국’이란 미(未)실현 꿈을 좇아 증시로 뛰어들었다. 중국 오지의 승려부터 첨단 IT문화에 빠져든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계층이 불나방처럼 증시로 달려들었다. 덕분에 2년 남짓한 기간에 주가가 1000에서 6000선으로 6배나 뛰었다. 그 기간 동안 증시는 몇 십 년 뒤에나 이룰 꿈을 눈앞에서 실현시켜 준 마법의 성처럼 비쳤다. 그런데 성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개인투자자들이 패닉에 빠져든 것이다. 하지만 중국 증시는 고전적인 버블 붕괴 풍속도라고 할 만하다. 1980년대 일본, 1920년대 미국, 1820년대 영국, 1640년대 네덜란드가 그랬다. 이들 나라의 국민은 요즘 중국인들처럼 장밋빛 환상에 취해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일본인들은 미국이 쌍둥이 적자로 병든 사자처럼 흔들리던 1980년대 일본이 세계경제의 중심이 될 거란 꿈에 취했다. 무역흑자와 외환보유액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엔화 자금이 세계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 순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게 바로 장밋빛 미래 전망이다. 당시 일본 노무라증권은 몇 가지 가설과 가정을 바탕으로 2010년께 일본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1920년대 미국인들도 비슷했다. 영국 경제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미국은 막대한 전쟁물자를 팔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미 기업들은 막강한 생산력을 뽐내면서 유럽의 경쟁 기업을 제치고 세계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바로 1927~1929년 8월의 재즈시대 버블이다. 근대 초기인 1640년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경제 중심으로 떠올랐을 땐 튤립거품이 발생했고, 영국이 기존 유럽의 경제패권을 쥐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을 제칠 가능성이 엿보이던 1820년대에도 주식회사 거품이 일었다. 과거 사람들처럼 중국인들도 조만간 일확천금의 미몽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뒤로는 한동안 차분하고 냉정하게 기업의 미래 실적이나 경제성장 전망을 재평가하게 된다. 마치 광란의 카니발을 끝낸 이들이 숙취를 이겨내며 일상으로 돌아가듯 말이다. 먼 미래 가치가 성급하게 반영된 군살이 빠지면 그 뒤로는 실현 가능한 미래 가치만이 주가를 지탱하게 된다. 시장의 정상화가 이뤄진다면 중국 주가는 기업 실적이나 경제성장 추세를 따라 ‘착하게’ 움직이게 될 것이다. 문제는 시장이 정상화되는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거대한 거품이 붕괴한 뒤 대략 4~8분기 정도 바닥을 다지는 기간이 찾아왔다. 그 순간까지 시장에선 반등과 추락을 거듭하면서 투자자의 인내를 시험하기도 한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은 대공황 직후 시장이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던 1929~33년에 투자원칙을 곱씹으며 투자 저서의 고전인 ‘증권분석’을 집필했다. 마치 참선하듯 말이다.

2008.04.08 11:20

3분 소요
할리우드 이단아 마침내 세상 떠나다

산업 일반

파란만장한 영화인생 마감한 개성파 감독 로버트 앨트먼 (1925~2006) 로버트 앨트먼은 관객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냉정한 인습타파주의자로서 감상주의를 비웃고, 장르의 법칙을 뒤집었으며 행복한 결말을 거부했다. 그런데 그의 걸작들을 보면서 왜 다른 감독의 작품과 달리 행복감을 느꼈을까? 1970년대 초 나온 마술적 연작(‘매케이브와 밀러 부인’ ‘기나긴 이별’ ‘캘리포니아 불화’ ‘내슈빌’)을 보면서 참으로 황홀한 느낌에 젖었다. 극장에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도취감으로 기분이 두 배는 좋아졌다. 여기에 예술의 신비한 연금술적 측면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설이 있다. 그 영화들은 겨울 같은 황량함, 실존적 무용(無用), 태평한 숙명론으로 끝나지만 심미적 황홀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앨트먼 영화에는 그만의 독특한 언어가 있다. 방황하는 롱테이크. 배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게 만드는 겹치기 대화, 관객들이 마음대로 골라보게 만드는 풍성하고 자연스러운 파노라마. 모든 장면을 치밀하게 사전 준비한 히치코크와는 정반대 기법이었다. 앨트먼의 영화는 필름 가장자리 밖으로 흘러나와 생활의 혼란상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는 느긋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고, 즉흥연기를 좋아하며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다. 마치 파티 주최자처럼 잔치를 벌여놓고는 카메라가 그 결과를 포착하도록 내버려뒀다. 출연진에게 명확한 지시를 잘 내리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전에 본 적이 없는 장면을 기대하는 내가 뭘 지시하겠는가”고 되물었다. 앨트먼은 감독이면서 동시에 관객이었으며, 영화적 진실의 순간을 창조하는 동시에 발견하면서 그가 느낀 즐거움은 전염성이 컸다. 배우들은 그와 함께 일할 기회가 생기면 뛸 듯이 기뻐했고 최선의 연기로 보답했다. 자신을 거창한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본능적인 실존주의자였다. 그의 영화제작 방법은 곧 그 영화의 의미였다. 1970년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뻔뻔스럽고 즉흥적인 ‘야전병원(M. A. S. H. )’이 당시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잘 모른다. 어두운 분위기로 미몽을 깨우치면서 위험을 빈정거리는 반전영화였다. 앨트먼은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에서 오랜 수련을 쌓은 뒤 크게 성공한 그 코미디 TV시리즈로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신동은 결코 아니었다. 영화는 전통적으로 젊은이들의 놀이지만 앨트먼은 45세에서야 비로소 이름을 날렸다. 필름누아르(‘기나긴 이별’은 레이먼드 챈들러를 송두리째 뒤집었다)에서 전기영화(‘빈센트와 테오’는 고흐의 신비를 벗겼다)에 이르는 모든 전통 장르를 파괴하면서, 실물보다 위대한 영웅을 만들거나 설교조를 거부했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자란 앨트먼은 같은 중서부 출신인 존 휴스턴과 마찬가지로 생김새가 불법 도박꾼 같았고, 할리우드 영화가 밥 먹듯 해대는 거짓말을 경멸했다. 그의 영화인생은 기복이 심했지만(‘퀸텟 살인게임’과 ‘더 컴퍼니’는 잊혀졌다) 굴하지 않고 일을 계속했으며, 정치풍자극 ‘태너 88’로 에미상을 받았다. 정치적 수완은 별로 없어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와 영화 제작을 허가한 간부들을 실컷 비웃었다. 그런 그가 신랄한 할리우드 풍자극 ‘플레이어’(1992년)로 재기했으니 더더욱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영화계에 돌아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한 ‘쇼트컷’(1993년)으로 부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2001년의 ‘고스퍼드 파크’는 흥행까지도 성공적이었다. 그 영화로 다섯 번째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됐다. 아카데미상은 한 번도 받은 적은 없으나 올해 뒤늦게 공로상을 탔다. 마지막 작품 ‘프레리 홈 컴패니언’으로 중서부와 연예계라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갔다. 그 영화는 고별의 느낌을 풍겼다. 그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다룬 영화라고 말했다. 죽음의 천사가 매혹적으로 하얀 트렌치 코트를 걸친 미녀(버지니아 매드센)로 등장한다. 노대가만이 가능한, 절제되고 힘들이지 않은 우아함으로 만들어낸 가장 부드러운 환상곡이었다. 80세의 고령에도,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생 보지 못한 장면을 기대하며 만든 영화다.

2006.12.0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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